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엄경 공부(19)
4-6.
견성(見性)은 외물이 아니고,
자아의 참성품이다
1) 자(自)와 타(他)의 분별
ㅇ. 아난의 질문
[본문]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제가 비록 보는 성품[見性]은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어떻게 하여야
그것이 저의 진성(眞性)임을
사무쳐 알 수 있겠습니까?”
[해설]
아난의 질문은 바로 다섯번째
'견성은 되돌릴 수 없다'의 끝부분에서 이어집니다.
앞서의 '8번 되돌림'을 통해
보는 대상을 육진(六塵)으로
모두 돌려 보내고 난후,
최종적으로
돌려 보낼 수 있는 것은
저절로 아난이 아니며,
아난이 돌려 보내지 못하는
그것은
바로 아난임을 설하셨읍니다.
그런데 아난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네가 돌려 보내지 못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무엇이냐'라는 부분에 대해서
재차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색진(色塵)의 대상이
각각 그것이 나온 것으로
돌려 보낼 수 있으므로
곧 내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돌려보내지 못하는 것이
곧 내가 된다는 것을
아직 수긍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난이 물은 의도는,
돌려 보낼 데가 없다고 해서
참말로 내 성품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내 성품인지
돌려 보낼 성품이지를
모른다는 의문입니다.
ㅇ.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의 분별
[본문]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너에게 묻는다.
네가 아직
모든 번뇌를 여읜 깨끗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부처님의 신비한 힘을 입어
저 초선(初禪)의 하늘을 보는 데에는
장애가 없고,
아나율(阿那律)은 염부제(閻浮提) 보기를
마치 손바닥에 있는
암마라과(菴摩羅果)를 보듯 하며,
모든 보살들은
백천의 세계를 두루 보고,
시방의 여러 부처님은
한량없는 청정한 국토를 보지 못하는 곳이 없다.
그러나 중생들은
똑같이 진성(眞性)을 지녔으면서도
그 보는 것은
분촌(分寸)에 지나지 않는다.
[해설]
<네 아직 모든 번뇌를
부처님의 신비한 힘을 입어
저 초선(初禪)의
하늘을 보는 데에는
장애가 없고,
여읜 깨끗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아란존자는 지금
초과인 수타원과를 얻었으나,
사타함, 아나함을 거쳐
아라한까지 올라가야
번뇌를 모두 끊는 단계(無漏)가
됩니다.
번뇌가 일부만 없어져서
청정하다고는 하지만,
아직 무루청정(無漏淸淨)은 안되고
유루청정(有漏淸淨) 단계라는 것이죠.
<부처님의 신비한 힘을 입어
저 초선(初禪)의 하늘을 보는 데에는
장애가 없고>에서,
지금 아난존자 자신의 힘으로는
초선천까지 올려다 볼 수 없으니,
부처님의 신력으로 초선천까지
장애없이 다 봤다는 것입니다.
아나율은 손바닥에 암마라 열매를 놓고
자세히 드려다 보듯이,
사바세계를 그렇게 자세히 볼 수가 있고,
모든 보살은
백천(百千)의 세계를 두루 볼 수가 있고,
십방의 여러부처들은
이 세상의 먼지알갱이수 만큼이나 많은 청정국토를 보지 못하는데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청정국토는
단순히 청정한 것만이 아니고
오염된 더러운 것도
부처가 보면
청정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분촌(分寸)의 거리,
즉 눈앞에 보이는 것만 알지
보살이나 부처들처럼
넓게 보지 못한다는 것이죠.
이 문장은 온갖 차원의
수많은 세상이 모두
보여지는 객관 대상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읍니다.
[본문]
아난아! 내가 지금 너와 함께 사천왕(四天王)이 거주하는 궁전을 보았고, 그 사이에 물과 육지의 허공을 두루 보았다. 거기에는 비록 어둡고 맑은 갖가지 형상들이 있으나
모두 대상[前塵]으로서 분별되고 장애됨이 없지 아니했으니 너는 응당 여기에서 나와 남을 분별해 보아라.
이제 내가 너를 위하여 보는 작용에서
어느 것이 우리들의 보는 성품의 체(體)이고,
어느 것이 허망한 물상(物像)인지를 가려주리라.
[해설]
사천왕은 수미산의 중간에 산다고 하는데, 사천왕이 하늘에서 궁궐을 짓고 낙성식을 하는데 부처님을 초대해서 부처님이 가시게 됬는데, 아란존자가 부처님 수행비서로 따라갔다는 말입니다. ㅎㅎ.
사천왕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하늘 길 중간에서
물과 육지와 허공 등을 관찰했다는 것입니다.
어디 북두칠성 근방이나 다른 은하계 행성이겠지요.
그렇게 이 넓은 우주에
온갖 현상과 환경이 수없이 널려 있어서
여러가지 차별화가 되어 있지만,
이런 것들이 단순히
앞의 대상 경계 밖에 안되고,
그런 '대상'에는 보는 성품인
'견(見)'이 없다는 것이죠.
<너는 응당 여기에서
나와 남을 분별해 보아라> 에서
여러가지 보는 주체,
보여지는 대상들을 통해서
가령 아난이 보는 것은
自라고 하고,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은
他라고 할 수도 있고,
또 부처님과 함께 보았으니깐
자기가 보는 것은 自라고 하고,
부처님이 보는 것을 他라고 할 수도 있는 등,
한번 스스로 분별해서
사고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너를 위하여
보는 작용에서 어느 것이
우리들의 보는 성품의 체(體)이고,
어느 것이
허망한 물상(物像)인지를
가려 주리라>에서,
지금 아란의 생각에
어느 것은 見이고 어느 것은 物件이고,
물건이 見같고, 見이 물건 같아서,
즉 見과 物件이 뒤섞여 있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섞이지 않은 것을 보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즉, 보는 주체는 무엇이며,
보여지는 대상이 무엇인지
가려주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아난아!
너는 보는 근원[見源]을
끝까지 추구해 보아라.
그러나 위로 해와 달에 이르더라도
모두가 물상이지 너의 진성이 아니며,
아래로 칠금산(七金山)에 이르도록
두루두루 자세히 관찰하여 보더라도
비록 갖가지 '빛'이 있으나
그것도 역시 물상이지 너의 진성이 아니며,
그밖에 다시 점점 관찰하여
구름이 뜨고 냇물과 풀
그리고 사람과 축생을 보더라도
다 물상(物像)이지
너의 진성(眞性)이 아니다.
[해설]
이 세상 모든 현상과 사물, 빛 등은 전부가 보여지는 대상, 즉 물상(物像)이지,
'보는 주체인 見의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 내용입니다.
즉 견(見)이 진성(眞性)이므로,
이 세상에 널려 있는 모든 현상과 물건들은 진성(眞性)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
아난아!
멀고 가까운 모든 사물의 성품이
비록 여러 가지로 다르더라도
모두가 너의
보는 성품의 정미로움[見精]으로
청정하게 보는 것이기에
여러 가지 물류(物類)는
스스로 차별이 있을지언정
그것을 보는 성품은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정미롭고 묘명한 것[精妙明]이
바로 너의 '보는 성품'[見性]이다.
[해설]
세상의 크고 작으며,
어둡고, 밝으며,
가깝고 먼데 있는
온갖 다양한 사물들이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개성을 가지고 있어 차별이 있지만,
모두가 아란이 가진
'하나의 보는 성품'으로
보여지는 것이므로,
수억천가지 물상들이
견성은
오직 하나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차별이 있는 것은 물건(物件, 대상)이요,
차별이 없는 것은 진성(眞性)입니다.
이렇게 정미롭고 묘명한 것이
바로 너의 본래 성품이라는 것은,
앞장에서 이야기한
되돌려 보낼 수 없는 견성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2) 사약장(四若章)
이제부터 소위 사약장(四若章)에 들어 갑니다.
이 능엄경의 사약장이 글이 무척 까다롭고
그냥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대의 능엄경 주석서들도
소견이 여러가지로 나왔습니다.
이 사약장은
'만약 약'자가 네번에 걸쳐 나오면서
견성이
물상(대상)이 아닌, 아체(我體)임을
밝히는
핵심부분입니다.
상당히 축약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선가에서는 공안(公案)으로 애용해 왔습니다.
이 부분은 강사들이 강의를 하면서도 강사와 수강생들간에 논란이 많이 제기되는 부분입니다.
[본문]
<若見是物인댄 則汝亦可見吾之見하리라 >
만약 보는 성품[見]이
물질이라면,
너는 응당
나의 보는 성품[見]을
보아야 할 것이다.
[해설]
앞에서 아란이
되돌려 보낼 데가 없다고
어떻게 내 진성인줄 알겠습니까?
했는데,
그 말 속에는
그것이 物件(대상)일줄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 있읍니다.
그래서 아란이 의심하듯이
만약 見이 物件이라면, 너의 眞性이 아니다
라는 것을
증명해 보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응당
나의 보는 성품(見)을
보아야 할 것이다>에서
만약 보는 성품(見)이
물건(物件, 보이는 대상)이라면,
아란의 견(見)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견(見)도
物件(보이는 대상)이니,
'내 見도 보아야 할 것이 아니냐'하고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若同見者로 名爲見吾인댄 吾不見時에 何不見吾不見之處오 >
만약 하나의 대상을
함께 보는 것으로
‘나의 보는 성품[見]을 본다’고
한다면,
내가 보지 않을 때
어찌하여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보지 못하느냐?
[해설]
아난이 보는 성품(見)을
물건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니깐,
원칙적으로는 못 보지만,
물건이라면
'나의 見을 보아야 할게 아니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견자(同見者)라는 것은,
부처님이 책상을 보신다면
부처님 見이 책상에 주의가 맞추어져 있는데,
그때에 아난도 같이
책상을 보면
이것이 동견자(同見者)라고 합니다.
즉 한 물건을 같이 본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어떤 물건을 보실 때에
부처님 見(주의)이 그 물건에 있습니다.
그때에
내가 그 물건을 같이 본다고 하면
내가 부처님 見을 보는 것입니다
ㅡ 운허스님 강설에서 인용함.
<내가 보지 않을 때는 어째서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보지 못하는가?>에서
물건을 볼 때는
당연히 견(見)이 있으나,
역시 물건을 보지 않을 때도
見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見이 물건이라면,
부처님이 책상을 볼 때만
見이 물건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볼 때도
부처님 見이
물건이어야 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물건이니까,
부처님이 보지 않을 때도
부처님이 보지 않는 見을
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若見不見인댄 自然非彼不見之相이요 >
만약 네가
‘나의 보지 않는 곳’을 보았다면,
자연(自然) 그것은
‘나의 보지 않는 모습'이 아닐 것이다.
[해설]
<만약 '나의 보지 않는 곳'을
네가 본다고 한다면>
견은
대상을 보고 있든,
아무 것도 안보고 있든,
딴데를 보고 있든,
항상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자연 그것은 저 不見하는 相이 아닐 것이다> 에서,
'自然'이라는 말은
'의례이' 또는 '당연히', '저절로'라는
뜻이겠죠.
부처님이 '보지 않는 곳'은
원래부터 못보는 법인데,
즉 見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주ᆞ객이 없는 비이원적이니깐),
부처님이 보지않는 見을
어찌 見으로 미치겠느냐,
(대상적인) 물건이라야
見으로 미치지 않겠느냐
라는 뜻입니다.
본래 부처님이 보지 않는 곳은
見자체이므로
見으로 미칠 수 없는 곳이 되어서,
그것은 원래부터
불견지상(不見之相)인데,
네가 그걸 본다고 하면
불견지상(不見之相)이 아니라
가견지상(可見之相),
즉 볼수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더 이야기 해 보자면,
부처님이
아무 물건도 보지 않을 때에는
그 자체는
물상(物像)이 아닌데,
아란이
그것을 보았다고 한다면
不見之相은 물건이 아니니깐,
物像이 아닌 것을 보았지,
부처님의 不見하는 物像,
즉 不見之物像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견(見)은 物像이 아니다"
라는 결론입니다.
[본문]
<若不見吾不見之地인댄
自然非物이어니 云何非汝리오 >
만약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보지 못한다면 ,
이는 저절로
물질(物質)이 아닌 것이니
이것이
너의 진성(眞性)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해설]
<만약' 내가 보지 않는 곳'을
(아란이) 보지 못한다면>에서,
"내가 보지 않는 곳을
아란이 못 본다고 한다면,
내가 보는 데도
아란도 못 보아야 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즉
내가 보는데도
못 본다고 하면,
見은 물건이 아니다.
내 見이 물건이 아니면
아란의 見도 물건이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 이는 저절로 물건이 아닌 것이니,
이것이 너의 진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나의 보지 못한 데를
네가 보지 않는다고 하면,
네 見이 물건이 아니니까,
내 見이 물건이 아니면
네 見도 물건이 아니다.
그러니 물건이 아니라고 하면
네자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는 말씀입니다.
네가 볼 수 있으면
볼 수 있는 건 다 물건인데,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네가 보지 못한다고 하면
못하는 것이니 見이 물건이 아니다.
見이 물건이 아니면
너자신이 아니겠느냐,
이런 뜻이죠.
여기까지 사약장(四若章)인데,
見은 볼 수 없다는, 아란이 물건인가 의심하는데, 부처님은 물건이 아니라고 해서, 물건이면 보아야 할텐데 보지 못하니 물건이 아니다, 보지 않는 곳을 보아야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본문]
<又則汝今의 見物之時에 汝旣見物인달하야
物亦見汝하리니 體性紛雜하야 則汝與我와
幷諸世間이 不成安立하리라 >
(만약 보는 성품이 물질이라면
물질에도 보는 성품이 있어서)
네가 지금 물건을보는 것처럼
물건도 너를 볼 것이니,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의
체성(體性)이 어지럽게 섞여서
너와 나
그리고 모든 세간[諸世間]의
가지가지 현상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
[해설]
만약 見이 물건이라면
아란이 물건을 볼 때에,
見인 물건이
아란을 보아야 할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見도 물건이니깐
물건도 너를 보아야 되겠다,
즉 아란이 見을 가지고
이 물건을 보니까
(물건도 見이니까)
너를 본다는 이야기입니다.
物件은 無情이고, 見은 有情인데,
아란이 無情인 물건을 볼 때에
물건이 또한 너를 본다고 하면
無情인 물건이 아란을 보니깐
有情과 無情이 뒤섞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체성(體性)이 분잡(分雜)해서
안될 뿐 아니라,
또한 나도 너를 보고
너도 나를 보고
能見(보는 주체)과 所見(보이는 대상)이
달라야 되는데,
위에서 有情과 無情도
分雜하다 했는데,
有情과 有情끼리는
더구나 섞일 게 아니냐,
그러니 有情과 無情이 섞이어
이 세상 너다 나다하는 이런 것들이
하나도 존재하지 못하므로,
그러므로 견(見)이
物件이라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阿難若汝見時에 是汝非我이며
見性周徧인댄 非汝而誰리오 云何自疑
汝之眞性을 性汝不眞하여 取我求實가 >
아난아!
만약 네가 나를 볼 때에
보는 것은
네가 보는 것이지 내가 아니다.
이와 같이
너의 보는 성품[見性]이 두루하다면
항상하고 두루한 이것이
너의 진성(眞性)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어찌하여 스스로 너의 진성을
‘너에게 성품으로서 참되지 못한 것인 양’ 의심하고,
나를 취하여
진실(眞實)을 구하려고 하느냐?”
[해설]
위에서 아무리 見을 보려고 해도
없다고 했지만,
이렇게 가득한데
네가 아니고 누구겠느냐,
이건 너의 見이고 내 見은 아니니
그럼 전체가
네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말입니다.
즉 見은 네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전체에 두루하게
항상 펼쳐져 있는
자신의 참성품(眞性)을 지니고서도,
자기의 성품이
참되지 못한 것처럼 여겨서,
굳이 부처님에게 물어서
그것을 새삼스럽게 확실하게
답을 구해보려고 했느냐고
힐책을 하시는 것입니다.
전체에 두루한 見이
말을 할 필요없이 그대로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뭘 참성품이 가짜니 진짜니 따져 보면서
무엇인가 實을 구하려고 했느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위의 해설부분은 많은 부분이
운허스님 강설을 재정리하고 발췌해서 올렸습니다)
ㅇ. 종합정리
"아난아, 이 가깝고 먼 데 있는
여러 가지 物性이
비록 여러가지로 다르나
모두가
너의 淸靜한 見精이
보는 바이니
곧 모든 물상의 종류가
스스로 차별이 있을지언정,
그 見性은 차별이 없으니
이 정미롭고 밝은 것이 진실로 너의 見이다."
(四若章 부분)
1.
만약 보는 것이 물질이라면,
곧 네가 나의 보는 것을
볼 수가 있어야 할 것이다.
2.
만약 함께 보는 것으로써
나를 보는 것이 된다고 이른다면
내가 보지 아니할 때에는
어찌 나의 보지 아니한 것을
보지 못하느냐?
3.
만약 보지 못하는 그것을 본다면
자연히 저 보지 못하는 것(相)이
아닐 것이다.
4.
만약 내가 보지 못하는
그 자리를
네가 보지 못한다면
그는 저절로 물질이 아니거니
어찌 네가 아니겠느냐?
또 곧 네가 지금 물건을 볼 때에
네가 이미 물건을 보고
물건이 또한 너를 본다면
체성이 분란하고 혼잡하여
곧 너와 나와 및 모든 세간들이
안립함을 이룰 수 없다.
사약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외부로 보여지는 바의 물질은
모두 아체(我體)가 아니고
물질에 따라 차별성을 띠는 것이지만,
그 물질을 보는 見性은 순수한 我體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팔환변견(八還辯見)에서도 확인했듯이
환원할 대상이 있으므로
我體가 될 수 없습니다.
見性을 물질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아난이 앞서
어떻게 견성이 眞性임을 알수 있냐고
물었으므로
진성이 아닌
물질로 가정해 보고
따져 보려는 것입니다.
따져 본 결과가 이치에 맞을 경우
견성은 진성이 될 수 없지만,
따져본 결과
견성이 물질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견성이 진성임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견성을 물질로 가정했을 때
응당 볼 바 대상이 되어
견성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 물건을
부처님과 아난이 같이 봤을 때
부처님이 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난도 역시 보지 못합니다.
만약 부처님이 보지 않는 것을
아난이 본다고 말한다면
이미 (부처님이) 보지 않는 바가
아닌 것이 되므로
모순(矛盾)이 생깁니다.
이는 견성이
외부 대상으로 보여질 수 있는
물질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난이
외부 대상을 봄에 있어서
見性이 물질이 아니라면
자연히 아난의 眞性이 되는 것입니다.
見性이 我體를 성립하는
또 다른 이유는
견성이 물질과
서로 어지럽게 섞여 버리면
내가 물상을 보는 동시에
물상이 나를 보고,
내가 상대를 봄으로써
(상대가 나를 보지 않아도 )
동시에
상대가 나를 보는 것이 되어서
세계의 모든 존재가 혼잡하여
安立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見性은
自와 他를 구분하는
자신의 眞性임을 알수 있습니다.
<"종합 정리편"은 경서원에서 나온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강해소고'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