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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금강바라밀경윤관金剛波羅蜜經綸貫 / 함허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2.04|조회수112 목록 댓글 1

 

금강바라밀경윤관(金剛波羅蜜經綸貫)

 

함허당득통화상 涵虛堂得通和尙

 

 

 

夫金剛者 言簡意密 事周理圓

대저 금강이란 그 말은 간결하고 뜻은 현밀하며

사(事)는 두루하고 이(理)는 원만하다.

 

凡出世因緣 度生體裁 含攝無餘

그리하여 무릇 세속을 벗어나는 인연과 중생을 제도하는

가르침이 모두 남김없이 포함되어 있다.

 

於戱諸佛能事 一部盡之矣

때문에 제불의 공능과 사업이

이 금강경 한 책에 다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經云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者說 豈欺人哉

경전에서 말한 “대승심을 낸 자를 위하여 설하고

최상승심을 낸 자를 위하여 설한다.”는 말이

어찌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겠는가.

 

若使具眼者見之 一見便見無疑

만약 안목을 지닌 자가 이 경전을 본다면

한 번 보고는 곧 그 뜻에 걸림이 없을 것이다.

 

若不具眼到此總須茫然

그러나 만약 안목을 지니지 못한 자가

이 경전을 보기에 이른다면 모두 망연자실하고 말 것이다.

 

有客問余曰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大凡經文皆有序正流通

“대체적으로 경문에는

모두 서분과 정종분과 유통분이 있습니다.

 

其間必文字相因

이들 사이에는 반드시 문자끼리

서로 인(因)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鉤鎖連環 意義相次 血脈貫通然後 能使人開卷萬目易曉其義

마치 쇠사슬과 쇠고리가 연결〔連環〕되어 있는 것과 같이

그 뜻이 결부〔相次〕되어 있고 혈맥이 관통하고 있어야

책을 펼친 사람들 모든 이가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今此一部金剛 序分流通

그러나 지금 이 한 권의 금강경은

서분과 유통분은 그런 대로 그렇습니다.

 

就正宗一分 文意重踏律呂不次 致令讀者 騰疑未決

그러나 정종분을 살펴보면 글의 뜻이 중첩되어 있고

글의 흐름도 차례가 맞지 않아 이 경전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불러일으켜 헷갈리게 합니다.

 

如經初卷住降已 乃問云 可以身相見如來不安名勸持

以至說塵非塵界

가령 경전의 첫머리에서 수보리가 ‘어떻게 주해야 합니까,

어떻게 항복받아야 합니까?’를 묻고 있는데,

그 이후에 부처님은

‘가히 신상을 통해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물으면서

금강경이라는 명칭을 붙여 그 금강경이라는 명칭으로

수지하도록 권장을 합니다.

나아가서 미진이 미진의 세계가 아니라고 설하였습니다.

 

又問云 可以三十二相見如來不 明福德有實無實

또한 ‘가히 32상을 통해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면서 복덕의 실과 부실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又問云 佛可以具足身相見不 明不作念度生

以至明我非我凡非凡

또한 ‘부처님을 신상의 구족을 통해서 볼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서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였고, 내지 아(我)가 아(我)가 아니고

범부가 범부가 아님을 설명하였습니다.

 

又問云 可以三十二相見如來不一般 佛身何以四重問來

또한 ‘가히 32상을 통해서 여래를 볼 수가 있겠느냐?’라고

물은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똑같이 불신에 대하여

어째서 네 번이나 물은 것입니까?

 

又空生前三問 則一一答契佛意 何以於最後一問

錯承佛意 累他如來 再三提警

또한 공생(수보리)이 위에서 질문한 세 가지 경우에 대하여

각각의 답변이 부처님의 뜻에 계합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마지막의 한 가지 질문은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서

거듭 저 여래로 하여금 재삼 깨우쳐주시게 하였습니까?

 

又空生得六萬三昧 解空第一 又於前經

屢問三空之義 何以到此

또한 공생이 6만 가지 삼매를 얻어 해공제일이라 불리우고,

위의 경문에서 세 가지 공의 뜻을 누누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 이르러서는 상견(相見)을 잊지 못하고 부처님의 통렬한 꾸지람을 들은 연후에야 비로소 그릇된 줄을 알았습니까?

 

相見未忘蒙佛痛與針掘 方始知非 又滯致見

致令如來更敎不起斷滅之見

또한 상견(相見)에 막혀서 다시는 여래로 하여금

단멸의 견해를 내지 말라는 가르침을 펴게 하였습니다.

 

此未徹證而然歟 自己徹證方便爲機而然歟

이로써 보면 공생이 철저하게 깨치지 못하여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아니면 공생은 이미 철저히 깨쳤지만 방편으로

중생을 위하여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若道自未徹證而然 其爲人穎悟特達早向敷座處

徹見如來心肝 出來道希有

만약 공생 자신이 철저하게 깨치지 못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라면 어째서 그 사람됨이 지나치게 총명하고 뛰어나서

자리를 펴고 앉으실 때 이미 여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희유하십니다.’라는 말을 한 것입니까?

 

又經云 須菩提聞說是經 深解意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世尊云云

또한 경문에서는 ‘수보리가 이 경전을 듣고서

깊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말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했습니다.

 

然則豈謂自未徹證而然耶 共道方便爲機而然

爲機之言 何所據依

만약 그렇다면 공생 스스로 깨치지 못하고서야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더불어서 방편으로 중생을 위해서 그렇게 말했다면

중생을 위한다는 말은 무엇에 근거한 것입니까?

 

又前三問 則皆云見如來最後獨言觀如來

見歟觀相去多小 爲有淺深 爲無淺深

또한 위에서 공생이 질문한 세 가지의 경우는

모두 견여래(見如來)라 하였는데 마지막의 경우에만 유독

관여래(觀如來)라 했습니다. 이것은 견(見)과 관(觀)의

거리가 얼마나 되고 그 깊고 옅음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又下經云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또한 경문의 뒷 부분에서 ‘온 바가 없고 또한 간 바가 없다.

그러므로 여래라 이름한다.’고 말했습니다.

 

一箇如來 前已重重現示 何更此示 致令文義叢雜乎

같은 여래를 위에서도 여러 차례 드러내 보였는데

왜 하필 다시 여기 부분에서 드러내어 경문의 뜻을

전체적으로 복잡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又空生兩重問 云何住降 兩重問 頗有衆生生信心不

如來一一隨問有答

또한 공생이 ‘어떻게 주하고 어떻게 항복받아야 합니까?’라는 것을 거듭 질문을 하고,

또한 ‘어떤 중생이 신심을 내겠습니까?’라는 것을

거듭 질문을 한 것에 대하여 여래는 낱낱이

묻는 것에 따라 답변을 하였습니다.

 

問答語意多相似 但增減不同耳

그 문답의 말과 뜻으로 보면 거의가 비슷한데

단지 증감에만 차이가 있습니다.

 

又如來兩重問 如來有所說法不

그리고 여래가 공생에게

‘여래에게 설법한 바가 있는가?’ 하고 거듭 물었고,

 

兩重問大身 兩重問塵界

대신(大身)에 대해서도 거듭 물었으며,

미진세계에 대해서도 거듭 물었는데

 

空生亦一一隨問有答

공생도 또한 여래와 마찬가지로

낱낱이 여래의 질문에 따라 답변을 하였습니다.

 

此等問答亦語意多相似

이와 같이 여래와 공생이 행한 질문과 답변도 또한

그 말과 뜻으로 보면 거의가 비슷합니다."

 

출처 : 월간불광 현각/한국선학회장

 

 

 

 

 

헌 향 (獻 香)

 

함허득통(涵虛得通)

 

 

 

我此一爐香 아차일로향

 

여기의 한 향로의 향은

 

生從一片心 생종일편심

 

한조각 마음에서 나왔으니

 

願此香烟下 원차향연하

 

원컨데 이 향연기아래에서

 

薰發本眞明 훈발본진명

 

본래 마음의 밝은 빛이 향기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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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2.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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