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의 씨Seeds of Contemplation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오늘의 지평
왜 그리스도인인가?
사람이면, 참으로 사람이면 그만이지
어째서 또 그리스도인이라야 하는가?
그리스도인 실존은 인간 실존보다 큰가? - 한스 큉
명상瞑想의 씨
땅 위에 사는 사람 사람의 순간 순간, 사사건건은
반드시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을 심는다.
바람이 보이는 것, 안 보이는 것, 수많은 솜털 달린 씨들을
옮겨가듯이, 시간의 흐름은 남몰래 사람의 정신과
의지에 파고드는 영신靈神 생명의 씨를 가져온다.
... 이런 씨는 자유와 열망의 기름진 땅이 아니면 싹틀 수가 없다.
모든 쾌락의 옥수獄囚가 되어 버린 정신, 모든 욕망의 포로가 되어버린 의지는 보다 고상한 희열,
초자연적인 열망의 씨를 받아 심을 수 없다.
내가 가장 힘쓸 바는 쾌락이나 성공, 생명이나 건강,
돈이나 휴식을 취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고통이나 실패, 죽음 병 따위도 아니다.
무슨 일이 있든지, 내 오직 하나의 열망, 하나의 기쁨은
이를 아는 것이니
곧, “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이것을 원하신다.
나는 여기서 임의 사랑을 발견하고, 이 뜻을 받아들임으로써만
나를 임께 드리고 당신 사랑을 돌려 드릴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임이 뜻하신 바 명상의 단계에까지 자라나니,
이 곧 다름 아닌 영생이다.”
만물은 신성하다.
성인의 눈은 모든 아름다움을 거룩케 하며,
그 손이 미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친다.
성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노하지 아니하고,
또한 죄를 모르기 때문에 남의 죄를 판단하지 아니하고,
성인이 아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뿐이며,
그가 세상에 살아 있음은 오직 이를 만인에게 베풀기 위함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에 합일되어 있으면
우리는 임 안에 모든 것을 소유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합일되어 있으면
우리는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임께 바쳐 드린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우리 것이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또한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피조물 안에서 발견하는 충족은
피조물被造物의 실재實在에 속하는 것-
이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느님을 반영한다.
그 안에 있는 고민은 우리 욕망의 무질서에 속하는 것-
우리 욕망이 그 대상에서 항상 실제로 있는 것보다
더 큰 실재를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 욕망은 언제나 어떤 피조물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충족을 찾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물을 통하여 하느님을 섬기려 하지 않고,
항상 피조물을 이용하여 우리 스스로를 섬기려한다.
자기가 되어야만
내가 성인이 되는 길은 나 자신이 되는 것이므로,
내 성덕이나 구원의 문제는, 곧 나를 발견하느냐 못하느냐,
참된 나를 찾느냐 못 찾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 모두는 환상적인 인격, 즉 거짓 나로 그늘져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만,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 대하여 조금도 아시는 바 없으므로,
그런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내가 내가되는 비밀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속에 파묻혀 있다.
내가 내가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은,
내 존재 이유와 내 존재의 충족이 파묻혀 있는
임과 같아지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내 전존재와 평화와 행복이 달려 있는 문제는
하느님을 발견함으로써, 나를 발 견하는 것 하나뿐이다.
나 만일 임을 찾기만 하면 나를 또한 찾을 것이요,
참된 나를 찾기만 하면 임을 찾게 될 것이다.
나를 가르쳐 임을 찾을 수 있게 하실 이는 홀로 내 임,
내 하느님뿐이다.
기도로 자기를 발견하라
그러므로 하느님을 완전히 찾는다함은,
곧 환상과 쾌락, 세속적 근심과 욕망,
하느님 원치 않으시는 일과
사람만을 자랑하는 영광에서 퇴각하는 것,
내 자유가 임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정신의 분산을 극복하는 것,
내 마음의 침묵을 즐기고,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피조물의 개념과 영상에서 우리 지능을 해방시켜,
신앙으로 은밀히 하느님과 접촉하는 것,
겸손에 머무르고, 남과의 투쟁과 경쟁에서 물러나와
평화를 발견하는 것, 쟁의를 피하고,
판단과 비평의 짐을 벗어버리고,
말할 의무가 없는 참견을 삼가는 것,
내 의지를 꺾고, 영혼의 힘을 기울여,
내 안에 깊이 들어가 조용히 하느님의 임하심을 기다리는 것,
내가 임께 매달려 있는 점에다
조용히 하느님의 임하심을 기다리는 것,
내 전부, 내가 가진 모든 것, 내가 당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신뢰와, 맹목적 신앙과, 완전한 사랑으로
모두 임의 뜻에 바쳐드리는 것.
그리고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내 마음을 비워 놓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
“ 가만히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림이 좋은 이 이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다.
내가 되려면, 지금까지 되려고 생각해 온 것을 단념해야 한다.
참된 나를 발견하려면
나를 떠나야 한다. 살고 싶으면 떠나야 한다.
그 이유는 내가 이기심 중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내가 보다 참되고 내가 되려는 자연적 노력은 도리어 거짓되고,
나와 멀어지게 할 따름이다.
이는 내 노력이 거짓을 감싸고돌기 때문이다.
나를 찾되, 하느님 안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서도 나의 모습을 찾아내야 한다.
그대가 일부러 고독의 생활을 택한다면,
이것이 그대가 하느님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데도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그대의 입장을 정당화 할 수 있다.
그대는 광야로 가되 다른 사람들을 피하기 위하여 하지 말고,
하느님한테서 그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하라.
내적 고독이 없으면 참 고독은 없다.
다른 사람들과 참된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에게는
내적 고독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재능이나 덕행이 뛰어나고 많은 은총을 받아서
이것이 남과 분리시켜
그들 위에 놓이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없다.
가장 큰 자유는 겸손에 있다.
그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를 두둔하는 한,
그대는 마음의 평화를 잃을 것이다.
그대가 그림자를 다른 사람들의 그림자와
비교하기만 하기 시작했을 뿐더러,
존재치 않는 것에는 기쁨이란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대는 스스로를 옹호하기 위하여 남의 행동에서
죄와 허물을 낱낱이 캐내기 시작할 것이다.
완전한 기쁨은 스스로를 완전히 잊어버렸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욕을 다 버리고, 별안간 잠을 깨어보면
하느님의 기쁨이 사방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자기네의 덕과 선으로 일찍이 맛보지 못한 기쁨을
다른 사람의 덕과 선에서 발견하고 용약할 것이다.
그는 같이 사는 사람들의 영혼이
하느님을 반영하는 황홀한 빛에 어리둥절하여,
이웃에서 보는 어떠한 허물이라도 단죄함을 잃고 만다.
그들은 가장 큰 죄인한테서도 남이 찿아낼 수 없는 덕과 선을 본다.
그들로 말하면 자신을 남과 비교하려 들지 않는다.
비교란 이제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그들은 마침내 자기네가 보잘것없음을 의당히 여기고
자신에 대하여 조금도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있는 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의 모상模像대로 만들어졌다 함은,
사랑은 내 존재 이유라 함과 같으니,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참 나다. 사랑은 나의 참 성격이다.
사랑은 내 이름이다. 내 욕심을 차리지 않는 것이 참 나다.
사랑을 발견하려면 하느님의 본질인 성소聖所,
사랑이 감추인 그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고 좇아갈 수 있는 모든 길을
기꺼이 버리는 길밖에 없다.
고독
우리가 고독을 찾는 것은,
그것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자라나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광야로 가는 것은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하나의 목적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참 고독은 그대 밖에 있는 무엇도 아니요,
그대 주위에 사람이나 소리가 없음도 아니요,
다만 그대의 영혼 가운데 열려 있는 심연이다.
이 내적 고독의 심연은
어떠한 피조물로도 만족될 수 없는 굶주림으로 조성된다.
고독을 찾는 단 하나의 길은 굶주림이요,
목마름이요, 슬픔이요, 가난이요, 열망이다.
고독을 찾은 사람은 마치 죽음이 휩쓴 공허와 같이 텅 비어 있다.
성실
겸손은
단순히 겉모양이나 의견, 취미, 행동하는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 속 에 있는 무엇이다.
그는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무익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이 성인이 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자기를 망칠 수 있음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은 깊은 정신적 세련과 평화스러운 마음,
그리고 건전한 윤리의 터전이 되는 묘기와 상식을 동반한다.
가장 큰 겸손은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고심에서 습득할 수 있다.
곧 그대가 되려고 계속 노력을 하되 함부로 날뛰지 말고
다른 사람의 거짓인격을 거슬러
그대의 거짓인격을 내세우지 않음이다.
성인의 첫째 표지 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옳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실상 그가 미친 것인지 교만한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시인은 창조하기 위하여 자기 안으로 들어간다.
명상가는 창조되기 위하여 하느님 안으로 들어간다.
해처럼 빼어나신
그분의 성덕이 대단히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도 만일 그분이 감추어진 하느님 안에 감추어진다면
그분을 찾아볼 수 있다.
그분과 같이 겸손하고 감추어지고 가난하고 숨어 있고
고독하게 사는 것이 그분을 알기에 가장 좋은 길이다.
그분의 성덕은 침묵이다. 이 침묵에서만 그리스도를 들을 수 있고, 마리아의 명상을 통하여 하느님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체험으로 나타난다.
지금 살아야 하는 세상에 살면서
누가 갑자기 세상에 열중하는 흥미를 잃어버리고,
자기 영혼 속에 꿈틀거리는 가난과 고독에의 요구를 발견하였다면, 이는 놀라운 은혜요 커다란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자연이나 초자연의 선물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은
사람의 눈에서 사라져 감추이기를 원하 는 것,
세상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김을 받고
자의식적自意識的 생각을 벗어버리고
그지없는 가난으로 無로 화해 버리기를 원하는 것이니,
이는 곧 다름 아닌 하느님의 숭경崇敬 이다.
이 절대적 공허空虛,
이 가난, 이 어둠은 하느님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스스로 모든 기쁨의 비결을 지니고 있다.
이 空虛를 찾는 것이 하느님의 어머니께 대한 참된 효성이다.
이를 찾으면 곧 어머니를 찾은 것이다
실망과 겸손
실망은 더할 나위 없는 자애自愛의 극치다.
사람이 ‘ 나를 잃어버렸노라.’ 라는 썩은 가치를 맛보기 위하여
일부러 다른 사람의 도움에다 등을 돌릴 때에 실망에 이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뜻한 바가 무너져 버리면
곧 무성한 자책自責의 잡초와 꽃을 키우는 교만 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보이지 않는 실망의 뿌리가 묻혀 있다.
그러나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실망할 수 없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자책이란게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만일 겸손할 수 없으면 기쁨을 누릴 수도 없으니,
이는 기쁨을 불가능하게 하는 자기중심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겸손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대한 신비적 사랑의 기쁨은
교만의 자취를 깡그리 지워버리고 나서
모든 이기심의 껍질을 벗었을 때 솟아난다.
높아지기를 바라지말고 낮아지기를 원하라.
그대와 세상의 눈에 크게 보이기보다는 작게 보이기를 원하라.
그 기쁨으로 들어가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임의 위대함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길은
그대의 어쩔 수 없는 모자람의 바늘귀를 뚫고 지나가는 것이다.
겸손한 사람이면 칭찬으로 설레지 않는다.
그는 이미 자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좋은 바탕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기 때문에
칭찬을 마다하지도 않는다.
칭찬은 그가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것이므로,
그는 이를 받음으로써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머물러 두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기쁘게 하느님께 돌려드린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칭찬을 받아들이는 꼴이 매우 치사스럽다.
그대가 참으로 겸손하다면
그대를 가지고 조금도 괴로워할 것이 없다.
그럴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대가 마음 쓸 바는 오로지 하느님과 임의 뜻,
사물의 객관적 질서와 그대의 이기심이
어떠하기를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보는 것이다.
그리하면 그대가 두둔해야할 환상은 아주 없어질 것이다.
그대의 움직임은 자유로워 질 것이다.
겸손한 사람은 실패할 까봐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것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도 도무지 걱정하지 않는다.
완전한 겸손은 하느님의 힘을 완전히 믿는데 있기 때문이다.
렌즈를 통하여
명상에 이르는 정상적인 길은
임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하여 깊이 생각한 후에 생기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다.
이 삶, 이 기쁨을 얻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그대가 할 일은 믿을 것, 사랑할 것밖에 없다.
복종에서 자유로
고독 속에서 거룩해지는 사람은 퍽 드물다.
아주 혼자서 완전해 지는 사람은 썩 드물다.
남과 같이 살면서 그들의 약함과 모자람을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버리기를 배우는 것이 참된 명상가가 되는데 도움이 된다.
그대가 다스릴 수 없는 것들을
모두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맡겨드리는 것,
그대가 마음 먹기에 달린 것에는
하느님께 완전히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안으로의 삶에 있어서나
밖으로의 하느님을 위한 일에 있어서나 언제든지 어디 서든지
하느님의 뜻을 채워 드리려는 한 가지 생각만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만 하면 그대는 기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평화를 나눌 것이며,
사람들은 그대가 하는 일의 순박함에서
그대의 평화스런 마음을 알아보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것이다.
자유
가장 간단한 자유의 정의定義는 ;
하느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초탈超脫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이 스무 명이나 될는지 의심스럽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한데 모아 쥐고
제멋대로 떨어져 나가려는 우주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 이다.
마음의 평화의 비결은 초탈이다.
극기克己
가장 확실한 고행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 겪는
절박한 불안과 수고와 보잘것 없음이다.
다른 사람에게 아주 매이는 것,
몰라 보이고 경멸받고 망각되는 것,
아무런 체면이나 안락 도 모르는 것,
쓰레기 속에 살고 나쁜 음식을 먹는 것,
명령을 받고 몇 푼도 바라지 않고 일하는 것,
그것은 어려운 학교다.
아주 심신 깊은 사람들이 피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어려운 학교다.
할 수 있는 대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마음을 쓰지 말고,
그들의 자연적 허물이나 괴상한 버릇에는 조금도 맘쓰지 말아라.
모든 성덕이 달려있는 열쇠는 끊어 버림이요 초탈이요 극기다.
의식적이며 드러나는 악습을 쳐부수는 데는
계획적 결심과 고행의 전력이 가장 좋은 길이다.
내적 빈곤
그대의 본성은 여지껏 이기심과 죄의 무질서로 해서
왜곡歪曲되고 훼손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그대를 자신의 쾌락과 흥미에로
돌아서게 하는 생활방식으로 말미암아
그대는 바짝 죄고 비틀려 있으며,
그대는 이 왜곡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그대의 슬픔은 어떠하겠는가?
이는 성인들의 가책 - 어쩔 수 없이 그대가 의도하지 않은 바
그런 사림이 되어야 한다는 고민과 슬픔 -
이라 부르던 것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이 어쩔 수 없는 지경에서
우리의 기쁨이 비롯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만히 머물기만 하면 고통이란 그다지 나쁜 것도 아니며,
우리가 ‘혹시라도 희망이 있을 까’하여 녹초가 된 채
얼굴을 땅에 처박고 엎드려져 있을 적에 우리 곁에 있어주는 어떤 동료, 어떤 힘, 어떤 富, 어떤 평화까지라도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평화가 우리 영혼에 자리잡고
우리는 ‘우리인 바’와 ‘우리 아닌바’를 불평 없이 받아들일 때면,
이 알뜰한 가난은 커다란 행운임을 깨닫게 된다.
본래 우리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혼란밖에는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그 富를 모조리 벗어 던지고 나서,
비록 좋고 可할 지라도 우리의 참된 목적과 행복에
조금도 이바지할 수 없는 것들을 탐하고 알고파 하는 행위에
침묵을 명하고 가만히 있을 때면
우리의 목숨의 뜻은 오로지 가난이요 허무 임을 알게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가난, 이 허무가 좌절이기는 커녕
참으로 커다란 초자연적 선물의 약속이며,
가난과 허무야말로 이 큰 은혜를 받아 담을 수 있는 그릇임을
깨닫는다.
우리가 한번 이 허무를 발견하고 나면,
아무리 속속들이 알뜰한 가난이라도
우리의 욕망에 비추어 아직 넉넉지 못하며,
아무리 빈 허무라 해도 아직 우리의 욕망의 잔재가 남아 있으며,
아무리 순박한 겸손도 우리 욕망에 비해 아직 모자란다.
허무로 길러지고, 가난을 간직하고,
단순한 복종으로 모든 슬픔을 벗어 던진 명상가는
만사萬事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용기와 기쁨을 길어 낸다.
그래서, 임의 침묵과 어둠에 가만히 머무는 것이
하느님께 큰 찬미가 된다.
명상한 바를 남에게 전하기
우리가 명상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이 아니다.
- 사랑으로 임을 ‘안다’.
우리의 정신과 의지가 모든 피조물에 대한 집착에서
완전히 해방되기만 하면,
이내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로 완전히 채워지기 때문이다.
그렇게되는 것이 임의 뜻이며,
임이 우리 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 성취를 위한 지나친 광분狂奔은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어디나 계시면서 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을 열어 보이시려 기다리 심을
체험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쉬이 안온과 확실하고 무한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 소유를
버리고, 불확실한 인간적 활동의 가치를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순수한 사랑
여기 이미 죽어서 묻혀 없어지고
그의 기억마저 세상사람들의 뇌리腦裏에서 사라져간,
그리고 시간 안에 우글대는
생명 중에 존재하지 않는 한 사람이 있다하자.
순수한 명상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로 사라진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다.
하느님 홀로 남아 계시다.
임은 거기서 행동하는 본체本體시다.
사랑하고 알고 기뻐하시는 이, 임 혼자 뿐이시다.
하느님께서 교만하실 수 있으랴? 아니면, 죄 지을 수 있으랴?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하느님의 천막인 까닭에 세상의 힘이다.
그들은 파멸하려는 우주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작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모른다. 온 땅은 그들에게 달려 있다.
그런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모든 것이 창조됨은 그들을 위함이었다.
그들은 나라를 상속하리라.
그들만이 삶을 전적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온 세계를 끊어 버렸기에,
온 세계는 그들의 소유로 주어졌다.
그들만이 세계와 그 안에 담긴 것을 맛볼 줄 안다.
1. 나를 정결하게 하면 신에 다가갈 수 있을까?
"우리가 [부정적으로 간주하는 어떤] 사물로부터
우리 자신을 떼어낸다는 것은 '사물'과 '신' 사이에
모순관계를 설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마치 신도 하나의 '사물'이고,
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이 신의 경쟁자인 것 마냥 들립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에게 밀착시키기 위하여 사물로부터
우리 자신을 떼어내는 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우리는 신 안에서,
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보고 활용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내게 되는 것이랍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시각으로,
진실로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처참하게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이 창조한 그 무엇에도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분의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2. 내 밖의 악을 물리침으로써 신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신께서 주신 좋은 것들을 마치 악한 것처럼 취급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세상 사물과 타락한 관계를 맺게 되는 상황]으로부터 탈피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단지 형편없는 환상 속에 자신들을 가두고 있을 뿐입니다. 이 사람들은 마치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이브 탓을
하는 것과 또 이브가 뱀 탓을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여자가 저를 유혹했습니다. 술이 저를 유혹했습니다. 음식이 저를 유혹했습니다. 여자는 간악합니다, 술은 독약입니다, 음식은 죽음입니다. 저는 그것들을 혐오하고 욕합니다. 그것들을 혐오함으로써 신을 기쁘게 해드릴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아기의 생각과 태도입니다.
야만인의 생각과 태도이기도 합니다. 또, 자신의 이기적인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요술의 주문과 마법을 갈구하고 자기 마음 속의 만족할 줄 모르는 쬐그만 신을 달래려고 하는 우상숭배자의 생각과 태도입니다. 신을 위하여 그러한 우상을 세우는 것은 최악의 종류의 자기 기만입니다. 그런 것은 사람을 광신으로 빠지게 하여,
더 이상 진리와 지속적인 접촉을 할 수 없게 만들고, 더 이상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들의 이고(ego)를 어떤 성스러운 것으로 믿으려 하며 이 광신자들은 그외의 모든 것들을 부정한 것으로 갖주해버립니다.
성인과 위대한 명상가들이 피조물들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고,
눈앞에 드러나고 귀에 들리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해해주지도, 즐기지도 않았다는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분들은 모든 것과 모든 이들을 사랑했습니다....
[모든 종류의 즐거움을 부정하는] 그런 도덕성은 사실 죄의식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이 아닌지 때론 의심이 드는군요!
이 사람들은 성인(聖人)의 일생이란 끝없이 죄의식과 투쟁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인은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시면서도 자신의 갈증을 해소하는 죄에 대하여 뉘우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그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용서받지 못할 죄라도 되는 듯이. 마치 아름다움과 선함과 기분 좋은 것에 대한
어떤 반응도 성인에게는 죄가 되기나 하는 듯이. 마치 성인은 기도와 내면적인 경건한 행동 이외의 어떤 것에도 즐거워 하도록 스스로를 허락해서는 절대로 안되기라도 하는 듯이....
성인은 이 세상과 신이 만드신 모든 것이 좋은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인이 아닌 사람들은 피조물들이 성스럽지 못하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에 대하여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성인의 눈은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성스럽게 만들고, 성인의 손길은 그것이 닿는 모든 것들을 신의 은총으로 신성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성인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감정이 거슬리지 않고 어떤 이의 죄도 심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는 신의 자비를 알 뿐입니다. 그는 지상에서의 자신의 임무가 그 자비를 모든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3.신의 축복인 나의 개성
"똑같은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각 피조물의 개성은
불완전함이 아니다. 오히려, 각 피조물의 완전함이란 단순히 어떤 추상적 형태와의 일치에 있지 않고, 스스로의 개인적 성격을 찾음에 있다. 한 그루의 나무는 이 세상의 어떤 다른 나무도 여직껏 그랬던 적이 없고, 또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방식으로 자신의 뿌리를 땅에 뻗고, 자신의 가지를 창공과 빛에게로 들어올리고, 그리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됨을 보여준다."
4. 신과 함께 찾는 나의 본질
"우리의 직무는 단순히 '있음'에 있지 않고 하느님과 함께 힘써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본질과 우리의 숙명을 창조해내는 데 있다.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이고 하느님의 자식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우리가 수동적으로 존재해서는 안되고, 우리가 진리를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의 창조적인 자유와 우리 자신의 삶과 다른 이들의 삶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잘 표현해보자면,
우리는 우리의 본질의 진실을 창조해내는 작업마저도 하느님과
함께 하도록 소명받았다는 말이다. 우리는 가식의 행동으로 이 책임을 모면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회피를 유쾌하게 받아들이기까지 하는데, 그것은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때로는 자유롭고 창의로운 삶의 방식인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사는 건 참 쉽고, 누구에게나 기분좋은 방식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종국에 이르러서는 그 대가와 상심은 매우 크다. 하느님 안의 우리 본질을 일깨워내는 것을 바이블에서는 "우리의 구원을 일구어내는 것"이라 하는데, 이는 희생과 고뇌와 위험과 많은 눈물을 요구하는 노고이다. 이는 매 순간의 현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과, 하느님께서 매번의 새로운 상황이 가지고 있는 신비에 희미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에 하느님께 지극히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매 순간 나의 자유 속에 심어지는 씨들은 나 자신의 본질과, 나 자신의 현실과, 나 자신의 행복과, 나 자신의 신성함의 씨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의 존재와 내가 있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나의 본질과 바로 나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 것은 나의 존재의 완전함을 거부하는 것이다.
... 하느님을 찾도록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다."
5. 신이 주체가 되는 구도(求道)
"하느님을 찾기"는 단순히,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나 욕망 등을 없애 버리는 따위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이다.
만일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모든 생각과 욕망을 없애 버리는 데
성공한다면, 어쩌면 정말로 자신의 중심으로 깊숙이 들어가 앉아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샘솟아나는 자신의 생명이 있는 그 상상의 지점에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정말로 하느님을 찾은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허용된 어떤 행위를 통해서도 당신이 하느님과 접촉할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 당신이라는 존재의 내면에 하느님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는 한, 당신의 영혼의 중심에 그분의 이름을 말해주시지 않는 한, 당신은 하느님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마치 돌이 관성의 힘으로
자신이 버티고 서있는 땅을 알 수는 없듯이.
우리가 하느님을 발견한다는 것은, 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발견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을 찾기 위해서 천국으로
갈 수 없는데, 그것은, 천국이 어딘지, 천국이 무언지 우리로선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천국에서 내려오시어 우리를 찾으신다. 그분께서는, 어디에나 있는 그분 자신의 무한한 실재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우리를 바라보시고, 그분이 우리를 바라보심으로 인해서 우리 역시 그분을 발견하는 새로운 존재함과 새로운 정신을 부여받게 된다. 우리는 오직 그분께서 우리를 아시는 한에서만 그분을 알고, 우리가 그분을 명상하는 것은 그분께서 자신을 명상하는 것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의 하느님 자신을 발견하실 때에
우리는 명상가가 된다.
... 하느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 안에서 자신을 아신다는 것은 진실이다. 하느님께서는 그것들을 보신다, 그리고 그분께서 그것들을 봄으로 인해서 그것들은 존재한다. 그분께서 그것들을 사랑하심으로 인해서 그것들은 선하다. 그것들을 그분께서 사랑하심이 그것들의 본질적인 선함이다. 그분께서 그것들에게서 보시는 가치가 바로 그것들의 가치이다. 그분께서 그것들을 보시고 사랑하시는 한, 모든 것들은 하느님 그분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 하느님께서 자신의 지식과 자신에 대한 사랑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게 해준 그 사람들만이 하느님을 인식하고 하느님을 사랑한다."
6. 진짜 나, 가짜 나
우리 안의 신의 특별한 거(居)하심이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과 일치하게 된다. 그 때부터는 우리의 삶이 다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의 연속이 되어버린다: 첫째, 우리가 열정과 탐욕의 환상으로 키우고 있는 가짜 나의 허구; 둘째, 순수하게 베풀어질 따름인 신의 자비에 사랑으로 순종하는 것 ....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왕국이고, 그 왕국의 도래를 위하여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할 때마다 우리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자비와 장엄이 드러나는 한 복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밀한 비밀인 우리의 참된 정체에 관한 흐릿한 직관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내면에 살고 있는 신인(神人; Divine Persons)에게 "네!"라고 말할 때, 순간적인 섬광과 함께 인정하는 순간,
우리의 내면의 자아가 깨어난다. 오직 신의 영광을 우리 안에 "받아들일 것"에 완전히 동의하는 때에 우리는 단지 진짜 우리일 뿐이다. 우리의 진짜 자아는, 그렇다면 신께서 자식들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인 사명을 자유롭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자아이다.
다른 어떤 "자아"도 단지 환상일 뿐이다.
7. 성스럽고도 특별한 나
'나는 당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나는 당신이 되지 못한 존재이다.
나는 당신이 얻는데 실패한 것을 얻었으며
당신이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손에 넣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고통받고 나는 행복하며, 당신은 경멸을 받고
나는 찬양을 받으며, 당신은 죽고 나는 산다;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며 나는 중요한 사람이고,
당신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중요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나는 당신과 나 사이의 그 간극을 찬미하며 내 생을 보낸다; 때로는 이 때문에,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고,
내가 너무 느려서 얻지 못한 것을 얻었으며, 내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것을 손에 넣었고, 나로서는 받을 수 없는 찬양을 받고 있으며, 내가 죽은 후에 살아 있을 그런 사람들을 잊기도 한다...'
이러한 분리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은 죽음 속에 살고 있다.
그는 스스로 길을 잃었기에 자신을 찾지 못한다;
그는 현실로 존재하기를 멈추어버렸다.
그가 자신일 것이라고 믿는 바로 그 사람은 악몽이다.
그리고 그는 죽고 나서, 자신이 오래 전에 존재하는 것을 멈췄음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한한 현존이시며 당신의 시야가 모든 것의 존재함이신 신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므로: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
지금 나는 영적인 오만이라는 병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다.
나는, 성자들의 마음속에 파고들어서는 그들의 성스러움이 성숙해지기 전에 그 성스러움을 갉아먹어 버리는 특이한 비현실성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다. 모든 종교적인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이 벌레의 조각이 들어있다 ...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 만의 분위기를 향유하고자 하는 그 비밀스러운 욕망으로부터 누가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 이 세상 죄인들의 그저그런 삶과 뚜렷이 구분되어지는 그 달콤한 묘미를 구하지 않고서 그 누가 선행을 할 수 있겠는가?
이 병은, 마치 겸허인 듯이 보이는 것에 성공할 때에 가장 위험하다. 오만한 자가 스스로는 겸손하다고 생각할 때, 그건 정말 가망없는 일이다.
여기, 자신의 육신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많은 일을 해낸 사람이
한 명 있다. 그는 수난을 겪었고 많은 일을 했으며, 신의 은총 덕에, 굳건함과 자신을 희생하는 습관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마침내 그런 와중에 노고와 고통이 그에게는 쉬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의 양심이 평화로우리라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깨닫기도 전에, 신과 합체되어 있는 깨끗한 평화의 의지가 스스로의 뛰어남을 사랑하는 의지라는 자기만족이 되어버린다.
그가 어려운 일을 하고 그런 일들을 함에 있어서 성공할 때 그의 마음 안에 있는 쾌락이 그에게 은밀하게 말한다: "나는 성자야." 동시에 다른 이들은 그를 자신들과는 다르다고 인정하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그를 칭송하고, 아니 어쩌면 그를 피한다 - 죄인들이 바치는 달콤한 경의! 쾌락은 집어삼킬 듯한 불길이 되어 타오른다.
그 불길의 따사로움은 신의 사랑과 매우 비슷하다. 그 불길은 바로 자비의 불길을 지폈던 것과 동일한 미덕으로 인하여 힘을 얻는다. 그는 자아 찬양으로 불타오르며 이렇게 생각한다: "이건 신의 사랑의 불길이다."
그는 자신의 오만이 성령이라고 생각한다.
그 쾌락이 주는 달콤한 따스함이 그가 하는 모든 일의 척도가 되어버린다. 스스로 보기에 칭송할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행위들 속에서 그가 향유하는 그 풍미 때문에, 그는 금식하고, 또는 기도하고, 또는 홀로 은거하고, 또는 많은 책을 저술하고, 또는 교회당이나
병원을 짓고, 또는 수천의 조직을 새로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나면 그는 자신이 느끼는 만족감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쾌락의 은밀한 목소리가 그의 마음에서 노래한다: "Non sum sicut caeteri homines" (나는 다른 인간들과 같지 않다.)
일단 그가 이 길로 나서게 되고나면, 자기만족 때문에 그가 신과
신의 사랑과 신의 영광의 이름 하에 저지르는 악행에는 한이 없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 너무도 만족한 나머지 이제는 아예 남의 충고를 - 또는 상급자의 명령을 참지 못한다. 누군가가 그의 욕구에 반대하면, 그는 자신의 손을 겸허하게 포개며 잠시 그것을 받아들이는 듯이 보이나, 그의 마음 속에선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세속의 인간들에게 박해받고 있다. 저들은 성령에 이끌리고 있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성자들에게는 이런 것이 늘상 겪는 일이다."
순교자가 된 지금, 그는 그 전보다 열배는 더 완고해졌다.
그런 자가, 자신이 예언자라든가, 신의 사자라든가, 아니면 이 세상을 개혁할 사명을 부여받은 자라든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는 종교를 파괴할 수도 있고,
신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재수없게 들리도록 만들 수도 있다.
나는 나의 실체를 어떻게든지 해서 신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안에서도 찾아야만 한다.
만약 내가 특별한 존재인 것 처럼 다른 인간들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면 나는 결코 나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이다.
8. 진정한 고독
전체가 무형의 얼굴 없는 군중 속으로 날이 갈수록 개인을 삼켜버리고 있는 오늘날, [진정한 고독에 대한 욕구는] 한층 더 절실하다. 오늘 날 우리가 범할 수 있는 과오는, "사랑"을 "추종" 즉, 군중의
정신이나 조직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것과 동일시 하는 데 있다 ....
진정한 고독은 한 사람의 보금자리이고,
거짓 고독은 개인주의자의 도피처이다 ....
육체적 고독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현대인의 가장 큰 유혹은 육체적 고독이 아니라 타인들로 이루어진 군중 속에 파묻히는 것이고, 산속이나 사막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이런 데 유혹되는 이가 더 많을 리도 없쟎은가!)
군중이라는 무책임의 거대한 무형의 바다로 도망가는 것이다 ....
다른 이들 속에서 단순히 살아간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이들과
교감을 이루고 살거나 의사소통을 하며 살 것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군중 속의 인간만큼이나 의사소통할 것이 없는 이가 어디에 또 있는가? 대체로, 할 말이 가장 많은 이는 고독한 사람이다; 그가 말을 많이 한다기 보다는, 그가 하는 말이 새롭고, 내용이
있으며, 개성이 있다는 점에서. 그건 그 자신의 말이다. 비록 그는 아주 조금만 말을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는 자신만의 개인적인 그 무엇, 타인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 그는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진짜인 것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그 자신이 진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진정한 의사소통 없이 함께 모여서 살고 있을 때, 그곳에 마치 커다란 나눔이 있고 좀 더 진정한 교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교감이 아니고, 끝없이 되풀이 되어서 종국에는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내며 생각도 없이 반응하게 되는
수많은 무의미한 구호와 구태의연한 말들 속에 빠져들어가는 것일 뿐이다.
자신의 뛰어남을 스스로 찬양하는 자의 자기도취는 물론 나쁘지만, 스스로 존중해줄 피상적인 자아조차도 없어서 자기존중의 마음이 아예 없는 자의 자기도취에 비하면 차라리 나은 편이라고 하겠다. 후자는 사람이 아니고, 개인도 아니고, 그저 원자핵일 뿐이다.
이렇게 원자핵과 같이 되어버린 존재함이 때로는 겸허나 자기 희생으로 찬미되기도 하고, 아니면 복종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계급 투쟁의 변증법에 대한 헌신이 되기도 한다. 그러한
존재함은 일종의 평화를 만들어 주는데, 실은 이것이 평화가 아니라 단지 눈앞에 닥친 투쟁에 대한 예감으로부터의 즉각적인 탈피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것은 사랑의 평화가 아니라 마취의 평화이다. 그것은 자아실현과 자기헌신의 평화가 아니라 무책임으로의 도피이다.
내면의 고독 이외에 진정한 고독은 없다. 그리고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자신의 올바른 위치를 수용하지 않는 어떤 이에게도 내면의 고독은 깃들지 않는다. 어떤 재능이나 은총이나 덕망이 우연하게도 찾아와 자신을 다른 이들로부터 분리시켜 그들 위에 군림하게 해줄 것이라고 아직도 상상하고 있는 사람에게 진정한 평화란 깃들지 않는다. 고독은 분리가 아니다.
9. 성자의 특성
성자(聖者)들이 훌륭한 이유는, 그들이 성스러워서 사람들의 찬미를 받기 때문이 아니라, 성자로서 받게 되는 은총의 힘으로 그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찬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자는 그 은총의 힘으로, 가장 추악한 범죄자 안에서도 선함을 발견할 수 있는 분명한 애정을 갖게 된다. 성자는 그 은총의 힘으로, 타인을 심판하고 비난하는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성자는 그 은총의 힘으로, 애정과 자비와 용서를 통하여 타인들에게서 선함을 끄집어내는 방법을 배운다. 어떤 이가 성자가 되는 것은, 그가 죄인들보다 더 낫다는 확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죄인들 중의 한 사람이고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음에 의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