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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대승무생방편문(大乘無生方便門)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2.19|조회수119 목록 댓글 1

 

대승무생방편문(大乘無生方便門)

 

북종 계통의 선종 강요서 가운데 하나로서

수계작법에 대해 설명한 저술이다.

달리 대승오방편(大乘五方便)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기신론(起信論)』에 의해서 불체(佛體)를 설명하고,

『유마경(維摩經)』에 의해서 지혜를 설명하며,

『법화경(法華經)』에 의해서 부사의법(不思議法)을 설명하고,

『사익경(思益經)』에 의해서 정성(正性)을 설명하며,

『화엄경(華嚴經)』에 의해서 무이(無異)를 설명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북종의 대의를

〔번뇌를 여의고 청정을 보며 [拂塵看淨]

방편으로 모든 경전을 사용한다 [方便通經]는 의미를 엿볼 수가 있다.

 

大乘無生方便門

대승무생방편문

 

第一總彰佛體。

첫째, 불체(佛體)를 총체적으로 드러낸다.

 

第二開智慧門。

둘째, 지혜의 문을 연다.

 

第三顯示不思議法。

셋째, 부사의법을 현시한다.

 

第四明諸法正性。

넷째, 제법의 정성(正性)을 설명한다.

 

第五自然無礙解脫道

다섯째, 자연의 걸림 없는 해탈도를 설명한다.

 

各各胡跪合掌當教令發四弘誓願

각각 호궤합장을 하여라.

이제 네가지 큰서원을 세우도록 가르쳐 주겠다.

 

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이 많다해도 맹세코 건지기를 원합니다.

 

煩惱無邊誓願斷。

번뇌가 끝없지만 맹세코 끊기를 원합니다.

 

法門無盡誓願學。

법문이 한량없지만 맹세코 배우기를 원합니다.

 

無上佛道誓願證

위없는 불도를 맹세코 깨닫기 원합니다.

 

次請十方諸佛為和尚等

다음으로 시방의 제불을 청하여 화상 등으로 모신다.

次請三世諸佛菩薩等

다음으로 삼세의 제불보살 등을 청한다.

次教受三歸

다음으로 삼귀의계 받는 것을 가르친다.

 

次問五能

다음으로 다섯 가지를 받아지닐 수 있는지에 대하여

그 여부를 묻는다.

一者汝從今日乃至菩提能捨一切惡知識不

첫째는 “그대들은 오늘부터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일체의 악지식을 버리겠느냐.”

(能)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二者親近善知識不

둘째는 “선지식을 가까이 하겠느냐.”

(能)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三能坐持禁戒乃至命終不犯戒不

셋째는 “앉아서 받은 금계(禁戒)

목숨이 다할 때까지 파계하지 않겠느냐.”

(能)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四能讀誦大乘經問甚深義不

넷째는 “대승경전을 독송하고

매우 깊은 뜻을 물어 배우겠느냐.”

(能)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五能見苦衆生隨力能救護不

다섯째는 “고통 받는 중생을 보면

능력이 닿는 데까지 구호하겠느냐.”

(能)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次各稱已名懺悔罪言過去未來及現在身口意業十惡罪。

다음으로 각각 이미 죄를 참회하는 명목을 일컫고 나서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열 가지 악업의 죄를 뉘우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我今至心盡懺悔。

“저는 이제 지극한 마음을 다하여 참회합니다.

願罪除滅永不起五逆罪障重罪

원컨대 죄를 멸하여 영원히 오역죄(五逆罪)와

바라이죄〔障重罪〕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准前)

(앞의 순서에 따른다.)

 

譬如明珠沒濁水中以珠力故水即澄。

비유하면 밝은 구슬이 흐린 물 속에 빠지더라도

그 밝은 구슬의 힘으로 인하여 흐린 물이 맑아지는 것과 같다.

 

清佛性威德亦復如是。

청정한 불성의 위덕(威德)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여서

 

煩惱濁水皆得清淨。

번뇌의 흐린 물이 모두 청정해지게 된다.

 

汝等懺悔竟三業清淨。

그대들은 참회를 마쳤으니 삼업이 이미 청정해졌다.

 

如淨瑠璃內外明徹。

마치 청정한 유리는 안과 밖이 명철하듯이

 

堪受淨戒菩薩戒。

청정계와 보살계를 받아지녀라.

 

是持心戒。

이것이 마음으로 계를 받아지니는 것〔持心戒〕이다.

 

以佛性為戒。

이것은 불성으로 계를 삼은 것이다.

 

性心瞥起即違佛性。

때문에 불성이라는 집착의 마음이 잠깐만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곧 불성을 어기는 것이 된다.

 

是破菩薩戒。

곧 보살계를 파하는 것이다.

 

護持心不起即順佛性。

그러므로 계를 지닌다는 마음마저도 일으키지 않아야 참으로 불성을 따르는 것이다.

 

是持菩薩戒

이것이 곧 진정한 보살계이다.

 

(三說)

(세 번 설한다.)

 

次各令結跏趺坐 同佛子心湛然不動是沒 言淨

佛子諸佛如來有入道大方便。

다음으로 각각 결가부좌하게 하여

모두 계를 받는 불자들의 마음을 담연하게 하여

움직이지 않게 하는데 이것을 ‘정(淨)’이라 이름한다.

불자들이여, 제불여래에게는 깨달음에 들어가는

대방편이 있다.

 

一念淨心頓超佛地 和擊木一時念佛

그것은 일념이 청정심이 되면

문득 불지(佛地)를 초탈하는 것이다.

모두 동시에 나무를 두드리면서 한목소리로 염불을 하여라.

 

和言。一切相總不得取□以金剛經云。

일체의 상은 모두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凡所有相皆是虛妄。

“무릇 존재하는 모든 형상은 다 허망한 것이다.”고 말하였다.

 

看心若淨名淨心地。

그리하여 만약 마음을 청정하게 보게 되면

그것을 ‘정심지(淨心地)’라 이름하는 것이다.

 

莫卷縮身心舒展身心。

몸과 마음을 움츠리지 말라. 몸과 마음을 펼쳐라.

 

放曠遠看平等盡虛空看

그리하여 멀리 드높게 모든 허공계를 보아라.

 

和問言。見何物

그리고 모두에게 묻는다. 무엇이 보이는가?

 

子云。一物不見 和。

그대들은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看淨細細看。

(淨)을 보는데 아주 세세하게 보아야 한다.

 

即用淨心眼無邊無涯除遠看

청정한 마음의 눈〔淨心眼〕으로

한량없고 끝없이 먼 허공을 보아야 한다.

 

和言。

그리고는 모두에게 묻는다.

 

問無障礙看 和問 見何物

“걸림없이 보는가? 그리고 무엇이 보이는가?”

 

答。一物不見 和向前遠看。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답해 말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대들은 모두 앞을 향해 멀리 보아라.

 

向後遠看。

그리고 뒤를 향해 멀리 보아라.

 

四維上下一時平等看。

그리고 사방과 상하를 일시에 평등하게 보아라.

 

盡虛空看。

그리고 모든 허공을 보아라.

 

長用淨心眼看。

그리고 오랫동안 청정한 마음의 눈〔淨心眼〕으로 보아라.

 

莫間斷亦不限多少看。

그리고 잠시도 쉬지 말고,

또한 많고 적음의 한계도 두지 말고 보아라.”

 

 

使得者然身心調用無障礙

이렇게 하여 수계자들로 하여금 몸과 마음을

조화롭게 작용하여〔調用〕 걸림이 없게끔 해야 한다.

 

和言。三六是何

그리고는 모두에게 묻는다.

“18가지란 무엇인가?”

 

子云 是佛身心得離念。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8가지란 부처님의 몸과 마음으로써

망념을 멀리 떠난 것입니다.”

 

不見心心如心得解脫。

마음이 있다고 보지 않으니

마음이 청정심과 같아서 해탈을 얻습니다.

 

不見身色如身解脫。

몸이 있다고 보지 않으니 색이 몸과 같아 해탈을 얻습니다.

 

如是長時無斷用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오랫동안 끊임없이 관하는 것이다.

(入言)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虛空無一物。

“허공에는 아무 것도 없다.

 

清淨無有相。

청정하여 상(相)이 없다.

 

常令不間斷。

그러면서도 항상 끊어지거나 쉼이 없다.

 

從此永離障。

이로부터 영원히 장애를 떠난다.

 

眼根清淨。 眼根離障。

곧 안근(眼根)이 청정하여 눈이 장애를 떠난다.

 

耳根清淨。耳離根障。

이근(耳根)이 청정하여 귀가 장애를 떠난다.

 

如是乃至六根清淨。

이와 같이 내지 육근(六根)이 청정하여

 

六根離障。

여섯 감각기관이 장애를 떠나

 

一切無礙是即解脫。

일체에 걸림이 없는 것이 곧 해탈이다.

 

不見六根相。

그리하여 육근의 상(相)을 보지 않게 되면

 

清淨無有相。

청정하여 더 이상 상(相)이 없어

 

常不間斷。即是佛。是沒是佛。

항상 끊어지거나 쉼이 없으니 이것이 곧 불(佛)이다.

 

佛心清淨離有離無。

이 불()은 불심이 청정하여 유(有)를 떠나고 무(無)를 떠나

 

身心不起常守真心是沒是真如。

몸과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서 항상 진심(眞心)을 지킨다.

이것이 진여(眞如)이다.

 

心不起心真如。

그리하여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심진여(心眞如)이고,

 

色不起色真如。

색(色)이 일어나지 않는 색진여(色眞如)이다.

 

心真如故心解脫。

심진여이기 때문에 심해탈(心解脫)이고,

 

色真如故色解脫。

색진여이기 색해탈(色解脫)이다.

 

心色俱離即無一物。

그리하여 심(心)과 색(色)을 모두 여의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다〔무일물(無一物)〕.

 

是大菩提樹

이것이 곧 대보리수이다.

 

 

佛是西國梵語。

불(佛)은 서쪽나라의 범어이다.

 

此地往翻名為覺。

이 나라에서는 흔히 각(覺)이라 번역한다.

 

所言覺□為心體離念。

이른바 각(覺)이라는 것은

마음의 체성이 망념을 여의었다는 것이다.

 

離念相者。

망념의 상(相)을 여의었다는 것은

 

等虛空界無所不遍。

허공계와 똑같아서 두루하지 않은 바가 없고,

 

法界一相即是如來平等法身。

법계가 한 모습〔一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여래의 평등법신이다.

 

於此法身說名本覺。

이 법신을 설하여 본각(本覺)이라 이름한다.

 

覺心初起心無初相。

그리고 깨달음의 마음〔覺心〕이 처음 일어나지만

마음에 처음이라는 상(相)이 없다.

 

遠離微細念。了見心性。

멀리 미세한 망념까지도 떠나 마음의 본성을 분명하게 본다.

 

性常住名究竟覺。

이처럼 본성이 상주하는 것을 구경각(究竟覺)이라 이름한다.

 

佛是西國梵語。

불(佛)은 서쪽나라의 범어이다.

 

此地往翻名為覺。

이 나라에서는 흔히 각(覺)이라 번역한다.

 

所言覺義者心體離念離念是佛義覺義。

이른바 각(覺)이라는 것은

마음의 체성이 망념을 여의었다는 것이다.

망념을 여읜 것이 곧 불(佛)의 뜻이고, 각(覺)의 뜻이다.

 

略釋佛義。

간략하게 해석하면 불(佛)이라는 뜻이지만

 

具含三義亦名印心方便

자세하게는 여기에 세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또한 인심방편(印心方便)이라고도 이름한다.

 

問。是沒是三義。

문: 그 세 가지 뜻이란 무엇입니까?

 

自覺覺他覺滿

답: 자각(慈覺)과 각타(覺他)와 각만(覺滿)이다.

 

離心。自覺不緣五根。

(心)을 떠난 ‘자각’은

다섯 가지 감각기관〔五根〕이 반연을 여읜 것이다.

 

離色覺他。不緣五塵。

리고 색(色)을 떠난 ‘각타’는

다섯 가지 대상〔五塵〕이 반연을 여읜 것이다.

 

心色俱離覺行圓滿。

그리고 색(色)과 심(心)을 모두 떠난 각행원만(覺行圓滿)은

 

即是如來平等法身。

곧 여래의 평등법신이다.

 

離念相者。

망념의 상(相)을 떠났다는 것

 

等虛空界無所不遍

허공과 똑같아서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이다.

 

현각/한국선학회장

번뇌(煩惱)의 팔풍(八風)

 

팔풍(八風)

이(利),쇠(衰),훼(毁),예(譽),칭(稱),기(機),고(苦),락(樂)

 

불경(佛經)을 보면

 

'팔풍(八風)에 휘둘리지 말라

무릇 수행자는 신체와 수족은 침묵속에 안정죄어 부동하니

팔풍이 불어도 부동하느니라 -불지경론-

 

등의 말씀들이 가끔 나옵니다.

이것은 풍수지리학 에서 말하는 팔풍이 아닌,

우리 '번뇌의 팔풍(八風)'을 말한 것입니다.

 

팔풍을 나누면

네가지 순,풍,사,순四順은 이,예,청,락이고

네가지 역풍사위는 쇠,훼,기,고이다

 

이풍

첫째는 이(利)라,

즉 우리에게 이로운것,

주면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이런것도 역시 한 가지 이(利)에 우리 마음이 팔린 것이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내 이익에 팔려서 마음이 흔들린다.

 

쇠풍

둘째는 쇠(衰)라,

이것은 모두가 잘 안되는 경우,

쇠퇴, 쇠멸하는 바람이다.

내 소유에 손해가 되어 마음이 흔들린다.

일이 여의롭게 안되어 사업에 실파한다거나

또는 잘못되는 그런 경우에도

역시 우리 마음이 비관도 하고 타락도 하는것이다.

그것이 쇠라 하는것이다.

 

훼풍

셋째는 훼(毁)라,

헐뜯고 비방한다는 말이다.

어느 누구나 칭찬하면 다 좋아합니다.

별로 못난이도 칭찬하면 좋아하지만 휘방하면 그냥 싫어한다.

기분나쁘게 등 뒤에서 딴말을 여기저기 퍼뜨리며

헐뜯고 훼방하여 마음이 흔들린다.

자기가 분명히 나쁜짓을 했는데도

비방하고 비판하면 싫어한다.

 

예풍

넷째는 예(譽)라,

기릴예자입니다.

우리를 기리어 찬사를 주고 명예를 받으면

우쭐해가지고서 또 마음에 동요를 느낍니다.

예찬하는 바람이다 기분좋도록 등뒤에서

미담을 퍼뜨려서 우쭐해지고 마음이 흔들린다.

 

칭풍

다섯째는 칭(稱)이라,

칭찬한다는 말이다.

칭찬받는것도 역시 우리 마음에 동요를 주는것이다.

면전에서 좋은 말로 칭찬하는 말에 흔들린다.

 

기풍

여섯째는 기(機)라,

기롱할 기자이다.

나무라고 꾸짖고 욕도하고

실없이 희롱하고 비방하는 말이다.

이러한 때에 역시 동요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동요가 없어야 비로소

다운 수행자인 것입니다. 이로울때,

또는 무엇인가 실패할때,

자기를 훼방할때, 또는 자기가 명예로울 때,

자기를 칭찬할때,

또는 자기를 기롱할 때,

이런때에 동요하지 않는것이다.

 

고풍

일곱번째는 고락(苦樂)이라,

우리는 괴로울 때 또 동요하고,

또는 안락할 때 동요하게 된다.

고통의 바람이다, 핍박한다는 뜻이다.

악연악경을 만나 심신이 핍박은 받아 마음이 흔들린다.

 

낙풍

여덟번째는 희락(喜樂)의 바람이다.

희열의 뜻이다.

호연호정을 만나 심신의 희열을 느껴 마음이 흔들린다.

 

무릇 수행자는 신체와 수족은 침묵속에 안정되어 부동하니

팔풍이 불어도 부동하느니라. 불지경론

 

-대승무생방편문(大乘無生方便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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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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