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UNE WITH THE INFINITE (1910)
무한 공간의 선율에 젖어
By Ralph Waldo Trine
랄프 왈도 트라인
2. THE SUPREME FACT OF HUMAN LIFE
삶의 핵심 요소
From the great central fact of the universe in regard to which we have agreed? namely, this Spirit of Infinite Life that is behind all and from which all comes, we are led to inquire as to what is the great central fact in human life. From what has gone before, the question almost answers itself.
앞에서 설명한대로이른바 "무한한 원천을 지닌 우주의 큰 생명력"이 있어서 거기서 세상 만물이 나오고 들어간다는 것이 우주 생명의 원리라면,
이제 우리는 마땅히 인간의 삶에서 가장 핵심되는 사실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The great central fact in human life, in your life and mine, is the coming into a conscious, vital realization of our oneness with this Infinite Life, and the opening of ourselves fully to this divine inflow.
인간의 삶, 곧 그대와 나의 삶의 핵심은 이 "우주의 큰 생명력"과
우리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신성의 물줄기를 향해 자신을 활짝 열어 놓는데 있다.
This is the great central fact in human life, for in this all else is included, all else follows in its train. In just the degree that we come into a conscious realization of our oneness with the Infinite Life, and open ourselves to this divine inflow, do we actualize in ourselves the qualities and powers of the Infinite Life.
이것이 바로 삶의 원리이다. 왜냐하면 이 속에 모두가 다 들어있으며, 그 밖의 것은 저절로 따라오기 때문이다.
자신이 "우주의 큰 생명력"과 하나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고
그 숭고한 생명력을 향해 자신을 열어 놓을 때 우리에게 그 무한한 생명의 본질과 힘이 그대로 꽃피어 날 수 있다.
And what does this mean? It means simply this: that we are recognizing our true identity, that we are bringing our lives into harmony with the same great laws and forces, and so opening ourselves to the same great inspirations, as have all the prophets, seers, sages, and saviors in the world's history, all men of truly great and mighty power. For in the degree that we come into this realization and connect ourselves with this Infinite Source, do we make it possible for the higher powers to play, to work, to manifest through us.
이것은 무쓴 뜻인가? 다시 말해 자신의 참모습을 아는 순간 우리는 역사상에 존재했던 위대하고 놀라운 힘을 지녔던 모든 사람들,
진실을 깨친 현자들처럼 크나큰 힘과 법칙에 조화된 삶을 살 수
있다. 또한 그들이 활용했던 것과 똑같은 위대한 영감을 향해 자신을 열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고 "무한한 우주의 원천"과 자신을 연결시킬 때 그 높은 힘이 우리 자신을 통해
일하고 활동하기 때문이다.
We keep closed to this divine inflow, to these higher forces and powers, through ignorance, as most of us do, and thus hinder or even prevent their manifesting through us. Or we can intentionally close ourselves to their operations and thus deprive ourselves of the powers to which, by the very nature of our being, we are rightful heirs.
그런데 우리들 대다수는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는가?
그것은 무지 때문이다. 무지 때문에 우리는 이들 높은 힘과 불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대생명력의 물줄기가 자신에게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자신이 정당하게 물려받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On the other hand, we can come into so vital a realization of the oneness of our real selves with this Infinite Life, and can open ourselves so fully to the incoming of this divine inflow, and so the operation of these higher forces, inspirations, and powers, that we can indeed and in truth become what we may well term, God-men.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내부의 참된 나"가 이 무한한
생명과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큰 생명력의 물줄기를 향해
자신을 있는 대로 열 때 그 높은 힘, 영감, 생명력이 온전하게
우리 자신을 통해 표현된다. 그때 우리는 진실로 "신인(神人)"이
될 수 있다.
And what is a God-man? One in whom the powers of God are manifesting, though yet a man. No one can set limitations to a man of this type, for the only limitations he can have are those set by the self.
신인(神人)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를 통해 신의 무한한 힘이 표현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누구도 좁은 울타리 안에 가둘 수 없다. 그 자신만이 자기를 구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Ignorance is the most potent factor in setting limitations to the majority of mankind, and so the great majority of people continue to live their little, dwarfed, and stunted lives simply by virtue of the fact that they do not realize the larger life to which they are heirs. They have never as yet come into a knowledge of the real identity of their true selves.
무지야말로 인류 전체를 좁은 울타리 안에 가두어 두는 결정적인 원인이다. 자신이 상속받은 무한한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편협하고 힘없고 어두운 삶을 살고 있다. 인류 대부분이 아직도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알지 못하고 있다.
Mankind has not yet realized that the real self is one with the life of God. Through its ignorance it has never yet opened itself to the divine inflow, and so has never made itself a channel through which the infinite powers and forces can manifest. When we know ourselves merely as men, we live accordingly, and have the powers of men. When we come into the realization of the fact that we are God-men, then again we live accordingly, and have the powers of God-men.
인류는 아직도 "내부의 참된 나"가 신의 생명과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무지 때문에 인류는 튼 생명력의 물줄기를 향해 자신을 열어 놓지 않으며, 따라서 그 무한한 힘과 정열이 표현될 통로가 막혀 있다. 자신을 평범한 인간으로만 알 때 결국 평범한 인간의 힘만을 갖게 되며, 극히 제한된 힘에 따라서만 살게 된다. 반면에 자신이 "신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신인"의 힘을 갖게 되고, 그 힘대로 온전히 살게 된다.
In the degree that we open ourselves to this divine inflow are we changed from mere men into God-men.
우주의 큰 생명력의 흐름을 향해 자신을 얼마만큼 열어 놓느냐에 따라 우리는 한낱 평범한 인간에서 "신인"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A friend has a beautiful lotus pond. A natural basin on his estate -his farm as he always calls it -is supplied with water from a reservoir in the foothills some distance away. A gate regulates the flow of the water from the main that conducts it from the reservoir to the pond. It is a spot of transcendent beauty. There, through the days of the perfect summer weather, the lotus flowers lie full blown upon the surface of the clear, transparent water. The June roses and other wild flowers are continually blooming upon its banks. The birds come here to drink and bathe, and from early until late one can hear the melody of their song. The bees are continually at work in this garden of wild flowers. A beautiful grove, in which many kinds of wild berries and many varieties of brakes and ferns grow, stretches at the back of the pond as far as the eye can reach.
한 친구가 아름다운 연못을 가지고 있었다. 넓은 정원에 자연적으로 생긴 그 연못은 얼마 떨어진 곳에 있는 산기슭의 큰 저수지로
부터 물을 공급받고 있었다. 그리고 연못에는 저수지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의 양을 조절할 수 있게끔 수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곳은 이 세상이 아닌 듯이 무척 아름다웠다. 그곳에서는 뜨거운 한 여름에도 맑고 투명한 수면 위에 연꽃들이 매혹적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둑 위에서는 유월의 장미꽃들과 야생의 들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났으며, 새들이 날아와 목을 축이고 깃털을 씻었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까지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들려왔다.
꿀벌들은 쉴새없이 날아와 정원에 핀 들꽃들 사이를 오가며 분주하게 꿀을 따서 모으고 있었다. 연못 뒤로는 갖가지 야생의 열매와
온갖 푸성귀, 고사리들이 자라는 아름답고 작은 숲이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다.
Our friend is a man, nay more, a God-man, a lover of his kind, and as a consequence no notice bearing such words as 'Private rounds, no trespassing allowed,' or Trespassers will be prosecuted,' stands on his estate. But at the end of a beautiful by-way that leads through the wildwood up to this enchanting spot, stands a notice bearing the words 'All are welcome to the Lotus Pond.' All love our friend. Why? They can't help it. He so loves them, and what is his is theirs.
우리의 친구는 모두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아니 그 보다는 "신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땅에서는 "여기는 개인 소유의 땅이니 들어오지 마시오! 라든지 "허락 없이 침입하는 자는 엄벌에 처함"이라는 팻말이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 대신 그 매혹적인 장소로 통하는
숲 속의 산책길 끝머리에는 "연꽃이 만발한 이 연못으로 그대를
초대합니다"라는 표지판이 꽂혀있었다. 모두가 이 친구를 사랑했다. 왜일까?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모두를 사랑했으며, 그가 가진 것이 곧 모두의 것이었다.
Here one may often find merry groups of children at play. Here many times tired and weary-looking men come, and somehow, when they go their faces wear a different expression -the burden seems to be lifted, and now and then I have heard them when leaving, sometimes in a faint murmur, as if uttering a benediction, say, 'God bless our brother-friend.' Many speak of this spot as the Garden of God. My friend calls it his Soul Garden, and he spends many hours in quiet here. Often have I seen him after the others have gone, walking to and fro, or sitting quietly in the clear moonlight on an old rustic bench, drinking in the perfume of the wild flowers. He is a man of a beautifully simple nature. He says that here his greatest and most successful plans, many times as by a flash of inspiration, suggest themselves to him.
여기에 오면 언제나 즐겁게 뛰노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피곤하고 삶에 지친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이곳으로 왔으며, 떠날 무렵 그들의 얼굴은 무거운 짐을 벗은 듯 밝은 표정이었다. 이따금 나는 사람들이 그 정원을 떠나면서 입속말로 이렇게
축복의 기도를 하는 것을 목격하곤 했다. "이 집 주인에게 축복이 깃들기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하늘의 정원"이라고 불렀다.
내 친구는 그곳을 자신의 "영혼의 뜰"이라고 했다. 그는 그곳에서 오랜 시간 침묵 속에 명상을 하며 앉아 있곤 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돌아가고 난 다음 나는 종종 그 친구가 달빛 속을 이리저리 거닐
거나 낡고 이끼 낀 나무의자에 말없이 앉아 들꽃 향기에 취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로 소박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 이 정원에서 명상을 하는
동안 인생의 진리를 많이 깨달았으며, 영감을 통해 조화롭고 순리에 맞는 인생의 계획들을 얻었다고 말했다.
Everything in the immediate vicinity seems to breathe a spirit of kindliness, comfort, goodwill, and good cheer. The very cattle and sheep as they come to the old stone-fence at the edge of the grove and look across to this beautiful spot seem, indeed, to get the same enjoyment that the people are getting. They seem almost to smile in the realization of their contentment and enjoyment, or perhaps it seems so to the looker-on, because he can scarcely help smiling as he sees the manifested evidence of their contentment and pleasure.
근처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그 정원이 간직한 부드러움과 편안함과 선한 의지와 생명력을 지닌 어떤 큰 기운을 숨쉬는 듯하였다.
소와 양떼들까지도 오래된 돌 담장 근처로 다가와 이 아름다운
정경을 들여다보고는 사람들과 똑같은 즐거움을 맛보는 듯 했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구경꾼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축 떼들의 편안한 표정을 보고 사람들 역시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었다.
The gate of the pond is always open wide enough to admit a supply of water so abundant that it continually overflows a quantity sufficient to feed a stream that runs through the fields below, giving the pure mountain water in drink to the cattle and flocks that are grazing there. The stream then flows on through the neighbor's fields.
연못의 수문은 위쪽의 저수지로부터 충분한 양의 물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언제나 활짝 열려 있었다. 그래서 연못에서 흘러 넘친 물은 시내를 이루며 아래쪽 들판으로 흘러가 풀을 뜯는 소 떼와 다른
가축들에게도 신선한 물을 공급해주었다.
Not long ago our friend was absent for a year. He rented his estate during his absence to a man who, as the world goes, was of a very 'practical' turn of mind. He had no time for anything that did not bring him direct practical returns. The gate connecting the reservoir with the lotus pond was shut down, and no longer had the crystal mountain water the opportunity to feed and overflow it. The notice of our friend, 'All are welcome to the Lotus Pond,' was removed, and no longer were the gay companies of children and of men seen at the pond.
그런데 얼마 전 우리의 친구는 사정이 생겨 일 년 남짓 그곳을 비우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집과 정원을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어야 했다. 세를 든 사람은 지극히 "현실적인"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당장에 "현실적인" 보상이 생기는 일이 아니면 관심이
없었다. 그 사람은 귀찮은 마음에 저수지로 통하는 연못의 수문을 닫아 버렸다. 그래서 수정같이 맑은 산 속의 물은 더 이상 연못으로 흘러내려 올 수가 없었으며, 연못 아래쪽 동식물들의 갈증을 채워줄 수도 없게 되었다. 우리의 친구가 세워놓았던 "그대를 초대합니다"라는 표지판도 뽑혀 나갔으며, 염못 근처에서 뛰어 놀던 아이들도 더 이상 얼씬거리지 않았다.
A great change came over everything. On account of the lack of the life-giving water the flowers in the pond wilted, and their long stems lay stretched upon the mud in the bottom. The fish that formerly swam in its clear water soon died and gave off an offensive odor to all who came near. The flowers no longer bloomed on its banks. The birds no longer came to drink and to bathe. No longer was heard the hum of the bees, and more, the stream that ran through the fields below dried up, so that the cattle and the flocks no longer got their supply of clear mountain water.
모두에게 큰 변화가 닥쳤다. 생명력을 실어 나르던 물이 끊어지자 연못의 꽃들이 시들었으며, 바짝 마른 꽃줄기들만이 연못 바닥
진흙탕에 널브러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맑은 물 속에서
헤엄치던 물고기들도 말라죽었고, 가까이 가면 썩은 냄새를 풍겼다. 둑에 만발했던 꽃들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새들도 날아오지 않았다. 꿀벌의 잉잉거리는 소리도 사라졌다. 게다가 시냇물도 메말라 가축들은 더 이상 산 속의 물을 받아먹을 수 없었다.
The difference between the spot now and the lotus pond when our friend gave it his careful attention was caused, as we readily see, by the shutting of the gate to the pond, thus preventing the water from the reservoir in the hills, which was the source of its life, from entering it. And when this, the source of its life, was shut off, not only was the appearance of the lotus pond entirely changed, but the surrounding fields were deprived of the stream to whose banks the flocks and cattle came for drink.
우리의 친구가 정성껏 가꾼 연못이 그렇게 황폐한 장소로 바뀐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지켜본 대로 순전히 저수지와 통하는 연못의 수문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기슭의 저수지 물이 더
이상 흘러들어 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자 연못 전체의 모습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짐승들이 목을 축이던 들판의 시냇물까지도 메말라 버렸다.
In this do we not see a complete parallel so far as human life is concerned? In the degree that we recognize our oneness, our connection with the Infinite Spirit which is the life of all, and in the degree that we open ourselves to this divine inflow, do we come into harmony with the highest, the most powerful, and the most beautiful everywhere. And in the degree that we do this do we overflow, so that all who come in contact with us receive the effects of this realization on our part. This is the lotus pond of our friend, he who is in love with all that is truest and best in the universe. And in the degree that we fail to recognize our oneness with this Infinite Source, and so close, shut ourselves to this divine inflow, do we come into that state where there seems to be with us nothing of good, nothing of beauty, nothing of power, and when this is true, those who come in contact with us receive not good, but harm. This is the spot of the lotus pond while the farm was in the hands of a tenant.
이것과 똑같은 진리를 인간의 삶 속에서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모두에게 생명을 주는 "우주의 대생명력"과 내 자신이 하나로 이어져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대생명력의 물결이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자신을 열어 놓을 때 우리는 어디서나 가장 높고 힘있고 아름다운 정신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흘러 들어온 대생명력의 물이 넘쳐나 주변의 모두를 적실 수가
있다. 이 상태가 바로 연꽃이 만발한 내 친구의 연못이며,
그런 사람은 세상의 참되고 선한 모든 사물들을 다 사랑한다.
반면에 자신이 이 "우주의 대생명력"과 하나라는 사실을 못보고
자신의 문을 닫아걸어 대생명력의 물결이 흘러 들어올 수 없게
만들 때, 우리는 선하거나 아름답거나 정열 넘치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며, 또한 이때는 우리와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우리에게서 나쁜 영향만 받는다. 이 상태가 바로 세든 사람의 손에 맡겨져 있을 때의 연못이다.
There is this difference between the lotus pond and your life and mine. It has no power in itself of opening the gate to the inflow of the water from the reservoir which is its source. In regard to this it is helpless, and dependent upon an outside agency. You and I have the power, the power within us, to open or close ourselves to this divine inflow exactly as we choose. This we have through the power or mind through the operation of thought.
연못과 우리의 인생에는 차이가 있다. 연못에게는 생명의 원천인 저수지로부터 물이 마음껏 흘러들어 올 수 있도록 수문을 여닫을 힘이 없다. 연못 혼자서는 그 일이 불가능하며, 수문을 열어 줄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당신과 나에게는 그럴 힘이 있다. 이 우주의 대생명력의 물줄기를 향해 자신을 열어 놓을 힘이 우리에게는 있다. 마음과 가슴을 통해 우리는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There is the soul of life, direct from God. This it is that relates us to the Infinite. There is, then, the physical life. This it is that relates us to the material universe about us. The thought life connects the one with the other. It is this that plays between the two.
신에게로 곧바로 통하는 "영혼의 삶"이 있다. 영혼은 우리를 무한한 세계와 연결해 준다. 그 다음에는 "육체의 삶"이 있다.
육체는 우리를 주변의 물질 세계와 연결시켜 준다.
Before we proceed further let us consider very briefly the nature of thought. Thought is not, as is many times supposed, a mere indefinite abstraction, or something of a like nature. It is, on the contrary, a vital, living force, the most vital, subtle, and irresistible force there is in the universe.
여기서 잠시 마음의 성질에 대해 살펴보자. 마음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은 우주 속의 그 어떤 것보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힘, 가장 활기 있고 미묘한 힘이다.
In our very laboratory experiments we are demonstrating the great fact that thoughts are forces. They have form, and quality, and substance, and power, and we are beginning to find that there is what we may term a science of thought. We are beginning also to find that through the instrumentality of our thought forces we have creative power not merely in a figurative sense, but creative power in reality.
많은 과학적 실험을 통해 마음이 곧 힘이라는 사실이 잇달아 증명되고 있다. 마음은 형태와 본질, 실체와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결과 "마음의 과학"이라는 것까지 생겨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창조할 수 있는 것도 이 마음의 힘을 통해서이다.
Everything in the material universe about us, everything the universe has ever known, had its origin first in thought. From this it took its form. Every castle, every statue, every painting, every piece of mechanism, everything had its birth, its origin, first in the mind of the one who formed it before it received its material expression or embodiment. The very universe in which we live is the result of the thought energies of God, the Infinite Spirit that is behind all. And if it is true, as we have found, that we in our true selves are in essence the same, and in this sense are one with the life of this Infinite Spirit, do we not then see that in the degree that we come into a vital realization of this stupendous fact, we, through the operation of our interior, spiritual, thought forces, have in like sense creative power?
우리 주변에 있는 물질세계의 전부가, 지금까지 우주 속에 존재해 온 일체가 다 마음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마음을 통해 모든 것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도로와 건물, 음악과 미술, 기계와 각 부품 등 - 이 모든 것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기 이전에 이미 이 우주도
결국 세상 만물의 배후에 있는 "무한한 대생명", 곧 신의 마음이
형상화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그리고 이미 살펴본대로 우리의
"내부의 참된 나"가 본질에 있어서 이 "우주의 대생명력"과 하나라면, 이 엄청난 진리를 얼마나 구체화시키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 무한한 대생명력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의 마음을 통해 그만큼 창조적인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Everything exists in the unseen before it is manifested or realized in the seen, and in this sense it is true that the unseen things are the real, while the things that are seen are the unreal. The unseen things are the cause, the seen things are effect. The unseen things are the eternal the seen things are the changing, the transient. The 'power of the word' is a literal scientific fact. Through the operation of our thought forces we have creative power. The spoken word is nothing more or less than the outward expression of the workings of these interior forces. The spoken word is then, in a sense, the means whereby the thought forces are focused and directed along any particular line, and this concentration, this giving them direction, is necessary before any outward or material manifestation of their power can become evident.
이 세상 만물은 그것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 모습을 나타내기 전에 이미 안 보이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런 뜻에서 볼 때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인 것이고, 반면에 눈에 보이는 것이 비현실적이다. 안 보이는 세계의 것이 원인이고, 보이는 세계의 것은 결과이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영원한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항상 변하며 일시적이다. "말의 힘"은 문자 그대로 엄연한 과학적인 사실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힘을 통해서인데, 말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내적인 힘이 바깥으로 표현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말을 통해 마음의 힘이 초점을 잡고 방향을
정하는 일은 마음의 힘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되는 데 아주 필요하다.
Much is said in regard to building castles in the air, and one who is given to this building is not always looked upon with favor. But castles in the air are always necessary before we can have castles on the ground, before we can have castles in which to live. The trouble with the one who gives himself to building castles in the air is not that he builds them in the air, but that he does not go farther and actualize in life, in character, in material form, the castles he thus builds. He does a part of the work, a very necessary part, but another equally necessary part remains still undone.
공중누각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땅 위에 실제로 살 수 있는 집을 지으려면 먼저 공중에 그 집을 그려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공중누각을 꿈꾸는 사람이 문제가 되는 것은 공중에다가 집을 상상하는데 그치지 않고 거기서 한 걸은 나아가 그것을 현실세계 속에 구체화시키거나 실제의 삶에 적용시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There is in connection with the thought forces what we may term the drawing power of mind, and the great law operating here is one with the great law of the universe, that like attracts like. We are continually attracting to us, from both the seen and the unseen side of life, forces and conditions most akin to those of our own thoughts.
마음의 힘과 관련하여, 마음에는 대상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 적용되는 중요한 법칙이 곧 우주 전체를 꾸려나가는 큰 법칙이기도 한데, 그것은 닮은 것끼리는 서로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든 안 보이는 영적 세계든 우리는
쉬지 않고 양쪽 세계로부터 우리의 마음과 가장 많이 닮은 힘이나 조건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This law is continually operating whether we are conscious of it or not. We are all living, so to speak, in a vast ocean of thought, and the very atmosphere around us is continually filled with the thought forces that are being continually sent or that are continually going out in the form of thought waves. We are all affected, more or less, by these thought forces, either consciously or unconsciously and in the degree that we are more or less sensitively organized, or in the degree that we are negative and so are open to outside influences, rather than positive, thus determining what influences shall enter into our realm of thought, and hence into our lives.
이 법칙은 우리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지금도 쉼 없이 작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생각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숨쉬고 있으며, 주위의 대기는 생각이라는 파도를 타고 끊임없이 바깥으로 밀려나오는 수만 가지 마음의 힘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 모두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많든 적든 간에,
아들 마음의 힘에 항상 영향을 받고 있다. 그리고 얼마나 예민한가에 따라서, 다시 말해 외부의 영향에 대해 의식이 얼마나 많이 열려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곧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
There are those among us who are much more sensitively organized than others. As an organism their bodies are more finely, more sensitively constructed. These, generally speaking, are people who are always more or less affected by the mentalities of those with whom they come in contact, or in whose company they are. A friend, the editor of one of our great journals, is so sensitively organized that it is impossible for him to attend a gathering, such as a reception, talk and shake hands with a number of people during the course of the evening, without taking on, to a greater or less extent, their various mental and physical conditions. These affect him to such an extent that he is scarcely himself, and in his best condition for work, until some two or three days afterwards.
우리 주위에는 늘 남보다 훨씬 예민하다고 해서 지적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정신적 육체적 구조가 남달리 아주 섬세하고 예민하다. 그래서인지 그런 사람은 어쩌다 마주치는 주위 사람들의 아주 사소한 심리상태, 정신상태에까지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내가 아는 유명한 잡지 편집장인 어떤 친구는 모임에 가서 사람들과 악수도 나누고 대화를 하면서 저녁 한때를 잘 보내고 나면
자신이 참석했던 그 모임의 분위기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큰 영향을 받는다. 그 영향이 어찌나 강한지 이삼일이 지나서도 일을 제대로 손에 잡지 못할 정도이다.
Some think it unfortunate for one to be sensitively organized. By no means. It is a good thing, for one may thus be more open and receptive to the higher impulses of the soul within, and to all higher forces and influences from without. It may, however, be unfortunate and extremely inconvenient to be so organized unless one recognize and gain the power of closing themselves, of making themselves positive to all detrimental or undesirable influences. This power everyone, however sensitively organized they may be, can acquire.
사람들은 흔히 예민한 것을 몹시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예민한 사람일수록 자기 내면에서 들리는 영혼의 목소리나 다른 차원에서 밀려오는 힘과 영향에 대해 더 많이 열려 있고
흡수가 더 빠르기 때문이다. 물론 해롭고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들을 가려 알거나 그것들에 대해 자신을 여닫을 힘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무턱대고 예민하기만 하다면 무척 불편하고 곤란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예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그런 힘을 터득할 수 있다.
This they can acquire through the mind's action. And, moreover, there is no habit of more value to anyone, be they sensitively or less sensitively organized, than that of occasionally taking and holding themselves continually in the attitude of mind - I close myself, I make myself positive to all things below, and open and receptive to higher influences, to all things above. By taking this attitude of mind consciously now and then it soon becomes a habit, and if one is deeply in earnest in regard to it, it puts into operation silent but subtle and powerful influences in effecting the desired results. In this way all lower and undesirable influences from both the seen and the unseen side of life are closed out, while all higher influences are invited, and in the degree that they are invited will they enter.
어떻게 그 힘을 터득할 수 있는가? 바로 마음을 통해서이다.
예민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높은 차원의 힘이나 영향에 대해서는 문을 활짝 열고 낮은 차원의 것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겠다는 자세를 늘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의식적으로 이러한 마음의
자세를 키워 나갈 때 저절로 몸에 배게 된다. 그리고 얼마나 진실하게 그 작업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는데 이것이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나 안
보이는 세계로부터 저차원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들을 죄다 물리칠 수 있으며, 반면에 높은 차원의 흐름을 다 초대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초대하는 만큼 실제로 그것들은 찾아온다.
And what do we mean by the unseen side of life? First, the thought forces, the mental and emotional conditions in the atmosphere about us that are generated by those manifesting on the physical plane through the agency of physical bodies. Second, the same forces generated by those who have dropped the physical body, or from whom it has been struck away, and who are now manifesting through the agency of bodies of a different nature.
눈에 안 보이는 세계란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로 그것은 육체라는 도구를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마음의 여러 힘들, 정신이나
감정의 여러 상태들을 말한다. 둘째로 그것은 육체 없이 존재하는, 육체라는 옷을 벗고 지금은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여러 숨은
영(靈)들이 보내는 힘을 가리킨다.
The individual existence of man begins on the sense plane of the physical world, but rises through successive gradations of ethereal and celestial spheres, corresponding with his ever unfolding deific life and powers, to a destiny of unspeakable grandeur and glory. Within and above every physical planet is a corresponding ethereal planet, or soul world, as within and above every physical organism is a corresponding ethereal organism, or soul body, of which the physical is but the external counterpart and materialized expression.
모든 인간 존재는 최초에 물질계의 감각차원에서 출발하지만
그 차원에 해당하는 힘과 생명력을 바탕으로 영적인 여러 단계를 거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되고 무한한 신의 경지로까지 진화한다. 모든 물질체 속에는 그 물질체에 대응하는 에테르체 또는
영체(靈體)가 있으며, 겉으로 보이는 육체는 그 영체의 바깥쪽
짝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물질계에 있는 모든 별 속에는 그 별에
대응하는 유계(幽界) 또는 영계(靈界)가 존재한다.
From this etherealized or soul planet, which is the immediate home of our arisen humanity, there rises or deepens in infinite gradations spheres within and above spheres, to celestial heights of spiritualized existence utterly inconceivable to the sense of man. Embodiment, accordingly, is two-fold -the physical being but the temporary husk, so to speak, in and by which the real and permanent ethereal organism is individualized and perfected, somewhat as 'the full corn in the ear' is reached by means of its husk, for which there is no further use. By means of this indestructible ethereal body the corresponding ethereal spheres of environment with the social life and relations in the spheres, the individuality and personal life is preserved forever.'
끝없는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우리 인간은 지구라는 물질계와 짝을 이루고 있는 유계, 영계를 통해 인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파악이 불가능한 순수한 영혼의 최종단계로 나아간다.
따라서 우리는 두 겹의 옷을 입은 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 육체라는 것은 그 내면에 존재하는 보다 본질적이고 영원한 영(靈)이 하나의 개체로 표현되고 완성된 일시적인 껍질일 뿐이다. 말하자면 육체는 콩이 들어 있는 콩 깍지에 불과하다.
파괴할 수 없는 이 내면의 영과 그것이 몸담고 있는 껍질, 그리고 그 세계 속의 다양한 관계를 통해 모든 생명체는 영원히 진화해 나간다.
The fact of life in whatever form means the continuance of life, even though the form be changed. Life is the one eternal principle of the universe and so always continues, even though the form of the agency through which it manifests be changed. 'In My Father's house are many mansions.' And, surely, because the individual has dropped, has gone out of the physical body, there is no evidence at all that the life does not go right on the same as before, not commencing for there is no cessation but commencing in the other form exactly where it has left off here, for all life is a continuous evolution, step by step, there one neither skips nor jumps.
수만 가지로 모습을 바꾸기는 해도 생명 그 자체는 절대로 소멸되는 법이 없다. 생명은 우주의 원리이며, 따라서 겉에 드러나 숨쉬는 얼굴은 달라질지라도 생명 그 자체엔 끝이 없다.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많은 방이 있다." 육신의 허물을 벗고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져 없어졌다고 해서 그것으로 생명이 끝나거나 여태까지 산 것이 죄다 무(無)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생명에는 중단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형태를 벗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형태로 다시 시작한다. 이 세상 만물은
한 단계 한 단계를 거쳐 끝없이 진화해 나가는 도중에 있으며,
그 진화의 행렬에서는 어느 것 하나 이탈하는 법이 없다.
There are in the other form, then, mentalities and hence lives of all grades and influences, just as there are in the physical form. If, then, the great law that like attracts like is ever operating, we are continually attracting to us from this side of life influences and conditions most akin to those of our own thoughts and lives. A gruesome thought that we should be so influenced, says one. By no means, all life is one, we are all bound together in the one common and universal life. Especially not so when we take into consideration the fact that we have it entirely in our own hands to determine the order of thought we entertain, and consequently the order of influences we attract, and are not mere willowy creatures of circumstance, unless indeed we choose to be.
이 세상에는 물질의 존재하는 수많은 영들이 있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차원의 형태로 존재하는 영들도 수없이 많으며, 당연히 그들이 보내는 온갖 전파와 파장이 어디에나 존재한다. 따라서
같은 것끼리 서로 끌어당긴다는 불변의 법칙이 쉼 없이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생각이나 삶의
형태에 가장 많아 닮은 전파나 파장을 우리 주위로 끌어당기고
있다. 우리가 그토록 엄청난 영향들 속에서 생활한다니 섬뜩해진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것은 모르고서 하는 소리다.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다. 우리 모두가 이 우주가 벌이고 있는 생명의 잔치에 함께 하고 있다. 따라서 조화로운 마음을 통해 조화로운
전파를 자기 주위에 끌어당기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의 손에 달려 있으며, 스스로 선택하기 전에는 우리는 결코 환경에 지배당하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In our mental lives we can either keep hold of the rudder and so determine exactly what course we take, what points we touch, or we can fail to do this, and failing, we drift, and are blown hither and thither by every passing breeze. And so, on the contrary, welcome should be the thought, for thus we may draw to us the influence and the aid of the greatest, the noblest, and the best who have lived on the earth, whatever the time, wherever the place.
정신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두 가지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자기 혼자서만 주인공이 되어 나아갈 길을 정하고 매번 방향수정을 할 수도 있으며, 아니면 그러다가 실패하여 길을 잃고 운명에 이끌려 이리저리 헤맬 수도 있다. 반면에 마음을 통해, 영적인 교류를 통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지구상에 살다간 모든 위대했던
현자들이 보내는 힘과 전파를 자기 쪽으로 불러들여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We cannot rationally believe other than that those who have labored in love and with uplifting power here are still laboring in the same way, and in all probability with more earnest zeal, and with still greater power.
사랑을 통해서 높은 정신을 실현하고 간 그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눈에 보이진 않지만 이 세상에 살 때와 똑같이, 어쩌면 그때보다
더 강력한 힘과 애정을 가지고 세상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까닭이 없다.
'And Elisha prayed, and said, Lord, I pray thee, open his eyes, that he may see. And the Lord opened the eyes of the young man, and he saw: and, behold, the mountain was full of horses and chariots of fire round about Elisha.'
성경의 구약에는 그것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들과 함께 한 자보다 더 많으니라. 이렇게 말하고 나서 엘리사가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저 젊은이의 마음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젊은이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젊은이가 바라보니 수많은 말들과 불의 마차들이 온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감싸고 섰더라."
While riding with a friend a few days ago, we were speaking of the great interest people are everywhere taking in the more vital things of life, the eagerness with which they are reaching out for a knowledge of the interior forces, their ever-increasing desire to know themselves and to know their true relations with the Infinite. And in speaking of the great spiritual awakening that is so rapidly coming all over the world, the beginnings of which we are so clearly seeing during the closing years of this, and whose ever-increasing proportions we are to witness during the early years of the coming century, I said, 'How beautiful if Emerson, the illumined one so far in advance of his time, who labored so faithfully and so fearlessly to bring about these very conditions, how beautiful if he were with us today to witness it all! how he would rejoice!'
얼마 전 나는 한 친구와 함께 길을 가면서, 지금은 도처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참 존재가 무엇이며 자기 내면의 힘과 무한의 힘이 어떤 관계인가를 알려는 구도의 정열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지하게 영적인 자각에 눈을 돌리는 세대가 점점 불어나고 있는 지금의 기현상을 돌이켜보다가 나는 문득 한숨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깨달은 영혼들이 오늘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지상에 밝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목숨까지 희생한 성자들이
지금 이 세상에 나타나 자신들이 뿌려놓은 결실을 본다면 얼마나 기뻐할까!"
'How do we know', was the reply, 'that he is not witnessing it all? and more, that he is not having a hand in it all -a hand even greater, perhaps, than when we saw him here?' Thank you, my friend, for this reminder. And, truly, 'are they not all ministering spirits sent forth to minister to those who shall be heirs of salvation?'
그러자 친구가 대답했다. "그들이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또 그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옛날보다 더 큰 힘과 애정으로 일을 하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 사실을 일깨워준 그 친구에게 감사한다. 참으로 그렇다.
"무한한 자비를 가진 그 영들이 지금 이 순간도 모든 구도자들에게 진리를 전해주고 있는지 누가 아는가?"
As science is so abundantly demonstrating today, the things that we see are but a very small fraction of the things that are. The real, vital forces at work in our own lives and in the world about us are not seen by the ordinary physical eye. Yet they are the causes of which all things we see are merely the effects. Thoughts are forces, like builds like, and like attracts like. For one to govern their thinking, then, is to determine their life.
과학적으로도 매번 증명되듯이,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일부분뿐이다. 우리의 생명과 주위 세상을 엮어 나가는
진짜 힘은 평범한 육안으로는 파악하기 어렵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그 보이지 않는 힘이 원인이 되어 나타난 결과일 뿐이다.
마음은 힘이다. 안쪽이 바깥쪽을 부르고,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끌어당긴다. 따라서 어떤 삶이 되느냐 하는 것은 마음이 어떠한가에 달려있다.
Says one of deep insight into the nature of things, 'The law of correspondences between spiritual and material things is wonderfully exact in its workings. People ruled by the mood of gloom attract to them gloomy things. People always discouraged and despondent do not succeed in anything, and live only by burdening someone else. The hopeful, confident, and cheerful attract the elements of success.
누군가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이렇게 말했다. "마음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를 연결하는 법칙은 놀랄 정도로 정확하고 빈틈이 없다. 근심에 젖어 사는 사람에게는 늘 근심스러운 일만 생긴다.
용기 없고 기죽어 지내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실패만 하며,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 힘겹게 살아간다.
반면에 희망, 자신감, 활력은 성공을 부른다.
A man's front or back garden will advertise that man's ruling mood in the way it is kept. A woman at home shows her state of mind in her dress. A slattern advertises the ruling mood of hopelessness, carelessness, and lack of system. Rags, tatters, and dirt are always in the mind before being on the body. The thought that is most put out brings its corresponding visible element to crystallize about you as surely and literally as the visible bit of copper in solution attracts to it the invisible copper in that solution. A mind always hopeful, confident, courageous, and determined on its set purpose, and keeping itself to that purpose, attracts to itself out of the elements things and powers favorable to that purpose.
혼자 사는 남자의 방안에 꽂혀있는 한 다발의 들국화, 그것은
그 남자의 얼굴이다. 동전의 한쪽 면을 보면 다른 쪽 면이 무엇인가를 금방 알 수 있듯이 생각이 연출해 내는 거죽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가 어떤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늘 희망차고, 자신감 넘치고, 용기 있으며, 목적이 분명해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늘 그 목적에 필요한 힘과 여러 가지 요소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Every thought of yours has a literal value to you in every possible way. The strength of your body, the strength of your mind, your success in business, and the pleasure your company brings others, depends on the nature of your thoughts...... In whatever mood you set your mind does your spirit receive of unseen substance in correspondence with that mood. It is as much a chemical law as a spiritual law. Chemistry is not confined to the elements we see. The elements we do not see with the physical eye outnumber ten thousand times those we do see.
그대가 하는 생각 하나 하나가 말 그대로 모든 면에서 그대 자신에게 영향을 준다. 몸과 마음의 건강, 일의 잘되고 못됨, 주위 사람과의 관계, 이 모든 것이 전부 그대의 생각에 달려 있다. 마음이 어떤 상태냐에 따라 그대의 정신은 그 상태에 어울리는, 눈에 안 보이는 물질을 끌어당긴다. 그것은 정신의 법칙일 뿐만 아니라 화학법칙이기도 하다. 화학작용은 눈에 안 보이는 요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육안으로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요소들이 천 배나 많다.
The Christ injunction, "Do good to those who hate you," is based on a scientific fact and a natural law. So, to do good is to bring to yourself all the elements in nature of power and good. To do evil is to bring the contrary destructive elements. When our eyes are opened, self-preservation will make us stop all evil thought. Those who live by hate will die of hate: that is, "those who live by the sword will die by the sword." Every evil thought is as a sword drawn on the person to whom it is directed. If a sword is drawn in return, so much the worse for both.'
예수가 한 말, "너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하게 대하라."는 것도 엄연한 과학적 사실과 자연법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또 부처는 더 구체적으로 법구경에서 "이 세상에서 미움은 미움에 의해서는 결코
풀어지지 않는다. 미움을 버릴 때에만 풀리나니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다."라고 말했다. 선하게 대할 때 자연계 속에 있는 힘있고 선한 요소들이 전부 끌려나온다. 악하게 대하면 그 반대로 파괴적인 요소들이 죄다 몰려온다. 마음의 눈을 열고 보라.
악한 생각을 버리는 것이 곧 자신을 보호하는 길임을 알게 될 것이다. 미움 속에 사는 사람은 미움을 당해 죽는다. 즉, "칼로 사는
사람은 칼로 죽는다." 악한 생각은 곧 상대방을 찌르는 칼이다.
그리고 그 칼은 반드시 되돌아오는 성질을 갖고있기 때문에 둘
다 상처를 입는다.
And says another who knows full well whereof he speaks: 'The law of attraction works universally on every plane of action, and we attract whatever we desire or expect. If we desire one thing and expect another, we become like houses divided against themselves, which are quickly brought to desolation. Determine resolutely to expect only what you desire, then you will attract only what you wish for. . . . Carry any kind of thought you please about with you, and so long as you retain it, no matter how you roam over land or sea, you will unceasingly attract to yourself, knowingly or inadvertently, exactly and only what corresponds to your own dominant quality of thought. Thoughts are our private property, and we can regulate them to suit our taste entirely by steadily recognizing our ability so to do.'
자신이 하는 이야기의 내용을 진짜로 알고 있는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끌어당김(引力)의 법칙은 우주 전체 어떤 차원의 행위 속에서도 정확히 작용한다. 우리는 늘 자신이 바라보고 기대하는 것을 곁으로 끌어당긴다. 만일 우리가 이것저것을 다 바라고 꿈꾼다면 우리의 마음은 온갖 잡초가 무성한 밭이 되어 금방 황폐해진다.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한 주인만
섬기듯 오로지 그것만을 기대하라. 그때 자신이 가장 바라는 것이 끌려온다. 항상 즐거운 마음을 가져 보라. 그러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한, 신발 하나만 끌고서 세상 어디를 돌아다닌다 해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대는 그 마음에 어울리는 즐거운 일들만 주위로 끌어당길 것이다. 마음은 우리의 소중한 재산이다. 더불어 우리에게는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성찰하고, 그 마음의 바탕을
근본부터 바꾸고 다스려 나갈 힘이 있다."
We have just spoken of the drawing power of mind. Faith is nothing more nor less than the operation of the thought forces in the form of an earnest desire, coupled with expectation as to its fulfillment. And in the degree that faith, the earnest desire thus sent out, is continually held to and watered by firm expectation, in just that degree does it either draw to itself, or does it change from the unseen into the visible, from the spiritual into the material, that for which it is sent.
이제까지 우리는 마음의 세계에 작용하는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해 말했다. 확신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어떤 선한 바램과 그것을 이루려는 기대에서 나오는 "마음의 힘"이다. 얼마만큼 강한 기대를 갖고 계속해서 확신을 불어넣느냐에 따라 그 확신에 의해 정신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으로, 눈에 안 보이는 세계로 바뀌어 나타난다.
Let the element of doubt or fear enter in, and what would otherwise be a tremendous force will be so neutralized that it will fail of its realization. Continually held to and continually watered by firm expectation, it becomes a force, a drawing power, that is irresistible and absolute, and the results will be absolute in direct proportion as it is absolute.
두려움과 의심이 떠나지 않는 곳에는 많은 자본을 아무리 투자한다 해도 실패의 여지가 늘 따라다닌다. 자나깨나 기대를 잃지 않고
확신을 불어넣을 때, 그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기대가 하나의 힘으로, 강력한 힘으로 바뀌고, 기대가 절대적인 만큼 결과도 절대적으로 나타난다.
We shall find, as we are so rapidly beginning to find today, that the great things said in regard to faith, the great promises made in connection with it, are not mere vague sentimentalities, but are all great scientific facts, and rest upon great immutable laws. Even in our very laboratory experiments we are beginning to discover the laws underlying and governing these forces. We are now beginning, some at least, to use them understandingly and not blindly, as has so often and so long been the case.
오늘날 하나하나 증명되고 있듯이 지금까지 말한 확신에 대한
이야기나 그것에 따르는 무시 못할 결과는 절대 신비한 환상이나 착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크나큰 불변의 법칙에 근거를 둔 과학적인 사실이다.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서도 그 강력한 힘의 밑바닥에 깔린 법칙이 발견되고 있다.
Much is said today in regard to the will. It is many times spoken of as if it were a force in itself. But will is a force, a power, only in so far as it is a particular form of the manifestation of the thought forces, for it is by what we call the 'will' that thought is focused and given a particular direction, and in the degree that thought is thus focused and given direction, is it effective in the work it is sent out to accomplish.
의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사람들은 의지 자체가 곧 힘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의지는 마음이 그 속에 몽땅 담겨 있을 때에만 힘이 된다. 마음의 정열이 전부 한곳에 집중되어 일정한 방향을 갖고 있을 때에만 생겨나는 것이 곧 의지이며, 마음이 얼마나 담겨 있고 방향이 뚜렷한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In a sense there are two kinds of will -- the human and the divine. The human will is the will of what, for convenience sake, we may term the lower self. It is the will that finds its life merely in the realm of the mental and the physical -- the sense will. It is the will of the one who is not yet awake to the fact that there is a life that far transcends the life of merely the intellect and the physical senses, and which, when realized and lived, does not do away with or minify these, but which, on the contrary, brings them to their highest perfection and to their powers of keenest enjoyment. The divine will is the will of the higher self, the will of the one who recognizes their oneness with the Divine, and who consequently brings their will to work in harmony, in conjunction with the divine a will. 'The Lord thy God in the midst of thee is mighty.'
어떤 의미에서 두 종류의 의지가 있다. 인간의 의지와 신의 의지가 그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의지, 소위
"겉가죽의 얕은 나"의 의지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단지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곧 감각차원에서 해결하려는 의지이다. 그러나 여기 중요한 사실이 있다. 지적이고 육체적인 감각으로만 이루어진 우리 자신의 배후에는 그것을 초월한 더 큰 생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생명을 깨닫는 순간 우리 자신의 존재가
무시되거나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완전한 절대의 하나가 된다. 인간의 의지는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한다.
신의 의지는 "내 속의 깊은 나"의 의지, 자신이 신과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의지를 신의 의지와 조화시키는 사람의 의지다. "내 안에 있는 신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다."
The human will has its limitations. So far and no farther, says the law. The divine will has no limitations. It is supreme. All things are open and subject to you, says the law, and so, in the degree that the human will is transmuted into the divine, in the degree that it comes into harmony with, and so acts in conjunction with the divine, does it become supreme. Then it is that 'Thou shalt decree a thing and it shall be established unto thee.' The great secret of life and power, then, is to make and to keep one's conscious connection with this Infinite Source.
인간의 의지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하고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신의 의지에는 한계가 없다.
그것은 절대적이고 자유자재하다. 이 법칙에 따르면 모든 것이
그대를 향해 열려 있으며, 칼자루는 그대 손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가 신의 의지를 얼마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어느 정도 신의 의지와 조화를 이루느냐에 따라 인간의 의지 또한 그만큼 절대적인 것이 된다. "네가 어떤 것을 부르니 그것이 네 안에 자리잡도다."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 존재와 삶의 가장 큰 비밀은 바로 나의 의식을 이 "무한한 근원"에 연결시키는데 있다.
The power of every life, the very life itself, is determined by what it relates itself to. God is immanent as well as transcendent. He is creating, working, ruling in the universe today, in your life and in mine, just as much as He ever has been. We are apt to regard Him after the manner of an absentee landlord, one who has set into operation the forces of this great universe, and then taken Himself away.
일상 생활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 전체는 우리의 의식이 어떤 것과 연결되어 있느냐에 달려있다. 신은 세상 만물을 초월하여 존재하면서 동시에 어느 자리에나 다 깃들어 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온 것과 똑같이 신은 오늘도 이 우주 속에서, 당신의 삶과 나의 삶 속에서 변함 없이 창조하고, 일하고, 다스리고 있다. 우리는 그를 옆에 존재하지 않는 땅주인, 이 크나큰 우주를 그냥 저 스스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고 자기는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의 통치자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In the degree, however, that we recognized Him as immanent as well as transcendent, are we able to partake of His life and power. For in the degree that we recognize Him as the Infinite Spirit of Life and Power that is today, at this very moment, working and manifesting in and through all, and then, in the degree that we come into realization of our oneness with this life, do we become partakers of, and so do we actualize in ourselves the qualities of His Life. In the degree that we open ourselves to the inflowing tide of this immanent and transcendent life, do we make ourselves channels through which the Infinite Intelligence and Power can work.
신이 이 세상을 초월해 있을 뿐 아니라 이 세상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의 생명과 힘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 오늘 이 순간에도 세상 만물 속에서 그 모두를 통해 모습을 나타내고 일하는 "생명과 힘의 무한한 큰 생명력"이 곧 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이 생명과 우리 자신이 조화를 이룰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신의 생명력을 나누어 가질 수 있고, 우리 자신 속에 그
생명의 힘이 굽이치게 할 수 있다. 초월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
세상 만물 속 어디에나 깃들어 있는 이 큰 생명력의 물줄기를 향해 자신의 수문을 얼마나 열어놓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만큼 지성과 힘이 우리 자신을 통해 표현되게 할 수 있다.
It is through the instrumentality of the mind that we are enabled to connect the real soul life with the physical life, and so enable the soul life to manifest and work through the physical. The thought life needs continually to be illumined from within. This illumination can come in just the degree that through the agency of the mind we recognize our oneness with the Divine, of which each soul is an individual form of expression.
내부 영혼의 삶과 외부 육체의 삶이 만나거나, 그 영혼의 삶이 육체의 삶을 통해서 표현되고 활동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이다. 그러려면 마음이 늘 맑고 밝아야 한다. 말고 밝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각각의 영혼을 통해 모습을 나타내는
"우주의 큰 생명력"과 우리 자신이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마음은 저절로 맑고 밝아진다.
This gives us the inner guiding which we call intuition. 'Intuition is to the spiritual nature and understanding practically what sense perception is to the sensuous nature and understanding. It is an inner spiritual sense through which man is opened to the direct revelation and knowledge of God, the secrets of nature and life, and through which he is brought into conscious unity and fellowship with God, and made to realize his own deific nature and supremacy of being as the son of God. Spiritual supremacy and illumination, thus realized through the development and perfection of intuition under divine inspiration, gives the perfect inner vision and direct insight into the character, properties, and purpose of all things to which the attention and interest are directed.....
이때 영감(靈感)이라는 길잡이가 생겨난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
물체를 파악하고 이해하듯이, 영감은 우리의 영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이해하는 힘이다. 말하자면 영감은 우리 속 내부의
영에게 있는 감각, 판단력이다. 인간은 이 영감을 통해 자신과
이 세상 모든 생명의 비밀을 알게 되며, 그래서 우주의 큰 생명력에게 자신을 내맡겨 자신 속에 있는 그 생명력을 온전히 꽃피울 수 있다. 큰 생명력과 연결될 때 영감은 더욱 발달한다. 모든 창조적인 영감의 원천은 바로 이 "우주의 대생명력"이다. 이렇게 발달된 영감을 통해서 인간은 사물의 본질과 속성을 있는 그대로 맑게 볼 수 있다.
It is we repeat, a spiritual sense opening inwardly, as the physical senses open outwardly, and because it has the capacity to perceive, grasp and know the truth at first hand, independent of all external sources of information, we call it intuition. All inspired teaching and spiritual revelations are based upon the recognition of this spiritual faculty of the soul, and its power to receive and appropriate them..... Conscious unity of man in spirit and purpose with the Father, born out of his supreme desire and trust, opens his soul through this inner sense to immediate inspiration and enlightenment from the Divine Omniscience, and the co-operative energy of the Divine Omnipotence, under which he becomes a seer and a master.
다시 말하지만 육체의 감각이 바깥 세상을 향해 열려 있듯이 영의 감각인 영감은 내면세계를 향해 문이 열려 있다. 이 영감은 주워들은 온갖 정보나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곧바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곧바로 바라봄, 즉 직관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영감을 통한 가르침이나 영적인 계시들도 영혼이 갖고 있는 이 놀라운 직관의 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주의 대생명력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곧 이 직관을 통해서 내부의 "전능한 대생명력"이 보내는 빛과 영감으로 자신의 영혼을 연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우주의 대생명력"의 에너지와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 힘 아래에서 현자가 나오고 깨달은 자가 나온다.
'On this higher plane of realized spiritual life in the flesh the mind holds the impersonal attitude and acts with unfettered freedom and unbiased vision, grasping truth at first hand, independent of all external sources of information. Approaching all beings and things from the divine side, they are seen in the light of the divine Omniscience. God's purpose in them, and so the truth concerning them, as it rests in the mind of God, are thus revealed by direct illumination from the Divine Mind, to which the soul is opened inwardly through this spiritual sense we call intuition.' Some call it the voice of the soul, some call it the voice of God, some call it the sixth sense. It is our inner spiritual sense.
이 육체 속에 "우주의 대생명력"을 실현할 때, 마음은 "나"라는 좁은 굴레에서 벗어나 외부의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자유롭게 편견 없이 단숨에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다. 그때 세상 만물이 내 내부의 "우주의 대생명력"의 빛에 맑게 비친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참선에서
말하는 '관(觀)'이다. 그때 만물 속에 깃든 존재계의 목적,
진리 따위가 내 내부의 밝은 지혜 앞에 다 드러난다. 우리가 영의 감각이라 부르는 이 영감과 직관을 통해 영혼은 "우주의 대생명력"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영혼의 목소리라 부른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신의 소리라 부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제6의 감각(육감)이라고 한다. 어쨌든 그것은 인간 모두의 내부에 존재하는 영의 판단력이다.
In the degree that we come into the recognition of our own true selves, into the realization of the oneness of our life with the Infinite Life, and in the degree that we open ourselves to this divine inflow, does this voice of intuition, this voice of the soul, this voice of God, speak clearly, and in the degree that we recognize, listen to, and obey it, does it speak ever more clearly, until by-and-by there comes the time when it is unerring, absolutely unerring, in its guidance.
"내부의 참된 나"를 바로 알고 또 우리의 생명이 "우주의 큰 생명력"과 하나라는 사실을 밝게 알 때, 그래서 이 큰 생명력의 물줄기를 향해 자신을 열어 놓을 때 이 영감(靈感)의 소리, 이 영혼의 목소리, 이 큰 생명력의 목소리가 차츰 뚜렷하게 들린다.
우리가 그 목소리를 듣고, 느끼고, 그 목소리를 따를 때 그 목소리는 더욱 뚜렷해져서 마침내 잡음이 전혀 없는, 다시 말해 "잘못 인도하는 일이 전혀 없는" 확실한 길잡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