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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내가 누구인가라는 가장 깊고 오랜, 질문에 관하여 / 사콩 미팜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1.28|조회수141 목록 댓글 1

인생의 참주인을 찾는 깨달음의 길

"내가 누구인가라는 가장 깊고 오랜, 질문에 관하여"

사콩미팜 | 안희경 옮김

시작하며

"지상에서 천국을 구현하여 우리의 일상생활이

천국에서의 삶이 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당신의 삶을 지배하는 방법이다."

………

인간의 몸을 타고나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는

원래 태어날 때부터 매우 현명하다.

우리의 마음은 넓고, 세상을 보는 통찰력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깊게 자리하고 있다.

삶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이런 타고난 지혜를 '착한 본심Basic Goodness'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착한 본심은 자연스러우며,

맑고 깨끗하다. 우리는 모두 천국에 머물기로 이미 예약되어 있다. 천국은 찬란하게 빛나며 우리 모두를 위해 활짝 열려 있는 곳이다. 이런 천국을 지상에서 구현하여 우리의 일상생활이 천국에서의 삶이 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당신의 삶을 지배하는 방법이다.

………

천국이란 바로 지혜를 말하며, 지상은 냉엄한 현실이다.

우리의 세속적인 삶에서 이 지혜를 활용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성공을 이루는 길목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는 영적인면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면 까지 포함한다.

 

자신의 삶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으로 기르는 교육은

인습적으로 틀에 박힌 방식의 교육과는 다르다. 인습적인 교육은 우리의 마음을 채워 나가야 하는 빈 그릇이라 간주한다.

 

우리는 착한 본심에 대한 확신을 기르고,

우리의 고귀한 인품을 발전시키고 있다.

우리가 우리 내부의 착한 본심과 연결될 때,

우리의 모든 호흡, 행동, 생각은 새로운 기운으로 약동하게 된다.

환하게 빛을 내면서 자신감에 차 있는 태초의 몸과 마음을 갖게되고,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성취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방법이다.

 

1부 | 삶을 다스리는 비밀

'나'는 환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복이라는 수를 놓기 위한

마음의 바늘과 실이다.

우리는 이미 이 둘을 가지고 있다.

착한 본심,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찬란하게 반짝이는 우리들,

우리 안에 있는 이 착한 본심은 깊은 산속 호수만큼이나 투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이미 착한 본심을 갖고 있음을 명확히 확신하지 못한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착한 마음에서 빗나가 길을 잃어버린다. 이는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고, 어찌할 바를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온갖 생각은 우리를 고삐로 얽어매어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닌다. 마치 우시장에 있는 소들처럼 말이다. 이 소들처럼 우리는 삶의 조종간을 잃고 끌려다니면서 살고 있다.

우리는 행복의 근원이 바로 여기,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때로 행복한 경험을 할 때도 있지만, 어떻게 그

행복을 갖게 됐는지, 또 다시 행복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일단 행복이 오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우리는 불안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항상 행복이 얼른 자신에게 와 주기를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다.

행복의 원천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 길을 혼동하게 되면, 우리는

이렇게 불만에 에워싸이게 만든 세상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투덜거리기라도 하면 기분이 좀 상쾌해질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런 다음 더욱 큰 착각과 혼란을 삶 속으로 불러들이는 행동을 한다. 마음은 번잡하고, 일은 두서가 없고, 생각은 종잡을 수 없이 오락가락 할 때, 우리는 나쁜 습관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질투, 분노, 오만이라는 진흙 덩어리를 마구 휘저어 섞고

있다. 그러면 마음은 부정적인 말을 내뱉게 되고, 이는 곧 말이

씨가 되듯 부정적인 상황들을 만들게 된다. 욕망이나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이제 저와 함께합니다."

이러면 우리는 점점 왕자가 아닌 거지가 되어 간다.

거지는 아침마다 매번 이런 생각으로 깨어난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나한테 이득이 될까?

오늘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까?'

아침에 갖는 이러한 거지 발상은 하루 종일 마치 심장 고동처럼

울려댄다.

………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자 열중하면서 계속 이것저것 행복을 가져올 만한 것들을 찔러댈 때, 우리 삶의 엔진은 털털거리며

거칠게 돌아가게 된다. 강박 관념 같은 이런 자기 망상이 결국 우리를 스트레스에 찌들고 병들게 한다.

마치 '나에게 이득이 될까?'라고 쓰인 자석이 바람의 말을 멀리

밀쳐내듯이, 우리의 마음은 매우 좁아져만 간다. 바람의 말은 성공을 가져올 수 있는 우리 내부의 잠재적인 능력임에도, 우리 스스로 이를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상과 나누던 교감을 잃는다. 이 지상에는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능력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이 착륙할 자리가 사라지고 만다.

티베트에서는 행복이 어떻게 오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작정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로톡Lotok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거꾸로'를 의미한다. 마치 망원경을 거꾸고 들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아무리 뚫어져라 보고 있어도, 행복이 커지거나 가까워지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더 작고 더 멀리 보인다. '나'의 마음을 이렇게 작게 만드는 것은 혼란스러운 감정인데, 산스크리트 어로 클레샤Klesha라고 한다. 이는 분노, 욕망, 무지, 오만을 일컫는데, 이것들이 바로 착한 본심을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클레샤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 익숙한 것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클레샤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클레샤가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도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더욱 밀어붙이고, 움켜쥐고

놓지 않게 만드는 클레샤야말로 성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

이런 분노, 욕망, 무지, 오만 등의 감정이 '나'를 위해 일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을 삼사라Samsara라고 한다. 이는 산스크리트 어로

'끝없는 어둠의 시대'를 말한다. 이 어둠의 시대 속에서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제정신을 잃고 만다. 이러한 강박관념은 매 순간마다 우리의 혼을 빼고

있다. 마음은 계속해서 갈등과 욕망, 질투와 자존심 사이에 있는

계곡 속으로 뺘져들어 간다. 우리는 심지어 스스로를 원망하면서 지금의 상태로 살고 있는 것이 불행하다고 한탄하고, 고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모든 행동이 바로 불만족을 구성하는 기본 형태이다.

부정적인 것에 탐닉할수록 우리의 마음에는 이런 혼탁함이 두껍게 쌓여 간다. 이 혼탁한 기운이 바로 스트레스로 나타나는 것이다. 스트레스는 마음의 평화가 부족하다는 외침이기도 하다. 스트레스는 두려움 때문에 생기고, 두려움은 '나'한테 어떤 일이 생길지 알지 못하는 불안감에서 온다. 원하는 것은 갖고, 원하지 않는 것은 피하려는 야망에 휩싸일수록 우리 마음은 더욱 초조해진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도 상처를 입는 행동을 하게 된다. 우리는 밤낮으로 혼란에 휩싸인다.

………

눈앞에 보이는 겉모습만 보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되면, 그 내면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려 하지 않는다. 시시각각 마음은

행복을 좇아 떠돌지만, 여기저기 행복을 찾아 방랑하는 마음은

우리를 계속해서 고통이라는 덫 안에 가두고 있다.

우리는 내면으로 깊게 파고들고자 하는 진지함을 잃고, 하찮은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우리는 진리를 주제로 명상을 하기보다는 만나기 어려운 유명인들의 자질구레한 사생활을 듣고 싶어 한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듣기보다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새로운 유행가에 더욱 귀를 기울인다. 심지어 누군가 우리에게 충고라도 한마디 하면 오히려 그 사람에게 달려든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명상을 하는 것처럼, 일생동안 계속해서 수행에 몸담는다는 것은 일부 호사가나 누리는 쓸데없는 사치처럼 여긴다.

이렇게 좁고 각박한 마음으로는 늘 같은 자리를 맴도는 현재의 상태를 개선시킬 수 없다. 지혜, 자비와 같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착한 본심이라는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것을 알려는 시도조차 못하고 있다. 우리는 선택의 폭을 늘 열어 놓고 싶어한다. 계속해서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자유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는 늘 변화하는 마음이 낳는 것은 고통일 뿐이다.

우리가 '나'라는 틀 속에 갇혀 있으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어떤 친구가 당신에게 멋지다고 말하면,

당신은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직장 동료가 당신에게 "그리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 않다."라고 말을 한다면, 당신은 곧 의기소침해진다. 우리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웃다가도 곧 울음을 터뜨린다.

칭찬과 비난은 메아리와 같다. 메아리는 실체도 없고, 곧 그치고

만다. 마치 막대기를 좇는 개처럼 우리에게 던져진 말을 좇아 흥분하면, 아무리 사소한 말일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요동치게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되며, 이로 인해 그날 하루를 망치게 된다.

우리가 ‘나’라는 관점에 사로잡혀 속게 되면, 원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우리의 모습은 마치 반짝이는 물건을 보면 잡으려고 흥분하는 원숭이와 같다. 우리는 감사할 여유도 없이 수많은 것을 쌓아둔다.

우리의 끊임없는 욕망은 어리석은 행동을 낳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복이라는 수를 놓기 위한 마음의 바늘과 실이며, 우리는 이미 이 둘을 가지고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질투를 의미하는 티베트 어에는 ‘여러 어깨’라는 의미가 있다

어깨가 아무리 많아도 그 위에 얹을 수 있는 머리는 오로지 하나 뿐이다.

우리가 감당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의 몫일 뿐이다.…

사실상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가장 성실하게 대해야 할 사람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행동에 가장 영향을 받는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골프 선수인 바비 존스가 큰 경기를 치를 때였다. 공이 러프에 빠졌을 때 무심코 공을 몇 센티미터 옮겼는데,

뒤늦게 이를 알고서는 본인 스스로 벌점을 매겼다. 누군가가 그에게 공을 움직이는 걸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뭘 그러냐고 지적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보았습니다. 그럼 세상 모두가 본 것이나 마찬가지죠."

나는 여러 대중과 함께하는 명상 수련회에 처음 참가할 당시,

출발에 앞서 아버지인 초감 트룽파 린포체께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 아버지께서는 "네가 혼자 있을 때 하는 행동이 너의 남은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고 하셨다. 자신의 삶을 지배하려는 사람은 외딴 곳에 혼자 있다 해도 고결한 선덕善德을 풍겨야 한다.

선善은 실용적인 것이지 도덕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선을 통해 우리는 '나'라는 틀 속에 빠져 있는 우리 자신을 밖으로 드러낼 수 있다. '나'라는 틀 속에서 나오는 데 도움이 되는 생각과 말, 행동을 배양하는 것이 선이다. 습관이란 그동안 우리가 해 왔던 것, 하지 않으려는 것, 하지 않았던 것을 말한다. 이런 습관을 바꿔 나가면 우리는 밖으로부터 안으로 변화를 줄 수 있다. 동시에 안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발산되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마음속엔 더욱 맑은 공간이 생기고, 우리의 시야는 점점 넓어진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풍요로움을 보게 되고, 스트레스와 불안이라는 구름 너머에 숨어 있는 찬란함을 보게 된다. 마음이 지닌 타고난 성품은 순수하다. 마음은 마치 하늘의

텅 빈 공간처럼 무엇이든 받아들인다. 마음은 또한 물처럼 맑으면서, 어떠한 장애나 주장에서 맞서지 않고 그냥 흘러간다. 이것이

착한 본심이며, 우리라는 존재가 지닌 파괴될 수 없는 본성이다.

거지의 마음은 좁디좁다. 거지의 마음은 집착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만들려 집착하고, 그것이

유지되도록 집착하는 것은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이런 팽팽히 조여진 폐쇄공포증적인 감각이 '나'를 창조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부정적인 생각들로 인해 무엇인가를 꽉 잡고 놓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꽉 잡고 있으면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의 삶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화를 내고 욕망이 불타오른 경험이 이미 셀 수 없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땠는가? 화를 냈다고 해서 행복을 성취했는가?

욕망이 불타오를 때마다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는가?

………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행복은 바로 우리 내부에 있다.

'나'라는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다. 그리고 '나'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인식할 수 있을 때가 바로 행복의 출발점이다.

이는 명상수련과 함께 시작된다. 매일 꾸준히, 10분만 투자해도

우리의 행복은 싹터 오른다. 마음을 안정시킴으로써 '나'를 넘어선 곳에 있는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된다. 천국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지니고 있던 넓은 마음이고, '나'를 지키기 위해 작아진 마음의 이전 모습이다. 일단 마음이 평화로워지면 '나'라는 것은 단지 생각이고 느낌일 뿐이며, 단단하게 굳어진 감정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명상을 함으로써 생각이 일어나고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떠오른 생각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생각이 어디서 왔고 어떤 의미인지 그 실체를 알게 된다. 이러면 눈에 보이는 것에 끌려 바보가 되는 일은 더이상 생기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도 보다 부드러워진다. 우리는 삶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마음이 반영된 결과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막대기를 좇는 개가

되지 않고, 외부에 나타나는 현상들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이제는 사자처럼 막대기를 던진 사람, 즉 우리의 마음을 살피기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마음과 세상이 어떻게 작용하며 돌아가는지를 듣고, 관찰하고, 명상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착한 본심에 대한 확신을 개발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듣고, 관찰하고, 명상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생각과 감정이 질풍처럼 몰아치는 혼돈 속에서 듣고 관찰하고 명상한다는 것이다. ……… 우리가 하는 듣기, 관찰, 명상은 한마디로 막무가내식이다. 그리고 우리가 도출한

결론은 종종 부정적인 마음이라는 길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

바람의 말은 '나'라는 틀 너머로 우리를 인도한다. 좁은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그 즉시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힘이 자연스럽게 솟아난다. 우리에겐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럴싸한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내면에서 밖으로 발산되고 있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공과 열정의 기운을 내뿜고 있다. 착한 본심과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능력은 순수하고 정돈된 힘이다.

우리는 더 이상 희망과 두려움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다. '나'라는 관념을 유지하고자 애를 쓰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착한 본심과

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넓은 마음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반영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도, 마치 마술을 부리듯 원하는 것을 끌어당기게 된다. 착한 본심이 발산하는 에너지 속에서

확신을 얻는다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거지가 아니다.

대부분의 우리 마음은 왕자와 거지를 섞어 놓은 상태이다.

우리는 아직 어떻게 스스로의 삶을 다스릴지 모른다. 우리는 안개 속에 있는 셈이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도, 때로는 자신을 위해 살기도 한다. 그래서 행복할 때도 있고, 울적할 때도 있다.

생각을 다스릴 수 없다면, 우리는 수시로 변하는 변덕스러운 생각에 휘둘리게 된다. 그러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샴발라로 가는 길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매개로 하여 자비와 확신, 그리고 용기를 개발할 수 있는 실리적인 방법들을 제공해 준다. 붓다가 다와 상포 왕에게 전수한 고귀한 가르침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우리에게는 가족, 일, 바쁜 일상이 있다. 이 모든 것을 지혜와 자비를 기르고, 착한 본심에 대한 확신을 키우는 방법으로 이용할 수 있다.

………

* 바람의 말은 티베트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장수, 건강, 성공, 행복을 의미한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

자신의 삶을 지배할 수 있는 당당한 사람이 되는 데

가장 실용적인 방법은 우리가 생활하는 시간의 10퍼센트만이라도

매일 우리의 마음가짐을 바꾸는 수련에 투자하는 것이다.

한번은 스승님께서 내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붓다와 우리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니?

붓다는 착한 본마음 안에서 온전한 확신을 품어 내셨지.

착한 본심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확신한 것이야. 우리가 그런 확신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는 상관없어.

우리 모두는 깨어 있고, 사랑스러우며, 매우 지혜로운 존재들이야. 우리는 우주의 지혜와 자비를 갖고 있지. 그리고 그 우주는 마치

태양을 기다리며 겨울잠을 자는 씨앗처럼 우리 안에 들어 있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깨달음과 180도 동떨어져 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사실은 단지 몇 도만 빗겨 있을 뿐이야."

나는 붓다처럼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다른 은하계에서나 있을법한 일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그런 시절, 지혜와 용기를 주는 이런 짧은 가르침만 들어도 내 마음은 크게 설레었다. 실제로 우리의 지혜와 자비는 언제든 발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지혜와 자비를 제대로 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동아시아로 성지

순례를 떠나거나 금욕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약간의

행동만으로도 가능하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법을 익히는 것은 누구나 착한 본심을 갖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 일이다.

이러한 확신을 가지려면 매일 매일 미덕을 쌓는 기술을 익혀야만 한다. 우리 가운데 충분한 숙면을 취하고 개운하게 아침을 맞는

이가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약간 몽롱한 상태에서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직행하거나 서둘러 부엌으로 향한다. 그러고는 미리 내다보는 안목없이 허둥지둥 위태롭게 하루의 일과를 수행할 뿐이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젖어 있다. 약간 화가 나 있고, 우울하거나 불안한 느낌에 빠져 있을 때 항상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나에게 이득이 될까?'라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 하룻밤 사이에 물 빠지듯 없어지고, 항상 만족스럽고 기쁘며, 조화를 이루는 지혜를 얻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어젯밤 꿈이 지금 눈앞에서

현실화되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이다.

………

스스로의 삶을 지배할 줄 아는 당당한 사람이 되는 방법도 이와

비슷하다. 가장 효과적이며 실용적인 방법은 하루에 아주 조금씩만 마음가짐을 바꾸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단 10퍼센트만 말이다.

너무 지나칠 경우, 전체 과정을 망칠 수 있으니 유의하자. 이는 한꺼번에 너무 먼 거리를 속도를 내어 달리거나, 능력 이상의 역기를 드는 것과 같다. 내가 명상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보통 10분만 하도록 권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즉각적인 결과를 보도록 목표를 제시해 주지 않는다. 이런 눈높이에 맞는 접근은 우리

스스로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는 아직도 나머지 90퍼센트의 시간 동안에는 짜증이 난다.

그러나 나의 마음과 정신을 위해 투자한 10퍼센트의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을 나보다 먼저 생각하도록 노력한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며 자연스럽게

안정을 취한다.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에 마음을 집중한다. 그런 다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지,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이 배울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바람의 말을 불러올 수 있는지에 모든 관심을 집중한다.

오늘 하루도 자비의 마음을 소중하게 품고, 프라즈나Prajna가

깨어나는 삶을 살고자 다짐한다. 프라즈나는 산스크리트 어로

'최고의 지식'을 뜻한다. 나는 호흡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호랑이처럼 발을 내디딘다. 큰 의미를 지닌 생각을 관찰함으로써, 사라처럼 마음을 가다듬고 기쁨을 북돋운다. 나는 지금 마음가짐을 가다듬는 중이다. 삶은 착한 본심이라는 안장 위에 우리를 떨어뜨리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하루를 시작할 때 처음부터 내 마음이 올바르다면, 하루 전체를 다스리는 것이 보다 쉬울 것이다.

………

매일 아침 수련을 마친 후 삶 속으로 발을 내디디고, 일상에서의

행동을 관찰하고 선善을 쌓으면서 하루를 생활하도록 한다.

내 마음속에 있는 천국을 매일 경험할 수 있다면, 사물이 작용하는 이치를 알고 올바른 생각을 가짐으로써 선을 쌓아 가며 세속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명상을 하면서 마음이 넓어지고 커진다면,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끊임없이 유지할 수 있다.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유지하는 것은 곧 '나'라는 틀에서 벗어나 평화, 자비, 지혜로 향하는 길이다. 하루 종일 일어나는 이런저런 사건들이 마음의 안정을 깨트릴 때마다, 생각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마음을 호흡에 집중하거나 아침에 관찰햇던 주제에 집중하도록 한다.

………

어떤 이들은 내게 하루 종일 명상 수련만 하기 위해 자신들의 사회 생활을 포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성스러운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에게 영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을 구분하는 것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어떤 관점을 갖고 생활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하곤 한다.

삶을 의미있게 하자면,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미래에 긍정적인

효과를 갖도록 원인과 결과를 연결 지어 생활하는 계획이 필요하다. 이런 절제된 태도는 룽타, 즉 바람의 말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바람의 말은 우리가 천부적으로 갖고 있는 힘과 핵심을

인식하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는 당당한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은 공격적인 삶과 반대되는 것으로, 우리 내면의 사랑과 친절을 되살려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 혼란을 겪는다. 이는 우리가

세상사를 부정적인 감정과 연관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야망을 품고 탐욕을 부려 원하는 것을 꼭 얻어 내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질질 끌려 다니며 살아가는 것은 세속적인 성공이라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세속적인 무지일 뿐이다. 사람들은 종종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말하는데, 실제로 모르는 것은 고통이다. 아는 것이 힘이며,

축복이다. 착한 본심을 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카르마Karma의 법칙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앎이라는 지혜이고 행복을 부르는 방법이다. 카르마의 법칙이란 원인과 결과를 말한다.

카르마는 두 가지 방향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선하게 행동하면,

우리가 뿌린 씨앗은 행복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악하게 행동하면, 고통으로 되돌아온다.

………

'세속적'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티베트 어에는 '겁이 없는'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이 두려움이 없다는 것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이 갖춘 '두려움이 없는' 상태는 명상을 통해 개발된 넓은 마음과 정교함을 말한다. 세속적 의미의 '겁이 없는'은 우리 자신이 겪는 혼란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분노와 탐욕에 빠져든다. 그 분노와 탐욕이 무엇이 되어 우리한테 되돌아올지 두려워하지도 않고 말이다. 우리는 마음대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 분노를 표출한 대가를 나중에 톡톡히 치러야 함을 모른다.

………

10퍼센트의 게임을 즐기는 것은 삶의 속도를 천천히 늦추는 것이며, 뒤로 한발 물러서는 것이다.

………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10분의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이 시간을

통해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고 고통, 무상, 무아를 관찰할 수도 있다. 또한 '어떻게 삶을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은 어떤 의미 잇는 일을 할까?'를 관찰 할 수도 있다.

………

우리는 90퍼센트의 마음이 모든 상황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스스로에게 웃음 지으며 명상을 할 수 있다.

더불어 10퍼센트의 마음을 온종일 열어 놓는 실천도 해 볼만 할 것이다.

………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은 마음이 중립적이라는 특성을 이용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다른 것에 생각과 마음을 두도록 하고, 그 시간을 점차 늘리도록 한다. 자비와 지혜를 바탕으로 한 생각에 마음을 집중하면 할 수록, 마음은 이에 더 가까이 끌리게 되고, 친절한 습관들이 하나 둘 씩 더 배어들게 된다. 이제 '나에게 이득이 될까?'라고 새겨진 유리 항아리 대신 '다른 이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라는 유리 항아리에 마음을 쏟아 채워 나간다. 좀 더 넓은 마음을 갖고 일상생활을 함으로써 우리의 태도는 바뀌어 간다.

 

10퍼센트 게임을 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가짐은 마치 군대에서 깃발을 든 기수와도 같다.

모든 군인은 깃발을 따른다. 깃발이 있는 곳이 곧 전투 현장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가짐이 진창을 통과하면, 우리의 모든 생각도 그 진창을 통과하게 된다. 마음가짐이 산 정상을 향한다면,

우리의 생각도 산을 오르게 된다.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데 효과적이다. 이것은 마치 설탕이나 커피를 끊는 것처럼, 서서히 변화를 줌으로써 눈덩이가 불어나듯 점진적으로 전체를 탈바꿈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은 늘 지구력이나 체력과 같은 기초에 대해 말하곤 한다. 일단 기초를 갖추게 되면, 한동안 마라통을 그만두었다 해도 쉽게 다시 달리기를 시작할 수 있다. 이미 달리는 데 몸이 적응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달려야 할지 몸이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마라톤을 하면서 이것을 알게 되었다. 일단 기초를 갖추고 나니 자신감을 얻었다. 내가 지금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 주위를

둘러볼 수도 있었고,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기초를 갖추기 전에는 달리는 데만 안간힘을 써야 했기

때문에, 무엇을 감상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호흡에 마음을 집중할 때는 평화로 이끌 수 있도록 마음의 안정이라는 기초가 있어야 한다. 존재에 대한 진실을

관찰할 때는 지혜로 이끌 수 있도록 지식이라는 기초가 있어야 한다. 마음의 안정과 지식을 키울수록 우리는 보다 명확하게 보고,

보다 큰 확신을 갖게 된다. 굳건한 기반이 마련됐기 때문에 우리는 선한 기운에 감싸인다. 내 자신이 너그러워지고 인내하는 것도

즐기게 된다.

매일 매일 우리의 마음가짐을 10퍼센트만 바꾸어도 매우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호랑이, 사자, 가루다, 용의 길에 과감히

들어서며 각각의 동물이 지닌 선덕을 수련하는 것은,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심이라는 바위 속 갈라진 틈에 쐐기를 꽂는 것이다.

내게 만족스러운 모든 시간, 내가 다른 사람을 돕는 모든 시간,

집착을 뚫고 진리를 바라보는 모든 시간, 지혜와 마음이 하나가

되어 편안해지는 모든 시간이 나무못으로 되 쐐기에다 물을 붓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나'라는 폐쇄공포 속에 우리를 붙들어 놓고 있는 관념과 두려움을 서서히 깨뜨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착한 본심이 드러나게 되고,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꾸려 가게 된다.

* 경전의 가르침들은 신화에 나오는 네 마리의 동물에 빗대어 설명된다. 

네 마리 동물은 각각 대표적인 확신을 나타내는데 이러한 확신을 우리가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소망을 이루게 해 주는 보석의 지혜와 자비를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호랑이는 만족, 사자는 기쁨, 가루다(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옮긴이)는 사물을 냉철하게 볼 수 있는 평정심, 용은 유쾌한 지혜를 나타낸다. 

2부 | 호랑이의 길

삶은 스스로 결정한다

우리는 호랑이의 길에 들어서면서 조심스럽게 앞발을 내디딘다.

우리는 카르마를 존중한다.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이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호랑이의 마음은 소탈하며 전혀 거만하지 않다. 그리고 도약하기 전에는 온 마음을 다해 신중하게 검토한다. 무엇을 하든지 완전히 몰입한다. 호랑이의 이런 참을성 있는 품성은 드넓은 대지와 연결되어 있다. 호랑이의 만족을 갖는다면 우리는 삶을 단념하지 않게 된다.”

 

증명이 불가능한 두 가지, 즉 삼사라(윤회)를 믿지 않더라도 카르마(業)의 존재와 작용은 꼭 믿어라. 붓다의 10무기(無記)를 항상 기억하라. 제자들이 내세나 윤회 등에 대해 질문했을 때, 붓다는

오히려 나무라며 답해주지 않았음을, 붓다의 깊은 의도를 다시

생각하라.

 

나의 마음을 하늘처럼 넓어도 나의 행동은 참깨의 씨처럼 작고

미묘하다.-파드마삼바바. 인도의 위대한 성자는 카르마(업)의

영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그것이 두렵다면 항상 선행하라고

했다. 그러면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인간으로서의 삶의 소중함, 카르마(업)의 법칙, 삼사라(윤회)의

고통, 무상(無常)의 진리, 그리고 자비와 지혜가 진정한 자유라는 것을 제대로 관찰함으로써 정확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소유가 곧 행복이라는 믿음 속에 갇혀 있다. 두려움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물들이려고 위협한다. 두려움은 비겁함을 낳는다. 비겁해지면, 자비로움은 마치 초현실적인 듯 보이고,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오히려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혼돈 속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아무 제약 없이 내달리게 되면, 바람의 말은

쇠약해지고 어둠의 시대는 보다 길어진다.

어둠의 시대 속에서 혼돈에 빠진 우리의 광기는 종종 속도로 뚜렷하게 드러난다. 일단 가속도가 붙으면 어떤 일이건 감사할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한다. 속도가 여유를 죽이는 것이다. 이렇게 미친 듯이 속도가 붙으면 힘과 추진력을 갖추게 되고,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마음이 조급해지면, 마음을 내려놓고 쉰다는 것조차 기억해 내지 못하며, 성급하게 앞으로만 달려 나가게 된다.

여유가 없기에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공격적인 삶을 살게 된다. 원하는 곳으로 달려가기 위한 약속,

전화, 만남에 집착하다 보니 질투, 경쟁, 집착, 짜증이 일어난다.

하루가 힘겨운 것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우리가 가는 길 위에 '나'라는 턱을 무수히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속 방지턱은 우리에게 천천히 가라고 속삭이고 있다. 이는 파유를 사용하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호랑이의 참을성이 없다면 이러한 암시와 속삭임을 들을 수 없다.

만족에 이르는 길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그 길이 드러나지 못하도록 스스로 가리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길을 드러내는 능력을 갖추는 순간부터 우리는 삶의 주인이 된다. 행동을 그치고 자리에 앉아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려 노력하는 것이 곧 밖으로 내달리려는 마음을 올바로 꿰뚫어 보는 길이다.

이렇게 안정된 몸과 마음이 일상생활에서 유지되도록 한다.

버려야 할 습관과 갖추어야 할 덕목을 되돌아보면 볼수록 바람의 말은 힘을 얻게 된다. 우리는 이제 무엇이 부질없는 일인지 깨닫는다. 발 딛고 있는 이곳에서 다른 곳을 찾아 헤매고 있고, 하고 있는 일에 몰입하지 못하고 더 좋은 일을 꿈꾸는 것. 이런 떠도는 움직임이 우리의 균형감을 깨뜨린다는 것 말이다. 파유를 이용하면 몸과 마음의 균형을 다시 잡을 수 있다. 호랑이의 통찰력을 갖게 되면 삶의 속도를 천천히 늦추는 법을 배우게 되고, 이제 우리가 지금 머무르고 있는 곳을 살피는 신중함과 만족하며 감사할 줄 아는 여유를 익힐 수 있다.

카르마를 이해하라

감사의 통찰력, 최선을 다하는 노력은

우리 삶을 다스리는 도구이며,

우리의 미래 또한 다스릴 수 있도록 해 준다.

이것이 호랑이가 사용하는 도구이다.

 

관찰은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데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보도록 함으로써, 내 자신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다. 매일 아침 죽음의

침상 위에 누워 있다는 상상을 하며, 우리의 삶을 현실과 조화롭게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진지하게 생각하는 훈련을 한다. 그 훈련이

바로 진리를 관찰하는 것이다.

매일 하루를 마무리 할 즈음, 다시 한 번 죽음의 침상에 있다고

상상한다. 그렇게 진솔하게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난 후,

과연 하루를 후회 없이 보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 살펴보라. 처음에는 그저 그날 어떤 일을 했는지,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만 생각이 날 것이다. 그 후, 약간의 후회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마치 난파선에서 흘러나와 바다 위를 떠다니는 물건들처럼,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또는 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의 부스러기가 떠오른다. 후회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집착이다. 이는 이미 지나간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가 더욱 소중했었고, 그 일이 더욱 절실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렇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후회하는 것은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감사가 부족했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후회할 때면, 도대체 이렇게 후회해서 돌아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살피기가 어렵다. 후회란 고통이기 때문이다. 후회를 한 후, 우리는 또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몇 주 후 똑같은 일로 다시 후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행동을 바꾸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고 싶다면, 후회가 밀려올 때 그것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그리고 후회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의도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조리 있게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후회를 관찰할 때는 굳이 도덕주의자가 되거나

자책하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다. 스스로를 힐책하듯 비난하지 말고, 그저 무엇을 후회하는지만을 되도록 명확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기준으로 후회를 이용하는 것이다.

무언가 잘못했다고 느껴지면 그것을 관찰하라. 잘못을 저지를 당시의 마음가짐은 어떠했는가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 마음가짐이 지금 후회라는 형태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아마도 또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그것을 깨끗이 밝히고 사과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좀 달리 해 보고 싶지 않은가? 핵심은 후회라는 느낌을 통해 가능한 한 많이 배우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미덕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는 삶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

이는 곧 행복을 얻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모두 기쁜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기쁨과는 반대의 길을 가면서 이를 찾는 경우가 많다. 열심히 노력하고 집중하지

않아도 기쁨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바보 같은 생각이다. 이렇게 살면서 진정한 인생의 안식을 얻지 못하면서도, 무작정

이런 잘못된 시도를 한다. 우리는 꿈에 그리던 휴가를 맞게 되어도 드러누워 낮잠이나 잔다. 구상이나 계획이 없다면 제대로 즐길 수 없다. 식당에 좌석을 예약하건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건,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노력했을 때만큼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 물론 휴식도 때로는 필요하지만, 단순한 휴식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더 자연의 이치에 맞는다. 무엇을 하건 마음을 담아서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은 의미 있는 것으로 채워지길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관찰하게 되면, 지금까지 우리가 그리 많이 노력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삶을 호랑이의 눈으로 관찰하면서 "내가 노력하는 대상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사실상 우리는 이미 거의 매 시간을 노력하면서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노력이 종종 잘못도니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며, 분노를

발산하는 데 노력하는 것이다. 고통을 잠시 잊고자 쾌락을 찾는 데 몰두한다. 그리고 그것을 겁 없이 시도해 본다.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전제가 된다면, 즐거움의 대상을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 내면에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3부 | 사자의 길

자비는 절제에서 온다

사자의 절제는 바람의 말을 일깨우고,

이는 에너지와 기쁨을 부른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사자가 지닌 규율이며 절제이다.

다른 사람을 도우면 우리는 즐거워진다. 남을 돕는 순간에 우리는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극복하고, 가슴 뿌듯해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기쁨을 갖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망설이고 의심하면서, 골짜기 밑에 처박혀 인생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비천한 존재가 아니다.”

 

붓다는 행복을 찾기 위해 밖으로 끊임없이 헤매기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고 가르쳤다. 오늘날 수많은 스트레스는 단순히 만족의 결핍에서 온다. 진정으로 착한 본심을 가진 자신을 사랑하라,

그러면 스트레스는 자연히 사라진다.

태양이 빛을 뿜듯 착한 본심이 쏟아 내는 자비는, 우리의 이기심을 극복하여 어둠의 시대를 벗어나도록 해준다. 자비는 자신을 묶은 족쇄가 풀리길 꿈꾸며 세상을 향해 고귀한 마음으로 응답하고자

하므로 기쁨을 부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있다면 우유를 끊임없이 젓듯 그의 마음을 계속 저어라, 언젠가는 치즈가 될 날도 있으리라. 너의 긍정적 마음이 결국 엄청나게 큰 에너지로 변해 그를 변하게 할 것이다. 그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가? 보아라, 너의 마음이 그의 마음이다.

우리가 의심에서 해방되면, 마음이 더욱 넓어지고 자비가 자연스럽게 흐른다. 우리는 다툼 없이도 얼마든지 어떤 상황에서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나는 이런 넓은 마음을 이미 여러 위대한 스승님들에게서 보았다. 〔…〕그분들을 가까이서 접한 나의 기억에, 그분들은 아주 편안하시며 온화하고, 사랑으로 가득한 친절한 노인의 모습이셨다.

이와 똑같은 경험을, 티베트를 대표하는 키엔체 린포체, 페노르

린포체 스승님께도 받았다. 그분들도 온화함과 기쁨을 발산했다.

그분들은 현실과 다투지 않기 때문이다.

비난하지 말자

늘 불만과 불평을 달고 사는 우리.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고 해서

내게 평화나 행복이 오지는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 비난할 사람을 찾게 되면, 우리는 사자의 길을 더

이상 갈 수 없다. 마음이 자리 잡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명상을 하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

따라서 명상을하면 비난하는 행동을 관찰할 수 있다.

부정적인 비난을 발산하기보다는 그러한 불만의 원인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자. 불만이 일어난 원인은 아마도 그것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욕하고 불평을 터트릴 대상을 물색할수록, 우리는 혼동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규율과 절제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비난을 퍼부울 대상을 찾는 대신에, 그런 공격적인 마음 그 자체가 고통의 표현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우리 마음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를 인식할 수 잇는 지각력을 개발해 낸다면, 우리는 더 이상 남을 탓하는 낚싯바늘에 꿰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학대하는 마조히스트가 되거나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삶은 그것이 기쁘건 슬프건, 고통과 고난이

매우 기본적인 일상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러면 누구나 어려운 시기를 겪게 됨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우리는 고통 속에 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우리의 마음은

자비를 향해 문을 열게 된다. 우리가 탓할 상대가 누구이건 그 사람 역시 고통 속에 있는 것이다.

붓다는 네 가지 기본적인 진리에 대해 대략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진리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상대적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일지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니고, 어떤 때는 진리지만 다른 때에는 아닐 수 있다. 첫 번째 진리는 괴로움이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고통 받고 있다. '나'라는 생각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빼앗기면 화가 난다. 무언가를 얻으면 거기에 집착한다.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더 많이 가지면 진투를 한다. 이런 얽매임이 카르마를 만들고, 카르마는 끝없이 돌고 도는 불만족이라는 고리 속에 우리를 가둔다."

………

현실에는 항상 불만 거리가 있다.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얻지 못하는 것도 남의 탓을 한다. 만약 남을 탓하는 대신 마음을 여유롭게 가라앉힐 수 있다면, 우리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 안에서 웃음을 찾게 될 것이다.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행복한

존재임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집착을 버려야 사랑이 흐른다

사랑 속에 지혜를 담으면, 자연스레 솟아나는 기쁨이라는

저 높은 고원에서 맘껏 뛰놀 수 있다.

우리는 '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우리 존재 속 깊은 내면을 탐색하게 된다. 사랑을 관찰하면 우리는 가장 넓은 마음을 얻을 수 있다. 보다 멀리 우리의 사랑을 넓힐수록 우리의 마음도 보다 넉넉히

부풀어 오른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세상 모두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위대한 기쁨이며, 사자의 확신이다.

만약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데 지혜가 부족하다면, 사랑은 오히려 우리는 무너뜨릴 수 있다. 이는 사랑하는 대상에 집착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엔 소유욕이 강해지고 우리 스스로 문제에 휘둘리게 된다.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 된다고 서로를 구속하게 된다. 우리는 상대를 충분히 감사 안으려 하지 않는다.

지혜는 우리 모두에게 여유가 필요함을 알고 있다. 무지는 상대방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그가 '나의' 친구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여유를 주지 않을 때 우리는 질투와 탐욕에

빠진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것을 상대에게 요구하게 된다.

스스로를 열어 보이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서 받으려고만 한다. 그러고는 여유의 틈새마저 닫아 버린다.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걸 가져 왔다고 판단되면 주저 없이 또 다른 사람에게로 이동한다. 그러나 결국 늘 성에 차지 않는다. 이는 바로 거지의 행동이다. 왕자는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베풀어 줌으로써 자신의 원하는 것을 채워 나간다.

자비는 기쁨을 부른다

태양이 빛을 뿜듯 착한 본심이 쏟아 내는 자비는,

우리가 이기심을 극복하여 어둠의 시대를 벗어나도록 해 준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자비심이 있다. 집착이 들어간 자비, 최고의

지식인 프라즈나가 들어간 자비가 그것이다. 가족과 친구들을 향한 자비는 보통 집착이 들어 있다.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최고의 자비를 베풀고 싶어 하지만, 이러한 바람에는 질투, 집착, 두려움이 들어 있다. 집착이 있으면 자비를 베풀 때 솔직해지지 못한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스스로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고통이 없어지길 원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불편을 주기 때문이고, 우리를 무섭게 하고, 우리의 고통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관찰하는 명상을 통해서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를 걸러 내고,

미덕이 나오는 근원을 파고들어 가도록 한다. 뚫는다. 미덕의 근원이 바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하고 열린 마음의 자비심이다.

붓다는 "내 가르침이라고 무작정 따를 것이 아니라 이를 관찰하도록 해라. 내가 너를 믿도록 노력하는 것보다 네가 네 자신을 믿도록 하는 것이 더 바른 길이다."라고 말했다. 우리 자신을 믿는 것이 곧 수련이다. 관찰을 할 때는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고 잠시

그것을 유지하는 수련을 한다. 마음에 어떤 대상이 떠올랐다면,

그 대상과 친숙해지는 것이 제일 좋다. 명상을 뜻하는 티베트 어에는 '친숙함'의 의미가 담겨 있다. 수련을 뜻하는 티베트 어에는

'경험하기'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자비를 관찰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도록 한다. 그러다 우리가 또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알아차리게 되면 다시 마음을 자비를 생각하는 곳으로 돌려 놓는다. 이것이 우리가 자비와 친숙해지는 것이며, 자비를 경험하는 것이다.

4부 | 가루다의 길

영원한 것을 없다

가루다의 마음은 용감무쌍하다.

더 이상 '나' 속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가루다의 용감무쌍함은 좌절, 성급함, 권태 등의 이유로 무모하게 행동하는 것과는 다르다. 가루다의 용감무쌍함은 진정한 확신을

의미한다. 이런 용감무쌍함은 평정심을 가져온다. 평정심은 마음이 평정, 즉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평정심을 갖추면, 일상을 유유히 보낼 수 있다. 더 이상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金翅鳥(금시조)

【범】 garuda 가루라(迦樓羅)ㆍ가류라(加留羅)ㆍ계로다(揭嚕茶)라 음역. 묘시조(妙翅鳥)라고도 번역. 인도 신화의 가공의 대조(大鳥). 이상화된 신령스런 새. 사천하(四天下)의 대수(大樹)에 내려 용을 잡아먹고 양 날개를 펴면 336만 리나 된다고 한다. 그 날개는 금색이다. 대승경전에서는 천룡인부중(天龍人部衆)의 하나이고, 밀교에서는 범천(梵天)ㆍ대자재천(大自在天)이 중생을 구하기 위해 이 새의 모습을 빌려 나타난다고 한다. 또는 문수의 화신이라고도 함.

티베트에서는 나이가 드는 것을 기분 좋게 생각한다. 또 다른 한 해를 살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이와는 다른 것 같다. 우리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 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그것이 나이와 질병, 죽음과 관련되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나이가 든다는 것을 우울하게 생각한다.

젊음에서 점점 멀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늙는 것을

괘념치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성장하고 배움을 익혀 가는 변화를 즐긴다.

나이 드는 것이 젊음에서 멀어져서 우울한가?

그것은 변화에 대한 시간이 흐르면서 발생하는 성장과 배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상(無常)의 진리와 존재의 본질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부질없는 생각임을 알게 된다.

나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관찰하도록 가르침을 주신 스승님들께 감사 드리는 마음이다. 스승님들께서는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여러 방법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서 껄껄 웃으시곤 하셨다. 스승님들께서는 "궁극적으로 죽음은 예고 없이 온다."고 말씀하셨다.

그분들이 냉혈한이거나, 나쁜 마음을 품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다. 스승님들께서는 현실을 관찰하는 데서 오는 힘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 힘을 얻으면 희망과 두려움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다. 나는 손톱과 치아가 영우너하지 않다는 것에 저항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여 영적으로 성장할 수도 있음을 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늙어 가는 과정에 들어간다.

탄생은 즐겁고도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

만약 우리가 영원한 것이 없다는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내일 당장 어떤 일이 생길지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을 극복하고 인생을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가루다의 용감무쌍이다.

………

존재의 본질을 관찰하면, 무엇인가를 얻을 것이라는 희망에 집착하는 마음을 놓게 된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대한 집착도 놓을 수 있다. 이는 우리 삶에서 늘상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주며, '별것 아니네.'라는 두둑한 배짱도 가져다 준다. 고통은 어떤 상황이나 사물이 꼭 원하는

방식대로 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욕망 때문에 생긴다.

………

변화하는 현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곧 집착할 희망도 두려움도 없다는 뜻이다. 이를 알면 우리는 곧 홀가분해짐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집착하면서 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현재의 순간을 받아들이고, 현재의 순간을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더욱 넓히는데 사용한다.

‘죽기 전에 해봐야 할 100가지’라는 버킷리스트는 자주 나오는 말이지만 나는 한 가지만 이룩하고 싶다.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지혜와 자비심의 경험이다. 탐·진·치 삼독을 놓아 버리면 지혜와 자비의

종착점에 가게 된다. 흘러가도록 놓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는가? 공간이다. 이는 열림, 무아(無我), 공(空)으로도 알려져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잃었기에 공(空)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공(空)이란 자신의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없어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비움은 우리의 추측이 비워지며 자비로 채워진다. 이것이 착한 본심이고 착한 본심을 개발하는 것이 자유이다. 비우는 훈련을 쌓다보면 집착할 대상이 없다는 인식에 이르게 되고,

내 안의 지혜와 자비가 빛을 내게 된다.

 

희망과 두려움의 경계를 넘어 갈 때 어떤 상황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심이 생기며, 그것이 자유와 기쁨을 가져 오고 그것이 바로

명상의 목적이고 그 자체이다. 티베트 법복을 입고도 무더운 여름의 날씨를 견디는 것은 더워서 싫다는 부정적 생각에서 벗어난

평정심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지혜와 자비가 배양되면 평정심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현대를 살고 있으나 시대와 관계없이 희망과 두려움을 기본으로

한 몇몇 변형된 관점이 존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 영원주의-제행무상과 반대의 개념으로 영원히 존재하면서

바뀌지 않는 창조자가 지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나. 허무주의-윤회나 업 등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삶이 한 번뿐이기에 이번 생에서 잘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었다.

다. 붓다의 관점-붓다는 여러 사물이 서로 관계를 맺어야 완전해진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을 中道라 한다. 사람들은 종종 중도가 永遠주의와 허무주의 사이, 존재와 비존재의 사이의 중간이라고 생각하나 중(中)은 사실상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하는 접근 방식이다. 이는 균형을 갖춘 시각을 말한다. 이분법적인 논리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공(空)이라 하며, 중도를 인도에서는 자유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다.

5부 | 용의 길

행운을 끌어당겨라

마음이 가진 깊이를 알면,

세상이 부리는 찬란하고 본질적인 마법을 볼 수 있다.

“용의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짜증나는 상황이 생기면, 그를 위해 일부러 흥을 돋운다. 

짜증이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기에, 

흥을 돋우면 짜증이 마음에서 떠나게 된다. 우리가 어째서 이렇게 착하고 즐거움이 넘치는지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자아가 단단한 형체가 있는 존재이고 영원하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붓다는 “자아는 사실상 피, 뼈, 기억, 감정, 생각, 인식 등의 집합체, 즉 오온”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집합체를 ‘나’라고 오인하는 순간 온갖 집착이 생겨나는 것이다. 집착은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 되므로 집착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명상 중의 기쁨 체험

어느 날 명상하던 중 갑자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이 투명하게 나타났고, 이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꿈도 아니었고 신탁도 

아니었다. 그것은 대지에 박혀 있는 고정된 상태와 움직이는 유동적인 상태의 중간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느낌이었다. 나는 더 이상 모든 생각, 언어, 현상이 고정된 상태로 지속된다고 볼 수 없게 되었다. 내 자신도 덧없는 존재인데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 또한 실체가 없다는 것이 너무도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진리를 만난 나의 기쁨은 컸고 내 마음이 온갖 관념에서 자유로워졌으며 세상은 활짝 열렸다.

 

하늘의 마음이 된다는 것은 호랑이의 만족, 사자의 기쁨,

가루다의 평정심, 용의 지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라는 것은 현재에 있는 기억일 뿐이고

미래라는 것은 현재에서 투사하는 환상일 뿐이다.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는 것은, 그 순간 속으로 우리의 마음이

안정을 취하기 시작햇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음이 편안해지면

우리는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과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현재에 있는 기억일 뿐이다. 그리고 미래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재에서 투사하는 환상이다.

용의 지혜는 우리에게 침착하라고, 흘러가게 놓아두라고,

지금 이 순간에만 충실하라고 말한다. 지금 이 순간에만 모든 힘의 마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6부 | 삶을 다스리기 위한 길

자신의 삶을 지배하라

성공을 부르는 조건이 올바로 성립되면,

바람의 말은 질주를 넘어 하늘로 비상한다.

“바람의 말에 올라탐으로써, 우리는 세속적인 삶 속에서 영적인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착한 본심에 대한 확신을 개발함으로써 풍요로운 천국을 만들 수 있다. 자비를 실천하는 용기는 우리에게 지상에서 천국을 구현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직업에 관계없이 삶을 지배하며 살아갈 수 있다.

마음을 어떻게 쓰고 인생을 어떻게 사는지에 따라 바람의 말은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다.”

 

깨달음이란 우리가 ‘나’라는 관념으로 투사하여 멋대로 색칠하기 이전의 순수한 본래 모습이다.

 

진정으로 강하고 싶다면 먼저 자애로워라. 붓다는 “모두가 잘 되를 바라면, 네가 먼저 그렇게 되리라.”하셨으니 붓다의 황금률이다.

사무량심(四無量心) 중 맨 앞의 자비가 최고의 무기임을 언제나 잊지 말라.

자신의 삶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이러한 샴발라 가르침을 직접 경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지혜가 담긴 짧은 글이 적힌 메모지를 냉장고에 붙여 놓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매우 달콤한

재치이다. 그러나 이런 글을 생활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저 장식일 뿐이다. 이 책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고도 통치의 전략인 관찰하는 학습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감동은 곧

수명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 책의 내용을 삶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찰을 통하여 책에서 말하는 내용들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명상의 힘을 갖는다. 이는 밀가루에 물을

부어 반죽하는 것과 같다. 밀가루와 물이 잘 엉기어 반죽 덩어리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반죽해야 한다. 이렇게 반죽을 하듯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지 않으면, 우리들 대부분은 진리를 듣는다 해도 그 진리를 계속 붙잡고 있지 못한다. 다시 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방법을 터득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모든 사람은 이러한 원리에 다라 수행을 했고,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려 노력했다. 이들처럼 우리도 매일 일정한 시간을 내어 명상을 하고, 이와 더불어 일상 속에서도 이러한 진리를 계속 관찰한다면 확실한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방법을 충분히 터득하면, 결국에는 인간의 타고난 신성함이 나타나도록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성공을 부르는 조건이 올바로 성립되면, 바람의 말은 단순히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날아오르게 된다. 수련의 효과가 매우

느리게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비록 10퍼센트의 노력일지라도

우리의 생각보다 빨리 세상이 깨어날 것이다. 미덕은 태양 10만 개만큼의 능력을 갖고 있다. 만약 우리들 중 몇몇이 하루 중에 단지 10퍼센트의 시간만이라도 미덕을 향해 마음을 돌린다면,

태양 수십 억 개만큼의 빛이 세상을 덮을 것이다. 샴발라의 가르침에 따르면, 빛이 비치면 모든 살아 있는 만물이 행복을 성취하고

새로운 황금의 시대가 밝아 온다고 한다.

·다르마 -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진리.

그리고 그 진리를 표현하는 가르침이다.

·드랄라 - 글자 그대로는 '적을 넘어서'의 의미. 축복 에너지로써,

공격적인 성품을 극복하면 일어난다.

·드립 - 부정적인 감정과 자기중심적인 사고 때문에 일어나는 탁한 기운과 오염된 마음이다.

·룽타 - 바람의 말. 성공을 이룰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으로,

도덕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생긴다.

·린포체 - 티베트에서 존귀한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호칭으로

'귀중한 보석'이라는 뜻이다.

·삼사라 - '순환하는'의 의미.

고통과 불만족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을 말하며, 무지 때문에 생긴다.

·착한 본심 - 절대적인 순수,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다.

·카르마 - '나'와 '남'으로 구분하는 잘못된 믿음에 기본을 둔 혼돈스러운 행동이다.

원인과 결과가 서로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의도적인 행동, 말, 마음을 말한다.

·클레샤 - 무지에 뿌리를 둔 혼돈된 감정을 말한다.

·파유 - 통찰력을 말한다.

·프라즈나 - '최고의 지식', 예리한 통찰력을 말한다.

티베트의 문양에서는 칼로 형상화되어 있다.

명상하는 자세

1. 척추를 곧게 펴되, 자연스러운 곡선이 되도록 힘을 뺀다.

2. 두 손은 다리에 올리고 힘을 뺀다.

3. 두 팔과 어깨는 편안하게 힘을 뺀다.

4. 턱을 살짝 당기되, 목이 긴장하지 않는 범위까지만 당긴다.

5. 눈은 힘을 뺀 채 편안하게 내리깔고, 완전히 감지 말고 반만 감는다.

6.얼굴과 턱관절 전체를 자연스러우면서도 편안하게 이완시킨다.

7. 바닥에 앉아서 할 때는 방석 위에 앉아 양반 다리나 반가부좌를 한다. 의자에 앉아서 할 때는 두 발을 방바닥에 댄다.

호흡 명상

1. 앞에서 설명한 자세를 취한다.

2. '나는 지금 마음을 다하여 평화를 키우는 수련을 시작한다.'라고 자신에게 말하며, 지금부터 수련을 시작한다는 인식을 분명하게 한다.

3. 호흡에 마음을 집중한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느낌을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 이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안정과 휴식을 주며, 마음의 산만함을 줄여 준다. 절대로 숨을 인위적으로 길게 쉬거나 강하게 쉬는 등의 행동을 하면 안 된다. 자연스러운 호흡을 단순히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다. 만약 호흡이 느껴지지 않거나, 이 수련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들이쉬고 내쉬는 숨에 숫자를 붙여 숨을 세도 된다. 들이쉰 후 내쉬면서 '하나', 다시 들이쉰 후 내쉬면서 '둘' 하는 식으로 진행한다. 숫자는 '일곱'까지 세거나 '수물하나'까지 세는데, 숫자를 다 셌으면 다시 처음부터 세어 나간다.(붓다가 호흡법에 대해 말씀한 《안반수의경(아나파나사티)》에는 '열'까지 숫자를 세는 것이 가장 좋다고 나와 있다. ……옮긴이) 만약 잡념이 들어 숫자를 몇까지 셌는지 놓쳤다면 다시 '하나'부터 세도록 한다. 집중력이 향상되면 더 이상 숫자를 세지 않아도 된다.

4.수련 중 어떤 생각이 든다면, 그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그 생각에 '생각' 또는 '잡념' 등으로 이름을 붙여 보라. 자신이 잡념에 빠졌다고 알아차리게 되면 그 잡념은 곧 없어진다. 그리고 다시 호흡에 집중하며, '지금 나는 호흡에 다시 마음을 집중한다.'라고 알아차린다.

5.이 수련이 힘이 들거나 이해하기 어렵다면 전문가에게 지도를 받는 것이 좋다.

관찰하는 명상

1. 호흡에 마음을 잠시 집중하여, 마음을 안정시킨다.

2. 안정이 되었다고 느껴지면 특정한 생각이나 의도에 '욕심', '분노' 등의 이름을 붙여, 그 단어를 떠올려 본다.

3. 이를 명상하는 대상으로 삼고,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즉시 원래의 단어에 마음을 집중한다.

4. 떠올린 단어의 의미를 마음으로 느끼기 위해, 떠올린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단어와 관련된 이미지나 생각을 떠올려 본다.

5. 단어의 의미가 가슴 깊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어떤 인위적인 행동도 하지 말고, 그냥 두도록 하라.

6. 수련을 마무리하며 단어적 의미를 가슴에 담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기서 '의미'란 5번에서 느낀 직접적인 체험이며, 사전에 나와 있는 '의미'라는 단어의 뜻과는 다르다.

7. 이제 관찰로 느낀 점을 마음에 품고 세상 속에서 활동하라. 예를 들어 앞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관찰했다면, 당신이 관찰로 느낀 것은 감사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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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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