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마음 공부

세속에서의 명상 / 크리슈나무르티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2.06|조회수126 목록 댓글 1

명상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다.
 
명상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다.
명상은 자기 폐쇄적인 고립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세상의 온갖 방식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세상은 의 .식. 주 말고는 주는 게 거의 없으며,
세상이 주는 쾌락에는 늘 커다란 슬픔이 뒤따른다.
 
명상은 세상에서 표연히 벗어나는 일이며,
이때 인간은 누구나 완전한 아웃사이더가 되어야 한다.
그때 세상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고,
하늘과 땅의 아름다움도 변함이 없다.
이렇게 되면 사랑은 더 이상 쾌락이 아니다.
그리고 이 명상으로부터 모든 행동이 나올 때
비로소 그 행동은  긴장이나 갈등, 자기 만족의 추구,
권력의 횡포 등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과거 속에는 결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진리는 기억의 잿더미이다.
기억은 시간으로 되어 있고,
어제의 죽어버린 잿더미 속에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시간의 영역 속에 있지 않은 살아 있는 것이므로... 
 
이제 당신이 자명하다고 주장하는
브라만의 핵심문제를 다루어보자.
샹카라Shankara
(700~750, 인도의 베단타 철학자불이일원론을 주장)가 주장했건 현대신학자들이 주장했건 모든 주장은
분명히 상념想念,imaginative mind이 고안해낸 이론이다.
당신은 어떤 이론을 경험하고 나서
과연 그렇다고 긍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가톨릭 세계에서 자라나 가톨릭적으로
길들여진 사람이 그리스도의 비전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명백히 그따위 비전들은 스스로를 제약하는 조건에서 나온
투사projection이다.
따라서 크리슈나의 전통 속에서 자란 사람은
그 문화에서 태어난 경험과 비전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경험은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크리슈나나 그리스도로써 비전을 인식하는 건 결국
제한된 지식이 낳은 것이다.
따라서 비전은 전혀 실재가 아닌 공상이나 신화에 불과하며, 경험을 통해 강화되는,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도대체 당신은 왜 이론을 원하며
무엇 때문에 믿음을 자명하다고 주장하는가?
이 끊임없는 믿음의 주장은 두려움 - 매일매일의 삶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철저한 삶의 무의미성에 대한 두려움 - 의 징표이다. 
 
당신은 온갖 현실을 바라보면서 어떤 이론을 고안해낸다.
그리고 그 이론이 점점 더 교묘하고 풍부해질수록
이론의 비중은 더욱더 커진다. 그리하여 수백 수천 년 동안
프로파간다를 거치고 나면 그 이론은 틀림없이,
그러나 어리석게도 '진리'가 되고 만다.
그러나 당신이 어떤 도그마를 자명한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면 그때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것과 직면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것'이란 사고와 쾌락과 슬픔이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매일매일의 삶이 경쟁과 탐욕, 야망, 그리고 권력추구로
가득 찬 구조란 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이론이나 구세주,
스승들의 불합리성뿐만아니라 슬픔과 사고가 만들어낸
전 구조도 끝장나는 것을 발견하리라.
 
이 구조들을 이해하고 통찰하는 일이 바로 명상이다.
그때서야 당신은 세상이 환상이 아니라
인간이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지어놓은
엄청난 현실임을 알게된다.
 
당신이 이해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지
조직화된 종교의례나
번잡스러운 행사 위주의 베탄다 이론들이 아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이나 선망, 슬픔에서 비롯한
그 어떤 동기도 없이 자유로울 때 비로소
마음이 평화로 가득 차고
저절로 고요해진다.
그렇게 되면 나날의 삶 속에서 순간순간 진리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지각을 넘어서서 나아갈 수 있다.
그 결과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분리가 사라지면서
모든 이원성이 끝장난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 투쟁, 허영, 절망과 전혀
상관없는 - 시작도 끝도 없는 흐름
(이것은 이론이 아니다)이 존재하며, 마음으로는 결코 붙잡을 수 없고
측량할 길 없는 움직임이 존재한다. 
 당신은 이런 말을 들으면 분명 또 어떤 이론을 만들려고
할 것이며, 새로 만든 이론이 마음에 들면 남에게
그 이론을 전파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전파하는 그 이론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지금 현재 당신의 가슴과 마음을 채우고 있는
고통이나 근심, 또는 타인에 대한 공격성으로부터
자유로울 때만 존재한다.
 
당신이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나서 사랑이라 불리는
저 축복과 마주쳤을 때 비로소 당신은
지금까지 말해 온 것들의 진실성을 알게 되리라.

 
명상하는 마음은 너무나 천진해서
상처받기 쉽다

 
명상 중에 핵심적인 것은 마음mind과 가슴heart의 특질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이룩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마음의 특질은 너무나 천진해서
상처받기 쉽다. 부정을 통과한 긍정적인 상태이다.
단순한 축적이나 살기 위한 경험은 명상의 순수성을 거부한다.
명상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수단이자 목적이다.
마음은 경험을 통해서는 결코 순수해질 수 없다.
사고가 길러낼 수 없는 긍정적 순수 상태를 가져다 주는 것은 바로 경험에 대한 부정이다.
사고는 결코 순수하지 못하다.
명상은 사고를 끝장내는 일인데, 이는 명상하는 자에 의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명상하는 자가 바로 명상이기 때문이다. 명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형형색색의 장엄한 미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그 광경을 보지 못하는 장님과 다를 바 없다.
 
바닷가를 거닐면서 이 명상의 특질이 당신을 찾아오도록 하라. 명상의 특질이 찾아오게 할지언정 추구하지는 말라.
추구란 '전에 있었던' 것에 대한 기억이며,
'정에 있었던' 것은 바로 '지금 있는' 것이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 언덕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주변 일체가 삶의 아름다움과 고통을 당신에게 이야기하게 하라.
그 결과 자신의 슬픔을 깨우쳐서 그 슬픔을 끝마치도록 하라.
명상은 뿌리이자 줄기이며 꽃이고 열매이다.
열매, 꽃, 줄기, 뿌리를 분리하는 것은 낱말일 뿐이다.
이런 분리 속에서 나온 행위는 결코 선을 가져오지 못한다.
미덕은 전체적인 지각이다.
 
당신은 신을 발견할 수 없다.
신을 발견하는 방법이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원한 축복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 생각하여
수 많은 길과 종교, 신념, 그리고 구세주와 스승들을 고안해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모색은 마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통해 헤아리고 투사한 일종의 환상이나 비전으로 인도하고 만다.
 
인간이 찾고 있는 사랑은 살아가는 도중에 파괴된다.
당신은 한 손에 대포를 잡고 있으면서 또 한 손으로
신을 잡을 수는 없다. 신은 단순히 하나의 상징, 하나의 낱말로 전락해 버렸는데, 그 이유는 교회나 사원이 신이 갖는 본래의 참된 의미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이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짧고 덧없는 삶의 슬픔을 겪고 고통 받는다는 점에서는  신자와 다를 바 없다.
그리하여 나날이 겪는 괴로움은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실재는 사고의 흐름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빈 가슴은 사고의 낱말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점점 영리해지고 새로운 철학도 만들어내지만
끝내는 실패의 쓰라림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궁극에 도달하는 방법에 관한
온갖 이론을 만들어왔으며, 신자들은 사원에 가서
스스로 만들어낸 상념 속에서 자기 자신을 상실한다.
승려나 성자도 그 실재를 발견할 수 없는데, 까닭인즉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승려나 성자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전통이나 문화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비둘기는 날아가 버렸고
대지 위엔 구름 덮인 산이 아름다웠다.
진리는 바로 그곳에 있는데도 당신은 결코 바라보지 않는다.
 
특히 어둡고 긴 그림자가 드리우는 저녁 무렵 정원은
마을의 소란스러움이나 빈부의 추악함에서  벗어나
지극히 평화스러운 분위기였다.
 
비가 올 때는 묘한 침묵이 있다. 그래서 그날 아침 계곡에는
평소에 들리던 농장의 소리, 트랙터 소리 , 나무 자르는 소리 등 모든 소리가 멎어 버린 것 같았다.
들리는 소리라곤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물받이통을 따라 졸졸거리는 물소리 뿐이었다.
 
비를 담뿍 머금은 검은 구름이
동쪽으로부터 밀려와서 서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구름이 언덕을 언덕들을 지나가고,
대지의 향기는 구석구석 퍼지고 있었다.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사실 나는 전혀 느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나는 영문학뿐 아니라 이 나라의 문학서적도
꽤 많이 읽었습니다. 시도 읊을 줄 알지만
시구 너머에 놓여 있는 아름다움이 가슴속에 깃들지 않습니다.
 
석양을 바라보는 기쁨 - 과거에 내가 그런 느낌을 느낀 적이 있다면 - 을 왜 잃어버리게 되었을 까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죄악들을
더는 강하게 느끼지 못하는 걸까요
 

"저 꽃을 보고는 있지만 나에겐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같은 사람이 수백만이나 있죠.
그래서 나는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왜 지성과 감정 사이에는 이러한 틈이 있는 걸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잘못된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나무, 꽃, 새 혹은 시냇물은 보지 못한 채 기억력만을 단련하는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삶을 기계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일까?''

지성과 느낌의 분열은 말은 이상할 정도로 중시하면서도
말을 넘어선 것은 중시하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당신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온갖 방식으로
왜곡되고 폐쇄되었기 때문일까?
현대사회에서는 지성을 숭배하는 데 영리하고 약삭빠른 인간일수록 더욱더 성공한다.
 
사랑은 지배하는 성질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사랑은 사고나 감상에 의해 구성되는  사물이 아니다. 사랑은 지적인 말도 아니고 감각적인 반응도 아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모든 일에서 벗어나 쉬어라!
그리고 귀를 기울여라. 저 꽃의 아름다움을 보라.
 
실재는 사고의 흐름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빈 가슴은 사고의 낱말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점점 영리해지고 새로운 철학도 만들어내지만
끝내는 실패의 쓰라림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궁극에 도달하는 방법에 관한 온갖 이론을 만들어왔으며, 신자들은 사원에 가서 스스로 만들어낸 상념 속에서 
자기 자신을 상실한다.

 
명상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며
비전을 경험하거나 침묵을 배양하는 것도 아니다.
염주나 주문이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자기최면이다.
명상은 사고의 패턴이나 쾌락의  황홀경 속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시작이 없기에 마찬가지로 끝도 없다.
'나는 오늘부터 명상 자세로 조용히 앉아
규칙적으로 호흡하면서
나의 사고를 통제하겠다'고 말한다면
그때 당신은 자기기만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명상은 어떤 거대한 관념이나 이미지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장난감에 빠져 있는 아이가 놀고 있는 동안만은
조용하듯이 어지러운 마음을 잠시동안 가라앉힐 뿐이다.
 
 
명상은 어떤 상념의 축복으로 인도하는
비가시적 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적인 마음은 삶의 모든 관계속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하루종일 주의 깊게 보는 것이다.
어떤 말도 비평도 견해도 없이 바라보고 귀 기울이는 것이다.
 
마음이 외적이든 내적이든 삶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귀 기울일 때 바로 그런 마음에는 사고가 붙잡을 수 없는 침묵이 찾아든다.
 
명상적인 마음의 침묵은 인식의 영역 안에 있지 않은 데,
그 까닭은 침묵에는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분리의 공간이 사라진 곳에는 오직 침묵만이 존재한다.
 
 
명상은 새로움이 끊임없이 열리는 것이다.
이 새로움은 언제까지나 반복하기만 하는 과거를 넘어선다.
따라서 이 명상은 이 반복을 끝내는 것이다.
명상이 초래한 죽음은 바로 이 새로움의 불멸성이다.
이 새로움은 사고의 영역 안에 있지 않으며
따라서 명상은 사고의 침묵이다.
 
명상은 길들여지지 않은 쏜살같은 흐름으로 둑을 넘어
범람하는 강과 같은 것이다.
명상은 소리없는 음악이다.
그것은 지배할 수도 이용할 수도 없는 것이다.
명상은 관찰자가 처음부터 사라진 침묵이다.
 
 
명상적인 마음은 삶의 모든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하루종일 주의 깊게
보는 것이다

 
매일 저녁 무굴식 장원으로 찾아와 다리를 꼬고 앉아
눈을 꼭 감은 채 '명상'과 '기도와 만트라'를 외우며
나날의 단조로운 일상생활에 대한 위안을 발견하는 한 남자.
 
그는  가난했지만 언제나 그 외진 구석을 찾아와서
자신을 잊었다.
뭐 하느냐고 물어보기라도 한다면,
그는 '명상하고 있다. 기도와 만트라를 반복해서 외우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에겐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그는 그 속에서 나날의 단조로운 일상생활에 대한 위안을 발견하였다.
 
그는 잔디 위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의 뒤쪽엔 재스민을 비롯한 갖가지 꽃들이 만발해 있으면서 그 찰나의 아름다움으로 그를 감쌌다.
그러나 그는 자기나름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신을 잊은 탓인지 그 꽃들의 아름다움을 전혀 보지 못했다. 
 
 
명상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며 비전을 경험하거나 침묵을 배양하는 것도 아니다. 염주나 주문이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자기최면이다.
오히려 최면제를 먹는 것이 나으리라.
 
명상은 사고의 패턴이나 쾌락의 황홀경 속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시작이 없기에 마찬가지로 끝도 없다.
 
'나는 오늘부터 명상자세로 조용히 앉아
규칙적으로 호흡하면서 나의 사고를 통제하겠다'고 말한다면
그때 당신은 자기 기만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명상은 어떤 거대한 관념이나 이미지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장난감에 빠져 있는 아이가 놀고 있는 동안만은 조용하듯이 어지러운 마음을 잠시 동안 가라앉힐 뿐이다.
그러나 아이는 장난감에 흥미를 잃자마자 전과 마찬가지로
들뜨게 되고 짓궂은 짓을 시작한다.
 
명상은 어떤 상념의 축복으로 인도하는 비가시적 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적인 마음은 삶의 모든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하루 종일 주의 깊게 보는 것이다.
어떤 말도 비평도 견해도 없이 바라보고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다 밤이 와서 육체라는 전체 유기체가 휴식에 들면
명상적인 마음은 종일토록 깨어 있었기 때문에
꿈을 꾸지 않는다.
게으른 자나 자기 상태에 대한 암시를 필요로 하는
반수면 상태의 사람들만이 꿈을 꾼다.
 
그러나 마음이 외적이든 내적이든
삶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귀 기울일 때
바로 그런 마음에는 사고가 붙을 수 없는 침묵이 찾아든다. 
 
 
관찰자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침묵이 아니다.
그가 경험하고 알았다면 그것은 더는 침묵이 아니다.
명상적인 마음의 침묵은 인식의 영역 안에 있지 않은데,
그 까닭은 침묵에는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분리의 공간이 사라진 곳에는 오직 침묵만이 존재한다.
 
 
안팎... 불천…
 
당신은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밖으로 손을 내민다.
 
내적 빈곤에서 나온 이것은
개념적이고 사변적이며 이원론적이다.
 
이것이 갈등이며 그 갈등은 끝이 없다.
 
이번에는
밖에서 안으로 손을 뻗치면서
소위 내면이라고 부르는 것을
탐구하는 것으로 바뀐다.
 
두 가지 모두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이다.
둘 다 모두 끝내야 한다.
 
 
   안과 밖이 같아져야 더 이상 흐를 곳이 없고,
   따라서 흐르지 않는다.(不遷).
   결국 안팎이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2.12.06
    댓글 이모티콘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