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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견(見)은 자연, 인연이 아니다.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2.13|조회수127 목록 댓글 1

* 능엄경 공부(23)


4-10. 견(見)은 자연, 인연이 아니다.

ㅇ. 사비가라 외도의 교설과 차이점


[본문]

[阿難白佛言호대 世尊誠如法王所說覺緣이 徧十方界하야 湛然常住하고
性非生滅인댄 與先梵志인  娑毘迦羅의 所談冥諦及投灰等諸外道種의 說有
眞我가 遍滿十方으로 有何差別이닛고 ]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어!
참으로 법왕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깨달음의 인연[覺緣]이
시방세계에 가득히 맑고 고요하게
항상 머물러 있어서

그 성품이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예전에  범지의
사비가라[先梵志娑毘迦羅]가 말했던
명제(冥諦)와 고행[投灰]을 좋아하는
여러 외도들이

‘진아(眞我)가 시방세계에 가득하다’고
말한 것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해설]

<깨달음의 인연[覺緣]이
시방세계에 가득히 맑고 고요하게
항상 머물러 있어서
그 성품이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면>에서,

이 구절은 지금까지 부처님이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예전에 범지의
사비가라[先梵志娑毘迦羅]가 말했던
명제(冥諦)와>에서,

어느 번역서에는 '先梵志'라고 번역되었는데, 선(先)이란 "오래전" 또는 "옛날에"라는 뜻입니다. 범지(梵志)는 "바라문"이라는 말인데,
힌두교 계통의 수행단체 또는 베단타 수행단체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불교입장에서는 힌두교나 베단타 수행자들을 외도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 바라문에서도 사비가라파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능엄경 처음에 마등가녀가 아란존자를 꼬시려고 사비가라선범천주문을 했다는 것이 바로 이 사비가라파 고대주문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명제(暝諦)란 바라문들이 주장하는
물질의 근원을 말하는데,
보통 아트만(진아)이라고 말하며,

정확한 개념은 알수 없으나,
아마도 초원인체 단계(이스와라, 내가 있다)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고대 브라만 수행체계에서는
아트만ᆞ'내가 있다'를
최고의 진아라고 했으나

점차 세월이 지나면서
그 보다 더 높은 파라마트만ᆞ절대바탕이 진아라는 설로 발전하였음)

또한 브라만교 수행자들 중에는
특별히 고행을 극단적으로 행하여,
더 이상 苦를 받을 것이 없으면
苦가 끝나면 樂 밖에 남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외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들 고행수행자들이 물질의 시초가
신아(神我)라는 개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도 아마 베단타 학파의
아트만 사상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하튼 사비가라가
명제(冥諦)라고 말하는 것이든,

브리만교 고행자들이  말하는
신아(神我)가 있다고 한다든가,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각연(覺緣)이
온 세상에 두루하다고 하신 말씀들이

서로 간에 무슨 차별이 있겠느냐,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 아니냐, 하고 아란이 의심을 하며 묻습니다.

[본문]

[世尊亦曾於楞伽山에 爲大慈等하사 敷演斯義하사대 彼外道等이 常說自然하나
我說因緣非彼境界니이다 ]

세존께서도 일찍이 능가회상(楞伽會上)에서 대혜보살(大慧菩薩) 등을 위하여
이 이치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저 외도들은 항상
자연(自然)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설하는 인연(因緣)은
저들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해설]

능가경(楞伽經)을 설한 곳이
능가산(楞伽山)인데,

능가(楞伽)를 번역하면
'不可到​' '不可往'이 된다고 합니다.
신통을 얻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이란 뜻입니다.

대혜(大慧)는 楞伽會上의 上首보살입니다.
거기서 부처님이 설한 인연(因緣)은

저 외도들이 말하는
자연(自然)이라는 경계가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란의 의심은
부처님의 인연설이나
외도들의 자연설이나
다 같은 얘기 아닙니까?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我今觀此인댄 覺性自然하야 非生非滅이며
遠離一切虛妄顚倒하니 似非因緣與彼
自然이니 云何開示하야 不入群邪하고
獲眞實心妙覺明性이리닛고]

제가 지금 생각하여 볼 때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의 성품[覺性]은
진실한 자연이기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멀리 일체의 허망과 전도(顚倒)를
여의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인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래께서는 ‘외도들이 말하는 자연이 아니다’하시니 어떻게 이해[開示]하여야만 저희들이 삿된 소견에 떨어지지 않고 진실한 마음의 묘하게 깨어있는 밝은 성품[妙覺明性]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해설]

부처님은
인연(因緣)에 대해서
말씀하셨다고 했지만,

아란이 보기에는
외도가 말한 자연(自然)과
다름이 없어 보이고,
인연이 아닌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외도들이 말한 자연과는 다르다"라고
말씀하시니,

어떻게 이해해야 부처님이 말씀하신
"覺緣이 十方에 두루한다"는 것을 이해해서,

구도의 여정에서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고 옳바르게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겠읍니까, 하는 말입니다.

ㅇ. 견(見)은 자연이 아니다.

[본문]

[佛告阿難하사대 我今如是開示方便하야 眞實告汝어늘 汝猶未悟惑爲自然
가하니 阿難若必自然인댄 自須甄明有自然體하리니 汝且觀此하라 妙明見
中에 以何爲自오 此見爲復以明爲自아 以暗爲自아 以空爲自아 以塞爲
自아 阿難若明爲自인댄 應不見暗이오 若復以空爲自體者인댄 應不見塞
이며 如是乃至諸暗等相으로 以爲自者인댄 則於明時見性斷滅어니 云何
見明이리요 ]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편을 열어 보여서 진실하게 말하였는데도 너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자연인가?’하고 의혹을 품고 있구나. 아난아! 만약 정말로 자연이라면 그 자연을 분명히 밝힐 수 있어서 자연의 체(體)가 따로 있어야 할 것이다.

너는 우선
이 묘하게 밝은[妙明] 보는 성품[見]
가운데에
무엇이 자연의 체가 되는지 살펴보아라.

이러한 보는 성품이
밝음으로 자연의 체를 삼느냐,
어두움으로 자연의 체를 삼느냐,
아니면 비어 있는 것[空]으로
자연의 체를 삼느냐,
막히는 것으로 자연의 체를 삼느냐?


아난아! 만약 밝음으로
자연의 체를 삼는다면
응당 어두움을 보지 못할 것이고,

만약 비어있는 것으로
자연의 체를 삼는다면
응당 막힌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더 나아가
어두움 등으로 자연의 체를 삼는다면

곧 밝을 때에는
보는 성품이 없게 될 것이니
어떻게 밝음을 볼 수 있겠느냐?”

[해설]

아란의 의심을 해소해 주기 위해서
진심(眞心)의 묘각명성(妙覺明性)이
자연이 아님을 밝힙니다. 

妙覺明性이 만약 自然이라면,
자연은 '저절로 그러한 것'이므로

스스로 있는<自>라는 것이
그 <體>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自然>은 존재하는 것이므로
엄연이 그 <自體>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自>라는 것이 드러나서
그 <自然體>라는 것이 있어야
妙覺明性이 <自然>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

묘하고 밝은 보는 성품을
자체(自體)라고 한다면,

여기에 무엇을 가지고
<自>라고 할지
한번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묘(妙)하게 밝은(明)
보는 성품(見精)이니깐,

먼저 밝은 것(明)으로
자체를 삼을까?

즉 見精자체가 밝은 것인가?,
아니면 어두운 것인가?,
空한 것인가?
막힌 것인가?

부처님이 한번 이렇게 따져 보자는 것입니다.

결국은
밝고 어둡고, 비고, 막힘 등,
명암공색(明暗空塞)은

우리가 보는
見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밝음을
자연의 체(見)로 삼는다면 ,
응당 어둠은 보지 못할 것이고>에서,

見의 자체가 밝음이라면,
밝은 곳엔  어둠이 없으니깐,
見은 밝은 것만 보지 어두운 것은 못봐야,

밝음(明)을
見의 자체라고 해야될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見의 자체가 밝은 것이라면
어두운 것과는 상관이 없지 않느냐,

즉 見이 어두운 것을
못 봐야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비어있는 것을
자체로 삼을 것 같으면,
응당 막힌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에서,

만약 비어있는 空을
見의 體라고 한다면

응당히 막힌 것(色)과는
상관이 없으므로
막힌 것은 못 보아야 할거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見의 자체(自體)를
어둠이라고  한다면,
어두울 때는
밝은 것이 없어졌으니깐,

보는 성품(見性)이 끊어져 버렸으니까,
밝음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밝음, 어둠, 빔, 막힘 중
어느 것을 예를 들더라도

한가지를 보면
다른 것은 못보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즉 보는 성품(見)은
명(明), 암(暗), 공(空), 색(塞)으로
자체를 삼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 ㅇ. 견(見)은 인연이 아니다.

[본문]

[阿難言必此妙見이 性非自然인댄
我今發明是因緣生이나 心猶未明하야
諮詢如來하노니 是義云何이며
合因緣性이닛고]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반드시 이 묘하게 밝은 보는 성품이
자연이 아니라면

저는 다시 이것이
‘인연으로 해서 생긴 것이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직 분명하지 못하여
부처님께 묻습니다.
이 이치가 어떻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설하신
인연의 뜻에 맞겠습니까?”

[해설]

부처님이
견성은 자연이 아니라고 하니까,
아란이 그럼 인연(因緣)으로 인해 생긴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

자연이 아니면 인연이고,
인연이 아니면 자연일 테니깐,

확실하게는 감이 잡히지 않지만,
그럴게 아니냐, 하는 식으로
한번 부처님에게 디밀어 보는 것이죠.

자연이 아니면 인연일 텐데,
見이 인연이라면
인연이라는 이유를 설명해야 할텐데,

그러나 어떻게 설명을 해야
이 見의 뜻이
인연에 부합될 수 있는지

아란은 분명하게
지금 알 수가 없다는 것이죠.

[본문]

[佛言汝言因緣이라하나 吾復問汝호리라 汝今因見으로 見性現前하리니 此見爲
復因明有見가 因暗有見가 因空有見가 因塞有見가 阿難若因明有인댄 應不
見暗이며 如因暗有인댄 應不見明이라 如是乃至因空因塞도 同於明暗하
니 復次阿難아 此見又復緣明有見가 緣暗有見가 緣空有見가 緣塞有見
가 阿難若緣空有인댄 應不見塞이며 若緣塞有인댄 應不見空이라 如是乃
至緣明緣暗도 同於空塞하니라 ]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인연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내가 다시 너에게 묻는다.

네가 지금 보기 때문에
보는 성품[見性]이
앞에 있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보는 성품이
밝음으로 인하여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두움으로 인하여있다고 생각하느냐,
허공으로 인하여 있다고 생각하느냐,
막힘으로 인하여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난아! 만약 밝음으로 인하여 보게 된다면
응당 어두운 것을 보지 못할 것이고,

어두움으로 인하여 보는 것이라면
밝은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더 나아가
허공으로 인하여 보게 되거나
막힘으로 인하여 보게 되는 것도
앞의 명암(明暗)과 같을 것이다.

다시 아난아!
이 보는 성품이
밝은 것을 연(緣)하여 보게 되느냐,
어두운 것을 연하여 보게 되느냐,
허공을 연하여 보게 되느냐,
막힘을 연하여 보게 되느냐?

아난아! 만약 허공을 연하여 보게 된다면
막힌 것을 보지 못할 것이요,

만약 막힘을 연하여 보게 된다면
허공을 보지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더 나아가
밝음과 어두움도
트이고 막힘[空塞]의 비유와
같을 것이다.

[해설]

<네가 지금 보기 때문에 ​
보는 성품이 앞에 있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에서,


밝음을 본다든지,
어둠을 본다든지,
빔(空)을 본다든지,
막힘을 본다든지,

이것들을 보는 것으로 因해서
보는 성품(見性)이
앞에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즉 明暗空塞을 보기 때문에
본다고 하는 見性이
앞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보는 성품이
밝음으로 인해서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둠으로 인하여 있다고 생각하느냐,
막힘으로 인하여 있다고 생각하느냐?>에서,

인연(因緣)이라는
인(因)과 연(緣)이라는 것으로 인해
봄이 있느냐고 묻는 것인데,

명암공색(明暗空塞)으로 인(因)해서
見이 있느냐,

명암공색으로 연(緣)해서
견(見)이 있느냐, 를

지금 각각 경우에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밝음으로 인해서 見이 있느냐>라는
말을 예를 들면,

감자씨를 심으면
감자가 싹트는 것처럼,

밝음으로 인해서 見이 생긴다면
見의 종자가 밝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밝음 때문에
명(明)에서 견(見)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밝음으로 인해서
견이 나왔다고 할 수 있읍니다.

暗, 空, 塞으로 인해
見이 생긴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밝음으로 인하여 봄이 있다면
마땅히 어둠은 보지 못해야 하고>에서,

그러나 우리는 어둠을 볼 수 있으니까, 밝음(明)으로 인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죠.

<이와 같이 더 나아가
空으로 因하여 보게 되거나
막힘으로 因하여 보게 되는 것도
앞의 명암(明暗)과 같을 것이다>에서,

空으로 因하여 見이 있다고 하면
막힌 것을 보지 못해야 하며,

막힌 것으로 인하여 見이 있다고 한다면
空을 보지 못하는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즉 인(因)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과씨를 심어서
사과나무가 생기는 것이 직접원인,
즉 인(因)입니다.

지금까지는 因 하나만을 얘기했고,
다음에는 연(緣)을 따로 이야기합니다.

<보는 성품이 밝은 것을 緣하여
보게 되느냐>에서,

연(緣)이라는 것은 조연(助緣),
즉 간접적인 원인입니다.

예를 들면 콩씨에서 콩이 난다고 하면,
콩씨는 직접因이니까 그건 因이지만,

콩씨에서 나무로 자라려면,
흙, 습기, 햇볓, 온도 등이 있어야 되는데
이것들이 조연(助緣)이라고 합니다.

콩씨 하나를 100년 동안
책상 위에 두어도 싹이 안납니다.

왜냐하면 因은 있지만,
緣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허공을 연하여 봄이 있다면
막힌 것은 보지 못할 것이며>에서,

공 때문에 견이 있다고 하는 것은,
공의 간접적인 원인으로 인해
보는 것이 생긴다는 것인데,

그러면 막힌 것은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밝음, 어둠, 공, 막힘 등
모두 같은 원리로 따져 볼 수가 있읍니다.

그래서 자연은 물론 아니지만,
인연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더우기 인연이라고 하면
없던 것이 생기고,
있던 것이 없어지는 생멸법인데,

우리의 견 자체는
생멸법이 아니라,
우주의 절대진리이므로,

있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생기는
생멸법은 원래 맞지 않는 것이죠.

[본문]

[當知如是精覺妙明은 非因非緣이며
亦比自然이며 非不自然이니 無非不非하며
無是非是하야 離一切相하고 卽一切法이어늘 ]

그러므로 응당 이와 같은
깨달음의 묘명[精覺妙明]은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며
또한 자연(自然)도 아니고
자연 아님도 아니며
비(非)와 불비(不非)도 없고
시(是)와 비시(非是)도 없어서
일체의 형상[一切相]을 여의고

일체의 존재[一切法]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해설]

​그러므로 見性은
因도 아니고,
緣도 아니고,
自緣도 아니고,
자연 아님도 아니라고 했읍니다.

因, 緣, 自緣을 부정하고,
또 다시 부정한 것을 부정하고,

그 부정한 것이 다시 긍정으로 생각할까봐,
다시 그 부정한 것을 또 부정하여

현상계의 어떤 표현을
완전히 부정하면서도
또한 모든 존재에 포함되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체의 형상을 여의고
일체의 존재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에서,

즉 일체상을 여의었다고 하면
온갖 것이 다 아니라는 말이고,
아니기만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니 만법 그 속에
그대로 妙精明見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며,

나무 하나 풀 한포기가
모두 妙精明한 세계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즉 우주의 진리라는 것이
나무도 아니고,
돌도 아니고,
물도 아니겠지만,

나무나 돌이나 물이
다 우주의 진리로 생긴 것이니깐,
모양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있는 그대로 존재로 보았을 때는
모두 묘명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금반지, 금비녀, 금목걸이, 금시계가
다 모양은 다르지만
모두 순금으로 된 것과 같이

모든 만물은 그 모양이 다르지만
모두 진리자체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우주만물이
모양은 다 생멸법이지만,

실존적으로는
생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인연 아닌 것도 아니고
자연 아닌 것도 아니고,

非, 不非도 없고,
是, 非是도 없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實相 자체가
어떤 것이냐 하면,

우리의 묘정명성(妙精明性)은

"일체법의 모양을 떠났지만,
일체법 자체가
바로 실상(實相) 그 자체"
라는 것입니다.

[본문]

[汝今云何於中措心하야 以諸世間戱論名相으로 而得分別가 如以手掌으
로 撮摩虛空인달하야 祗益自勞언정 虛空云何隨汝執捉이리요 ]

너는 지금 어찌하여
그 가운데 마음을 두어
속세의 부질없는 이름과 모양으로
분별을 일삼고 있느냐?

이는 마치 손바닥으로
허공을 잡으려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

허공이 어떻게 너의 손에 잡히겠느냐?”

[해설]

즉 묘정명성(妙精明性)을
인연이겠다, 자연이겠다 하며,

이름과 모양으로
분별심을 일으키느냐는 것입니다.

​즉 우주의 진리에 대해서
生滅法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말을 가지고는

不生滅의 진리 자체를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난이
인연이다 자연이다 하는 것은
생멸법을 말하는데,

즉 말이나 글등 이론들은
생멸법을 가지고
이 진리에 대하여 표현하는 말인데,

어떻게 주객 이원화된
개념과 언어를 가지고

비이원적인 각성(覺性)자리를
분별하려하는가,

그런 所見,
좁은 마음 자세를 가지고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세간의
희론명상(戱論名相)은 손바닥이고
묘정명성(妙精明性) 자리는 허공인데,

손바닥으로
허공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세간의
개념적 이론이나
명상(名相)을 가지고

묘각명성(妙覺明性)자리를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손바닥으로 허공을 잡을 수 없듯이,

세간의 희론명상(戱論名相)을 가지고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ㅡ 능엄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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