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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크리슈나무르티의 마지막일기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1.02|조회수137 목록 댓글 1

크리슈나무르티의 마지막일기

 

청어람미디어

 

 

 

생각이란 결심이나 의지 또는 고요하고 텅 빈 상태 속으로 들러가고 싶다는 욕망으로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9

우리 인간이 그러하듯 작은 물체는 스스로의 존재를 자기 집과 연결 지어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인종과 문화, 믿음과 신념 또는 신비의 인물, 구원자 그리고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을 통해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한다. 어떠한 것을 이용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 듯하다. 아마도 우리는 자기 집을 지키려고 하는 작은 동물에게서 이런 점을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왜 우리는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갈망과 욕구를 느끼는 것일까? 옷, 음식, 보금자리 등 물리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통해 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심리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갈망은 피부 속 깊숙이 자리 잡은 내면에서부터 시작되며, 우리는 과거와 전통 혹은 화려하고 낭만적인 이미지나 오랫동안 지켜온 상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싶어한다. 그래야만 안정감과 안전함 그리고 어딘가에 소유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안도한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허상으로 부터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낀다. 인간은 다양한 허상을 느껴야만 하는 존재인 것 같다.

 

명상이라는 단어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이미 타락해버렸기 때문이다. '깊이 생각하다. 고민하다. 숙고하다.'라는

명상의 명상의 일반적인 의미는 상당히 사소하면서도 평범하다.

진정한 의미의 명상을 이해하려면 단어 자체를 잊어버려야 한다.

잴 수 없는 어떤 것을 다어 하나로 재거나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단어나 방법, 생각, 방식, 수련법도 진정한 의미의 명상을 제대로

설명하거나 전달할 수 없다.

명상이란 단어를-사실 이 단어만큼 훼손되거나 변질되어 평범해지지 않은, 더 나아가 돈을 버는 수단으로 타락해버리지 않은 단어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제쳐놔야만 시간과 무관한 움직임을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느낄 수 있다. 움직임이란 단어는 시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마련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움직임이란 처음과 끝이 없는 그런 것이다. 마치 파도의 움직임처럼 말이다. 그 어떤 곳에서도 시작되지 않았으며 부딪혀 부서질 해변도 없는,

그런 끝이 없는 파도 말이다.

시간이란 꽤 성가신 것이다. 얼만큼 더딘가와 상관없이 말이다.

시간이란 곧 성장과 진화를 의미하는데 어떤 것이 되거나 도는 어떤 것을 달성하고, 배우고, 변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시간이란 의지나 욕망의 행동이며, 욕망이란 절대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간은 명상과 전혀 상관이 없다. 35

명상은 그저 단어에 불과하다.

깊고 변치 않는 침묵 속에 천국의 뿌리가 자리 잡고 있다

 

삶과 죽음 43

 

우리는 반드시 결론 또는 최후와 같은 것들로부터 벗어나 생각해야 합니다.

결론과 같은 주장은 제한적이라서 우리의 질문을 편협하게 만듭니다.

 

공동체 또는 국가, 인종. 종교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인간 사이의 갈등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곧 인류전체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일부분입니다.

낭만적이거나 환상적인 말이 아니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중요한 점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왜 이렇게 되었는가 73

 

'지금의 모습'에서 '되어야 하는 모습'으로 변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터무니없는 소리다.

 

'나'라는 존재는 절대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없다.

노력은 기울이겠지만, 또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라는 것은 미묘한 형태로 남아 있게 된다… 자아는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오로지 '나'와 정신 속에 있는 이기심과 불안, 고통 , 슬픔의 끝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전문가가 되기 위해 단련한 사람이 과연 슬픔과 고통, 외로움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성대한 대 성당에서 열리는 의식을 지켜보는 것도 오락의 한 형태다.

신성하고 종교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감정적이고 낭만적인 경험이며 독실함을 느끼게 하는 오락에 불과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자신의 기분을 반드시 표현해야 하며

어떤 형태로든 자제하거나 표출하지 않은 것은 해롭다고 부추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다양한 형태의 강박관념에 빠지게 되고,

당연히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을 도와주는 스포츠와 오락, 유흥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검소함의 첫걸음은 아무런 왜곡과 편견 없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 것이다. 설사 자신에 대해 어떠한 사실을 발견했을 지라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생각과 기분을 통제하거나 억제하려는 노력 없이 그냥 관찰하고 인식하는 것.

마치 싸우는 새들을 지켜보듯이 가지고 있던 편견과 왜곡을 더하지 않고

그냥 관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기 개선이나 자아실현 같은, 바보 같은 생각과 억제를 통해서 얻을 수 없는 검소함을 가져온다.

꽤 유치한 일이다. 관찰을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고, 그 자유 속에 검소함의 위엄이 있다.

 

… 자신으로부터 아무리 멀리 도망쳐서 의식적이거나 도의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해멘다고 하더라도, 갈등과 기쁨, 고통 , 두려움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지워버릴 수가 없다. 억누르려고 노력하고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애를 쓸 수 있겠지만, 결국에 이것들은 늘 수면 위로 올라 오고 만다 기쁨 역시 떨쳐버릴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다. 기쁨 또한 똑같은 갈등과 고통 그리고 지겨움을 지니고 있다. 기쁨의 피로함과 조바심 모두 혼란스러운

인생의 일부다. 안타깝지만 벗어날 수 없다.

생각과 나 자신의 움직임에 대해 신중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는 한 이런 깊은 혼란에서 도망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성가시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미래는 파괴적이고 견딜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의미해질 것이다. 무기력하거나 우울한 생각이 아닌 사실이다. 지금 현재의 모습이 곧 미래의 나 자신의 모습이다. 피할 수 없다.

태양이 떠오른 후 지는 것과 같이 확실한 일이다. 우리 한 명 한 명이 생각의 산출물이 아닌 것으로 변하지 않는 한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몫이다.

 

생각과 시간 93

 

인간은 무질서 속에서 혼란스럽고 확신이 없는 상태로 이런저런 것들에

반응하며 살고 있습니다.

보상을 바라며 처벌을 피하려고 하죠. 안정을 추구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불안 그 자체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삶에 무질서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현재의 모습'에서 달아나려고 합니다.

우리 한 명 한 명에게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신중하고 부지런하게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죠.

우리는 '현재의 모습'을 억누르거나 초월하려고 노력합니다.

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받게되는 질서가 없는 상태에 도달하려고 안달하죠. 하지만 질서를 향한 이러한 노력들이 오히려 더 큰 무질서를 초래하고 다른 문제를 불러옵니다.

 

사건의 본질에 대해 분석하고 조사하여 지속되는 정신이 현실인지 아니면 인간이 안정감과 편안함을 추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희망일 뿐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시간과 행동의 움직임을 아무런 생각 없이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과 생각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것, 두 개의 움직임, 두 개의 행동이 아닙니다. 시간이 곧 생각이며 생각이 곧 시간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생각의 완전한 끝이 있을까요?

지식의 끝이 있을까요? 지식이 곧 시간이고 생각이 곧 시간입니다.

 

하지만 진실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하는 주체가 반드시 필요한데 이 주체는 시간과 축적된 기억, 지식의 산출물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냥 바라보고,

일상적인 삶에 온전히 집중해서 시간과 생각의 끝의 가능성을 발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곧 세계다 107

 

'내가 변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인가?

나의 노력은 그저 커다란 호수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이 아닐까? 결국에는 아무런 영양도 끼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나 한 사람이 바뀐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라는 당신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당신이 곧 인류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세계에서 따로 떨어진 채

혼자 서 있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다. 당신이 곧 세계다.

 

세상은 이미 병들어 있다. 당신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 자신밖에 없다. 수많은 지도자와 전문가, 모든 종류의 외부 기관, 심지어 신까지 그 누구도 당신을 구원해줄 수 없다. 이들은 당신의 정신적 세계에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그들은 당신을 안내해줄 수 없다. 정치인과 교육자, 종교적 지도자도 당신의 내면을 강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줄 수 없다. 그리고 당신이 무질서 속에서 당신의 집을 엉망인 상태로 유지하는 한, 당신은 외면의 예언자를 만들어낼 것이고 그 예언자는 당신을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게 될 것이다. 무질서 상태인 당신의 집을 이 땅 또는 천국에 있는 그 누구도 대신하여 정리해줄 수 없다.

당신이 스스로 무질서와 갈등 그리고 분열의 본질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당신과 당신의 집은 언제나 무질서와 전쟁 속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두려움 117

 

정신은 오로지 기억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정신에 많은 것을 부여합니다. 자질과 선행, 비열한 행동 그리고

외면과 내면의 세계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영리한 행동들 말입니다.

아무런 편견과 결론이 없이 꼼꼼히 들여다볼 때, 그 동안 일어났던 모든

일이 기억과 함께 얽히고 설킨 방대한 망을 가진 우리의 존재 자체에도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우리는 이것에 매달리는 것이지요.

 

기억 이외에 연속성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인간의 뇌 속에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과연 있을까? 작든 크든 크기와 상관없이 기억이

단 한차례도 손대지 않은 그런 공간 말이다.

 

지식이 정신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식을 통해서 한 걸음 더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지켜 보는 것 125

 

처벌과 보상의 원칙에서 사는 우리는 보상을 위해 명령에 잘 따르도록 훈련된 개와 다를 바 없다.

늘 복종에 따른 보상을 바라기 때문이다.

제한적인 뇌가 이런 욕구를 만든다.

 

우리의 인생은 매우 짧다. 이 짧은 시간 동안 기억의 움직임에 불과한 정신에 대해 배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단지 관찰만 할 뿐이다.

생각의 움직임이 없는 관찰, 과거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관찰자 혹은

관찰하는 주체 없이 순수한 관찰 말이다. 그저 지켜본다. 이 모든 것이 삶의 일부다. 열심히 주의 깊게 지켜본다 하더라도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고요하고 텅 비어있는 광활한 공간만이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통찰력 131

 

우리는 절대 오랫동안 바라보거나 관찰하지 않는다… 무언가에 귀 기울일 때에는 어떠한 해석이나 반응 또는 편견 없이 들어야 한다… 듣고 지켜보고 있다는 인식이나 아무런 반응 없이 지켜보고 듣는 곳 말이다… 지켜보고

듣는 것은 우리의 감각을 날카롭게 만든다. 모든 반응과 생각, 기억의 중심에는 뇌가 있다. 우리는 날카롭게 살아 있는 감각 없이 진정으로 지켜보거나 들을 수 없다… 꾸밈없이 지켜보고 들으면, 빨강, 노랑, 흰색 빛을 띄고 있는 꽃의 선명한 색깔과 부드럽고 연약한 봄날의 잎사귀, 줄기, 천국과

지구 그리고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간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된다.

 

욕망 139

 

인생은 '되어가는 것'과 '끝나는 것'의 끊임없는 과정이다… 욕망은 욕망이다. 욕망으로 빚어진 행동은 늘 제한적이며 왜곡될 수 밖에 없다.

그 행동이 고결하든 비열하든 상관없이 말이다.

 

의심이야말로 뇌와 심장을 정화하는데 더 없이 훌륭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신중하게 계산된 의심은 명쾌함과 자유를 가져온다.

 

욕망의 행동이 타락했고 왜곡되었음을 머리나 말로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해한다면, 바로 이 깨달음이 지금과 전혀 다른 행동을 낳는 지능의 시작이다...

 

명상의 시작 149

 

비교는 엄청난 두려움과 슬픔을 낳았다.

 

명상은 산스크리트어로… '되어가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명상을 한다면 이것은 욕망의 또 다른 형태에 불롸하며 욕망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한밤의 고요한 적막 속에서 명상해야 한다.

잠에서 갑자기 깨어났을 때… 뇌가 깊은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명상해야 한다.

 

생각의 활동 157

 

지식의 결과물인 생각은 인간을 전혀 바꾸지 않았고 앞으로도 절대 바꾸지 않을 것이다.

지식은 늘 제한되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을 깨워 165

 

왜 우리는 예민함이라는 몹시 연약한 감각을 점점 잃어가는 것일까?

문제와 혼란뿐 아니라 우리에 관한 모든 예민함 말이다.

 

단 하루라도 평화롭게 173

 

사랑은 곧 관대함과 보살핌, 서로를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과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려는 마음이다. 관대하고 칠정하며 연민을 느끼며 말하고 생각하는 행동을 말한다.

 

만약 우리가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인생의 온전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삶을 사업적, 예술적, 과학적,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 세계라는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왔다.

이러한 세계들이 모두 따로 떨어져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터에서 추악하고 부패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위선과 이중 잣대의 삶을 살고 있다… 사랑과

연민으로부터 비롯된 지능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 지능만이 시간이 지나도 둔해지거나 쓸모 없어지지 않을 유일한 도구다.

 

아무 것도 없음 속에 모든 것이 있다 189

 

… 하지만 관찰은 주목과 인지, 엄청난 연민 그리고 지능을 가지고 있다.

 

뇌를 길들이는 것 199

 

실제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 개념과 형상이 우리 뇌를 길들인다… 서로 다른 인정이 각각의 단어에 중요성과 의미를 달리 부여함으로써 인류의 감정에 분열과 제약이 생기는 것을 지켜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단어의 미묘함과 의미 그리고 그 무게에 굉장히 민감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소년과의 대화 215

 

평범함이란 언덕을 반만 올라가는 것처럼 어떤 것을 밤만 하는 것이고,

산꼭대기 끝까지 오르지 않거나 당신의 모든 에너지와 능력을 다 쓰지 않는 것입니다. 탁월함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어떻게 행동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고란 바보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떻게'라고 묻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 '어떻게'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라고 말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내서와 시스템, 또는 누군가가 당신의 손을 잡고 이끌어주기를 바란다면 나만의 자유와 관찰할 수 있는 능력, 활동과 생각들, 삶의 방식을 모두 잃게 되고 말 것입니다. '어떻게'라고 묻는 순간, 우리는 결국 간접적인 인간이

되고 맙니다. 또한 진실함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정확히 바라보거나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고, 또 그런 나를 초월하기 위한 선천적인 정직함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절대 '어떻게'라고 질문하지 말기 바랍니다. 물론 정신적으로 말입니다. 229

 

파도가 밀려왔다가 다시 멀어지는 것은 인간의 행동과 반응과 닮아 있다. 우리의 행동과 반응은 재빨리 이루어진다. 반응이 이루어지기 전에 순간적 멈춤은 없다.

질문과 대답 사이에도 순간적인 멈춤은 없다. 결국 우리는 인생의 썰물과 밀물인 셈이며, 이는 곧 외면과 내면이다.

우리는 내면이 외면과 완전히 떨어져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외면과 관계를 형성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분명히 외면의 움직임은 곧

내면의 흐름이다.외면과 내면의 쉬지 않는 움직임은 바다의 물처럼 결국

같은 것이며, 도전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245

 

삶은 외면과 내면으로 따로 떨어진 두 개의 활동의 움직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느끼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이며, 이 사이의 연관성이 곧 움직임이자 슬픔과 기쁨, 즐거움과 우울함 그리고 외로움과 탈출의 썰물과 밀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삶이 조각 조각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다.

온전한 그것은 인생의 썰물과 밀물, 행동과 반응의 썰물과 밀물로 부터

자유롭다. 아름다움은 반대말이 없다. 미움은 사랑의 반대말이 아니다. 247

 

우리가 죽음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것도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먼지에서 시작해서 먼지로 끝난다고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죽음에 대해 두려움 없이 친절하게 설명해줄 것이다.

아이들이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하나이며, 죽음이 오십 년, 육십 년

또는 구십년을 살고 나면 그 끝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 나뭇잎의 죽음과도 같은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이다.

 

매일매일 끝이란 곧 자기 자신의 끝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253

 

죽은 나뭇잎의 아름다움과 색깔을 바라보며, 나의 죽음에 대해, 모든 것의 끝이 아닌 시작에 대해 어쩌면 내가 깊게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죽음은 피해야 하고 뒤로 미루어야 하는 끔직한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위대한 광대함을 만날 수 있다. 255

 

 

이 책은 크리슈나무르티가 혼자 고요히 있을 때 녹음기를 향해서 한 말들을 묶어서 낸 유일한 책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1982년에 출판된 <크리슈나무르티의 일기>이후 그는 그것을 계속 써나가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는 손을 더욱 심하게 떨게 되었기 때문에(87세) 더

이상 일기를 계속 써나갈 수 없었다.

이러한 형편은 그로 하여금 자신을 지치게 만들었던 쓰기 대신에 스스로에게 자신의 말을 구술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이 생각은 그의 마음에 꼭 드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즉시

구술을 시작할 수 없었다.

1983년 2월 그는 캘리포니아로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이 책에 실려있는 첫번째 부분을 새로 구입한 녹음기에 구술했다.

이 책에 실려있는 구술일기 중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로스엔젤레서에서 북쪽으로 80마일 떨어진 오자이 계곡에 있는 파인 카티지의 그의 집에서 녹음되었다. 그는 이것들을 아침식사를 마친 후 침대에 누워서 방해받지

않는 채로 구술했다.

 

크리슈나무프티는 1922년 그의 동생과 함께 처음으로 파인카티지에 머물렀다. 그 집은 어떤 친구가 그에게 빌려준 것이었는데

그는 1922년 8월 22일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영적 경험을 하게 된다. 곧 이어서 파인 카티지와 그 주변의 6에이커의 땅을 구입하기 위한 돈이 모금되었으며, 크리슈나무프티 재단이 설립되었다.

1978년 아름다운 새 건물이 크리슈나무르티의 독특한 침실과 거실이 있는 파인 카티지 주변에 지어졌다.

 

그의 구술일기들은 그의 글처럼 분명히 끝나지 않고 있으며 또 때때로 그의 목소리는 녹음기 안에서 맴돌다 더 먼 곳으로 사라져가기도 한다. 따라서 이 구술일기는 그의 <비망록>이나 <크리슈나무르티의 일기>와는 달리

명료성을 위해서 약간의 편집이 필요했다.

독자들은 이 구술일기에서 크리슈나무르티를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구술일기들은 때때로 거의 그의 의식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몇몇 구술일기에서는 그에게 묻고 그로 하여금 답변하게 하는 가상의 방문객을 초대하고 있다.

이 책은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가 대부분의 구술일기의 서두로 삼는 자연에 관한 묘사는 그를 철학자이자 시인으로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의 전존재를 평화롭게 해주며 따라서 그들이 그의 가르침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게 해준다.

그의 구술일기에는 반복되는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반복은 그가

가르치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것들은 과거의 모든 근심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와진 그에게 어떻게 일상의 나날들이 완전히 새롭게 주어지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특이하게도 그의 구술일기 중 마지막 일기는 -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글일 - 죽음에 관한 것이다.

이 일기는 우리로서는 크리슈나무르티가 그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이 년 후 그는 이 일기를 녹음한 파인 카티지에 있는 그의 침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

 

 

강가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 우리는 몇 주간 매일 아침해가 떠오를 때마다 그것을 바라보았다.

해가 서서히 지평선 위로 떠올라 이 나무를 비추면 이 특별한 나무는 갑자기 황금빛으로 변한다.

모든 잎사귀들은 생명의 기쁨으로 빛나고, 당신이 보고 있는 동안 시간은 점점 흐르며 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나무-이름이야 어떻든 이 나무는

아름답다-의 특별한 아름다움은 강가과 강물 위로 넓게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해가 조금 더 높이 떠오르면 나뭇잎사귀들은 팔랑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매 시간마다 나무는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해가 뜨기 전에 나무는 우울한 느낌, 고요, 아득함, 거룩함과 같은 것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낮이 시작되면 햇살은 나뭇잎사귀 위에 빛나고 나뭇잎들은

춤을 추며 너무나 아름다운 특별한 느낌을 준다.

한낮이 되면 그 나무는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당신은 나무를 당신의 친구로 삼아서 결코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며 그 그늘에 앉아 뜨거운 햇빛을

피할 수 있다. 당신이 거기에 앉아 있으면 그곳에는 오직 나무들만이 알 수 있는 깊이 지속되는 안도감과 자유의 관계가 있다.

지는 해로 서쪽 하늘이 환하게 빛나는 저녁 무렵이면 그 나무는 차츰

우울하고 어둡게 스스로를 닫아간다.

하늘은 붉고 노랗고 푸른 색으로 변해가지만 그 나무는 고요히 몸을

숨긴 채 밤을 위한 휴식을 맞는다.

 

만일 당신이 그 나무와 관계를 맺는다면 당신은 전인류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그 나무에 대해 책임을 느낀다면 당신은 세계의 모든

나무들에 책임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이 지상의 살아있는 것들과 관계를 갖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인류와, 모든 인간존재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코 어떤 나무의 특성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한다. 우리는 결코

그것을 만지지 못하며 그 견고함이나 거친 껍질을 느끼지도 못한다.

그리고 그 나무의 일부인 노래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나뭇일 사이를

스쳐가는 바람의 소리도, 나뭇잎을 흔드는 아침의 미풍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스스로의 소리, 줄기의 소리와 뿌리의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당신은 특별히 그 소리를 듣는것에 민감해야만 한다.

 

이 소리는 세계의 소음도 아니고, 마음이 재잘거리는 소리도 아니며,

인간의 싸움이나 전쟁 따위의 야비한 소리도 아닌 우주의 한 부분으로서의 소리이다.

우리가 자연, 즉 곤충과 뛰어다니는 개구리, 언덕 사이에서 짝을 부르며

우는 올빼미와 그렇게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결코 이 지상 위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가 자연과 깊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식욕을 위해서 동물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이익을 위해 원숭이나 개, 모르모트를 해치거나 해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고, 우리의 몸을 낫게 하기 위한 다른 방법들을 발견해 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치료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 치료는 당신이 자연, 즉 나무에 달린 오렌지, 시멘트를 뚫고 돋아난 풀이파리, 구름에 덮이고 가리워진 언덕들과 관계를 맺게 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인 상상이 아니라 지상 위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과의 관계의

진실이다.

 

인간은 수백만 마리의 고래를 죽였고 아직도 죽이고 있다. 우리가 고래를 죽임으로써 얻는 모든 것들은 다른 수단을 통해서도 얻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분명히 동물들, 빨리 달리는 사슴과 놀랄만큼 신기한 영양과 거대한 코끼리를 죽이기를 좋아한다.

또 우리는 서로를 죽이기를 좋아한다. 다른 인간을 죽이는 이러한 짓은

이 지상에서 인간의 삶의 역사를 통해 결코 멈춰졌던 적이 없다.

만약 우리가 자연, 살아있는 나무들과 수풀과 꽃둘과 풀들과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또 맺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어떠한 이유로도 다른 인간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전쟁은 조직화된 살인이다. 비록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전쟁, 핵전쟁이나 기타 여러가지 종류의 전쟁들에 대해서는 반대시위를 하지만, 아직까지는 결코 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시위를 하지 않았었다. 또 우리는 결코 아직까지는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이 지상에서 최고의 죄라고 말하지 않았다.

 

 

41,000피트의 하늘로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비행할 때 당신은 오직 눈, 수 마일에 걸쳐있는 눈만을 본다. 모든 산과 언덕들은 눈으로 덮혀있으며, 또 강들은 얼어있다. 당신은 눈이 온 지상 위를 헤매 휩쓰는 것을 본다. 그리고 훨씬 아래 쪽으로 멀리 떨어져있는 농장들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혀 있다.

그것은 열한 시간의 길고 지루한 비행이다. 비행기 안의 승객들은 끝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한 줄 뒤에 앉은 한 쌍은 결코 말을 그치지도, 이 장엄한 언덕과 산들의

위용을 바라보지도, 또 다른 승객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분명히 떠들어대면서 그들 자신들의 생각, 그들 자신들의 문제에 몰입해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죽음과 같은 겨울 속을 나는 지루하고 조용한 비행 끝에 당신은

태평양에 있는 그 마을에 착륙한다.

소음과 법석을 뒤로 하고 당신은 더럽고 허우적거리는 야비하고 시끄러운 도시와, 거의 똑같은 물건을 파는 끝없는 상가를 떠난다.

당신은 모든 것을 뒤에 버려둔 채, 언덕을 따라 맴돌다가 때때로 바다를

만나기도 하는, 해변을 따라 나있는 아름다운 길, 블루 퍼시픽 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해안을 여행한다.

그리고 당신은 태평양을 뒤로 하고 구불구불한 작은 언덕들을 넘어서 평화롭고, 고요하며, 이 지방 특유의 위엄으로 가득 찬 계곡에 있는 마을로 들어간다. 당신은 지난 6년 동안 계속 그 곳에서 살아왔지만 매번 이 계곡에 들어갈 떄마다 놀란다. 그곳은 고요하며, 인간에 의해 거의 접촉되지 않은 곳이다. 당신은 마치 거대한 컴이나 새둥지 같은 이 계곡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조그만 마을을 떠나 오렌지 과수원과 작은 숲을 지나 약 1400피트 정도 높이의 산으로 올라간다. 공기는 오렌지꽃 향기로 가득 차있다. 계곡 전체가 향기로 가득 차있다. 그 향기는 당신 정신 안에 ,심장 안에 그리고 몸 전체에 가득히 넘친다. 그것은 3주 이상 계속될 향기 안에서 느끼는 삶에 대한 최고로 특별한 느낌이다. 그리고 산에는 고요와 거룩함이

있다. 당신은 이 언덕과 높이가 6,000피트가 넘는 산들을 바라볼 때마다,

이러한 지역이 존재한다는 것에 진정으로 놀란다. 당신이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에 올 때마다. 놀라운 무관심과 깊은 침묵 그리고 느린 시간이 넓게 퍼져나가는 느낌이 있다. 인간은 이 계곡을 훼손시키려고 하지만, 그것은 보존되어 왔다.

 

아침의 산은 유달리 아름답다. 당신은 거의 그것을 만질 수 있다.

그 안에는 장엄, 영원성에 대한 거대한 느낌이 있다.

그리고 당신이 60년 이상 살아온 집으로 조용히 들어가면 대기는,

공기는- 만약 우리가 그런 단어를 쓸 수 있다면 - 성스럽다.

당신은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은 거의 그것을 만질 수 있다.

 

우기이므로 비가 상당히 많이 왔다. 모든 언덕과 산의 봉우리들은 빛나는 푸른색으로 넘쳐흐른다.

-세계는 그런 빛남과 자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깊고 고요한 이해로

미소짓고 있다.

 

"당신은 여러번에 걸쳐 거듭해서 정신, 또는 당신이 좋다면 두뇌는, 자유롭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시간이나 사상 또는 행위가 아닌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고요해야만 하며, 그것이 모아놓은 모든 지식을 비워야만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당신의 말 대부분 가운데서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즉 내가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면 관념을,

그것의 깊이를 포착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요한 텅 빔을 느끼는 것이

엄청나게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결코 그것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느낄 수 없습니다.

나는 마음의 수다를, 이러저러한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심이 야기하는 문제들을 끊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시도해왔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이런 모든 것들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의 삶이며, 권태이고, 가족들 안에서 계속되는 대화입니다.

만약 대화가 없다면 거기에는 언제나 텔레비전이나 책이 있기 마련입니다.

정신은 그것이 점유당해야 할 것, 즉 한가지 것에서 다른 것으로 옮겨가야 하고, 사고의 끝없는 움직임에 따라 지식에서 또다른 지식으로, 행동에서 또다른 행동으로 움직여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지적한 것처럼 사고는 결정에 의해서, 말하자면 의지의 결정에

의해서 또는 조용한 성질, 고요한 텅 빔으로 몰입하려는 절박한 욕구의

결정에 의해서 멈출 수 없습니다. "

 

"나는 내 스스로가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어떤 것이 진리이기를 열망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진리는 내가 갖기를 원하는 것이지만 항상 나를

벗어나고, 나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나는 내가 때때로 해온 것처럼 당신과 대화를 시작합니다. 왜 나의 일상의 삶에는, 직업적인 생활에는 안정, 계속되는 고요함이 없을까요? 왜 이것이 나의 삶에는 없을까요? 나는 스스로에게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왔습니다. 나는 또한 내가 많은 것을 할 수도 또 삶에 관한 모든 것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나를 몰아대는 끊임없는 잔소리가 있습니다. 나는 삶을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만약 내가 삶을 다시 한번 경험할 수만 있다면

그 경험은 나를 풍부하게 해줄 것이며 또 그 기억은 이 어리석은 삶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나에게 줄 수 있을 텐데.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탐구하고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정신은 - 어쩌면 두뇌라는 단어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 그것이 점유당해야 할 것을 요구합니까?"

 

 

어느 날 우리가 문명의 소음과 야만성과 야비함을 벗어나, 인간에 의해

짜맞춰진 모든 것을 벗어나 숲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자 거기에는 모든 것을 감싸 안아주는 위대한 고요 - 평화롭고 아득하며 충만한 대지의 소리 - 의 느낌이 있었다.

당신은 당신 주위의 사물들, 덤불과 나무들, 귀뚜라미와 새들을 방해하지 않고 홀로 조용히 걷다가 갑자기 그들 방식대로 미친듯이 싸우는 두 마리의 조그만 동물을 발견했다.

한 마리는 다른 한 마리를 쫓아내려고 하고 다른 한 마리는 그것의 작은

동굴에 억지로 침입하려 하고 있었다.

그 동굴의 주인은 침입자를 쫓아내려고 싸우고 있었다. 마침내 동굴의 임자가 승리했고 침입자는 쫓겨 달아났다.

다시 고요, 깊은 적막감이 찾아왔다. 당신이 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을

올려다 보니, 그 오솔길 옆으로는 부드럽게 노래부르며 떨어지는 폭포가

있었다. 거기에는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공허하고 거만해보이는 엄숙함이 아닌 지극한 엄숙함과 위대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 조그만 동물은 우리 인간이 그런 것처럼 자기 스스로와 집을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우리의 종족, 우리의 문화,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 그리고 어떤 신비한 형상, 어떤 구원자, 어떤 종류의 초월적 권위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우리 스스로를 어떤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런 느낌을 그 조그만 동물로부터 받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동일화에 대한 이러한 열망이나 갈망이 존재하는지를 궁금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이 동일화를 물리적인 욕구-옷이나 음식, 집 등과 같은 필요한 물건들 - 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심으로, 말하자면 본심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통, 혹은 우리가 상당히 그리워하는 신비한 낭만적 이미지나 상징과 상당히 그리워하는 신비한 낭만적 이미지나 상징과 동일시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동일시에는 분명히 보호나 안전하다는 느낌, 소유했거나

소유당했다는 느낌이 있다. 이러한 느낌은 엄청난 편안함을 준다. 우리는 어떤 형식으로든 환상 안에서 편안함이나 안도감을 느낀다.

분명히 인간은 수많은 환상을 필요로 한다.

 

멀리서 올빼미 우는 소리가 들리고 그 반대쪽 계곡에서 낮고 깊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은 새벽이다. 하루의 소음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고요하다.

해가 떠오르는 곳은 어딘지 신비롭고 성스럽다. 거기에는 여명에 대한,

신비롭고 고요한 빛을 향한 기도와 찬송이 있다.

그 이른 아침, 햇살은 부드러웠고, 미풍조차 불어오지 않았다.

모든 식물들, 나무와 풀들은 고요하고 평온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해는 아마 30분 또는 그 이상이 지날 때까지 떠오르지 않을 것이었다. 여명은 신비한 고요로 천천히 대지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밝아오기 시작했고,

해는 산봉우리를 정결한 금빛으로 물들였다.

산꼭대기의 눈은 햇살로 순결하고 깨끗하게 빛났다.

당신이 산 아래로 난 오솔길을 따라 작은 마을을 떠나 산으로 올라가면,

대지의 소리, 귀뚜라미와 메추라기 그리고 다른 새들은 새로운 날의 숭배로 넘치는 아침노래와 찬송을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면 당신은 생각이 결합시켰던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빛의 일부가 되었다. 당신은 스스로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영혼은 그것의 투쟁과 고통들을 깨끗이 비워내었다.

당신이 산길을 따라 걸어 올라갈 때면 혼자 있다는 느낌마저 사라졌다.

아침 안개는 계곡을 따라 서서히 움직였고, 안개가 점점 더 짙어질수록

당신은 우리 자신의 삶의 환상과 낭만과 순진무구함으로 빠져들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후 당신은 산을 내려왔다.

바람과 풀벌레들의 속삭임과 새들의 노래소리를 뒤로 하고 당신이 산을

내려오자 안개는 소리없이 사라졌다.

새벽의 영광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거리와 상점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당신은 틀에 박힌 일상의 삶을 시작했다. 당신은 반복되는 업무에 사로잡힌 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툼 속에서, 자연과의 동일화를 잃어버리고, 이데올로기의 분열 속에서, 전쟁을 준비하며, 당신 안의 고통과 인간의 영원한 슬픔을 지니고 살아가게 되었다.

 

 

큰 잎사귀든 작은 잎사귀든 모든 잎사귀의 끝에는 특별한 보석처럼 태양에 빛나는 하나의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가벼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풍은 어젯밤에 내린 비로 깨끗하게 씻겨져있는 저 잎사귀 위에 맺혀있는 물방울을 떨어뜨리거나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불고 있었다.

공기 속에 기쁨과 평화와 감사의 마음이 충만한 무척이나 조용한 아침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깨끗하게 씻겨진 모든 잎사귀 위에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자. 모든 전보선과 그 전보선이 전해주는 온갖 추악한 소식들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특별히 더 아름다워졌다. 인간 세상의 모든 소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풍요롭고, 지속적이며, 영원했다.

그리고 비록 여기저기에서 가장 파괴적인 지진이 일어나지만 세계는 살아가며, 그것과 함께 일하고, 커다란 바위와 돌맹이를 옮기느라 우리의 손을 먼지로 더럽히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꽃이나 거대한 나무들이나 길을 따라 나있는 생울타리와

같이 세계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의 특별한 의미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 아침에는 모든 것들이 살아있었다. 우리가 바라보았을 때 거기에는

엄청난 환희가 있었다.

하늘은 푸르렀고 태양은 서서히 언덕 너머로 떠올랐으며 온누리에는

햇살이 넘쳐 흘렀다.

우리가 전기줄 위의 입내새를 바라보았을 때, 그것들은 익살맞은 짓들을

하고 있었다.

높이 날아올랐다가 날카로운 소리로 생의 환희를 노래하며 원을 그리면서 내려앉는 광경을 바라보았을 때,

거기에는 바라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새들만이 존재했다.

바라보는 이는 거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직 긴 꼬리를 가진 잿빛

또는 하얀 색의 새들만이 존재했다.

어떠한 사유의 운동도 없이 바라보는 것, 스스로 놀고 있는 새들의 소란을 바라보는 것만이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결코 오랫동안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가 엄청난 인내심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어떤 느낌도 없이 바라볼 때, 그리고 그 새들과 미세하게 흔들리는 나뭇잎 위의 작은 물방울과 벌들과 꽃들, 개미의 긴 행렬을 바라볼 때, 시간은 정지한다. 시간은 멈추게 된다.

 

우리는 바라보기 위해 시간을 소요하지도 않으며, 바라보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바라봄- 사람들이 걷고, 이야기하고, 몸짓을 하는 방식을 바라봄으로써 많은 것을 배운다.

당신은 그들 자신의 육체의 허영과 나태를 통해서 그들이 무관심하고,

냉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높은 하늘 위에 언덕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날개를 전혀 움직이지 않으며 맴도는 독수리 한 마리가 있다. 그 독수리는 곧 사라졌다.

바라봄과 배움. 배움은 시간이지만 바라봄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또 당신은 들을 때 어떤 해석이나 반응, 어떤 편견도 없이 들으라.

하늘의 천둥소리와 언덕 사이로 울려오는 천둥소리를 들으라.

 

우리는 결코 완전하게 들을 수 없다. 언제나 방해가 있다.

바라봄과 들음은 하나의 중요한 기술이다.

- 어떤 반응 또는 바라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의 감각 없이 바라보고

듣는 것은 하나의 중요한 기술이다.

우리는 바라보고 들음으로써 어떤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무한히 많은 것을 배운다.

책은 필요하다. 그러나 바라봄과 들음은 당신의 감각을 예리하게 만들어준다.

왜냐하면 두뇌는 결국 모든 반응과 사유와 기억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감각들이 고도로 깨어있지 않다면 당신은 결코 진정으로 어떻게 행위해야 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배움에 대해서 바라보거나 듣거나 배울 수 가 없다.

그 배움은 바로 선의 씨앗이 자랄 수 있는 토양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단순하고 명료한 바라봄과 들음이 있을 때 거기에는 하나의 깨달음-붉고, 노랗고 흰 꽃들의 빛깔에 대한 깨달음, 봄의 나뭇잎과 줄기가 그렇게 부드럽고 섬세하다는 깨달음-이 있다.

우리는 나무와 꽃들과 하늘과 저렇게 재잘거리며 왔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 주변에서 무엇이 진행되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환경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자연을 보호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말을 하지만,

언덕의 아름다움과 침묵, 엄청나게 오래된 나무의 위엄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생각과 반응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걷는 방식, 옷을 입는 방식에 대해서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들의 바라봄 그리고 자신들의 깨달음 안에서 자기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깨달아야만 한다는 뜻이다.

 

당신이 깨달았을 때, 거기에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 당신이 지금까지 기억해온 당신의 편견, 공포,

근심, 기쁨과 당신이 지금까지 추구해온 쾌락에 대한 하나의 선택이 존재한다.

이러한 모든 것 안에는 선택이 존재하며, 우리는 선택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좋아한다. 즉 우리는 선택을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또는 더 나아가 선택은 우리에게 자유스러운 느낌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모든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이해할 때 거기에는 어떤 자유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선택의 여지가 없는 깨달음- 어떤 좋아함이나 싫어함도 없는 깨달음-으로 이끌어간다.

이러한 진정으로 단순하고 정직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깨달음이 있을 때, 그것은 또 다른 요소 즉 주의깊음으로 당신을 이끌어간다.

'주의깊음'이란 단어는 그 자체가 긴장, 파악,주장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두뇌 안에 있으며, 두뇌의 활동이다. 바라봄, 깨달음, 주의깊음 등은 모두 두뇌의 영역 안에 있으며 또 두뇌는 유한하다.

- 두뇌는 과거 세대, 인상, 전통의 모든 방식과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 선함에 의해 조건지워져 있다. 따라서 이러한 주의깊음으로부터 생겨나는 모든 행동은 여전히 유한하며 또 유한한 것은 필연적으로 무질서를 야기시킬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침부터 밤까지 우리 스스로 - 우리 자신의 근심, 우리 자신의

욕망, 요구, 충족 - 에 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이러한 자기중심성과 너무나 유한한 존재는 그 역시 유한한 존재인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마찰을 야기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는 반드시 마찰과 수많은 종류의 긴장과 혼란이 있을 것이며, 인간의 영원한 폭력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모든 것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깨달음을 주의깊게 바라보게 될 때, 그것으로부터 통찰력이 생겨난다.

 

통찰력은 회상의 행위나, 기억의 연속성이 아니다. 통찰력은 섬광과 같다.

당신은 모든 복잡성, 결론들, 난해함들을 절대적으로 명료하게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력은 완전한 행위이다.

통찰력 안에는 후회도 돌아봄도, 과소평가도 그리고 어떤 차등도 없다.

이것은 순수하고 분명한 통찰 - 어떠한 의심의 그림자도 드리우지 안는

지각 - 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확실성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그 확실성은 불확실성으로 변해가고, 우리는 불확실성을 안고 죽는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불확실성, 의심, 의문, 물음, 요구로 삶을 시작한다면,

또 인간의 행태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교적 기호들에 대한 진정한 회의로 삶을 시작한다면,

그 회의로부터 확실성의 명료함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폭력에 대한 명료한 통찰이 있다면, 그 통찰은 모든 폭력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통찰력을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두뇌 바깥에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시간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이나 지식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통찰력과 그것의 행위는 두뇌의 세포를 변화시킨다.

통찰력은 완전하며, 그 완전성으로부터 논리적이고 건전하며 합리적인

행위가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바라봄과 들음으로부터 벼락 같은 통찰력에 이르기까지의 이러한 전운동은 하나의 운동이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빠른 화살과 같다.

그리고 두뇌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그 통찰력만이, 어떤 것에의 필요성을 이해함으로써 결정되어 있는 두뇌를 무규정적으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을 제외한 어떤 것도 규정되어 있는 조건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발생시키지 못한다.

이러한 모든 것은 시간이며 또한 시간의 종말이다.

인간은 시간에 구속되어 있으며, 시간에의 구속은 사유의 운동이다.

따라서 사유와 시간의 종말이 있는 곳에는 완전한 통찰력이 있다.

오직 그때에 이르러서야 두뇌의 절정이 있을 수 있다. 오직 그때에 이르러서야 당신은 정신과 완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봄날 아름다운 아침에 곧게 뻗은 길을 따라 걷노라니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다.

하늘에는 구름이 한 점도 없었고 태양은 너무 뜨겁지 않고 아주 따뜻했다. 유쾌한 기분이었다.

나뭇잎들은 공기 중에서 반짝거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 정말로 유난히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높은 산들은 신비롭게 거기에 있었으며,

그 아래의 언덕들은 초록빛으로 신비롭게 거기에 있었으며,

그 아래의 언덕들은 초록빛으로 사랑스러 웠다.

당신은 무심하게 길을 따라 조용히 걷다가 가을에 떨어진 노랗고 밝은 빛깔의 붉은 잎들, 낙엽들, 죽은 나뭇잎들을 보았다.

그 나뭇잎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 죽음에 있어서는 너무나 소박한 이 나뭇잎들은 온 나무와 여름의 아름다움과 활기로 가득 차서 그렇게 활발했었는데.

그것이 시들어 죽지 않았다니 이상한 일이다. 그 나뭇잎을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잎의 모든 엽맥과 엽병, 모양이 보였다.

그 나뭇잎은 바로 나무 전체였다.

 

왜 인간은 질병과 늙음, 노쇠로 몸이 오그라들고 추해지면서 그렇게 비참하고, 그렇게 불행하게 죽어가는 걸까?

왜 인간은 이 나뭇잎처럼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죽을 수 없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무슨 잘못이 있는가?

그렇게 많은 의사와 약품과 병원들과 수술에도 불구하고,

삶의 모든 고통과 쾌락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룩하고 소박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죽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언젠가 길을 따라서 걷다가 우리는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 노래는 고대 산스크리트의 깊이를 가진 아름답고 리듬이 있는 노래였다. 우리는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떤 장자가 허리를 벌거벗고 타오르는 불이 들어있는 진흙으로 만든 도자기 주전자를 옮기고 있었다.

그는 다른 도자기 주전자 하나를 더 갖고 있었으며 그의 뒤로는 두 사람의 남자가 흰 천을 씌운 그의 아버지의 시체를 옮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 노래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으며, 거의 같이 불렀다.

그들이 우리를 지나가자 우리는 그들을 뒤따라갔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길을 따라 내려갔고 그 장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바닷가로 옮겼는데, 그 바닷가에는 이미 거대한 장작더미가 쌓여있었다.

그들은 시체를 그 장작더미 꼭대기에 올려놓고 불을 질렀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놀라울 정도로 소박했다.

거기에는 꽃도 없었고, 귀에 거슬리는 곡성도 없었으며 검은 말이 끄는

검은 수레도 없었다. 모든 것은 고요하고 너무나 존엄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나뭇잎과 그 나무의 수천 개의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되면 그 나뭇잎들은 엄마의 품에서 떨어져 길 위를 뒹굴 것이고

점점 말라서 완전히 시들 것이며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로 흩어졌다가 결국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당신이 어린아이들에게 산수와 쓰기, 읽기와 지식의 습득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가르칠 때,

그들은 당연히 죽음의 존엄성에 대해서도 배워야 한다.

당신은 죽음을 우리가 결국에는 직면하게 되는 무시무시하고 불쾌한 어떤 것으로가 아니라 일상적 삶-푸른 하늘과 잎사귀 위의 메뚜기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삶 - 의 어떤 것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것은 아이들의 이빨이 자라고, 어린아이들이 잘 걸리는 병의 모든 불편함처럼 배움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들은 유난히 호기심이 많다.

만약 당신이 죽음의 본성을 이해하고 있다면,

당신은 모든 것은 죽는다거나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식으로 죽음을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두려움도 없이 당신은 그들에게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 우리가 50살이나 60살 또는 90살이 넘어서 맞게 되는 삶의 종말이 아니라, 죽음은 저 나뭇잎과 같은 것이라고 - 부드럽게 설명할 것이다.

나이 든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얼마나 노쇠하고, 얼마나 기력을 상실하고, 얼마나 불행하고 추해보이는가.

그것은 그들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들은 삶을 써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단지 자아, '나', 개인을 즐기고 강화시키느라 끊임없는 갈등에 낭비해버렸다.

우리는 그토록 다양한 갈등과 불행속에서 우리의 나날을 약간의 기쁨과

쾌락, 술마시고 담배 피우기 그리고 일, 일, 일들로 낭비하고 있다.

그러다가 우리는 삶의 끝에서 죽음이라고 불리워지는 것과 직면해서 두려움에 떤다.

 

나는 죽음이 언제나 깊이 느끼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호기심을 가진 어린아이는 죽음이 단지 질병이나 늙음 또는 예기치 않았던 사건으로 육체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며 일상적인 날들의 종말이 일상적

나날 속의 우리 자신의 종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움 받을 수 있다.

부활이란 없으며 그것은 하나의 미신이며 독단적인 믿음일 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 아름다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살아가고 또 죽어가며,

나타났다가 소멸되어 사라진다.

삶의 이러한 총체적인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성이 요구된다.

사유나 책이나 지식으로서의 지성이 아니라 감수성을 지닌 사랑과 연민의 지성이 필요하다.

나는, 만약, 어떤 교사가 죽음의 의미와 그 존엄성을 이해하고 있다면 죽음의 특별한 단순성을 이해하고 있다면

- 지성적으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깊이 - 그는 죽음은 우리가 피해야 할 종말이 아니며 또 두려워해야 할 어떤 것도 아니라고 학생들에게,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죽음은 우리 삶의 일부이며 따라서 학생들, 어린아이들이 자람에 따라 그들은 결코 그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 이전에 살았던 도든 인간들, 지나간 모든 세대가 아직도 이 세상에 살아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시작은 종말이 아니다.

나는 돕고 싶다. - 아니 그 돕는다는 단어는 틀린 말이다. - 나는 죽음을

어떤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젊었든 늙었든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어떤 실재적인 것 또는 사실적인 것으로

교육에 받아들이고 싶다.

그것은 눈물이나 고독, 분리의 슬픈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죽여왔다.

우리의 식량을 위해서 수많은 동물들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스포츠라는

이름의 오락을 위해 - 사냥철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슴을 죽이는 것처럼 - 불필요하게 많은 동물들을 죽였다. 사슴을 죽이는 것은 내 이웃을 죽이는 것이다.

당신은 자연과, 이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접촉이 없기 때문에 동물들을 죽이게 된다.

당신은 수많은 낭만적, 민족적,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위해 전쟁에서 사람을 죽였다.

당신은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여왔다. 폭력과 살인은 함께 이루어진다.

그 모든 아름다움과 빛깔을 지닌 죽은 나뭇잎을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이 단지 종말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한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깨달을 수도 있었으리라.

죽음은 어떤 두려운 것, 피해야 하거나 연기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날이면 날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놀라우리 만큼 무한한 감정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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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2.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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