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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어두움이 맺혀 색이 되고 색이 망상과 썪여 몸이 된다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0.23|조회수114 목록 댓글 1

* 어두움이 맺혀 색이 되고 색이 망상과 썪여 몸이 된다


[본문]

진여(眞如)에
어두운[無明] 까닭에
회매(晦昧, 어두움)한 것이며,

이 회매로 인하여
꽉 막히어
완공(頑空)이 되고,

이렇게
막히고 어두운 가운데
[空晦暗中]

○ '어두움'이 맺히어
'색'(色)이 되고,

○ '색'이
'망상'과 섞여서

○ 생각[想]과 형상[相]을 지닌
'몸'이
되었거늘,

대상에 끌려감[緣]을 쌓아
안으로 흔들리고
밖으로 치달려서

어둡고
번거로운[昏擾擾] 모습으로

자기의 심성(心性)을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한 번 미혹하여
마음이라 하고,

거기에 집착하여
이제는

이 마음이
색신(色身, 몸)의 속에 있다고
착각하여

이 몸과 밖에 있는
산과 강 그리고 허공과 대지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다
묘하게 밝은 참마음[妙明眞心]에서
비추어진

하나의 현상[物]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맑고 청정한 백천의 큰 바다는
버리고,

오직 하나의 거품을
오인하여

그것으로
바다 전체라 하면서
바다를 다 알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에
그대들을 미혹한 가운데
다시 배[倍]나 더
미혹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니

앞에서 내가 손을 드리워서
이야기했던 것과 다름이 없으며,
그래서 여래는

그대들을
‘가엾은 사람이다’고
하는 것이다.”


[晦昧爲空하고 空晦暗中結暗爲色하야 色離妄想하야 想相爲身거늘 聚緣內搖하고
趣外奔逸하야 昏擾擾相以爲心性이니 一迷爲心에 決定惑爲色身之內하야 不知
色身과 外泊山河와 虛空大地히 咸是妙明眞心中物하니 譬如澄淸百千大海棄之
하고 唯認一浮漚體하야 目爲全潮하야 窮盡瀛渤인달하야 汝等卽是中倍人이니
如我垂手로 等無差別하며 如來說爲可憐愍者니라 ]


[해설]

<진여(眞如)에
어두운[無明] 까닭에
회매(晦昧, 어두움)한 것이며,

이 회매로 인하여
꽉 막히어
완공(頑空)이 되고,

이렇게
막히고 어두운 가운데
[空晦暗中]

어두움이 맺히어
색(色)이 되고,

색이
망상과 섞여서

생각[想]과 형상[相]을 지닌
몸이
되었거늘,

대상에 끌려감[緣]을 쌓아
안으로 흔들리고
밖으로 치달려서

어둡고 번거로운[昏擾擾] 모습으로
자기의 심성(心性)을 삼고 있는 것이다>
에서

진여는 밝음인데,
그 진여의 밝음 가운데서,

그것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밝음이 없어진 것이
무명(無明)입니다.

그래서 그 무명속에 있어서
어둡다는 것이
회매(晦昧)라고 합니다.

이 회매라는 것이
깨달음(悟) 중의
미혹(迷)이라는 것입니다.

이 <회매가 空이 되었다>는
것은

원래
본성자리 입장에서 보면
虛空이 없는데,

晦昧했기 때문에
<캄캄한 것이 허공이 되었다>
는 것입니다.


허공은
본래가 캄캄한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가 처음 생길 때에
허공이 먼저 생겼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세계가 생기는 과정은
제4권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이렇게
막히고 어두운 가운데
[空晦暗中]

어두움이 맺히어 색(色)이 되고>
에서

空은 캄캄한 虛空이고
晦昧란 無明이며,

우리의 본성자리는
<밝은 妙有>인데,

그것이 明이 없어져서
晦昧했으니깐

없어진 그것이
無明입니다.

어두운 것이 맺힌다는 것은
結晶이 되는데,

<어두운 것이 똘똘 뭉치면 물질이 되는 것>
이죠.

그래서 물질은
전부 어두운 것이며,
色은
물질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空은 虛空이고,
晦昧는 無明이며,

그 둘 가운데
<無明>이
차차 굳어져 가지고

<물질>이
처음 생기는 것입니다.

그 물질을 불교에서는
四大라 하고,
과학에서는 元素라 합니다.

四大란
地大, 水大, 火大, 風大의
넷을 말하는 것으로

이 세상 온갖 유형물은
다 사대로 되어 있습니다.

<色이 忘想과 섞여서

생각[想]과 형상[相]을 지닌
몸이 되었거늘> 에서

色은
물질이며,

망상은
회매(晦昧)한 것,

즉 지금 우리의
분별심,
생각입니다.

우리 중생은
망상 이외의 것은
경험해 보지 못했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망상입니다.

色은
육신이요,

妄想은
우리의 마음이니까,

色과 忘想이 섞인
그것이
想과 相입니다.

앞의 想은 생각想자니까
妄想을 가리키고,

뒤의 相은 모양相자니깐
色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육신의 모양은
相,
만물을 생각하는 것은
妄想,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몸이라고 합니다.

그게 아닌데,
그 이외의 몸은
우리가 모르고 있습니다.

<대상에 끌려감[緣]을 쌓아
안으로 흔들리고> 에서

緣이란
'정신상태'라든지 '뜻'이라든지
우리의 '망상'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구분입니다.

흔히
'魂'이라고 하기도 하고,
'넋'이라고 하기도 하고,
'정신'이라고 하기도 하여

우리의 '마음'을 말하는데,
그것을
여기서는 연(緣)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연(緣)이 한데 모여,
마음 안에서 흔들린다는 말입니다. 

흔들린다는 것은
곧 망(妄)이라는 것입니다.

妄이란 動하는 것이고,
眞이란 動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에
객진번뇌(客塵煩惱)를 말할 때에

손님은
왔다가는 것이고,
주인은
그냥 머물러있다 했으니,

허공은 가만히 있는데
티끌이 흔들린다고 했듯이,

흔들리고 動하는 것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안으로 흔들린다는 것은
아직 우리의 생각이
밖의 환경에 접촉하지 않고,

그냥  몸안에서만
마음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밖으로 치달려서
어둡고 번거로운[昏擾擾] 모습으로
자기의 심성(心性)을 삼고 있는 것이다.>
에서

내면에 있던 마음이
눈으로 나와서 보고,
귀로 나와서 듣는 등,

이렇게 밖으로 나오면
어둡고 흔들리면서

'묘하게 밝은 마음'이
'물질화'되어 나타나고,

마음이 
'분별심'으로 되어 나온 것이

바로 우주 전체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주전체가 
참마음의 자리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본래 우주가
우리의 참마음 자리에서
나왔는데

그것을 모르고,
우리 몸 가운데 있어서

생각하고 보고 듣는
이것(분별망상심)을
마음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며,
부처님이 손을 내렸을 때에
거꾸로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한 번 미혹하여
마음이라 하고,
거기에 집착하여

이제는 이 마음이
색신(色身)의 속에 있다고
착각하여

이 몸과 밖에 있는
산과 강 그리고 허공과 대지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다
묘하게 밝은 참마음[妙明眞心]에서
비추어진

하나의 현상[物]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에서

본래 내 몸만이 아니라
우주전체가
내 마음으로부터 나왔으니까,

그것이 모두
마음 속에 있는데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주 가운데

조그마한 일부분,
다섯 자도 못되는
우리 몸,

이 속 안에 있어서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을,

이것을 가지고
마음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팔 자체는
거꾸로 바로가 없는 것을
알지 못하고,

즉 전체를 모르고,
내리면 거꾸로 라고 생각하여
잘못 아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맑고 청정한 백천의 큰 바다는
버리고,

오직 하나의 거품을 오인하여
그것으로 바다 전체라 하면서
바다를 다 알았다’고
하는 것과 같다.>에서

백천대해는
우리의
'진심자리'를 가리키는 것이고,

조그만 물거품은
'우리의 육신'을 비유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물거품 하나를 바다 전체로
잘못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망상의 마음이
몸 속에 있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망심'을 가지고
온갖 우주를 통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그대들을 미혹한 가운데

다시 배[倍]나 더
미혹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니

앞에서 내가 손을 드리워서
이야기했던 것과 다름이 없으며,

그래서 여래는 그대들을
‘가엾은 사람이다’고 하는 것이다> 에서,

여기서 배(倍)자는
우리의 마음에 대하여
본 참마음 자리는 모르고,

1. 작은 망상심,
이것을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한 번 잘못 본 것이고,

2. 또 내 마음이
우주 전체를
다 포함했다고 하는,

즉 물거품 하나가
큰 바다 전부를
포함했다고 하는

그것이
두번 잘못  본 것입니다.

전에 팔에 대해서
일배첨시(一倍瞻視)한다고 했던
그 부분이
여기와서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거울 속에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
거울의 본체입니다,

우리의 본 진심자리는
이 맑디 맑은 거울과 같습니다.

그런데 거울은
어디갖다 놓든지
영상이 비칩니다.

곧 그 앞에 있는
그림자가 비칩니다.

물건의 그림자를
안비추는 거울은 없습니다.

마음으로는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거울 가운데
형상이 비치는 것은

앞에 있는 것의
'그림자'가 비추는 것이니

거울의 본 바탕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림자가 비추는 것은
우리의 '망상'입니다.

지금 우리가
좋다, 나쁘다 분별을 내는
그 마음입니다.

본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좋다, 나쁘다의
차별이 없는 것인데,

우리의 본심자리를
迷해서
그릇 내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이

마치 거울에
영상이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마치 거울이 없어면
영상이 비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참마음 자체에
영상이 비치는 것을,
그 영상을
참마음인 줄 알면,

지금의 허망한 망상심이
본심을
떠나있지 않다는 것을
알겁니다.

대개의 경우
거울 가운데 있는 영상을 없애 버려야
참 거울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슨 방법으로
거울 가운데 있는
영상을 없애 버릴 수 있겠어요.

없애버리지 못합니다.

만약 거울을 거울끼리 맞대어
그림자를 안 비추게 할지라도

우리는 보지 못하지만
거울과 거울은
서로 비춥니다.

우리의 망상심에서
'망상을 떼놓고'
불성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망상만 없어지면'
불성이요,

그걸 말해서
중생이
이대로 부처라고 합니다.

迷하면
중생이요,

깨달으면
부처라고 하는 말이,

이 마음 떼버리고
새 마음
취하는 것이 아니며,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이
분별인데,

거울 가운데
사람을 비춘다든지,
꽃을 비춘다든지
그것만 인정합니다.

결론적으로
거울 가운데 있는 '영상인 줄만 알면'
'아는 그때'가 부처입니다.

그걸 모르니
부처님이 여기서
가련하고 연민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ㅡ 능엄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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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2.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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