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엄경 공부(22)
4-9.견(見)은 시비(是非)가 없다.
ㅇ.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은 둘이 아니다.
[본문]
부처님이
문수보살과 여러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시방의 여래와 대보살들이
스스로 머무는 삼마지(三摩地)에는
견(見)과
견연(見緣)과
생각되는 모든 현상[相]이
마치 허공의 꽃과 같아서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견과 견연이 그대로
깨달음의 묘정명체(妙淨明體)이거늘,
어찌 그 가운데 ‘견[是]이다’
‘견이아니다[非是]’고 할 수 있겠느냐?
[해설]
삼마지(三摩地)는 삼매(三昧)이며,
삼매는 정(定)입니다.
견(見)은
정견(精見, 보는 주체)을 말하고,
견연(見緣)은
색(色, 물건)과 육진경계(六塵境界)를
다 포함시킨 보이는 대상들을 말합니다.
여기에 생각으로 인해 나타난
몸과 모든 모양들도
보이는 대상들이죠.
여래와 큰 보살들이
스스로 삼매 속에 들어가서 보면,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 물질들,
그리고 생각하는 모양은
모두가
마치 허공꽃과 같아서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보는 주체(見)와
그 대상 물질은
본래가
보리의 오묘하고 깨끗하고 밝은
실체 그 하나 자체인데,
어째서 그 견(見) 안에서
'이것이다, 이것이 아니다' 라고
따질 것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진(眞, 주체)은 제외하고
망(妄, 대상)만 허망하다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나 큰보살들이 볼 때는
진(眞)이나 망(妄)이
다 같이 허공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色이고 空이고,
見이고 見이 아니고 하는
그런 구별이 없이
다같은
하나의 진리의 세계(一眞法界)일 뿐이지
그외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는 주체와 보는 대상이
나눠진 것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입니다.
[본문]
문수(文殊)야!
내가 지금 너에게 묻는다.
네가 지금 문수(文殊)인데
다시 이 문수에게
시문수(是文殊,眞文殊)라
불러야 할 것이 있겠느냐,
시문수(是文殊)라 할 것이 없겠느냐?”
문수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어!
제가 진실한 문수이므로
따로 시문수(是文殊)라 할 것이 없겠습니다.
[해설]
문수는 하나인데,
이건 옳은 문수,
저건 그른 문수라고
나누어 분간해서
불러야 할 것이 있겠느냐고
부처님이 묻습니다.
문수보살이 대답하기를,
진실한 문수 하나 뿐이지
무슨 옳은 문수,
그른 문수가 또 따로 있겠읍니까?
하고 대답합니다.
즉 보리묘정명체(菩提妙精明體)이면
하나의 보리묘정명체이지,
그 중에서,
어느 것은 물상(物像, 보이는 대상)이며,
어느 것은 見(보는 자)이고,
어느 것은 見이 아니라는
그러한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본문]
왜냐하면 만약 시문수가 있게 되면
곧 두 가지 문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금일에
문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시비(是非)의
두 모습이 ‘없다’는 것입니다.”
[해설]
옳은(是) 문수가 있으면
상대성인
옳지 않은(非是) 문수도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옳은 문수가 있다고 하면
그른 문수도 같이
따라서 나오게 되므로,
문수면 있는 그대로
그냥 문수 하나뿐이지,
거기에
是문수니, 非是문수가
어디 있겠느냐,
즉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인 見은
둘로
나눌수가 없다는 의미인데,
見 중에서
어떤 것은 보는 주체이고,
어떤 것은 보여지는 대상이라고
둘로
나눠질 수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본문]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보는 성품의 묘명[見妙明]과
가지가지 허공과 티끌
또한 그와 같아서
본래 그대로가
묘명(妙明)한
무상보리(無上菩提)의
깨끗하고 원만한 진심(眞心)이거늘
이것이 허망하게
색공과 견문이 되는 것이
마치 눈을 눌러
제이월(第二月)을 보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 무엇을
시월(是月)이라 하겠느냐?
[해설]
見의
묘명진체(妙明眞體)와
지금 허망한 대상들이라는
공(空)과 진(塵)도
또한 문수와 같아서
옳고 그른 시비(是非)가
없다는 것입니다.
문수의 옳고 그른
두 가지 상(相)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의 진견(眞見)과 색공(色空)도
옳고 그르다는
이상(二相)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시비(是非) 이상(二相)이
없느냐 하면,
본래 여래와 대보살이 머물고 있는
삼매 속에서는
묘하고 밝은 위없는
보리의 참마음,
즉 일진법계(一眞法界) 뿐이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듣고 보는 것을 통해서
'무지의 마음'으로 분별하여
色(물질)과 공(空)으로
생겨난 것이지,
전체가 하나인데
무슨 차별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눈을 누르고 보니
달 옆에 또 하나의 달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닌데,
어느 것이 진짜 달이고,
어느 것이 가짜 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第二月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文殊但一月眞이니 中間自無是月非月이니라 ]
문수야!
다만 하나의 진실한 달[一眞月]이
있을 뿐,
그 가운데 어디에도
‘시월(是月)이다 비월(非月)이다’
할 것은 없다.
[해설]
여기서 시월(是月)은
第二月(눈위를 눌러서 생기는 두개의 달)과
같고,
비월(非月)은
第三月, 즉 물위에 비친 달과 같습니다.
달 하나면
하늘에 있는 달 하나이지,
그 가운데
是月(제이월),
非月(물위의 달)이 없는 것과 같이,
보리묘정명체(菩提妙精明體, 절대본체)
하나면 그만이지,
원래 부처나 보살의 경계에서는
견(見, 보는 자)이니
色空(보이는 대상)이니 하는
분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ㅇ. 보는 주체와 보이는 경계는 망념이 만든 것이다.
[본문]
그러므로 네가 지금까지
보는 견(見)과
물상[塵]을 통해
가지가지로 드러내 보였지만
이것이 다 잘못된 생각이기에
그러므로 그 가운데
시(是)와 비시(非是)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다 진실하고 정미로우면서도
묘하게 깨어 있는
밝은 성품[妙覺明性]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궁극에는 그대들에게
가리킬 수 없는 것(보는 자, 非指)와
가리킬 수 있는 것(대상, 指)으로 부터
(주,객 이원성을) 벗어나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해설]
그러므로 見(보는 자)과
塵(보이는 대상)이
원래는 하나인데,
이것을 여러가지 보이는 대로
구별하여 나누어 놓으니깐,
그 속에서는
見을 찾을 수가 없다는
망상을 하고,
또한 그 안에서
이건 옳고 저건 옳지 않다고
분별하는데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망상 때문에
시비분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모두가
진실하고 정묘로운
부처님 깨달음의 밝은 성품으로 말미암아
너로 하여금,
가리킬 수 있는 견(見)과
가리킬 수 없는 대상(色空)에서
다 같이 벗어나게
할 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부처가 얻은 깨달음의
밝은 보리심으로
보는자와 보이는 대상으로 나누어진
너의 그 주ᆞ객 이원화 분별심을
벗어나게 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맨 마지막의
출지비지(出指非指)라는 말은,
앞의 지(指)는
가리킬 수 있는 것,
즉 눈앞에 있는
대상들을 말하는 것이고,
비지(非指)는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못하는 것,
즉 보이지 않는 견(見),
보는 자를 말합니다.
따라서 가리킬 수 없는
'보는 자(非指)'와
가리켜 보일 수 있는 色塵(대상),
다시 간단하게 말하면
主ᆞ客의 이원성(二元性)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즉 이원적 분별심으로부터
초월하게 해준다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