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깨달음을 판단 검증하는 열 가지 질문
남회근 선생 강술
사람들마다 걸핏하면 깨달음에 대해 담론하는데,
소위 깨달음이란 궁극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가장 평이하고 실제적인 설명으로는 바로 영명연수(永明延壽) 선사가 종경록(宗經錄)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선종의 견지· 수증· 행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송나라 때 대 저작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사마광의 자치통감(自治通鑑)이오 하나는 영명수선사의 종경록입니다. 이 두 대작은 거의 동시대에 나왔습니다.
애석하게도 세속 학문을 말하는 자치통감은 후세에 전해지면서 연구자들이 많았습니다만, 종경록은 거의 휴지통에 내던져진 신세였다가, 청조에 와서야 옹정황제가 제기하여 이 책을 연구하라고 특별히 강조하는 명령을 여러 번이나 내렸습니다.
종경록은 진정한 깨달음이란 어떤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책에서는 열 가지 물음을 제기하는데, 도를 깨달은 사람은
경전에 통달하지 않는 자가 없어서, 모든 불경의 교리를 바라보자마자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마치 소설을 보듯이 보자마자 이해하니 깊게 연구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영명연수 선사의 종경록 1권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식 견해에 굳게 집착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를 가로막는 마음을 일으키고, 다른 배움의 길을 끊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그들을 위하여 이제 열 가지 물음으로 기준원칙[紀綱]을 정한다.
첫째, 자기의 본성을 또렷이 볼 수 있음이 마치 대낮에 색깔을 보듯 명백하고 그 경지가 문수보살 등과 같은가?
둘째, 연(緣)을 만나고 경계를 대함이나, 색상을 보고 소리를 들음이나, 발을 들어올리고 발을 내림이나, 눈을 뜨고 눈을 감음이나 모두 밝은 종지를 얻어서 도와 상응하는가?
셋째, 세존이 한 생에 걸쳐 설한 모든 가르침[一代時敎]과, 위로부터 내려오는 조사의 언구(言句)를 열람하고, 그 심오함을 듣고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두 철저히 이해하여 의심이 없을 수 있는가?
넷째, 온갖 질문과 갖가지 힐난에도 네 가지 변재(辯才)를
갖추어 그들의 의심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가?
다섯 째, 언제 어느 곳에서도 지혜의 비춤이 걸림 없어서,
생각 생각마다 원만히 통하고, 한 법도 능히 그 장애가 되는 걸 보지 않으며, 한 찰나 동안이라도 끊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
여섯 째, 일체의 역(逆) 경계와 순(順) 경계, 좋은 경계와
나쁜 경계가 현전할 때, 방해받아 틈이 생기지 않고 다 꿰뚫어 볼 수 있는가?
일곱 째, 백법명문론(百法明文論)에서 말하는 심리 경계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그 미세한 체성(體性)과 그 근원이 일어나는 곳을 살펴보고, 생사와 육근육진[根塵]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는가?
여덟 째,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네 가지 위의(威儀) 중에
가르침을 받들거나 응답하거나, 옷을 입고 밥을 먹거나 동작을 취하는 등 모든 활동가운데에서 하나하나 진실을 변별할 수
있는가?
아홉 째, 부처가 있다고 하든 없다고 하든,
중생이 있다고 하든 없다고 하든, 칭찬을 하든 비방을 하든, 옳다고 하든 그르다고 하든, 이런 말을 듣고서도 한결같은
마음이면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열째, 온갖 차별의 지혜를 들어도 다 밝게 통달할 수 있고,
본성과 현상을 모두 통달하며 이론(理)과 사실(事)에도 걸림이 없어서 한 법이라도 그 근원을 변별하지 못함이 없고, 나아가 천 명의 성인이 세간에 나오더라도 의심이 없을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깨달음에 이르렀는지의 여부는,
위의 열 가지 물음을 그 판단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
명심견성의 경계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일체의 사물에 대해 또렷이 아는 것이, 마치 대낮에 그림의 색깔을 보는 것과 같아서 문수보살 등의 경계와 같아야 하는데,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질문:
‘연을 만나고 경계를 대한다.’ 는 말은 그 포괄 범위가 아주
넓습니다. 당신이 사람을 만나거나 어떤 일에 직면했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면전에서 당신을 방해하거나, 색상을 보거나 소리를 듣더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고,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 밤에 잠을 자면서도 도와 합치할 수 있어야 하는데,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세 번째 질문:
법화경이든 능엄경이든 불교의 경전을 보기만 하면 모두 알 수 있고, 가장 고명한 설법을 들어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철저하게 환이 꿰뚫어 이해할 수 있고 의심이 없어야 하는데,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네 번째 질문:
모든 학자들이 갖가지 학문을 들고 나와 당신에게 질문을 하더라도, 당신은 막힘없는 변재로 해답해줄 수 있습니까?
나머지 여섯 가지 물음은 여러분 자신이 한번 연구해 보기
바랍니다. 마지막 단락은 이렇습니다.
“만약 정말로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절대 분수에 지나고 속이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며, 자부하고 만족하는 뜻을 내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지극한 가르침을 두루 연구하고, 선지식들에게 널리 묻고, 부처와 조사의 자성(自性)의 근원을 궁구하여, ‘배움이 끊어지고 의심이 없는[絶學無疑]’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배움을 쉬고 방황하는 마음을 쉴 수 있다. 그 때는 자신을 다룸에는 선관(禪觀)으로 상응하고, 남을 위함에는 방편을 열어 보일 수 있다. 법계에 두루 나아가지
못하고 뭇 경전을 폭넓게 연구할 수 없다면, 오직 종경록(宗鏡錄)의 내용만 자세히 살펴보아도 자연히 들어갈 수 있다.
종경록은 바로 모든 법의 요체이자 도에 들어가는 문이다.
마치 어머니를 지켜서 자식을 알아보고 근본을 얻어서 지말(枝末)을 아는 것과 같으며, 그물의 벼리줄을 끌어당김에 그물코마다 다 바르고 옷을 끌어당김에 올올이 모두 따라오는 것과 같다.”
만약 이 열 가지 물음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면,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옳다고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의문이 있다면 도처의 선지식에게 가서 가르침을 청하여, 반드시 모든 부처와 조사들의 경계에 도달해야 합니다. 조사들이 깨달은 바를 당신도 다 성취했다면, 비로소 배움이 끊어지고 의문이 없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어서 더 이상 배우지 않아도 좋습니다. “회식유심(灰息游心)”은 망상심이 모두 쉬어버린 겁니다. “자신을 다룸에는 선관(禪觀)으로 상응하고, 남을 위함에는 방편을 열어 보일 수 있다”는 말은, 대철대오한 후에 소승의 길을 걸어가면 다시
사선팔정을 닦아 과위를 증득하고, 육신통을 구족하고, 삼신(三身)을 갖추고, 신통의 묘용을 일체 구족한다는 겁니다.
또 대승의 길을 걸어가면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수지(修持)로써 세속으로 나와 불법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나설 수 있다는 겁니다.
“법계에 두루 나아가지 못하고 뭇 경전을 폭넓게 연구할 수 없다면”, 만약 3장12부의 대장경이 너무 많아서 볼 수 없다면, “오직 이 종경록(宗鏡錄)의 내용만 자세히 살펴보아도 자연히 들어갈 수 있다. 이 종경록은 바로 모든 법의 요체이자 도에
들어가는 문이다.”, 영명연수선사는 자신이 편집한 종경록을 참고하기를 권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경전의 정수를 집약하여 이 책에 담았기 때문이란 겁니다. “마치 어머니를 지켜서 자식을 알아보고 근본을 얻어서 지말(枝末)을 아는 것과 같으며, 그물의 벼리줄을 끌어당김에 그물코마다 다 바르고 옷을 끌어당김에 올올이 모두 따라오는 것과 같다.”, 이 구절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구절은 영명연수 선사가 이 책의 중요성을 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