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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No Claim, No Blame, No Fame / Leo Hartong 맑은 삶의 선물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2.18|조회수117 목록 댓글 1

 

No Claim, No Blame, No Fame

Leo Hartong

요구 없음, 비난 없음, 명성 없음

 

레오 하통

 

The following is an extract from Leo's book 'Awakening to the Dream: The gift of lucid living'.

다음은 레오의 책 '꿈에 눈을 뜨다 : 맑은 삶의 선물'에서 발췌 한 내용입니다.

 

As I am sitting at my computer writing these words, I become aware of the sensation of thirst. Simultaneously comes the thought, “A cup of tea would be nice.” This all happens spontaneously without me first

deciding to be thirsty and then to think of tea.

이 말을 쓰는 컴퓨터에 앉아있을 때 나는 갈증이 느껴짐을 알게 됩니다.

동시에 "차 한 잔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나와는 상관 없이 먼저 목이 마르다는 결정을 한 후,

곧바로 차茶를 생각함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합니다.

 

If you watch your mind, you will see that thoughts arise of their own

accord. Please, do not simply accept or reject this.

When you honestly observe and investigate, it will become clear that

you are not the thinker of your thoughts.

만약 그대의 마음을 본다면, 그대 자신의 생각이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단순하게 이 사실을 수락하거나 거부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정직하게 관찰하고 조사 할 때,

당신이 당신의 생각을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What this chapter will try to show is that you are also not the doer of your deeds. This may go against your deepest convictions and beliefs, so I ask you to suspend the judgment that may come up as a reflex and see what is really being offered here.

이 장에서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또한 당신의 행위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가장 깊은 신념과 믿음에 어긋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반사 작용으로 올 수 있는

판단을 중지시키고 실제로 여기에서 제안하는 것을 인식하도록 요청합니다.

 

All apparent decisions and choices are thoughts.

To act upon a thought feels like choice and is labeled choice by the

language, but choice is really just the expression‎ of whatever thought

arises most predominantly. I did not choose my desire for tea, nor did

I choose the stronger desire that I should finish the paragraph first,

but that is what is spontaneously happening.

모든 명백한 결정과 선택은 생각입니다.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선택과 같이 느껴지고 언어에 의해 선택이라고 불린다.

선택은 실제로 가장 현저히 일어나는 우월적 생각의 표현일 뿐이다.

나는 차에 대한 욕망을 선택하지 않았으며, 내가 먼저 일어난 생각을

없애야 한다는 강한 욕구를 선택하지도 않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입다.

 

This is not to say that I am an apparatus without free will. There is actually no individual here to be deprived of free will. The thought of “I” and the thoughts of tea and typing merely unfold as a manifestation of the animating energy of Pure Awareness.

이것은 내가 자유 의지가 없는 장치(기관)라는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자유 의지를 박탈당하는 개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생각과 차와 타이핑에 대한 생각은 순수한 인식의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의 발현으로 전개됩니다.

 

From this perspective, there is a sense that life is simply living, thinking, and acting through you and as you.

The Taoists call this Wu Wei, which loosely translates as non-doing.

This does not mean doing nothing in the sense of inertia, but rather that everything—including “your” thoughts and actions—is happening

naturally and of its own accord.

Lao Tsu describes it in the Tao Te Ching as follows: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생이란 단순히 살아 있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도교 신자들은 무위(無爲)(Wu Wei)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무기력이라는 관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생각과 행동"을 비롯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老子는 도덕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Tao, without doing anything,

Leaves nothing undone (37)

 

道常無爲而無不爲

도상무위이무불위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화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화이욕작 오장진지이무명지박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무명지박 부역장무욕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불욕이정 천하장자정

 

무명지박 부역장무욕

불욕이정 천하장자정

 

 

도는 하는 게 없으면서, 못하는 게 없다.

임금이 도를 간직하면 만물이 동화할 것이다.

 

잘 동화하고 있는데도 더욱 의욕을 부리면,

나는 이름 없는 통나무로 눌러버리겠다.

 

이름 없는 통나무는 욕심이 없을 터이다.

욕심이 없이 고요하면 천하가 안정될 것이다. (37)

 

 

And again:

Less and less is done,

Till only non-action remains.

Nothing is done, yet nothing is left undone. (48)

 

爲學日益

위학일익

 

爲道日損

위학일손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無爲而無不爲

무위이무불위

 

取天下 常以無事

취천하 상이무사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급기유사 불족이취천하

 

 

배움은 날마다 보태지만,

도는 날마다 줄인다.

줄이고 줄여, 무위에 이른다.

 

무위하면 못할 게 없다.

 

천하를 취하려면, 일 없이 하라.

일단 일이 벌어지면, 천하를 취하기 어렵다. (48)

 

In Buddha’s words:

Suffering exists, but none who suffer,

The deed there is, but no doer thereof.

부처님의 말씀 :

고통은 존재하지만, 고통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행위는 있지만 그 행위자는 없습니다.

 

****

已去無有去 未去亦無去 離已去未去 去時亦無去

이미 간 것에 감이 없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감이 없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없네. (1)

 

已去無有去已去故 若離去有去業 是事 不然 未去亦無去 未有去法故

去時名 半去半未去 不離已去未去故

이미 간 것에는 감이 없다. 이미 갔기 때문이다.

만일 감이 없이 감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감이 없다.

아직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가고 있는 것이란 반은 이미 간 것이고 반은 아직 가지 않은 것이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2) 問曰

動處則有去 此中有去時 非已去未去 是故去時去

동작이 있는 곳에 감이 있네.

이것에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없네.

그러므로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네. (2)

 

隨有作業處 是中應有去 眼見去時中有 作業 已去中作業已滅

未去中未有作業 是故當知去時有去

거동이 있는 곳마다 감이 있다.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거동이 있음을 눈으로 본다.

이미 간 것에는 거동이 이미 사라져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거동이 아직 없다.

그러므로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答曰

云何於去時 而當有去法 若離於去法 去時不可得

지금 가고 있는 것에

어떻게 감이 있겠는가?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는데. (3)

 

去時有去法 是事不然 何以故 離去法 去時不可得 若離去法有去時者 應去時 中有去 如器中有果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마치 그릇 속에 과일이 담겨 있는 것처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는 것이 될 것이다.

 

復次

若言去時去 是人則有咎 離去有去時 去時獨去故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는 과실이 있네.

지금 가고 있는 것 만에 감이 있기 때문이네. (4)

 

若謂已去未去中無去 去時實有去者 是 人則有咎 若離去法有去時

則不相因待 何以故 若說去時有去 是則爲二 而實

不爾 是故不得言離去有去時

또 만일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감이 없고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실재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과실이 있다.

만일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지 않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둘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

 

5) 問曰 若去者去有何咎

만일 가는 이가 간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答曰

若言去者去 云何有此義 若離於去法 去者不可得

가는 이가 간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는가?

감이 없이 가는 이는

얻을 수 없는데. (9)

《中論‧觀去來品》(감과 옴을 관찰하는 장)

 

We all know the feeling of being in the flow of things. At such times,

we lose ourselves in our activity. Writers frequently have this experience when the words seem to simply pour onto the page and they have no

idea what the next line is going to be until they write it. Most athletes

also have moments when suddenly everything clicks and they manage

to perform beyond their normal capacity. There are sometimes

moments during lovemaking when lovers melt into a union that knows no separate individuality. Or what about narrowly averted accidents

on the highway where you later wonder just who was steering the car? I’m sure if you think about it, you have had several such experiences in which you forgot yourself and everything seemed to magically fall into place.

우리 모두는 사물의 흐름 속에 있다는 느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활동에서 자아를 잃어 버립니다.

작가들은 단어가 단순히 페이지에 쏟아지는 것처럼 보이고,

그들은 글을 쓰기 전까지 다음 줄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할 때 종종 이 경험을 합니다. 대부분의 운동 선수들은 갑자기 모든 것이 클릭되고 정상 용량을 초과하여 수행 할 수 있는 순간도 있습니다. 연인들이 별개의 개성을

알지 못하는 합일로 녹아들 때, 때로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또는 누가 나중에 차를 조종했는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고속도로에서의

사고를 가까스로 피하면 어떨까요? 나는 당신이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면, 당신은 자신을 잊어 버리고 모든 것이 마법처럼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 몇 가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This forgetfulness is very different from forgetting your friend’s birthday or where you put your glasses. Nor is it like the absentmindedness

induced by too much booze or too many tranquilizers.

It is a forgetfulness that is alert and alive. This losing oneself in the

flow is a taste of what is meant by “the action of non-action.”

이 건망증은 친구의 생일을 잊어 버렸거나 안경을 어디에 두었는지 와는

아주 다릅니다. 너무 많은 술이나 너무 많은 진정제로 인해 야기된 멍한

방심 같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경고하는 생생한 건망증입니다. 몰입 속에서 자아를 잃는 것은 "비 - 행동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맛볼 수 있습니다.

 

All works are being done by the Gunas (or the energy and power) of

nature, but due to delusion of ego, people assume themselves to be the doer. (The Bhagavad-Gita Copyright 1988 by Dr. Ramanand Prasad V3.27)

모든 일은 본연의 구나 (또는 ​​에너지와 힘)에 의해 수행되고 있지만,

에고의 망상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Ramanand Prasad 박사의 Bhagavad-Gita Copyright 1988)

 

Although being in the flow feels wonderful, the idea of our actions

happening by themselves instead of through our free will can be

upsetting. This is especially true for the western mind, which tends to

view free will as either an inherent quality of one’s prized individuality

or a gift/test from God to see if one is strong enough to do the right

thing. For the atheist, his doing or failing to do the right thing may be

a measure of his true character; for the religious person there is a lot

more at stake, since for him it determines the quality of his after-life.

비록 몰입에 있는 것이 멋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우리의 자유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일어나는 우리의 행동들에 대한 생각은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유 의지를 자신의 소중한 개성의 고유한 자질이나, 옳은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지를 보기 위한 하나님으로

부터의 선물 / 시험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서양인의 마음에 더욱더 해당됩니다. 무신론자에게 있어, 옳은 일을 행하거나 실패하는 것은 그의 진정한 성격의 척도 일 수 있습니다. 종교인에게 더 많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의 사후세계의 질을 결정 짓는 중요한 요소가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위험이 있습니다.

 

From the free-will point of view, the idea that something is living

through us can be quite objectionable. It seems to reduce us to mere

marionettes, implying a helplessness, which is hard to accept.

Furthermore, there arises a fear that if nothing we do is truly our own

action, then people have an excuse for undesirable behavior.

What is overlooked in such arguments is that all activity is of the one

Self, appearing as the multiplicity of characters that apparently do the

thinking, acting, and choosing. To excuse our undesirable behavior on

these grounds does not work, for there will still be consequences.

You may protest that the thought that led you to steal from your

employer simply arose, and you are not responsible; but then neither

is your employer responsible for the thought that led him to fire you

and press charges.

자유 의지 관점에서 볼 때, 무언가가 우리를 통해 살아 간다는 생각은

상당히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그저 마법으로 줄여주며, 무력함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는 일이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변명의 여지가 있다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러한 논쟁에서 간과되는 것은 모든 활동이 생각, 행동, 선택을 하는

문자의 다양성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자아에 관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변명하는 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고용주로부터

도용당하여 이끌었던 생각이 단순히 생겨나고 당신은 책임이 없다는 것에 항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용주는 그로 하여금 당신을 해고하고 요금을 청구하는 사고에 책임이 없습니다.

 

Ultimately, since the ego is an illusion, it cannot be deprived of free will nor can it be the victim of predestination. The ego is neither the doer

nor the non-doer; it simply does not have an existence independent of the Self, any more than a character in a novel exists independently of

the author who portrays him. He and all other characters in the story

arise from the imagination of the writer. When it is realized that we all arise from Pure Awareness in much the same way, it is instantly clear

that there is no one from whom free will could have been taken.

The moment the ego’s point of view gets dropped, there is the liberating realization of a divine energy spontaneously manifesting as us.

There’s then no one left to experience a sense of helplessness,

and it is clearly seen that the helplessness is just another thought.

Like St. Paul said:

궁극적으로, 에고는 환영이기 때문에 자유 의지를 잃을 수도 없고 숙명의 희생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에고는 행위자도 아니고 행위자-아님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기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그를 묘사하는 저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이상이다. 그와 이야기의

모든 다른 등장 인물들은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다. 우리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순수한 인식 (Pure Awareness)으로부터 생겨났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유 의지가 빼앗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즉시 명백해진다. 에고의 견해가 무너지는 순간, 자발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신성한 에너지의 해방된 실현이 있습니다. 그 후 무력감을 경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력감은 단지 또 다른 생각 일뿐입니다.

세인트 폴처럼, 그는 말했다 :

 

"I live, yet not I, but Christ - the eternal Logos - liveth in me. "

(Gal 2:20).

"나는 살아 있지만, 내가 아니요, 영원한 로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이라." (갈디아서 2:20).

 

The paradox in the suggestion that the ego should be dropped is that

when one is not the doer, one cannot do the dropping. What happens is more like a falling away, which comes in its own time and which is

nothing other than the impersonal recognition of the ego’s illusory

nature. Although this realization comes by itself—it is often referred to

as grace—it is not something one has to wait for. Waiting is just another way of trying to get it, which only perpetuates the illusion that there

really is someone who should get something.

자아(에고)를 버려야 한다는 암시에서의 역설은, 행위자가 아닐 때는

자아를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그 자신의 시간에 오는 추락과 같으며, 그것은 다름아닌

에고의 환상적 본성에 대한 비 개인적 인식이다.

이러한 실현은 그 자체로 발생하지만, 종종 은혜 (grace)라고도 합니다.

이는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것은 그것을 얻으려는

또 다른 방법 일뿐입니다. 실제로 뭔가를 얻어야 할 누군가 있다는 환상을 영속시킬 뿐입니다.

 

Intellectually accepting the idea that we should not try often results in

trying not to try. This is what in psychology is called the double bind or in everyday language, “damned if you do and damned if you don’t.”

우리가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종종 시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이중 구속 또는 일상 언어로 불리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면 피해를 입히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받을 것"

 

This double bind is acutely felt when you try to will yourself to forget

something unpleasant.

It also features prominently in so-called self-improvement projects and can lead to bizarre thought patterns such as:

이 이중 구속은 당신이 불쾌한 것을 잊어 버리려고 할 때 매우 예민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또한 소위 자기 계발 프로젝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다음과 같은 기이한 사고 패턴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I will correct my habit of correcting myself and others;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바로잡는 습관을 고치겠다.

 

I will no longer put up with intolerance;

나는 더 이상 편협함을 참지 않을 것이다.

 

I’ll put a real effort into becoming more relaxed; and

좀 더 여유로워 지도록 노력하겠다.

 

I can hardly wait to become more patient.

나는 더 참을성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I will really try to be more spontaneous;

나는 정말로 좀 더 자발적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I will seriously work on my sense of humor;

나는 진지하게 나의 유머감각을 연구할 것이다.

 

and In the very near future,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I resolve to become more accepting of what is right now.

나는 지금 당장에 대해 더 많이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Okay, this might be a slight exaggeration, but it shows the principle at work through the contradictions that pop up when the ego embarks on a project of becoming better adjusted, more accepting, or more relaxed.

As long as we believe that there is an ego to either improve or remove, and as long as we work toward the betterment or elimination of that

ego, the more the illusion is perpetuated.

It’s like looking in the mirror and seeing your face. Trying to remove

your face by cleaning the mirror is useless. If you simply walk away,

it’s not there anymore; but you don’t see that. All you know is that

every time you look it’s still there, and you may decide that more

cleaning is needed. During the course of the day we often “forget” to

look and, in such moments, we are totally without a sense of ego.

We don’t realize this since during these moments there is no “I” to

notice its absence.

좋아요, 이것은 약간의 과장된 것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자아가 더 잘

적응하고, 더 받아 들여지거나, 더 긴장을 완화하는 프로젝트에 착수 할 때 나타나는 모순을 통해 일하는 원리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개선하거나 제거할 자아가 있다고 믿는 한, 우리가 그 자존심의

개선이나 제거를 위해 노력하는 한, 그 환상은 더 오래 지속됩니다.

그것은 거울을 보고 당신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을 닦아서

얼굴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쓸모가 없습니다.

당신이 단순히 그곳을 떠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당신이 아는 모든 것은

당신이 그것을 볼 때마다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많은 청소가 필요하다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루의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보지 못한다는 것을 "잊는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자아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다. 우리는 이 순간에 그 부재를

눈치 채는 "나"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The deceptive sense of a personal self is a complex system of thoughts, memories (a special kind of thoughts), emotions and conditioning.

This mental structure may even cause certain sensations in the body-

mind, through, for example, habitual muscular contractions and nerve

firings, further supporting the perception of the illusion as reality.

We may argue that when it is felt and perceived it also must exist.

It’s fine to take that position, but then realize that the ego illusion is not so much in what we label as the ego, as in our identification with it.

In the same way, we could say that a mirage of an oasis in the desert

exists when it is observed; or we could say that it does not.

It only becomes a problem when it is not recognized for what it truly

is and one expects to find water there.

개인적인 자아에 대한 기만적인 감각은 생각, 추억 (특별한 생각), 감정 및 조절의 복잡한 체계입니다. 이러한 정신적 구조는 예를 들어 습관적인 근육 수축과 신경 발작을 통해 몸의 마음에 어떤 감정을 유발할 수도 있으며,

환상의 인식을 현실로 뒷받침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느껴지고 인식될 때

또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세를 취하는 것은 좋지만, 에고의 환상은 자아와 동일시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에고의 개념이라 부르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사막의 오아시스 신기루가 관찰될 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물을 찾을 것으로 기대할 때 문제가 됩니다.

 

See that you are not limited to this mirage known as the ego.

You are that which appears as and—at the same time—is aware of the

ego. The ego concept is built into the very syntax we use for thinking

and talking. Thinking “I have an ego” is just a thought;

but so is thinking “I don’t have an ego.” Both thoughts include “I”

along with “ego,” and both appear and disappear again without leaving a trace on the mirror of Pure Awareness. Stop looking, and it’s gone.

에고로 알려진 이 신기루에 국한되지는 않는지 확인하십시오.

당신은 그 에고를 인식하고 있는 동시에 동시에 나타납니다. 에고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고 말할 때 사용하는 바로 그 구문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나는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생각 일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자아를 가지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두 생각 모두는 "자아"와 함께

"나"를 포함하며, 두 가지 모두 순수 인식의 거울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다시 나타나고 사라진다. 눈길을 멈추라. 그러면 사라질 것이다.

 

When a student asked Shri Atmananda, “When will I get it?” he answered, “When the when stops.” Normally the mind then asks “And when will that be?” The answer can only be “Right here and right now!”

This literally means that you do not have to wait for grace to set you

free. You already are free. Saying that you do not have to wait for this

freedom is not meant to put you again into a double bind, in which

you might try to give up trying or find yourself waiting for the waiting

to stop. It’s just a reminder that the silent space of Pure Awareness

already is. It sees and contains the reading of these words and the

arising of thoughts, which then are identified as “your” thoughts.

It is in and prior to the energizing of your senses and available as

everything that’s presenting itself at this very instant. The acceptance of this reveals what you truly are. Behind the veil of ignorance (ignore-

ance), you are the Awakened One, aware of—as well as appearing in

and as—this marvelous show of manifestation. You are, at once,

Awareness and the totality of its content.

한 학생이 Shri Atmananda에게 "언제 내가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언제 "언제 멈추느냐."라고 대답했습니다.

보통 마음은 "그게 언제지?"라고 묻는다.

대답은 "지금 바로 지금 당장!"일 뿐이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은총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대는 이미 자유롭다.

당신이 이 자유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당신을 다시 이중의 구속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 당신은 시도를 포기하려고

하거나 혹은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것은 단지 순수한 인지의 조용한 공간이 이미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러한 단어들과 생각의 발생을 보고 포함하고 있으며,

그 후에 그것은 "당신의" 생각이라고 식별됩니다. 그것은 당신의 감각에

활기를 불어 넣기 전이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드러내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 드러낸다.

무지의 베일 뒤에, 당신은 깨어난 사람이며,

이 놀라운 징후를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즉시 인식과 그 내용의 전체입니다.

 

Again, let me stress that, due to the limitations of language, I seem to

suggest that there is Awareness on one hand and its content on the

other. In truth, there is nothing but Oneness here, preceding and

including the duality of duality and non-duality. There is no individual entity to either get it or not get it; there is only this. There is not now,

nor was there ever, an ego either to be burdened by guilt or to bask in

individual glory. No claim, no blame, no shame, and no fame—it all

goes out of the window when thoughts, feelings, decisions, and actions are known as arising spontaneously from the welter of life.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언어의 한계로 인해 나는 한편에 인식이 있고 다른 한편에 내용이 있음을 제안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여기엔 이원성과 비 이원성의 이중성을

포함한 선행 외에는 여기에는 유일성 만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얻거나 얻지 못하는 개별 실체가 없습니다. 오직 이것만 있습니다.

죄책감에 사로 잡히거나 개인의 영광을 누릴 자아는 현재도,

혹은 그 어느 때도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주장도 없고, 비난도 없고, 수치심도 없고, 명성도 없다.

- 생각, 감정, 결정, 행동들이 삶의 터전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밝혀지면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If you cannot believe this and are still convinced that you are a separate individual in charge of your life, try this small experiment. Right now in this moment decide to feel elation and feel it. Then think of your least

favorite food and for the next five minutes really crave it. Consider your opinion on capital punishment and change it. Finally, ask yourself what your next thought will be and see if you can know it in advance. While you’re busy doing this or perhaps hosting a thought stream that rejects

it as nonsense, the divine play of life magically unfolds by itself.

만약 당신이 이것을 믿을 수 없고 여전히 당신이 당신의 삶을 책임지는

별개의 개인이라는 것을 여전히 확신하고 있다면,

이 작은 실험을 시도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 의기양양해지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느끼기로 결정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가장 싫어하는 음식을 생각해보십시오. 다음 5 분 동안은 정말로 그것을 간절히 갈망합니다. 사형에 대한 귀하의 의견을 고려하여 변경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다음 생각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미리 알 수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당신이 이것을 하느라 바쁘거나 어쩌면 그것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거부하는 사고 흐름을 접대하는 동안, 신성한 생명의 신의 놀이는 마법처럼 펼쳐집니다.

 

You will find that when your claim on thoughts, feelings, and actions

dissolves, your ability to deal with the day-to-day business of living

doesn’t get impaired. On the contrary, it becomes less stressful.

When the person you thought you were continues as a dreamed

character—as one of the many guises of the universal actor—there is

no longer any effort dedicated to keeping up appearances, no need to

carry resentment, no point in worrying about an imaginary future.

생각, 감정 및 행동에 대한 그대의 주장이 사라질 때, 일상 생활의 업무를 처리하는 그대의 능력은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스트레스가 적어집니다.

당신이 꿈꿔왔던 인물, 즉 세계적인 배우의 많은 모습 중 하나를 꿈꾸는

인물로 계속 생각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더 이상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분노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으며,

상상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To sum it up, thinking that you’re no more than your limited role is

buying into the illusion; realizing that you’re the one actor playing

all the roles is liberation.

In this context,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the word person comes

from the masks that were used in ancient Greek-Roman theatre.

Per-sona: Through (per) which the sound (sona) is coming.

요약하자면, 당신이 당신의 제한된 역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환상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당신이 모든 역할을 하는 한 배우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해방입니다.

이 맥락에서, 사람이라는 단어가 고대 그리스 로마 극장에서 사용 된

가면(탈)에서 왔음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Per-sona : 소리 (sona)가 오는 (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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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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