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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능엄경 공부(20) 참된 성품은 무량(無量)하다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1.17|조회수117 목록 댓글 1

* 능엄경 공부(20)


4-7. 참된 성품은 무량(無量)하다


ㅇ. 아난의 질문 -見은 늘어나거나 줄어듭니까?

[본문]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어!

만약 보는 성품이
참으로 나요 다른 것이 아니라면

제가 여래와 함께 사천왕(四天王)의 수승한 보배의 궁전을 보고자

일월궁(日月宮)에 있을 때에는
보는 성품이 두루 원만해져서
사바세계에 골고루 퍼져 있다가

정사(精舍)에 돌아오면
오직 가람(伽藍)만 보이고,

마음을 맑히는 선당[禪堂, 淸心戶堂]에서는
다만 처마만 보입니다.

세존이시어!
보는 성품이 이와 같아서

그 체(體)가 본래는 온 세계에 고루 퍼져 있다가 지금 방 안에 있을 때에는
오직 하나의 방에만 가득하게 됩니다.

그 때 보는 성품은
큰 것이 축소되어 작아진 것입니까,

아니면 담과 지붕에 막히고 좁아져서
끊어진 것입니까?

저희들은 지금 그 이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큰 자비를 베푸셔서 저희들을 위하여 깨우쳐 주소서!

[해설]

위에서 아난이 물어보는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넓은 공간에서 볼 적에는
이 見이 그와 같아서
그 자체가 본래 전체에 두루해 보이다가,

지금 좁은 방 안에서 보이는 것이
오직 하나의 방안에서만 꽉 차 있으니,

이 見이
큰 것이 축소되어 작아진 것입니까?

장벽이 좁게 차단해서 끊긴 것입니까?"

아난이 생각하기에
장소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여
변하는 것 같다고 의심하고 있읍니다.

탁 트인 곳에서 보면
보이는 것이 넓고 많은데,
좁은 실내에서 볼 때는
작은 방안의 자그마한 시야 뿐인 것이죠.

견이 외물이 아니고 자신의 것이라면,
이렇게 보이는 것이
많거나 혹은 작은 것은

혹시 견자체가
늘어나거나 축소되거나
또는 차단당해서
그러한 것인가 의문을 갖읍니다.

이것은
크다, 작다, 줄어든다, 늘어난다 등의
차이는

보이는 대상(前塵)에 관련된 것으로
대상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지,

보는 자, 즉 見 자체는
크다, 작다, 줄어든다, 늘어난다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난이 아직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이것을
그릇에 담긴 허공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읍니다.

<만약 보는 성품이 참으로 나요,
다른 것이 아니라면>

여기에는 두가지 뜻이 있는데,
즉 내 견성이 보는 성품이지
물건(대상)이 아니라는 뜻과

또한
부처님의 견이나 다른 사람의 견이 아닌,
내가 보는 견이라는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읍니다.


ㅇ. 견은 줄거나 늘어나지 않는다.

[본문]

​[佛告阿難一切世間大小內外와
諸所事業各屬前塵하니
不應說言호대 見有舒縮이니라 ]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세간의 대소내외(大小內外)
모든 일들이
다 앞의 대상에 속하는 것이기에
(그 대상에는 멀고 가까운 차별이 있을지언정)

보는 성품에
‘퍼지거나 줄어듬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해설]

앞에 보이는 대상(前塵)은
크고 작고 안이고 밖이고 하는 것은
모두가 ​ 대상에 속하는 것이지,

見 자체는
줄었다 늘었다 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

ㅇ. 모난 그릇에 담긴 허공

[본문]

이것은 마치 모난 그릇 속에 보이는
모난 허공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니,

내가 다시 너에게 묻는다.

이 모난 그릇 속에 보이는
모난 허공이 고정된 모난 것이냐,
아니면 고정된 모난 것이 아니냐?

만약 고정된 모난 것이라면
따로 둥근 그릇 속에 두더라도

그 허공은 응당
둥글게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이고,

만약 고정된 것이 아니라면
모난 그릇 속에 두더라도
모난 허공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네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다’고 한 이치가 이와 같거늘,

어떻게 보는 성품이
퍼지거나 줄어든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해설]​

​네모난 빈 그릇이 있다면
그 네모 그릇에 허공이 들어 있는데,

그 속의 허공이 원래부터
네모나게 고정된 것인가
혹은 고정된 것이 아닌가
부처님이 묻습니다.

물론 허공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릇모양에 따라서
허공 모양이 달라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허공 자체는
모양이 변하거나
크기가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읍니다.

여기서 네모난 그릇이나 둥근 그릇은
전진(前塵), 즉 대상(對像)을 비유하고,

허공 자체는
見 또는 진심(眞心)을 비유한 것입니다.

즉 둥근 그릇속에 있는 허공이 둥굴게 보이든,
네모그릇 속의 허공이 네모나게 보이든,

그릇에 상관없이
見은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읍니다.

즉 앞의 보여지는 대상이
어떻게 생겼든 간에

우리들의 見 또는 참마음은
무한하고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

아난의 물음에,

전체가 확트인 넓은 곳에서는
見이 무한히 넓다가
좁은 방안에 들어오면
​見이 작아지느냐고 물은 것에 대하여

부처님이
見은 대상의 모양과 크기가 변한다고 해서
見 자체는 안 변한다는 것을

그릇과
그릇에 담긴 허공을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읍니다.
​​
[본문]

<阿難若復欲今人無方圓인댄
但除器方이언정 空體無方이니
不應說言更除虛空의 方相所在니라 >

아난아!
만약 모나고 둥그름[方圓]이 없는 곳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릇의 모난 것만 없앨지언정
허공 그 자체는 모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응당
허공의 모난 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말라.

[해설]

​<만약 모나고 둥구름이 없는 곳에
이르고자 한다면>는,

경계가 없는 곳에 이르고자 한다면,
즉 진심에 이르고자 하면, 하는 말입니다.

<그릇의 모난 것만 없앨지언정
허공 그 자체는 모난 것이 아니다>에서,

잘 몰라서
모난 허공을 치우려 하지 말고,
그릇만 치워버리면
모난 허공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見이
늘었다 줄었다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앞의 경계, 즉 대상이 적으니까
적은 것만 보이고,

경계가 크면
큰 것만 보이니깐,

대상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대개
눈앞의 대상, 즉 전진(前塵)에
끌려 다니면서,

그것이 하자는 대로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네모났다
줄었다 늘었다 하는 얘기는
그릇만 없어지면 그만이지,

그릇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모난 그릇에는
모난 허공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릇만 없애면 되지,
네모난 허공을 없앨 려고 할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若如汝問인달하야 入室之時에
縮見今小인댄 仰觀日時에 汝豈挽見하야
齊於日面고 若築牆宇하야 能來見斷인댄
穿無績逆가 是義不然하니라 >

만약 그대가 질문했던 것처럼
방 안에 들어갔을 때에
보는 성품이 축소되어 작아진 것이라면

해를 쳐다 볼 때에
너는 어떠한 방법으로
보는 성품을 늘려서 해에 닿게 하였느냐?

만약 담과 지붕이 막혀서
見이 끊어진 것이라면
작은 구멍을 뚫었을 때에는
어찌하여 이은 흔적이 없느냐?

이와 같이
보는 성품[見]에는
본래 펴지고 줄어듦이 없는 것이다.

[해설]

<해를 볼 때에 너는 어떠한 방법으로
보는 성품을 늘려서 해에 닿게 하느냐?>에서,

해를 보려면
見이 해까지 올라 가야 할 테니깐 ,

해를 우러러 볼 때는
見을 잡아 당겨서 해 까지 갖다 대느냐는 말입니다.

<만약 담과 지붕이 막혀서
견이 끊어진 것이라면 >에서,

담이 막혀서 가위로 자르듯이
見이 끊어졌다면,

담으로 끊긴 見이 ​
담 밖으로도 남아 있고,
담 안에도 남아 있다면,

그래서 담 때문에
見이 적어 졌다면, 그런 말입니다.

<작은 구멍을 뚫었을 때에는
어찌하여 이은 흔적이 없느냐?
이와같이 보는 성품에는
본래 펴지고 줄어듬이 없는 것이다>에서,

벽에 작은 구멍을 내면,
안의 見과 밖의 見이
이어지는 것이니까,

이것을 담으로 끊어서
한 동강이는 밖에
한 동강이는 안에 있었다고 하면,

그것을 조그만 구멍을 냈을 때는
방안에 있는 견과 밖에 있는 견의
둘을 맺은 흔적,

즉 매듭이 있어야 될 게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깐
끊어졌다면 다시 맺어놓아야 할텐데,
그런 흔적이 없으니,
줄었다 늘었다, 끊었다 이었다 하는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금 아란의 의견이
틀렸다는 것을 말하고

어떻게 해야 되는 지를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아란은 見이
전진(前塵)의 장애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부처님은
見은 장애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一切衆生從無始來로 迷已爲物하야
失於本心하고 爲物所轉故로 於是中觀大
觀小거니와 若能轉物인댄 則同如來하야
卽心圓明하고 不動道場하야 於一毛端에
遍能含受十方國土하리라 >

일체중생이
시작이 없는 옛날부터
자기를 미혹하고

경계[物]를 따라
본심을 잃어버리고
경계에 끌려가는 바가 되었기에

그 가운데에서
크고 작은 것들을 보게 되거니와

만약 경계를 부릴 수 있다면
곧 여래와 같이
마음이 원만하게 밝아져서

도량에서 움직이지 아니하고도
한 개의 털끝 속에
시방의 국토를 받아들일 것이다.

[해설]

<일체중생이 시작이 없는 옛날부터
자기를 미혹하고 경계를 따라
본심을 잃어버리고
경계에 끌려가는 바가 되었기에>에서,

만물이 다
우리의 見性으로 된 것인데,

경계, 즉 물건이 따로 있는 줄 알고,
경계에 끌려 다닌다는 말입니다.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은 것을 보게 되거니와>에서,

그 묘하고 밝은 見의 가운데서
큰것도 보고, 작은 것도 보아서,

물건이 크면 큰 줄 알고,
물건이 작으면 작은 줄 아는
그것이
물건의 지배를 받는 것이지,

見 자체가
무슨 크고 작은 것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면
그럴 것도 같다고 생각하지만,

실지로 전체의 내 존재 안에
만물이 들어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외물의 지배를 받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참성품의 자리가
법계에 가득한 것을 실제로 느껴야 합니다.

<만약 경계를 부릴 수만 있다면
곧 여래와 같이
마음이 원만하게 밝아져서

도량에서 움직이지 아니하고도
한개의 털끝 속에
시방의 국토를 받아 들일 것이다>에서,

내가 만일 경계를 지배하게 된다면
여래와 같은 수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중생과 여래가 다른 것은,
중생은 경계의 지배를 받는데,
여래는 경계를 지배한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죠.

여래와 같이 된다면
심신이 둥굴고 밝아져서

지금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도
털끝 하나에다
온 세계를 집어 넣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크고 작은 경계에 지배를 받지 않고,
온갖 경계를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다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물건을 지배하는데,
우리 중생은 물건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의 본뜻은
見은 장애되지 않는다는 것과,
見은 따로 나눌 수가 없다 것이
여기에서 말하고자하는 본뜻입니다.

見, 자성자리는
분변(分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물 전체가 모두 見이요,

見과 만물은
따로 나눌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용 재정리-복습]

ㅇ. 모난 그릇에 담긴 허공

부처님은
모난 그릇에 담긴 경우를 비유헀습니다.

여기서 그릇은
전진(前塵), 즉 대상이고,

허공은
견성이라고 말 할 수 있읍니다.

또 그릇의 모난 모양은
前塵의 大小, 長短 등의 차이를 의미하고,

허공의 모난 모양을 본 것은
견성에 대한
전진의 그릇된 妄想입니다.

이를 통해 부처님이
견성은 줄어듬과 늘어남이 없음을
설명하시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허공이 모난 것으로 정해졌다면
둥근 그릇을 두더라도 
그 그릇 안에 허공이
둥굴게 보이지 않아야 될 것이고,

허공이 모난 것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면
모난 그릇 안에서도
허공이 모난 것으로
보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허공은
딱히 모양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견성도 그와 같습니다.

2)
만약 허공이 모나고 둥근 모습을
없애고자 한다면

모나고 둥근 그릇을 없애면 되는 것이고,
따로 허공의 모나고 둥근 모습을
없앨려고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전진의 대소, 장단 등의 차이는 
前塵을 제거하면 사라질 뿐
견성 자체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3)
見이 장소에 따라
그 늘어나고 줄어듦이 있다면

방안에 들어 올 때는
일부로 보는 것을 축소하고,

해를 볼 때는
見을 해에 까지 늘이는 것인가?

또 담이 차단되었다면
담에 구멍을 뚫었을 때
구멍을 통해 見이 이어지는
자취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見이
前塵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前塵이
見안에 담겨 있을 뿐입니다.

그릇은 그 모양에 따라
네모나기도 하고 둥굴기도 하고
크고 작고 등의 차별이 있을수 있지만,

그 그릇 안에 담긴 허공은
세상에 두루할 뿐 본래
그러한 차이가 없습니다.

오직 모난 그릇에 담겨 있을 때
그 공간이 모나게 보이고,
둥근 그릇에 담겨 있을  때는
그 공간이 둥굴게 보일 뿐,

사실 본래 모나거나 둥근 형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오히려 둥근 그릇 안의 허공을 둥굴다 하고
모난 그릇 안의 허공을 모나다고 보는 것이 어리석은 중생들의 착각입니다.

여기서 부처님은
전진의 대소장단의 반연심을 떠나면
무착무애(無着無碍)하고
두루한 見性을 얻을 수 있음을
反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見이
늘어나고 줄어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난의 질문에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데,

見이 前塵의 대상을 따라
축소되고 확대된다는 것은

見이 前塵에
종속적인 위치를 갖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不生不滅, 不動, 非遺失, 無還, 無去來한
眞性의 見이

前塵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화한다면,

이미 앞서 말한
見性의 本質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부처님은 이를 경계하고 있읍니다.

일체 중생이
진아를 잊어버리고
물질과 같이 여겨서

물질에 따라 크고 작음을 보고,
자신의 마음도

그에 따라 커지고 작아지는 양
망상과 번뇌에 빠집니다.

이는 본심과 물질이
顚倒된 것이라고 합니다.

망상을 극복하고
본성을 되찾을 때,

우주에 두루한 허공과 같이
前塵에 치우침 없이 무한한 세상을
두루 관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써 견성의 범위가
무한하게 확 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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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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