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바로 그것이다 Thou Art That (Tat tvam asi)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박경미 역, 해바라기
1. 저자 소개
한 작가에 대해 벌써 네번째 소개를 해야 할 시점이다. 아직 한 번 더 그를
소개할 일이 남았다. 한정된 자료를 가지고 어떤 각도에서 그를 어떻게
다르게 소개해야 하는지가 번번히 고민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동시에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오늘은 캠벨이 자신의 저서 속에 중요하게 거론하는, 그가 영향을 받은 몇 인물들을 중심으로 캠벨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애초 생각은 캠벨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과 작품, 사건들(이 책 저 책 속에
흩어진 단편적인 정보 조각들)을 모아 캠벨의 지적 여정을 서술하는 멋진
퍼즐을 하나 완성하고 싶은 거였는데 시간과 빈약한 자료를 핑계로 종국에는 용두사미가 되어 버렸다.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
캠벨이 이룬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난해한 소설 <피네간의 경야>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지침을 마련하는 것이었다(신화의 힘 p8).
이런 노력으로 출간된 책이 그가 헨리 모튼과 함께 쓴 <피네간의 경야를
여는 열쇠 A Skeleton Key to Finnegans Wake>다.
얼마나 어려우면 그 소설의 문을 열기 위해 필요한 열쇠까지 준비해야 했을까. 조이스의 다른 소설 <율리시즈>가 낮 동안 한 인간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간 것이라면, <피네간의 경야>는 이어위커(Earwicker)라는 한 주점 주인이 하룻밤에 꾼 꿈의 무의식을 그려낸 작품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꿈 이야기와 함께, 주막 손님 12명의 세속적 농담, 그가 공원에서 저지른 죄에 대한 가책, 아내와의 성과 사랑, 부자(父子)의 대결, 형제의 갈등과 해소, 딸에 대한 친족상간적 애정 등이 전개된다. 인간의 원죄와 추락, 탄생, 결혼, 죽음, 부활을
다룬 대(大)알레고리로서 단테의 ‘신곡’에 견줄 ‘인간곡’(Human Comedy)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이스가 n이 책에서 말한 ‘참으로 엄연하고 항시적인’ 인간의 고뇌에서 캠벨은 바로 고대 신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읽는다.
캠벨은 위대한 소설이 인생에 대해 줄 수 있는 교훈을 신화와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 이유로 그가 특히 존경한 소설가는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이다. 이들의 작품은 신화적 전통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대단히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고 캠벨은 본다. 토마스 만의 책 <토니오 크뢰거>, 이 책은 ‘인간이 가진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 목적이다. 캠벨은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토마스 만이 <토니오 크뢰거>에서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에 대해 그리는 것이다. 이른바 ‘에로틱 아이러니’라고 하는 그의 소설의 특징은,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를 통해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해 진실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신화의 힘 p27).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뽑아온 두 비극적 감정, 연민과 공포의 함의
(‘천의 얼굴’ p40-, ‘네가 바로 그것’ p97- ‘신화의 힘’ p301- 참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유년기에서 청년기에 이르는 스티븐 디덜러스라는 한 젊은 예술가의 정치적,종교적,지적 편력과 가정, 종교, 국가를 초탈한 그가 예술가로서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결국에는 자기 유배의 길을 떠나는 성장과정을 그린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을 이끈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자전적
소설이다. 캠벨은 성직자들이 종교적 언어의 본질적인 구조인 은유를 읽는데 실패한 역사를 떠올리며 인간의 영적 탐험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로 예술가들에게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그 희망을 제임스 조이스의 연민과 공포라는 두 단어에서 끌어온다. 이 두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비극적 감정’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 스티븐은 이 두 단어를 다시 정의한다.
연민은 고통당하는 인간과 하나되려는 감정이며, 공포는 고통을 넘어서는
인간의 지고의 존재(신)에 대한 고요한 경험, 즉 은밀한 원인(secret cause)과 하나 되게 하는 감정이다. 영웅이란 결국 운명이 어떻게 되든 자신들의 행동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의 삶의 여정 자체가 바로 죽음의 은밀한 원인인 것이다.
예술작품을 보고 ‘예’하듯, 우리 역시 우리가 태어난 바, 천복을 이루며 죽기를 바라는 것이다. 죽음까지도 긍정하는 삶에 대한 ‘예’의 관점은 삶의 행위들을 통해 드러나는 생명의 신비를 체험하는 일이다.
거기에 예술의 열쇠가 있다. 종교로서의 신화는 선과 악, 너와 나,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근거가 있다. 상징이 문을 열 때 그 배경이 빛나고
흘러나오게 된다. 상징의 문을 여는 것, 우리 안에서 무언가를 끌어내는 것, 초월적 에너지와 영광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 만물의 ‘광휘’를 그 자체가 가진 진리의 드러냄으로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직무다.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는 악몽’ – 제임스 조이스
이 말은 캠벨이 즐겨 인용하는 귀절이다.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그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이라고 조이스는 말한다. 이는 캠벨의 천복 개념과 닿아있다.
신비주의 저술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시인 윌리암 블레이크
(‘신화의 힘’ pp101-102, p301, 본문 p252)
‘궁극적인 떠남, 최고의 떠남은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떠남, 모든 관념을 초월하는 하나님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에크하르트), ‘궁극적인 ‘놓음-쥠(leave-taking)은 ‘신을 위해 신을 놓음’이다’(에크하르트), ‘지각의 문전이 깨끗하면 만물이 그 자체로 영원하다는 것을 보다 알 수 있다’(블레이크).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다는 것이 캠벨의 생각이고 이것을 잘 지지해주는 것이 에크하르트와 블레이크의 발언들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 갇혀있다. 여자와 남자,
삶과 죽음, 진실과 허위, 이것과 저것, 선과 악…하지만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한다. ‘영원이란 시간의 산물에 대한 애정 속에 존재한다.’ 속세의 근원은 영원이다. 영원은 우리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관념이다. 신화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존재가 언표되는 장이다. 에덴동산은 시간을 초월한 신화적인 꿈의 시간대, 여자와 남자가 다르지 않은, 대극이
존재하지 않는 더할 나위 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다. 그러나 에덴에서 추방된 우리는 영원이라는 것에서 멀리 떨어져 어떻게든 그 영원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는 것이다.
칸트(‘신화의 힘’ pp126-127, 본문 p64-)
캠벨의 신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칸트는 유용하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우리의 모든 경험은 시공에 한정되어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경험은 어떤 공간 안에서 어떤 시간대에 생기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킨다. 때문에 우리의 감각은 시공이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힌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는 궁극적 존재는 갇혀있디 않다. 다만 우리가 이것을 생각함으로써 가둘 뿐이다. 초월자는 사유의 모든 범주를 초월한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도 범주다. 시공간 밖에 존재하는 신적 본성은 인식 불가능하다. 칸트는 이것을 ‘감각의 감성적형식들(the aesthetic forms of sensibility)’이라 불렀다. 신이란 말 역시 사유를 통해 생긴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이름 지을 수 있는 것들을 넘어선 무엇인가를 지시한다.
번역 박경미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 동 대학원에서 기독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이화여대에서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최만자와
함게 쓴 책, <새하늘, 새 땅, 새여성>이 있다. 초대 기독교 사상의 형성 과정과 요한복음서, 영지주의 사상, 신약성서에 대한 여성신학적 해석에 관심을 가진 저자의 역량은 이 책을 분석한 역자 후기에 잘 드러나 있다. ‘성서의
언어를 죽은 문자와 사실이라는 감옥에 가두지 않으면서도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생동성을 되살려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스스로 던지며, 기독교 신자로서 이 책을 유심히 살피며 번역해가는 그의 태도가 인상적이다. 종교체계의 상징을 해석하는 비교신화학과 신앙은 별개라는 것, 오히려 다른 문화권의 신화 이미지에서 본인이 가진 이미지의 내적, 영적 의미를 더 잘 해석해
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비판적 수용주의 입장을 취한다.
조셉 캠벨 재단 Joseph Campbell Foundation
캠벨은 1987년 숨을 거두기 전까지 방대한 양의 출판물을 남겨놓았다.
그 중에는 아직 발표되지 않은 글이나 편지, 일기, 비디오나 오디오로 녹음된 강연들도 상당수를 차지한다. 캠벨의 그 많은 저작들을 영구 보존하고 보급하기 위해 1991년 조셉 캠벨 재단(pp 288~289 참조)이 설립되었다.
이 재단이 내세우는 세 가지 기본 운영 목표는
1. 신화연구의 선구자 캠벨의 연구를 보전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것(그의 연구들의 저작, 출판 포함)
2. 신화학과 비교종교 연구를 촉진하는 것(신화 교육 실행, 지원),
3. 재단 프로그램 참여를 유도하여 개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캠벨 사후에 위와 같은 재단 목표에 따라 최초로 발간된 책이다.
재단은 캠벨이 남겨놓은 자료들이나 절판된 작품들을 ‘조셉 캠벨 전집_
The Collected Works of Joseph Campbell’으로 출간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책은 바로 그 첫 번째 결실로, 조셉 캠벨 전집 제1권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 실린 내용들은 대부분 예전에 소개된 바 없는 글들로, 유진 케네디
박사의 지도 하에 조셉 캠벨의 유고와 강연 테이프들을 중심으로 이 책이
만들어졌다.
서문의 기성종교 비판
11. 신화와 종교의 상징과 에너지는 인류 공통의 상상력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와서 스스로를 표현한다.
15. 캠벨의 목적은 성서신화들을 탐구함으로써 그것들을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그것들이 지닌 살아있는 풍성한 의미들의 세계를 열어
보이려는 데 있다.
공식적인 종교적 가르침에서는 눈에 띄는 분명한 발전이 거의 없었다.
거기서는 지배적인 서구 종교들의 위대한 문서들이나 전승들을 새롭게
읽을 수 있게 해주는 발전된 연구들을 끌어들이지 못했고, 심지어는 인정
조차도 하지 않았다. 종교적 지도자들은 종교적 은유들의 역사-사실적
성격만을 고집함으로써 그 본래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천박하게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영적 요구들을 무시했다 ....
[기성종교의 경직성이 보여주는 것은] 사람들이 훌륭한 의도에서,
그러나 이성적으로 빈곤한 상태에서 자신들의 낡은 믿음을 옹호하기 위해
진리에 대항해서 싸울 때 어떠한 비극적인 결과가 따르는가 하는 것이다.
예컨대 제도 종교의 지도자들은 아주 조야하고 단순한 종교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그것은 신학적으로 조예가 깊은 대중 강연가들, 가령 천문학자였던 칼 세이건 같은 사람들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었다 ....
창세기를 신화로 이해하는 것은 그 책을 파괴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영적 생명력과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발견하자는 것이다 ....
아서왕 기사들의 이야기에서 각 사람은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성배를 찾아 "숲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다시 말해 아무도 이전에 길을 만들어놓지 않은 곳으로 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제도 종교가 보이는 타성은 영적 성장을 위한
끊임없는 도전[= 장애물]이 된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남이 만들어놓은 길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
18. 그는 제도 종교에서 줄곧 영적 은유들을 역사적 사실로 잘못 해석함으로써 생겨나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19. 본래 은유는 우리로 하여금 먼지가 풀풀 나는 구체적인 역사적 시간이
무대에서 좌절한 채로 영원히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해준다…종교적 은유가 지니는 내포적 의미는…바로 우리들 자신, 지금 여기 있는 우리들 자신의 내적이고 영적인 경험을 지시한다.
종교적 은유들을 마음과 영에서 우러나는 상징들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사실로 이해하면서 영적인 권리들을 주장할 경우 세계는 끔찍하게 분열되고, 어쩔 수 없이 엄청난 비극을 맞게 된다.
- 네가 바로 그것이다, pp. 16-18, 20, 23
조셉 캠벨은 <도덕의 기초>에 나오는 쇼펜하우어의 질문을 좋아했다.
"어떻게 나의 고통도, 내가 관심을 갖는 사람의 고통도 아닌 남의 고통을 보고 마치 그것이 나 자신의 고통인 양, 즉각 몸을 던져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한가. [.....] 이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며,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 그러한 즉각적인 반응과 행동은 "네가 그것"이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는 형이상학적 깨달음이 섬광처럼 지나간 결과라는 것이다. 캠벨은 기쁘게 이 답을 자신의 답으로 삼았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이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을 전제한다 ....
자비라는 말조차 이 시대에는 아무렇게나 평가절하되어 희생과 전혀 상관이 없고, 유치한 감상주의와도 구별되지 않게 되었다 .... 그러나 자비는 우리들의 내적 품성을 향해 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며, 멀리 우리와는 아주 다른 것 같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우리들 각자가 영웅적인 여행을 하라고 촉구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경험이며, 우리는 이 여행에 뛰어들기 위해 집을 떠날 필요도, 아니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를 떠날 필요도 없다 ....
[여러 종교들이 설파하는 '종말론'적인] 세계의 종말은 자신들의 영적 통찰을 통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들, 초월, 신비의 성례전, 또는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썼듯이 '무한'을 향해 솔직한 사람들에게 매일매일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종말은 어둡고 무시무시한 끝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출발점에 대한 은유이다.
조셉 캠벨이 복구한 유대-기독교 전통은 서로 적대하며, 끝도 용서도 없는 전쟁을 하도록 사람들을 부추기는 종교도 아니고, 분열되어 자기 의義만을 추구하는 소종파적인 종교도 아니다. 이 전통의 가장 의미 깊은 가르침은
사실 자비의 가르침으로서, 그것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죽어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동일한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비전을 향해 부활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네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가르침이다.
(유진 케네디의 서문), pp. 9-10, 24, 25
25. 세계의 종말은..어둡고 무시무시한 끝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출발점에
대한 은유다.
25. 캠벨이 복구한 유대-기독교 전통의 가장 의미깊은 가르침은 자비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죽어서 다름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동일한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비전을 향해 부활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네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가르침이다.
1장 : 은유와 종교적 신비
내가 어느 방송사에서 30분짜리 생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였다.
대담자는 젊고 똑똑해 보이는 남자였는데, 그는 나를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는 돌리지 않고 바로 질문하겠습니다. 저는 법을 공부했습니다."
빨간 불이 들어오자 그는 논쟁조로 시작했다. "'신화'라는 말은 '거짓말'을 뜻합니다. 신화는 거짓말입니다."
나는 신화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로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화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신화란 상징적인 이미지들과 이야기들을 조합해 놓은 것이며, 인간 경험의 가능성들에 대한 은유이고, 특정한 시대에 이루어진 특정한 문화적 성취입니다."
"신화는 거짓말입니다." 그는 내 대답을 무시하는 듯 또다시 같은 말로 되풀이했다.
"신화는 은유입니다."
"거짓말입니다."
이렇게 대담자와 나는 약 20분 동안 같은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이 끝나기 4, 5분 전쯤에야 나는 대담자가 진정 은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가 나를 대하는 방식대로 그를 대하기로 했다.
"아닙니다." 나는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신화는 은유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은유의 예를 한 번 들어보십시오."
"당신이 예를 들어보시지요." 그가 답했다.
나는 고집을 부렸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질문했습니다." 나는 30년 동안
학교에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은유를 한번 예를 들어보시지요."
대담자는 너무도 당황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아무 교사에게나 한번 알아볼까요?" 결국 1분 30초쯤 지난 후 그는 은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번 해보지요. 내 친구 존은 아주 빨리 달립니다. 사람들은 그가 사슴처럼 달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은유입니다."
대담의 마지막 몇 초가 흐르는 동안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은유가 아닙니다. 은유는 이렇습니다. '존은 사슴이다.'"
그는 총알같이 내뱉었다. "아닙니다.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방송은 끝났다. 이것은 은유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관련하여 어떤 점을 시사하는가?
이 에피소드를 통해 나는 인류의 절반쯤은 종교 전통의 은유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나머지 반은 은유가 결코 사실일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종교적 은유들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에 자신들은 무신론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pp. 30-32
32.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종교적 은유들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에 자신들은
무신론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신화의 네 가지 기능
33-39 나는 전통적인 신화는 네 가지 기능을 한다고 본다. 첫 번째 기능은
존재의 근원적 조건에 의식을 맞추는 것, 다시 말해 우주의 신비로운 떨림
(mysterium tremendum)을 향해 의식을 깨우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 전통적인 신화의 기능은 해석적인 기능이다. 바로 우주 질서의 일관된 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 점차 문명화됨에 따라 인간은 위대한 신비의
'떨림'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신비는 대단히 비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인간은 그를 향해 기도할 수도 없고, 단지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신들은 이 지고의 위대한 신비의 대리자들에 불과하며, 그 비밀은 수학을
통해 드러난다. 이것은 오늘날 과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시공간의 수학은 이를 통해 위대한 신비, 즉 '떨림'이 자신을 드러내는 베일로 간주된다 ....
전통적인 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구체적인 도덕 질서, 다시 말해 그 신화가
생겨난 사회의 질서를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 [가혹한 원시 통과의례인] 자르기, 낙인 찍기, 베어내기는 개인들의 마음과 몸을 보다 크고 지속적인 문화적 몸으로 통합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제 보다 큰 몸을 설명하는
신화는 그들 자신의 것이 된다. 그 힘은 자연이 아니라 사회에서 발견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
전통적 신화들과 관련해 볼 때 과학 역시 그 시대의 과학일 뿐이다.
따라서 구약성서가 기원전 3000년경의 우주론을 반영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은유, 종교적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단지
자신들이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부할 사실들만을 발견한다.
전통적인 신화의 네 번째 기능은 개인이 삶의 다양한 단계들과 위기들을
통과할 수 있게 하는 것, 즉 개인들이 삶의 전개를 통전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통전적이란 출생으로부터 중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개인이
처음에는 그들 자신을 따라, 두 번재는 사회 문화에 따라, 그리고 세 번재는 우주, 마지막으로는 그들 자신과 만물 너머에 있는 '신비스러운 떨림'과
일치해서 중요한 사건들을 겅험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40. 시대와 상황은 변하지만 수세기에 걸친 역사적 조건의 주체, 즉 우리가 인간 존재라고 부르는 신경정신적 통일체는 지속적으로 남는다.
아돌프 바스티안이 ‘원소적 관념’이라 표현하고 융은 ‘집단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지칭했던 것은 변화하는 역사적, 문화적 시대의 은유들을 통해 표현한다.
42. 신화와 형이상학의 은유적 언어들은 둘 다 실제 세계나 신들을 외연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건드리는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차원들과 실재들의 의미를 표현한다. 은유는 시공간의 외적 세계를 기술하는 것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은유가 지시하는 실제 우주는 내적인 삶의 영적 영역이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45. 진정한 의미에서 신화란 ‘다른 사람들의 종교’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종교란 ‘신화에 대한 대중적인 오해’라고 이해될 수 있다.
2장: 종교적 신비의 경험
48. 신비 전통과 관련해서는 두 개의 커다란 세계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근동과 유럽을 포괄하는 이란 서쪽이고, 다른 하나는 인도와 극동을 포괄하는 인도 동쪽이다. ..서구 종교(조로아스터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유럽이 아니라 지중해 동부 연안, 즉 근동에서 유래했다.
이 종교들에는 신이 세계를 창조했고, 신과 세계는 동일하지 않다.
즉 창조주 피조물 사이에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인 구별이 있다.
따라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구별이 없는 들과는 전혀 다른 심리학과
종교적 구조가 생겨난다. 이 종교들의 목표는 초월과의 동일성에 도달하는데 있지 않고, 동일하지 않은 인간 존재와 신 사이의 관계를 수립하는데 있다.
신비가의 목표
기독교 전통에서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참 신이면서 참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본성의 통일성으로 인해 그리스도는 신비로 간주된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우리들 각자가 신성의 일부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전혀 신비로 간주되지 않는다.
서구 종교 문화에서는 특정한 사회 집단들과 그들의 다양한 성서적, 교회적 주장들이 중요하게 부각되지만, 이것들은 현대의 역사적, 과학적 연구에
비추어보면 의문시된다. 그렇게 사회 제도와 교회의 주장이 부각된 경우
우리 자신이 지닌 신성에 대한 감각은 없어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한 주장을 할 뿐인 사회 조직이나 위계 제도[= 종교 교단]에 헌신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주장들 자체가 의문시된다. 따라서 '소외 alienation'라 부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다시 말해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중재하는 종교제도로부터 개인이 소외된 것이다.
제도의 신은 영적 실재에 대한 우리들 자신의 경험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 이 신은 인간 존재의 정당성에 도전하면서 간격을 만들어놓는다.
신비가의 첫 번째 목표는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경험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p. 50-51
53. Tat tvam asi, 그것은 바로 너다. 이것은 모든 형이상학적 담론의 기본적인 통찰로서 내가 신이 가면들이라 부르는 이름들과 형식들이 벗겨지는 순간 각 사람이 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57. 인간은 선악의 열매를 먹음으로 이원성의 영역에 있게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대립의 쌍들로 이루어진 세계에 살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쫓겨났던 그 통일성의 영역-나와 아버지가 하나인-으로 다시 돌아간다. 바로 이것이 신비다.
59. 종교적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선과 악을 대비시키는 윤리적 관점으로 성서에 근거한 서구 기독교에서는 선과 악을 대립시키는 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신비적 관점에서는 선과 악을 한 과정을 지니는 두
측면으로 이해한다.
3장: 신에 대한 개념들
67.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야훼가 말했을 때 사실상 야훼는 이 가능성을
찬탄한 것이다
…신이 초월을 향해 문을 열 때 우리는 신이라 부르는 존재와 하나가 된다.
76. 결혼은 다른 은행계좌를 하나로 합치는 협상 같은 것이 아니다.
79. 성서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현대 성서학자들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중심적인신화적 주제들을 모두 그보다 앞서 있었던 수메르-바빌론 문서들에서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Joseph Campbell)
81.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그분은 훨씬 높은 곳에 있다고 믿을 때에만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
84. 서구의 종교 전통에서는 이처럼 자기 존재의 근거와 하나가 되는 경험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다. ..서구 종교는 ‘관계성’의 종교다. 피조물 a가 창조주 X와 관계(Related: R)를 맺는 것이다(aRX). 반면 동양의 종교에 대한 적절한 묘사는 훨씬 단순하다. a=X라는 동일시인 것이다.
87. 인간은 모두 동물로 태어났으며 잠자고, 먹고, 번식하며 싸우는 동물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물들이 알지 못하는 삶의 또 다른 질서, 존재의 신지 앞에서 느끼는 경외, 즉 삶에서 느끼는 영적 감정의 뿌리이자
가지라고 할 수 있는 ‘신비스럽고 떨리며 매혹적인 것에 대한 경외가 있다.
88.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회중들에게 했던 설교에서 이러한 위기에 대해 말했다. "하느님이 영적으로 한 처녀나 훌륭한 영혼 안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마리아에게서 육체적으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보다 낫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이것은 우리들 자신이, 아버지가 영원히 낳은.... 독생자가 된다는 뜻을 포함한다.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한 가장 훌륭한 일은 스스로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상징을 읽으면, 역사의 찌꺼기를
털어내고 직접적으로 신비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
89. 우리는 우주의 감각이다. 바로 우리 자신 안에 그것이 있다. 한때 우리가 믿었던 신들은 저기 밖에 있고, 그 신들은 우리들 자신이 투사된 것이다.
그 신들은 우주의 신비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다.
4. 종교적 상상력과 전통신학의 규칙들
성직자의 임무
95. 이 시대 종교의 과제와 기능은 마음을 깨우는 것이다.
만일 성직자들이 마음을 깨우지 못하거나 깨울 수 없다면, 사람들을 깨우고 영적으로 양육할 상징들을 해석할 능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성직자가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배반 행위다. 사회 활동이나 신도들의 가정사에 깊이 관여하는 것으로 성직자의 임무를 대신하는 것은, 그들의 소명의 진정한 이유, 즉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에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의 의미가 지니는 여러 차원들을 열어 보이는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96. 종교적 언어의 본질적 구조인 은유들은 구체적인 지시물들, 외연과 관련해서 읽혀졌다. 그 결과 실은 은유의 전체적인 의미는 분열과 이원성을 넘어서는 것임에도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적대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종교적 문제의 한 예는] 상징들이 연대기적으로 잘못
읽혀지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언어의 본질적 구조인 은유들은 구체적인
지시물들, 외연과 관련해서 읽혀졌다. 그 결과, 실은 은유의 전체적인 의미는 분열과 이원성을 넘어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적대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성직자들의 일차적 임무인 상징들을 - 그들은 사실 상징의 수호자이다 - 이해하는 일에 실패했을 때, 유일하게 우리의 영적
탐험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술가들뿐이다 ....
성례전 중 하나인 세례가 지니는 기능은 우리 안에 무언가를 퍼붓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으로부터 무언가를 끌어내는 데 있다. 성례전은 불러냄 evocation 이지, 교리주입(교화) indoctrination 이 아니다.
107.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며 그것들을 넘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만 진정으로 알 수 있다.
–아퀴나스 <이단논박대전>
108. 한 정통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다른 전통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어서 전 영역을 살펴보는 것이 대단히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이 서로 밝혀주기 때문이다.
5. 유대-기독교 전통의 상징들
128. 은유는 아직 남아있는 신화의 언어이며 여전히 광범위하게 오해되는 말이기도 하다. 소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신화는 거짓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은유를 잘못 읽었을 때만 그러한 오해가 생긴다.
129.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은유는 사실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은유가 사실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무신론자라고 부르며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종교적이라 생각한다.
133. 에덴이라는 목가적 장소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에덴은 남성과 여성, 선과 악으로 이루어진 대립의 쌍들로, 우리들 정신과
생각이 신의 정신만큼 거룩하다는 것의 은유다.
138. 이러한 신화적 주제들은 황당한 동화적 이야기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고 우리 삶을 밝혀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창세기의 이야기들은
내연적 의미에 따라 읽으면-영적 메시지와 중요성을 제공하는 참된 은유적 의미에 따라 읽으면-이러한 모든 상징들이 거기에 나타난다.
146. 신을 하나의 사실로 생각할 때는 신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없다. 그러나 신을 생명의 역동으로 보고 우리 자신을 거기에 포갤 때 우리는 신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동산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는 여기 지상에 존재한다.
151. 만일 당신이 어떤 다른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한 신을 선택한다면
그 신을 확고히 긍정하고 붙들 수 밖에 없다. 그 신이 초월을 열어 주면,
신자도 초월을 열 수 있다. 그 신이 닫으면 신자도 닫게 된다…성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그것을 역사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읽는 것이다.
6. 유대-기독교 영성의 상징들에 대한 이해
177. 묵시문학적 사건을 알리는 전령으로서의 메시아개념은 히브리인들이 페르시아인들로부터 받아들인 것이었다.
181. 세 가지의 시험을 이긴 다음, 그리스도는 깨달음을 이루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인식을 얻는다.
융은 만다라의 상징이 인간의 경험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심리학적 기능들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것은 이해 기능인 감각sensation과 직관intuition, 그리고 판단과 평가
기능인 사유thinking와 감정feeling이다.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 사는 사람이 사려 부족으로 파멸에 빠지듯이, 미래에 대해 주의 깊게 고려하면서 살더라도 한순간의 감정의 폭발로 삶을 망칠 수 있다. 다음의 십자가 형태의 도표는 융이 말하는 '네 가지 기능들'이 대립하는 두 힘들의 쌍을 나타낸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감정과 사유가 대립을 이루듯이 감각과 직관도 대립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각을 통해 전달된 정보만을 인식한다. 즉각적으로 가장 가시적이고 실제적인 것들만을 인식하며, 인식되지 않는 함의들에 대해서는 실망하거나 내버려둔다. 환자들과의 임상경험에 근거한 융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은 살아가면서 각각의 대립을 이루는 두 기능들 중 한 가지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감각과 사유에 치중해서 직관과 감정을 발달시키지 못할 수
있다. 그러면 사용하지 않던 기능들이 활동하는 데 대해 위협적으로 느끼거나 저항하게 된다. 더욱이 이렇게 저항을 받은 기능들은 발달되지 않기 때문에―융의 표현대로 하면 '열등'하기 때문에―사람들이 자기 자신이나 세상을 이해할 때 도외시된다. 그러나 도외시되었던 기능들이 일단 돌출해 나오면, 언제나 통제받지 않는 강력한 힘으로 개인을 압도해서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 밖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는 반쪽짜리 인간으로 살아갈 뿐이며,
모든 사회가 인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선과 악으로 도덕적으로 나누어서 한쪽을 선호하며 키워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상징 체계에서는 십자가가 중심에 있고, 선한 것은 모두 위에 있는 천상으로, 악한 것은 모두 아래 있는 지옥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갈보리 산 위 예수의 십자가는 착한 강도[强盜]와 악한 강도 사이에 있었고, 착한
강도는 천국으로, 악한 강도는 지옥으로 보내졌다. 예수는 천상으로 올라가기 전에 지옥으로 내려갔다. 그는 역사적이며 동시에 영원하고 완전한 인간으로서 모든 대립의 쌍들을 넘어서기 때문에(타락하기 이전에, 그리고 그의 갈비뼈에서 이브가 나오기 이전에 아담이 선악과 남녀의 대립을 넘어서 존재했듯이), 자신의 존재 안에서 모든 종류의 갈등, 심지어 신과 인간 사이의
대립까지도 넘어선다. 바울이 빌립보인들에게 선언했듯이,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느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립 2:6~11) ....
200. 그리스도는 비록 역사적으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한했고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했지만 대립의 어느 쪽에도 얽매이지 않았으며, 십자가의 수직대와 수평대 어느 쪽에도 매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자신도 그분의 상징을
믿음으로써 얽매이지 않고 ‘구원받았다’는 것이다….(반면) 인간은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삶 속에서 대립되는 쌍의 어느 한 쪽에 얽매어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런 유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법인 도덕과 죄의 법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이 죽고, 네 가지 기능을 모두 통과하는 에너지와 빛의 순환에 스스로를 열어서 강들이 네 방향으로 흐르는 에덴 동산의 생명나무
처럼 우리도 한 가운데 머물러야 한다.
이처럼 십자가의 은유를 감각과 직관, 감정과 사유라는 융의 심리학적 틀을 통해 읽으면, 인간은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삶 속에서 대립이 되는 쌍의 어느 한 쪽에 얽매어 살아가며, 따라서 선악 개념에 얽매어 부분적인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유한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살면서 따르는 법인 도덕과 죄의 법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이 죽고, 네 가지 기능을 모두 통과하는 에너지와 빛의 순환에 스스로를 열어서 강들이 네 방향으로 흐르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처럼 우리도 한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한다. 혹은 가시 면류관을 쓴 구세주의 머리 뒤에 십자가의 수평대와 수직대가 교차하는 지점처럼, 한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이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압니다 ....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6:6, 14)
203. 마가복음서에서 세계의 종말은 다가올 미래의 사건인 것처럼 나타난다….그러나 결코 세계의 종말이 달력 속의 어느 날짜엔가 일어날 역사적인
사건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 나라는 여기, 우리 앞에 있다’. 만일 당신이
세상의 빛나는 환희를 본다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예’라고 말할 것이고
만일 그 환희를 보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들에 ‘아니오’ 라고 말 할 것이다.
..(신화)경험을 통해 만유 안에 있는 생명의 역동성을 확인하고 깨닫는 것,
그저 세상의 측면에만 매일 것이 아니라 핵심을 보야야만 하는 것이다.
7. 질의 응답
208. 신화적 이미지들은 불합리하고, 따라서 무의미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따라서 합리적 체계는 우리 삶에서 신화적 이미지들의 연관성을 깨뜨리고
신화적 상들이 지닌 힘을 사용할 수 없게 한다.
214. 영원은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자 자신의 진리와 존재의 영원성을 나의 가능성 안에서 경험할 수 있다…서구와는 달리 동양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공(空)이 아닌 공(空)과 자신의 동일성을 내면에서 경험하는 데 있다.
216.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나 가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
자신을 내어주는 고귀한 사랑의 위대한 예가 바로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여기서 개인의 초월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아버지에 대한 속죄 혹은 아버지와의 일치이다.
217. 결혼이 전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결혼하지 않은 것이다.
228. 쿤달리니 요가라는 말은 ‘감겨진 것’을 뜻하며 인간의 몸 속 가장 밑바닥에 실제로 항문 위치에 감겨져 있다고 여겨지는 영적 에너지를 가르킨다.
이 요가의 목표는 호흡조절과 명상을 통해 수슘나라고 하는 척추의 통로로 쿤달리니가 풀려나오게 하는 데 있다.
8. 대담
237. 신화는 거짓을 뜻하는 말로 잘 쓰이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표현하는
영구적 수단이다….
신화와 상징은 모든 종교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특징으로 종교 체험의
특수한 언어이다.
246. 부활절 계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주시대에는 두가지 명제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1. 우리는 새로운 상징체계로 나가야 합니다.
2.현존하는 상징들은 영적으로 해석될 때 계시를 드러낸다.
250. 토마스 머튼이 썼듯이 하나의 상징은 우리의 의식으로 하여금
삶과 실재 그 자체의 내적 의미를 새롭게 자각하도록 일깨우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상징을 통해 우리는 가장 깊은 자아와 접촉하고 다른 사람과
접촉하고, 신과 접촉합니다.
257. 우리가 서로 하나라는 것, 그것이 우주 시대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많은 종교 제도들이 그 요청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259. 경제적 가치를 입증하는 성과만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유인원들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먹이를 놓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홀로 떨어져서 경외심에 이끌려 돌판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없는 점이지요. 그가 바로 인간으로
진화한 유인원이며 미래를 이해한 존재입니다.
역자 해설
263. 캠벨은 이 책에서 성서와 기독교의 많은 이야기들을 인간과 세계,
신에 대한 근원적인 이야기로 보고 세계의 다양한 신화들과 비교하여 구조적 유사성을 발견하고, 그러한 구조에 나타나는 인간 종교성의 근본 구조를 밝히려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273. 하나님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역사 속에서 만난다. 따라서
유대 기독교에서 역사는 계시의 장소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