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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자기 찾음의 길 / 전제남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2.25|조회수118 목록 댓글 1

자기 찾음의 길

 

전제남 글, 2009, 도서출판 濟世

 

 

< 당부의 말 >

 

 

세상에는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세상은 천태만상이다.

모두들 살기 위해 아우성치며 분주히 헤매고 있다.

 

 

그대는 무엇을 위해 그리도 열심히 살고 있는가?

살아남기 위해서인가, 행복하기 위해서인가?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대가 세상의 부를 모두 움켜잡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다해도 어느날 모두 놓아 두고 사라져야 한다.

그대는 결국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한다면

그대의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 목적은 무엇인가?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 실체조차 모른다.

자신도 알지 못한다면 그대의 삶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대가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그대의 삶은 생성과 소멸의 변화과정에 불과하며

그대는 일시적인 형상일 뿐 영원한 존재는 아니다.

하나의 물방울이 강을 이루고 다시 바다가 되듯이

전체에서 태어난 부분이며 다시 전체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깨어나 그대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안정된 삶을 살기를 기원한다.

 

 

 

제1편, 삶과 죽음과 인생

 

 

그대는 목적없이 그냥 태어났다.

그대는 삶의 목표를 세울 수 있을 뿐,

삶의 목적은 없고 다만 과정일 뿐이니

과정을 즐기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현명하다.

 

 

삶은 그대에게 주어진 큰 선물이요,

유일무이하게 주어진 기회다.

맘껏, 삶을 즐기고, 노래하자.

삶을 엑스터시(무아경·황홀, 환희의 결정)의 경지로 끌어 올리자.

무아지경이요, 환희요, 희열의 극치로 만들자.

그대의 모든 행위는 행복하기 위한 것들이다.

그대의 삶을 낙원의 경지로 만들자.

 

 

그대는 사명감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주어진 환경과 여건을 극복하고

그대의 목표와 비전대로 살아갈 뿐이다.

삶의 목적이라는 허구의 굴레를 벗어나

지금 여기에 살며 삶의 맛을 느끼자.

살아가는 순간순간을 음미하고

지금 여기에 충실하고 그 맛을 느끼며 살자.

지나간 일은 미련에 불과하고

다가올 일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항상 오늘 지금 여기에 머무르며 즐겨라.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자연의 섭리대로 태어났을 뿐

사명감을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할 의무나 책임도 없다.

자연의 흐름처럼 특정한 목적이 없다.

구름은 정처없이 흘러가고

바람은 정한 방향 없이 불어오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갈 뿐이다.

봄이 오면 저절로 새로운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세상을 아름답게 꾸민다.

목적이 없기에 부담이 없이 자연스럽다.

그러기에 삶의 굴레에 묶여 허둥대지 말고

목적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며 과로워하지 말고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해하지 말고

마음 편히 현재를 음미하며 살아야 한다.

현재를 즐기고 현재를 기뻐하며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도록 해야 한다.

그대는 반드시 가야할 곳도 없고

다그치는 자도 없으니 자신을 가꾸고 싶은대로

유유자적하며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자.

 

 

죽음이란 형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몸과 마음과 자아가 사라지는 것이다.

양파의 껍질을 모두 벗기면 남는 것이 없는 것처럼

죽음이 무의식적이면 그대는 영영 사라진다.

죽음이 의식적이라면 그대는 새로운 삶을 얻게 죈다.

그대가 무의식적으로 살면 일시적인 삶을 살뿐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게 된다.

그대가 각성하고 깨어나 살면

그대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삶의 참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대는 탄생과 죽음을 초월하게 된다.

그대가 갇혀 있는 세상의 삶도 초월하게 된다.

그대 자신을 아는 것이 그대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대는 무의식적으로 태어나 무의식적으로 죽는다.

그래서 자신의 전과 후와 자신의 실체를 모른다.

인간의 생은 변화의 과정이며 늘 미완성이다.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가는 허망한 삶이다.

그냥 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는 없다.

반드시 자신의 본성인 실체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대는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다.

 

 

그대의 삶이 죽음을 통해 모두 사라진다면

삶은 너무나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이 된다.

그대가 애착하는 삶은 죽음의 연장에 불과하고

고통의 연속일 뿐,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그대는 태어나면서 죽음과 함께 동행했다.

그대가 무엇을 얻고, 무엇이 되던,

그대는 결국 모든 것을 놓아두고 죽어야 한다.

날로 죽어가고 있으면서 살려고 발버둥 친다.

죽음에 잠식되고 있는 그대의 삶은

결국 죽음의 소유가 될 것이다.

그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다.

삶은 죽음의 연장에 불과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가치있게 열심히 살아야 하고,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지만

결국 웰 다잉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지?

 

 

제2편. 나는 누구인가

 

 

존재계는 그대에게 무관심하다.

어느 누구도 그대에게 무관심하다.

오직 그대만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

그대가 없어도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

세상은 그대가 있든 없든 마찬가지다.

그대는 우연한 존재이며

필연적인 존재는 아니다.

아무도 그대를 초대하지 않았다.

그런 느낌이

공포를 주고 회의감을 일으킨다.

그대는 존재에 대해 무가치함을 느낀다.

그 자체가 두려움이요, 고독이다.

 

 

그대는 잠시 세상에 왔다가 떠나가야 한다.

그대의 삶은 일시적이요, 한정적인 것이다.

무엇에라도 영원히 머물 수는 없는 것이다.

세월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모든 것은 과거로 사라지고

다가올 미래는 보이지 않고

그대는 불안정한 삶을 살아간다.

그대는 과거와 미래의 틈바구니에서

초조와 불안을 되씹으며 마음 졸인다.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을 아쉬워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두려워하며

미련과 후회를 과거에 묻으려 애쓰고

고통과 아픔을 미래의 희망에 내맡기며

과거와 미래의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절규하며 괴로워한다.

모든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대가 부를 쌓든, 큰 공을 세우든,

부귀영화를 누리든, 권력을 휘두르든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삶을 꿈이라고 하지 않는가?

모든 것은 한시적이요, 영원하지 않다.

한 순간에 그대는 모든 것을 놓아야 한다.

일순간에 그대는 어김없이 떠나가야 한다.

그대의 미련도 후회도 희망도 모두 사라진다.

삶은 변화의 과정이지 존재가 아니다.

깨어나 지금 여기에 멈추면

그대의 흘러가던 세월도 멈추고

그대는 항구적인 현재 속에 머물며

영원한 존재로 남게 된다.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그대가 존재를 알아내는 방편이요,

그대가 신의 세계를 살아가는 진리요,

영원한 생명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바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보물을 찾아라.

그대가 그대의 존재를 찾으면

그것은 깨지지 않는 영원한 빛이요,

생명임을 그대는 확연히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을 버리고, 자아를 버리고,

무심의 세계로 가서 존재를 알아라.

 

 

사람들은 모두 특별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대는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라.

그저 평범하고 소탈한 삶을 살아라.

자신에 대한 신뢰와 내맡김 속에서 살아라.

그대의 몸과 마음은 자아의 도구이며

세상살이에 필요한 수단일 뿐

그대 자신의 본성은 분명 아니다.

그대는 오로지 몸과 마음에 의지하며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불안정하고

고통스럽게 힘겹게 살고 있다.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작용할 뿐

그대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도

그것은 그대의 소유일 뿐

진정한 그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가 성공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그대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대가 안정되고 평화스러운 삶을 살려면

먼저 그대의 본성인 실체를 알아야 한다.

자기를 깨우치고 바로 알아야

그대 자신이 구원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대는 도구나 수단이 아닌 중심이다.

그대의 실체는 바로 존재 그것이다.

 

 

세상은 불안과 고통과 변화로 차 있다.

그대는 자신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며 살고 있다.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른다.

그대는 욕망과 물질에만 의지하며

표피적으로 피동적으로 살아간다.

그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대는 온통 마음과 육체에 갇혀 있다.

불안정한 마음에 시달리며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고통을 당하고 이용당한다.

그대는 스스로 자학하며 괴로워한다.

몸과 마음은 그대의 것들인데

그것에 잡혀 한정된 삶을 살아간다.

이제 허울을 벗고 실체를 찾아보자.

그대는 몸과 마음의 집착에서 벗어나

내면 깊이 들어가 실체인 자기를 찾아라.

그대는 지금 무의식적인 잠에 취해 있다.

무의식의 잠을 깨고 그대의 실체를 찾아라.

그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존재를 만나라.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진 세상을 만나라.

생성과 변화와 소멸이 사라진 영원한 세계를 만나라.

 

 

제3편. 마음과 의식과 중심

 

 

그대의 마음이 흔들리고 방황할 때

그것을 억지로 멈추려고 하지 마라.

마음은 하늘에 흘러다니는 구름과 같다.

구름은 잠시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하늘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대로다.

순수한 하늘을 의식하고 자각하라.

마음은 구름조각이요, 그대의 실체는 하늘이다.

마음을 어느 한 곳에 붙잡아 두려고 하지 마라.

자유롭게 떠 다니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음이 방황할 때, 그냥 버려두고

무한한 허공인 하늘을 상기하라.

우주를 담고도 여유 있는 하늘이 그대의 실체이다.

마음이 방황하며 흘러다니는 것을 허용하라.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구름이 마음의 상태이다.

그냥 버려두면 사라지고 또 생겨난다.

그대는 영원불변한 하늘임을 자각하라.

우주를 담고도 남음이 있는 하늘이다.

형체도 움직임도 보이지 않지만,

영원히 존재하는 영생불멸하는 존재다.

보이는 것은 순간적이요, 한정적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영구적이며 영원하다.

형상에 잡히지 말고 그 바탕인 실체를 찾아라.

 

 

욕망이 일어날 때 그대는 자제할 수 없다.

욕망은 원초적인 욕구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그대의 의지나 노력으로 극복하기는 어렵다.

거기다 습관화된 행동이 부추기기 때문에

그대는 욕망에 대해 굴복하고 만다.

거부하려고 하면 갈등과 혼란을 겪게 되고

결국 탈진하게 되어 깊은 좌절감을 맛본다.

욕망이 알어날 때 자각하고 깨어 있으라.

의식 전체를 투입하여 직시하고 주시하라.

욕망을 직면하고 직시하면 욕망은 가라앉는다.

전 존재로 하여금 그냥 바라보게 하라.

거기에 어떤 거부나 갈등이나 적대감을 품지마라.

그냥 버려두면 욕망은 힘을 잃고 사라진다.

그대의 반대는 욕망을 더욱 충동질하는 것이니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기만 하라.

간섭하거나 제지하지 말고 그냥 바라보아라.

그대가 주시하는 동안 욕망은 서서히 사라진다.

그대는 충만한 에너지를, 엄청난 자각을 갖게 된다.

자기의 욕망과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다만 필요한 것은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그대의 전체적인 의식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가슴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순수한 의식으로 태어나지만

가정, 사회, 교육, 문화를 통해 생각으로 변화한다.

성장할수록 의식은 머리로 모여든다.

결국 성인이 되면 가슴은 사라지고

생각을 무기로 하여 머리로만 살아간다.

의식은 사념이 존재할 때 머리에 남는다.

그대가 아무 생각이 없다면

그대의 의식은 가슴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명상이 필요한 이유다.

무념무상, 생각이 없는 깨어있음,

즉 정념(情念)이 강조된다.

아이처럼 순수하여야 의식인 가슴에 닿는다.

순수한 의식은 표현될 수 없다.

그래서 소리없는 침묵이 필요하다.

의식은 내부에 있으므로 눈을 감고

내면의 의식을 느끼도록 하자.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하고 무궁한

텅 빈 공간인 허공이 의식의 모양이다.

 

 

그대가 이룩한 것이 삶의 전부라면

그대의 삶은 너무 무의미하고 황당하다.

그대가 평생 이룩한 모든 것들은

그대가 영원히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대의 삶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그대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이루기 위해 살았는가?

그대는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갈 뿐

그대의 삶은 공허하고 허무할 뿐이다.

더하여 두려운 죽음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의문과 두려움은 잠을 깨는 순간,

그대가 그대 자신을 깨닫고 아는 순간 사라진다.

이것이 그대가 그대 자신을 깨달아야 하는 이유다.

깨닫지 못하고 살다 죽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다.

깨닫고 사는 것은 영생의 삶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 구원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대에게는 죽음은 없고, 전체적인 삶만 남는다.

그대가 살아있는 동안에 각성하고 깨우쳐야

그대는 마음의 세상과 존재의 세계를 함께 살 수 있고

세상의 삶을 더욱 의미있게, 가치있게 살 수 있다.

살아있을 때 깨달아야 삶의 방향을 바로 잡을 수 있고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는 자기에게로 갈 수 있다.

이것이 살아서 깨달아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제4편. 구도의 길과 해탈

 

 

구도의 길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비워서

오로지 자신의 근원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대가 마음의 세상을 쫓아다니면

점점 자신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대 자신에게 종속된 그대로서

세상과 대상의 노예가 된 마음으로

절대적인 자유와 평화를 얻기는 어렵다.

대상에서 벗어나야 문제가 떨어지고

그대로부터 벗어나야 실제로 주인이 된다.

비어있는 마음은 노예가 아니다.

모든 것을 담고도 남음이 있는

우주를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다.

그대가 마음을 떠나 의식적일 때,

그대의 의식이 주인의 위치에 있을 때,

그대는 비로소 제 자리를 찾고

주인의 위치로 돌아온 것이다.

그대는 유형의 세계와 무형의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신선이 된다.

그대는 허공이다. 그대는 존재다.

그대의 주인인 자기를 찾아 만나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세상은 스스로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다.

세상을 세상 자신에게 맡겨두어라.

세상을 변화시키려던 많은 혁명가들이 사라졌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성격 이상자들로

살인극을 연출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것은 넌 센스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오직 세상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세상은 세상의 길로 가야 하며

그대는 그대의 길로 가야 한다.

세상의 병을 고치려고 하지 말라.

세상의 병은 세상 스스로 극복하여야 한다.

그대는 자신의 자리에서 바라보기만 하라.

다만 변화를 거부하거나 고집하지 말고

변화를 수용하고 변화에 동참하라.

변화만이 세상을 발전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퇴보하거나

자연의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전진하고 있다.

변화에 동참하고 협조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라.

세상과 호흡을 같이 하며 함께 나아가라.

 

 

제5편. 명상과 수행과 초월

 

 

명상이란 무엇을 찾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버리려는 것도 아니고

과거나 미래로 찾아가는 것도 아닌

지금 여기에 멈추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무수한 사념들의 광란도

화산처럼 타오르는 욕망의 불길도

억누르거나 지우려 하지 말고

자아마저 버려두고 떠나는 것이다.

마음의 세상을 떠나서

무심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내면으로 들어가

그대의 본처(本處)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곳은 초월의 땅이요, 무한의 경지다.

그대는 탄생과 죽음의 한계를 벗어나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에 닿는다.

명상은 무심의 세계를 만나는 것이다.

명상은 피안의 세계에 머무는 것이다.

명상은 존재의 세게를 경험하는 것이다.

명상은 마음의 세상을 떠나

무심의 세계에 이르러 체험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어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깨달음은 어느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나 무의식의 잠을 깨고 일어나면

자신의 실체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본질이 바로 그대가 찾는 그것이다.

다른 사람을 제도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그 작용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그대는 아무도 제도할 수 없다.

그대는 오직 그대만을 제도할 수 있다.

그대 자신도 무의식의 잠에서 깨어나야 가능하다.

가장 근원적인 출발점이 바로 그대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깨달아 알지 못하는 한

그대의 의문은 끊임없이 계속될 뿐이며

그대의 고뇌도 방황도 계속될 뿐이다.

그대가 깨어나 자신을 아는 순간

그대는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된다.

자기 자신을 깨달아 알 때

그대는 신과 진리를 알아볼 수 있다.

그대 자신을 통하여 무심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다.

그대가 거기로 건너가는 방편이요, 해답이다.

그대 자신을 깨우쳐 알면

사람도, 세상도, 하늘도 저절로 알 수 있다.

 

 

제6편, 신과 종교와 철학

 

 

세상의 종교는 편파적이요, 독선주의적이다.

믿어라, 따라오라, 복종하라, 이것만이 진리다.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무서운 벌을 받는다.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죄인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자유의사와 자기표현을 억제하고

오로지 복종하고 순종하도록 강요한다.

불복하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하며

공포심을 일으키고 희생을 강요하며

신도를 노예인양 영원히 예속하려고 한다.

몸과 마음이 나약하고 병든 자들에게

구원과 자유와 평화를 구실로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씌운다.

세상적인 종교는 굴레요, 강요이며

진실의 엄청난 왜곡이요, 맹신이다.

그들이 인도하는 길로 평생 따라다녀도

그대는 결코 진리에 닿을 수가 없다.

그대는 종교를 믿고 따라다닐뿐

신이나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 아니라 그대의 존재다.

깨어나 의식적인 상태로 존재하느냐

잠에 취해 무의식적인 상태로 존재하느냐

비존재의 상태에서 존재의 상태로 옮아가는 것이

그대의 깨어남이요, 그대의 구원이다.

 

 

진정한 종교인은 세상 모두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특별한 주의나 주장에 잡히거나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신이나 진리는 무엇으로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신앙, 어떤 신념에 의해서도 제한받거나

편 가르거나 배척하거나 무조건 맹종해서는 안 된다.

참 종교인은 무한 속에 살아야 한다.

어떤 생각이나 주의는 편견이요, 장벽에 불과하다.

이것들은 한계나 벽을 만들고 경계선을 만들어

세상을 분열하게 만들고 끝없는 살육전을 일삼는다.

인간의 어떤 주의나 주장도 완전할 수 없다.

참 종교인은 순수한 의식으로 신을 찾아야 한다.

신은 부분이 아니고 전체요, 진리다.

그것은 현재로 통하며 영원하고 무궁하다.

신의 인격화나 인간화는 모두 우상에 불과하다.

참 종교인은 차별하거나 이단시하지 않는다.

신은 절대적인 존재로 분리나 차별은 없다.

인간은 상대적인 존재로 분리하고 경계를 만든다.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려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간의 상대적이며 이중적인 인식을 버리고

절대적인 의식으로 신에게 다가가야 한다.

진실한 종교인은 제도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순수의식으로 세상과 인류를 포용하고 수용해야 한다.

 

 

제7편. 깨달음에 이르는 길

 

 

그냥 지금 여기에 각성하고 깨어나 있어라.

지나간 일을 후회하고 괴로워하지 말고

오지 않은 것을 근심하며 불안해하지 말고

오로지 지금 여기에 깨어나 머물러 있어라.

매순간 지금 여기에 깨어나

항상 현재를 의식하며 살아라.

지금 여기서 멈추고 순수한 거울이 되어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구경꾼이 되어라.

그대의 모든 것과 그대마저도

모두 내려놓고 지금 여기에 각성하라.

그리하면 잠자던 의식이 깨어나고

그대는 순수의식인 존재에 닿게 된다.

그대는 전체이며 하나인 세게를 만난다.

그대는 영원 불멸의 진리 그 자체이다.

그냥 지금 여기에 머물러 그대의 존재를 만나라.

멈춤만이 영원으로 통하는 문이다.

멈춤만이 신에게로 통하는 길이다.

그것은 존재의 세계를 찾아가는 길이요, 방편이다.

그대의 자기가 불생불멸의 존재요, 영원자다.

무한한 영원 그 자체이며,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대는 이제 그대의 실체인 자기를 만났다.

모든 것이 끊어지고 영원한 세계가 전개된다.

 

 

삶은 단 한 번 공연되는 한 편의 연극이다.

그대는 그 연극을 삶이라고 여긴다.

불행은 바로 잘못된 인식에서 생겨난다.

이 연극을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원인이다.

그대의 삶은 주어진 배역에 불과하다.

그대는 사회의 감옥에 갇혀 살아야 하는

정신을 빼앗긴 군중이요, 

페르소나(Persona: 가면이라는 말로 사회적 역할을 의미함)다.

그대는 착각과 환상 속에 살고 있다.

자신의 배역을 삶의 전부인양 여기고

목숨을 걸고 그것에 매달려 끌려 다닌다.

그대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온 것인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지금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그대는 그대의 자기를 잃어버렸다.

잠에 취해 꿈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니

그대 자신을 깨우쳐 환상의 삶에서 벗어나라.

깊은 잠에서 깨어나 참 삶을 살아라.

잠을 깨고 그대의 본향으로 돌아가라.

그곳에서 그대의 참 모습을 만나

불멸의 삶을 사는 존재로 돌아가라.

 

 

제8편. 존재와 진리와 앎

 

 

그대는 삶과 죽음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의 공포가 몰려온다.

삶과 죽음은 각기 다른 것이 아니고

삶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일 뿐이다.

파도와 바다가 둘이 아닌 것은

파도는 사라져도 바다가 남기 때문이다.

파도와 바다가 분명 하나인 것처럼

삶과 죽음도 삶을 이루는 요소일 뿐

존재로 통하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존재로 순환하는 과정일 뿐이며

그대의 존재는 영원하고 무한할 뿐이다.

그대는 죽음으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삶과 죽음은 분명 하나인 존재다.

그대는 일시적이며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의 자기는 영원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죽지 않는다.

다만 존재로 변형되어 돌아갈 뿐이다.

그대와 존재는 분명 하나이다.

이제 죽음의 공포는 사라질 것이다.

그대의 실체인 자기가 죽지 않는데

죽음의 두려움이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어느날, <나>라는 꿈을 깨고 일어나

그리도 간구하던 <자기>를 만나던 날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이 솟아난다.

온갖 의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음 속의 갈등과 번민이 끊어지고

오랜 방황의 발길을 멈추게 된다.

잡다한 생각도, 변덕스러운 감정도

불같이 타오르던 욕망의 갈증도

두려움도, 온갖 근심도 점차 사라지고

무한한 엑스터시의 느낌 속에 젖는다.

애착도, 집착도, 후회도, 원망도, 미련도

모든 것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자아의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를 맛본다.

온갖 굴레와 제약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유와 평화의 느낌 속으로 빠져든다.

말이 끊어진 침묵의 세계를 만난다.

생각도, 감정도, 자아도 모두 사라지고

경계마저 사라진 절대적인 경지로 들어간다.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된 불멸의 세계

절대적인 존재인 자기를 만나게 된다.

 

 

< 책을 마치며 >

 

 

그대는 <자기 찾음의 길>을 탐색하며

긴 여정의 길로 더듬어 왔다.

그 길은 그대의 실체를 찾는 길이며

그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길로

그동안 어둠 속을 헤매며 쉼 없이 찾아왔다.

 

 

그런데 아직도 자신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는가?

그러면 지금도 자아의 굴레에 얽매어 있다.

자아가 존재하고 있는 한 그대는 구속되어 있다.

자아가 사라져야 실체인 존재가 드러난다.

마음의 세상을 떠나 무심의 세계에 이르러야

그대는 사라지고 실체인 자기가 된다.

 

 

아직도 그대가 존재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깨어나

그대의 모든 것들과 그대 자신마저 내려놓아라.

그대는 전체에서 부분으로 태어났다가

다시 전체인 하나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절대적인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이제 그대는 사라지고 실체인 자기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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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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