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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견(見)은 되돌아 갈곳이 없다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1.02|조회수124 목록 댓글 1

* 견(見)은 되돌아 갈곳이 없다


ㅇ. 아난의 질문

[본문]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제가 말씀드린 심성(心性)은
각기 ‘돌아갈 곳이 있다’고 하시면서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묘명한 근원의 마음[妙明元心]은
어찌하여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하십니까?

바라옵건대 부디 가엾게 여기시어
저희들을 위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阿難言若我心性은 各有所還하며 則如來說의 妙明元心은 云何無還이리잇고 唯
垂哀愍하사 爲我宣說하소서>

[해설]

심성(心性)은
지금 보고 듣고, 알고 하는 그것입니다.

묘명원심(妙明元心)은 ​
묘하고 밝은 우리의 본바탕 참마음입니다.

정말로 보낼 데가 없으면
우리 마음이 바뀌어 질 수도 있겠지만,

본래 보낼 데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
돌려 보낼 데가 없는 것을
말씀해 달라는 말입니다.

모든 돌려보낼 데가 있는 것을
전부 되돌려 보내고 나서,

마지막 남은 것은
달리 어디로도 돌려 보낼 데가 없으므로,
할 수 없이 내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인도 베단타 철학에서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하면서
모든 것을 부정하며 다 버리고 나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것이
절대바탕인 진아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ㅇ. 분별심은 돌려 보낼 곳이 있다.

[본문]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나를 볼 때에

그 보는 정기의 밝음[見精妙明]이
비록 묘하게 정미로운
밝은 마음[妙精明心]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는 마치
제이월(第二月)과 같고
물에 비친 달 그림자[月影]와는 같지 않다.

너는 응당히 자세히 들어라.
내가 마땅히 지금 너에게 돌아갈 곳이 없는
참 마음을 보여주리라.

<佛告阿難하사대 且汝見我하는 見精明元은 此見離非妙精明心이니 如第二
月이요 非是月影이니 汝應諦聽하라 今當示汝無所還地호리라>

[해설]

<그대가 나를 볼 때에
그 보는 정기의 밝음[見精妙明]이
비록 묘하게 정미로운 밝은 마음[妙精明心]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에서,

견(見)이 정명(精明)하다고 하는 것은
보는 것의 정미롭고 밝은 것,
즉 마음 본체에서 직접 비추는
순수의식을 말합니다.

제이월(第二月), 즉 '두번째 달'이란
손가락으로 눈등을 누르고 달을 보면
원래 달 옆에 또 하나의 달이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월령(月影), 즉 달 그림자는
연못같은 물 표면에 비친
달그림자를 말합니다.

대략 달에는 세가지 형상이 있는데,
제1월(第一月)은 하늘에 떠 있는 진짜 달,

제2월(第二月)은 눈을 눌러서 달을 바라보아 두개의 달이 생긴 것을 말하고,

제3월(第三月)은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를 말합니다.

이것은 마음을 비유한 것인데,

제1월을
마음의 본체인 진심(眞心, 절대바탕 또는 진아)을 비유한 것이고,

제2월은
여기서 말하는 견정명원(見精明元),
즉 순수의식의 비춤을 비유한 것이고,

제3월은
경계가 반연된 이원적인 분별마음(번뇌)을
비유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진심(마음본체, 절대진아)과
여기서 말하는 견정명원(見精明元)을 혼돈하는 경우도 있는데,

진심은, 비유하자면 태양본체와 같고,

견정명원은
태양에서 직접 비치는
'반사되지 않은 순수한 햇빛'
과 같은데,

어찌보면
해와 햇빛이 하나라고 볼 수도 있죠.

그러나 마음 측면에서 말하자면
본체인 진심과
진심에서 직접나온 순수의식,
즉 순수한 견(見)은,

절대본체입장에서는 다 같지만,
깨닫지 못한 중생입장에서는

마음본체와 순수의식(見)은
다르게 보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심(眞心)은
베단타에서는 절대진아(파라브라만)라고 하고,

여기서 말하는
견정명원(見精明元-정미로운 밝은 봄)은

베단타에서는
이스와라 또는 근본마야,
또는 "내가 있다"는
순수존재의식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위의 본문에서 말하는
<견정명원(見精明元)이
마치 제이월과 같고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지 않다>
라는 구절에서,

아난이 부처님의 모습을 볼 때에
그 견정명원은
아난이 경계를 상대로 해서
드러난 見이지만,

그 보는 見의 근원은
정묘한 밝은 마음(본체)에서 나온 것이기에
비록 묘심(妙心, 순수의식)으로 드러나지는 못했으니
마치 제2월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2월이란
본래 달과 바탕이 하나로서
다만 눈을 눌러서 이루어진 것이니,

본래는 견정명성(?)이 둘이 없으나
사람으로 인하여
두개의 달이 생긴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순수의식은
견(見), 그자체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
즉 대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순수의식(見精明元)은
보이는 것이 아니고
전체에 퍼져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베단타에서 말하는
"내가 있다"는 순수존재의식도

육체가 있기 때문에
존재의식이 생긴 것이지,

육체가 '나'가 아니라는 동일시를 제거하면,
그대로 "내가 있다"가
절대본체인 파라브라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에 비친 달은
진짜 달과 가짜 그림자의
두가지 모습이 있는 것이므로

여기서 <물에 비친 달그림자(月影)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견(見) 자체가

본 마음에서
한 줄기 나온 것이었으나,
이제부터는 참마음을 말합니다.

묘정명심(妙精明心)은
본래 보낼 데가 없느냐는 아난의 물음에
지금부터 부처님이 답을 하는데,

후대의 능엄경 주석자(戒環師)는 이를 팔환변견(八還辯見)이라고 말했읍니다.

[본문]

아난아!
이 대강당의 동쪽이 환하게 트여서
둥근 해가 떠오르면 곧 밝게 빛나고,

달도 없는 한밤중에
구름과 안개마저 자욱하면 더욱 어두우며, 문틈으로는 다시 통함을 보고,
담장을 대하여서는 막힘을 보며,

분별하는 곳에서는
반연(攀緣)함을 보고,

허공 속은
모두가 비었으며,

흙비의 현상은
티끌이 얽힌 것이고,

맑게 개어 안개가 걷히면
다시 맑음을 보게 될 것이다.

<阿難此大講堂이 洞開東方하야 日輪升天則有明耀하고 中夜黑月에 雲霧晦
瞑則復昏暗하며 戶牖之隙則復見通하고 牆宇之間則復觀壅하고 分別之處
則復見緣하고 頑虛之中徧是空性이며 鬱挬之象則紆昏塵이요 澄霽斂氛又
觀淸淨하니>

[해설]

<해가 떠오르면 밝게 빛나고>에서,
해가 하늘에 뜬다는 것은
해라고 하는 자체(自體)에 의지해서
밝은 모양이 있다는 것인데,

즉 무엇이든지
그 자체에 원인이 있어서 생긴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해니의 달을 백월(白月)과 흑월(黑月),
둘로 나누어서,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는 백월, 16일부터 그믐까지를 달이 기운다고 해서 흑월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흑월이 그믐을 가리킵니다.

밤중이란 해가 없다는 것이고,
흑월이란 달빛도 없는 때를 말하며,

'달도 없는 한밤중에
구름과 안개마저 자욱하면'이란
별빛마저도 없다는 것입니다.

해는 밝음을 내고,
달과 별이 없는 밤은 어둠을 내고,
벽의 문은 통함을 내고,
담장은 막힘을 내고,

분별하는 곳에서는
연(緣)의 관계를 보고,

허공은 비어있음을 내고,
흙비에서는 티끌이 끼어 캄캄해진 것을 보고, 안개가 걷이면 맑음의 상(相)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본문]

아난아! 너는 이러한 여러 가지 변화하는 모양을 살펴보았거니와 내가 지금 각기 본래의 인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하리라.

<阿難汝咸看此諸變化相어니와 吾今各還本所因處호리라 >

[해설]

눈으로 보이는 여덟가지 현상이 다 그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을  왔던 데로 되돌려 보내겠다고  말하고 이제  다음부터는 각자 돌려 보내는 이야기를 합니다.

[본문]

무엇을 ‘본래의 인연이 있는 곳’이라 하겠느냐?

아난아! 이러한 모든 변화 가운데
밝은 것은 해로 돌려보낸다.
왜냐하면 해가 없으면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밝은 것의 원인은
해에 속한 것이니 밝은 것은 해로 돌려보내고,

어두움은 달이 없는 데로 돌려 보내고,

통하는 것은 문으로 보내고,

막힘은 담장으로 돌려보내고,

대상에 반연하는 것은 분별로 보내고,

빈 것은 허공으로 보내고,

흙비는 티끌로 보내고,

청명은 개인 곳으로 돌려보낸다.

이와 같이 세상 모든 것들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이 여덟 가지를 보는
견(見)의 정미롭고 밝은 성품[見精明性]은
어디로 돌려보내겠느냐!

<云何本因고 阿難此諸變化明還日輪하니 何以故無日不明할새 明因屬日是故
還日하니라 暗還黑月하고 通還戶牖하고 壅還牆宇하고 緣還分別하고 頑虛
還空하고 鬱挬還塵하고 淸明還霽하니 則諸世間一切所有不出斯類어니
와 汝見八種見精明性은 當慾誰還고>

[해설]

앞서 이야기했듯이, 밝은 것은 해가 떠올라서 나온 것이므로 그 원인이 해에 있으므로 해에게 되돌려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둠은 흑월로 돌려 보내고,

통함은 문으로 돌려 보내고,

막힘은 담장으로 돌려 보내고,

연(緣)은 분별(차별)작용때문에 생긴 것이니깐, 연(緣)은 분별로 보내고,

빈것은 허공으로 보내고,

흑비는 티끌로 되돌리고,

맑음은 ​안개가 걷인 것으로 되돌려 보낸다면,


이 세상에 모든 현상이
이 여덟가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이 여덟 가지를 보는
견(見)의 정미롭고 밝은 성품[見精明性]은
어디로 돌려보내겠느냐!>에서,

아란이 능히 볼 수 있는
그 견(見)하는 작용은 어디로 보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즉 밝은 것은 해로 보내고 어둠은 흑월로 보내는 등, 모두 다 그것이 나온 원인으로 되돌려 보냈는데,

그 밝고 어둡고 막히고 통하는 등을
보는
견정명성(見精明性)은 어디로 보내겠느냐,

보낼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인연(因緣)으로 생긴 것은
그 인연의 근원으로 돌려 보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위에서도 여덟가지 현상을 예를 들었지만,
좀더 설명을 덧붙혀 보자면,

금으로 만든 금반지는
그 인연의 근원이 금(金)이므로,
오직 금으로만 본다면,

반지라는 모양과 이름은
별로 가치가 없어지고,
그 가치는 오직 금일 뿐입니다.

벽돌이
흙과 물의 인연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벽돌을 오직 흙이라고만 본다면
벽돌이라는 딱딱한 사각모양과
그 기능은 사라져 버리고
그 가치는 오직 흙일 뿐입니다.

벽돌로 쌓은 담벼락이
그 인연의 근원인 벽돌로만 본다면
그냥 벽돌 쌓아논 것이지,
담벼락이라는 이름과 모양은 그 가치를 잊어버립니다.

우리들의
아는 분별지(知性,알음알이, 分別知)도

진심(眞心)과 무지(無知)가
서로 인연(因緣)관계로 맺어져 합성되어

지성(知性, 알음알이, 분별지)이
생겨났지만,
이 분별지성이라는 것도
사실 물위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아서,

환(幻)이며,
이것을 진심(眞心)으로 되돌려 버리면,
그 자체가 진심인 것입니다.


ㅇ. 見은 돌려 보낼 때가 없다.

[본문]

만약 보는 성품[見精明性]이
밝은 곳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밝지 아니할 때에는 어두움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명암(明暗) 등은
비록 가지가지로 차별이 있다 하더라도
그 보는 성품은 본래 차별이 없는 것이니

<諸可還者는 自然非汝어니와 不汝還者는 非汝以誰리 >

[해설]

​<만약 보는 성품[見精明性]이
밝은 곳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밝지 아니할 때에는
어두움을 보지 못할 것이다>에서

우리의 견정명(見精明)은
밝기 때문에 보니깐,
즉 밝은 것 때문에 본다고 하면

밝지 않을 때는
보지 못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밝은 것 때문에 견(見)이 있어서,
밝은 것을 보았다고 하면,
밝은 것이 없을 때는
견(見)이 없어야 할 것이 아니냐,

견이 없으면
어두운 것도 못 보아야 할텐데,
어두운 것을 보니,
해로 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둠과 밝음은
그것들 간에 차별이 있지만,

그 차별있는 대상을 보는
성품, 見은
본래부터 차별이 없이
항상 일정한 하나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차별이 있는 것은
客(손님)이고,
차별이 없는 것은
주인(主)라는 것입니다.


[본문]

어느 곳이든 돌아갈 수 있는 것은
너의 진성(眞性)이 될 수 없거니와,

네가 돌려보낼 수 없는 것은
너의 진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諸可還者는 自然非汝어니와 不汝還者는 非汝以誰리오>

[해설]

<어느 곳이든 돌아갈 수 있는 것은
너의 진성(眞性)이 될 수 없거니와>에서

여러 가지 돌려 보낼 수 있는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막힌 것, 통한 것 등
모두 돌려 보낼 수 있는 것이니,

네(주인)가 아니다,
즉 그런 것은 모두가
客(손님)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돌려 보낼 수 없는 것은
너의 진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에서

"너" 빼놓고는
모든 대상을 다
그 원인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은
어디에도 돌려 보낼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대상은
그것이 온 원인으로 되돌릴 수 있지만,

보는 見(보는 자) 자체(주인)는
되돌릴 데가 없으니,
그것이 바로 참된 본성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이와 같이
‘너의 마음이 본래 오묘하고 밝고 깨끗한 것이었는데

네가 스스로 혼미하여
근본을 잃고 윤회하면서
생사 속에서 항상 표류하였으며,

그러므로 여래가 가련하다고 말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則知汝心이 本妙明淨커늘 汝自迷悶하고 喪本受輪하야 於生死中에 常被漂溺하니
是故如來名可憐愍이니라 >

[해설]

아란의 마음이
본래 묘하고 밝고 깨끗하다는 것은,

본래부터 그렇다는 것이므로,
닦아서
깨끗하고 맑아진다든지,

수행을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지니고 있는 상태가
밝고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본 마음(本心) 자리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생사에 윤회하지 않을 것인데

본심(本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사에 윤회하니깐 ,

즉 생사의 강물에 빠져서
헤메고 있으니깐,
그래서 여래가 보기
답답해서 가련하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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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2.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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