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 Miguel Ruiz
생명인 신은 당신 안에 살아 있다!
당신은
생명(Spirit)이며
생명은 죽을 수 없으므로
당신은 나무 안에, 나비 안에, 물고기 안에, 공기 속에,
달님 속에, 햇님 속에 깃들어 있다.
당신이 어딜 가든,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곳에 존재한다.
당신의 몸은 사원이다.
신이 거주하는 살아 있는 사원이다.
신은 생명으로서 당신 안에 살아 있다.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신이
당신의 내부에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당신의 마음(mind)을
마치 가장 아끼는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당신의 몸(body)을 사용하는 힘은 바로
당신(spirit)이다.
당신이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놀며 즐기는 것.
우리는
행복해질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삶을 즐길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고통을 겪기 위해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든 고통의 환영을 받지만,
우리는 고통 받을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고통을 받는 걸까?
온 세상이 괴로워하므로 우리는 고통이 곧 정상적인 상태라는
가정을 내리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면 우리는 그 '진리'를 지원할 믿음의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종교들은 우리가 고통 받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삶은 눈물의 골짜기라고 말한다.
오늘 고통 받으며 그에 대한 참을성을 가지면,
죽어서 보상을 받게 될 거라고? 그럴 듯한 소리로 들리지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고통 받는 법을
배웠으므로 고통 받고자 한다.
우리가 만일 계속해서 같은 선택을 내린다면,
계속해서 고통 받을 것이다.
'지구의 꿈'은
인간다움의 이야기를, 인간의 진화를 전해주며,
고통은 인간 진화의 결과이다.
인간은
알기 때문에 고통 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모든 거짓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 모든 거짓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고통 받는다.
당신은 죽은 후에 지옥에 간다든가,
천국에 간다든가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신은 지옥 아니면 천국에 살겠지만, 문제는 지금이다.
천국과 지옥은 마음속에나 존재할 뿐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 고통을 받는다면, 죽어서도 고통을 받는다.
마음은 뇌와 함께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꿈은 계속되고 우리의 꿈이 지옥일 때,
우리의 뇌는 죽고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지옥에서 꿈을 꾼다.
죽는 것과 잠드는 것의 유일한 차이는,
잠을 자면 뇌가 있으므로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으면 뇌가 없으므로 깨어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꿈은 그대로 있다.
천국이나 지옥은
지금 여기에 있으니
죽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당신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고,
당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면,
당신의 미래는 당신의 수중에 있고,
몸이 살아 있는 동안 당신은
천국에서 살아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지구에서 만들어내는 꿈은 분명 지옥이다.
이것은 옳거나 그르거나,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며,
그것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부모를 비난할 수 있을까? 아니다.
부모님은 어린 당신을 프로그래밍할 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 분들의 부모님도 똑같았다.
자녀가 있다면, 당신도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어떻게 당신 자신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깨닫는다는 것은 당신이 어느 누구든 비난할 필요가 있거나,
당신이 한 일에 대해 죄책감을 안고 다녀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염성이 심각한 정신병을 두고
우리가 어떻게 죄책감을 안고 다니거나 비난할 수 있을까?
당신은 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완전하다는 것을.
당신은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그것은 진리이다.
당신은 깨달은 자이다.
당신이 분노와 질투를 훤히 꿰뚫더라도
당신의 분노와 질투는 완전하다.
당신의 삶에서 엄청난 우여곡절이 계속된다 해도,
그것은 완전하고, 아름답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영화를 보러 가서
내내 울 수도 있다.
누가 지옥은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가?
지옥은 당신을 격려할 수 있다.
지옥조차 완전한 것이다.
세상에는 완전함만이 존재하므로.
당신의 삶에서 지옥을 꿈꾼다 해도,
당신은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우리가 완전하지 않다고 믿게 만드는 것은 지식일 뿐이다.
지식은 꿈의 설명에 다름 아니다.
꿈은 실제가 아니므로, 지식도 실제가 아니다.
지식이 어디에서 생겨나든,
그것은 인식의 한 지점에서만 실제이다.
인식을 이동시키면, 그것은 더 이상 실제가 아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지식으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
결국
우리가 찾아 헤매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 자신을 찾는 것,
우리 자신이 되는 것,
이미 프로그래밍된 기생충의 삶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을 사는 것.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해주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다.
지식과 지혜를 구분해야 한다.
그 둘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을 이용할 수 있는 주요 방법은 서로 소통하고,
우리가 인식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다.
지식은 소통을 위해 우리가 지닌 독소일 뿐이다.
인간은 마음과 마음으로 소통하기가 매우 어려운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식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이다.
지금의 우리는 지식의 노예가 되어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
지혜는 지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혜는 치유와 관련이 있다.
지혜로울 때, 자유로이 자신의 마음을 사용하고
자신의 삶을 운영한다.
건강한 마음은 기생충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자유롭게 길들여질 수 있다.
당신의 마음을 치유할 때,
꿈에서 벗어날 때 당신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지만 지혜롭다.
한 가지 커다란 차이를 제외하고 당신은 다시 어린아이처럼 된다.
어린아이는 순진하며,
그래서 고통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꿈을 초월하는 이는 지혜롭다.
그래서 더 이상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꿈의 지식도 가지고 있다.
지혜로워지기 위해
지식을 축적할 필요는 없다.
누구든 지혜로워질 수 있다.
지혜로워지면, 삶이 쉬워진다.
진실로 현재의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아닌 것이 되기 위한 노력은,
당신 자신과 다른 모든 이들에게 당신은
당신이 아닌 것이라고 납득시키려는 노력은 힘들다.
당신의
현재 모습이 되려는 노력은
당신의 모든 에너지를 앗아가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되는 것은
어떠한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다.
지혜로워지면,
당신이 만들었던 그 모든 이미지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진다.
다른 무언가인 척 연기할 필요가 없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당신 자신의 완벽한 수락은 다른 모든 사람의 완벽한 수락이 된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바꾸려 하거나
당신의 관점을 강요하려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존중한다.
당신의 몸과 인간성을 몸의 그 모든 본능과 더불어 받아들인다.
동물이라는 사실에 문제는 전혀 없다.
우리는 동물이며, 동물은 항상 자신의 본능을 따른다.
우리는 인간이며,
매우 똑똑하기 때문에
우리의 본능을 억압하는 법을 배운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거스르고 몸의 욕구들을 억압하고
그러한 욕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려 한다.
이는 지혜로운 처사가 아니다.
지혜로워지면,
몸을 존중하고, 마음을 존중하고,
영혼을 존중한다.
지혜로워지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당신의 삶을 통제한다.
더 이상
자신을 방해하고 파괴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복, 또는 자신의
사랑을.
더 이상
그 모든 죄책감을 안고 다니며 비난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이상 다른 누구도
비판하지 않는다.
그 순간부터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인생에서 투쟁하도록 당신을 내몰고,
당신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그 모든 믿음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당신의 현재 모습이 아닌 것에 대한 그 모든 생각을 버리고,
진실로 당신인 것이 되라.
당신의 본성에 항복할 때, 진실로 당신인 것에 항복할 때,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는다.
진짜 당신에게 항복할 때, 생명에 항복하며 신에게 향복한다.
일단 항복하면, 더 이상 투쟁도, 저항도, 고통도 없다.
지혜로워지면
항상 쉬운 길을 선택한다.
즉 당신이 무엇이든 당신 자신이 되는 길을.
고통은 신을 향한 저항에 다름 아니다.
당신이 저항할수록 더욱더 큰 고통을 당한다.
그건 간단한 진리이다.
어느 하루에서 다음 날까지,
꿈에서 깨어나 완벽하게 건강하다고 생각해보라.
당신은 더 이상 상처가 없고, 더 이상 감정의 독도 없다.
당신이 경험하게 될 자유를 상상해보라.
모든 것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딜 가든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왜 그럴까?
건강한 인간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것이 두렵지 않으며, 사랑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
삶을 어떻게 살지, 당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 상상해보라.
만일 더 이상 감정적 몸에 난 그 상처들과 그 독을 갖고 다니지 않는다면 말이다.
명상 학교에서는 이것을 '각성'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마치 어느 날 깨어났는데
더 이상 감정적 상처가 없는 것과도 같다.
더 이상 감정적 육체에 그러한 상처가 없다면,
한계는 사라지고 당신은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의 믿음 시스템에 따라서가 아니라.
눈을 떴을 때 그러한 상처들이 보이지 않으면,
당신은 회의하게 된다.
모든 사람에게 당신이 얼마나 똑똑한지를 말해서
당신의 체면을 높인다거나,
그 모든 거짓을 믿는 다른 사람들을 약올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깨어나면, 당신은 회의주의자가 된다.
당신의 눈에는 꿈이 실제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눈을 뜨고 잠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일단 깨어나면
돌아갈 수 없는 선을 넘은 것이므로
결코 세상을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
당신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
꿈꾸기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꿈꾸기란 마음의 역할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은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그것을 알면,
꿈을 즐기거나 꿈을 고통스러워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려 있다.
각성은 당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술에 취한 파티에 있는 것과도 같다.
당신은 그 파티에서 유일하게 정신이 맑은 사람이다.
그것이 각성이다.
사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감정적 상처들을 통해,
자신의 감정적 독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며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지옥의 꿈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파티의 모든 사람이 취했는데 오직 자기만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연민을 가질 수 있다.
우리도 한때는 그들처럼 취했던 시절이 있었으므로.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비판할 필요는 없다.
우리도 한때는 지옥에 있었으므로.
각성했을 때
당신의 가슴은 영혼의 표현이며,
사랑의 표현이고, 생명의
표현이다.
각성은
'당신은 곧 생명'이라는
깨달음을 가질 때 생겨난다.
당신이 곧 생명이고 힘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어떤 일이든 가능해진다.
기적은 언제나 일어난다.
그러한 기적은 가슴으로 실행되는 까닭에.
가슴은
인간 영혼과의 직접적인 소통이며,
가슴이 말할 때 머리가 저항하더라도
당신 내부의 어떤 것은
변화된다.
당신의 가슴은
또 다른 가슴을 열고,
진실한 사랑은 비로소 가능해진다.
인도에는 전적으로 혼자였던 신,
브라만에 관한 오래된 이야기가 전한다.
브라만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따분했다.
브라만은 놀이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나,
그 놀이를 같이할 상대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다운 여신 마야를 창조했다.
다만 놀이를 함께할 대상이었다.
마야가 존재를 얻자 브라만은 그녀에게 존재의 목적을 일러주었고, 이를 들은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좋아요, 아주 근사한 놀이를 해보죠.
하지만 당신은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해요."
브라만은 이에 동의했고, 마야의 지시에 따라 온 우주를 창조했다.
브라만은 태양과 별들을, 달과 행성들을 창조했다.
그러고 나서 지상에 생명체를 창조했다.
동물들과 대양들, 대기, 모든 것을.
마야가 말했다.
"당신이 만든 이 환상의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워요.
이제 아주 똑똑하고 지혜로워서 당신의 창조물에 감사할 줄 아는 동물을 창조하셨으면 좋겠어요."
마침내 브라만은 인간을 창조하고 나서 마야에게 놀이는 언제 시작되느냐고 물었다.
"지금 당장 시작할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브라만을 데려다가
수천 개의 조그만 조각으로 잘라,
그것을 모든 인간의 내부에 하나씩 넣어주었다.
"이제 놀이가 시작됩니다!
나는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이 무엇인지 잊어버리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겁니다."
마야는 이렇게 꿈을 만들어냈으며,
지금까지도 브라만은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내려고 애쓰고 있다.
브라만은 당신의 내부에 있으며,
마야는 당신이 무엇인지 기억해내는 것을 중단시키고 있다.
그 꿈에서 깨어나면, 당신은 다시 브라만이 되며 당신의 신성(神性)을 되찾을 수 있다.
당신 내부의 브라만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좋아요, 난 깨어났어요. 나의 나머지는 어떻게 되죠?"
그러면 당신은 마야의 속임수를 알게 되며,
역시 깨어날 다른 사람들과 진리를 공유할 수 있다.
파티에서 술에 취하지 않은 사람이 두 명이라면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술에 취하지 않은 사람이 세 명이라면 더 좋다.
당신으로부터 시작하라.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꿈이, 파티의 모든 사람이 깨어날 때까지.
인도,
톨텍, 기독교, 그리스에서,
그러니까 전 세계, 온갖 사회에서 전해주는 가르침들은
모두 똑같은 진리에서 생겨났다.
당신의 신성을 되찾아
당신 내부의 신을 찾는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이다.
가슴을 온전히 열고 지혜로워지는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가슴을 열고 내부에 깃든 사랑을 발견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상상할 수 있을까?
당연히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것은 강요된 생각을 따르는 문제가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을 발견하고,
당신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문제이다. 그러니
당신의 삶은 곧 예술이다.
톨텍은
'영혼의 예술가'를 뜻한다.
톨텍 사람들은
가슴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들,
무조건적인 사랑을 간직한 이들이다.
당신은 생명의 힘, 신의 힘 덕분에 살아 있다.
당신은 생명의 힘이지만, 마음의 수준에서 사고할 수 있으므로
진정으로 당신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린다.
그러면 다른 누군가를 보고 이렇게 말하기 쉽다.
"오, 신이 있잖아. 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실 거야.
신이 나를 구해줄 거야."
아니다.
신은 당신에게, 다시 말해
당신 안의 신에게 이 말을 해주러 왔을 뿐이다.
깨어 있으라고,
선택을 내리라고,
당신의 모든 두려움을 해부하여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가져보라고.
그러면 당신은 더 이상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을 거라고.
사랑의 두려움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두려움 가운데 하나이다.
왜 그럴까? 지구의 꿈에서, 절망은 곧 '보잘 것 없는 나'를 뜻하기 때문이다.
지금쯤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생명이거나 신이라면,
우리는 왜 그것을 알지 못하는가?"
그렇다. 알지 못하도록 프로그래밍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배웠다.
"너는 한 인간이다. 이것이 너의 한계다."
그리고 우리는 두려움들로 인해
우리가 가진 가능성들의 한계를 정한다.
당신은 곧 당신이 믿는 것이다. 인간은 재능 있는 마법사이다.
당신이 당신이라고 믿는 것이 당신의 현재 모습이 된다.
당신은 생명이요, 신이요, 의미이므로 할 수 있다.
당신에게는 자신을 지금 당장 당신인 것으로 만들 힘이 있다.
그러나 당신의 힘을 지배하는 것은 당신의 이성적인 머리가 아니다. 당신이 믿는 바로 그것이다.
당신도 알 것이다. 모든 것은 믿음에 달려 있다.
무엇이 우리의 존재를 지배한다고 믿든,
그것은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우리가 만드는 믿음의 시스템은 우리 자신을 그 안에 집어넣는
작은 상자와도 같다.
우리는 도망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도망갈 수 없다.
그것이 우리의 해결책이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 자신의 한도를 만든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가능한 것이 무엇이고,
가능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그러고 나서 단지 우리가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에게 진실이 된다.
톨텍의 예언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
인간이 자신의 믿음에,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새로운 인간성의 시작을 내다보았다.
당신이 자신의 스승이 될 때가
다가오고 있다.
당신은 신의 의지가 무엇인지 당신에게 말해줄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 어떠한 중개자 없이
신을 일대일로 대면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신을 찾아 헤맸으며,
당신 안에 신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신은 더 이상 그곳, 당신의 외부에
있지 않다.
생명이라는 힘이 당신의 내부에 있다는 것을 알 때,
당신은 자신의 신성을 받아들이되 겸손하다.
다른 모든 이들에게서도 똑같은 '신성'을 보기 때문이다.
당신은 신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안다.
모든 것은 신의 현현이니까.
육신은 죽어 없어질 것이고, 마음도 점점 사라질 테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다.
당신은 불멸하다.
당신은 여러 가지 다른 현현으로 수백년 동안 존재한다.
당신은 생명이며 죽을 수 없으므로.
당신은
나무 안에, 나비 안에,
물고기 안에, 공기 속에, 달님 속에,
햇님 속에 깃들어 있다.
당신이 어딜 가든,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곳에 존재한다.
당신의 몸은 사원이다.
신이 거주하는 살아 있는 사원이다.
신은 생명으로서 당신 안에 살아 있다.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신이 당신의 내부에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당신의 생명이 그 증거이다.
물론,
당신의 마음속에는
쓰레기와 감정의 독소가 있지만,
신도 그곳에 그것들과 함께 있다.
당신은 신에게 닿기 위해, 눈뜸의 세상에 이르기 위해,
깨어나기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을 신에게 데려갈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당신을 신에게 데려가겠노라고 말하는 이는 누구든 거짓말쟁이다.
당신은 이미 그곳에 있으므로.
살아 있는 단 하나의 존재가 있으며, 원하든 원치 않든,
그것에 저항하든 안 하든,
당신은 이미 아무 노력 없이 신과 함께 있다.
그러니
유일하게 남은 것은
당신의 삶을 즐기는 것,
살아 있는 것,
감정적 육체를 치유하여
당신의 내부에 깃든 모든 사랑을
숨김없이 나누는 방식으로 당신의 삶을
창조할 수 있다.
온 세상이 당신을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사랑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당신에게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갖고 있는 사랑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서 우러나오는 그 사랑이다.
모든 사람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당신의 절반이다.
다른 절반은 나무가 될 수도 있고, 강아지가 될 수도 있고,
구름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은 하나의 절반이다.
다른 절반은 당신이 인식하는 것이다.
당신은 꿈꾸는 사람으로서 절반이고, 그 꿈은 다른 절반이다.
당신은 언제든 마음대로 사랑할 수 있다.
당신의 선택이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라면,
당신의 파트너도 똑같은 게임을 할 것이다.
얼마나 멋진 선물인가!
당신의 관계가 온전히 지옥에서 벗어난다면,
당신은 자신을 한없이 사랑하여
상대방이 전혀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
당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테니까.
두 사람이 만들어낼 것은 천국의 꿈이다.
당신은 이미
두려움과 자기부정을 극복했다.
이제는 자기애(自己愛)로 돌아갈 것이다.
자기사랑을 통해
당신의 개인적 꿈을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바꿀 만큼 강해질 수 있다.
아무 조건 없이.
당신이
조건 없이 사랑할 때,
당신은 인간이며, 당신은 신이고,
당신은
당신을 관통하여 흐르는
생명의 영혼과 일치한다.
당신의 삶은
그 영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표현해준다.
삶은 꿈에 지나지 않으며,
사랑으로
당신의 삶을 창조할 때
당신의 꿈은 근사한 예술 작품이 된다.
[돈 미구엘 루이스(Don Miguel Ruiz) / 사랑하라, 두려움없이 The Mastery of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