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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견(見)은 차별이 없다.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1.25|조회수120 목록 댓글 1

* 능엄경 공부(21)


4-8. 견(見)은 차별이 없다.

ㅇ. 아난의 의문 - 보는 성품과 분별심은 어떻게 다른가?


​[본문]

[阿難白佛言호대 世尊若此見精이
必我妙性인댄 今此妙性이 現在我前이라
見必我眞인댄 我今身心은 復是何物이닛고
而今身心은 分別有實하나 彼見無別하야
分辨我身이니다 ]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어! 여래께서는 이와 같이
보는 성품의 정미로움[見精]이
반드시 저의 묘한 성품[妙性]이라 하셨습니다.

지금 그 묘한 성품은 제 앞에 있고,
그것[見]이 반드시 저의 진심(眞心)이라면
지금 저의 몸과 마음은 다시 무엇입니까?

지금 이 몸과 마음은
분별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보는 성품은 분별이 없어
우리의 몸을 가리지 못합니다.

[해설]

<세존이시어! 여래께서는 이와 같이
보는 성품의 정미로움[見精]이
반드시 저의 묘한 성품[妙性]이라 하셨습니다. 
지금 그 묘한 성품은 제 앞에 있고>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묘명견정(妙明見精)이
내 성품이라면, 그 견성이 내 앞에  있다는 말입니다.

아란이 지금
자기의 자체를 見으로 보지 않고,
見하는 물건인 전진(대상)을 見性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見이
어디 한 곳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것(見)이 반드시 저의 진심이라면
지금 저의 몸과 마음은 다시 무엇입니까?>에서,

앞에 있는 見이 내 참성품이라면
분명히 이건 나인데, 이 몸과 마음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즉 見과 몸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몸과 마음은 분별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보는 성품은 분별하지 않아 우리의 몸을 가리지 못합니다.>에서,

몸 마음 자체는 분별되니깐 실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나의 진성이라고 하는 見은 아무 것도 분별하는 실제가 없으니, 아란이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 몸이 참말로 나인지, 밖에 있는 견정(見精)이 어찌 '나'가 될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앞에서 여러가지 見에 대해서 듣고,
보이지 않는 見이 내것이라고 해야 겠는데,

앞에 있는 것을 見이라고 해서,
이 몸은 '나는 사람이고, 저것은 책상이다'고 분별할 수 있지만,

見인 저것은 아무 것도 분별할 수가 없어서 몸인지 눈인지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능히 분별할 수 있는 것은 내 가까운 몸인데, 나와 관계가 없는 보이지 않는 저걸 내것이라고 하니 어떻게 뭘 가지고 믿겠느냐,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본문] 

[若實我心이라 今我今見인댄 見性實我요 而身非我로소니 何殊如來의 先所難言하
신物能見我로닛고 惟垂大慈開發未悟하소서 ]

만일 보는 성품이
참으로 저의 마음이고

그것이 지금 저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그 보는 성품이 진정한 자아(自我)요
이 몸은 내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여래께서 먼저
‘물건[物]이 능히 나를 보리라’고
힐난하여 말씀하신 것과 무엇이 다르옵니까?

바라옵건대 큰 자비를 베푸시어
아직 깨닫지 못한 저희들을 깨우쳐 주소서!”

[해설]

<만일 보는 성품이 참으로 저의 마음이고,
그것이 지금 저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그 보는 성품이 진정한 자아요,
이 몸은 내가 아닐 것입니다>에서,

만일 내 앞에 있는 이 견정(見精)이
내 진심이라고 한다면,
그 진심을 내가 본다면,

앞에 있는 見性은 나지만,
몸은 내가 아닐 거라는 말입니다.

지금 밖에 있는 견정(見精)이
나를 본다고 하면,

<그러면 여래께서 '물건이 능히 나를 보리라'고 힐난하여 말씀하신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에서,

지금 여기 있는 견정이 나이고,
몸은 내가 아니라고 하면,

그렇더라도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닌 몸에 딸린 눈이,
참 내 견성을 보고 있으니

이는
물건이 나를 본다고 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앞에서 부처님이
'물건이 너를 본다고 해서는 안된다' 했는데,

지금 분명히 이건 내 몸이 아니고
밖에 있는 見精이 참말 나라고 한다면

지금 보기는
이 눈을 가지고 見精을 보니깐,
내가 아닌 물건이
나를 보는 겁니다.

즉, 이 몸인 물건이
밖에 있는 見精인 나를 보는 것 같다,
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과
상반(相反)되는 것 같다는 것이죠.

지금까지 아란은
진짜 내 見이라면 내 몸에 있지 않고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죠.


ㅇ. 형상이 있는 것은 위치가 있어서 모두 가리켜 보일 수 있다.

[본문]

[佛告阿難今汝所言한
見在汝前이라호미 是義非實이라 ]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네가 ‘보는 성품이 앞에 있다’고
말하였는데

그 말은 이치가 옳지 않다.

[해설]

아란이 보는 성품인 見이
앞에 있는 것인 줄 아니깐,

見이 네 앞에 존재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다고 하는 것은 앞에 있는
前塵(대상)을 보는 것이지, 見 자체는 아니다.

그래서 見이 앞에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라는 뜻입니다.

[본문]

[若實汝前하야 汝實見者인댄 則此見精旣有方所이니 非無指示하리라 且今與汝坐
祗陀林하야 遍觀林梁及與殿堂어니와 上至日月前對恒河하니 汝今於我獅子座에
前擧手指陳하라 是種種相이 陰者是林明者是日이요 礙者是壁通者是空이요 如是
乃至草樹纖毫히 大小雖殊이나 但可有形無不指著하리라 ]

만약 참으로 보는 성품[見]이
네 앞에 있어서
네가 보는 것이라면

보는 성품의 정미로움[見精]이
이미 장소가 있는 것이니
가리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너와 함께 지타림에 앉아서
두루 숲과 냇물과 전당(殿堂)을 보고 있는데, 위로는 해와 달에 이르고
앞에는 항하(恒河)를 대하고 있다.

그대가 지금 나의 사자좌(獅子座) 앞에서
손을 들어 가리켜 보아라.

이 갖가지 모양들이
그늘진 것은 숲이고,
밝은 것은 태양이며,
막힌 것은 벽이고,
통한 것은 허공이다.

이와 같이 더 나아가
풀과 나무 그리고 실오라기와 터럭 끝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것은 비록 다르지만
형상이 있는 것은
다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해설]

만약 보는 성품인 見이 네
앞의 대상으로 나타난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장소를 차지하고
가리켜 보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보이는 대상이지,
보는 자체(見)는 아니죠.

그래서 부처님이
이 세상 모든 물건과 현상들(前塵)은
모두 형상이 있으므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가 있다는 것을
실례를 들어서 지타림에 앉아서
주변의 사물들을 하나하나 가리켜 보이며
예를 들고 있습니다.

즉, 형상이 있는 것들,
대상들은 다 손으로 가리켜 보일 수가 있지만,

보는 성품인 見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가리켜 보일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ㅇ. 보는 성품은 위치가 없다.

[본문]

[若必有見現在汝前인댄 汝應以手確實指陳하라 何者是見고 阿難當知하라 若空
是見인댄 旣已成見이니 何者是空이며 若物是見旣已是見이니 何者爲物이리요 
汝可微細히 拔剝萬象하야 析出精明淨妙見元하야 指陳示我호대 同彼諸物分明無
惑케하라 ]

만약 보는 성품[見]이
분명히 네 앞에 있다면
너는 응당 손으로 확실하게 가리켜 보아라!

어느 것이 그 보는 성품이냐?

아난아! 마땅히 알라.
만약 허공이 보는 성품이라면
허공이 이미 보는 성품이 되어 버렸는데
어떻게 허공이라 하겠느냐?

만약 물건이 보는 성품이라면
물건이 이미 보는 성품을 이루었는데
어떻게 물건이라 하겠느냐?

너는 세밀하게 만상을 나누고 쪼개어서
정미롭고 깨끗하고 오묘한[精明淨妙]
보는 성품의 근원을 드러내어

나에게 가리켜 보여
저 모든 물류[物]의 모습과 같이
분명하게 의혹이 없게 하라.”

[해설]

만일 見이 앞에 있는 것이라면
그 위치가 있을 것이므로
그 앞에 있는 見을
가리켜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

또, 허공이 見이라면,
허공이 보는 성품인 見이 되었으니,
그럼 허공은 어느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또, 물건이 보는 성품이라면,
그럼 물건은 어느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 중에서
미세하게 분석하고 쪼개서 정묘한 見을
추출해서 부처님 눈 앞에
명쾌하게 내보여 보라는 말씀입니다.

즉, 見은 쪼개거나 나눌 수가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쪼개거나 나눌수 없기 때문에
어떤 특정 위치가 없고,

전체에 걸쳐 편재해 있다는 것을
말없이 드러내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阿難言我今於此重閣講堂에 遠泊恒河하며 上觀日月호대 擧手所指며 縱
目所觀에 指皆是物이라 無是見者니다 世尊如佛所說하야 況我有漏初學
聲聞어니와 乃至菩薩亦不能於萬物像前에 剖出精見하고 離一切物이라야
別有自性이니다 佛言如是如是하시다 ]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제가 지금 이 곳의 여러 층으로 된 강당에서 멀리는 항하에까지 이르고,
위로는 해와 달을 보거니와
손을 들어 가리키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들이 다 대상인 물질[物]이지
이것을 보는 성품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세존이시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아직 번뇌를 여의지 못한
유루(有漏)의 초학성문(初學聲聞)이기에 그렇거니와

나아가 보살이라 하더라도
온갖 물상(物像)에서
따로 정미로운 견[見精]을
쪼개어 낼 수는 없고,

일체의 물(物)을 여의어야
견의 자성(自性)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건 그렇다.”

[해설]

아란의 말이
주변의 이 모든 것이 다 물건이지,
어느 것이 見이라고
가리킬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漏란 '번뇌'를 말하는데,
아란한이 되면 漏가 없지만,

아란은 아직 초과만을 통과했으니
번뇌가 남아 있읍니다.

그런데 초학인 아란 뿐만 아니라,
대보살들도 ​대상적인 物에서는
見을 분리해서 지적할 수가 없고,

오직 일체 대상적인 것을 초월해야
보는 성품인 見을 알수가 있다고
아란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아란이 초학이라고
능력이 부족해서 
만물 속에서 見을 못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見은 원래부터 드러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見은 대상으로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부처님이
'그건 그렇다'고 긍정하십니다.

[본문]

[佛復告阿難 如汝所言인달하야 無有精見하고 離一切物이라야 別有自性인댄
則汝所指한 是物之中에 無是見者라니 ]

부처님이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네가 말한 바와 같이

‘물상(物像)에서
따로 정미로운 견[精見]을 쪼개어 낼 수 없고,

일체의 물(物)을 여의어야
보는 성품의 자성(自性)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네가 가리킨 저 물상에는
견(見)이 없다는 말이 된다.

[​해설]

위에서 아란이 말한 見이
모든 물건을 떠나서
따로 자성이 없다고 한
말꼬리를 붙잡고서,

아란이 가리킬 수 있는 물건 중에는
見이라 할 것이
전혀 없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아란의 의견을 떠봅니다.

즉 아란의 생각은
見이 없다고 결정적인 생각을 하니,

다시 부처님은 見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아란의 말을 끄집어  내놓는 것이죠.

[본문]

[今復告汝하노라 汝與如來로 坐祗陀林하야
更觀林苑과 乃至日月種種象殊
하니 必無見精受汝所指인댄 汝又發明하라
此諸物中에 何者非見고 阿難言
我實徧見此祗陀林호대 不知是中에
何者非見이니다 何以故 若樹非見인댄
云何見樹며 若樹卽見인댄 復云何樹닛고
如是乃至若空非見인댄 云何爲空
이며 若空卽見인댄 復云何空이닛고
我又思惟호니 是萬象中에 微細發明하면
無非見者니이다 佛言如是如是하시다 ]

지금 다시 너에게 묻는다.
너와 여래가 지금 지타림에 앉아서
저 숲과 동산, 나아가 해와 달에 이르기까지

가지가지 형상이
서로 다름을 보았을 것이다.

그 가운데 반드시
보는 성품의 정미로움[見精]이

너의 가리킴을 받는
물(物)에 있지 않다면

너는 다시 이 모든 물상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견 아닌 견[非見]인지를
밝혀 보아라.”

아난이 대답하였다.
“제가 사실 이 지타림을 두루 보았으나
이 가운데 어느 것이
견 아닌 견[非見]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나무가 견(見)이 아니라면
어떻게 나무를 보며, 나무가 만약 견(見)이라면 어떻게 나무라 하겠습니까?

따라서 저는 다시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온갖 물상을 지혜롭고 미세하게 살펴볼 때에
그 가운데에 견(見) 아닌 것이 없겠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건 그렇다.”

[해설]

주변의 여러가지 사물이 다름을 보면서,
그 여러 물건 가운데서

보는 성품인 견정(見精)은
앞에 가리킬 만한 어떤 물건에도 있지 않다고 아란이 방금 전에 말했는데,

그렇다면 그 모든 물건 중에서
보는 성품이 없다는 것인데,

그 모든 물건 중에서
보는 성품이 아닌 것(非見)을
지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아난의 모든 물건에는
견이 없다는 결정적인 생각을 뒤집기 위해서,

이 모든 물건 중에 
보는 성품이 아닌 것이 어디에 있는지
밝혀 보라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아란이
見이 아니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나무가 見이 아니라면
어떻게 나무를 보며>에서,

위의 문장에서
허공이 見이라면
어느 것이 허공이겠느냐 말과 같이,

나무가 견이 아니라면
나무를 보지 못해야 할 텐데,

그러나 나무를 보니
見이 없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나무가 견이라면
나무는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만약 나무가 見이라면
어느 것이 나무입니까?>에서,

見 대신 어떤 것을
나무라고 해야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見 아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또 "그건 그렇다"고 긍정하십니다.

부처님이 견이라고 해도 그렇다 하고,
견 아니라 해도 그렇다 하고,

둘을 다 긍정하시는 말인데,

먼저 말이 옳았으면,
뒷말은 틀렸다고 해야 하고,

뒷말이 옳다고 하며
앞말은 틀렸다고 해야 할텐데,

즉 견이다라는 것도 옳고,
견아닌 것도 옳다고 했으니,
청중들이 헷갈리고 있습니다.


[본문]

[於是大衆의 非無學者는 聞佛此言하고
茫然不知是義終始이라 一時惶悚하야
失其所守러라 ]

그 때 대중 가운데에서
아직 무학(無學, 아라한)에
이르지 못한 이들은

부처님의 이러한 말씀을 듣고도
아직 그 뜻의 처음과 끝[始終]을
알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 하면서

마치 간직하고 있던 물건을
잃어버린 듯이 하고 있었다.

[해설]

무학(無學)이란 공부를 마쳐서
더 배울 것이 없는 아라한을 말합니다.

이렇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아라한들조차

부처님의 見이라 해도 그렇다,
見이 아니라 해도 그렇다,라는
말씀에

종잡을 수가 없어
대중이 어리둥절하는 모습입니다. ​

​[본문]

[如來知其魂慮變慴하고 心生憐愍하야
安慰阿難及諸大衆하사대 諸善男子야
無上法王是眞實語에 如所如說하며
不誑不妄하여 非末伽梨四種不死라하는
嬌亂論議이니 汝諦思惟無忝哀慕하라 ]

여래께서는
그들이 어리둥절해 한다는 것을 아시고
가엾은 마음을 내시어

아난과 여러 대중들을 위로하시려고
말씀을 계속하셨다.

“여러 선남자들이여!
한없이 훌륭한 법왕(法王)은
진실하게 말하고
다르지 않게말하며 [如所如說, 不異語]

속이는 것도 아니고,
허망한 말도 아니어서

저 말가리(末伽梨)들이
죽지 않는다[不死]고 하는
네 가지 혼란스러운 논리와는
결코 같지 않다.

너희들은 깊이 생각하여
부질없이 슬퍼하거나 고민하지 말라.”

[해설]

이에 부처님이 황망해 하는 대중들에게 안심시키는 말씀을 합니다.

여래는 항상 있는 그대로 진실을 이야기하니, ​안심하고 믿고 들으라는 밀씀입니다.


4-9. 견(見)은 시비(是非)가 없다.


ㅇ. 문수사리가 보는 성품과 보이는 경계를 묻다.


[본문]

[是時文殊師利法王子가 愍諸四衆在大衆中이라가 卽從座起頂禮佛族하고 合掌恭
敬以白佛言호대 世尊此諸大衆이 不悟如來發明二種精見色空의 是非是義니다 ]

그 때 법왕자인 문수사리보살이
여러 사부대중을 가엾게 여겨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절하고
공손히 합장하며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어! 여기 모인 여러 대중들은
여래께서 밝혀 주신

정미롭고 밝은 보는 성품의 근원[精見]과
눈앞의 색공(色空)에 대한
시(是)도 비시(非是)의 두 가지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해설]

이때에 문수보살은 자신은 다 알지만
대중이 모르고 있으니까
그걸 딱하게 여겨서

​문수보살이
대중의 무지한 입장에 서서
부처님게 사룁니다.

여기서 보는 성품의 근원(精見)은
불성 자리고,

색공(色空)은
色이 아니면 空,
空이 아니면 色,
둘 중의 하나를 취하라는 것이고,

시(是),비시(非是)는
色空이 見인지,
色空이 見이 아닌 것인지를 말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 뜻이란
是와 非是를 말하는데,

是는 色과 空이 見인지,
非是는 色과 空이 見이 아닌지,

이 두가지를 말합니다.

[본문]

[世尊若此前緣色空等象이 若是見者應有所指요 若非見者應無所矚커늘 而今不
知是義所歸일새 故有驚怖언정 非是疇昔善根輕尠이니 唯願如來大慈發明하소서
此諸物象與此見精이 元是何物이완대 於其中間無是非是니잇고]

세존이시어!
만약 눈앞에 있는

색공 등의 대상이
견(見)이라면
응당 가리킬 수 있어야 하고,

만약 비견(非見)이라면
응당 볼 수 없어야 하는데

지금 그렇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이 뜻의 근본을 알지 못하여
놀래고 두려워했을 지언정

그렇다고 옛날보다
선근(善根)이 적어진 것은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여래께서는
큰 자비를 베푸시어

저 모든 물상(物像)과
보는 성품의 정미로움[見精]이

원래는 무슨 물건이기에

이 속에
‘시(是)’와 ‘비시(非是)’를
말 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해설]

<만약 눈 앞에 있는 色空 등의 대상이
見이라면 응당 가리킬 수 있어야 하고>에서,

눈 앞의 물체든, 허공이든,
보이는 대상이 見이라면

당연히 見을
가리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見이 아니라면
당연히 볼 수 없어야 할텐데>에서,

색공 등 온갖 像이
見이 아니라면
안보여야 할 텐데,

그러나 다 보이기는 보이니
見을 끄집어 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見이 아니라면
볼 수 없다는 말은,

색공 등이
見의 범위 내에 들지 않으면
볼 수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저 모든 물상과
보는 성품의 정미로움(見精)이
원래 무슨 물건이기에

이 속에
'시(是)와 비시(非是)를
말할 수 없는 것입니까?>에서,

앞에서 여러가지 物像(대상)과
見精​(보는 주체),

이 둘이 무엇이길래
物像 가운데서
見이라 할 수도 없고,
見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으며,

본래 견정과 물상이
어떤 見인지,
무슨 까닭인지? 하고 묻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수보살이
대중들의 궁금한 입장을 대변해서
부처님깨 물으니,
부처님이 다음부터 대답을 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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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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