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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자기신뢰 Self Reliance/랠프 월도 에머슨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1.26|조회수103 목록 댓글 1

자기신뢰(신의 말이 몸을 얻은것이 인간이다)

"너를 자기 밖에서 구하지 말라."

 

어린 것을 바위에 던져라.

늑대의 젖꼭지를 빨게 하고

매와 여우와 더불어 겨울을 나게 하라.

힘과 속도가 그의 손이 되고 발이 되리라.

 

내안에

모든 자연의 법칙이 들어 있다.

내 안에 전체 이성이 잠들어 있다.

그 모든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일이다.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자신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진실로

받아들이리라 믿는 것.

이것이야말로 비범한 재능이다.

 

존재에 증명은 필요 없다.

 

정말로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나 영적인 삶에서나

똑같이 어렵다.

그러나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을 구분하는

훌륭한 기준이 되어준다.

 

시인이나 현자가 보여주는

천상의 빛을 찾는 대신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야한다.

 

우리안의 반짝이는 불빛들을

알라보고 관찰할 줄 알아야 한다.

 

1장. 당신 자신을 믿어라.

얼마 전에 나는 저명한 화가가 쓴 몇 편의 시를 읽었다.

인습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시였다.

주제가 무엇이든, 그런 시는 인간의 영혼에 반드시

어떤 가르침을 준다.

시를 읽을 때 마음에 스며드는 감정은 그 시에 담긴 어떤 사상보다 더 많은 가치가 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자기 마음속에서 진실인 것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진실이라고 믿는것, 그것이 천재(天才)다.

 

마음속에 숨어 있는 확신을 소리 내어 말하라.

그러면 그것이 보편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때가 되면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에 있던 것이

겉으로 드러나기에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리면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생각이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마음속 목소리를 듣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모세,플라톤,밀턴에 대해 가장 높이 평가해야 할 점은,

그들이 책과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시인이나 賢者(현자)가 보여주는 천상의 광휘가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우리 마음을 가로질러 번뜩이는 빛줄기를 찿아내고 관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자기 생각에 주목하지 않고,

오히려 그 생각이 자기 것이라는 이유로 밀쳐버리고 만다.

우리는 흔히 천재의 작품을 통해 우리가 내던진 생각을 만나게

된다.

한때 우리가 품었던 그 생각들이 이제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위엄을 띠고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위대한 예술 작품들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이 이것이다.

모두들 반대편에 서서 떠들고 있을 때야말로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자기 자신의 느낌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일 어떤 사람이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나 우리가 늘 생각하고 느꼈던 것들을 그럴싸하게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자기 생각을 들어야 하는 부끄러운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질투란 무지이고 모방은 자살이다. 공부를 해 나가다 보면 이런 확신에 도달하게 되는 시점이 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나 자신 밖에 모르고,

그것도 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신은 비겁자를 통해 자신의 과업이 드러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은 온 마음으로 일에 몰두하고 최선을 다할 때

활기를 얻고 즐거워진다.

하지만 말과 행동이 그렇지 못할 때는 마음의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 것도 낳지 못하는 해산이다.

마음에 없는 일을 하게 되면 재능이 그를 버리고,

뮤즈도 그의 곁을 떠난다. 창조도 희망도 사라진다.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 자기를 신뢰하는 강한 현을 갖게 되면 모든 사람의 마음이 거기에 맞춰 울릴 것이다.

미성년자나 환자처럼 누군가에게 보호받거나,

혁명 앞에서 도망치는 비겁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길잡이로서, 구원자로서, 은혜를 베푸는 자로서,

전능한 힘에 복종하며 혼돈과 어둠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젊은이가 쩔쩔매며 할 말을 제대로 못한다고 해서 무력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귀를 기울여 보라.

또래를 만나면 어떻게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지 아는 듯하다.

비슷한 나이의 친구를 상대할 때, 성격에 상관없이, 더 나이 많은 사람들을 쓸모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법도 터득하게 될 것이다.

 

끼니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소년들은 다른 사람을 회유하는 말과 행동을 경멸한다.

군주와 같은 태연함이야말로 인간이 천성적으로 타고난

건전한 태도이다.

 

이런 목소리들은 우리가 고요히 홀로 있을 때 들린다. 우리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 그 목소리는 희미해져 들을 수 없게 된다.

사회는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인간다움을 빼앗으려

음모를 꾸민다.

사회는 일종의 주식회사다. 그 속에서 각 주주들은 자신의 빵을

더 확실히 보장받는 대신, 그 대가로 자유와 교양을 넘겨주기로

합의한 셈이다.

거기서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은 순응이다.

자기신뢰는 혐오의 대상이다. 사회는 본질과 창조성이 아니라

명목과 습관을 사랑한다.

 

누구든 진정한 인간이 되려고 한다면 사회에 영합해서는 안 된다.

불멸의 승리를 얻으려는 사람은 善이라는 명목에 가로막히지

않고, 그것이 진정한 선인지 스스로 탐구해야 한다.

내가 아주 젊었을 때 세간의 존경을 받던 어느 조언자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교회의 낡아빠진 교리로 나를 성가시게 했다.

"내가 만일 나 자신의 내부에서 나온 명령을 전적으로 따른다면, 신성한 전통이라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하지만 그런 충동은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온 것인지도 모르지."

"정말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혹시 내가 악마의 자식이라면 나는 악마의 명령을 따르며 살겠습니다."

나에게는 내 본성에서 나온 율법 이외에는 어떤 것도

신성하지 않다. 선과 악은 단순히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하나 옳은 것은 내 본성을 따르는 것이고,

오직 하나 그른 것은 내 본성에 반하는 것이다.

모두가 반대한다고 해도,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허울 뿐이고 덧없는 것인 양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배지, 이름, 거대한 단체, 죽은 조직에

얼마나 쉽게 굴복하는지 생각해보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몸을 똑바로 세우고 씩씩하게 나아가

언제라도 무례한 진실을 말해야 한다.

악의와 허영심이 박애라는 옷을 걸치고 나타난다면

눈감아 주어야 할까?

어떤 사람이 (1834년 노예제도를 폐지한) 바베이도스 소식을

전하러 내게 왔다고 하자.

노예제도 폐지라는 그런 박애적인 임무를 띤 사람이 사실은

험악한 고집쟁이라면, 그에게 이렇게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가서 당신의 아이를 사랑하고, 당신을 위해 험한 일을 하는 사람을 사랑하세요... 멀리 있는 흑인들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온정으로 당신의 냉담하고 무자비한 야심을 치장하지 마세요.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집에서는 악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거칠고 무례한 짓이지만,

그럼에도 진실은 가식적인 사랑보다 훌륭하다.

우리가 품은 선의에는 얼마간 모가 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의 가르침이 울고 흐느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랑의 가르침에 대한 반작용으로 증오의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내 천성이 나를 부르면, 나는 부모도 아내도 형제도 멀리한다.

오늘 어떤 사람이 내게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 모두에게 좋은 상황을 가져다 주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내게 하지 마시라. 어째서 내가 그들을 떠맡아야 하는가? 나는 당신들, 어리석은 박애주의자들에게 말한다.

내게 속하지 않은 사람들, 내가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는 돈은 단돈 1센트라도 나는 아깝다.

정신적으로 절대적 친근감을 느껴 나 자신을 희생해도 좋을 만큼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나는 감옥에라도 갈 것이다.

하지만 당신들의 그 잡다하고 흔해빠진 자선사업, 바보들의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요즘 많은 사람들이 후원하는 그런 헛된

목적을 위한 공회당 건물, 주정뱅이를 위한 후원금, 수많은 구호단체들에 대해서는 다르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하자면, 나도 때때로 설득에 넘어가

그런 곳에 돈을 기부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악한 돈이다. 앞으로는 용기를 내어 그런 요구를 거절하려고 생각한다.

 

약속한 모임에 참가하지 않은 대가로 벌금을 내듯이, 사람들은 자신의 용기와 자비심을 보여 주기 위해 선행이라고 불리는 행위를 한다.

그들의 선행은 자신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실에 대해 사과하거나 정상을 참작해 달라고 해명하는 것이다.

그들의 덕이란 결국 벌금이다.

하지만 나는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고 싶다.

내 삶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 구경거리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삶은 화려하고 불안정하기보다는 수수한 것이고,

그래서 성실하고 평온한 것이다.

또한 내가 원하는 삶은 건전하고 즐거운 생활, 식이요법도 수술도 필요 없는 생활이기를 바란다.

당신이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증거는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지, 당신의 가식적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모두 내게 관계된 것이지,

다른 사람들이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아니다.

이 기준을 지키는 것은 일상생활이나 지적인 생활에서 똑같이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다.

세상에는 당신의 의무가 무엇인지 당사자인 당신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게 마련이므로 이 기준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의견을 좇아 생활하는 것은 쉽다.

혼자 있으면서 자신의 의견에 따라 살아가는 것도 쉽다.

하지만 위대한 사람은 시끄러운 군중 속에서도 온화한 태도로

혼자 있을 때와 같은 독립성을 유지한다.

 

이미 당신에게 의미 없어진 관습에 순응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당신이 가진 힘을 흩뜨려 놓기 때문이다.

인습에 순응하는 것은 당신의 시간을 빼앗고, 당신의 본성이 느낀 인상을 흐릿하게 만든다.

당신이 죽은 교회를 지지한다면, 생명력을 잃은 성서협회 같은 곳에 기부한다면, 정부를 편들거나 반대하는 거대정당에 투표한다면, 비천한 하녀처럼 식탁이나 차리고 있다면, 그런 모습을 통해서 나는 당신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또 그런 일을 하는 동안 당신은 인생에서 많은 힘을 빼앗기고

만다.

당신 자신의 일을 하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당신 자신의 일을 하라.

그러면 당신은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다.

순응이라는 유희가 얼마나 장님놀이 같은 것인지 생각해봐야만

한다.

어떤 사람이 무슨 종파에 속해 있는지 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주장을 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목사의 설교를 직접 듣지 않아도 그가 새롭고 자발적인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알지 않는가?

그가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교구 목사로서 자신에게 허용된 일면만을 바라보겠다고 스스로 서약했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저런 손수건으로 자신들의 눈을 가리고, 이런저런 여론 공동체 가운데 한 곳에 속해 있다.

그렇게 순응하는 탓에 사람들은 몇 가지 특정한 문제에 대해서만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며,

몇 가지 거짓말만 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문제에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진실은 어느 것도 완전한 진실이 아니다.

그들을 바로잡으려 해도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 순간, 인간은 자신이 속해 있는 당파의 죄수복을 입게 된다.

서로서로 얼굴과 외양을 닮아 가고, 차츰 지극히 순종적인 당나귀의 표정을 갖게 된다.

그 중에서도 인간에게 가장 치욕적인 경험은 일상생활에 언제나 등장하는 아첨하는 바보 같은 표정이다.

재미없는 대화에 끌려들어 불편한 마음으로 대답할 때 우리의

얼굴에 나타나는 억지웃음 말이다.

그럴 때면 근육이 자연스럽지 않아서 억지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기분이 아주 나빠지며 얼굴도 굳어버린다.

 

순응하지 않는 사람에게 세상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회초리를 휘두른다.

대중의 불만은 의회나 대학의 불만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다.

세상을 알고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교양 있는 계층의 분노는 쉽게 견딜 수 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의 분노는 품위 있고 조심스럽다. 그들 자신이

상처받기 쉽기 때문에 그만큼 분노도 소심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그들의 여성적인 분노에 대중의 격분이 가세할 때에는,

무지하고 가난하고, 無知蒙昧(무지몽매)한 야수같은 하층민들이 으르렁거릴 때에는 다르다.

 

인간을 자기신뢰에서 멀어지게끔 위협하는 또 다른 요인은

우리가 가진 어리석은 일관성이다.

우리는 과거에 했던 말과 행동을 지나치게 중시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걸어온 길을 평가할 수 있는 자료는 과거

우리가 했던 행동 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일관성에 집착한다.

 

그러나 왜 예전에 여기저기서 했던 말들과 모순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억이라는 시체를 질질 끌고 다녀야 하는가?

언행에 모순이 있었다고 치자.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당신의 이론에서 벗어나라.

요셉이 음탕한 여인의 손에 옷을 남긴 채 달아났듯이,

그렇게 평소 지론에서 벗어나라.

 

어리석은 일관성은 좁은 마음에서 나온 도깨비 같은 것으로,

그릇이 작은 정치가,철학자,신학자들이 숭배하는 대상이다.

일관성과 위대한 영혼은 서로 아무 관계도 없다.

일관성을 걱정하는 것은 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걱정하는 것과 같다.

오늘 당신이 생각하는 것을 단호하게 말하라.

그리고 내일은 또 내일 생각하는 것을 단호하게 말하라.

오늘 말하는 것이 어제 말한 것과 모든 면에서 모순된다 해도 괜찮다.

"아, 그러면 오해받을 텐데." 오해받는 게 그렇게 나쁜 것인가?

피타고라스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소크라테스도, 예수도, 루터도, 코페르니쿠스도, 갈릴레오도, 뉴턴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육신에 깃들었던 순수하고 현명한 정신은 모두 세상으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위대한 인물이 된다는 것은 오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2장. 만물의 중심이 되어라.

누구도 자신의 본성을 거스를 수 없다.

인간이 분출하는 모든 의지는 자신의 존재 법칙 안에 국한된다.

당신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시험하든, 그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밖에 없다.

성격이 의지보다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자신의 미덕이나 악행이 행동을 통해서만 표현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매 순간 그것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정직하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면 갖가지 다양한 행위에도 공통점이 있기 마련이다.

동일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기에 겉으로 아무리 달라 보여도 그런 행위들은 조화를 이루게 된다.

아무리 훌륭한 배라도 항해 도중에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기 때문에 지그재그 모양으로 운항하게 된다.

충분히 거리를 두고 배가 지나간 물길을 바라보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직선 형태를 나타낼 것이다.

성실하게 행동하면 그 행위는 스스로 해명될 것이고,

당신이 행한 다른 모든 성실한 행동들도 자연히 설명된다.

하지만 순응하는 행위는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독자적으로 행동하라. 당신이 예전에 독자적으로 행동했던 것들이 지금의 당신을 정당화해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라.

인격의 힘은 차곡차곡 쌓인다.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으려고 노력한다면, 결국엔 항상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순응이나 어리석은 일관성 따위의 말을 이제 더는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 대신 스파르타군의 용맹스러운 관악기 소리를 듣고 싶다.

다시는 허리를 굽히지 말고, 더는 우물거리며 사과하지 말자.

이 세상의 매끈한 평범함과 비열한 만족감에 과감히 맞서고 그것을 질책하자.

인간행동의 배후에는 반드시 원인이 된 사상가와 행위자가 있다. 참된 인간은 어떤 시대, 어떤 장소에도 속하지 않는 만물의 중심이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차이를 하찮게 만들어 버릴 정도로 거대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참된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원인이고, 국가이고, 시대이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완벽하게 성취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공간과 수학과 시간이 요구된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마치 그에게 예속된 부하처럼 그 참된 인간의 발자취를 따르게 될 것이다.

카이사르가 출현한 뒤로 로마제국이 오랫동안 영화를 누렸다.

하나의 제도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연장된 것이다.

수도원 제도는 은자 안토니의 그림자이고,

종교개혁은 루터의 그림자이다.

퀘이커교는 조지 폭스. 감리교는 존 웨슬리, 노예제도 폐지는

토머스 클락슨의 그림자이다.

모든 역사는 몇몇 용감하고 열정적인 인물의 전기로 간단하게

환원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깃들어 있는 힘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나 자신밖에 모르고,

그것도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내가 훌륭하다고 인정 받는 일을 한다 해도,

또는 그것을 피한다 해도,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타고난 재능이 거의 없고,

설령 있더라도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나는 확실히 나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모두 내게 관계 된 것이지,

다른 사람들이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아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의견을 쫓아 생활하는 것은 쉽다.

혼자 있으면서 자신의 의견에 따라 살아 가는 것도 쉽다.

하지만 위대한 사람은

시끄러운 군중 속에서도 온화한 태도로

혼자 있을 때와 같은 독립성을 유지한다.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

자기를 신뢰하는 강한 현을 갖게 되면

모든 사람의 마음이 거기에 맞춰 울릴 것이다.

 

오늘 당신이 생각하는 것을 단호하게 말하라.

그리고 내일은 또 내일 생각하는 것을 단호하게 말하라.

오늘 말하는 것이 어제 말한 것과 모든 면에서 모순된다 해도 괜찮다.

 

어떤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라.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으려고 노력한다면,

결국엔 항상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알고, 모든 것을 발아래 두어야 한다.

세계가 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곳저곳을 엿보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살금살금 숨어 다녀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가 거리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은 가치 있는 것을 자신의 내부에서 찾지 못하는 탓에 탑과 신상을 보면서 비참한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그의 것이다. 그의 눈 앞에 걸려 있는 것들은 그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진실을 쫓아 살아간다면,

그 진실이 결국에는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마치 구걸하는 것처럼 책 내용에 아첨하는

태도를 보인다.

역사를 바라볼 때에도 우리의 상상이 진실을 흐려놓는다.

평범한 사람들이 독자적인 견해를 갖고 의식적으로 행동할 때,

왕의 행위만을 비추던 영광이 그의 행위로 옮겨간다.

 

소박한 마음으로 신성한 지혜를 받아들일 때 낡은 것들은 사라진다. 수단,교사,경전,신전이 무너진다.

정신은 현재에 살고, 과거와 미래를 현재의 시간으로 통합해 흡수한다.

그러므로 신을 알고 있으며 신을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 어딘가 다른 세계에 있는 오래된 나라의 용어를 써가며

당신을 과거로 이끌려고 해도 그 사람을 믿지 말라.

완성된 형태인 참나무보다 씨앗인 도토리 낫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과거를 숭배하는 풍조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역사는 나의 현재와 미래에 관계된 유쾌한 교훈이나 우화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이상이면 주제넘고 해로운 것이다.

 

사람들은 머뭇거리며 변명이나 늘어놓는다.

자신의 다리로 굳건하게 서 있지 못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또는 "나는 이렇다."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고 성인과 현자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은 무언가를 미래의 일로 미룬다든지 과거를 돌아본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지 않는다.

과거를 돌아보며 슬퍼하고, 지금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풍요에서 눈을 돌리고, 발꿈치를 들고 미래를 넘겨다보려 한다.

 

아무리 초월적인 지성의 소유자라도 다윗,예레미야,바울의 언어를 통하지 않으면 감히 신의 음성을 들을 용기가 없다.

기껏해야 몇 권의 경전, 몇 사람의 인물에 그렇게 높은 가치를

부여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할머니나 교사가 한 말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러다가 자신도 그런 말을 한 사람들과 같은 견문과 학식을 지니는 경지에 이르면, 그제야 그들을 이해하게 되고 그 말들을 기꺼이 놓아 버린다.

이제 자신도 필요할 때면 언제든 그런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하게 산다면 우리는 진실을 볼 수 있다. 강자가 강해지는 것은 약자가 약해지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우리가 새로운 지각을 갖게 되면, 기억 속에 보물로 소중하게 쌓아 두었던 것들을 쓸모없는 물건처럼 기쁘게 내던질 것이다.

善이 당신 가까이 있을 때, 당신이 내부에 생명을 지니고 있을 때, 그것은 이미 알려진 방법이나 관습에 따른 것이 아니다.

 

3장. 혼자서 가라.

힘은 과거로부터 새로운 상태로 옮겨가는 순간, 심연을 뛰어넘는 순간,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순간 속에 존재한다.

영혼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이 사실을 온 세상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 사실이 과거의 가치를 영원히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힘은 자연계에서 정당성의 근본 척도이다. 자연은 스스로 돕지 못하는 존재가 자신의 왕국에서 살아가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어리석은 대중에 불과하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경외심을 품지 않는다.

자신의 재능을 믿고 집에 머물면서 내면의 큰 바다와 교류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남의 항아리에서 물 한 잔을 구걸한다.

우리는 혼자서 가야 한다.

나는 예배가 시작되기 전의 고요한 교회를 좋아한다.

어떤 설교보다 그것이 더 좋다.

자신만의 성역이나 신전에 들어가 있는 인간의 얼굴은 얼마나

초연하며 청량하고 순결하게 보이는지!

그러나 고립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을 고양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당신이 자신만의 성역에 있으려 할 때면, 때때로 온 세상이 공모해서 사소한 일로 당신을 괴롭히려 들지도 모른다.

움직이지 마라. 그들의 혼란 속으로 들어가지 마라.

당신의 優柔不斷(우유부단)한 호기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을 괴롭힐 힘을 준 것이다.

누구도 내 행동을 통하지 않고는 내 곁에 가까이 다가올 수 없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갖고 있지만, 욕망 때문에 그 사랑을 잃는다."

 

우리가 진실을 좇아 살아간다면,

그 진실이 결국에는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세상의 일반적 기준을 거부하면, 세상 사람들은 모든 기준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고 도덕률을 폐기하자는 것으로 생각한다.

참회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속죄함으로써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의 기준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죄를 씻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외부의 기준을 무시하고 자신의 기준에 따라 스스로 면죄를 선언할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이 의무라고 부르는 임무 가운데 내게는 의무가 아닌 것이 많이 있다.

나에게는 단호한 주장과 완벽한 궤도가 있다. 이런 자신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세상의 기준을 따를 필요가 없어진다.

 

인간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동기를 버리고 자신을 신뢰하며 스스로 엄격한 주인이 되려는 사람은, 내면에 신과 같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의 마음은 높고, 그의 의지는 충실하며, 그의 시야는 맑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진정한 교의가 되고 사회가 되고 법이 된다.

 

우리의 살림살이는 구걸하는 거지나 다름없다.

우리의 예술,직업,결혼,종교는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선택해준 것이다. 우리는 말로만 전사일 뿐이다.

운명이라는 고된 전장에서 강한 힘이 솟아나는 법인데,

우리는 그런 전장에서 달아나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처음 일을 시작해서 실패하면 완전히 풀이 죽어버린다.

젊은 상인이 사업을 하다 실패하면 주위 사람들은 그의 인생이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면 크게 상심해서 나머지 인생 전부를 불평 속에서 보내는 것을 그 자신이나 그의 친구들 모두 당연하게 생각한다.

반면, 시골 출신의 강인한 젊은이는 차례로 온갖 직업에 도전한다.

짐을 나르고, 밭을 갈고, 행상을 하고, 학교를 운영하고, 설교를

하고, 신문을 편집하고, 의회에 들어가고, 대지주가 된다.

이런저런 일을 하는 동안 역경이 닥쳐와 벼랑으로 굴러 떨어져도 그는 언제나 고양이처럼 부드럽게 착지한다.

이런 젊은이는 도시의 인형 같은 젊은이 백 명에 맞먹는 가치가

있다.

그는 시대와 나란히 걷고, 전문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인생을 미루지 않고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한 가지 기회가 아니라 백 가지 기회가 있다.

자기신뢰를 실천하면 새로운 힘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 자신을 믿으면 일과 인간관계, 종교, 교육, 연구, 생활양식,

교제, 관념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특정한 이익을 구하는 기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이 되지 않는

어떤 것을 구하는 기도는 사악하다.

기도는 가장 높은 관점에서 현실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영혼의 독백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기도는 비열한 것이며,

도둑질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기도는 자연과 의식을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원적인 것으로 가정한다.

신과 일체가 된 인간은 그 즉시 구걸하지 않게 된다.

"신의 숨은 뜻은 우리의 노력 속에 있다. 용기야말로 우리에게 최고의 신이다." - 존 플레처(1579~1625). 영국 극작가.

불평은 자기신뢰가 부족해서 나오는 것이고,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표출되는 것이다.

불행을 뉘우치는 것으로 고통받는 자를 도울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일에 열중하라.

그러면 잘못이 고쳐지기 시작한다.

신에게나 인간에게나 언제나 환영받는 것은 스스로 돕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모든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모두가 반갑게 인사하고,

모든 영광이 돌아가고,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탐내듯 그의 뒤를

좇는다.

"성스러운 신은 불굴의 인간에게 질풍과 같이 강림한다."

- 조로아스터(B.C.628~551).

 

인간의 기도가 의지의 질병인 것처럼 교의(dogma)는 지성의

질병이다.

새로운 정신은 새로운 분류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의 새로운 체계가 나타난다.

로크, 벤담, 푸리에처럼 비범한 활동과 힘을 갖춘 정신이 나타나면 그것은 일파를 이루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분류를 적용한다.

그런 경향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교의와 교파이다.

교의와 교파도 근본적인 개념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강력한 정신의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공부하면서 얼마 동안은 자신들의 지력이 성장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균형 잡히지 못한 정신은 분류를 우상화한다.

분류를 재빨리 사용해서 소진해야 할 수단이 아니라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기게 된다.

그들은 빛이 특정한 일파에 속하거나 정복당하지 않는 것이어서 어떤 오두막도 비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얼마 동안 자신들이 좋을 대로 떠들면서 빛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말하게 내버려 두자.

입으로 어떤 말을 하든 그들이 정직하고 훌륭하게 살아간다면,

아늑하기만 했던 그들의 새로운 오두막이 머지않아 너무 좁고 낮게 느껴질 것이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아직껏 여행이라는 미신에 매혹당하는 것은 자기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이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탈리아,영국,이집트 등을 숭배한다.

영국,이집트,그리스를 신성한 땅으로 숭배하게 된 것은 거기 살던 사람들이 그 땅이 지구의 지축이나 되는 듯 자신들의 땅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영혼은 여행자가 아니다. 현명한 사람은 집에 머무른다.

필요나 의무 때문에 집을 떠나고 때때로 외국에 나가기도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집에 있을 때와 다름없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 표정을 본 이들은 그가 지혜와 덕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상인이나 시종이 아니라 마치 군주처럼 당당하게 도시와

사람들을 방문한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자신이 태어난 곳을 사랑한다면, 나도 예술,학문,박애를 위해 세계를 여행하는 것을 심술궂게 반대하지 않는다.

여행의 목적이 그가 알고 있는 것보다 좀더 굉장한 무엇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즐기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 자신에게 없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이다.

낡은 것들 속에서 젊은이의 마음은 늙어 버린다. 그는 고대도시들의 폐허에 폐허를 가져가는 것이다.

 

여행은 어리석은 자의 낙원이다. 한 번이라도 여행을 떠나 보면, 어디에 가더라도 그곳이 그곳일 뿐, 그다지 차이가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어디를 가든 엄연한 현실, 곧 내가 도망쳐 온 슬픈 자아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가차없이 다가온다.

나는 바티칸을 방문해 궁정을 둘러본다.

경치와 암시에 취한 척 가장해보지만 사실은 도취되지 않는다.

내가 어디를 가더라도 나의 분신인 거인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

 

여행을 열망하는 것은 지적 활동 전체에 영향을 주는, 한층 깊은 불건전함을 보여 주는 징후이다.

지성이란 본래 방랑자처럼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인데,

현대의 교육제도 탓에 불안정한 성격이 더욱더 강해졌다.

육체가 집에 머물러 있어야만 할 상황일 때,

우리의 마음은 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우리는 모방한다. 그 모방이란 바로 지성의 여행이다.

 

4장. 마음의 목소리를 들어라.

자기 자신을 고수하라. 결코 모방하지 마라.

태어나면서 받은 능력은 언제든 표현할 수 있고, 세월과 함께 교양이 쌓인 만큼 더더욱 풍요롭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차용한 능력은 임시통변에 불과해서

시간이 지나도 완전히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그를 만든 조물주뿐이다.

자신이 타고난 재능이 무엇인지는 직접 해 보기 전에는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다.

세익스피어를 가르칠 수 있었던 교사가 어디에 있는가?

프랭클린이나 워싱턴, 베이컨, 뉴턴을 가르칠 수 있었던 교사가

어디에 있는가?

위대한 인물은 모두가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세익스피어를 연구한다고 해서 세익스피어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문명인은 멋진 스위스 시계를 차고 있지만 태양을 보고 시간을

알아내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하늘에는 일 년 내내 빛나는 달력이 있지만 현대인의 마음에는

그것이 아무 지침이 되지 못한다.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그 철학에 걸맞게 모두가 금욕주의자였다.

그런데 기독교 세계의 어디에 진정한 기독교인이 있는가?

☞ 진지한 철학과 위선적인 비즈니스의 차이다.

 

재산에 의지하는 것, 혹은 재산을 보호해주는 정부에 의지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사람은 오랜 세월 자기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외부의 사물만을

바라보았고, 그 결과 교회, 학교, 사회제도를 재산의 보호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조직들에 대한 공격을 강하게 비난하는 것도 그것을 곧 자신의 재산에 대한 공격으로 느끼는 탓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명의 여신을 상대로 도박을 벌여서,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대로 모든 것을 얻거나 모든 것을 잃는다.

하지만 운에 따라 얻은 것은 도리에 합당하지 않으니 모두 내버리고, 신의 법관인 원인과 결과를 상대해야 한다.

☞ 확실성에 의존해야 한다.

위대한 의지에 따라 행동하고 선한 것을 얻어라.

그러면 우연의 수레바퀴를 쇠사슬로 묶어 두게 되고, 앞으로는 수레바퀴가 어떻게 돌아갈지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히 있을 수 있다.

당신 자신 말고는 아무 것도 당신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다.

근본 원리를 따르고 그 영광을 누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당시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다.

당신 삶의 소박하고 고결한 영역에서 살아가라.

마음의 목소리에 복종하라.

그러면 당신은 태초의 세계를 다시 이 땅 위에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의 힘을 아는가?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믿음.

하지만 우리는 믿음을 느낀다. 안다.

믿음은 어떠한 에너지가 진동하는 정신적인 물질이다.

 

자신의 자존을 갉아 먹는 관계를 청산하고,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가야 한다.

 

자기 자신을 믿으면 새로운 힘이 모습을 드러낸다.

신의 말이 몸을 얻은 것이 인간이다.

랠프 월도 에머슨 | 전미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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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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