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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산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 라마 크리슈나 어록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0.26|조회수151 목록 댓글 1

 

<산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 
  
-라마 크리슈나 어록-
 
 
인간이여, 그대 무지의 대낮에 신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해서 신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그의 생각과 동기에 의해서 적절한 보상을 받는 다. 모든 사람은 그가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신으로부터 공급 받는다. 가난한 사람의 아들이 열심히 공부한 결과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말한다. '이제 나는 행복하다. 나는 원하던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제 충분하다.' 그러나 그에게 신은 이렇게 말한다. '그 상태에서 그대로 머물려 하는가?' 나이가 들어 그가 과거를 돌아볼 때에서야 그는 자신이 인생을 쓸모 없이 써버렸다는 것을 느낀다. 그에게 신은 말했다. '그대여 이 세상에서 무엇을 했는가?'
 
인간은 다음 두 가지 취향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첫째 비드야-자유를 추구하는 경향, 둘째 아비드야-세속적인 것, 구속 쪽으로 이끌리는 경향.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마음이 이 세상을 택하게 되면 아비드야의 접시가 무겁게 되어 지상 쪽으로 추락한다. 그러나 만일 마음이 영혼 쪽을 택하게 되면 비드야의 접시가 신 쪽으로 상승한다.
 
하나를 알아라. 그러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숫자 뒤에 놓인 0은 백 개나 천 개가 되어도 1을 빼버리면 그 0들은 아무 가치도 없게 된다. 수많은 0들은 1이 있을 때에만 가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하나'이다. 첫 번째는 신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사람과 이 세상이다.
 
첫 번째로 신을 자각하라. 그 다음 물질이다. 이와 반대로 시도하지는 말아라. 영적인 자각이 있는 후에 세속적인 삶으로 내려가라. 그러면 너는 결코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으리라.
 
사회개혁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러면 사회개혁을 위한 첫 번째 조건으로써 우린 신을 자각해야 한다. 기억하라. 옛 구도자들은 신을 자각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등지었다. 이것이 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나머지 것들은 네가 정말로 필요로 할 때 너에게 공급될 것이다. 첫 번째로 신을 자각하여라. 그 다음 체제에 대해서, 사회개혁에 대해서 이야기하여라.
 
신속에서 영원한 휴식처를 찾은 후에야 이 세상의 첫 방문자인 너는 두려움 없이 일상적인 일들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둠, 곧 그 무서운 밤이 너를 덮칠 때 너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큰 곡식 창고의 문 앞에는 쥐를 잡기 위하여 식은 밥덩이를 넣은 쥐덫이 놓여있다. 식은 밥덩이에 매혹된 쥐는 창고 속에 더 많고 맛있는 곡물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덫에 걸리고 만다. 네 영혼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 즐거움의 그 몇 백 배나 더한 신성의 축복 앞에 서려는 찰나 그 축복 속으로 다가가려는 노력 대신 너는 조그마한 세속적 쾌락에 유혹 당하고 만다. 마야, 즉 환영의 덫에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정말로 위대한 것은 신에 대한 헌신이다. 그들에게 이 헌신의 마음이 있다면 좋다. 그들의 목적이 신의 자각에 있다면 옳다. 그러나 기억하라. 다른 천체의 별이나 해와 달 등의 이 하찮은 일에 열중하는 것은 진정으로 신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의 발 밑에 복종하기 위하여 우리는 영적인 명상 수련을 해야 한다.
 
신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으로 우리 가슴은 울어야 한다. 마음은 오직 신을 향해서 집중되어야 한다. 그는 어떤 경전이나 언어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슴이 그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은 헌신과 숭배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어린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정신 없이 놀다가도 엄마가 돌아오면 놀던 장난감을 집어 던지고 엄마에게 달려간다. 너도 이와 같다. 오, 인간이여, 이 물질의 세상에서 철없이 놀고 있는 인간이여, 너는 지금 아무 두려움도 없이 부귀 명예 따위의 장난감에 팔려 아주 재미있어 하고 있다.  그러나 일단 저 영원한 어머니(神)를 자각하게 되면 이 모든 장난감에서 더 이상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장난감들을 내 던지고 저 영원한 어머니에게로 달려갈 것이다.
 
바닷속에는 진주가 있다. 그러나 진주를 구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릎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단 한번 자맥질을 해보고 진주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진주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몇 번이고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진주를 얻게 될 것이다. 신을 찾는 일도 이와 같다. 첫 번의 시도가 실패했다고 하여 신을 향한 그 가슴의 불을 끄지 말라. 절망하지 않고 끊임 없이 시도하다 보면 너는 언젠가 신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몸이라고 하는 이 사원을 어둡게 하지 말라. 이 사원 각방마다 지혜의 불이 켜져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영원한 어머니를 보아야 한다.
 
지바(개별영혼)는 신에게 붙지 않으면 아무 가치도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과 그 가치는 그것들이 모두 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지바가 신과 연결되어 있는 동안은 우리가 하는 일이 모두 신을 위한 일이 될 때, 우리는 더욱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신이 없으면 인간은 단 1초도 살 수 없다.
 
신은 자석과 같다. 그러나 쇠가 진흙에 묻혀있으면 자석의 인력이 미칠 수 없듯이 인간도 마야의 진흙에 묻혀있는 영혼은 신의 인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쇠에 묻은 진흙을 씻겨내면 자석에 이끌리듯이 끊임없는 참회의 눈물과 기도로 영혼에 묻은 마야의 진흙을 씻어내게 되면 너는 머지않아 신의 인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얽매여 있는 영혼은 인간이다. 그러나 그 마야의 밧줄로부터 풀려날 때 그 영혼은 신이다.
 
평범한 영혼과 뛰어난 영혼은 하나이며 같다. 이 양자 사이의 차이는 오직 겉모양뿐이다. 한쪽이 영원한 데 비하여 다른 한쪽은 제한되어 있다. 한쪽은 독립적인 데 비하여 다른 한쪽은 의존적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마음, 지성, 감각이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신의 힘 때문이다. 브라흐만의 힘이 그 활동을 정지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 지성, 감각도 따라 멈추어 버린다.
 
 
인간의 본질은 저 영원한 축복이다. 그러나 자아 때문에 인간은 수많은 세속적인 것들의 제약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마침내 그 자신의 본질마저 망각해버린다.
 
뱀이 허물을 벗어나듯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된다.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영혼의 자유를 얻으려고 생각지도 않는 반면, 어떤 사람은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고, 어떤 사람은 이미 자유를 쟁취하였다.
 
예쁜 사람도 있고 미운 사람도 있으며, 성스러운 사람도 있고 나약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속에는 성스러운 존재가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의 육체는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가슴의 순수성에 따라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게 된다.
 
인간은 결국 신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그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람의 마지막 순간에 마음 속에서 신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에게 헌신하는 방법을 꾸준히 수련해야 한다. 이런 수련을 평소에 꾸준히 하게 되면 신에 대한 생각이 그 마지막 순간에 가슴속에서 솟을 것이다.
 
인간의 다음 생의 탄생은 그가 죽기 직전에 무엇을 생각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기도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꾸준히 기도 생활을 하게 되면 세속적인 모든 생활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그의 마음은 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찰 것이며, 그의 주변도 이 영적 파장으로 진동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영적 파장은 죽음의 그 순간조차도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듯이 마야가 신을 가리고 있다. 신을 보고 싶으면 네 눈으로부터 이 마야의 장막을 거두어내라.
 
브라흐만을 알게 하는 것은 마야다. 마야가 없다면 누가 브라흐만을 알려주겠는가. 신의 구체화 된 마야를 알지 못하고는 신을 알 수 없다.
 
세속적인 것에 빠져있는 인간은 '황금'과 '여인'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런 것들이 그들에게 수천 번의 굴욕감을 가져다 주면 그때 그의 마음은 비로소 신을 향하게 된다.
 
기름을 넣은 가죽 포대를 본 일이 있는가. 안의 기름을 다 쏟아내도 아직 기름냄새가 난다. 너도 이와 같다. 네 가슴속에는 아직 세속적인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이 세속적인 냄새가 완전히 사라져야 신이 깃들 것이다.
 
신을 체험하려는 사람, 헌신적인 영적 수련을 향상시키려는 사람은 특히 욕망과 부의 올가미로부터 그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성취의 기쁨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이 신으로부터 멀어지면 '황금'과 '여인'의 압력이 거기 놓이게 된다.
 
물이 담긴 항아리의 밑바닥에 조그마한 구멍이라도 나게 되면 물 전체가 그 구멍으로 빠져나간다. 구도자의 마음 속에 조그마한 세속적인 냄새가 남게 되면 그로 인하여 그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성욕을 완전히 지배하도록 하라. 이에 성공한다면 생리학적인 변화가 올 것이다. 메드하라는 신경조직(낮은 차원의 에너지를 높은 차원의 에너지로 변환 시켜 주는 기능을 하는 기관)이 계발될 것이다. 자아의 높은 차원은 이 메드하 신경이 계발된 이후에 얻어진다.
 
마음이 감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그 마음은 신에게 향한다. 신을 향해서 집중된다. 구속된 영혼은 이제 자유롭게 된다. 그러나 신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되면 그 영혼은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마음에서 재색에 대한 애착이 뿌리 뽑히게 되면 여기 무엇이 남아 있는가. 오직 브라흐만의 축복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집안에 독사가 살고 있으면 경계를 해야 하듯,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탐욕과 욕망의 유혹을 경계해야만 한다.
 
'여인'과 '황금'은 이 세상 전체를 죄의 수렁으로 빠지게 한다. 그러나 '여인' 속에서 어머니 신에 대한 속성을 발견하는 순간 '여인'은 사라진다.
 
자아가 뿌리 뽑히지 않는 한 인간은 구제 받을 수 없다. 자아가 버티고 있는 동안은 영혼의 각성도 해탈도 불가능하다. 여기에 탄생과 죽음의 악순환은 그치지 않는다.
 
그대의 '나'가 사라져버리고 그대 자신이 신 속에 흡수될 때에 거기 자유가 있게 된다.
 
진정한 구도자는 이렇게 말한다. '신이여, 당신은 내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입니다. 나는 당신 손에 쥐어진 한갓 악기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시키는 것이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오직 당신의 명령에 따를 의무만이 있을 뿐입니다."
 
명예와 인기를 찾는 사람은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모든 것이 신에게서 온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다. 현명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신이여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내가 했다. 이것은 순전히 내 힘으로 해냈다."
 
여기 두 종류의 자아가 있다. '익은 자아'와 '덜 익은 자아'가 그것이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보는 것, 느끼는 것, 듣는 것, 아니 이 육신조차도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언제나 영원하다. 나는 자유로우며 지혜의 원천이다." 이런 생각은 익은 에고로부터 나온다. "이 것은 내 집이다. 이 아이는 내 아들이다. 이 여자는 내 아내다. 이 것은 내 몸이다." 이런 생각은 덜 익은 자아의 발작이다.
 
<나>라는 말을 잘 관찰하라. 이는 자아의 과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아를 뽑아 내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라. "나를 억눌러라. 그리고 신의 종으로 남아라." "나는 신의 종이다. 나는 신을 신봉하는 자이다." 이런 생각에 바탕을 둔 자아는 그렇게 해롭지 않다.
 
신을 체험한 사람만이 홀로 이 마야의 바다를 건너간다. "신만이 진정한 지배자다. 신과 연결되지 않고는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육체의 차원에서도 오히려 자유롭게 될 것이다.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이야기 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을 행하기는 어렵다.
 
신 앞에서 지성, 지식 등은 아무 쓸모가 없다. 거기 벙어리가 말하고, 눈먼 자가 보고, 귀머거리가 듣는다.
 
빈 그릇은 소리가 난다. 그러나 물이 차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신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 본질에 대한 무익한 논쟁으로 차 있다. 그러나 일단 신을 체험하게 되면 말없이 신의 은총에 젖어있다.
 
초보자인 경우 구도자는 수행의 티를 낸다. 그러나 신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구도자의 티를 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을 체험하게 되면 그는 가장 평범한 사람이 된다.
 
조금 알 경우, 인간은 여기 저기 뛰어 다니며 그 아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완전히 알게 되면 그는 더 이상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경전들은 오직 신의 길을 가르쳐줄 뿐이다. 일단 그 방법을 알았다면 책이 더 이상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 다음은 저 철저한 고독 속에서 신과 대화를 해야할 시간이다.
 
오직 다음의 두 종류의 사람들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첫째, 자기가 배운 모든 지식에 방해받지 않는 사람, 둘째, 이 모든 경전과 과학을 공부한 후에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진실한 구도자는 절실하게 신을 갈망하면 신이 모든 것을 도와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때 잘못된 길을 갔던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가 원하는 것을 신은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바램을 틀림없이 이루어 주신다.
 
지식인들은 쓸데없이 창조의 비밀을 밝히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들은 과일을 따먹기 전에 나무와 잎사귀의 숫자까지 알고 먹으려는 자와 같다. 현명하고 겸손한 자는 창조주와 직접 친구가 되어 모든 축복을 누리고 있다.
 
, 그대 성직자여, 신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았는가? 우선 먼저 신성의 영감과 위임장을 받아라. 신의 영감인 이 위임장을 받지 못하면 비록 일생을 남을 가르치는 데 소비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단순히 그대 호흡의 낭비밖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신의 사랑 속으로 깊이 침잠하고자 열망하는 사람, 그것을 위해서 인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속적인 일들과 신을 체험하기 위한 그 명상과 기도를 구별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개의 사람들은 겨우 책이나 몇 권 읽고는 남을 가르친답시고 동으로 서로 뛰어 다닌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인데 말이다. 진정으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신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은 사람, 신을 깨달은 사람, 오직 그만이 남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
 
저 유창한 설교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지만 그는 아직 영적인 힘이 계발되지 않았다. 그는 남이 맡긴 재산을 함부로 쓰는 사람과 같다. 그는 쉽게 다른 사람을 충고한다. 그러나 그 자신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차용해 온 것은 아무리 가르쳐보아야 별 가치가 없다.
 
요즈음의 종교지도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조그만 영적 체험을 하고는 아주 위대한 스승인 체 하고 있다.
 
우선 첫째로 그대 가슴의 사원에 신을 모셔라. 첫째 신을 깨달아야 한다. 강연 강론 등은 신을 깨달은 후에 하라. 사람들은 세속적인 것들에 집착하고 있으면서 아주 유창하게 브라흐만에 대해서 말을 한다.
 
영혼의 잠을 깨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제하려고 할 때는 둘 다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법력의 힘이 없는 사람 밑에서는 결코 혼의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사람이 순수하고 완전하게 되면 그의 따스함이 사방에 퍼져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자연히 그에게 모여든다. 그러므로 굳이 청중들을 붙들고 외쳐댈 필요가 없다.
 
신을 명상하는 마음이 세속적인 거친 생각으로 부패되어 있다면 이 부서진 도구로 어떻게 진리를 찾을 수 있겠는가.
 
젖은 성냥을 아무리 그어봐도 쉽사리 불이 붙지 않는다. 그러나 마른 성냥은 살짝만 그어도 이내 불이 붙는다. 진실한 구도자의 가슴은 마른 성냥과 같다. 신의 이름을 가볍게만 불러도 그의 가슴엔 헌신의 불이 붙는다. 그러나 세속적인 사람의 가슴은, 부에 집착하고 욕망의 물에 젖어 있는 가슴은 젖은 성냥과 같다. 신은 여러 번 사랑의 가르침을 주지만 그 불꽃은 결코 그의 가슴에서 점화되지 않는다.
 
세속적인 사람도 현자와 같은 지성이 있고 수행자 이상의 고통과 노력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이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에너지가 길을 잘못 들어섰기 때문에, 결국 이 모든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때묻은 거울은 햇빛을 반사할 수 없다. 그 영혼이 순수하지 못하고 불결한 사람은, 마야에 현혹되어 있는 사람은 결코 신의 영광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러나 영혼이 순수한 사람은 맑은 거울에 햇빛이 반사되듯 신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이 순수해야 한다.
 
세속적인 사람의 마음은 불순한 생각과 더러운 물이 섞여 아주 혼탕하다. 그는 그 마음을 다시 순수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리를 향한 열정에 불붙기 위해서는 엄격한 규제와 일관성 있는 명상법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속에 얽매여 있는 영혼은 언제나 쓰레기 속에서 살고 있는 구더기와 같다. 그들은 그 속에서 아무런 고통도 괴로움도 없이 그렇게 태어났다가 그렇게 죽는다. 이런 영혼은 혼의 강도가 너무 약하다. 쓰레기 위에 앉았다가 사탕과자 위에 앉는 파리와도 같다. 그러나 자유로운 영혼은 벌과 같다. 벌은 언제나 꿀만 먹을 뿐 그 외의 것은 일체 맛보려고도 않는다.
 
세속적인 사람은 어떠한 충고를 해 줘도, 어떠한 자극을 줘 봐도 결국 그의 현 상황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을 버려라. 신의 길만을 가라.
 
죄악에 가득 찬 길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감각을 무절제하게 혹사하는 사람, 명상을 모르는 사람,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제 아무리 높은 지성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결코 신에게는 이를 수 없다.(우파니샤드)
 
신은 그 자신 속에서 하늘, 땅, 공간,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생명의 에너지로 짜고 있다. 오직 그대 자신의 진실한 영혼만이 그를 알 수 있나니, 부질없는 말장난은 집어치워라. 이것이 불멸의 길이다.(우파니샤드)
 
겨울 하늘을 보라. 수많은 연들이 날고 있다. 그 수많은 연중에서 몇 개의 연만이 끊어져 자유롭게 날아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명상 수련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세속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속적인 애착을 모두 버린 구도자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벽에 가까운 구도의 길을 갈 수 있다. 그러나 세속적인 집착에 그대로 머물게 되면 아무리 훌륭한 구도자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성품에 불완전한 흔적이 남는다.
 
젊은이의 경우 그 가슴은 신을 향해 구부리기가 쉽다. 그러나 늙은 가슴은 신 쪽으로 구부리려 하면 비켜서 버린다. 젊은 때에는 신에 대한 집중이 쉬우나 늙게 되면 신에게 집중시키게 하기가 어렵다.
 
젊은이들은 세속적으로 부패하기 전에 신의 길로 들어가야 한다. 일단 세속적인 욕망이 그들의 가슴에 들어가게 되거나 사탄적인 쾌락이 그들을 뒤덮게 되면 그들을 진리의 길로 이끄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이제 그대는 신을 찾았다. 그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신을 찾는데 소비했다. 신을 찾은 후에 이 세상에 들어가 보라. 이 세상의 즐거움과 평화가 아무리 좋더라도 그 체험에 비길 수 있겠는가?
 
사트바적인 예배, 라자스적인 예배, 타마스적인 예배 이 셋의 차이는 무엇인가? 자만심이나 겉치레가 없이 그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예배를 올리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사트바적인 예배를 하는 사람이다. 예배를 올릴 때, 집을 단장하고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면서 잔치처럼 예배를 의식화하는 사람, 이 사람이 라자스적인 예배를 올리는 사람이다. 많은 양들을 제물로 바치고 고기와 술을 제단에 바치면서 예배를 올릴 동안 노래와 춤에 도취한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타마스적인 예배를 하는 사람이다.
 
부싯돌은 수 백년 동안 물 속에 잠겨 있지만 그러나 원래의 화력은 조금도 잃지 않는다. 언제든지 살짝 치기만 하면 불꽃이 튀긴다. 진실한 신앙인의 믿음도 이와 같다.  비록 에 세상의 온갖 불순한 것들에 싸여 있지만 그러나 그는 결코 믿음을 잃지 않는다. 그는 신의 이름을 듣게 되면 이내 뜨거워진다.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믿음과 헌신이 확고부동한 사람은, 이 모든 갈등과 근심 걱정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또한 그는 많은 사람들을 신에게로 향하게 한다.
 
감각적인 쾌락과 그 유혹은 언제 사라지는가? 축복의 영원한 바다, 신속에서 모든 행복과 기쁨을 성취했을 때이다. 신을 체험한 사람에게는 세속적인 기쁨의 값싼 유혹은 더 이상 없다. 신의 축복을 맞본 사람은 세속적인 기쁨 속에서 더 이상의 행복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설탕과 모래가 섞였어도 개미는 모래는 그대로 두고 설탕만 가져간다. 이와 같은 높은 영적 차원에 있는 구도자와 신앙심 깊은 사람은 나쁜 것들 사이에서도 능히 좋은 것을 가려낸다.
 
구도자는 때때로 슬픔과 좌절, 그리고 불신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든다. 그러나 이는 잠시적인 탈선일 뿐, 그것이 오래가지는 못한다. 구도자는 신의 아들이다. 그의 헌신적인 눈물이야말로 그의 가장 무서운 무기이다.
 
신의 이름만 들어도 그 감동으로 머리칼을 세우는 사람, 진리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눈물이 글썽이는 사람 이런 사람은 이번 생애가 그의 마지막 윤회가 될 것이다.
 
진정한 구도자는 혼자 있을 때조차도 어떤 죄악도 짓지 않는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지만 신이 그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외딴 곳에서 돈 뭉치를 주웠을 때, 갖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는 사람, 그는 진정한 구도자다. 그러나 일반의 눈이 무서워 일종의 전시 효과를 위하여 종교인 되는 사람은 진정한 구도자라 말할 수 없다. 침묵의 종교만이 진정한 종교다. 그러나 그 종교가 자만심과 자랑으로 팽배해지면 그것은 조소와 부끄러움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신을 찾는 사람은 신을 찾는 사람 이외에는 누구와도 교제를 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자신의 신에 대한 체험을 도반들과 함께 나누면서 행복을 느낀다. 법열에 접고 싶다면 첫째, 그대 자신 속에서의 모든 세속적인 욕구를 진정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기도는 삶의 근심 걱정으로 부패하고 부서져버릴 것이다.
 
물론 돈은 필요하다. 그러나 노력한 만큼의 벌이에 만족하라. 그것이 가장 좋은 자세이다. 자신의 삶과 영혼을 신에게 바친 사람, 신속에서 피난처를 찾는 사람은 돈을 잡으려고 버둥거리지 않는다. 그들의 지출은 수입과 정비례한다. 오른손으로 돈이 들어오면 왼손으로 써버린다. 돈은 결코 정체되지 않는다.
 
신을 위해서 일하라, 그러면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을 자연히 얻게 될 것이다. 신은 이 세상에 너를 보내기 전에 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준비해두셨다.
 
여인과 황금의 포기는 수도원 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수도자들은 여자의 사진을 보아서도 안 된다. 유혹 받을 위험이 있는 것은 아예 보지도 듣지도 만나지도 말라. 일반인들은 여자들 속에 살면서도 마음은 거기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신에게로 향해 있어야 한다.
 
이따금 조용한 곳에 홀로 가서, 오직 너 자신만으로 가서, 불타는 심장으로 기도해야 한다. 적어도 3일은 그렇게 해야 하지만 형편이 안될 경우는 하루만이라도 해야 한다. 언제나 기도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너희들은 영적으로 충만하고 힘있는 삶을 살게 되리라.
 
이 세상에 살아라. 그러나 세속적으로는 살지 말아라. 구도자는 이 세상에 살지만 그러나 이 세상이 그의 영혼 속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오직 먹기 위해서만 사는 것은 값있는 삶이 아니다. 언제나 그 마음을 신을 향하게 해야 한다. 한 손으로는 일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신의 발을 잡아라.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될 때가 오거든 그때는 그대의 두 손과 가슴으로 신의 발을 잡아라.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차원에 사는가? 그는 진흙탕 속의 연꽃과 같다. 늪 속에 사는 고기와 같다. 이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에 의해서 전혀 오염되지 않는다. 진흙 물은 연꽃을 적실 수 없고, 갯벌은 고기의 싱싱한 비늘을 더럽힐 수 없다.
 
재가 수행자든 출가 수행자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 마음은 언제나 신을 향하게 하고 집착심이 없이 그대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라. 등에 종기가 난 사람은 무엇을 하거나 신경이 온통 등에 가있다. 신을 향하는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아야 한다.
 
실재가 아닌 것들로부터 실재를 가려내는 능력과 세속적인 것들에 냉정함과 그리고 신을 향한 마음이 열렬하다면 그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안전하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을 향하라. 너 자신을 전부 그에게 맡겨라. 거기 근심과 걱정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때 너는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그의 의지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을 체험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한 재가자가 있었다.  자나카가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 누구나가 갑자기 자나카의 높이까지 상승할 수는 없다. 자나카는 여러 해 동안 이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떠나서 홀로 기도와 명상수련을 했다. 잠시 동안이라도 모든 인간 관계로부터 떠나 홀로 기도와 명상을 한다면 재가 수행자를 위해 아주 좋은 일이다. 신은 마침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오염되지 않고 세속에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나카는 처음부터 얼마나 검소한 생활을 했는가? 나는 그대들에게 자나카와 같은 고행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처음에는 신에 대한 헌신부터 수련하라는 것이다. 때때로 조용한 곳에서 홀로 살아야 한다. 즈나나와 박티를 얻은 후에 이 세상으로 돌아가라.
 
자나카에게는 전혀 집착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비데아(육체가 없는)라는 별명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는 지반묵타(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야에서 벗어난 존재)의 사람을 살았다. 이 육체로부터 그러한 생각을 완전하게 떠나가 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자나카는 이러한 점에서 아주 위대한 영웅이었다. 그는 쌍칼을 쉽게 사용했다. 한 손엔 지혜의 칼과 다른 한 손에는 카르마의 칼을.
 
집착심 없이 이 세상에 살고자 한다면 우선 조용하고 외딴 곳에서 기도와 명상을 하여야 한다. 1년이나 6개월, 또는 한달, 아니 최소한 12일은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소유한 것들은 언젠가는 모두 내게서 떠나게 될 것이다.
 
신만이, 오직 신만이 진정한 나 자신이다. 어떻게 하면 신을 깨달을 수 있는가? 이것만이 그대의 유일한 관심사여야 한다. 첫째, 우주적 자아의 진정한 지혜로써 너 자신을 강화하라. 그런 다음 이 세속적인 것들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라. 그러면 그 어떤 것도 너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침반은 언제나 북쪽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길을 잃지 않는다. 그 가슴이 언제까지나 신을 향해 있는 사람은 이 속세의 바다에서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 신을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세속적인 속박에 구속당하지 않는다. 신의 발아래 있는 사람은 어떤 두려움도 없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욕망과 번뇌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제 그를 매어둘 곳은 아무것도 없다.
 
, 인간이여, 이 속세의 올가미에 걸려든 자여, 너는 축복의 바다에서 헤엄치고자 한다. 그러나 가족들의 귀찮은 간섭에 의해서 방해를 받는다. 그러나 용기를 내라. 여가가 있을 때마다 그 가슴을 다하여 신을 불러라. 신에게 기도하고 너의 슬픔을 말하라. 때가 되면 너는 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서 축복의 바다에서 헤엄치게 될 것이다.
 
유혹의 장소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거든, 저 영원한 어머니를 생각하라. 어머니는 너를 보호해줄 것이다. 네 가슴 깊이 잠복해 있을지도 모르는 악마들로부터 너를 보호해줄 것이다.
 
이 세상과 신,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 이 세상에 살아라. 그러나 언제나 신을 기억하라. 결코 신의 길을 등지지 말라. 세속적인 하면서도 신을 굳게 잡아라. 그러면 그대는 이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어떤 환경에 놓이든지 자신의 마음이 신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라. 세속적인 잡무에 둘러싸여 있을 때도 그 가슴만은 신을 향해야 한다. 손으로는 세속적인 모든 임무를 수행하고 가슴으로는 신을 찬미하는 것을 잊지 말라.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라. 삶 자체가 기도이게 하라.
 
나의 가족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신의 것이다. 나는 신의 하인이다. 신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 이런 생각이 확고해질 때, 여기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에서 모든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 마음은 늘 신에게 향해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구도자다. '고행의 길'을 떠나기 전에 안락한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대는 영적인 성장을 게을리 하지 말라.
 
두뇌가 명석하고 가슴이 깊으며, 이 양자가 잘 균형을 이룬 사람은 참으로 축복 받은 사람이다.  그는 그에게 부여받은 임무가 어떤 것이든 아주 훌륭하게 그 임무를 해낸다. 그는 신을 향한 확고한 믿음과 사랑에 충만해 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과의 교제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가 세속적인 일에 몰두할 때는 철저한 사업가가 된다. 지식인들 모임에서는 박사들 못지 않게 그의 의견을 피력한다. 가족들에게는 자애롭고 겸손하다. 친구들에게는 늘 편안함을 준다. 그의 아내에게는 사랑의 신과 같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완전한 사람이다.
 
인간의 마음은 세속적인 것들을 추구하는데, 그 대부분이 소모된다. 그리고 그 손길은 포기의 삶을 택함으로써 보상받는다.
 
구도자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누구인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등 내일을 전혀 생각지 않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구도자다. 이런 사람의 마음가짐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두려움 없이 나무 꼭대기에서라도 뛰어내리겠다. 이 삶과 육신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구도자는 집착이 없으며 감각을 잘 제어한다. 그러나 여자와 돈을 철저히 거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도자의 철저한 포기를 알아차릴 때, 사람들은 용기를 갖게 된다. 진정한 구도자의 상징은 무엇인가? 욕망과 황금은 철저히 거부해야 한다. 꿈속에서조차 그것들의 오염이 있다면 그의 모든 영적 수행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수행자의 복장을 입은 사람은 진정한 수행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어떤 외부 조건으로 하여 수행자가 된 사람은 마지못한 수행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고행주의는 일시적이다.
 
가슴과 영혼으로 신을 받드는 자가 진정한 수행자다. 여자와 황금을 포기한 사람이 진정한 수행자다. 그는 언제나 신을 생각한다. 그는 이 모든 것들 속에 신이 거주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를 섬긴다. 이것이 진정한 구도자의 특성이다.
 
신의 은총은 영혼과 형상, 모두에게 내려진다. 내적인 감정이나 외적인 상징에 고루 내려진다.
 
진리의 완전성을 체험한 사람은 모든 계급과 차별을 버린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생명의 상호 연결과 조화를 깨닫는다. 그러나 진리의 완전성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우월 의식과 열등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헌신자는 우선 구체적인 신의 형상에 그 생각을 고정시킴으로써 집중력을 키워야 한다. 이 일이 성공한 다음에는 그 마음을 무형에 고정시켜야 한다. 그의 마음을 신의 형상에 집중시켜서 수련하다보면 무형의 영적 공간에로의 집중이 보다 쉬워질 것이다.
 
신의 동상을 왜 단순히 진흙, 나무, 돌로만 생각하는가? 이런 동상들 속에까지 우리 의식의 근원인 어머니, 저 영원한 존재가 현현하고 있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신을 깨달은 사람은 알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 모든 동상들이 신의 영적인 힘의 현전임을 알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이 모든 동상들은 나무나 돌이 아니라 영혼의 구체화인 것이다.
 
숭배자가 동상들을 보고 신의 다양한 형상이라고 확신하게 되면 그는 상의 숭배를 통해 신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동상들을 단지 나무나 돌로 여긴다면 그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이 모든 상의 숭배가 신을 깨닫기 위한 그 기초 단계임을 알지 못한다면 그에게는 상의 숭배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각기 다른 상을 숭배하는 것은 오직 신을 깨닫기 위한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신만을, 오직 신만을 사랑하라. 이것이 너의 첫 번째 의무이다.
 
우유는 소에게서 나오지만 귀나 다리를 쥐어짜도 우유는 나오지 않는다. 우유는 오직 젖을 짜야만 나온다. 신은 우주에 충만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곳에서 신을 보기는 어렵다. 신은 숭배자들의 영적 에너지가 몰려있는 사원에 보다 더 쉽게 나타난다. 규칙적으로 기도와 명상을 하는 영적 공간에 더 자주 나타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명상하며 염원하는 곳에서 신은 그 자신을 나타내 보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들의 헌신과 영적인 사색을 통해서 하나의 응결된 형태로써 신은 그 자신을 현현시킨다. 그러므로 그런 장소에서 우리는 보다 쉽게 신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며, 영적인 자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수많은 수행자들과 헌신자들, 그리고 자각의 경지를 맛본 사람들이 신의 비전을 갖기 위해서 이런 성소를 찾았던 것이며, 세속적인 욕망을 다 버리고 오직 사무치는 가슴으로 신에게 기도했던 것이다. 사실 신은 이 모든 것에 편재해 있지만 그러나 특별한 이런 장소에서 신은 그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땅의 어느 곳을 파든지 결국은 물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우물이나 호수를 발견하게 되면 언제든지 필요할 때에 물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성스러운 사원이나 성지를 방문하게 되면 적어도 그곳에 머무는 동안은 거룩한 생각을 해야 한다. 조용한 구석에 앉아 이런 분위기 속으로 그대 전부가 용해되어 버릴 때까지 명상에 잠겨있어야 한다. 이런 장소를 떠난 후에도 얼마 동안은 이런 분위기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서 신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거기에서도 역시 깨닫지 못한다. 그 가슴속에서 이미 신을 체험한 사람은 성지에서도 강렬한 긴장을 느낄 것이다. 그런 헌신의 마음이 없다면 성지에 간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성지에 간다. 그러나 대개는 그곳에서 장사치가 된다.
 
성자나 현자들과의 만남은 영적 성장의 기본적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신을 깨달은 사람의 안내를 받음으로써 그리고 그와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신에게 향하게 할 수 있다.
 
감각에만 붙들려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처방은 신의 이름을 적극 찬양하게 하고, 이원적인 태도를 적극 장려하는 것이다.
 
너의 가슴에 신의 사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감각적인 기쁨은 더욱 적어진다. 꾸준히 신의 이름을 찾아라. 그러면 그대의 모든 죄와 분노, 육체적인 욕망은 깨끗이 사라질 것이다. 신의 이름 속에서 기쁨을 찾아라. 날이 갈수록 신의 이름을 찾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면 너는 이제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어진다. 혼란은 그칠 것이며, 그분의 영광이 너를 덮을 것이다.
 
신을 체험하고 싶은가. 첫째, 신의 이름을 연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주 유효하다고 믿어야 한다. 둘째,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실재를 식별해 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슈리 차이타냐는 말했다. "신의 이름은 암송하게 되면 아주 막강해진다. 이것이 금방 괄목할만한 결과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로 인해 어느 날인가는 결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알게든 모르게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떤 경지에 있든지 간에 신의 이름을 소리 내어 반복하라. 신의 이름을 소리 내어 반복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결국은 불멸에 이르게 된다.
 
신의 이름을 반복하는 것은 아주 효과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 사랑이 없는데 충분한가? 영혼은 신에 대한 갈망으로 굶주려 있어야 한다. 마음은 여전히 여자와 황금에 가 있는데, 입으로만 신의 이름을 번복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신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죄가 깨끗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다음 그는 또다시 죄악의 길을 간다. 이후로는 죄를 짖지 않고 산다고 맹세할 만큼 그의 마음이 굳세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신의 이름을 부르되 동시에 신에 대한 사랑을 깨닫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그대를 붙잡고 있는 것들은 점차 힘을 잃게 된다.
 
열렬한 가슴으로 신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라. 산 같은 죄업이 사라질 것이다. 산더미처럼 쌓인 땔감이 하나의 성냥불에 다 타버리듯이. 자파란 무엇인가. 조용한 곳에 앉아서 신의 이름을 반복하는 것이다. 집중과 헌신으로 꾸준히 신의 이름을 반복한다면 그는 신의 무한한 비전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삼스카라의 영향은 아주 강하다. 수행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한 여자가 지나갔다. 수행자들은 전과 같이 명상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수행자는 여자를 힐끔 본 후 그녀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수행자가 되기 전에 가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적을 행하는 자들과 가까이 하지 말라. 그들은 모두 진리의 길에서 낙오된 자들이다. 이적을 바라지도 말라. 진정한 구도자는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오직 신의 연꽃 같은 발만을 바랄 뿐이다. 이런 힘들은 요가와 기도, 그리고 명상 수련에 의해서 저절로 오는 것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집착하게 되면 더 이상 높이 오를 수 없다.
 
즈냐니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어떤 음식도 해롭지 않다. 그러나 쿤달리히의 불꽃 속에 음식을 공양하는 하나의 의식으로써 즈냐니는 모든 음식을 취한다. 그러나 박타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오직 순수한 음식을 먹어야만 한다. 신에게 아무 거릴 것 없는 음식만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순수한 음식을 먹어도 마음이 여자와 황금에 가 있다면 그는 더러운 사람이다.
 
성스러운 지혜의 불꽃은 그대의 욕망 분노, 그리고 여타의 악한 것들을 모두 태워버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와 '나의 것'이라는 의식을 태워버린다. 그때 몸은 강한 충격으로 부서지는 수도 있다. 너는 그때 이 모든 것은 끝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고의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남아 있는 한, 신은 결코 너를 풀어 주지 않을 것이다.
 
몸으로 하여금 그 운명의 고통을 당하도록 하라. 그러나 오, 마음이여, 언제나 축복 속에 있거라. 이 몸이 어떠한 고통을 당하더라도 진정한 구도자는 결코 신념과 예지의 빛을 잃지 않는다. 그의 예지와 신념은 결코 어두워지지 않는다. 아무리 극심한 시련을 겪더라도 결코 예지의 빛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대 자신의 감정과 신념을 굳게 지켜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 밖으로 새어 나가게 하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너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자기의 기도와 수련을 내보이지 않으면 않을수록 자신에게는 더욱 좋다.
 
자만심이 많으면 파멸한다. 이는 궤변스러운 지혜와 설익은 현명함을 고집한 결과이다. 위대하고 싶거든 겸손해야 한다. 높은 자리는 수행하기에 알맞지 않다. 물이 고이려면 낮은 땅이 좋다. 낮은 곳이야말로 수행자의 자리이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지 말라. 설교가가 되지 말라. "나는 지금 진리를 말하고 있다. 그대들은 모두 내 말을 들어야 한다." 설교가는 이렇게 강요한다. 에고이즘은 지혜가 아니라 무지 속에 있다. 너의 가슴과 영혼을 신에게 향하고자 한다면 겸손해야 한다. 영적으로 소박해야 한다.
 
능히 자중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진실한 인간이다. 이렇지 못한 사람들은 이름뿐인 인간이다.
 
구도의 길에 있어서 절망은 가장 큰 적이다.
 
네가 배운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포기하라. 그리고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해져라. 그때 그대는 참된 예지를 얻게 될 것이다.
 
단순한 마음을 통해서 우리는 쉽게 신에 이를 수 있다. 단순하게 되면 영적인 가르침은 쉽게 결실을 보게 된다. 오직 참회를 통해서만 우리는 고결하고 단순해질 수 있다. 단순한 마음이 없이는 결코 신을 깨달을 수가 없다. 그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사람은 단순한 사람이다.
 
단순한 구도자가 되라. 그러나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깨어 있으라. 그리고 진실과 거짓, 순간적이고 거짓된 것은 옆으로 밀어 두고 영원한 것, 진실한 것에만 네 마음을 집중하라.
 
송장과 같이 그 자신의 욕망을 소멸시킨 사람, 살아 있으면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실한 사람이다.
 
조금이라도 욕망에 감염되어 있는 동안은 신을 볼 수 없다. 가슴의 무한 공간이 욕망의 객들에게 침해를 받아 어지럽혀지고 있는 동안에는 신의 빛을 포착할 기회가 없다. 아름다운 비전은 오직 신과의 영적 교섭에 몰두해 있는 가슴속에, 조용한 가슴속에만 동터 온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이 세상의 유혹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혹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의 우물에 한번 빠지면 오염되지 않은 채,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다.
 
열정이 세속적인 쪽으로 향해 있으면 우리의 적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이 열정이 신을 향해 있으면 그것들은 우리의 친구가 된다. 열정은 마침내 신에게 우리를 인도한다. 세속적인 욕망을 신을 향한 열망으로 바꿔야 한다.
 
세속에 집착하면 할수록 높은 지혜를 얻으려는 마음이 적어진다. 세속에 대한 애착이 적으면 적을수록 높은 지혜에 대한 갈망도 커진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신의 축복을 경험한 이들은 결코 여성들을 경계하거나 피하지 않는다. 구도자들은 정숙한 여성이건, 정숙치 못한 여성이건 모두 저 성스러운 어머니의 화현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성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그녀를 영혼의 어머니로서 숭배한다.
 
여성과 함께 탄트라를 수행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빗나가기 쉽다. 탄트라에 의하면 세 가지 헌신과 숭배의 수행법이 있다. 첫째, 배우자적인 태도로써 수행하는 것, 둘째, 하인적인 태도로써 숭배하는 것, 셋째, 아들의 입장에서 수행하는 것, 이 가운데서 나는 아들의 입장에서 수행하였다. 그러나 배우자의 길은 위험이 따른다. 가장 순수한 길은 아들의 입장으로 어머니를 숭배하는 것이다.
 
신의 길을 가로막는 여자는 단념하라. 그녀가 죽든 말든 내버려 두라. 구도의 길을 방해하는 그런 여자는 무지의 화신이다. 그가 진실한 구도자라면 그의 아내도 점차 신을 향하게 된다.
 
만약 신으로 향한 열정으로 미쳐버렸다면 여기 아버지가 어디 있으며, 어머니가, 아내가 어디 있는가? 그는 미쳐버릴 정도로 신을 사랑한다. 그에게는 아무 의무도 없다. 그는 이 모든 빚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그는 이 세상 전부를 잊어버린다. 그는 육체조차 잊어버린다.
 
마음으로 간절하게 염원하고 입으로 사무치게 애원하면 거기 응답이 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입으로는 '이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신이여'라고 말하는 사람의 기도는 전혀 응답이 없을 것이다. 진지하고 단순한 가슴으로 기도하라. 그러면 너의 기도에 응답이 있을 것이다.
 
세속적인 생각과 욕망이 마음을 혼란시키지 않도록 하라. 그때그때 필요한 행동은 무엇이든 다 하라. 그렇게 하되 네 마음은 신에게 고정시켜라.
 
나라다는 라마에게 말했다 '오 라마여, 당신의 발 밑에 엎드리게 하여 주십시오. 헌신의 열정으로 내 영혼을 불붙게 하여 주십시오' 라마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됐다. 다른 요구는 없는가?' 나라다가 말했다. '오, 신이여, 제발 당신의 마야에 넋을 잃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라마는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됐다. 다른 요구는 없는가?' 나라다가 대답했다. '신이시여, 이것이 내 기도의 전부입니다.'
 
신이 과연 형상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거든 결정할 수 없거든 이렇게 기도하라. '신이여 당신이 형상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저를 연민히 여기시어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십시오.'
 
나무나 돌로 깍은 신의 여러 가지 모습과 외관 때문에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신의 힘을 믿는다면 신은 그에게 그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기도하라. 사무치는 가슴으로 이렇게 기도하라. '신이여 나는 당신의 실체를 모릅니다. 내가 당신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신의 이름은 많다. 그리고 저 영원한 세계는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형상을 통하여 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떤 이름이나 형상을 숭배하더라도 그 숭배와 찬양의 대상을 통하여 너는 마침내 신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에게로 가는 각기 다른 길들이다.
 
박애주의에 이끌린 사람은 크리스찬이 되도록 내버려 두라. 형식과 의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흰두교가 되도록 내버려 두라. 모든 생명체에 우주적인 사랑을 주려는 사람은 불교도가 되도록 내버려 두라.
 
외출해서 사람들과 어울릴 때에는 그들의 모든 것을 사랑하여야 한다.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그들과 혼연일치가 되어야 한다. 너는 어깨를 으스대며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상대를 비난해서도 안되며, '그들은 기독교다, 그들은 힌두교들이다. 그들은 회교도다.'하는 식으로 색안경을 쓰고 보지 말아라.
 
사람들은 모두 그 자신의 종교를 따라야 한다. 기독교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고, 불교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길이다.
 
자기 자신의 생각을 속이지 않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정직과 단순한 믿음이야말로 천국에 이르는 길이다.
 
마음은 모든 것이다.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다면 너는 너 자신을 잃는다. 그러나 마음이 자유롭다면 너 역시 자유롭게 될 것이다. 마음은 흰옷과 같아서 어떤 색깔로도 물들 수 있다.
 
'나'와 '나의 것'은 무지이다. '신'과 '신의 것'은 예지이다.
 
인간이 괴로워하는 것은 신에 대한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수많은 경전과 책들을 읽어야 한다. 드러나 자기 자신의 영적인 빛을 얻기 위해서는 한마디의 성스러운 말씀과 믿음으로 족하다.
 
신과 연결되려는 예지는 그 믿음과 보조를 같이 해야 한다. 믿음이 적으면서 지혜만 구하는 것은 어리석다.
 
간절히 신을 깨닫고자 하는가. 굳은 신념으로 신의 이름을 끊임없이 반복하라.
 
한 사내가 강을 건너고자 했다. 스승이 부적을 주며 말했다. '이 부적을 가지고 강을 건너가게.' 사내는 이 부적을 가지고 물위를 걸어갔다. 강을 반쯤 건너갔을 때, 그는 호기심에 차서 부적을 뜯어보았다. 그 속에는 라마 신의 이름을 쓴 종이가 한 장 들어 있었다. 그 순간 사내는 김빠진 듯 말했다. '이것이 겨우 다란 말인가. 부적의 비밀이 이것인가.' 이 의심이 그의 마음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그대로 물 속에 빠져버렸다. 사내로 하여금 물위를 걷게 한 것은 신의 이름에 대한 믿음이었다.  믿음이 있는 것은 삶이요, 믿음이 없는 것은 죽음이다.
 
스승의 영적인 힘을 전적으로 믿는 제자가 있었다. 그는 스승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름으로써 강 위를 걸어갈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안 그의 스승은 생각했다. '내 이름 속에 이런 힘이 있다는 것을 몰랐군, 나는 얼마나 위대한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그 이튿날 그 스승은 '나, 나, 나'를 외치면서 물위를 걸어가려 했다. 그러나 물의로 발을 내딛자마자 스승은 물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이와 같이 자만심은 파멸을 가져오는 반면 믿음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신 라마는 랑카로 가기 위해 바다에 다리를 놓았다. 그러나 그의 하인이며 신봉자인 원숭이 하누만은 한걸음에 바다를 건너뛰었다. 그것은 신 라마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단순한 믿음을 통해서 하인이 그의 주인보다 먼저 성취한 예가 여기 있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한대로 된다. 끊임없이 완전한 존재, 축복을 생각하면 너 자신은 결국 완전한 존재, 축복이 된다.
 
왜 일생동안 죄, 지옥의 불 따위만을 이야기하는가. 신의 이름을 불러라. 그리고 이렇게 말하라. '신이여, 저는 해야할 것은 하지 않았고, 했어야 할 것은 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에 차서 이렇게 말한다면 너의 모든 죄는 깨끗해질 것이다.
 
그 자신을 평범한 중생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그저 중생으로 머물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을 신과 합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그대로가 된다.
 
정직한 사랑과 단순한 믿음으로써 신의 의지에 자기 자신을 전부 내 맡기는 사람은 머지 않아 신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살든지 이 세상을 등지든지 그것은 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성실하게 일하라. 그리고 모든 것을 그에게 맡겨라. 그것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라. 그에게 너 자신을 내맡겨라. 그러면 더 이상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오직 신의 의지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너는 알게 될 것이다.
 
완전히 신을 믿는 상태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모든 근심과 두려움이 없어진 상태이다.
 
어떤 집착성도 갖지 말고, 모든 것을 신의 의지에 내맡겨라. 이 모든 것을 신 스스로 보살피도록 하라.
 
한 사내가 우물을 팠다. 12미터쯤 파 내려가 봤지만 물이 나오지 않아서 다른 곳을 다시 파내려 갔다. 그러나 꽤 깊이 파내려 갔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버리고 또 다른 곳을 파내려 갔다. 한 30미터쯤 파내려 갔으나 그러나 거기에도 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싫증이 나서 우물을 파는 작업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가 만일 여러 우물을 파던 힘을 한 곳에 모았더라면 물을 발견했을 것이다. 구도의 길을 자주 바꾸는 사람도 이와 같다. 구도의 길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의심을 갖지 말고 자신이 택한 신앙에 전심전력으로 매달려야 한다.
 
가슴속에 헌신의 신앙을 심어라. 그리고 모든 속임수와 기만을 버려라. 사업하는 사람, 사무직에 있는 사람, 장사를 하는 사람들 또한 진리에 달라붙어야 한다. 진리에 가득 찬 생활이야말로 이 칼리 유가 시대에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다.
 
언제나 진리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진리의 영인 신을 발견할 수가 없다. 진리를 이야기 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진리를 통해서 우리는 신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은 그것이 어떠한 종류든 다 나쁘다. 거짓된 모양조차도 나쁘다. 너의 마음이 겉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때 끔찍한 파멸이 찾아올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위선이 자라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거짓말과 거짓행동에 대한 두려움마저 사라진다.
 
신의 위대한 영상은 철저한 금욕을 통해 순수한 그의 정력을 보존한 사람의 가슴에 비칠 수 있다. 완전한 금욕을 수련하지 않는다면 영혼의 미묘한 진리를 우리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수카데바(바야사의 아들)는 완전한 금욕주의자였다. 그는 정액을 방출해본 적이 없다. 다이트레야라고 부르는 또 한사람이 있다. 그는 한번 정액을 방출한 적이 있지만 그 후로는 금욕을 수련했다. 만약 12년 동안을 다이트레야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의 몸에는 새로운 신경 조직이 계발될 것이다. 이 신경에 계발되면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해 낼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의 이해력은 사고의 가장 미묘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관통할 수 있게 된다. 이 이해를 통해 사람은 비로소 신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신은 이런 순수한 이해를 통해서만 체험될 수 있다.
 
정액의 낭비는 에너지의 소모를 가져온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사된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음식의 탓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이라면 육체적으로 여자를 몰라야 한다. 성적인 즐거움을 포기한 사람은 진정으로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신은 바로 그의 곁에 있다.
 
여자와 황금은 둘 다 실재가 아니다. 실재는 오직 신뿐이다. 돈은 무엇에 쓰는가. 왜 돈이 필요한가. 돈은 우리의 의식주를 해결해 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돈의 힘으로 신을 깨달을 수는 없다. 돈은 사람의 최후 목적은 아니다. 신을 보는 시각은 잃어버리고 대신 이런 보잘것없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니 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가.
 
비베카란 비실재 속에서 실재를 가려내는 것이다. 그리고 바이라그야는 세속적인 대상들로부터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갑자기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수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신을 위해서 기꺼이 마음속에서 '황금과 여자'를 버려야 한다. 그 다음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신을 모르는 동안은 이 세상도 비실재이다. 이 모든 것 속에서 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너는 너 자신을 '나'와 '나의 것'이라는 에고의 밧줄로 이 세상을 잠아 매어 놓았다. 우리는 이 무지에 속기 때문에 감각의 대상에 집착하여 마야의 심연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마야는 인간의 눈을 완전히 멀게 한다. 문이 활짝 열려 있는데도 그들은 마야의 이 올가미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너는 알아야 한다. 이 세속적인 삶이 얼마나 비실재적인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네가 가진 것은 네가 죽음으로써 무효화된다. 세속적인 사람들의 집착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라. '손자가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이 그를 이 세상에 잡아매어 놓는다. 그물이 언제나 열려 있지만 그는 그물을 나오지 않는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그 자신을 누에고치에 가두어 놓는다. 그리고 거기서 생을 마친다. 이런 것이 비실재적이고 무의미한 삶이 아니겠는가?
 
이 모든 것의 근원인 신을 깨닫지 못하고서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말이냐.
 
숲 속은 가시덤불로 덮여 있기 때문에 이 가시덤불을 지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두 가지 방법을 택할 수 있다. 첫째, 숲 전체를 가죽으로 덮는 방법, 둘째, 두 발만을 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는 방법, 숲 전체를 가죽으로 덮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두 발만 가리는 방법이 보다 현명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이 수많은 욕망과 바램을 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더 이상의 욕망과 바램을 끊고 벗어나는 길, 둘째, 이 모든 욕망을 다 충족시키는 길. 그러나 인간이 이 모든 욕망과 바램을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욕망을 충족시켜도 다른 욕망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욕망을 최소한으로 줄여 만족을 구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리고 나머지 욕망을 향한 에너지를 진리를 구하는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현명한 길이다.
 
세속적인 기쁨은 처음에는 아주 매혹적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감당하기 힘들고 참고 견디기도 힘들며 빠져나오기는 더욱 어렵다. 오 그대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세속적인 욕망의 짐을 벗어 던지지 못하기 때문에, 세속적인 환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평온해질 수 없는 것이다.
 
종이가 기름에 물들게 되면 글씨가 쓰여지지 않듯이, 악과 쾌락에 젖은 사람의 영혼은 기도와 수련이 들어먹지 않는다.
 
신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세상과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신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대의 몸과 마음, 그리고 모든 것을 희생시켜야 한다.
 
'점차적으로 나는 신을 깨달을 것이다.' 이것은 연약한 포기의 태도다. 그러나 포기가 강한 자는 오직 신만을 찾는다. 그의 가슴에는 오직 신밖에 없다. 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우물과 같다. 언제 우물에 빠질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다. 신을 깨닫기 전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열망과 결심은 확고하다.
 
직접 체험이나 간접 체험을 통해서 모든 것을 깨달았을 때만이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즈냐니가 된다.
 
욕망과 소유욕의 포기 없이는 결코 즈냐니가 될 수 없다. 포기의 새벽이 오면 모든 무지가 사라진다. 그러나  즈나나(지혜)는 단번에 얻어질 수 없다. 시간이 필요하다. 세속에 물들어 있는 동안에는 진리의 가르침이 소용없다.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줄어들기 시작해야 비로소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어떤 사람이 강가에 갔다가 한 사람으로부터 며칠 후에 산야신이 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그 이야기를 듣고 산야신이 가장 훌륭한 삶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고는 즉시 산야신이 되기로 결심하고 출가를 하였다. 집에 들리지도 않고 떠났다. 이것이 격렬한 포기의 경우다.
 
삶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내면적으로 진정한 인간의 기질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용기가 없다. 우유에 젖은 팝콘처럼 맥이 없이 굽실거리기만 한다. 그는 내면적으로 강함이 없다. 그들에게는 참고 견디고 노력하는 끈기가 없다. 그들에게는 의지의 힘이 약하다. 이런 사람들은 삶의 완전한 패배자이다.
 
진정한 구도자는 결코 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전 생애를 걸쳐 기도와 명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을 체험하지 못했다 해도 그는 결코 풀이 죽지 않는다.
 
신의 사랑을 위해 잠시 동안만을 수련한다면, 그런 다음 신을 잊고 지낸다면 신의 사랑이 너의 가슴에서 증발해버릴 것이다. 그러나 가슴이 언제나 신의 사랑과 신념으로 젖어 있다면 열정은 언제나 충만해 있을 것이다.
 
초심자의 가슴은 영적인 기도와 명상 수련을 하는 동안만 열광으로 들끓는다. 그러나 신을 체험한 사람은 기도나 참회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순수해지고 싶거든 쓸데없는 교리 등의 논쟁에서 물러나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와 명상 수련을 계속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너의 작은 가슴은 금새 더러워지고 만다.
 
신을 체험하고 싶다면 기도와 명상 수련을 하라. '오 신이여, 오 신이여'하고 부르짖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부초를 걷어 내지 않으면 물을 발견할 수 없는 것처럼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신을 깨달을 수가 없다. 구체적인 행동이란 무엇인가? 명상, 만트라 수행, 기도, 찬송, 자선, 종교의식 등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신에게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행위이다.
 
삶의 전환기가 올 때 신을 꽉 붙잡지 못하면 진리의 길을 이탈하게 된다. 수행은 개미의 꾸준함을 본받는 것이 제일 좋다. 그것이 진리라는 열매를 얻기 위한 확실한 방법이다.
 
신을 명상하라. 외진 구석에서, 숲 속의 외진 곳에서, 그리고 네 가슴의 고요한 신전 속에서 신을 명상하라.
 
초보자는 조용한 곳에서 언제나 그의 마음을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것들이 그를 혼란하게 할 것이다. 계속적인 기도와 명상 수련에 의해 영적인 집중력을 얻게 되면 그는 언제나 그가 처한 환경에서 벗어나 있게 된다.
 
명상을 하기 전에 나(라마크리슈나)를 생각하라. 나에 대한 너의 믿음으로 하여 너의 모든 생각이 나에게 집중된다면 그 생각을 신 쪽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네가 스승을 생각할 때, 여러 갈래로 흩어진 너의 마음은 스승이라는 집중점으로 모이게 된다. 네 마음이 이렇게 한 곳으로 모이게 되면 그 모인 마음을 신에게로 향하게 할 수 있다. 이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명상은 가능해진다.
 
명상 도중 초보자는 '요가니드라'라고 불리는 일종의 수면 상태에 잠기게 된다. 이때 그는 어떤 종류의 성스러운 비전을 보게 된다.
 
마음의 모든 외침이 잠잠해질 때, 호흡의 정지, 즉 꿈바까의 상태가 온다. 꿈바까의 상태는 박티 요가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신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통해서도 호흡의 정지 상태가 가능하다.
 
'명상 속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은 구제의 문 앞에 와있다.'고 옛 사람은 말했다. 그러면 명상 속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명상을 위하여 앉아 있을 때, 신성한 분위기가 그를 에워쌀 때다. 그리고 그의 영혼이 신과 교섭을 시작할 때다.
 
깊이 명상에 잠겨있을 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지각과 느낌마저도 사라져 버린다. 뱀이 그의 몸을 감아도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명상하는 동안은 외부에 전혀 무관심하게 된다. 새가 그의 머리 위에 집을 지어도 그는 전혀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머지 않아 완벽한 명상의 힘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깊은 명상 속에서는 감각의 모든 기능이 마비된다. 밖을 향해 출렁이던 마음의 물결은 성문이 닫히듯 멈추어버린다. 감각의 다섯 가지 대상들은 문밖으로 밀려나간다. 처음에는 명상 도중에 감각의 대상에 대한 비전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명상이 깊어지게 되면 더 이상은 마음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문밖으로 밀려나간다.
 
어떤 방법을 택하든지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지지 않고서는 신과 연결되지 않는다. 수행자는 그의 마음에 의해서 지배를 당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의 마음이 수행자에 의해서 지배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미치지 말고 신의 사랑에 미쳐라. 너의 가슴이 신을 동경하도록 하라. 신을 열망하는 사람은 먹고 마시며 사소한 일을 하면서도 결코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 가슴이여, 내 가슴이여!, 전능하신 어머니를 불러라. 그녀가 너에게 얼마나 빨리 달려오는지 너는 알게 될 것이다. 네가 가슴과 영혼으로 신을 부르게 되면 신은 너에게 오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다.
 
신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열렬해야 하는지 아는가? 남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 황금에 대한 욕망, 세상일에 대한 집착, 신을 동경하는 네 마음이 이 모두를 합친 것만큼이나 강한 열망이 있어야 너는 신을 깨달을 수가 있다.
 
'기필코 이 생에 신을 깨닫고 말겠다, 그렇다 앞으로 3일 안에 신을 깨닫고야 말겠다. 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 순간에 나는 신을 내 영혼 안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신봉자의 이런 열렬한 사랑이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신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뜨뜻미지근하게 되면 수세기를 거쳐도 그를 깨달을 있을지 말지 하다.
 
'이 생에 신을 깨닫지 못하면 다음 생에 신을 깨달을 것이다.' 왜 이런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가? 기도와 명상 수련에는 이런 식의 게으름이 용납될 수 없다. '이 생에 아니 지금 이 순간에 신을 깨닫고 말 것이다.' 이렇게 네 마음이 굳지 못하면 너는 결코 신에게 이를 수 없다. 신념을 굳게 갖고 이렇게 결심하라. '지금 이 순간에 신을 깨닫고 말 것이다.'
 
마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열망하는 사람은 신이 그 길을 가르쳐줄 것이다.
 
신을 위해서 열렬한 사모의 마음으로 울 수가 있는가? 사람들은 아내를 위해서, 아이들을 위해서, 돈을 위해서 울 수 있다. 그러나 누가 신을 위해서 울 수 있겠는가?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동안에는 엄마는 부엌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가 장난감을 집어 던지고 엄마를 찾기 시작하면 엄마는 더 이상 부엌에만 있을 수 없다. 엄마는 하던 일을 멈추고 급히 달려와 아이를 안는다.
 
신에 대한 집중과 열망이 강한 사람은 머지 않아 신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칼리유가 시대에는 신을 보기 위하여 단지 3일 동안의 열렬한 바램만으로 신의 은총을 입기에 충분하다. 성실하게 전력을 기울여서 3일 동안만 시도해 보라. 너는 분명히 신을 체험할 것이다.
 
영원한 어머니에게 기도하라. 확고한 사랑과 굳은 신념을 달라고 기도하라.
 
구도자의 강점은 무엇인가? 그는 신의 어린 아이다. 그리고 눈물이야말로 그의 가장 강한 무기이다. 어머니의 가슴에는 울고 보채는 아이의 생각밖에 없다. 신은 울고 보채는 아이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갖다 준다.
 
어떤 사람이 스승에게 말했다. "선생님 제 나이 45세입니다. 저는 14년 동안이나 신을 깨닫기 위해서 많은 스승들의 가르침을 따라 보았습니다. 수많은 성지도 순례하였고 성자들도 많이 만나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스승은 말하였다. "내가 자네에게 약속하네, 진정으로 신을 갈망하는 사람은 신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네."
 
우주의 기원과 소멸인 그(神)를 알아라. 그는 모든 덕의 근원이요, 죄업의 파괴자이면서 선행의 거장이다. 그는 이 우주에 거주하는 영원 그 자체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그대 자신 속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지각되면서 동시에 그는 시간과 공간뿐 아니라 삼사라(육도 윤회)의 나무까지도 초월해 있다. (우파니샤드)
 
우리는 그를 깨달아야 한다. 우주의 스승이요 초월자인 그를. 그는 모든 신들의 신이요, 모든 통치자들의 통치자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더 이상 성취할 것이 없다. 그는 어떠한 행위의 기관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와 견줄 수 있는 것, 그보다 위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파니샤드)
 
베다는 그의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의 위대한 능력은 우리로서는 예측할 수가 없다. 그의 예지와 의지, 그리고 행위는 본래부터 그에게 있던 것들이다." 그의 스승은 없다. 그를 추측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는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이며 그는 모든 영혼들의 지배자이다. (우파니샤드)
 
신은 위대하며 영원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위대함을 이해할 수 없다. 마야의 스크린이 인간을 신으로부터 차단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가슴속에 거하고 있는 신을 보지 못한다.
 
신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지만 우리는 신을 보지 못한다. 신을 가까이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의 헌신적인 아들들뿐이다. 신이 연민에 차서 그 자신을 우리에게 내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를 보지 못한다.
 
, 경전, 구도자 이 셋은 모두 하나며 같은 것이다.
 
신의 은총에 취한 나라다는 먼 곳에서 신의 바다를 얼핏 보았다. 그 후로 그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미친 사람처럼 신의 찬가를 부르며 떠돌이가 되었다. 타고난 고행자였던 수카데바는 오직 세 번 그 바닷물을 맛보았을 뿐이다. 그 후 그는 법열에 젖어 어린아이처럼 마구 딩굴었다. 그리고 위대한 스승인 마하데바는 손으로 세 모금 그 바닷물을 마셨다. 그 후 그는 신의 축복에 취하여 죽은 것처럼 누워있었다. 누가 이 바다의 깊이를 재겠는가? 아아, 누구 이 불가사의한 힘을 헤아릴 수나 있단 말인가?
 
어린 아이의 단순함은 얼마나 귀여운가. 어린 아이는 이 세상의 부보다 장난감을 더 좋아한다. 믿음에 찬 신봉자도 이 어린아이와 같다. 이 세상의 부귀 명예를 버리고 오직 신만을 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의 바다에 깊이 들어가면 위험이나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 신의 바다는 너에게 영원히 계속되는 사람을 준다.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그대의 신에 대한 열정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염려하지 말라.
 
인간이 우주적인 존재에 접근하면 할수록 그의 영원성의 계시는 더욱 새롭고 위대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는 지혜의 완성에 위해서 인간은 그에게 흡수되어 버린다.
 
신은 그에게 바치는 재물을 좋아하고 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의 은총은 재물이 아니라 사랑과 헌신을 바치는 쪽으로 간다. 그가 값있게 여기는 것은 오직 사랑과 헌신, 그리고 진리의 길을 가기 위한 정확한 분별력과 포기다.
 
삼부 말리크란 사내가 나에게 와서 말했다. "선생님, 나의 모든 재산을 영원한 어머니 발 밑에 놓고 가도록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자네 무슨 말을 하는가. 자네는 확실히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영원한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자네의 부란 자네 발 밑에 밝히는 먼지만도 못한 것일세."
 
'이 일을 하면 신에 이른다. 저 일을 하면 신에 이른다.' 이런 식으로는 생각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신의 은총에 달려 있다. 신의 은총을 입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진지하고 열렬하게 그를 열망하면서 하라. 그의 은총을 통해서 환경은 유리하게 되며 그를 깨닫기 위한 상태는 완전하게 될 것이다.
 
수백만 년 동안의 어둠은 방안에 횃불을 가져옴으로써 사라져 버린다. 수많은 생애를 통해서 지어온 죄는 신을 한번 봄으로써 사라져 버린다.
 
신의 은총이 내릴 때는 신앙이 싹튼 사람, 선의 종자가 있는 사람들은 신성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러나 세속적이며 무의미하게 사는 사람들은 전혀 영혼의 잠을 깨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염주를 세면서 끊임없이 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스승은 그에게 말했다. '왜 그대는 한 곳에 붙박혀 있는가. 앞으로 나가라" 그는 답했다. "신의 은총이 없이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스승은 말했다. "신의 은총이 밤낮으로 너의 머리 위에 불고 있다. 삶의 바다를 더 빨리 항해하고 싶거든 어서 배의 닻을 올려라."
 
신의 은총의 바람은 쉴새 없이 불고 있다. 이 삶의 바다에서 게으른 선원은 이 좋은 길의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행동적이며 강한 선원은 이 바람을 이용하여 그들의 마음의 닻을 올린다. 이로 하여 그들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곧 이르게 된다.
 
어떤 사람이 스승에게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신을 깨달았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희들도 신을 보게 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즉시 신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스승은 말했다. "이 모든 것은 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고기를 잡으려면 강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대는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내게 신을 보여달라고 말한다."
 
수행자는 곧잘 스승이 지시하는 고된 수련과 단조로운 직무에 싫증 내게 된다. 그는 스승에 대한 신뢰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의지로 신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헛수고를 한 후에야 다시 옛 스승의 은총을 구하게 된다.
 
제 아무리 노력해도 신의 은총을 입지 않고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그러나 신의 은총은 그리 쉽게 내리지 않는다. 우선 가슴에서 에고를 완전히 빼내어야 한다. "나는 ...하는 자다"하는 이런 에고의식이 남아 있다면 너는 결코 신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신은 지혜의 태양이다. 그의 단 한줄기 빛살이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알 수 있는 힘과 지혜의 다양한 차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가 그 자신의 얼굴에 그의 빛을 비쳐줄 때만이 우리는 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누가 누구의 스승인가. 오직 신만이 진정한 스승이다.
 
스승을 단순한 인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기도와 헌신을 통해서 도대체 무엇을 얼마만큼 얻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구루를 단순한 인간으로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제자가 신을 보기 전에 그는 신의 조명의 첫 비전 속에서 구루를 본다. 그리고 뒤에 신을 보게 하는 사람은 구루다. 구루는 그 자신을 신의 모습으로 불가사의하게 변형시킨다. 이때 제자는 구루와 신을 하나로, 같은 존재로 보게 된다. 구루는 제자가 바라는 것을 무엇이든 부여한다. 그렇다. 구루는 제자를 니르바나(열반)의 높은 축복에까지 데리고 간다. 또한 숭배 받는 자와 숭배하는 자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제자는 의식의 이원적 상태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무엇을 원하든지 구루는 모든 것을 제자에게 허락한다.
 
인간 스승은 제자의 귀에 비밀의 만트라를 속삭인다. 그러나 신의 화신인 구루는 제자의 영혼 속에 영기를 불어넣어 준다.
 
신에게 이르려는 사람은 신의 길을 잘 아는 구루의 충고에 따라야 한다.
 
신의 불가사의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신은 그에게 진정한 스승을 보낼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구루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 할 필요는 없다.
 
진지하고 열렬한 기도와 깊은 사랑으로 신에게 가는 사람은 구루가 필요치 않다. 그러나 영혼의 이와 같은 깊은 열망은 아주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구루는 필요한 것이다. 구루는 오직 하나이다.
 
깨달음을 얻은 스승이 무식해 보이거나 별로 학식이 없어도 그를 얕잡아 보아선 안 된다. 스승은 학자와는 다르다. 스승은 삶의 모든 지혜를 꿰뚫어보고 있다. 그는 신의 예지를 무진장 줄 수 있다. 진리로 가는 정확한 길과 책에 씌어진 모든 지식의 정수를 그는 다 알고 있다.
 
누가 스승을 비난하거든 듣고 있지 말아라. 스승은 너의 아버지보다, 너의 어머니보다 위대하다. 누가 네 앞에서 너의 부모를 욕한다면 가만히 있겠는가. 스승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싸워라.
 
아바타(신의 화신)는 신의 사자다. 그는 황제에게 권한을 이임 받은 총독과 같다. 진리의 불꽃이 시들어갈 때만다. 이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신은 이 지상에 아바타를 보낸다.
 
라마, 시타, 크리슈나, 라다 등은 단지 우화요, 역사적으로 비실재적 인물이라고 생각지 말라. 그리고 경전은 그 내적인 의미만이 진실이라고 생각지 말라. 이런 사람들은 너와 같이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동신에 그들은 신의 차원에 있다.
 
아바타는 언제나 하나며 모두 같다. 삶의 바다에 잠기면서 신이 어느 한 점에서 떠오르면 우리는 그를 크리슈나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가 그 지점에 가라앉은 후 다른 지점에 떠오르면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사치다난다의 나무에는 라마, 크리슈나, 붓다, 그리스도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지가 있다. 이 가지들 중에 서너 개가 이따금 이 세상에 와서 위대한 변화와 혁명을 일으킨다.
 
아바타는 신의 특성과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제일 높은 곳까지 체험의 어느 차원에서든지 머물 수 있고 갈 수 있다.
 
신의 화신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유한에서의 무한게임이기 때문이다.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의 신성을 알아본다.
 
크리슈나와 같은 신적 인간은 겉보기에는 우리와 똑같은 행동을 한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카르마의 영역을 넘어서 초월적인 차원에서 휴식하고 있다.
 
신은 무한하고 전능하다. 사랑으로서의 그의 신성이 인간의 육체를 갖고 나타나, 신의 화신으로서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 사랑은 신의 화신으로부터 우리에게 온다. 신의 화신은 영적인 눈과 체험을 통해서만이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신을 깨달아야만 한다. 신의 사랑은 신의 화신으로부터 우리에게 흘러 들어온다.
 
누가 신을 완전히 알 수 있겠는가. 신을 완전히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신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만이 오직 실재임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신을 찾고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 속에서 찾아라. 그의 신성은 다른 것보다도 인간 속에 더 많이 나타나 있다. 보라. 네 주위 사람들을 보라. 신의 사랑으로 가슴이 넘치는 그들을 보라. 신속에서 움직이며 살아가는 그들을 보라. 신의 사랑에 도취해 있는 그들을 보라. 이런 사람에게 신은 그 자신을 드러낸다.
 
우리 인간에게 진정한 즈나나와 박티를 가르치기 위해 신은 인간으로 화현해서 온다. 신은 신을 사랑하는 순수한 영혼을 위하여 인간의 몸으로 나타난다. 신의 화신으로 오는 사람은 영원히 자유를 얻은 영혼들, 또는 이 육도 윤회에서 마지막으로 태어나는 영혼들이다.
 
싯다(성취자)는 가까이에 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아바타는 사랑의 물이 다 말라 사막과 같은 사람조차 구할 수 있다.
 
구세주가 나타나면 모든 생명이 그의 은총을 통해서 구제 받는다. 그러나 싯다는 오직 많은 고통과 참회로써 그 자신만을 구할 수 있을 뿐이다. 기관차가 수많은 화물차를 이끌고 가듯이 우리의 구세주도 이와 같아서 조에 짓눌린 사람들을 데리고 신 앞으로 간다.
 
브라흐만은 마치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과 같다. 그를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잊어버리고 그의 존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런 사람들은 해탈을 얻은 사람, 성자들이다. 그러나 신을 체험한 구세주는 동시에 그 자신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일부로 니르바나로 들어갈 기회를 거절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고통을 능동적으로 받는다.
 
질문: 신은 왜 인간의 모습으로 그 자신을 화현합니까?
: 신의 완전성을 인간에게 시현하기 위해서다. 이 시현을 통하여 인간은 신과 대화할 수 있고 신의 연극을 볼 수 있다. 신의 화신 속에서 신은 그 자신의 초월적인 기쁨을 완전히 즐기고 있다. 성자를 통하여 신은 꽃 속의 꿀과도 같이 그 자신의 일부분만을 시현 한다. 화신들 속에서 신은 전부가 꿀이고 축복이다.
 
신의 화신에게는 아무것도 의심스러울 것이 없다. 삶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들을 그는 손쉽게 해결해 준다. 그는 지혜의 태양이다. 수많은 겁 동안 쌓인 어둠을 몰아내는 지혜의 빛이요, 그 태양이다.
 
즈나나 요가는 지혜에 의한 신과의 영적 교섭을 말한다. 즈나나 요가 수행자의 목적은 브라흐만 , 저 절대자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브라흐만은 사마디 속에서 깨닫게 된다.
 
이론과 식별로부터 나온 지혜와 명상으로부터 나온 지혜는 전혀 다르다. 지혜의 첫 단계는 이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다. 이런 지혜는 강한 영적 파장이 없다. 이런 지혜는 오직 방안만을 비추는 호롱불에 비유할 수 있다. 지혜의 다음 단계인 박티의 지혜는 보다 강한 빛이다. 이 지혜는 방의 안과 밖을 두루 비추는 달빛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지혜의 최고 단계인 아바타의 지혜는 가장 강렬하다. 그 지혜의 빛은 모든 곳을 비추는 태양과 같다. 이 지혜의 태양은 인간의 영혼 속에 오랜 시간 동안 쌓인 무지를 몰아낸다.
 
신을 너 자신 속에서 발견하지 못한다면 결코 너 밖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 자신의 영혼의 사원 속에서 그를 보게 되면 우주의 이 사원 속에서도 또한 그를 보게 될 것이다.
 
듣고 연구하고 명상하라. 신은 실재요 이 세상은 비실재라는 말을 먼저 들어야 한다. 그 다음 여기에 대한 연구다. 그것이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들은 것을 하나의 이론에 의해서 굳게 체계를 세워야 한다. 다음 단계는 명상이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비실재적인 것으로부터 마음을 거두어들여서 실재인 신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진리를 듣고 이해했지만 그러나 비실재적인 이 세계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면 듣고 이해한 그 지혜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이런 지혜는 세속적인 지식일 뿐 진리를 찾는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어느날 한 사두가 왔다.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베단타에 대한 이야기를 곧잘 하곤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어느 여인과 간통했다는 것을 나는 들었다. 얼마 후 나는 그에게 가서 물었다. '당신은 베단타에 대해서 그렇게 유창하게 말한다. 그런데 당신에 대한 소문은 어찌된 일인가?" 그는 정색을 하였다. "그 소문이란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란 말이오. 여기 아무런 하자가 없소. 그리고 이 세상 전체가 한갓 꿈의 현상에 불과하다면 어째서 나의 그 부정행위만이 실재가 될 수 있겠소. 그 행위 역시 꿈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오." 나는 그를 꾸짖었다. "나는 그대의 그 해박한 베단타 지식을 저주하네. 그대의 그 베단타 지식은 실재가 아니다. 집착과 욕망과 지적인 허영심에 의해서 꾸며진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이 칼리유가 시대에 있어서 즈나나 요가를 실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현 시대에 있어서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음식 섭취에 좌우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재, 현시대의 삶이 즈나나 요가를 수련하기에는 너무나 짧다. 셋째, 이 육체를 자기자신이라고 하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즈나니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해야만 한다. '나는 육체가 아니다. 나는 우주적인 영혼 저 절대자와 하나다. 나의 본질이 육체가 아닌 것처럼 나는 또한 육체의 어느 상태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나는 태어나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다.'
 
즈냐니인 한 수행자가 말한다. "나는 그(신)다. 나는 절대자와 하나다." 그러나 아직 육체 상태에 좌우되고 있는 동안은 이 자기 중심주의는 해로운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인간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파멸을 가져온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속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속인다. 이런 말은 할 필요가 없다.
 
'라마챤드라'라고 부르는 한 수행자가 라마크리슈나를 찾아왔다. 그의 머리는 고행으로 인하여 길게 헝클어져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으면서 줄곧 시보함, 시보함[Sivoham, 나는 그(신)다]만을 외쳤다. 라마크리슈나는 그를 유심히 관찰한 후 말하였다. "그저 입으로만 시보함을 말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신의 가슴에 있는 사원 속에서 신을 명상함으로써 자신의 가슴속에서 신을 깨달은 사람, 이런 사람만이 이 비밀의 언어를 암송할 자격이 있다. 깨달음도 없이 그저 말만을 되풀이하는 것이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깨달음의 경지에 아직 완전히 이르지 못했다면 신을 스승으로써 예배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자신을 신의 종으로 두는 것이 더 좋다." 이에 라마챤드라는 떠나면서 라마크리슈나의 방벽에 이렇게 써놓고 갔다. "오늘 이후부터는 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대로 따르겠다. 나는 신을 나의 스승으로써, 그리고 나 자신을 신의 겸손한 종으로써 여기겠다."
 
신에 대한 허신이 증가할수록, 감각 대상에 대한 집착은 감소된다. 166
 
즈나나 요가의 길을 가는 즈나니는 말한다. '신을 깨닫고자 하면 먼저 순수해져야 한다. 먼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 신에게로 가는 또 다른 길이 있다. 헌신과 사랑의 길이다. 신에 대한 사랑에 눈을 떴다면, 신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헌신의 기쁨에 젖는다면 여기 감정의 억제가 무슨 소용인가?
 
신을 너 자신으로 생각하라. 생각할 수 있는 데까지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라. 그러면 너는 신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특별한 태도와 확고부동한 헌신에 의하여 신을 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신은 너의 기도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신을 우리와 가장 가까운 관계로 만들어야 한다.
 
한 여인에게 라마크리슈나가 말했다. '그대는 딸을 너무 사랑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가 어디를 가든지 딸에 대한 생각이 그대를 압박할 것이다. 그러나 딸을 여신으로 생각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좋은 사람이 된다. 네가 사랑할 수 있는데 데까지 딸을 사랑하라. 그러나 이런 행동을 통해서 여신을 예배하고 공경한다고 생각하라.'
 
여인에 대한 집착이 강한 한 사람에게 라마크리슈나가 말했다. '사랑하는 상대를 신의 화신으로 생각하라. 이런 태도로 그녀를 대하라. 그러면 그 마음을 보다 쉽게 신에게로 향하게 할 수 있다.'
 
감각의 절제란 올바른 식별력을 필요로 하는 수행에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박티의 방법을 택한다면 자기 절제는 저절로 된다. 신에 대한 사랑이 증가하면 할수록 감각의 즐거움은 감소된다.
 
신의 이름을 들어도 감동이 오지 않는 사람에게만 헌신과 사랑의 명상 수행이 필요하다. 그러나 신의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나는 영혼에게는 사랑의 명상 수행이 필요치 않다.
 
신에 대한 헌신은 인간의 모든 적을 삼켜버린다. 신에 대한 헌신이 완전히 깨어나면 분노와 욕망 등 이 모든 나쁜 것들이 부서져버린다.
 
신에게로 향하는 박타는 모든 걸 버린다.
 
아직 올바른 길도 알지 못하면서 신을 깨닫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사람이 있다. 박티로 충만한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순수한 박티의 힘에 의해서 신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올바른 길을 모르더라도 가려는 의지만 확고하면 누군가가 그 길을 정확하게 알려줄 것이다.
 
올바른 식별력과 포기, 그리고 모든 생명력에 대한 사랑, 봉사, 신에의 찬양, 다른 구도자들과의 친교, 진리에 대한 열망과 덕, 이런 것들이 모두 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더욱 더 번성하게 한다.
 
인간의 영혼이 신의 인력에 잡히게 되면 이기심, 개적인 느낌 등등은 순식간에 부서져버린다. 그리고 저 신의 무한한 사랑 속으로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간다.
 
사트바적인 구도자는 그의 기도와 명상 수행을 은밀하게 행한다. 그는 음식이나 옷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사는 집도 조촐하기 짝이 없다. 그는 세상에 대한 감언이설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라마스적인 구도자는 몸의 치장과 복장, 형식 등으로 자기가 속한 종파를 나타내려고 한다. 그는 법복을 입고 기도하고 염주나 묵주를 만드는 등 온갖 형식을 다 갖춘다.
라자스적인 구도자는 불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는 물건을 빼앗는 강도처럼 신에게 달려든다. '나는 신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그의 재산을 상속 받을 권리가 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격렬하다.
 
끊임없이 힘차게 신을 부르며 미쳐라. 어머니를 부르면서 미치광이처럼 춤춰라. 칼리유가에 알맞은 수행법은 예배와 기도를 열정적으로 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조용히 명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결실을 가져온다. 신의 성은 기습으로 점령해야 한다.
 
영혼의 순례를 위한 수행에는 일곱 단계가 있다.
1 수도자들의 집단
2 영혼과 관련된 일에 대한 믿음과 헌신
3 자기의 이상에 한마음으로 헌신하는 것
4 신에 대한 강렬한 사랑
5 신에 대한 생각 속으로 침잠하는 것
6 5의 상태가 더욱 강렬해 지는 것. 그는 육체를 정복한다. 육체에 대한 애착이나 의식이 전혀 없다. 이런 경지는 보통 사람들로는 쉽지 않다. 오직 화신들만이 가능하다.
7 신에 대한 가장 강렬한 사랑. 여기에는 두 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는 이 세상을 잊어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 당계를 통하여 신봉자는 신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삶의 목표에 이르게 된다.
 
신의 이름을 외고, 정해진 날에 단식하고, 성지순례를 하며 숭배하고, 경전에서 지시한 준수사항을 따르는 것 등등 이런 태도를 바이디 박티라 한다. 그러나 여기 또 다른 종류의 헌신과 기도가 있다. 그것을 라가 박티라 한다. 이 라가 박티는 신에 대한 강렬한 사랑을 통해서 온다. 이 라가 박티의 경지에 들어서면 더 이상 의무적인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여기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이다. 세속적인 생각은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 이 라가 박티 없이는 신에 이를 수가 없다.
 
신의 화신을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중요한 것은 신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강렬한가 이다. 이것만이 필요하다. 
 
비 이원론적인 지혜는 가장 높은 지혜이다. 그러나 먼저 주인이 하인에게 숭배 받듯이 신을 숭배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쉬운 길이다. 이 방법은 우리에게 신과의 결합을 가능케 하는 가장 높은 에지를 가져다 준다. 우리는 먼저 이원적 입장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너는 보다 쉽게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신이 너에게 연민의 정을 베풀어 주지 않으면, 마야가 그 문빗장을 열어주지 않으면 그 누구도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며, 자기 자신을 깨달을 수 없다. 영원한 어머니께서 장애물을 제거해 주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가 없다. 마야가 우리를 가엾이 여겨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신을 만날 수 없다.
 
지금 이 시대에는 차라리 그 자신을 전부 신에게 내맡긴 다음, 기도와 헌신을 접근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다. 신을 숭배하는 자는 그를 구할 것이다. 숭배자가 신을 보고자 갈망한다면 신을 이를 허락할 것이다.
 
카르마요가는 일을 통해서 신과 연결되는 것이다. 세속적인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집착 없이 할 수만 있다면 그 일들을 통해서 신을 찬양할 수 있다.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서 신의 이름을 암송하고 여타의 종교적인 의무를 아무런 집착 없이 수행한다면 오직 신을 찬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카르마 요가이다.
 
집착이 없이 일한다는 것은 특히 이 시대에는 아주 어렵다. 그러므로 기도, 헌신, 그리고 사랑을 통해 신과 연결하는 것이 일과 지적인 추구, 철학을 통해서 연결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 그 누구도 자기에게 부여된 일을 회피할 수 없다. 모든 정신적인 활동도 일이다. '나는 느낀다. 나는 생각한다'는 의식 자체도 일에 포함된다. 세속적인 일이 기도와 헌신으로 바뀌면 어떻게 되는가. 신을 향한 사랑과 헌신에 의해서 일 자체가 단순화된다. 첫째, 이 신에게 향한 사랑은 숭배자 자신의 마음을 신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일 자체의 질을 변형시킨다. 둘째, 아무런 집착이 없이 일 그 자체에 몰입하게 된다.
 
지금 이 시대에 신에게의 헌신 없이 일을 한다는 것은 발이 없이 서려는 것과 같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우선 첫째, 헌신을 익혀라. 첫째는 예배와 기도요 줄째는 일이다. 신에의 헌신과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일이란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한다.
 
일에 대한 중압감은 때때로 신에게 가는 길에 발해가 된다. 그러나 즈나니가 집착 없이 일을 한다면 일이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진지하게 신을 찾는 다면 신은 반드시 너를 도울 것이다. 그리고 일의 멍에를 점차 풀어줄 것이다.
 
그는 어느때 인도의 위대한 박애주의자인 이스와르 찬드라 비드야사가르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사트바의 기질을 터고 났다. 즉 지혜를 일깨울 수 있는 순수한 성분을 가지고 태어 났다. 그대가 예배와 기도, 그리고 명상을 할 수 있고, 선행에 헌신할 수 있는 것은 이 사트바의 기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함 자비와 연민 등을 집착이나 어떤 목적 없이 베풀 수만 있다면 좋은 것이다. 이런 것들을 잘 실천하고 박티와 함께 한다면 너는 신에게로 인도될 것이다.
 
오직 명상할 때만 신을 생각하고 다른 때는 신을 잊어도 되는가. 그대 가슴의 연꽃 위에 신을 모신 후에는 그를 숭배하는 램프의 불꽃이 끊임없이 타 올라야 한다. 세상 일에 바쁠 때도 너는 끊임없이 네 안을 응시하고 있어야 한가. 이 램프의 불이 타고 있는지 꺼졌는지를 수시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세 가지 일을 힘써 행해야 한다. 첫째, 신의 이름을 즐겨 부를 것, 둘째,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자비를 베풀 것, 셋째 신을 숭배하는 모든 이들에게 봉사할 것. 신과 신의 이름은 같다. 이 이치를 알고 사랑과 헌신으로서 그의 이름을 수지해야 한다. 이 지구 전체는 한집안이라는 것을 알고 모든 생명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이 말을 하고 라마크리슈나는 사마디에 들어갔다. 이따금씩 그는 반의식 상태로 돌아와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모든 생명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이 놈아, 너는 벌레보다 나을 게 없다. 어찌 감히 모든 생명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말하는가. 자비를 베풀 게 아니라 그들을 섬겨라. 그들은 바로 신 자신의 다양한 현현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그들을 섬겨라.
 
사회 개혁가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이 세상을 위해서 선행을 하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선 먼저 기도하라. 이 세상을 위해서 봉사하려는 너는 누구인지 기도해 보라. 첫째, 헌신적인 기도와 명상 수행을 통해서 가라. 그러면 신을 체험한다. 이때 그대에게 영감과 능력이 부여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선행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되기 전까지는 선행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그러면 세속적인 일들을 포기해야 합니까?' '세속적인 노력들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대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서 하라.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신에게의 간절한 기도도 병행해야 한다. 신의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그리고 이 세상에서든지 내세에서든지 어떠한 보상이나, 기대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주어진 일을 다할 수 있는 힘을 주십사 하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자연은 우리를 일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주저 없이 해야 한다. 어떤 집착도 없이 일 그 자체가 되어 일할 수만 있다면 그 일을 통해 너는 신에게로 가게 될 것이다. 집착이 없이 일한다는 것은 그 일의 결과가 어떻든, 그 어떤 두려움이나 기대도 없이 일 그 자체가 되어 일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은 목적이 아니라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다. 신만이 유일한 목적이다.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일은 신에게 이르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삶의 목적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신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디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지 말라. 일을 하나의 움직이는 기도로 생각하라. 그러면 신을 깨닫게 된다.
 
모처럼의 선행도 도가 지나치면 오히려 신의 길을 방해할 것이다. 분수를 지켜 자기의 형편과 능력을 넘지 말아야 한다.
 
인간에게 순수한 사트바가 깨어날 때 그는 오직 신만을 명상한다. 그리고 그것 이외의 어떤 일에서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신에게의 헌신과 남에게 봉사하는 일을 계속함으로써 이 순수한 성질이 개발될 수 있다. 만일 이 사트바에 라자스가 섞이게 되면 마음은 여러 방면으로 분산되며 다음과 같은 에고의 느낌이 생기게 된다. '나는 이 세상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이 세상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독소다. 그러나 오직 남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한다면 아무 위험이 없다.
 
모든 사람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집착이 없이 헌신적인 마음으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사트바는 그의 라자스적인 요소를 정화시킬 수 있다.
 
처음에는 카르마의 소동이 대단하다. 그러나 우리가 신을 향하면 신을 향할수록 카르마의 소동은 적어진다. 마지막으로 모든 일에서 벗어나서 완전히 사마디에 들 수 있다.
 
저 절대자인 브라흐만은 오직 사마디 속에서만 자각된다. 여기 있는 것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 침묵뿐이다. 실재와 비실재, 존재와 이 세계, 그리고 지혜와 무지에 대한 논란은 모두 잠잠해진다. 여기 남아 있는 것은 '있음' 뿐이다. 이것 외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네가 인간의 차원에 있는 동안은 너의 절대성은 상대성을 내포해야 한다. 너의 불변성은 가변성을 내포해야 한다. 너의 비인격적인 것은 인격적인 것을 내포해야 한다. 너의 하나는 다수를 내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속에'나'라는 이 개인 의식이 있는 동안은 내 앞에는 인격적인 신이 있다. 갖가지 다양한 형상을 통해서 그 자신을 나타내면서… 이 세계와 존재를 통해서, 그 자신을 현현하면서… 
 
절대적 존재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즉 태어나지도 않고 존속하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를 움직이는 자로 생각할 때, 즉 창조하고 유지하고 파괴하는 자로 생각할 때, 샥티, 마야, 혹은 푸라그리띠라 부른다.
 
푸루사는비활동적 존재다. 이에 반해서 푸라그리띠는 끊임없이 활동하는 존재다. 푸루사는 이 모든 행위의 주시자일 뿐이다. 푸르사가 없다면 푸라그리띠는 아무것도 아니다.  
 
비활동적인 브라흐만과 활동적인 샥티는 사실 하나며 같은 존재다. 불과 불의 화력이 하나이듯, 브라흐만과 샥티는 하나이다. 보석과 보석의 광채가 하나이듯 브리흐만과 샥티는 하나다. 이 둘 사이에 차별을 둘 수 없다. 절대자와 그 힘은 하나다.
 
창조, 유지, 파괴의 행동은 곧 샥티다. 조용하건 파도치건 마찬가지다. 특성을 띤 신은 에너지와 결합된 신이다. 이런 신을 우리는 이스와라, 또는 인격신이라고 부른다.
 
사마디 속에서 절대자를 깨달았다고 해도 결국은 감각과 의식의 차원으로 내려오게 된다. 인격신에게 매달리게 된다. 그러므로 인격신의 숭배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배와 헌신이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되면 신봉자는 유형적인 신 속에서 만족을 얻게 된다. 그리고 또 다른 경지에 이르게 되면 무형적인 신 속에서 평안을 얻게 된다.
 
사치다난다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을 자각하지 않는 동안은, 선고 악의 이원적인 지각력이 남아 있는 동안은, 여기 선도 있고 악도 있다. 그러나 선과 악은 하나다라고 그대는 말할 지 모른다. 너의 십장 깊은 곳에 귀를 기울여봐라. 이런 말들이 단순한 말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악한 행위를 저지르는 순간 너의 의식은 너를 괴롭힐 것이다.
 
신은 도둑에게 어서 가서 훔치라고 명령하고, 동시에 집주인한테는 도둑을 조심하라고 명한다. 이렇듯 신은 모든 일을 한다.
 
신의 자각은 어떤 징표로 나타나는가. 거대한 에너지가 갑자기 깨어나서 대뇌 속으로 들어간다. 이때 우리는 깊은 사마디 속에 빠지게 되며 신의 비전을 경험하게 된다.
 
라마크리슈나가 쿤달리히 체험을 말하였다. '발에서 머리로 진동하는 감각과 함께 무엇인가가 상승하고 있었다. 이 감각이 대뇌에 이르기 전에는 아직 의식의 불 꽃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대뇌에 이르는 순간 나는 죽음을 경험했다. 시각과 청각은 정지해 버렸고 말하는 것조차 전혀 불가능했다. 이야기하는 자가 누군가, 나와 너의 구별이 사라져 버렸다. 이 신비로운 영역이 또는 여기까지(가슴과 목을 가리키며) 차올라 올 때의 느낌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그 단계에서는 그 느낌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신비로운 영력이 목을 넘어가자 누군가가 나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 신비로운 영력이 목 위로 넘어갔을 때 나는 나의 느낌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생각의 차원을 넘어선 곳이었다. 마음은, 느낌은, 더 이상 그곳에 닿을 수 없었다. 일은 거기서 끝나 버렸다. 마음이 여섯 번째 차크라에 달했을 때 나는 신의 비전을 경험하면서 사마디에 들어갔다. 여기 신과 나 사이에는 얇은 막이 쳐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엷은 막을 통해 신을 느낄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그는 사마디에 들어갔다. 그러나 설명은 불가능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해주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그것을 원치 않는다. 어머니는 내 입에 보이지 않는 자갈을 물렸다'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름과 형상의 세계를 건너갈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을 절대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이 모든 물체로부터 내 마음을 거두어 들이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순수의식의 정수인 어머니 칼리 여신의 형상이었다. 어머니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나타나서는 내가 이름과 형상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만은 허용하지 않았다. 아무리 마음을 집중하려 애써도 그럴 때마다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은 어머니의 형상이었다.
 
절망적이 되어 나는 한 나체 수행자에게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나는 내 마음을 저 절대적인 경지로 끌어올릴 수가 없습니다. 아트만(참나)과 합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내 말을 듣더니 말하였다. "뭐라고? 불가능하다고? 그러나 그대는 이 수련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깨진 유리조각으로 내 눈썹 중간을 찍어 주더니 "이 지점에 마음을 집중하라" 하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굳은 결심을 하고 다시 명상의 자세로 앉았다. 그러자마자 또 어머니의 형상이 나타났다. 나는 비수와 같이 예리한 내 식별력으로서 내 어머니의 모습을 둘로 절단해 버렸다. 내 마음을 방해하는 것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이 모든 상대적인 차원을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니르비칼파 사마디 속에서 내 자신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 니르비탈파 사마디(무상삼매; 에고가 완전히 사라져 순수의식의 자각만이 존재하는 상태)의 경지에 6개월 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로부터 21일이 되자 몸은 나뭇가지처럼 메말라 버렸다. 밤낮이 변하는 것을 전혀 의식할 수가 없었다. 파리가 입과 콧구멍으로 마구 날라들었다. 나는 마치 감각의 불이 다 꺼진 송장과 같이 되었다. 머리는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대소변도 나도 모르는 사이 나와버렸다.
 
한 사두의 도움으로 나의 의식은 세상으로 서서히 돌아왔다. 그가 음식을 입에 넣어주었으나 삼킬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6개월이 지났다. 어느날 나는 신의 명령을 들었다. '문간에 머물러 있거라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문간에 머물러 있거라' 그러나 그 이후로도 이따금씩 마음은 저절로 니르비칼파의 상태로 돌아가곤 했다.
 
나는 니르비칼파에서 내려오지 않으려는 내 의식을 억지로 끌어내려야만 했다. 그것은 낮은 욕망이 없이는 좀처럼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사소한 욕망들, 먹고 싶거나 제자를 보고 싶다거나 하는 욕구를 능동적으로 만들어냈다. 그러자 마음은 천천히 육체로 내려왔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마음은 또 다시 뛰어 올라가곤 했기 때문에 그때마다 사소한 욕망을 불러일으켜 끌어내려야만 했다.
 
이것이 가장 높은 경지의 사마디이다. 이 경지가 어떤 상태라고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신을체험한 사람에게는 세속적인 기쁨의 값싼 유혹은 더 이상 없다 . 신의 축복을 맞본 사람은 세속적인 기쁨 속에서 더 이상의 행복을 느낄 수 없다.
 
베단타 철학에서는 쿤달리히를 일곱 단계로 구분한다. 이 일곱 단계의 각기 다른 수준에서 수행자는 다른 비전을 보게 된다. 인간의 마음은 세계의 낮은 차크라 단계에서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세 단계보다 좀 더 높은 지점은 배꼽의 반대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식욕이나 육체적인 성욕의 만족으로 흡족해 한다. 그러나 심장의 반대편에 있는 네 번째 차크라 단계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눈부신 광채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이 경지로부터도 이 따금씩 세 개의 낮은 차크라 단계로 떨어지는 수가 있다. 목의 반대쪽인 다섯 번째의 차크라 단계에 이르게 되면 수행자는 신의 이야기 밖에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게 된다. 내가 이 경지에 있을 때 누가 내 앞에서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면 나는 격렬하게 거부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판챠바티(칼리 사원의 숲)에 은거하기로 했다. 나는 세속적인 사람들로부터 피하려 했다. 그들과 관련을 갖는다는 것은 한 번 빠지면 다시는 헤어나오지 못할 함정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들 속에서 숨이 막혓다. 나는 거의 죽음 끝까지 갔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 있을 때조차 잘못하면 세 개의 낮은 차크라로 미끄러질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보호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미간의 반대편인 여섯 번째 차크라에 도달하게 되면 이 모든 두려움이 없어진다. 그는 지고한 영혼(파라마트만)의 비전을 보게 되며 언제나 사마디 속에 머문다. 이 여섯 번째의 차크라 단계와 마지막 단계인 사하스라르 사이에는 엷은 막이 쳐져 있을 뿐이다. 그는 파라마트만에 너무 가까워져서 자신이 신속에 흡수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신 속으로 흡수되지 않았다. 이 여섯 번째의 차크라 차원에서 우리는 다시 다섯 번째나 네 번째 차원으로 타락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여섯 번째의 차크라 차원을 굳게 지키면서 21일 동안 이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면 이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에 쳐진 얇은 막이 찢어지며 신과 영원히 하나가 된다. 인간과 신의 영원한 결합을 우리는 차크라의 일곱 번째 차원으로 들어갔다고 말한다.
 
신의 자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신은 지바뜨만(개별영혼)과 파라마트만(브라흐만)의 통합 속에 존재한다. 둘째, 그의 인간적인 현현을 통해서 우리는 신을 깨달을 수 있다. 첫번째를 즈나나, 즉 지혜를 통한 자각이라고 부르고 두 번째를 박티, 즉 헌신을 통한 자각이라고 부른다.
 
누구든지 신을 분명하게 체험하고 또 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 모여 앉아서 서로 이야기 하는 것처럼 우리는 신과 마주보며 대화할 수 있다. 이 말은 진실이다.
 
인격신의 현현은 승화된 영혼만이 볼 수 있는 영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자면 신의 이런 모습은 신으로부터 파생된 영체의 영적인 기관들에 의해서 지각된다. 그러므로 신을 깨달은 사람만이 신의 이런 모습들을 보게 된다.
 
이 육안으로는 신을 볼 수 없다. 기도와 명상 수행 도중 네 속에서 사랑의 몸이 만들어지면 너는 그 안의 사랑의 귀와 눈으로 신을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다.
 
아나하타, 네 번째 차크라의 소리는 언제나 저절로 진동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프라나바(옴)의 소리다. 이 소리는 절대자 브라흐만으로부터 온다. 이 소리는 오직 요기들만이 들을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이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요기들은 이 소리가 한쪽으로는 배꼽 주변에서 들리고 다른 쪽에서는 절대자 브라흐만으로부터 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진정한 즈나나의 차원에 들어가면 에고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사마디가 없으면 결코 즈나나의 경지를 체험할 수 없다. 즈나나는 정오의 태양과 같아서 주위를 둘러봐도 전혀 그늘을 찾아 볼 수 없다. 사마디에 들어가면 전혀 에고의 그늘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에고가 남아 있다고 해도 그것은 순전히 비드야(신적인 요소, 지혜)로 이루어진 것이고 아비드야(무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붓다는 결코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 자신의 깨달음을 전부 이야기 하지 않았을 뿐이다. 붓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겠는가? 깊은 명상을 통해서 순수한 지혜, 그 자체와 하나가 된 사람, 최고의 지인 각(覺0과 하나가 된 사람이란 뜻이다. 자각의 상태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어떤 것이다. 존재와 비존재는 프라그리티의 변형이다. 실재는 이 둘을 초월한다.
 
지와 무지의 이면을 보라. 무지는 많은 것을 의식하는 것을 말한다. 유일자를 통일성을, 알지 못한 채 다양성만 아는 것이다. 박식으로 인한 이기주의의 근성은 바로 이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신이 이 모든 것 속에 있다는 확신, 그리고 다양성 속에는 통일이 있다는 확신을 우리는 유일에의 자각이라고 부른다. 절대자를 자각하게 되면 지혜와 무지를 모두 내버려야 한다. 절대자는 무지 뿐아니라 지혜조차 초월해 있다.
 
몸과 이 세상에 대한 의식이 마음에서 지워질 때, 인간은 신의 하늘로 날아간다. 사마디 속으로 그 자체가 흡수되어 버린다.
 
인간의 속성은 신성이 현현하기 전에 죽어야 한다. 그러나 이 신성 역시 신의 현현이 있기 전에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에고가 지워져 버리면 지바가 죽는다. 그리고 뒤이어 사마디 속에서 브라흐만의 자각이 일어난다. 지바가 아닌 브라흐마의 자각이
 
내적으로 신과 연결되지 않았을 경우 신은 감성과 이성을 모두 초월해 있다. 그러나 감성과 이성이 정화되었을 때, 신은 이 감성과 이성을 통해여 자신을 현현시킨다. 우리의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은 욕망과 탐욕이다. 그 가슴 속에 무지가 있는 동안은 감성과 이성은 결코 정화될 수가 없다. 그러나 정화된 차원으로 올라가게 되면 이 둘은 하나가 된다. 그리고 순수한 영혼으로 변형된다. 그때 신은 시 순수한 영혼을 통해서 현현한다.
 
사마디 속에서 비이원성을 경험한 뒤에는 다시 낮은 차원으로 내려와야 한다. 에고의식을 갖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은 약간의 마야가 필요하다. 적어도 이 육체를 가동시킬 만큼은 필요하다.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에고는 죽는다. 그러나 에고의 생존력은 아직 거기에 그대로 남아서 육체적인 삶의 기능을 작동시킨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또 다시 속박되지는 않는다. 고통의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그 마음이 이기적이 아니고 순수하며 올바른 것 등은 신이 강림하기 전의 전조이다. 신은 강림하기 전에 신봉자의 열렬한 가슴 속에 사랑과 헌신과 믿음을 보낸다. 신의 축복을 입은 사람은 거기 아주 취해 버린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아주 술 취한 것처럼 보인다.
 
사마디를 경험한 뒤로는 모든 카르마가 떨어져 나간다. 처음에는 누구나 거창하게 일들을 벌인다. 그러나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조용해지며 마침내는 신을 찬양하는 노래와 기도마저 잠잠해진다. 신을 체험하지 못하면 너는 너의 명상과 영적 체험 등에 관해 자주 말하게 된다. 외곽에서 빙빙 돌게 된다. 그렇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이 되면 이 모든 떠들어 댐은 그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너를 보면 그저 즐거움을 느낀다.
 
신을 깨달았을 때 세상은 결코 허무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이 모든 것 속에서 거주하는 신을 섬기게 된다. 그리고 신에게 예배 공양하는 것과 똑 같은 마음으로 가족을 대한다.
 
명상을 통하여 이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다음과 같은 여덟 개의 수갑이 채워졌다. 1 미움, 2 부끄러움, 3 자존심, 4 사회적 인습, 5 두려움, 6 명예, 7 신분에 대한 우월감, 8 에고이즘 등, 명상할 때는 이런 족쇄들을 모두 던져버림으로써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 방과 저 사원 등 나를 둘러 싸고 있는 모든 것이 시야로부터 사라졌다. 나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대신 나는 끝없는 지혜의 바다가 빛나고 있음을 느꼈다. 어느 쪽으로 눈을 돌리던지 내 눈에 보아는 것은 나를 향하여 파도쳐 오는 저 즈나나 지혜의 바다 뿐이었다. 잠시 후 그 바다의 파도들은 나에게 와서 모두 내 안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나는 방바닥에 쓰러졌다. 신의 비전을 체험함으로써 오는 법열로 나는 의식을 잃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법열의 바다에 내 영혼이 헤엄치고 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나는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저 성스러운 어머니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크게 울면서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내 주위로 모였다. 그러나 그들이 나에게는 그림자나 그림 속에 그려진 형상들처럼 보였다. 아주 비실재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 앞에서 어떤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심장의 고통을 통해서 나의 유한한 의식이 상실될 때마다 그 다음 순간에 나는 어머니의 눈부신 영체를 볼 수 있었다. 때로는 웃기도 하고 때로는 충고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보곤 했다.
 
당시 나는 몸의 청결 등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머리칼은 길대로 길어서 서로 엉켜 붙었으며 먼지와 때로 범벅이 되었다. 명상을 하려고 앉았을 때 몸은 빳빳하게 굳곤 하였다. 그리고 마음의 강한 집중력 때문에 몸은 나뭇조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새들이 내 몸을 죽은 육체로 알고 자유롭게 날아와서 머리 위에 앉았다. 먹이를 찾으려고 머리 속을 쪼아 댔다. 그러나 때로는 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강한 고통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머리를 땅에 처박고 몹시 괴로워하였다. 심할 경우에는 머리가 찢어져서 피가 나곤 했다. 명상과 기도 여타의 예배 공양 속에서 하루하루가 삽시간에 지나갔다. 사원의 고등 소리와 종 소리를 듣고 밤이 다가옴을 알게 되는 황혼무렵에야 또 하루가 지났음을 상기하곤 했다. 내 영혼을 휘어 감는 극심한 절망감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땅바닥에 내던져버렸다. 머리를 땅에 처박고 큰 소리로 울어댔다. '어머니 또 하루가 지났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당신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뼈를 깎는 고통이 내 영혼을 괴롭혔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딩구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내가 복통 때문에 괴로워 한다고 생각하였다.
 
내 몸과 마음이 경험한 영적 세계의41분의 1만 경험해도 보통사람 같았으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 날들의 대부분이 어머니의 성스러운 비전에 대한 법열로 지나가버렸다. 그로부터 6년 간은 졸음조차도 내 눈에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애서도 도시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시간에 대한 모든 감각이 나로부터 사라져갔다. 그리고 몸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없어져버렸다. 어머니로부터 내 몸 쪽으로 마음이 거꾸로 되돌아 올 때마다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나를 잡았다. 가끔씩 내가 정말 미쳐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내 육체를 세웠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보았다. 그러나 전혀 감각이 없었다. 나는 두려운 나머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울면서 나는 어머니께 기도 드렸다.  " 어머니, 당신만을 믿고 기도한 결과가 이것입니까? 그 결과로 나에게 이런 불치의 병을 주십니까? 어떤 운명이 내 몸을 덮치더라도 어머니, 절대를 저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제게 당신의 자비와 비전을 보게 해 주십시오. 어머니 아직 당신의 발 밑에서 완전한 휴식처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당신 아니면 저는 휴식처가 없습니다." 울면서 이렇게 기도하자 내 마음은 이상한 감격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동시에 이 몸에 대한 끝없는 혐오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어머니의 비전과 나를 위로하는 어머니의 음성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내 몸 속에서 나와 같은 모양의 산야신이 나타나서 나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곤 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내 모습으로 나올 때면 나는 어느 때는 바깥 사물에 대한 인식이 약간 있기도 하고 어느 때는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이때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현전과 그의 행동뿐이었다. 그가 내 몸 속으로 다시 들어갈 때, 나는 다시 바깥 사물에 대한 인식을 되찾았다. 내가 그에게서 들은 것은 모두 각자들에게 들은 가르침과 똑 같았다.
 
인간의 의지와 신의 은총, 서로 모순되는 이 두 입장을 조화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스승 라마 크리슈나에게 갔다.
 
스승: 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은 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우리 인간의 의지는 소의 밧줄 같이 신에게 매여있다. 밧줄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소가 자유를 갖는 만큼 우리도 어느 일정량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때문에 인간은 그의 의지는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의지는 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제자: 그렇다면 기도와 참회, 명상 등을 애써 수행할 필요가 없겠군요. 우리가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신의 의지이겠군요.
스승: 이 무슨 소리냐. 말로만 가시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해서 가시에 찔릴 때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의지에 따라서 부지런히 영적 수련을 해야 한다. 그러나 누구나 다 영적 수련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 다음의 한 가지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신이 너에게 부여한 의지력을 최대한 사용하지 않으면 신은 더 이상의 의지력은 주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최대한의 노력은 이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의 은총에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자기자신의 노력과 신의 은총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기 자신의 노력은 전적으로 필요하다.
 
이 세상에 살든지, 아니면 이 세상을 떠나든지 그것은 모두 너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너의 삶 전체를 신에게 맡기고 이 세상에 살면서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라.
 
영적 체험을 얻은 후에도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간다면 그는 마침내 영원한 진리의 보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 인간은 광야를 지나가는 나그네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자각'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보물이다. 타마스는 이 세상의 밧줄로 그를 묶었다. 그러나 사트바는 라자스와 타마스의 행동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준다. 사트바 속으로 피신함으로써 인간은 타마스의 영향인 분노, 탐욕, 기만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이렇게 사트바는 이 세상의 멍에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러나 엄밀하게 본다면 사트바, 그 자체도 도적이다. 사트바는 우리를 신의 거주지까지 안내해 준다. 그리고는 사라진다. 사트바조차도 절대 영역에는 들어갈 수 없다.
 
구루의 은총을 입는다면 전혀 두려움이 없게 된다. 구루는 그대의 눈을 뜨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누군지, 너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줄 것이다. -끝-

죄악에 가득 찬 길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감각을 무절제하게 혹사하는 사람,
명상을 모르는 사람,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제 아무리 높은 지성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결코 신에게는 이를 수 없다.
 
(우파니샤드)
 
 
신은 그 자신 속에서 하늘, 땅, 공간,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생명의 에너지로 짜고 있다.
오직 그대 자신의 진실한 영혼만이 그를 알 수 있나니,
부질없는 말장난은 집어치워라.
이것이 불멸의 길이다.
 
(우파니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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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2.1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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