신비와의 만남
고통은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 순간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 간의 간극에서 옵니다....무엇이 어떤 식으로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고통도 없고 긴장도 없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도 없습니다. 삶이라 불리는 아름답고 무질서한 것이 언제나처럼 펼쳐지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개념과 믿음, 공식같은 것들을 녹여 없애버리는 힘을 발휘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행복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불태워버립니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솔직하게 묻는다면 당신이 발견할 유일한 답은, "나"는 환상이고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개념은 당신의 진정한 본질이라는 더 큰 신비와는 어떤 실질적인 상응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당신을 늘 현재 순간으로 되돌려놓는데, 현재 순간은 삶이 이렇게 저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믿는 당신 나름의 공식이나 생각과는 하나도 들어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라고 불리는 거짓 관념 속에 숨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의 근원입니다.....
매일의 일상은 '거대한 신비'이며 (일상과 신비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아무 공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 머물 때 우리는 어떠한 공식도 필요없음을 깨닫는다는 점입니다. 삶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잘 압니다. 거기에 공식따위는 전혀 없습니다. 삶은 지금까지 완벽하게 잘해왔지만, 우리 자신이 지금 여기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를 뿐입니다. -235~243쪽-
마하리쉬의 가르침에서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는 극도의 단순함입니다. 그는 '참나실현'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는 자기탐구로, 나는 이를 보통 "호기심"(무엇이 진실인지 궁금해함)이라고 표현합니다. 다른 하나는 다 내맡김의 길로, 나는 이를 대개 "쉼(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둠)이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다니 얼마나 간단합니까!...
다행히 아무리 이리저리 분산시키고 가리더라도, 일단 다 내맡기기만 하면 우리는 즉각 제자리에 있게 됩니다.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호기심을 가지면 즉각 문이 열립니다. 서서히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다 내어주기만 하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으며, 그러지 않으면 계속 고통스럽습니다....
자유로워지는 것이 언제든 즉각 가능하다는 이 근본 진실은, 우리에게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어나기 전에도, 일어나는 도중에도, 일어난 후에도 해당됩니다....이런 진실을 실재하는 현실로 만들려면 '진리'를 직접 체험하는 것만 한 건 없습니다. .....
세상의 모든 스승들이 진실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제자들에게 자신이 필요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호기심이 충분히 깨어나기만 하면 당신에게는 사실 스승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당신을 진리의 근원으로 데려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때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어느 쪽도 진리를 더 많이 체득하고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깨달음 이후에는 스승이 더 이상 진리에 대한 독점권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언제나 현존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통증을 느끼고 있는가?" "무엇이 호기심을 발휘하고 있는가?" "호기심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 던지고 난 후, 다음 단계는 당신이 발견한 것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진리는 스스로를 드러내고, 당신은 그 당신 존재의 진실 안에서 그저 쉬기만 하면 됩니다. 보이는 것에 다 내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쉼이란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진실에 다 내맡긴다는 말입니다. -243~247쪽-
쉼이란 그 문을 기꺼이 열고, 발견한 것에 기꺼이 자신을 다 내맡기는 것입니다. 쉼은 '절대진리'를,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춤추고 있는 이 광대무변한 완전함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사실 절대 진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이기도 합니다....우리는 쉼을 허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유와 완전함은 이미 여기 있으며, 그러니 그것을 얻기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 얼마나 멋진 계시입니까! 우리는 진리를 찾기 위해 고요함을, 지금 여기를 살펴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은 내버려둔 채 자기 바깥을 살피는 데 마음 쓰느라 늘 너무 바쁠 따름입니다.
일단 '쉼'을 통하여 '절대'를 보게 되면 거기에 계속 머물고 싶은 미묘한 집착이 흔히 일어나는데,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하게 보이는 곳에서 누가 벗어나고 싶겠습니까? 이러한 완전함의 발견은 구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어떤 곳이든 우리 자신을 거기에 붙박이로 고정시키려는 것은, 그곳이 절대 속이라 할지라도 기억 속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삶에서 생명을 앗아갑니다.
바로 이 자리가 쉼의 짝인 호기심이 발휘되어야 할 지점입니다. 호기심은 우리가 경험한 신비가 어떤 성질의 것이든 그것을 상하지 않도록 해줍니다....호기심은 우리가 절대의 세계에 연착륙하여 거기에 숨어버리는 일을 방지해줍니다....우리는 "각성"과 호기심이 필요하며, 그와 더불어 다소 역설적이지만 " 다 내맡김" 또한 필요합니다. -247~249쪽-
우리는 자신의 온 삶을 진리에 기꺼이 다 내맡겨야 합니다. 진리를 찬미하거나 그 안에 숨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에 다 내맡긴다는 것은 '텅 빔'속으로, '공'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 그것의 관점으로 기꺼이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다른 것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절대 공'의 관점에서 보면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다 소중함을 알아차리는 놀라운 경이가 늘 함께 합니다. "모든 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소중합니다...... 그 복잡스러움과 혼란함과 불완전함까지도 전부 사랑합니다. '절대'가 베푸는 이 공평무사한 돌봄은 얼마나 놀라운지요!....모든 것이 똑같이 소중합니다.
영적인 삶이란 '절대'에 이르는 길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시를, 당신의 문제들과 혼란스러운 이 세상을 떠나는 편도표가 아닙니다. 그것은 왕복표입니다. 우리는 결국 이 삶 속으로 돌아와 절대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절대로서의 삶"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고요? 바로 이 지점이 호기심이 발동되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새로운 매 순간순간에만 드러날 테니까요. -249~250쪽-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저는 한계없는 사랑이 언제나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이라고. 그러면서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고투에 대해서 묘사하기 시작합니다."하지만" 뒤에 이어질 것은 당연하게도 앞에 나온 내용을 부정하는 것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정직해지는 간단한 방법은 "하지만"을 "그리고"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현존합니다. 그리고..."라고 해야 긍정에서 긍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진실한 모든 것을 인정할 때 자신에게 온전히 정직해 질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온전히 정직해지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알 수 없는 진리로 아주 빨리 갈 수 있습니다....진실을 알아차리겠다는 의지를 발휘하면 우리는 자신이 알지 못함을 재빨리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
뭔가 괴로움을 겪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질문은 "이것은 진실인가?"입니다. 이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면 그것은 불길처럼 모든 것을 태워버립니다. 거짓된 개념은 그 불길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개념들은 거짓입니다....자신에게 온전히 솔직해지면 우리는 개념들을 뒤로 하고 모든 것이 신비인 지점으로 신속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곳은 모든 개념을 벗어던져서 벌거벗은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정직해지는 그만큼 삶은 생기 넘치게 됩니다. -251~252쪽_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거기에 근거하여 사느냐, 얼마만큼이나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 안에서 행동하고 말하고 쉬느냐입니다.
진리에 다 내맡기기 위해 영적인 체험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런 체험을 한번 하면 멋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체험 사이사이에,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실제로 아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여기에서 진실은 무엇입니까? 당신 자신의 가슴을 기꺼이 거기에 다 내어주고자 합니까? 뭔가 새롭고 더 나은 깨달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대신 이미 여기에 존재하는 사랑에 기꺼이 자신을 다 내맡기고자 합니까?......
우리는 대부분 비범한 삶을 살기 위하여 기를 쓰고 몸부림칩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이런 저런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합니다....하지만 비범한 삶은 사라지기 마련이어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거나, 그 안에 머무는 길을 찾는다 할지라도 바로 그 상태가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립니다. 비범한 경험이 머무르든 사라지든 우리는 결국 아주 평범한 일상 속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무리 평범한 경험이라도 거기에 충분히 깨어있으면 그것이 곧 비범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평범한 경험에 깨어 있으면 그것은 그 자체의 비범함을 스스로 드러냅니다. 그리고 어떤 비범한 경험이 일어나도 그것은 곧 다시 평범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평범함이 비범함이 되고, 비범함이 평범함이 됩니다. 이 둘이 서로 왔다갔다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모든 이원성의 본질은 끊임없이 서로에게로 되돌아가 녹아 없어진다는 것입니다....어떤 경험이 갖고 있는 특별한 내용물은 주의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다른 뭔가로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요해지는 건 이런 경험이 무엇 안에서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253~255쪽-
비범함과 평범함 사이의 춤은, 단지 우리가 거기에 더 이상 흥미를 갖지 않게 된다는 이유로 중단되지는 않습니다. 춤은 계속되지만 거기에 대한 어떤 저항도 없어지고, 그리하여 결국엔 더 이상 아무 고통도 없어집니다. 우리가 지금 있는 그대로와는 다른 뭔가를 경험하고자 애쓰기를 포기하기만 하면 고통은 끝이 납니다. 그 안에서 비범함과 평범함이 모두 일어나는 '거대한 신비'를 알아차리기만 하면 우리는 어느 쪽에도 속지 않은 채로 이 두 경험이 왔다가 가버리도록 그냥 내버려둘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기 위해 습관적으로 마음과 느낌으로 돌아가곤 합니다.이것은 지금 현존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느낌이 생기면 당신은 그것을 유지하려고 애쓸 것이고, 나쁜 느낌이 생기면 당신은 그것을 제거하려고 애쓸 것이니까요.당신이 계속 거기를 기웃거리며 살핀다면 삶은 늘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그냥 멈춰서 잘 살펴보면 심지어 마음이 관여할 때 조차도 '공'이 여전히 현존합니다......이 거대한 신비 안을 살펴보고, 그것이 일찍이 여기에 있지 않은 적이 있다면 내게 말해주십시오. 이 거대한 신비 바깥에 있는 장소나 시간을 찾을 수 있나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음을 느끼는 방문자에게)그것을 넘어서 보십시오. 마음은 이 '무', 이 '공'을 잘못이라고,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할 이유라고 해석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없음 안에서조차 현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를 권합니다. 이 무의 한가운데에도 이 무를 의식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나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255~261쪽-
(거대한 신비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아무것도 없음으로 돌아간다는 한 방문자의 말에)그것을 넘어서 보십시오. 마음은 이 '무', 이 '공'을 잘못이라고,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할 이유라고 해석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 아무것도 없음 안에서조차 현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를 권합니다. 이 무의 한 가운데에도 이 무를 의식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나에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살펴보십시오. 무엇이 마음을 의식합니까?...
잘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지금까지 현존하지 않았던 시간이나 장소를 찾을 수 있습니까? .....의식 자체가 신비입니다.....잘 들여다보면 "나"라고 불리는 어떤 것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그저 더 많은 의식, 더 많은 거대한 신비를 찾을 수 있을 뿐입니다. "나"라는 것이 있다는 환상은 그러한 면밀한 검토 아래에서는 녹아없어져 버립니다.
...유일하게 가치있는 출발점은 "전체"진실입니다......"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진실의 또 다른 일부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니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일부 진실만 고려하여 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진실을 간과한다면, 고통에 대해 뭔가를 할 필요를 못 느낄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절대 속으로 도피하기"입니다. 영적인 삶의 목적은 세상을 초월하거나 그것으로 다 이루었다고 만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를 세상의 고통 속으로 가져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의 관점을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통의 경험에 적용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는 동시에 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이 전체 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261~263쪽-
고통이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원함에서 오는 것임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원함은 자신이 전체와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데서 옵니다. 전체와 분리되어 있다고 느낄 때만 뭔가가 부족하다는 결핍감에 사로잡힙니다.....고통은 당신이 분리된 존재라고 믿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애씀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을 할 때 손짓도 같이 하는 것처럼 실제로 많은 애씀이 있습니다만, 거기에 "나"라는 성질은 없습니다. "나"라는 것이 없으면 만사가 쉬워집니다. 그저 물 흐르듯 흘러갑니다. 당신이 말했듯이 어떤 생각이 떠오르고, 그러면 그 생각을 하고, 그런 다음에는 그것을 잊어버립니다.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끝나버렸으니까요.....
유일한 선택은, 무엇이 일어날지 결정할 선택권이 당신에게 없기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것 자체를 솔직하게 맞아들이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정직해지기만하면 에고는 녹아 사라져버립니다. 에고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에고는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거해야할 에고는 없습니다. '자유'는 에고란 없으며 일찍이 있어본 적도 없음을 인정하는데서 옵니다. -263~265쪽-
껴안음 또는 기꺼이 맞아들임은 그냥 그 느낌에 저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습니다. 그저 멈추어서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만 하면 됩니다. ..... 해야할 것이 있다면, 이미 여기 있는 것에 대해 진실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애써 외면하면서 일어나지 않는 척하고 싶은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우울한 기분이라도 있는 그대로 현존하도록 내버려두면 어떻게 될까요? 거기서 벗어나거나 그것을 고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그저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십시오......
(앞의 말처럼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면담자에게)그것이 진실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여기에 머무십시오. 그런 느낌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그 자리에 머무십시오. 여기에서 쉬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기만 하십시오. 지금도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까?
(약간의 저항이 있다는 면담자에게) 그것 역시 그대로 내버려두십시오. 고치거나 처리하려고 애쓰지말고 그냥 잠시 쉬어보십시오..... 멈추어서 모든 것을 잠시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내버려둘 때만 그밖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알아차릴 수 있는 한 가지는, 그 모든 것을 위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266~267쪽-
영적 수행은 크게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각각 호기심과 쉼에 상응합니다.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는 라마나 마하리쉬의 자기탐구는 호기심의 범주에 들어가며, 산스크리트어로 "지식"을 뜻하는 "즈나나jnana"라 불리는 영적 길의 일부입니다. 자기 탐구는 의식이 가진 본연의 특성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도록 조율해줍니다. .....자기 탐구를 충분히 수행하면 이 타고난 호기심과 공명을 일으켜 호기심을 드러내 보이게 됩니다.
영적 수행의 다른 범주는 쉼과 관련되 "헌신"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헌신 곧 "박티bhakti"의 길은 끊임없이 삶을 긍정하면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의식의 타고난 능력인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노래하고 춤추고 시를 짓고 기도하는 이 길의 수행은 '가슴'에 이르는 문을 열어줍니다.
헌신의 길은 사랑에 끊임없이 다 내맡김으로써, 에고가 저항할 수 있는 이상으로 사랑함으로써 에고를 해체시킵니다. 반면 자기탐구의 길은 우리의 환상 특히 "나"라는 환상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심도 있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 일을 해냅니다. 두 길 모두 동일한 지점에 이르게 하므로 어느 길을 따르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길에 얼마나 온전히 참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271~272쪽-
자기탐구는 "이 불편하거나 불쾌한 경험이 누구에게 일어나는가?"라고 물음으로써, 부정적인 정서상태나 경험을 다루는데 매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런데 자기탐구를 수행하는 많은 이들이 일단 긍정적인 상태에 도달하면 탐구를 중단해버립니다. 더 이상 탐구를 계속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거죠. 여기서 문제는 자기탐구로 인한 효과가 언제까지나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나타나는 결과가 좋든 나쁘든 자기탐구 수행을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좋거나 나쁜 상태와 경험 모두 안에 현존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지복과 같은 멋진 것이 나타날 때조차 기꺼이 탐구를 계속한다면 새로운 해방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지복이 사라진다 해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어차피 사라질 테니까요. 자기탐구에 전념하다보면 마음수련을 하던 상태에서 가슴이 활짝 열리는 지점으로 넘어가는 때가 찾아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헌신에, 그러니까 쉼과 허용에 더욱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결국 호기심과 쉼은 그 본질에서 동전의 양면같은 것임이 밝혀집니다. -272~273쪽-
헌신 수행으로 가슴이 활짝 열리고 지복의 물결에 휩싸이면 모든 것을 사랑하기란 참 쉬운 일이 됩니다. 어려운 것은 삶이 여의치 않을 때의 헌신 수행하기입니다. 자기탐구도 마찬가지지만 설사 헌신을 하나의 "처방"으로 활용하고자 할 때라도 거기에 온전히 다 바쳐야 합니다.
의식에 대한 "묘사"는, 그것은 이미 사랑 안에 있으며 그 자체로 "모든 것"에 헌신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힘든 사람, 힘든 상황, 힘든 감정이 나타날 때도 신에게 헌신하는 것과 똑같이 거기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 모두를 한없는 감사로 대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험해도 한결같이 헌신한다면, 우리는 이 거대한 신비에 대한 호기심이 생생히 솟구쳐 오르는 지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자기탐구나 헌신에 온전히 참여하면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에 대한 진실과 수행 사이의 경계가 사라져, 영적 수행과 진리가 하나로 어우러집니다. 온전히 다 바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정한 때의 "처방"으로만 활용해서는 안됩니다. 좋은 느낌에 취해서 탐구하기를 잊어버리거나 나쁜 느낌에 사로잡혀서 사랑을 할 수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처방"들이 있는 그대로에 대한 "묘사"가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자신을 온전히 다 내맡겨야 합니다. -273~274쪽-
거대한 신비가 신뢰할 수 있는 것임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거기에 우리의 모든 관심을 다 쏟아부으면서 심지어 공 속으로, 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을 때조차도 돌아서지 않는 데 있습니다.
..... 사랑이 일어나는데 뭔가가 필요하다면, 그건 자유가 아닙니다. 그 뭔가가 훌륭한 스승일지라도 말입니다. 거대한 신비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여 당신이 온전한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자유를 누릴 때까지 당신의 가슴은 만족을 모를 것입니다.
두 가지 간단명료한 가르침
영적 수행은 두 가지 간단명료한 가르침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경험을 알아차리고 거기에 호기심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영적인 자기탐구 수행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자신이 지금 이 순간 하고 있는 경험 자체를 가리켜 보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누가 또는 무엇이 듣고 있습니까? 누가 또는 무엇이 숨을 쉬고 있습니까? 누가 또는 무엇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호기심이란 모든 것을 기꺼이 꿰뚫어보겠다는 의지입니다. 호기심은 더 많은 것을 밝혀내겠다는 우리 존재의 자연스러운 경향입니다.......
두번째 간단명료한 가르침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경험은 올바른 경험이며, 따라서 그것을 허용하고 거기에 자신을 다 내맡겨야 함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쉼"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올바른 경험입니다.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 이 순간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해야 하는 이유는 ....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정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괴로운 순간이든 편하고 행복한 순간이든, 매 순간의 진실마다에는 매우 만족스러운 무엇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274~286쪽-
당신은 자신의 경험을 늘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보십시오. 당신의 경험 중 어떤 것이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는지 한번 알아보십시오.방의 온도라든가 몸의 감각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생각이나 느낌 등에 대해 우리는 항상 잘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하고 싶은 제안은, 훨씬 더 많은 경험을 당신의 의식 속에 받아들여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일어나고 있는 것의 일부분에만 주의를 기울입니다. 우리 경험의 내용물, 그러니까 일어나고 있는 특정한 생각과 느낌과 욕망에만 주의를 좁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들에 따라붙는 이야기에 온통 정신이 팔립니다.... 우리는 그 순간의 욕망자체를 경험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 욕망을 실현할지, 그것을 이루게 되면 기분이 어떨지에 대해 정교한 환상을 만들어내곤 합니다.....자신이 지어낸 환상에 최면당해 그 순간의 경험 자체에는 눈을 감기 일쑤입니다.
생각과 느낌과 욕망의 내용물뿐만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 맥락에도 주의를 기울여보십시오. 욕망자체의 경험 또는 행위나 생각이나 느낌 자체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여보십시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줄거리만 따라가지 마십시오. 생각, 느낌, 욕망의 경험은 대단히 신비스럽습니다. 생각과 느낌과 욕망이 일어나고 있는 그 공간을 알아차려보십시오. 누가 무엇이 알아차리고 있습니까? 그 알아차리는 자 또한 당신 경험의 일부입니다. 누가 무엇이 생각하고 있고, 느끼고 있고, 행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완전한 신비입니다. 생각과 느낌과 행위가 비롯되는 근원은 어디입니까?
경험의 내용물만이 아니라 경험 전체를 받아들일때, 이 순간이 고통스럽든 심오하든 평범하든 우리는 이 순간의 진실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깊은 즐거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정한 기쁨은 삶 전체를 만나는데 있습니다.
-287~288쪽-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든 호기심을 갖고 사랑하면 그것이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좋은 느낌이든 나쁜 느낌이든, 좋은 경험이든 나쁜 느낌이든 상관 없어집니다. 또한 나타나는 욕망에 호기심을 가지면 그것이 채워지든 채워지지 못하든 아무 상관 없어집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모두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습관이나 거짓까지도요. 사랑은 거짓을 애써 창조하는데, 그건 바로 우리에게 그것들을 꿰뚫어보는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을 찾으러 돌아다닐 필요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내내 당신 품속으로 뛰어들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옛 습관들을 허용하는 순간 그것들은 더 이상 옛 습관이 아닙니다. 게다가 옛 습관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경험을 절대 두번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이 거대한 신비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다면, 똑같은 걸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습관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일어날 때도 그것은 완벽하게 유일무이한 경험입니다.
(수렁에 빠져 꼼짝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에)그냥 그러도록 내버려두십시오.(어떤 패턴에 걸려든다면) 어떤 패턴에 걸려든 그 경험 속으로 빠져드십시오....
일어날 일이라면 일어납니다. 떠오를 생각이라면 어차피 떠오릅니다. 괜찮습니다. ....그것과 싸우기를 멈추고, 그저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도록 내버려둔다면 어떠한지 살펴보십시오....
.....경험 하나하나가 모두 은총입니다. -291~294쪽-
나타나는 모든 것은 은총입니다. 고통스럽고 잘못된 관념 또한 은총입니다. 그것은 진실로부터 차단된 존재 방식의 결과입니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스럽기에 그것은 우리의 주의를 끌며,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이 다 완벽합니다. 매 순간이 다 은총입니다. 매 경험이 모두 더깊은 진실을 가리켜 보입니다.
알아차리려면 먼저 허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려면 그것을 바꾸려고 애쓰는 데 바빠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바꾸려고 애쓴다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대신 그것을 고치거나 바꾸려고 애쑤기 일쑤입니다. ......
우리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보다 더 낫고, 다르고, 더 많은 어떤 것을 추구하고 기대합니다.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무엇이 일어나든 다 올바른 경험이라면, 그것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함을 뜻합니다.
일단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하면, 그때 당신은 그것들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의식이나 생각이나 행위라 불리는 이 신비는 무엇입니까?어떤 것도 변화시키려 애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당신의 의식은 이 신비 안의 몇몇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신비 "전체"에 대한 더 많은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296~297쪽-
허용하기와 더불어 한 가지 재미난 일이 벌어질 수 있는데, 그건 바로 자기 만족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경험에 대해 운전대에서 손을 땔 뿐만 아니라 심지어 눈을 감아 잠들어버리기까지 합니다.그렇게 우리는 자기 경험과 단절됩니다........
또 하나의 길은 합리화를 통해서입니다. 이런 식입니다. "내 경험이 언제나 올바른 경험이라면, 나는 그냥 술을 더 마시거나 과자를 더 먹을 거야."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잃어버리는 것은 자신의 경험에 대한 알아차림과 진정한 호기심입니다. 알아차리려면 있는 그대로 허용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허용하려면 어느 쪽으로도 쏠리지 않은 상태에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분노가 일어나면 그것 자체를 허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분노가 표현되거나 억눌리는 시점에 이르기 전에 그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과 허용하는 것,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것을 바꾸려는 어떤 행위도 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벗어나려는 어떤 행위도 하지 말야야 합니다. 그것을 허용하는 것과 거기에 호기심을 갖는 것 둘다 필요합니다. 분노나 두려움이나 의심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에 호기심을 갖지 않으면 그것을 표현하려고 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경험하는 한가지 이유는 그 순간을 고치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을 피해서 달아나려 하는 것도 고통의 또 다른 원인입니다.
-297~298쪽-
좋은 소식은 당신이 그것(고통)을 고치려고 드는 애씀이나 도망치려는 시도 자체에 대해 호기심을 갖기만 하면, 곧바로 더 이상 고통당하지 않게 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것을 원상회복할 필요도 없고, 참회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순간을 변경시키려고 애쓰는 것이, 그 순간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그 경험 자체를 통째로 허용하기만 하면 됩니다.경험에 진정으로 참여하여 호기심을 갖기만 하면, 당신은 언제든 자유롭습니다. 당신의 고통은 사라져버립니다.
..... 열린 눈, 열린 가슴으로 순간과 만날때마다 순간은 활짝 열려서 더 충만해지고 더 풍요로워집니다. 당신이 그 순간 속 "거기"에 있을 때 진실은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 순간 속에 나타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순간을 고치려 하거나 등을 돌리려고 하면 정반대 현상이 벌어집니다. 당신의 경험은 더 작아지고, 더 빠듯해지고, 더 위축되고, 덜 만족스러워집니다.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으로, 열린 가슴으로, 다 내맡기는 자세로 만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거기에 다 내맡기는 것입니다. 결국 당신은, 진정한 자유란 자기탐구 그 자체에 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정한 기쁨은 자기탐구 그 자체입니다. -298~299쪽-
진정한 기쁨은 진실을 보는 데 있습니다. 진정으로 만족을 주는 유일한 한가지는 이 순간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진실이란, 지금 여기에 가슴을 열고 현존하는 것을 뜻합니다. ....
모든 경험을 있는 그대로 만난다면 그 어떤 것도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조차에도 풍요롭고 진실한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있는 그대로의 경험에 강한 호기심을 가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렇게 할 때 무엇이 드러나는지 알아보십시오.
힘들다는 그 자체에 호기심을 가져보십시오. 그것이 힘들다면 그건 당신이 현재의 경험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힘들다 해도 힘들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쉽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허용할 때 어떤 순간이든 우스울 정도로 쉬워집니다.
(통증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에게) 고통은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쓰거나 통증을 제거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오는 겁니다.......(통증을 받아들여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 순간에 진실한 것이 그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거죠.통증을 사라지게 하려고 통증을 받아들이는 건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299~305쪽-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알아차리고 그것이 올바른 경험임을 알기보다는,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얻기 위해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쾌락을 얻는데 더 중점을 두고, 어떤 이들은 고통을 피하는데 더 중점을 둡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 고통이란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하지만 삶 속에 현존하면서 경험 자체를 위한 경험을 하면, 그것이 괴롭든 즐겁든 당신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됩니다. 이건 정말 간단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모든 경험에 대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고통스러운 경험이든 즐거운 경험이든 이전에 경험한 것들은 지금 이 순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순간이 고통스럽든 즐겁든 다음 순간은 그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것에 깨어 현존하는 것입니다.
결국 고통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기진맥진하면 우리는 아무런 계획없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어떠한 판단이나 그것을 바꾸려는 욕망없이, 그냥 그것자체를 위해 그것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은총이 작용하는 외길입니다.
그저 자신의 경험을 알아차리고 허용하기 위해서만 자신의 경험을 알아차리고 허용한다면,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그것이 참다운 자유입니다. 그것이 고통의 끝입니다. -306~307쪽-
우리는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 삶에서 고통을 없애거나 쾌락을 늘리는 데 곧잘 사용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멈추거나 확장 상태에서 오는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서 자신의 경험을 알아차리고 허용합니다. 그런 일에 이 가르침을 적용하면 이 가르침을 적용하지 않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초래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일어나든 그것 자체를 위해 알아차리고 허용한다면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통증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는 않아도, 고통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쾌락을 추구하거나 고통을 피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삶에 대한 이런 접근법은 인간 경험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단지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그 자체와 있는 그대로 함께하기를, 진실로 그것을 경험해보기를 권할 따름입니다....고통을 피하거나 쾌락을 얻으려는 경험 자체에 호기심을 가져보십시오. 그러면 그 순간의 진실에 훨씬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 현존하면 대개 처음에는 그 순간을 피하려고 갖은 애를 다씁니다. 그러다가 그런 저항자체에 깨어 현존하면 그것이 저항임을 알아차리게 되고, 그러면 그것에 더 이상 고통당하지 않게 됩니다. 저항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없습니다. (저항은 계속 일어납니다.)저항이 일어날 때 그것을 껴안아버리면 즉각 당신은 자유로워집니다.
-307~308쪽-
지금 여기에 존재하려면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모든 생각을 기꺼이 놓아버리겠다는, 기꺼이 알지 못하게 되겠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 순간의 진실을 더 많이 보려고 할수록 당신은 더욱더 아는 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반대로 이 순간의 진실을 보려는 의지가 더 적을수록 당신은 더욱더 자신이 아는 것에 의존하게 됩니다....
우리는 무관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만 무관심 안에도 발견할 필요가 있는 보석같은 진실이 존재합니다. 드러난 진실은 유쾌하지도 멋지지도 않을 수 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무관심 속에는 심오한 선물이, 매우 참되고 만족스러운 무엇이 있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도저히 만족을 찾을 수 없을 때 마지막으로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장소입니다.
당신은 어떤 보상으로부터가 아니라 "거기에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단지 살아있음만으로, 단지 존재함만으로 충족감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당신 삶은 당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되지 않습니다. 진실이 그렇습니다. 삶은 자기 되고 싶은 대로 됩니다. 삶의 방식이 원래 그러합니다. .... 때로 삶은 당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펼쳐지지만, 무엇이 일어날지를 결정하는 건 당신의 욕망이 아닙니다. -308~310쪽-
기쁨과 즐거움에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빠져들지 말고, 불만족스럽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십시오.... 불만족을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불만족 자체가 너무나도 풍성하고 놀랍고 예기치 않은 장소기 때문입니다. 불만족이 일어나면 그것을 고치려고 애쓰는 대신 그것이 무엇인지 탐구해보십시오. 기쁨은 탐구 자체에 있는 것이지 탐구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지루함을 실제로 잘 살펴보면 그 경험의 안팎에서 흐르고 있는 존재의 온갖 다른 특성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루함을 쫓으려고 즉각 TV를 켠다면, 당신은 내가 말하는 지루함에 대한 진실을 결코 찾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신나는 순간이나 지복의 순간같은 다른 순간들의 진실이 가진 풍요로움에 대해서는 알지 몰라도 말입니다. 삶의 표층과 심층 모두에 깨어 현존하면 당신은 그 둘이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지루함을 피하거나 바꾸려고 하지 않고 그 자체에 현존하면 당신은 문득 당신 존재의 모든 심오함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매우 깊은 통찰을 경험하고 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고통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게 익숙해서 하기가 더 쉽기 때문입니다.반면에 진실을 보는 경험 안에 머물려면 먼저 하기 쉬운 것을 하지 않으려는 적극적인 선택이 필요한데, 거기에는 많은 용기와 활발한 참여가 요구됩니다. -311~313쪽-
고통을 초래할 일을 하지 않기로 선택할 경우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들어앉은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벗어나려고 애써왔던 어떤 것에 깨어 참여한다는 것은 매우 강렬한 경험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과 진실 사이에 놓여 있는 불의 장벽과도 같습니다. 당신이 피해왔던 것이 끔찍한 무엇처럼 여겨지지만, 불의 장벽은 아주 얇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 장벽은 통과하기는 무척 쉽지만, 만일 머뭇거린다면 불타버릴 것입니다. 절반쯤은 발을 넣고 절반쯤은 발을 빼고 있는 그런 순간들에는 끔찍할 것입니다.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기꺼이 불을 통과하기로 마음먹기만 하면, 그토록 도망쳐왔던 것이 실제로는 그리 나쁜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진실은 매우 만족스러운 것입니다.....
그 경험에 진정으로 깨어 현존해보십시오. 고통을 피하거나 바꾸려고 하지 않고 진정으로 함께하면, 그것은 당신을 위해 스스로 파괴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이 그럴 만한 가치가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쁜 소식은 고통이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는 점입니다. 좋은 소식 또한 고통이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당신은 기꺼이 지금 여기에 머무르면서 진실을 보고자 하는 시점에 이르게 됩니다. -313~314쪽-
깨달음
깨달음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 타고난 자질입니다. 우리가 "깨닫기"라고 부르는 것은, 현존하는 깨달음이 있음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바로 자신의 진정한 됨됨이라는 사실 또한 인식하는 것입니다.....영적인 깨달음은 우리가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문득 우리는 자신이 깨어나 있으며 태양이 떴고 일어날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아침에 깨어나기 위해 어떤 행위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간이 되면 저절로 눈이 떠집니다.영적인 깨달음도 시간이 되면 그냥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겪는 한 가지 딜레마는, 삶 자체보다 더 생생히 깨어있기를 원하지만 깨달음이 일어나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깨닫기를 바라는 욕망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어서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으스러져버립니다. 하지만 이 두 진실을 그냥 다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쉬면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단지 그 상황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외면하지 않고 그냥 거기에 머물 때 이 두 진실은 우리의 잘못된 관념과 환상을 서서히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남는 것은 우리 존재의 진실이 명백히 드러나게 해주는 텅빈 공간입니다. 여태껏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다른 모든 것은 스러지고 진실을 위한 깨끗한 공간만 남게 됩니다. -317~318쪽-
깨달음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깨달음은 그냥 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자유는 당신이 일어나는 것에 저항하기를 멈추거나 일어나지 않는 것을 붙잡으려고 하지 않으면 그 즉시 찾아옵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고통은 즉각 끝납니다. 자유는 깨달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유를 원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깨달음 이후에는 저항하거나 집착하는 경향이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따라서 고통이 줄어듭니다. 하지만 깨달음 이후에도 집착하는 경향은 여전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경험을 계속 유지하려고 애쓰거나 그런 경험으로 되돌아가려는 갈망 같은 대개는 더 미묘한 방식의 집착이지요. 그런 일이 일어나면 고통도 다시 나타납니다.
좋은 소식은 자유는 매 순간, 깨달음 이전이든 도중이든 이후든 집착이나 저항을 포기하기만 하면 언제든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바꾸려는 헛된 노력을 포기함으로써 당신은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포기는 사실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참된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당신이 선택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면 늘 그렇듯이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찾아올 것입니다. -318~319쪽-
삶의 움직임은 시계추와 같아서 우리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고 딱지 붙인 것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흔들립니다.......
우리의 행복은 일어나는 것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일어나는 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 뉴에이지와 자기계발 모임들의 중심 메시지죠. ...깊어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올바른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문제를 초월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애씀이 이전만큼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이 깊어지는 과정에서 흔히 태도의 중요성 기억하기와 잊어버리기라는 또 다른 이원성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다시 고통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국 훨씬 더 깊이 바라보려는 의지가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흔히 모든 것이 신이며 따라서 모든 것은 완전하다는 인식이 동반되는데, 이런 인식은 시계추의 운동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우리의 관점은 다시 한번 더 깊고 더 거대한 진실로 이동하여 수많은 갈등과 고통을 끝장내는 한편 막대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도 혼돈과 고통은 여전히 현존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완전한지를 경험하는 "내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신임을 알아보는 것과 모두가 신임을 잊어버리는 것 사이에 새로운 이원성 즉 시계추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거기서 더 깊이 나아가면 우리가 바로 그 완전함 자체임을 알아보는 데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우리는 모든 것이 신임을 알아볼뿐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이 곧 신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 우리가 "깨달았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정체성의 이동을 가리킵니다.
-319~321쪽-
우리가 "깨달았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정체성의 이동을 가리킵니다. 기존의 정체성 형성에 참고하던 모든 낡은 틀(몸, 마음, 느낌)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신일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신이라는 이 진실이 우리의 참고틀이 되며, 바로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비록 이러한 봄 이후 막대한 고통이 사라지더라도 첫 시계추의 일부분이었던 모든 것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우리 몸도 사라지지 않고, 세상도 사라지지 않고, 집세 또한 사라지지 않습니다. 시계추는 여전히 흔들거리면서 경험과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계속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진리를 본다고 해서 이것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보는 것은 우리가 한때 시달렸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흔히 우리는 영적 초월이 우리를 세속의 관심사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고 상상하기 쉽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의 세상 이해에 더 많은 진실이 포함됨을 의미할 뿐입니다. -321쪽-
이렇게 단계가 깊어짐에 따라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더욱더 깊은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이 자유낙하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시계추가 존재하는 위치에 영향을 미치려고 애쓰기를 그만두는 것입니다.우리의 고투가 무익함을 알아차리든 완전히 기진맥진해서든 또는 은총에 의해서든, 마침내 우리는 애씀을 놓아버리고 시계추가 가고 싶은대로 가게 내버려둡니다.
이렇듯 애쓰기를 그만두면 이와 더불어 호기심은 우리가 더 깊은 진실로 계속 나아가도록 허용해줍니다.우리는 더 이상 다음번에 이루어질 통찰을 외면하지도 않고 지난 번에 이룬 통찰에 매달리지도 않습니다.....
무엇을 움켜쥐거나 붙들려고 하지 않을 때, 우리 존재의 자연스러운 중력이 현재의 명백한 이원성이나 시계추로부터 우리를 끌어내어 우리 존재의 진실로 더 깊이 내려가게 해줍니다. ...
우리는 아무 고통도 없고 경이로운 일만 일어나는 '알지못함'으로 계속 자유낙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거대한 신비의 더욱 깊은 면모를 발견하는 일은 사실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깊어짐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 자신의 타고난 본성이기도 합니다. -321~322쪽-
깨닫게 되면 자기 정체성 때문에 고통당하는 경향이 끝날 것이라고 기대하기 일쑤지만 이러한 경향은 깨달음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깨달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를 알고는 대단히 놀라곤 합니다.
에고는 영적으로 깨닫는다고 해서 반드시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단지 더 미묘해질 뿐입니다. 그렇기는 해도 깨달음 이후에는 이런 경향이 현저히 줄어듭니다. 깨달아감에 따라 자신을 다른 무엇과 동일시하는 경향은 크게 약화되거나 사라지며 그런 방향에 더 이상 집착할 수 없게 됩니다. 잠시 동일시할 수는 있지만 그런 낡은 이야기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지요.
하지만 많은 이들이 깨달음 자체에 집착하곤 합니다. 깨달음에 수반되는 확장된 상태에 계속 머물려고 애쓰면서 그것을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삼으려 듭니다. 아마 다들 깨어난 사람이 되었다는 이런 자부심으로 인해 영적 에고가 부풀려지는 경험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입니다.
고착하려는 이러한 경향의 또 다른 표현은 '공'의 상태에 도달하고는 그것을 단지 공허함으로만, 지루함으로만 경험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어느 깊이에 멈추어서 계속 그 상태를 고수하려고 애쓰면 깨달음은 순식간에 생기없고 지루한 것으로 변하고 맙니다. -323~324쪽-
동일시나 집착은 '의식'자체의 능력으로 우리가 뿌리 뽑거나 고쳐야 할 무엇이 아니며, 우리는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을 몸이나 느낌이나 생각이라고 여기는 이런 환상에 관여하는 것은 바로 의식입니다. 깨달음 이후의 의식은 자신이 꿰뚫어본 "나는 한계없는 의식"이라는 진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덫에 흔히 걸려들곤 합니다.
이런 경향이 일어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비심으로 그것과 만나고,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집착까지도 포함하여) 그것을 회피하지 않는 것입니다.어떤 느낌이나 반응이 일어나든 그것을 부정하지도 말고 거기에 빠지지도 말아야 합니다. 고착하려는 이런 경향에 깨어 함께 머물면서 호기심을 가져보십시오....
처음부터 그것은 의식의 믿을 수 없는 놀이였습니다. 여기에는 아무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진리를 가리는 것(환상)이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나 모두 그 안에는 대단한 풍요로움이 존재합니다.
깨달음 이후에 또 하나 바뀌지 않는 것은 우리가 가진 건강하지 못한 조건지어짐의 양입니다. 우리는 상당한 양의 건강하지 못한 조건지어짐을 물려받기 때문에 그것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열린 마음과 사랑으로 이러한 건강하지 못한 조건지어짐을 만나면 우리는 그러한 상황의 진실을 볼 수 있고,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오해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324~325쪽-
"나"라는 환상을 꿰뚫어보았다고 해서 조건지어짐이 단번에 끝장나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기 드물게 많은 양의 조건지어짐을 물려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닌 조건지어짐의 양은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러한 환상을 꿰뚫어본다면 어떤 조건지어짐이 "나의 것"이라는 생각은 터무니없음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다들 애씀과 고투가 사라지고 근본적인 행복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세상으로 되돌아가 다시 애씀과 고투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심지어 지진이 일어난 것같은 깨달음 이후에도 이런 행복, 이런 평화, 진리에 대한 이런 인식은 왔다가 가버리는 듯 합니다.
그렇게 진리를 흘깃 경험하고 나면 세상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리는 흔히들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습관의 힘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욕망, 바람, 갈망이라고 부르는 생각들(거짓들)로 돌아가리라는 익숙한 옛 습관에 즉각 다시 빠져들게 됩니다. 생각할 거리가 하나도 없을 때 마음은 자신이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무엇에 대해 생각합니다.
옛 습관을 버리려고 애쓰기보다는 새로운 습관으로 대체하는 것이 더 유용합니다. 새로운 습관을 들이느라 바쁘다 보면 옛 습관은 잊어버립니다. 우리 자신이 분리된 존재라고 믿으면서 결과를 얻기 위해 애쓰고 분투하는 이 가장 근본적인 습관에 대한 해독제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찾고 탐구하는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것입니다. -325~327쪽-
거짓을 쫓느라고 고통을 겪을 만큼 충분히 겪고 난 시점이 오면 더 이상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집니다. 여전히 충동을 느낄 수는 있지만 더 이상은 그럴 만한 가치가 없으므로, 그냥 충동을 허용하며 더불어 살아가게 됩니다.
당신이 언제 이런 문턱에 도달하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문턱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매순간, 심지어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온전히 깨어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현재 순간을 의식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하기 쉬운 일입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따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의식 안에서 편히 쉬면서, 무엇이 일어나든 깨어 현존해 보십시오. 우리는 뭔가 불편한 것이 있거나 즐거운 것이 있으면 즉각 분주해집니다. 불편한 것이면 고치려고 애쓰느라 바쁘고, 즐거운 것이면 거기에 더 오래 머물거나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쓰느라 바쁩니다. 하지만 그저 깨어 지켜보기만 하면 의식하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그 경험의 풍성함과 유익함을 오롯이 다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깨달음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안겨주며 스스로 펼쳐질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도 그저 깨어 있기만 하면, 우리는 결국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지점에 이르게 되어 무엇인가를 더 많이 바라거나 욕망하는 게임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327~329쪽
기쁨, 행복, 분노, 슬픔 등 왔다가 가버리는 것은 무엇이든 당신 존재의 전체 진실일 수 없습니다. 모든 느낌과 생각의 한 가운데 있는 이러한 공허함은 멋진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진실한 무엇을 가리켜 보이기 때문이죠. 전체 진실 말하기는 몸이 달아오르거나 기쁨과 지복에 온통 휩싸이는 순간조차도 이러한 공허함이 바로 여기에 여전히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공허함은 이것은 "나의" 지복, "나의"행복, "나의"분노라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더 깊이 나아간다면 당신은 행복이나 지복을 자신의 공으로 삼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겁니다. 대본이 점점 더 나아진다고 해도 그것을 당신 공으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공을 인정받지 못하지만 또한 더 이상 비난받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아주 불쾌한 영적 개성이 드러나더라도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자기심판은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심판할 대상이 아예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영적 경험이라도 그 핵심에는 이런 공허함이 존재합니다. 영적 경험의 목적은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신을 깨닫게 만드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심오한 영적 경험조차 당신을 공허하게 만들 뿐임을 발견할 때, 당신은 이 거대한 신비 안에 진실로 벌거벗은 채 남겨집니다.
-331~332쪽-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진실의 경험이 "나"에게로 귀속되면 ("나는 깨달았다." "나는 진실을 알았다.") 그것은 남아 있는 모든 집착하는 성향에 고옥탄가의 휘발유를 퍼붓는 것과도 같습니다. '참나실현'이후에도 개별 자아는 없다는 진실이 외면된다면, 그리고 그런 알아차림에서 비롯된 기쁨과 지복과 자유가 "나"에게 이끌려 개별 자아를 부풀리는 일에 종사하게 된다면 고통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결과를 "나"에게 귀속시킨다면 집착하는 성향에 기름을 퍼붓는 꼴일 뿐입니다. 반면 기쁨과 지복과 자유를 '진리'에 귀속시킨다면 그것은 더 깊은 깨달음으로 가는 연료가 됩니다....
진리와 자유를 향한 열망조차도 돈에 대한 욕망이나 다른 욕망들처럼 깡그리 태워 없애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은 수많은 영적 경험을 하여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음을 마침내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아무리 아름다울 지라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남게 되지요.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것이 당신 뜻대로 풀릴 때 그런 질문이 나타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당신 뜻대로 되지 않고 파탄 날 때도 그런 질문이 나타납니다. -332~334쪽-
고요를 인식하지 못할 때도 현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삶의 경험 때문에 잃어버렸거나 감추어져 온 것 같지만, 삶의 불협화음 가운데서도 현존하는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침묵 속에서도 불협화음 속에서도 현존하는 그것. 침묵에도 혼란스럽지 않음에도 의존하지 않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찾기에 좋은 곳이 바로 지금, 바로 여기입니다. 심지어 고요같은 것이 있음을 당신이 알기 전에도 늘 현존해왔던, 당신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불협화음이 아무리 야단스럽고 시끄러워도 '신성한 존재'는 여기에 현존합니다. 신성한 존재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안에 "당신"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에게 좋은 것을 추구하는 욕망이 남아 있는 한 당신은 신성한 존재를 무시하기 쉽고, 지복이나 고요같은 달콤한 어떤 것을 소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복이나 고요는 신성한 존재의 표현일 뿐입니다. 신성한 존재 자체는 그런 자기 표현 중 어떤 것 안에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신성한 존재는 지복과 고요의 근원이지만 소동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신성한 존재는 지켜보는 자와 불협화음과 고요를 다 포함합니다. 지켜봄 또한 신성한 존재에서 비롯되며, 그것 역시 아주 비개인적인 것입니다. 신성한 존재를 지켜봄으로만 만들려고 애쓴다면 "나는 지켜보는 자다"라는 분리가 생겨나게 됩니다. -335~337쪽-
우리는 언제나 매 순간 죽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모두가 과거의 뉴스입니다. ...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실제로 집 한 채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집을 떠날 때는 가졌다고 확신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알았던 것은 더이상 진실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것을 알았던 방식으로는 아닙니다. 우리가 집에 도착했을 때 집이 아직 거기에 있다 할지라도 그 집은 우리가 떠날 당시의 집과 똑같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거대한 신비는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고, 그러니 이 순간에 대한 앎은 지나간 순간에 대한 앎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정체성 또는 자기 이미지 형성하기라고 불리는 놀라운 일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온갖 낡은 기억들로 자기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어떻게든 이 이미지가 삶의 근원, 진실의 근원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잘 탐구해보면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미 죽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뉴스일 뿐입니다.
우리의 자기 이미지가 우리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무엇이 삶을 살고 있는 걸까요? 삶이라고 불리는 이 신비로운 것은 누구 또는 무엇일까요? 자기 이미지란 우리가 자신의 마음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좀비같은 것임을 인정할 때, 우리가 자기의 죽음을 곧 자기 자신의 부채를 인정할 때 남는 것이 바로 삶입니다. 그럴 때 남는 것이 바로 믿을 수 없을 만치 생생히 살아 있는 '신성한 존재'입니다. -341~342쪽-
우리는 가끔은 "있는 그대로"에 약간의 애정 어린 관심을 보이지만 대부분은 다른 연인들을 뒤쫓느라 바쁩니다.
다른 연인들이란 물론 "있지 않은 것"들입니다. 우리의 이미지들, 우리의 관념들, 우리의 창작물들이 그런 것들이죠. 그것들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인데 그것들이 그토록 나쁜 연인들인 이유, 그것들이 너무나 불만족스러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나는 지금껏 나를 그토록 힘들게 만든 이런 연인들과 지겹도록 사랑을 해보지 않았던가?"하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있는 그대로"와 사랑에 빠지기는 매우 성숙한 형태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환상만큼 항상 매혹적이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일찍이 사랑에 빠졌던 다른 모든 것은 사실 어떤 두려움 또는 어떤 환상이었습니다.
두려움 가운데 하나와 사랑에 빠지다니 웃기는 일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자신의 두려움에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왔는지 정직하게 바라본다면 그것 역시 일종의 연애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주의와 관심을 쏟는 일이니까요. 우리는 여태껏 자신의 두려움과 환상에 엄청난 주의와 관심을 쏟아왔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그러는 대신 "있는 그대로"에 주의와 관심을 쏟아보기를 권합니다.
깨달음이란 "있는 그대로"라는 이 연인을 선명히 보는 순간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더욱 더 완전하게 보는 순간입니다. 심오한 깨달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와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곤하는데, 그것은 이 연인이 그만큼 풍요롭고 아름다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342~343쪽-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사랑이 이미 여기에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두려움과 환상을 제거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사랑이 현존하며, 심지어 그것이 당신의 두려움과 환상을 향해서도 흐르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만 하십시오. 이를 알아차리면 두려움과 환상은 설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깨달음의 결과로든 성숙의 결과로든 아니면 환상과 사랑에 빠짐으로써 겪는 고통에 시달리다 기진맥진해서든, 어느 시점이 되면 당신은 "있는 그대로"에 가슴을 열어젖히게 됩니다. 가장 사랑에 빠지기 쉬운 "바로 지금 여기"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있는 그대로"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완벽한 연인입니다. 이 연인은 전혀 질투하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두려움과 환상을 쫓아다니다가도 돌아서기만 하면, 이 연인은 거기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바람을 피웠다 할지라도.....
만일 바로 이 순간 당신이 어떤 두려움과 사랑에 빠져있다면, 그 닫아걸고 감추고 방어하고 두려워하는 경험 자체와 사랑에 빠져보십시오. 지금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있는 그대로"는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 더 나은 것이 생기기를 지금 갈망하고 있다면 갈망하는 그 경험자체가 얼마나 풍성한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알아차려보십시오. 그것을 고치거나 제거하거나 그러지 말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기 이전에 말입니다. 그것과 사랑에 빠지십시오. 완벽한 연인인 "있는 그대로"는 변장의 달인이기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는 다양한 변장을 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두려움이라는 옷, 당신의 갈망이라는 옷을 입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맞아,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이잖아요. 변장이 정말 멋진데요!"라고 말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345~347쪽-
연인관계의 파탄은 흔히 결혼이나 동거 이야기가 나올 때 시작됩니다. "나"라는 것이 없음을 희미하게나마 인식할 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항상 현존하는 이 진리를 어떻게든 피하려고 자신을 분산시키거나 바쁜 척하기 일쑤지요.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언제나 기꺼이 좀 더 깊이 나아가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진리가 눈앞에 어른거릴 때 우리가 드러내는 자연스러운 경향은 이리저리 달려가는 것입니다. 많은 영적 구도자들이 "나"의 스승을 찾으려고 이 스승에게서 저 스승에게로 달려갑니다. 한동안 그러면서 그 스승들이 가리켜 보이는 진리에 대해 들어본 뒤 "나"의 스승을 찾아내고는 그 스승이 가리켜 보이는 지점에 도달하기에 충분한 시간 동안 그 곁에 머뭅니다. 그 스승이 다른 스승들보다 더 특별한 건 아닙니다. 그 스승은 단지 우리가 진리를 깨닫는 일에 대한 자신의 저항을 극복하기에 충분한 시간 동안 함께 머무는 사람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 스승이 아니라 진리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어떤 관계에서 헌신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두려움이 치밀지라도 기꺼이 함께 머물고자 하는 시점이 오는 것처럼, 영적인 구도에서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이 기꺼이 머물고자 한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옵니다. 대개 어떤 인간관계에서 도망치는 이유는 상실의 가능성 때문입니다. "내 것"이었던 것이 절반은 "네 것"이 될테니까요. 그런데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더 깊은 진실을 인식하게 되면 당신은 절반만 잃는 것이 아니라 "내 것"전부를 잃게 됩니다. 당신은 이전에 당신에게 왔던 모든 것, 또는 적어도 당신이 그것들에 쏟았던 시간과 노력의 투자를 그냥 기꺼이 놓아버려야 합니다.
-348~349쪽-
("나"라는 것이 더이상 없다면 누가 머물겠다는 결정을 내리느냐는 질문에 대해) 내가 방금 말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역설은 당신이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서 어디로 휴가를 갈지 어떤 관계를 지속할지 말지 이 순간의 진실을 사는 데 모든 것을 바칠지 말지 같은 결정해야 할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 순간 결정해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당신"은 지금까지 단 한 가지 결정도 내려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선택은 계속해서 이루어져왔습니다. 사실은 '거대한 신비'가 "당신"을 통하여 내내 선택을 해온 것입니다.
나는 새로운 연인에게 하는만큼 진리에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 보라는 말을 사람들에게 자주 합니다. 모든 것에 기꺼이 깨어 있으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더 깊은 관계가, 진리와 결혼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연애를 할 만큼 하고 나면 서로에게 더 깊은 헌신을 할 수 있는 시점이 오듯이, 진리에 더 깊이 참여하고자 하는 시기가 오게 됩니다.....
여기에는 희생이 필요한데, 당신은 자신의 관념이나 분리된 자아가 존재한다는 환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됩니다. 이 환상이 그동안 제공해온 온갖 가치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사실 당신의 모든 고통, 모든 갈등, 모든 문제의 원천이었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비록 그것들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안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당신의 재산, 당신의 역할, 당신의 꿈을 전부 포기해야 합니다.
진리가 설령 개구리처럼 보이고 심지어 끔찍한 혹들이 달려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당신은 기꺼이 진리와 키스하려는 의지를 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349~351쪽-
질문으로 살기
한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키스를 한다 할지라도 개구리가 반드시 왕자로 변한다는 보장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그냥 "여기에" 머무십시오. 그냥 깨어 머무십시오. 사람들은 닐암 선생님께 묻고했지요. "얼마나 오랫동안 깨어서 머물러야 하나요?" 그러면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걸리든 계속 깨어 머무십시오."
하루가 걸리든 일 년이 걸리든 전 생애가 걸리든 깨어서 머무십시오. 이 끝없는 '거대한 신비'에 말입니다.
영원한 결혼
당신이 거기에 온전히 헌신할 때
더 이상 빗나갈 일은 없으니
잠시 환상에 빠지더라도 아무런 만족 주지 못하네.
진실은 이혼할 가능성 조금도 없는
완전한 충성 요구하니
모든 고통 마주보아야 하리.
사랑하는 이의 맨얼굴 그대로 껴안아야 하리.
모든 두려움 만나야 하리.
미지의 것을 맛보는 짜릿함으로 인식해야 하리.
모든 기쁨 포기해야 하리.
주는 자 없는 선물로 감사해야하리.
오직 진실만을 말해야 이러한 하나됨 이루어질 수 있으니
진실이 당신의 꿈 산산이 흩어놓을지라도
진실이 당신을 텅 비게 만들지라도
진실이 당신의 거짓 존재를 드러낼지라도
그때야 비로소 앞으로 영원히 행복할 일 외에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으리.
(삿상에서 나오는) 질문들에는 우리가 뭔가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가정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뭔가를 얻거나 유지하거나 피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바로 거기에, 그러한 가정 속에 우리의 고통이 있습니다. 어떤 경험을 얻거나 유지하거나 피하고자 하는 그런 애씀이 삶을 불행하고, 힘들고, 불편하게 만듭니다.
삿상에서는 다른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특정한 상태로 유지하려 애쓰지도 않고 밀어내려 애쓰지도 않으면서 경험자체와 만나는 방법을 가리켜 보입니다. 자신의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것이 실제로 어떠한지 알아보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 안에서는 어떤 질문이 솟아나고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당신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므로 출발 지점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어떤 바람이 당신 안에서 솟아나고 있다면 뭔가를 원하는 그것은 어떠합니까? 또는 그것이 어떤 두려움이라면 뭔가를 두려워하는 그것은 어떠합니까? 잘못된 질문은 없습니다. 그 모두가 입구입니다. 자기탐구를 시작할 수 있는 지점이자 더 부드러워지고 더 친밀해질 수 있는 출발점입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것은 누구 또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전적인 자기탐구 질문의 변형입니다.....
영적 수행과 가르침은 우리가 흔히 만족을 구하는 지점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돌려세우려고 합니다. 우리 관심의 초점을 세상에서 존재자체로 전환시키려고 합니다....이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지 찾아보면 당신은 아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경험하는 주체는 경험될 수 없습니다. 눈이 눈자체를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어떤 것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만질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355~360쪽-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찾기로 되어있는 "어떤 것"을 계속해서 찾아 헤매기 일쑤입니다. 아무것도 찾지 못할 때 어딘가 다른 곳을 찾아 헤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무'가 답일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답을 찾아서 마음으로 돌아가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고, 기억을 뒤적거리고, 좋은 답을 상상합니다. 질문자체에 머물려는 생각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하는 자기탐구는 무미건조하가 짝이 없습니다....
질문을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온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거기에 달린 것처럼 혼신을 다해 묻는 것입니다.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질문을 하면 알아낼 수 있는 것을 넘어갈 수 있습니다.온 가슴으로 질문을 했지만 답을 발견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냥 거기에, 알지 못함에 머물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알지 못한 채로 그냥 내버려 둡니다. 거기에는 그 공간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 우리는 그저 그 공간에 깨어 머뭅니다. 우리의 눈 뒤, 우리의 생각 뒤, 우리의 느낌 뒤 거기에 아무것도 없음이 존재함을 의식하면서 말입니다.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을 때는 있음의 세계로 돌아오지 말고 그냥 거기 아무것도 없음 속에 머물면서 그 자체에 호기심을 가져보십시오.무, 그것은 어떠한가요? -360~361쪽-
'무'는 그것의 모든 특성들과 더불어, 아무리 아름다운 경험이든 고통스런 경험이든 상관없이 모든 경험 안에 현존합니다. 한편 거의 모든 경험의 스펙트럼을 통하여 "나"라는 지각이, 경험을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라는 지각이 또한 존재합니다. 그것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존재의 지각, 어떤 정체성의 지각이 거의 항상 존재합니다...
슬플 때는 슬퍼하는 것이 '나'인 것같습니다. 깨달았을 때는 깨달은 것이 '나'인 것 같습니다. 돌멩이가 발등에 떨어졌을 때는 아파하는 것이 '나'인 것같습니다. 언제나 '나'라는 지각이 있습니다.
어떤 경험을 하든 "나"라는 지각은 너무나 선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대개 그러한 경험을 통제하거나 조종하려는 경향을 보이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경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내"가 이 경험을 하고 있고 그러니 "나"는 그것을 고치거나 더 좋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것이 바로 우리의 고통입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나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자신이 경험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바꾸려고 애쓰는 것 때문에 야기됩니다. "내"가 고통스러운 경험을 할 때는 거기에 대해서 "내가" 뭔가를 할 필요가 있는 것같습니다. "내가" 좋은 경험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하는 문제로 "나는" 전전긍긍하기 일쑤입니다. -362~363쪽-
'무'는 그것의 모든 특성들과 더불어, 아무리 아름다운 경험이든 고통스런 경험이든 상관없이 모든 경험 안에 현존합니다. 한편 거의 모든 경험의 스펙트럼을 통하여 "나"라는 지각이, 경험을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라는 지각이 또한 존재합니다. 그것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존재의 지각, 어떤 정체성의 지각이 거의 항상 존재합니다...
슬플 때는 슬퍼하는 것이 '나'인 것같습니다. 깨달았을 때는 깨달은 것이 '나'인 것 같습니다. 돌멩이가 발등에 떨어졌을 때는 아파하는 것이 '나'인 것같습니다. 언제나 '나'라는 지각이 있습니다.
어떤 경험을 하든 "나"라는 지각은 너무나 선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대개 그러한 경험을 통제하거나 조종하려는 경향을 보이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경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내"가 이 경험을 하고 있고 그러니 "나"는 그것을 고치거나 더 좋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것이 바로 우리의 고통입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나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자신이 경험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바꾸려고 애쓰는 것 때문에 야기됩니다. "내"가 고통스러운 경험을 할 때는 거기에 대해서 "내가" 뭔가를 할 필요가 있는 것같습니다. "내가" 좋은 경험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하는 문제로 "나는" 전전긍긍하기 일쑤입니다. -362~363쪽-
고통에서 벗어나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자신이 '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을 때마다 "나"라는 지각은 줄어들고 무에 대한 지각은 늘어납니다. 여전히 "나"라는 지각이 있지만, "나"는 더 작아지고 무는 더 커집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고통을 경감시키는데, 왜냐하면 다루어야 할 "나"는 줄어들고 아무런 관리도 필요없는 무는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무는 유지비가 아주 적게 듭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우리가 바로 모든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물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알아차립니다. 천장의 선풍기도 "나"고 저 그림도 "나"입니다. 모두가 다 "나"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 한계가 없는 것처럼, 얼마나 큰 존재인지 또한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행복이고, 세상의 모든 슬픔이며, 세상의 모든 돈이고, 세상의 모든 빈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지극히 적습니다. 모두가 나 자신이니 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고통을 제거해줍니다.
우리는 첫번째 것을 자기탐구로, 두번 째 것을 우리가 그 안에서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헌신(박티)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탐구를 통해서는 자신이 무임을 깨닫는 반면, 헌신을 통해서는 자신이 모든 것이라는 정체성을 깨닫습니다. -363~364쪽-
우리의 본질에 대한 더 큰 진실과 맞닥뜨릴 때 우리의 한정된 자기 이미지와 그것과 연관된 관념들은 그 힘과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왜냐하면 더 작은 진실은 더 큰 진실의 빛 앞에서는 진실함과 영향력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니까요.
산타클로스가 좋은 예가 되겠지요. 산타클로스가 신화라는 더 큰 진실을 알게 되면, 산타클로스의 경험은 어디로 사라져버리지는 않지만 산타클로스에 대한 관념은 힘과 의미를 대폭 잃어버립니다.이런 탐구의 요지는 자기 이미지를 제거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을 더 직접 경험할 공간, 나아가서는 진정한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 공간, 어떤 식으로든 그것이 우리의 이미지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할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이미지나 정체성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유용하기도 합니다....의사소통에 유용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제한된 정체성은 풍성함이나 활기가 많이 떨어집니다.... 우리의 자기 이미지는 안정되고 지속되는 자아관념을 창조하려 듭니다. 하지만 실제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나"라는 것이 같은 길을 두 번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는 매 순간 새롭고 다른 무엇으로 나타납니다. 잘 살펴보면 "나"라는 것은 정적인 물체가 아니라 흘러가는 강물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의 자기 이미지들은 정적일지 몰라도 우리의 본질은 정적이지 않습니다......
지금 이순간 현존하는 계속되는 흐름과 자기 이미지를 유지하고자 하는 경향 둘 다 그냥 알아차려보십시오. 존재의 경계없음과 영원무궁함을 의식하고 자기 이미지를 더 이상 의식하지 않는 것과 이 두가지를 동시에 다 의식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당신의 자아에 대한 지각이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개념들 중 어떤 것과 실제로 맞아떨어진 적이 있습니까? 자신에 대한 어떤 관념이 이 순간을 실제로 포착할 수 있습니까?...."나는 깨달았다"나 "나는 깨닫지 못했다"는 어떻습니까? 그것이 지금 이 순간 당신이 하고 있는 경험과 어떤 실질적인 관련이 있나요?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이 순간보다 더 진실하게 당신의 본질을 담아낼 수 있는 어떤 관념이 있나요? -372~375쪽-
일어나야 하거나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삶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도 삶은 그저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 일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판단에는 많은 수고가 따릅니다. 우리의 주의를 계속 좁게 유지하는 데 그토록 많은 힘이 드는 이유는 그것이 의식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본성은 축소되기도 하고 확대되기도 하는 것입니다....애씀을 중단하고 생각의 내용물과 연루되기를 멈추면,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리면서 편안해지고 넓어지는 의식의 확대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른바 판단이라 불리는 이 억지스런 의식의 축소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쓰려고 애쓰는 경향이 있는 사람은, 아주 조금이라도 이런 애씀을 멈추고 쉬어주면 확장된 의식을 깊이 지각할 수 있습니다.
의식의 자연스런 흐름을 거스르는 이런 고투가 바로 고통입니다. 좋은 소식은 의식이 축소되더라도 의식에는 아무 해로움이 없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의식이 축소되더라도 의식은 확대 능력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의식이 확대와 축소를 반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우리는 의식이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그저 허용하면서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든 그 모든 상태의 경이로움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판단과 관찰을 구별할 수 있으면 유익합니다."바깥이 어둡다"같은 단순한 생각은 그냥 관찰일 뿐이라서, 그 순간 우리의 의식은 바깥이 어둡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는 이내 일어나고 있는 다른 무엇으로든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숲속에서 길을 잃어버렸는데 손전등도 없다면 이때 생각은"아, 안돼. 위험해"같은 판단의 성질을 띨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의식이 축소되면서 우리는 갑자기 그 상황 자체에 깨어 있기가 더 힘들어집니다....
판단은 또한 진정한 당신의 본질에 대한 지각을 축소시킴으로써 분리된 "나"가 존재한다는 인식을 유지시켜주는 기능을 합니다. 판단은 당신의 자아를 매우 작고 통제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나"는 마음속에만 존재할 뿐이며, 판단은 마음이 "나"라는 관념을 유지하는 한 방법일 뿐입니다. ....
판단은 또한 마음의 초점을 문제(예를 들어 불편한 느낌이나 경험)에 맞춤으로써 "나"라는 것을 창조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문제를 고치려고 애를 쓰기 시작합니다.이처럼 판단은 당신의 의식을 좁힘으로써 불편한 것을 차단하기도 하고, 불편한 것이면 무엇이든 고치려 드는 발판 구실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문제(우리의 판단으로 인해 생겨난)를 창조하고 있는데, 그럼으로써 정체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우리 마음도 뭔가 할 일이 생깁니다.....
우리는 자신의 현실을 고치려면 판단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판단은 사실 우리의 '존재'를 경험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는 아름답고 심오하고 만족스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아주 사납고 거친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항상 편안하고 안전하고 쉬운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385~389쪽-
좋은 소식은 우리의 판단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끝없이 유지해갈 수 없습니다. 특정한 문제에 의식의 초점을 계속 맞추고 있기에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우리가 마침내 이런 애씀을 멈추게 되면 의식은 자연스럽게 확대됩니다. 더 이상 자신의 판단 내용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의식이 활짝 열려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더 많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는 갑자기 방 안에 자신이 이전에 초점을 맞추어왔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판단에 대한 진실을 알고나면 우리는 판단을 제거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쉽지만 그것은 단지 판단 위에 판단을 쌓는 일일 뿐입니다. 우리는 판단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는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판단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판단 자체를 실제로 "경험하는" 것입니다.그냥 알아차리기만 해보십시오....
당신이 지금껏 피하려고 애써왔던 것과 마침내 그냥 함께 머물면, 피하려고 애썼던 그것이 사실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의식은 분노, 권태, 슬픔, 두려움, 의심, 걱정, 심지어는 정신적 외상을 입힌 끔찍한 기억이나 경험마저도 너그럽게 허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지복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것들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사실 이런 것들을 두루 껴안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390~392쪽-
저항이 얼마나 피곤한 것인지를 경험하고 무슨 경험이든 그냥 경험하도록 허용하기만 하면, 의식은 자연스레 확대됩니다. 그렇게 하면 경험이 말할 수 없이 풍성해집니다.....자기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하면 자신이 거기에 압도당할까봐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의식이 어김없이 축소될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경험 안에서 그냥 편안히 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같습니까? 공감이나 분노 또는 그와 비슷한 모든 것들이 더 진실하고 더 깊이 있는 무엇으로 채워집니다.의식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생생히 살아 있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경험이든 그것과 함께 머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어떤 것도 당신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슬픔과 분노와 고통은 당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에 더 가깝습니다....슬픔이 정말로 그렇게 나쁠까요? 그건 사실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진짜니까요. 그냥 그것자체에 호기심을 가져보십시오. 그것에 고통이나 슬픔이나 분노라는 딱지를 붙이기 전의 그것은 어떠한가요? -392~393쪽-
고통은 결국 당신의 의식이 존재하는 곳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식을 한 곳에 붙들어두려고 애쓰거나 닫혀 있는데도 열려고 애쓰는 데서 비롯됩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거기에 그냥 호기심을 가져보십시오.
당신의 의식이 어디로 흐를지, 당신의 의식이 확대될지 축소될지는 당신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옳거나 그른 것도 없습니다. 이런 가능성 모두에 호기심을 가지십시오. 확대와 축소는 들숨과 날숨처럼 의식의 본성일 뿐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향한 이 흐름이 당신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의식이 확대되든 축소되든 아무 상관없다면, 그것을 축소시키거나 확대시키려고 애쓸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애씀이 없다면 고통도 없습니다. 축소되어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해보십시오.... 자유란,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거기에 당신의 전부를 쏟아 붓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어떤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대한 우리의 저항에서 옵니다.....그렇게도 많은 시간 동안 우리는 자신이 부여받고 있는 삶에는 참여하지 않고, 자신이 부여받았어야만 했다고 생각하는 삶에 매달리고 있습니다.다른 삶을 갖기 위한 이런 노력이 사실은 우리가 고통을 받는 원인입니다. 우리의 기쁨 또한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여받고 있는 삶과 그저 더불어 존재하는 데서 옵니다.
-393~395쪽-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고통을 끝내는 길은 저항을 멈추는 데 있다고 자연스레 결론내립니다. 하지만 저항에 대해 뭔가를 하려고 애쓰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바꾸려는 또 다른 시도가 되어버립니다. 이 딜레마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냥 그것을 기꺼이 경험하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 우리는 어떤 식물을 키울 때 더 빨리 자라게 하려고 매일같이 뜰에 나가 식물을 잡아당기지 않습니다. 그러는 대신 그 식물과, 그것의 자연스런 펼쳐짐과 그저 함께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물과 거름을 주며 식물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줍니다. 하지만 그건 그 식물에 직접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식물 자체에 뭔가를 하는 것은 정작 식물을 해칠 수 있습니다.
조건지어짐의 흐름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어떤 경험에 뭔가가 잘못되어서 그걸 고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이런 조건지어짐의 일부입니다. 그 결과 뭔가를 고치겠다고 애쓰는 태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고통의 원인에 접근하는 것은 우리의 직관에 어긋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조건지어짐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변화하고 펼쳐지도록 내버려두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럼에도 그것과 풍성히 만날 수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395~396쪽-
자신이 부여받고 있는 삶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어떤 식으로도 바꾸려들지 말고 그냥 탐구해보십시오. 우리 삶 속 고통은 뭔가를 바꾸려는 시도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거기에 어떤 행위도 가하지 않는 자기탐구를 해보라고 나는 제안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은 우리의 조건지어짐일 뿐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가 부여받고 있는 삶의 일부입니다. 어느 누구도 조건지어짐 없이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설사 조건지어짐이 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기꺼이 그것과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조건지어짐이 제철에 따라 변하도록 기꺼이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어떤 과일은 봄에 익고, 어떤 과일은 가을에 익습니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든 상관없이 자유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탐구해보기를 권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조건지어짐이 일어나고 있다면 설사 뭔가를 고치거나 바꾸기 위한 조건지어짐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바로 그것이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부여받고 있는 삶입니다.
더 나은 삶은 없습니다. 당신의 삶을 충분히 경험하고 그 진실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섬김은 없습니다. 삶의 어떤 부분도 제거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탐구하십시오....당신의 조건지어짐이 끝날 때가 아닐지라도 당신은 여전히 그것을 그저 바라보는 선물을, 여기에 존재하는 것을 진실하게 살펴보는 선물을 줄 수 있습니다. -396~397쪽-
대개 우리는 고통이 나쁜 경험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고통은 우리가 실제로 거기에 있지 않은 것에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생깁니다...... 고통은 우리의 주의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향해, 그 순간의 진실을 향해 흐르고 있을 때 끝이 납니다. 고통은 우리가 의도하는 것과 있는 그대로의 현실 사이의 거리, 그 간격입니다...간격이 없으면 고통도 없습니다....
고통은 일어나는 것 자체와는 상관이 없다는 이 진실을 이해한다면 당신의 삶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일어나고 있는 것은 변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당신의 경험은 변할 것입니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지 않은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는 고통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의 진실에 열정과 호기심을 기울이면 우리는 고통을 겪지 않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의식과 열정과 호기심을 어디에다 쏟고 있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의 주의가 희망, 꿈, 욕망, 두려움, 의심, 걱정, 이상, 환상같은 실재하지 않는 것들에 얼마나 집중되고 있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욕망하고 있는 것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현존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욕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또한 현존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우리의 꿈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실재하지 않고, 실재하지 않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는 실재하는 것과 만나지 못합니다. '존재'의 생생한 살아있음은 실재하는 것, 거기에서만 체험될 수 있습니다. -398~399쪽-
거부와 욕망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에 저항하는 메커니즘으로, 우리를 고통에 빠뜨립니다. 거부와 욕망은 동시에 작동하거나 서로 돌아가면서 작동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부와 욕망 사이를 오갑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건 좋지 않아. 만일 내가 저걸 가진다면, 명상을 더한다면, 더 멋진 연인을 만난다면, 돈이 더 많다면, 더 많은 자유를 누린다면 훨씬 더 좋아질 거야"라고 말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러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시도하며, 그리고 그 시도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이 현존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여전히 거부하는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심지어 자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었을 때조차 우리는 그것이 별것 아님을 발견할 수도 있으며, 그리하여 만사를 더 좋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자신이 믿고 있는 또 다른 뭔가를 꿈꾸게 됩니다.
현재 있지 않은 것을 욕망하면서 "있는 그대로"를 거부하는 이런 행위는 보잘것없는 자아라는 지각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원동력입니다. 만사가 형편없다면 누구에게 그런 걸까요? "나"에게입니다. 만사가 별로라면 누구에게 그런 걸까요? "나"에게 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거부하고 욕망하는 것 자체를 의식조차 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그것은 우리가 자기욕망과 환상의 내용물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환상에 최면당해, 그것이 자신의 자아인식을 축소시켜서 스스로를 몹시 초라하고, 불완전하고, 모자라고, 불만족스러운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합니다.....환상은 그다지 참된 것이 못됩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만 존재합니다. 그것은 실체가 없습니다.
-400~401쪽-
'나'라는 것은 우리의 상상이 만들어낸 아주 그럴듯한 허구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나"에게 좋을지 나쁠지를 늘 확인하고 점검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경험을 평가하는데, 그렇게 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을 경험자체와 분리시키고 있는 것입니다."나"에게 주의를 집중할 때의 문제는 이 "나"라는 것이 단지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러기를 잠시 멈추고 살펴보면 당신은 "나"라고 불리는 이것을 도무지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펴볼 때마다 거기에는 매번 다른 것이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결국 한 생각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은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없습니다. 의식의 흐름은 넘칠만큼 많은 생각들을 품고 있지만, 그 흐름 안에 있는 "나"라는 것은 한 생각도 결코 품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라는 것은 그 흐름 속에 나타나는 생각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루종일 점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어떠한가?"라고요.
실재하는 것은 경험뿐입니다. "나"라고 불리는 경험을 담는 그릇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주의가 "나"에게로 흐르고 있는 한, 당신이 얼마나 많은 멋진 경험을 하든 상관없이 당신은 고통당할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이 덜 자의식적이 되려고 애쓰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자의식을 더 키울 뿐입니다....해결책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은 순수의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이 절대의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식 자체는 흐를 수 없는 것입니다. -401~404쪽-
실제로 의식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은 거울 없이 당신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것과 흡사합니다. 당신은 거기에 눈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들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감추어져 있지 않지만 당신은 그것들을 볼 수는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의식이 존재함을 알지만 그것을 보거나 맛보거나 만지거나 들을 수는 없습니다.
고통의 환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순수의식뿐입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면 우리의 고통은 거기에서 끝납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나"라는 것도 끝이 나니까요. "나"라는 것이야말로 우리 고통의 전부였습니다. 알고 보면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
"나"라는 것은 고통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애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애씀이 없으면 남는 것은 삶이라 불리는 경이로운 순수의식의 놀이뿐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아무도 그것으로 고통받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멋지게 춤추고 있습니다. -404쪽-
삿상에서는 두가지 간단명료한 가르침 또는 요청을 베풉니다. 첫번째 가르침은 자신의 경험을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당신이 알아차리는 것이 무엇이든, 발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바른 경험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고치거나 개선해야 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신이 지금 무슨 경험을 하고 있든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두번째 가르침은 그 경험을 있는 그대로 그냥 허용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바꾸려는, 더 낫거나 다르거나 더 많거나 더 적게 만들려는 끝없는 노력을 멈추십시오. 그저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십시오.
이 두 가지를 행하는 한 고통은 사라집니다. 물론 반대도 성립합니다. 당신이 자신의 주의와 호기심을 여기에 있지 않은 것에 쏟는 한, 이 순간을 고치거나 바꾸거나 저항하거나 피하려고 하는 한 당신은 고통받게 됩니다.
만일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 쪽을 하지 않는다면, 어느 쪽도 사실상 완전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두 가지 가르침은 실제로는 하나입니다. 만일 당신이 자신의 경험을 바꾸거나 고치려 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 경험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또한 당신이 자신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경험을 온전히 허용하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405~406쪽-
올바른 경험을 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가르침들은 어떤 특정한 경험을 알아차리기 위한 것도 아니고, 당신이 들었거나 읽었거나 다시 하기를 원하는 어떤 경험을 알아차리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당신이 지금 이 순간 하고 있는 경험을 알아차리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경험을 찾거나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 더 나은 경험을 간절히 원하거나 지금 하고 있는 경험에 격렬하게 저항하거나 어떤 것들이 이러저러하게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떠날 수가 없다면, 그건 그냥 당신 자신의 경험일 뿐이니 그것과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그것이 어떠한지 알아차리기만 하십시오....
그런 환상에 저항하기보다는 그것이 어떠한지를 알아차려보십시오. 환상에 빠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차리기만 하십시오. 환상의 내용물뿐만 아니라 갈망과 추구와 환상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그 "경험"자체를 기꺼이 받아들여보십시오. 관념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경험"은 어떠한가요? 핵심은 생각을 그만두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그것이 어떠한지를 알아차리기만 하십시오...
우리 대부분은 자기 인생이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지거나 나빠질지에 대해 마음으로 끊임없이 논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주의와 관념이 이런 관념들에 몰두할 때 그것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언제나 뭔가를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지금부터 10초 동안 어떤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해보십시오. 해보면 알겠지만 우리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알아차림은 그냥 일어납니다. 알아차리기와 허용하기라는 이 간단명료한 두 가지 가르침은 우리 존재의 특성일 뿐 우리가 해야 할 무엇이 아닙니다. -406~407쪽-
알아차림이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도록, 순간순간 마다 실재하는 경험을 받아들이도록 내버려두기를 권합니다. ... 잘 살펴보면 그것은 당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해지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당신이 알아차린다기보다 알아차려지는 것처럼 말이죠....
허용하기 또한 당신의 '존재'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당신은 수많은 경험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 이 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일을 당신은 다 괜찮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방안의 벽이 그렇게 서 있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가구들이 다 그렇게 위치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호흡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당신은 한 번에 경험의 한 측면만 거부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허용됩니다. 오로지 한 번에 하나씩만 저항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핵심은 알아차리기와 허용하기가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임을 당신이 알아차리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 허용하기의 공간은 이미 현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에게는 "있는 그대로"와 싸우는 것마저도 허용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한번 호기심을 가져보십시오. 당신은 얼마나 많이 "있는 그대로"를 허용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이 "있는 그대로"에 저항하여 싸우고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그런 허용하지 않음마저도 그냥 허용한다면 그것은 어떠하겠습니까? -407~409쪽-
우리는 사정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더 좋은 경험을 하거나, 더 나은 삶을 살거나,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물론 이런 진술의 이면에는 사정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믿음이 자리합니다.
이런 믿음이 일종의 신화라는 한 가지 단서는 더 좋은 것이나 더 나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모든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당신이 더 좋거나 더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도 늘 바뀌니까요. 당신이 한때 좋다고 느꼈던 것이 나쁘거나 해로운 것이 되어버리는 경우는 흔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
"더 좋다"거나 "더 나쁘다"는 것은 실체가 없는, 최종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관념에 불과합니다. 어느 것을 더 좋게 만들려는 애씀이나 더 나쁜 것을 피하려는 애씀이 바로 우리의 고통입니다....
처음에는 다들 다른 사람의 좋은 점만 보도록 의식의 범위를 좁히는데 달인이 되지요. 그러나 이처럼 의식의 범위를 좁히는 데는 그만큼 수고가 따르고, 그것은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이런 고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서 의식은 축소된 상태로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의식은 확대되고, 그리하여 관계의 이로운 점뿐만 아니라 좋지 않은 점도 보게 됩니다....
나쁘다고 생각해서 피하려 했던 일이 일어난다면, 머지않아 우리의 의식은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님을 깨닫기 위해 확대됩니다. 암같은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는 대단한 축복이었다는 말을 곧잘 합니다. 암에 걸려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런 말을 합니다. -409~410쪽-
더 좋아질 것이라는 환상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려면 의식을 계속 좁히려고 애써야 하는데, 그러나 결국 의식은 자연스럽게 확대되고 맙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 경험이 너무나 색다르기 때문에 흔히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이 듭니다.....
우리는 이런 조건지어짐에 따라 움직이는 데 너무나 익숙해서 더 좋은 것에 대한 한 가지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비록 더 미묘한 환상일 수는 있지만 대개 또 다른 꿈에 매달리기 십상입니다. ...
당신은 백만달러를 손에 넣어도 그것이 당신 삶을 더 나아지게 해주지 못하리란 걸 알지만 깨달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것이 삶을 더 나아지게 해주리란 믿음을 가질 수 있고, 그러면 이제는 그 관념 때문에 고통당할 수 있습니다. 또는 내면 상태가 달라진다면, 다시 말해 이런 식으로 느끼거나 저런 식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더 좋아질 것이라든가 더 나빠질 것이라는 생각없이 그저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요? "좋은" 것을 향해 나아가지도 않고 "나쁜" 것에서 멀어지려고도 하지 않은 것은 어떤 상태일까요? 인생에서는 항상 수많은 일이 벌어집니다.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따로 더 애쓰거나 고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요?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하지 않으면 우리는 절반만 경험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를 온전히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나머지 절반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기에 우리의 시각은 더 온전해집니다. 더 나은 것이라는 관념을 갖는 것은 옆을 못 보도록 말에게 씌우는 눈가리개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눈가리개를 하면 진실의 일부만 볼 수 있습니다. 그 눈가리개 자체를 알아차리고 있다면 잠시 일부분의 진실에 발을 들여놓더라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410~412쪽-
또 하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더 좋거나 더 나쁜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더 좋거나 더 나쁘다는 관념을 유지하려면 더 좋거나 더 나쁘게 될 "나"라는 것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더 좋은 것에 대한 관념을 가질 때마다 우리는 자신이 몹시 왜소하다고 느낍니다.
더 좋다거나 더 나쁘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관념 또한 늘 깨어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없어져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것을 알아차리고 거기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터득하십시오. 레스토랑 메뉴판을 건네받았을 때처럼 가끔은 더 좋은 것이라는 관념에 잠시 발을 들여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더 좋은 것이라는 관념이 믿음으로 변하거나 고정된 것이 된다면 우리의 자아에 대한 지각은 아주 왜소해지고, 따라서 우리는 고통받을 것입니다.....
이 작은 자아의 경험 곧 축소된 상태는 당신 '존재'의 더 큰 경험보다 더 나은 것도 아니고 더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단지 서로 다를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얼마나 많고 다양한 작은 자아들을 가지고 있는지요! 더 좋은 것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 하나하나는 모두 나는 누구인가라는 관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 어울리는 정체성이 존재합니다. 명상을 하면서 '평화로움'과 '존재'와 접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 어울리는 정체성이 존재합니다. 그 모두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우리의 관념입니다....
만사는 언제나 다를 뿐이지, 결코 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있는 그대로의 그것보다 더 좋거나 더 나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413~414쪽-
당신은 더 좋은 것에 헌신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실재하는 것, 참된 것,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헌신하고 있습니까? 이것 또한 판단할 거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이라는 관념을 지닌 채 고투하는 경험에도 삶을 풍요롭게 하는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고투가 별로 상관할 거리가 못됨을 깨닫고 거기에서 자유로워질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당신은 지금껏 살면서 더 좋은 것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쳤지만 지금도 여전히 거기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지금껏 살면서 더 나쁜 것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다했지만 여전히 거기에서 맴돌고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더 나은 어떤 것에 도달한다 해도 그것은 결코 충분치가 않습니다....
당신은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정말로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지금까지 그것을 그대로 믿어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더 좋다고 말하니까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 당신은 무엇이 당신 삶을 더 좋아지게 할지 더 나빠지게 할지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
사실 이 알지 못함이란 자리에는 아주 생생히 살아 있는 무엇이 존재합니다. 당신이 알지 못할 때 당신은 더 주변을 둘러보게 됩니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더 깨어 있게 됩니다.
더 좋은 것이라는 관념 없이, 당신은 그저 아는 기쁨을 위해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당신은 초록과 다른 색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저 다를 뿐,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더 좋은 것이라는 관념으로 의식의 범위를 좁히지 않는다면 인생은 다양해지고 풍부해집니다. 좋거나 나쁜 것이라는 관념의 층을 덧붙이는 일 없이 경험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정말로 즐길 수 있습니다. 더 좋은 것이라는 관념이 없다면 세상과의 관계도 없습니다. 그저 세상이 있을 뿐입니다. -414~416쪽-
"있는 그대로"에 대한 당신의 저항을 알아보는 좋은 방법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경험을 기꺼이 하고자 하는가, 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아주 조금이라도 "아니요"라는 답이 나온다면 그것은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현재 경험을 거부할 때 우리가 즐겨 쓰는 방법들 가운데 한 가지는 실제로 하고 있지 않는 온갖 경험을 두고 환상에 빠지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아닌 다른 경험을 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자신의 현재 경험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또 다른 방법은 과거에 대한 환상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당신은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경험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경험도 이미 잃어버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미 새로운 것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그러니 당신은 또한 자신이 하는 모든 경험을 기꺼이 잃어버리고자 합니까?
이런 질문들은 우리의 초점을 넓혀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아차리도록 할 뿐 아니라, 일어나고 있는 것과 우리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아차리게 해줍니다. 이 질문들은 또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반응하여 우리 내면에서 벌어지는 움직임까지도 포함하도록 우리의 초점을 넓혀줍니다.
그것은 기꺼이 하고자 함인가요, 그렇지 않음인가요? 그것은 이 순간에 대한 긍정인가요, 아니면 부정인가요?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우리는 그 대답이 거의 대부분 "아니요"임을 금방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공연하게든 미묘하게든 거기에는 대개 "아니요"라는 부정이 존재합니다....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면 자신의 경험을 어떤 식으로든 관리하려고 애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바른 경험에는 "예"라고 말하고 그른 경험에는 "아니요"라고 말함으로써 바른 경험을 하고자 애씁니다....뭔가를 원하는 것 또한 "있는 그대로"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한 방식입니다. -416~418쪽-
"그럼에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 괜찮다는 대긍정을 경험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 순간들 속에는 "기꺼이 하고자 함"이 현존하지만, 그것이 당신에게 해야 할 어떤 일이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고통은 사라지지만 당신이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을 들으면 당신은 흥분하면서 "그래, 알았어. 저항을 멈추기만 하면 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아니요"라고 말하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당신을 어김없이 고통에 빠뜨립니다.....
그저 여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만 이 질문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존재하는 데 익숙하지 못합니다. 우리 질문은 대부분 어떤 것을 더 좋아지게 하느라 애쓰는 데 바쳐집니다. 무엇이 여기에 있는지만 알아내기 위해서 이 질문을 해보십시오. 어떤 밀어냄이나 끌어당김 없이, 자신의 경험을 바꾸려는 애씀없이 그냥 경험자체와 만나보십시오.
이것은 경험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경험을 초월하려는 시도도 아니므로 당신은 고통을 경험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은 자신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지만 거기에 어떤 조작도 가하지 않습니다. 그저 가슴을 활짝 열고 호기심을 품은 채 "있는 그대로" 경험할 뿐입니다......
대긍정이 저항을 향해서도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안에는 어떤 경험이든 기꺼이 온전히 하고자 하고, 기꺼이 온전히 저항하고자 하고, 그리하여 고통 또한 기꺼이 온전히 겪고자 하는 여유 공간이 존재합니다. 이렇게 저항과 다정히 만나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내버려두는 가운데, 우리는 더욱더 많은 자신의 경험과 만날 수 있습니다." -418~419쪽-
우리가 저항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저항해야 할 것들, 허용해야 할 것들과 허용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우리의 다양한 전략과 개념들이 빚어내는 갈등과 불만족을 넘어서서, 우리의 '모든' 경험에는 그것들을 위한 공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나는 기꺼이 하고자 하는가?"라는 질문은 기꺼이 하고자 하지 않는 끝없는 흐름이 우리가 지금껏 길들여져온 조건지어짐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하도록 배워온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것에는 "아니요" 라고 말하고 저것에는 "예"라고 말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왔습니다.....
이런 조건지어짐의 소용돌이 속에 우리로서는 일어나게 만들 수 없는 대긍정이 존재합니다. 그런 완전한 긍정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다줄 기법이나 과정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 우리가 자신의 고통이나 갈등을 기꺼이 경험하고자 하기만 하면, 거기에는 이미 대긍정이 현존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제기되지 않지만, 조건지어짐은 여전히 현존하지만, 어떤 경험과도 아무 문제 없고 경향에 대한 저항과도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 '신성한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시야가 넓어질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아니요"라고 말하는 모든 방식을 기꺼이 보려고 하면, 항상 "예"라고 말하고 있는 신성한 무엇을 경험하는 문이 열립니다.
이렇게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가슴을 활짝 열어젖힌 채 자신의 경험과 고통을 따뜻이 맞이하는 것은 우리가 여태껏 반응하도록 배워온 방식과는 정반대입니다. -419~421쪽-
영적인 자기탐구는 우리의 경험을 밀어내거나 끌어당기는 일 없이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럴 때 저항이 생기더라도 저항하는 그 경험 자체와 그냥 만나보십시오. 있는 그대로의 경험자체에 그냥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는 절대 바닥나는 법이 없습니다.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는 저항의 소멸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 허용하는 이 "기꺼이 하고자 함"에 달려 있습니다. 자유는 저항의 부재가 아니라 저항을 만나는 일이며, 저항까지 포함한 모든 경험에 현존하는 대긍정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것을 더할 필요도 없고 어떤 것을 제거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자신의 삶을 달라지게 만들려고 애쓰도록 조건지어져온 당신의 일부는 이런 말을 들으면 그것을 당신이 해야 할 무엇으로, 옳바로 해내기 위해 터득해야 할 무엇으로 만들려고 애쓸 것입니다.하지만 자, 보십시오. '존재'는 당신이 이런 말을 듣고 그것을 고통당하는 데 이용하더라도 당신과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존재'는 당신이 겪는 어떤 고통과도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진실에 당신은 스스로를 열어놓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여기에 무엇이 있는지를 기꺼이 발견하고, 기꺼이 그것을 만나고자 합니까? 당신 자신의 경험과 기꺼이 만나고자 합니까? 당신의 조건지어짐 저항과 기꺼이 만나고자 합니까?....
아무런 기대없이 조건지어짐과 만나면 그것을 녹여 없애는 일에 가속도가 붙는 반면, 저항은 손도 못대고 그것을 고스란히 방치합니다. 우리의 조건지어짐을 큰 시각에서 보려면 이처럼 다정하고 호기심 어린 만남이 필요합니다. -421~422쪽-
대긍정은 우리가 행하거나 수련하거나 완수할 무엇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한 측면입니다. 대긍정은 '존재'자체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입니다. '존재'의 본질은 긍정이고, 사랑이고, 수용입니다. 이러한 긍정은 '존재'가 하는 무엇이 아닙니다.
'존재'자체가 그냥 긍정일 뿐입니다. 이러한 대긍정의 본질은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것이라서 "반대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긍정은 근본적입니다. ...그것은 이미 여기에 존재합니다. 그것이 여기에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걱정은 경험 자체를 부정하는 한 사례입니다. 이것은 방어적으로 선수를 쳐서 부정하는 것입니다.이러한 부정은 마음의 활동일 뿐이어서 별 효과가 없습니다. 걱정한다고 해서 일어날 일을 미리 예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예방에 성공해본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는지 헤아려 보십시오. 온갖 방지책을 다 갖고 있어도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긍정-하기yes-ing"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은 것들에 대해 "예"라고 말하면서 그것들을 소망하고 희망하는 데 헛되이 많은 시간을 낭비합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마음의 활동일 뿐입니다. 때로는 그러한 욕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실제 행동으로 이어져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을 하기도 합니다....영적인 경험을 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활동들 대부분은 여전히 우리의 생각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423~424쪽-
삶은 삶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삶은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계획서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도 많이 일어나고 원하지 않는 것도 많이 일어나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이것은 긍정하느라 애쓰고 저것은 부정하느라 애쓰는 분주한 마음이 존재하며, 자신이 원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이고 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기 위한 애씀이 존재합니다. ....
이런 모든 수고를 타고난 대긍정과 비교해보십시오. 대긍정이란 의식하는 어떤 것의 본질입니다.물의 본질이 축축하고 흐르는 것인 것처럼, 경험을 둘러싸고 있는 이 공간의 본질은 의식하고 사랑하고 모든 것에 대해 "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두루 감싸 안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마음의 모든 활동에까지도 스며듭니다. ....
이러한 긍정은 거기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든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걱정하는 생각이 거기에 있으면 그것에 조차 활기를 불어넣어줍니다. 우리의 마음 구조가 그토록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때문입니다. ...
이 대긍정은 모든 것에 현존합니다. 그것은 공기보다 더 널리 퍼져 있고 우리 자신의 피부보다 더 가깝습니다. 그것은 어디에나 구석구석 침투하고 스며듭니다. 어느 틈, 어느 구석이든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이미 여기에도 있고, 이미 저기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표현이든, 육체의 활동이든, 본성의 행위든 모든 표현에 근본적으로 내재합니다.
극심한 두려움과 간절한 열망도 사실은 이러한 의식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감싸 안음으로, 이러한 대긍정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질입니다. -424~425쪽-
"지금 여기에 있으라Be here now"는, 유서깊은 영적 가르침으로 현재 순간에 존재하라는 뜻입니다. ....이건 마치 내가 당신더러 지금 앉아있는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을 떠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 잠시만 멈추어서 살펴보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것이, 지금 여기에 현존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를 당신은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지금, 진짜 지금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 지금, 만들어진 지금,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지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짜 지금을 경험하는 대신 지금에 대한 우리의 환상을 경험하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정말로는 일어나지 않는 무엇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잠이 들었을 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지금을 마치 생시처럼 경험하는 꿈을 꾸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는 언제든 예외없이 실제로는 일어나고 있지 않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자유와 같은 놀라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 때라도 당신은 내면으로 들어가서 자유에 관한 어떤 환상을 품는데, 그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만들어진 지금"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충분히 환상을 품으면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환상을 품는 우리의 능력은 위조지폐를 인쇄할 수 있는 기계를 가진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 가짜 현실을 열심히 찍어내고 있지만 그것들은 우리에게 아무 도움도 안됩니다......
"지금 여기에 있으라"는 가르침이 주어질 때조차 마음은 그것을 해야 할 무엇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으려고 "애쓸"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426~428쪽-
이 가르침을 당신이 해야 할 무엇으로 바꾸기보다는, 당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당신이 설령 환상을 경험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경험 자체를 충분히 맛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핵심은 당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을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환상의 장막을 벗겨내고 진짜 지금을 그 모든 영광 가운데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당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환상과 개념화와 욕망의 두꺼운 장막이라면, 진짜 지금으로부터의 분리라면 그것 역시 대단한 일입니다. 그 모두가 당신의 경험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충분히 경험해보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경험이며,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당신의 환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일은 결코 충족될 수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우리의 희망과 환상이 가진 이런 타고난 불만족을 충분히 경험할 때 우리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비록 실재하지 않는 생각 속에서 길을 잃었다는 사실에 실재한다 할지라도, 실재한다는 것은 대단히 만족스럽습니다. 만족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에만 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경험이 무엇이든 거기에서 도망치거나 피하려 하지 않고 기꺼이 경험하고자 함으로써 우리는 진짜 지금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꿈의 공허함을 기꺼이 경험하고자 할 때만이 우리는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들(새소리, 방 안의 빛 등)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428~429쪽-
지금은 우리의 환상 속의 거기만이 아닙니다. 현실 속의 여기 또한 지금입니다. 지금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 어느 쪽으로도 한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지금"은 있었던 모든 것이고, 존재하게 될 모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어디에 주의를 기울이고 싶습니까? 공허한 환상입니까, 이 가득 차 터질 듯한 현실입니까?
나는 지금 당신이 꿈과 환상과 희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바꾸려고 애써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가능성들을 상상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은 대단한 선물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현재에 있지 않는 것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대단히 유용합니다.....
게다가 가짜 지금을 경험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은, 우리에게 가짜 지금이 갖는 공허함과 대비를 통하여 진짜 지금이 갖는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줍니다. 망상 속에서 사는 이런 능력이 없다면 현실 속에서 사는 것에 관한 논의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비현실을 경험할 수 없다면 현실의 경험을 구별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망상을 창조하는 이유입니다. 망상이 결국 우리를 현실의 전문가로 만들어 줍니다....
현재 순간으로 향할 때 일어나는 일 한 가지는 희망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삶이 진실을 드러내어 밝힐 때 삶은 우리의 희망 또한 소멸시킵니다....그것들은 설령 실현되더라도 결국에는 산산이 흩어질 것이며, 당신은 자신의 꿈이 답이 아니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당신의 희망과 소원과 꿈의 진실은 그것들이 당신을 어디에도 데려다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429~431쪽-
우리는 자신의 꿈과 희망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받는 약간의 보상에 목말라하면서 악전고투를 벌입니다. 희망하기의 적나라한 현실은 그것이 대부분 끔찍한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희망하는 것을 얻으면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처럼요. 우리는 전체 진실을 보지 않습니다. 전체 진실은 무엇일까요? 모든 것은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왔다가 가버린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거짓은 우리의 꿈이 실현되기만 하면 삶이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삶 속의 모든 것에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합니다....
세번째 거짓은 희망하기, 꿈꾸기, 소원하기가 우리를 더 적극적이고 생산적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소극적이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삶은 우리의 희망이나 꿈과는 아무 상관없이 일어납니다......
가장 큰 거짓은 우리의 희망이 실현되면 우리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희망, 꿈, 욕망을 실제로 먹어보면 우리는 그것들이 만족스럽지 않거나 만족스럽더라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희망하기와 욕망하기는 아무리 해도 채워질 수 없는 허기와도 같습니다....우리는 그것을 충족시키려고 애쓰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실재로부터 더 멀어지게 됩니다. 실재하는 것만이 우리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중독에 대한 설명입니다. -431~433쪽-
희망에 그렇게 중독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참으로 기이하게도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에 이르는 길이니까요. 라마나 마하리쉬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좋은 꿈에서 깨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를 깨어나게 하는 것은 나쁜 꿈이다." 때로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희망과 꿈에 가진 것을 다 걸어보고 그것들이 여전히 자신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 말고는, 달리 우리의 희망과 꿈의 진실을 발견할 길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희망하기의 경험을 깨어서 지켜보면 당신이 희망하고 있는 것은 실재하는 것, 여기에 있는 것,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발견은 희망을 녹여 없애버립니다. 왜냐하면 뭔가가 거의 진실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면 우리는 그것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버리니까요.....
당신이 갖고 있는 희망 한 가지를 깨어 살펴보아서 그것이 실재하지 않음을 알아차리면 희망의 단맛은 단번에 빠져나가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당신을 희망으로 몰아가지 못합니다. 희망은 공허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자신이 가진 희망의 진실을 보게 되면 당신은 더 이상 스스로를 기만할 수 없게 됩니다....
모든 희망을 놓아버리는데는 흔히 엄청난 저항이 따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것들 없이 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미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우리는 때로 희망을 절망으로 대체시키곤 하는데, 절망이란 사실 "부정적인 희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절망은 멋진 어떤 것을 희망하는 대신 끔찍한 어떤 것을 희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장차 끔찍한 뭔가가 일어날 것이라고 환상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대부분에게 희망없이 존재하는 경험은 곧 절망의 경험입니다.
-432~435쪽-
희망과 마찬가지로 절망은 미래를 관리하기 위한 또 다른 전략에 지나지 않습니다.
좋은 소식은 일어나는 모든 것에 깨어 있음이 우리의 희망뿐만 아니라 절망 또한 해체시킨다는 것입니다.... 이 순간을 더 나은 순간을 위한 희망으로도, 더 나쁜 순간에 대한 두려움으로도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저 희망의 부재와 절망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공'의 체험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내용물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많은 희망이나 두려움으로 채워져 있는지 알아차립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과 절망이 진실성도 현실성도 타당성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들에 그렇게도 많은 주의와 관심을 쏟아왔기 때문에, 희망과 두려움에 흥미를 잃게 되면 삶은 처음에는 텅 비어버린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제 뭘 어째야 할까요?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남아 있는 것은 바로 현실, 항상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현실입니다. 이제 모든 고투와 불만족은 사라지고, 나타나는 것은 완전히 만족스럽습니다.
마침내 '공' 가운데 머물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희망과 절망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게 되고, 우리가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지금"에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존재합니다. 삶은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고 펼쳐져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희망과 욕망은 그것과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435~436쪽-
전체 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랑은 항상 현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많은 부분이 사랑은 한정되어 있다는, 여기에서는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은 명백히 사랑의 전정한 본질에 대한 오해입니다. 사랑은 사실 다른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현존합니다. 사랑은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의식하고 허용하기에 무엇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현존합니다. 사랑은 너무나 완전해서 모든 것을, 심지어 고통스러운 감정이나 부정적인 생각마저도 허용합니다.
이런 진실을 깨달으면 모든 고투, 모든 애씀이 끝나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고통이 끝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이 존재할 상황을 조성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항상 여기에 존재해왔던 그 허용의 공간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사랑은 이미 여기에 있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만사를 있는 그대로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무엇이 오고 무엇이 가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어떤 것이 들어올 수도 있고 나갈 수도 있지만 그 공간은 여전히 거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왔다가 가버리는 어떤 것으로 커진 적도 없고, 줄어든 적도 없습니다. -439~440쪽-
다른 사람의 사랑을 얻는 것을 통해 당신이 진정으로 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바로 공간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완벽한 연인이란 당신의 됨됨이가 어떠하든 당신의 존재를 허용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기분이 좋으면 완벽한 연인은 그것을 허용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완벽한 연인, 완전한 사랑은 지금 여기에 이미 존재합니다. 그것은 이미 모든 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성장시켜주는 것은 이 사랑을 알아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일어나도록 끝없이 공간을 내주는 이 사랑을 말입니다. 그러한 허용, 그러한 받아들임은 우리 '존재'의 본질입니다. 그것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우리는 이 끝없는 사랑을 경험합니다.
진실은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말입니다. 너무나 간단합니다. 우리는 완전함을 구하려고 찾아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습니다.그것은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이 순간 어떤 것도 길을 잃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합니다. 이 완전함은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같은 상태로 머무는 법이 없습니다....
매 순간 새로운 완전함으로 스스로를 개혁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아주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이 완전함을 계속 인식하기가 왜 그토록 힘든 도전일 수 있는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순간의 완전함을 마침내 보더라도 다시 그것을 보면 모든 것이 이미 변해 있고, 그래서 그것은 더 이상 예전처럼 완전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완전함은 완전함에 대한 우리의 관념보다 훨씬 더 제멋대로고 터무니없습니다. 완전함은 우리가 완전함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는 온갖 방향으로 튀어 나가기 일쑤입니다. -442~443쪽-
우리는 만사의 완전함을 알아차리려면 확대된 의식상태가 되어야 하며, 오직 그 지점에서만 깨달음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 확대된 의식 상태를 추구하느라 바쁩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 상태 역시 왔다가 가버리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완전함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상태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확대된 상태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노력은 어김없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아주 단순한 순간들에도, 심지어는 의식이 축소된 순간에도 경험할 수 있는 완전함을 경험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한 상태 속에 머물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면 당신은 완전함이 모든 상태에, 모든 경험 안에 내재해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완전함이 '전체'안에 내재해 있다면 그 '전체'의 모든 부분에도 적용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어나는 모든 것에서, 모든 상태에서 완전함을 깨닫는 것이 가능하다면 어떻습니까? 정말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경험이 이런 완전함의 양상들이라면 왜 우리가 그 모두를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왜 그 가운데 어떤 것은 배제하려 들겠습니까? 나타나는 모든 경험은, 심지어는 완전함의 길에서 벗어날 때라도 완전함으로서 경험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확대의 경험과 축소의 경험 모두를 신성함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경험은 완전함에 물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완전함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합니다.
이 완전함을 인식하는 일은 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함은 매 순간 완벽하게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완전함을 인식하는 것은 확대된 상태를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경이로움을 길러주는 일입니다.경이로움과 호기심으로 모든 것과 기꺼이 만나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이라 불리는 이 생생하고 기이하고 신비한 것의 곳곳에 배어 있는 완전함의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완전함은 삶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담아낼 수 있는 어떤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합니다. 우리가 삶이라 불리는 이것을 아무리 많이 경험한다 할지라도, 삶은 항상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당신은 거듭거듭 되풀이해서 기꺼이 놀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444~4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