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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승려와 철학자/장 프랑수아 르벨 · 마티유 리카르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1.30|조회수118 목록 댓글 1

A Biologist-Turned-Buddhist and His Philosopher Father on the Nature of the Self and the True Measure of Personal Strength

자아의 본질과 개인 력량力量의 진정한 척도에 대한 – 

불자로 거듭난 생물 학자와 그의 철학자 아버지

“You first need to have an ego in order to be aware that it doesn’t exist.”

"에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 한다면 

먼저 자아(에고)를 가져야 합니다."

 

By Maria Popova

For the past few centuries, Western philosophy has maintained that human beings are driven by enlightened self-interest — a view predicated on the needs and desires of a solid self. Meanwhile, Eastern philosophies and spiritual traditions have long considered the self an illusion — a view with which modern science has recently begun to side.

지난 수세기 동안 서구 철학은 인간은 계몽된 이기심에 의한 자기이익(사리추구), 즉 견고한 자기자신의 필요와 욕망에 근거하는 관점에 의해 움직인다고 주장해왔다. 한편, 동양 철학과 영적 전통은 오랫동안 자아를 환상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는 현대 과학이 최근에 인정함이 시작된 견해입니다.

 

These contradictory conceptions of the self as a centerpiece of identity and success, per the Western view, and as an illusion, per the Eastern one, are what French philosopher Jean-François Revel and his biologist-turned-Buddhist son, Matthieu Ricard, explore in their extraordinary conversation, published as The Monk and the Philosopher: A Father and Son Discuss the Meaning of Life (public library).

,

프랑스의 철학자 장 프랑수아 르벨 (Jean-François Revel) 과 생물 학자

였던 불자인 그의 아들 Matthieu Ricard (마띠유 리카르드) 는 자아는

정체성과 성공의 중심인 서양인의 관점과, 환상이라는 개념을 동양적 관점에서 서로 모순된 개념을 묘사한다 .

승려와 철학자 : 아버지와 아들이 삶의 의미에 대해 토론 대화에서

 

What makes the conversation particularly compelling is the unusual pairing of perspectives — it is not only an intergenerational dialogue between a father and a son who both possess enormous intellectual potency, but a dialogue between Western philosophy and Eastern spirituality with a strong emphasis on science. The scientific perspective, in fact, comes not from Revel but from Ricard, who gave up a promising career as a molecular biologist — he had worked with Nobel laureate Jacques Monod — to move to Nepal and study Tibetan Buddhism. Doubly significant is Ricard’s route to Buddhism: Raised in the strongly secular home of two prominent French intellectuals — his mother, Revel’s wife, was the painter Yahne Le Toumelin — he grew up with only an intellectual curiosity toward religion and turned to Buddhism not out of disappointment with Western faiths but out of what his father calls “a state of indifference to any religion, a kind of religious weightlessness.”

대화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관점의 특별한 결합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세대 간 대화 일뿐만 아니라 서양 철학과 과학에 중점을 둔 동양 영성 간의 대화입니다.

과학적 관점은, 사실, 리카르드가 네팔로 이주하고 티베트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노벨 수상자 Jacques Monod 자크 모노드와 함께 일하며 분자 생물학자로서의 유망한 경력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인 르벨의 부인은 화가 야네 르 투멜린이라는 두 명의 저명한

프랑스 지식인의 강한 세속적인 집에서 자라난 그는 종교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자랐으며, 불교로 눈을 돌렸는데. 서양 신앙에 실망해서가 아니라, 그의 부친이 "어떤 종교에 대한 무관심 상태, 일종의 종교적 무중력 상태"라고 부른 것에서 나온다.

아버지와 함께 한 매튜 리카르드(오른쪽), 장 프랑수아스르벨(왼쪽)

Matthieu Ricard (right) with his father, Jean-François Revel (Photograph: Raphaelle Demandre)

So in 1999, when Revel traveled to Ricard’s home in Kathmandu and the two sat down for this remarkable intellectual encounter, it was the philosophical rather than the religion dimensions of Buddhism that took center stage as the father and son contemplated such immutable human concerns as free will, the meaning of life, the value of scientific progress, and the pillars of the good life. As they speak, each addresses the other as much as he is confabulating with himself, which results in a masterpiece of the art of conversation at its most elevated and ennobling — an exchange of dynamic contemplation between and within minds, driven not by the self-righteous slinging of opinions but by a deep commitment to mutual understanding and to enriching the shared pool of wisdom.

그래서 1999년, Revel르벨이 카트만두에 있는 Ricard리카르드의 집을 여행했을 때 이 두 사람이 이 놀라운 지적 만남을 위해 앉았을 때,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자유의지, 삶의 의미, 과학적 진보의 가치, 그리고 좋은 삶의 기둥과 같은 불변의 인간의 관심사를 숙고하면서 중심 무대에 올려졌다. 불교의 종교 차원이 아닌 철학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말할 때, 각자는 그가 스스로를 확신하고 있는 만큼 서로에게 말을 걸고, 그것은 가장 고상하고 매혹적인 대화의 예술의 걸작이 됩니다.

독선적인 의견 조율이 아니라 상호 이해와 지혜의 공유 풀을 풍성하게 하기 위한 깊은 헌신에 의해 추진되는, 마음 속에서 역동적인 사색을 교환하는

결과를 낳는다. 지혜의 공유 된 공동체를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One of the most pause-giving dimensions of the conversation deals with this notion of the self and its illusory nature. When Revel takes issue with the Buddhist concept of reincarnation, pointing out its mystical and scientifically ungrounded suppositions, Ricard emphasizes its metaphorical and philosophical importance over its literal interpretation. Embedded in that notion, he suggests, is the key to unmooring ourselves from the tyranny of the self in the here and now:

대화에 있어서 가장 고통을 주는 차원 중 하나는 자아에 대한 개념과 환상에 불과한 본성을 다룬다는 것입니다..

Revel르벨이 불교의 환생 개념에 문제를 제기 할 때, 신비롭고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추측을 지적하면서, Ricard리카르드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보다 은유 적이고 철학적인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이러한 개념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현재와 현재 자신의 폭정으로부터 벗어나는 열쇠라고 제안한다.

 

It’s important to understand that what’s called reincarnation in Buddhism has nothing to do with the transmigration of some “entity” or other… As long as one thinks in terms of entities rather than function and continuity, it’s impossible to understand the Buddhist concept of rebirth.

불교에서 환생이라고 불리는 것은 어떤 "실체"의 전환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능이나 연속성보다는 실체에 대해 생각하는 한, 불교의 부활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Since Buddhism denies the existence of any individual self that could be seen as a separate entity capable of transmigrating from one existence to another by passing from one body to another, one might well wonder what it could be that links those successive states of existence together… It’s seen as a continuum, a stream of consciousness that continues to flow without there being any fixed or autonomous entity running through it.

불교는 한 존재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 다닐 수 있는 별개의 존재로 보여질 수 있는 어떤 개인의 존재도 부인하기 때문에, 그 연속적인 존재의 상태들을 함께 연결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할 것입니다. 그것은 연속체를 통해 흐르는 고정된 혹은 독립적인 실체가 없이도 계속해서 흐르는 의식의 흐름으로 간주됩니다.

Illustration from ‘The Magic Boat’ by Tom Seidmann-Freud, Sigmund Freud’s niece.

시그먼드 프로이트의 조카 톰 시드맨 프레드의 '마법의 보트'에 나오는 삽화

Ricard likens this concept to “a river without a boat descending along its course” and is careful to point out a common misconception: Although Buddhism denies the existence of the individual self, it doesn’t deny individual consciousness. He explains:

리카르드는 이 개념을 "배가 흐르지 않는 강"이라고 부르며, 일반적인 오해를 지적하는데, 불교는 개인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개인의 의식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The fact that there’s no such discontinuous entity being transferred from one life to the next doesn’t mean that there can’t be a continuity of functioning. That the self has no true existence doesn’t prevent one particular stream of consciousness from having qualities that distinguish it from another stream. The fact that there’s no boat floating down the river doesn’t prevent the water from being full of mud, polluted by a paper factory, or clean and clear. The state of the river at any given moment is the result of its history. In the same way, an individual stream of consciousness is loaded with all the traces left on it by positive and negative thoughts, as well as by actions and words arising from those thoughts. What we’re trying to do by spiritual practice is to gradually purify the river. The ultimate state of complete clarity is what we call spiritual realization. All the negative emotions, all the obscurations that render the underlying wisdom invisible, have then been dissolved.

한 생명체에서 다음 생명체로 이행되는 그러한 불연속적인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 기능의 연속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아가 참된 존재가 없다고 해서 의식의 한 특정 흐름이 다른 흐름과 구별되는 자질을 갖는 것을 막는 것은 아닙니다.

강을 떠다니는 보트가 없다는 사실이 물이 진흙 투성이가 되거나 종이 공장에 의해 오염되거나 깨끗하고 깨끗하게 되는 것을 막지는 못 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강의 상태는 그 역사의 결과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의식의 개별 흐름은 긍정적 사고와 부정적인 생각뿐만 아니라 그 생각에서 발생하는 행동과 말로 인해 남아있는 모든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 수행으로 하는 일은 점차적으로 강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완전한 명확성의 궁극적인 상태는 우리가 영적 실현(깨달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 근본적인 지혜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모든 은폐(무지)는 해체되었습니다

Echoing the great Zen teacher D.T. Suzuki’s assertion that “the ego-shell in which we live is the hardest thing to outgrow,” Ricard argues that this recognition of individual consciousness is central to the dissolution of the ego-shell:

"우리가 사는 자아 - 껍질은 생존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위대한 젠 선생 스즈키의 주장을 반영하듯 DT 리카르드는 개인 의식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자아 - 껍질의 해체에서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It’s not a question of annihilating the self, which has never really existed, but simply of uncovering its imposture. Indeed, if the self did have any intrinsic existence we’d never be able to bring it from existence into nonexistence.

그것은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는 자아를 파괴하는 문제가 아니라

단지 그 실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실제로, 만약 그 자신이 어떤 본질적 존재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존재로부터 존재하지 않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A nonexistent self can’t really be “abolished,” but its nonexistence can be recognized. What we want to abolish is the illusion, the mistake that has no inherent existence in the first place… whatever we judge to be disagreeable or harmful. But as soon as we recognize that the self has no true existence, all these attracting and repelling impulses will vanish… The self has neither beginning nor end, and therefore in the present it has no more existence than the mind attributes to it.

존재하지 않는 자아는 실제로 “폐지”될 수 없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될 수 있다.

우리가 없애고 싶은 것은 애초에 내재된 존재가 없는 환상, 실수입니다. 불쾌하거나 해롭다고 판단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만 우리가 자아가 참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매력과 반발의 충동은 사라질 것이다… 자아는 시작도 끝도 없고, 따라서 현재에는 마음이 그것에 부여하는 속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다.

 

Ricard, who has since written about the secret of happiness, considers how our natural, everyday experience of the “I” mutates into the illusion of the self, from which all of our suffering stems:

그 이후로 행복의 비밀에 관해 쓴 리카르드 (Ricard)는 "나"에 대한 우리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경험이 어떻게 우리의 모든 고통에서 나오는 자아의 환상으로 변하는지를 생각합니다.

 

There’s a natural feeling of self, of “I,” which makes you think “I’m cold, I’m hungry, I’m walking,” and so forth. By itself, that feeling is neutral. It doesn’t specifically lead to either happiness or suffering. But then comes the idea that the self is a kind of constant that lasts all your life, regardless of all the physical and mental changes you go through. You get attached to the idea of being a self, “myself,” a “person,” and of “my” body, “my” name, “my” mind, and so on. Buddhism accepts that there is a continuum of consciousness, but denies any existence of a solid, permanent, and autonomous self anywhere in that continuum. The essence of Buddhist practice is therefore to get rid of that illusion of a self which so falsifies our view of the world.

자연스러운 느낌의 "나"는 "나는 추워서 배고프다"등등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 자체로, 그 느낌은 중립적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행복과 고통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 당신은 모든 육체적, 정신적 변화에 상관없이 자신이 당신의 모든 삶을 지속시키는 일종의 상상이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당신은 자신, "나", "사람", 그리고 "내"몸, "나의"이름, "내"마음 등의 개념에 붙어 있습니다.

불교는 의식의 연속체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 연속체의 어느 곳에서나 견고하고 영구적이고 자율적 인 자아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그러므로 불교 실천의 본질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위태롭게 하는 자아의 착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Illustration by Mimmo Paladino for a rare edition of James Joyce’s Ulysses.

When his father probes how one is expected to effect positive change in the world without a sense of personal agency — another common critique by those who misunderstand the foundational philosophies of Buddhism — Ricard responds:

그의 아버지가 어떻게 개인적인 기관의 감각 없는 세상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는지 조사할 때 - 불교의 근본 철학을 오해하는 사람들에 의한 또 다른 일반적인 비평 - 리카르드 (Ricard) 의 답변

 

The wish to allay others’ suffering, which may inspire a whole lifetime’s work, is an admirable ambition. It’s important to distinguish between negative emotions, like desire, hatred, and pride, that solidify still further our self-centered outlook, and positive ones, like altruistic love, compassion, and faith, that allow us to free ourselves little by little from those negative and self-centered tendencies. Positive emotions don’t disturb our mind, they reinforce it and make it more stable and more courageous.

일생 일대의 노력에 영감을 줄 수 있는 모르는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소망은 존경할 만한 야망이다.

욕구, 증오, 자존심 같은 부정적인 감정과 아직도 자기 중심적인 관점을 더욱 공고히 하는 긍정적인 감정, 그리고 부정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경향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해주는 이타적인 사랑, 동정심, 믿음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긍정적인 감정은 우리의 마음을 방해하지 않고, 그것을 강화시키고, 그것을 더 안정적이고 더 용기 있게 만든다.

욕망, 증오, 자존심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In a sentiment that calls to mind David Foster Wallace on the dark side of ambition, Ricard makes an important distinction between the two types of ambition:

야망의 어두운 면에 있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를 떠올리게 하는 심정에서 리카르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형의 야망을 구별한다.

 

Positive ambition — the pursuit of others’ well-being by all possible means, the fervent wish to transform oneself — is one of the cardinal virtues in Buddhism. In fact, Buddhists nurture one main ambition without any limits, that of removing the suffering of all living beings throughout the whole universe. That sort of ambition stops you succumbing to inertia and makes you strong-minded and determined. So the distinction between the positive and negative, selfless and self-centered sides of ambition is important. You could say that ambition is positive if its aim is to help others. That’s the simplest definition. Conversely, ambition is negative if achieving it is detrimental to others, and an emotion is negative if it destroys your own and others’ inner peace.

긍정적 인 야망 -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열렬한 소망은 불교의 근본적인 덕목 중 하나입니다. 사실 불교 신자들은 전 우주에 걸쳐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고통을 없애려는 한계도 없는

하나의 주요한 야망을 키워낸다. 그런 종류의 야망은 당신이 관성에 굴복하는 것을 멈추게 하고 당신을 강하게 만들고 결단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야망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사심 없는 면과 자기 중심적인 면의 구별이 중요합니다.

그 목표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면 야망이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간단한 정의입니다. 반대로, 성취가 타인에게 해롭다면 야망은 부정적이며, 자신과 타인의 내적인 평화를 파괴하면 감정은 부정적입니다.

 

He illustrates this with a verse from the eight-century Buddhist sage Shantideva:

그는 8세기 불교의 현자 샨티데바(Shantideva) 의 한 구절로 이것을 설명한다. (Shantideva)

 

All the joy the world contains

온 세상 모든 기쁨은

Has come through wishing happiness for others.

다른 사람들을 위한 행복을 기원함으로 부터.

All the misery the world contains

세상이 안고 있는 모든 불행

Has come through wanting pleasure for oneself.

스스로 쾌락을 갈망하는 데서 오는 것.

Is there need for lengthy explanation?

긴 설명이 필요한가?

Childish beings look out for themselves,

천진난만한 존재들은 스스로를 돌보고,

While Buddhas labor for the good of others:

붓다는 다른 이들을 위해 노력하지만:

See the difference that divides them!

그들을 나누는 차이를 보라!

 

With that great Eastern capacity for holding paradox and fusing contradictory concepts into a unity of wisdom, Ricard argues that shedding the ego-shell actually requires first fortifying our ego — more than that, he suggests, true altruism is the product not of selflessness but of a strong sense of self:

역설을 품고 모순적 개념을 지혜의 합일로 유지 하려는 위대한 동양의 능력으로, 리카르드는 자아 - 껍질을 벗기는 것은 실제로 우리의 자존심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 진정한 이타주의는 사심 없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강한 의식 감각:

 

Buddhism’s goal of uncovering the “imposture of the ego,” this ego that seems so powerful and causes us so much trouble while having no existence in itself. Nevertheless, as a first step it’s important to stabilize this feeling of a self in order to distinguish all its characteristics. You could say, paradoxically, that you first need to have an ego in order to be aware that it doesn’t exist. Someone with an unstable, fragmented, amorphous personality has little chance of being able to identify that powerful feeling of “me,” as a prior step to recognizing that it doesn’t correspond to any real entity. So you need to start with a healthy and coherent self to be able to investigate it. You can shoot at a target, but not in fog.

부처의 목표는 "자아의 사칭(詐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자존심은 너무 강력 해 보이며 그 자체로, 존재 자체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단계로서 모든 특성을 구별하기 위해 자아에 대한 이러한 느낌을 안정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설적인 말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선 자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안정하고 단편적이며 비정형 성격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어떤 실제 존재와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한 사전 단계로서 "나"라는 강력한 감정을 식별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탐구를 하기 위해서는 건강하고 일관된 자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표적을 향해 쏠 수는 있지만, 안개 속에서는 쏠 수 없다.

[…]

But it’s important not to think that once the imposture of the ego is unmasked you find yourself in a state of inner nothingness, to the point that the destruction of the personality renders you incapable of acting or communicating. You don’t become an empty container. It’s quite the opposite. When you’re no longer the plaything of an illusory despot, like the shadows in Plato’s cave, your wisdom, love for others and compassion can be freely expressed. It’s a freedom from the limitations imposed by attachment to a self, not at all an anesthesia of the will. This “opening of the eyes of wisdom” increases your strength of mind, your diligence, and your capacity to take appropriate and altruistic action.

그러나 일단 자아의 가식이 벗겨지면 내면의 무의미한 상태, 인격의 파괴로 인해 행동하거나 의사 소통을 할 수 없게 만들 정도로, 당신은 내면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대는 빈 컨테이너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플라톤의 동굴에 있는 그림자와 같은 환상적인 전제 군주의 놀이기구가 아닐 때, 당신의 지혜,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랑과 연민은 자유롭게 표현 될 수 있습니다. 의지의 마취가 아닌, 자신에 대한 애착에 의해 부과된 제한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지혜의 눈을 여십시오"는 마음의 힘, 근면함, 적절하고 이타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을 증가시킵니다.

 

Revel contrasts this with the West’s “cult of the self” and our civilizational emphasis on “the strong personality” as a hallmark of success, questioning whether there can be a common ground between cultural and philosophical traditions so diametrically opposed in this regard. But Ricard, once again, meets the problem with semantic lucidity that melts away the apparent conflict:

Revel은 이것을 서구의 "자아의 문화"와 대조하고 우리의 문명사회는 성공의 특징으로 “강한 인격”을 강조하면서, 이 점에서 그렇게 정반대되는 문화적 전통과 철학적 전통 사이에 공통점이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Ricard는 다시 한 번 명백한 갈등을 해소하는 의미적 명료함으로 문제를 만난다.

 

If by personality you mean exacerbation of the ego, simply to have a strong personality seems to me, unfortunately, a highly dubious criterion of success. Hitler and Mao Tse-tung had very strong personalities.

만약 당신이 성격에 의한 자존심의 악화를 의미한다면, 단순히 성격을 강하게 하는 것이 불행히도 성공에 대한 매우 모호한 기준으로 보입니다.

히틀러와 마오 쩌둥은 매우 강한 인격을 가졌다.

 

Illustration by André François from ‘Little Boy Brown’ by Isobel Harris.

Echoing Bertrand Russell’s famous assertion that “construction and destruction alike satisfy the will to power, but construction is more difficult… and therefore gives more satisfaction to the person who can achieve it,” Ricard adds:

버트 란드 러셀 (Bertrand Russell)은 "건설과 파괴가 모두 권력에 대한 의지를 충족 시키지만 건설은 더욱 어렵다... 따라서 그것을 성취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만족을 안겨 준다"고 주장했다 .

 

It’s important not to confuse strong individuality and strength of mind. The great teachers I’ve been able to meet had indomitable strength of mind. You could say they had very impressive personalities, and that they radiated a sort of natural strength that everyone who met them could perceive. But the big difference was that you couldn’t find the slightest trace of ego in them. I mean the kind of ego that inspires selfishness and self-centeredness. Their strength of mind came from knowledge, serenity, and inner freedom that were outwardly manifested as an unshakable certainty. They were worlds apart from Hitler, Mao Tse-tung and the like, whose powerful personalities arose from an unbridled desire to dominate, and from pride, greed, or hatred. In both cases, we’re faced with immense power, but in the first that power is a flow of constructive altruism, while in the second it’s negative and destructive.

강한 개성과 정신력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만난 위대한

선생님들은 불굴의 정신력을 지녔습니다. 당신은 그들이 매우 인상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인지

할 수 있는 일종의 자연적 힘을 발산시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차이는 당신이 그들 안에서 조금도 자아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기심과 자기 중심성을 자극하는 그런 자아를 의미합니다. 그들의 마음의 힘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지식, 평온, 그리고 내면의 자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히틀러, 마오쩌둥 등과는 다른 세계였는데, 그들의 강력한 성격은 지배하려는 억제되지 않는 욕망에서 비롯되었고, 자부심,

탐욕, 증오에서 생겨났습니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엄청난 권력에 직면 해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권력이 건설적인 이타주의의 흐름인 반면,

두 번째에서는 부정적이며 파괴적입니다.

 

The Monk and the Philosopher is a remarkable read in its totality, addressing with enormous depth and dimension such aspects of the human experience as happiness, suffering, education, ethics, and love. Complement it with D.T. Suzuki on how Zen can help us cultivate our character and Jack Kerouac’s Zen-inspired meditation on the self illusion and “the golden eternity,” then revisit Albert Einstein and the Indian philosopher Tagore’s historic conversation entwining Eastern and Western perspectives with great mutual curiosity and goodwill.

승려와 철학자 는 인간의 경험을 행복, 고통, 교육, 윤리, 사랑 등 엄청난 깊이와 차원으로 다루면서 총체적으로 주목할만한 읽을거리이다. 어떻게 선( Zen)이 우리의 인격을 함양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D.T. 스즈키와 함께 보완하고, 잭 케루아크의 선인( Zen人)이 자아 착상과 "황금의 영원"에 대해 명상을 한 다음,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인도 철학자 타고르의 역사적인 대화를 상호 호기심과 호의로 재조명해본다.

33. 과학과 구도의 삶의 양립-가능하나, 두 개의 의자에 앉을 수 없고,

양 끝이 뾰족한 바늘로 바느질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자는 결코 불편한 관계에 있지 않다.

다만 어느 한 편이 지나치게 한 편을 침범할 때는 달라진다.

 

34. 과학이론은 새로운 이론에 대체되면서 낡아가나 불교의 교리나 마음의 탐구는 진정한 내면의 변화로 나타날 때 완전히 살아있는 탐구,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탐구가 된다. 불교와 같은 형이상학적 전통은 낡을 수가 없다.

삶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40. <마르크스도 예수도 아닌> <전체주의의 유혹> 이 책들은 정치적 전체주의와 종교적 전체주의에 대한 이중의 부정을 내포한 책이다.

전체주의가 나쁜 것은 이론의 일부가 오류임을 주장하는 개인의 수정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43. 불교는 종교인가, 철학인가?-철학과 종교를 이어주는 다리

 

45. 불교는 종교인가, 지혜인가, 형이상학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

달라이 라마-“불교는 참 안됐다. 종교인들은 불교가 무신론적 철학이고

마음의 과학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하고, 철학자들은 불교를 철학에 끼워주지 않고 종교에 결부시키면서 거절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어디에도 시민권이 없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불교가 종교와 철학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될 수 있게 만드는 장점이다.”

만약 종교라는 것이 신자 스스로 그 교리의 참뜻을 재발견해야 할 필요 없이 맹목적인 신앙행위에 의해 받아들여진 교리에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신앙이 내적 진리의 발견으로부터 생겨나는 내적이고 확고부동한 확신이나 이러한 발견에 대한 경이감으로 이해될 때 불교는 신앙으로서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많은 기독교도들과 많은 사람들이 유신론적 전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교로 간주하지 않는다.

불교는 교리가 아니다. 부처는 자신의 가르침을 검토하고 성찰해야지,

자신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항상 진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불교도는 부처를 신이나 성인으로서가 아니라 최고의 경지에 오른 현자로서, 깨달음의 화신으로서 숭배한다.

 

47. 불교는 고통이 욕망, 집착, 증오, 자만, 질투, 무분별, 그리고 마음을 동요시키고 혼란과 불안에 빠뜨리는 ‘부정적’ 혹은 ‘몽매적’이라고 불리는 모든 심적 요인들로부터 나온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자아’의 개념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자아에 대한 집착은 실제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집착의 대상인 자아는 어떠한 진정한 실재도 갖고

있지 않다. 자아란 다양한 상호 의존적인 요소들의 일시적 결합에 지성이

붙여놓은 이름표에 불과하다.

 

49. 마티유 - 최근 몇 년 전까지도 티베트에 소설 같은 허구의 문학은 없었음은 사실입니다. 허구가 아니라도 현실을 갖고 쓸 것이 충분히 많았습니다.

52.불교는 행복과 고통의 메카니즘을 분석하고 분해한다. 고통은 어디에서 기원하며 원인은 무엇이고 치유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을 한다. 삶의 일상적인 목적인 권력, 부, 명예, 감각적 쾌락 따위는 일시적인 만족을 가져다 줄 수는 있지만 결코 지속적인 만족의 원천은 될 수 없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불만으로 바뀐다. 우리는 사는 동안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에 물이 마른 강에 그물을 던지는 어부만큼이나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53. 자아란 다양한 상호 의존적인 요소들의 일시적 결합에 지성이 붙여놓은 이름표에 불과하다. 자아의 속임수를 폭로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무지,

다시 말하면 사물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시적인 무능력이다.

 

57. 명상을 통하여 자아의 비실재성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생각의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탁월한 방법이다.

 

61. 환생과 윤회에 관하여

사후 의식의 연속성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계시적인 진리의 문제다.

불교에서 환생은 그 어떤 실체의 전생(轉生)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기능이나 지속성이 아닌 실체적인 말로 이해하는 한, 윤회라는 불교의 개념은 이해될 수 없다. 어떤 실(絲)도 윤회라는 목걸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계속적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유지되는 것은 인격의 동일성이 아니라 제약된 의식의 흐름이다.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나룻배가 없는 강물에 비유할 수 있다.

 

62. 기도나 의식, 깃발

미신과는 거리가 멀며 우리가 정신을 차리도록 끊임없이 자극하는 수단과 방편에 불과하다. 정신을 환기시키는 용도일 뿐. 가령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은 이 기도 위로 지나가는 바람이 어디로 가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고통과 그 원천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해주시라는 바람이다. 이때는 자연 자체가 교과서가 된다.

63. 티베트사람들은 깃발을 염색하여 그것들을 바람에 나붓기게 하면서

이렇게 기원합니다. '이 기도 위로 지나가는 바람이 어디로 가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고통과 고통의 원천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요.

그리고 행복과 행복의 원인을 알수 있도록 해주십시요.' 그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보살의 기원을 되풀이 하는것입니다.

65. 일상적인 소원을 이루려는 것보다는 공덕을 쌓음으로써 마음을 정화하고 지혜로 향하기 위해 기도하라.

 

66. 주문-어떤 불운으로부터가 아니라 방심이나

정신적 혼란으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68. 존재하지 않는 자아를 소멸시킬 수는 없지만 부존재를 식별할 수는

있으며, 자아에는 기원도 종말도 없으니 우리의 세계관을 왜곡시키는

자아의 환상을 일소해야 하는 것이다.

 

73. 명상 과학과 의식의 흐름

생각을 지배하려는 시도는 맨 처음이 어렵다. 처음에는 폭포였다가 강으로 변하고 급류의 과정을 거쳐 고요한 날씨의 바다처럼 변한다. 마침내 바다의 깊숙한 곳처럼 흔들리지 않는 ‘투명한 의식’의 상태에 도달하는데 이러 상태에서는 마음은 완벽히 맑아지고 이리저리 따지는 생각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대상이 없는 순수한 각성 상태.

 

76. 환생

부처는 죽음은 단지 삶의 한 단계이며 의식은 죽음 후에도 지속된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분별할 능력이 없다. 항상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이니 믿는다.

 

80. 키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결코 일어난 적이 없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은 기적이 아니다.”

 

81. 스스로 높은 정신적 단계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교 계율의 4대 위반 중의 하나.

 

83. 육체와 정신 그리고 명상

불교에서는 유물론적 관점과 관념론적 관점 사이의 대립, 정신과 물질 사이의 대립을 잘못 제기된 문제로 본다. 사실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생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확고부동한 물질’을 ‘비물질적’ 정신에 대립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물론이 정신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 것은

물질을 물화(物化)했기 때문이다.

 

94. 불교는 어떤 불멸의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속성을 고려한다. 그것은 12연기설처럼 상호의존적이다.

 

101. 현자의 평정과 행복은 어떤 외부적 요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유리하든 불리하든 삶의 사건에 흔들리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커지고 굳건해지며, 개인을 인공낙원 안에 갇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도록 인도한다.

 

104. 불교에 따르면 비물질적 의식과 의식이 일시적으로 결부된 육체 사이에는 상호 작용이 있으며 의식의 흐름은 죽은 후에도 지속되며, 매번 태어나고 죽을 때마다 서로 다른 삶의 상태들을 경험한다. 물리학에서 에너지 보존 법칙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이 불교에서는 의식 보존의 법칙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존재에는 의식의 연속체 혹은 의식의 흐름이 있으며, 이것은 강물이 더럽혀지거나 정화되는 것과 똑같이 변형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인간은 그러한 변형 과정 중에 일상적인 존재들의 혼동 상태에서 부처의 깨달음의 상태로 이행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의식은 뇌 이상의 것’은 아니라며 초자연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이 될 수 없듯이 의식도 뇌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했다. 텔레파시의 존재는 비물질적 의식의 증거가 될 수 있다. 티베트 사람들은 생각의 전달이란 현상(텔레파시)을 거의 흔해빠진

일로 받아들인다.

 

111. 마음공부의 핵심은 생각과 감정의 정체를 밝히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해소하고 광대한 마음 안에서 그것들이 소멸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의 내용, 즉 감정을

촉발한 원인이나 정황에 집중하지 않고 그 감정의 근원을 캐나가는 것이다.

 

112. 장-프랑수아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합리적으로 증명하는 논문들은 철학과 신학 도서관에 가득하다. 여러 세기를 걸친 몇 톤 분량의 논문들이 쌓여있으니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들은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합리적으로 증명하는 데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칸트는 선의 개념과 도덕의 개념을 통한 간접적인 증거에 의지한 것이다.

그것 역시 순수 이성을 통한 증거는 아니다.”

 

118.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합리적 증명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실험적 검증이나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하라.

실험적 검증에 대하여는 유일한 차이는 내면적 깨달음은 보통 내면적으로 이루어지며 진실성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선량함, 관용, 자비심, 지혜와 같은 외적인 양상들은 단지 내면적 깨달음의 ‘표시’에 불과하다.

 

119. 의학적 유물론-역사적 증언 같은 신비주의를 믿지 않는다.

과학적 증언의 영역 외는 믿지 않는다.

 

123. 정신적 깨달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며, 다른 차원, 즉 명상 체험-정신 영역에서 사물의 본성과 일치하기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진실의 직접적 통찰-의 차원에 속한다. 이는 이 관점이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개념적인 추론을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상적인 삶은 자체의 규칙을 갖고 있으며, 그 수련에서 생기는 심오한 확신은 물질세계에서 실행되는 그 어떠한 실험만큼이나 정신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

 

4장 마음의 과학/

128. 명상의 두 가지 방법

1)개를 닮은 명상-생각이 날 때마다 쫓아다니는 명상

2)사자를 닮은 명상-생각의 근원을 향해 ‘돌아서서’ 마음에서 사념이 일어나는 근본 메카니즘을 조사하는 명상. 우선 잠시 생각의 흐름을 중단시키려고 노력하고, 지나간 생각을 간직하지도 말고, 미래의 생각을 부르지도 말고, 잠시 동안만이라도 이것저것 따지는 생각에서 해방된 현재의 각성 상태에서 머무는 것. 물결이 잠잠해지면 물이 맑아지듯이 본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다음에 이것저것 따지는 생각의 성격을 검토한다. 예컨대 우리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이나 반대로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생각하면서 매우 강력한 감정을 의도적으로 일으킨다. 이러한 감정이 의식의 장에 나타나도록 한 후, 분석적인 조사와 순수한 명상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이러한 감정에 우리의 내면적 시선을 고정시킨다. 반복하다보면 그때 ‘찾아지지 않음’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 상태에서 잠시 명상에 머물면, 이것을 기술적인 측면에서 ‘생각이 空함을 알아봄’이라고 부른다. 맑은 집중과 각성의 상태로서 해방이라 한다.

 

133. 이것은 더 이상 감정의 노리개가 되지 않고 역경에 흔들리지 않거나

성공에 도취하지 않는 광활하고 평온한 마음을 갖게 된다.

소금 한 줌을 물 한 잔에 넣으면 그 물은 마실 수 없다.

큰 호수에 넣으면 물맛은 거의 변하지 않듯이 큰마음을 가져라.

 

135. 8세기 불교의 스승인 샨티데바의 말씀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남을 위하는 마음에서 오고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

바보는 자기 이익에 집착하고

부처는 다른 사람의 이익에 헌신한다

네 스스로 그 차이를 보아라

 

137. 선천적 자아 감정-우리 모두가 자연적으로 ‘나’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니 누군가 나를 부르면 대답하고, 날씨가 더우면 ‘나는 덥다’고 생각하고,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

 

139. 불교의 두 철학 유파

1)의식은 궁극적이고 자율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마치 등잔의 불꽃이 외부의 광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를 밝히는 것처럼 의식은 주객관계를 내포하지 않는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를 의식한다.

2)불꽃은 어둠을 내포하지 않으므로 '스스로를 밝힐' 필요가 없으며, 빛이

스스로를 밝힐 수 있다면 어둠도 자기 스스로를 어둡게 할 수 있을 것이다.

 

145. 마음 수련을 통해 마치 얼음덩어리를 녹여 물로 만들 듯이 사람과 사물에 대한 판단과 지각의 확고부동함을 녹여야 한다. 얼음과 물은 동일한 성분이지만 얼음은 단단하여 그 위에서 넘어지면 크게 다치지만 물은 부드러운 액체로서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

 

146.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각각의 존재는 그 안에 부처가 될 가능성,

다시 말하면 완벽한 해방과 깨달음에 도달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

 

150. 영속적인 대상은 아무것도 없다. 사물은 너무나 미세하게 비영속적이어서 매순간 대상이 변한다.

 

151. 불교는 현상세계가 불가항력적으로 인과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인다. 그자체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55. 불교가 가장 심하게 반대하는 힌두교의 이론은 이슈바라(시바?) 같은 전능한 창조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끊임없이 창조해야 진정한 창조자이다. 힌두교는 영원한 창조적 실체를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창조는 영원한 전지전능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데 지금은 창조를 중단했다면, 즉 '창조의 의지와 결심'을 잃었다면 그는 전지전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영원한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하기 전과 창조한 후가 다르기

때문이다. 창조 당시에 그렇게 자주 나타났는데 현재는 왜 보이지 않는가.

 

160. 불교에서는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과연 무엇이 존재하는 것인가? 불교는 가운데 길을 택한다. 그것은 상대적인 지각의 세계에서 현상의 실재를 부인하지 않지만 현상 이면에 영속적 실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인한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중도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우리 지각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無라는 허무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모든 지각으로부터 독립한 실재가 존재한다는 영원주의에 빠지지도 않는다.

불교는 현상의 空에 대해 설명할 때 현상이란 겉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고정된 실체의 존재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 현상의 궁극적 본성이 空이며,

空은 그 안에 발현의 무한한 잠재성을 담고 있다.

 

166. 우리가 집착하는 자아가 실체 없는 허깨비임을 알 때 고통의 악순환이 끝난다.

 

5장 세계와 인간, 구도와 깨달음

 

172. 불교를 가장 단순하게 정의하려면 道로 간주해야 한다.

 

178. 죽어서 사라진다는 것은 무지와 자아에 대한 집착이다. 그러나 그 빈자리에 깨달음의 무한한 장점들은 더없이 충만하게 나타난다. 깨달은 사람들은 더 이상 업의 영향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자비와 지혜의 힘을 가지고 중생들의 선을 위하여 제약된 세계에서 계속 나타난다. 그러나 그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열반, 즉 니르바나는 티베트어로 ‘고통을 넘어서’라는 의미다. 티베트 대승불교에서는 부처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극단적인 것’으로 불리는 윤회 전생에도,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한다. 무지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더 이상 그를 끝없는 환생으로 이끄는 업의 노리개가 아니기 때문에 윤회에 머물지 않으며, 또한 그는 끊임없이 고통받는 중생들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열반의 평화에도 머물지 않는다.

 

179. 불교의 초월의 개념-三體(모든 有情物에 내재하는 불성의 양상)

1)絶對體-모든 제한과 개념을 초월한다.

2)微細體-순수한 사랑과 지혜

3)發現體-석가모니와 같은 부처의 일신으로서 육체의 형태로 만날 수 있다

 

182. 대승(大乘)의 심오함은 空과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시각에서 기인하며 空은 無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현상이 고유한 실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 있다.

 

190. 유일신교의 특징은 불관용과 공격성 때문에 전쟁의 종교라 한다. 항상 다신교가 훨씬 관용적임을 역사적으로 증명된다. 인도와 네팔의 경우다.

 

191. 달라이 라마는 평화의 배달부.

 

193.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강요는 단지 탈선일 뿐이다.

진실의 힘으로 설득해야지 폭력을 통하여 진실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를 입증하기 위하여 폭력을 필요로 하는 진리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195. 일신교는 모든 것을 감시하는 인격신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데 종교의 미명 아래 종족의 말살 같은 만행이 자행되고 있다. 인간 존재의 다양성을 존중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196.空이란 개념은 갈피를 잡기 힘들어서 심지어 많은 사람들을 질리게 한다. 空에서는 아무것도 생길 수 없고, 아무것도 적절하게 ‘작동하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공허’ 안에서는 인과법칙을 비롯한 어떤 법칙도 작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공 안에 발현의 가능성이 조금도 담겨있지 않다고 생각하고는 그 점에 관해 거북하게 느낀다. 이는 無와 불교적 의미의 空을 혼동해서 야기되는 것이다. 無에는 아무것도 없는 반면, 空은 ‘보편적인 가능성’, 우주, 존재들, 운동, 의식 등을 말한다. 현상의 궁극적인 본성이 空이 아니라면 현상이란 전혀 발현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비유적 표현에 불과하지만 공간이 없으면 가시적 세계가 전개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공간이 본질적으로 확고하고 영속적이라면 그 어떤 발현이나 변화도 불가능할 것이다. 때문에 불경에서는 “空이 있으므로 만물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空은 그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며, 이러한 가능성들은 상호 의존적이다.

 

198. 불교에서는 세계에 ‘시작’이 없다고 말한다. 사실 시간의 시초(始初)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발현에는 항상 선행요인이 필요한데, 어떤 것이 나타나기 이전에는 시간의 개념이 의미가 없다. 시간은 다만 관찰자에 의해 지각되는 연속적 순간에 붙여진 개념에 불과하며 시간에는 고유한 실재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각의 순간들과 분리된 시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은 단지 특정한 기준 체계와 우리의 경험에 관련하여서만 존재한다.

 

203. 空은 無도 아니고 현상들과 분리되어 현상들 외부에 있는 빈 공간도

아니다. 그것은 현상의 본성 그 자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불교의 한 기본경전에서는 “공은 형상이고, 형상은 공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空卽是色 色卽是空).” 절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세계는 참되고 구체적인 실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상대적인 양상은 현상세계이고 절대적인 양상은 공이다. 비슷한 관점에서 ‘물질은 에너지이고, 에너지는 물질이다’

 

209. 어떤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원인이란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수많은 원인들도 결코 無를 바꾸지 못한다. 無는 본성을 바꾸지 않는 한 존재로 변하지 않는다.

 

6장 행동하는 서양문화, 성찰하는 동양불교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전부 고통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이 고통으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실체, 즉 세계와는 별도로 시간 속에서 지속되는 자아라는 잘못된 감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이러한 환상적 자아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탐욕, 욕망, 야망, 질투의 원천이다. 따라서 해방은 자아의 환상적 본질을 의식하는 데 있다. 고통에 대한 성찰은 우리를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도록 이끈다. 불자는 자신을 병자로, 부처를 의사로, 부처의 가르침을 치료로, 마음 수련을 치유의 과정으로 생각한다.

 

215. 플라톤의 동굴의 그림자

플라톤을 공부하자면 동굴의 비유를 빼놓을 수 없어 간단히 소개한다.

가장 유명한 저서 <국가>에 나오는데 가장 핵심적 사상인 이데아를 설명한다. 이데아는 그림자 너머의 초월적 세계, 태양으로 표현된다.

처음에 동굴의 안쪽 상황이 자세하게 제시된다. 지하에 동굴 모양의 거처가 있는데 입구는 동굴의 너비만큼이나 넓으며 불빛 쪽으로 향해 있다. 동굴은 아래로 향해 있어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면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이 동굴 안에는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채로 고개를 돌릴 수 없어 앞만 보도록 묶여 있는 죄수들이 있다. 이들의 위쪽으로 멀리 불빛이 타오르고 있으며, 이 불빛과 죄수들 사이에 가로 방향으로 길이 하나 있다. 이 길을 따라 담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이 담을 따라 사람들이 인물이나 동물의 모형을 들고 지나간다. 죄수들은 어려서부터 불빛에 비친 이 모형들의 그림자들만을 봤으므로 '인공적인 제작물들의 그림자들 이외의 다른 것을 진짜라 생각하는 일은 전혀 없다.' 그러다 이들 중 '누군가가 풀려나서는 갑자기 일어서 목을 돌리고 걸어가 그 불빛 쪽으로 쳐다보도록 강요'받고, 누군가에 의해 '험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통해 동굴 밖으로 끌려간다. 끌려간 죄수는 빛에 익숙해지면서 처음에는 그림자를, 다음으로는 물속에 비친 사람들이나 다른 것들의 상을 본 후에 실제 사물들과 하늘에 있는 것, 그리고 하늘 자체를 보게 된다. 마침내 그는 '계절과 세월을 가져다주며, 보이는 영역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그가 지금껏 보았던 모든 것의 원인인 태양'을 바라본다. 태양을 바라본 죄수는 계속해서 밝은 빛이 비치는 세상에 살고 싶어하며, 어두운 동굴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 나지 않는다. 플라톤은 이를 빗대어 죽은 후에 죽은 자들의 왕이 되기보다는 살아서 남의 머슴살이를 하는 것이 낫다는 심정과 같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는 처음 올라올 때 빛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동굴로 돌아가면서 다시 어둠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동굴에 돌아가서 과거에 그와 있던 죄수들과 함께 보았던 그림자들을 다시 판별해볼 것을 요구받게 되는데, 그는 아직 어둠에 익숙한 상태가 아닌지라 다른 이들의 '비웃음을 자초'하거나, '위로 올라가더니 눈을 버려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올라가려고 애쓸 가치조차 없다는 말'을 듣게 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게 된다.

 

동굴의 비유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상징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동굴의 안쪽은 선분의 비유에서 언급된 감각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 즉 지성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곳으로 진리가 아닌 의견의 영역이다. 반면에 동굴의 바깥쪽은 반드시 지성에 의해서라야 할 수 있는 곳으로 참다운 진리가 있는 곳이다. 죄수들이 보고 있는 그림자는 불빛에 비친 진짜 사물의 그림자로 복사물(태양의 복사물인 불빛)에 의해 만들어진 복사물, 즉 복합적인 허상이다. 반면에 태양은 모든 사물의 근원인 진정한 원인, 영원한 진리를 상징한다. 동굴의 비유 중 앞의 죄수가 동굴 밖으로 나가서 태양을 보기까지의 과정은 국가의 예비 통치자가 어떻게 진리를 인식하게 되는지에 대한 비유이며, 태양을 보고 다시 동굴로 돌아오는 과정은 진리를 인식한 후 실제로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 어떠한 정치적 실천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267. 불교의 사랑과 자비는 지혜, 즉 사물의 본성에 대한 앎과 분리될 수

없으며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인 무지로부터 타인을 구원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비에 모든 힘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혜와 현명함이다.

 

9장 본성에 대한 망각, 선과 악

근본적으로 악은 오류 이외의 다른 실체를 갖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부처의 본성이 마치 참깨 속의 기름처럼 모든 사람의 내부에 존재한다고 한다. 거짓은 참된 존재를 갖지 않으며, 거짓은 어쨌든 참을 구성하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악은 일종의 탈선에 불과하며, 이는 오류가 현실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 불과하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악은 허상으로만 존재한다.

 

285. 서양의 철학자들은 어떻게 선한 존재이기만 한 신이 자연 안에 악이

존재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느냐를 설명하려 애쓴다.

 

"신은 악을 없애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능력도 있고 없애려 하기도 하는가? 그렇다면 악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능력도 없고 없애려 하지도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를 신이라 부르나?"

 

286. 악과 고통의 원인인 무지는 우연한 오류이고 마음의 궁극적인 본성에서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갑작스러운 망각이지만 연쇄적인 고통스러운 체험을 일으킨다.

 

287. 라이프니츠-신은 전능하고, 그러므로 악에 대해 책임이 있다, 아니면 신은 전능하지 않고, 그러므로 그는 신이 아니다.----그것이 바로 전능한 창조주라는 개념을 반박하기 위해 불교가 사용하는 추론이다.

 

288. 결국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불교가 죄, 특히 원죄라는 개념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289. 마음 수련의 근본적인 목표는 항상 완벽한 경계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주의와 경계는 정신적 삶을 통해 계발할 수 있는 근본적인 자질이다.

 

307. 우리는 죽음의 순간도, 죽음을 야기하는 상황들도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본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한 순간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삶은 짧다. 그러므로 내적 자질을 계발하기 위한 길로 들어서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337. 기원전 2세기에 인도 서북부 박트리아를 통치했던 그리스의 왕(알렉산더가 인도를 정복하기 전에 확보한 영토의 왕) 밀린다와 불교의 현자 나가세나 존자 사이에 오간 대화형식의 철학 모음집(밀린다왕문경)에 비유를 통하여 왕을 교화시킨 기록이 있다.

 

340. 대승불교는 사랑과 자비를 강조한다. 그 가르침에 따르면, 주변의 중생들이 계속 고통을 받을 경우 자기만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소용이 없다. 구도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모든 중생을 위하여 자신의 내면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343. 길(道)-부처께서는 “나에 대한 존경으로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을 검토하고 그것의 진리를 발견하라. 나는 너희들에게 길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은 너희들에게 달려있다.”

 

350. 만다라는 세계와 존재들을 완벽한 장소와 거기에 머무는 신들의 형태로 상징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만다라의 ‘신’들은 신이 아니다. 그것은 불성의 원형이며 그것의 다양한 양상들이다. 만다라에 대한 명상은 이른바 ‘순수한 통찰력’, 즉 만물에 존재하는 불성의 이해로 이끄는 것이다.

 

351. 사리탑은 부처님의 마음, 글씨는 말, 조상(彫像)은 육체를 상징한다.

탑을 돌 때 ‘깨달음을 향해 걷는 것’이고, 불을 밝힐 때는 ‘인간 존재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불타 없어지게 하소서’, 먹을 때는 ‘각자가 관조를 맛볼 수 있도록’, 문을 열 때는 ‘자유의 문이 모든 존재에게 열리게 하소서’를 기원하는 것이다.

 

352.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그려놓은 벽화는 어떤 본질적인 실체가 있는 그 신이 아니고 깨달음의 다양한 특징들을 상징적으로 재현한 것이며, 얼굴은 유일(唯一), 절대를, 두 팔은 자비의 방법과 하나를 이룬 空의 지혜를 상징하는 것이다. 첫째 마음의 집중, 둘째 명상의 의식, 셋째 자기 안의 불성에 대한 이해.

 

353. 부처님께 절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궁극적 지혜를 구현한 사람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이것은 지혜에 대한 겸손의 표시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만의 해독제로 사용된다. 자만은 지혜와 자비의 출현을 막는다. 물이 산봉우리에 고이지 않듯이 진정한 공덕은 자만의 꼭대기에 모이지 않는다. 오체(五體)를 땅바닥에 놓는 오체투지 동작은 증오, 욕망, 무지, 자만, 질투라는 오독(五毒)을 정화하여 그에 상응하는 다섯 가지 지혜로 변화시키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손이 바닥을 따라 자신을 향해 미끄러질 때, 사람들은 ‘모든 존재들의 고통을 나에게 끌어 모아서 그것을 감당하여 소진시킬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356. 깨달음의 정의-자기 자신과 궁극적 본성을 발견하는 것.

자기 안의 불성을 발견하고 대화하는 것.

신앙의 종류

1)밝은 신앙

2)열망

3)확신

4)결실

 

14장 삶의 한 단계로서의 죽음

358. 세상으로부터 은거한다는 것은 죽음을 위한 준비. 몽테뉴<수상록>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배우는 것.

불교는 ‘바르도’라 불리는 ‘죽음 이후의 전이 상태’를 인정. 최고의 수행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개인적 자아, 현상의 확고부동함, 소유 따위에 대한 애착이 사라지면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죽음은 친구와 같은 존재이며, 삶의 한 단계이고 단순한 이행(移行. 옮겨감)이다. 죽음의 과정을 살펴보면 숨이 멎은 후에는 의식과 육신이 몇 단계에 걸쳐 소멸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물질계가 우리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될 때, 절대의 상태-의식이 육신과 연결되어 인식에 의해 제약된 세계와 반대되는 상태-로 우리의 마음이 해체되어 사라진다. 죽음의 순간에 의식은 아주 짧은 동안 이른바 ‘절대 차원의 광명 공간’ 속으로 흡수되었다가 다시 나와 중간 상태인 바르도를 지나게 되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새로운 삶, 즉 재탄생으로 이르게 된다. 바르도의 다양한 경험들이 다가오기 전, 바로 이 순간에 사물의 궁극적인 본성을 깨닫는 데 이를 수 있도록 절대상태에 머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명상도 있다.

 

361.죽음에 대한 추론

1)내세의 삶에 대한 믿음에 근거

 

2)순수하게 철학적이며, 내세를 믿지 않는다. 나라는 생물체적 실체가 붕괴되어 사라지는 것은 불가피하고 당연한 사건이므로 체념한다. 에피쿠로스는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과 결코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 존재할 때는 죽음이 아직 없는 것이고, 죽음이 여기 있을 때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쓸데없는 공포-신, 죽음, 번개, 지진과 같은 자연현상들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티베트 교훈에 “항상 죽음을 관조한다면 너희들은 마음 수련을 힘을 쏟을 것이고, 마음 수련을 행하고자 하는 열정을 새롭게 할 것이며, 죽음을 절대 진리와 결합하는 것으로 보게 될 것이다.”

 

368. 불교에는 천벌이 없다. 행위에 대한 업보는 처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결과다. 죄는 환상과 이기주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처벌 역시 포함하고 있다. 신은 벌하지 않는다.

 

369. 바르도-죽음과 탄생 사이의 중간 상태. 중간 혹은 전이 단계를 의미. 삶의 바르도, 즉 탄생과 죽음 사이의 중간 상태. 그 다음에는 죽는 순간, 즉 의식이 육체와 분리되는 순간의 바르도. 여기에는 두 가지 단계의 ‘해체’가 존재한다. 바로 육체적 · 감각적 능력의 외적 해체와 심적 과정의 내적 해체.

 

1)첫 단계의 해체는 육체가 살아있는 유기체에서 무생물로 변형. 생명을 갖고 있는 의식적인 유체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들의 해체라는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데, 그 각각의 원소들은 생명이 없는 외부세계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원소와 융합하면서 그 차이를 잃어버리게 된다. 견고함을 상징하는 ‘흙’의 원소가 해체될 때 유체는 무겁게 느껴지고 자세를 유지하기가 힘들며 산과 같은 무거운 것에 눌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의 원소가 해체될 때는 점막이 마르고 갈증을 느끼며 마음은 혼란스럽게 되어 강물에 휩쓸려가는 것처럼 표류하게 된다. ‘불’의 원소가 사라질 때 육체는 열기를 잃기 시작하고 정확히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공기’의 원소가 해체되면 숨을 쉬기가 어렵게 되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으며 의식을 잃게 된다. 환각이 생겨나고 마음속에서 우리 삶 전체가 필름처럼 전개된다. 어떤 사람들은 평온을 느끼게 되고 광명에 찬 평화로운 공간을 보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호흡’이 멈추게 된다. 그러나 내적 호흡이라는 생명력이 잠시 존재하는데 얼마간 계속되다가 정지된다.

 

2)두 번째 단계의 해체에서는 지속적인 의식의 흐름이 점점 미세해지는 일련의 상태를 통과한다. 우리는 거대한 빛의 단계, 이어서 지복(至福)의 단계, 마지막에는 모든 생각이 완전히 부재한 상태를 체험한다. 우리가 짧게나마 절대 체험은 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훈련된 수행자라면 그때 절대적인 바르도라 불리는 상태에 남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죽음과 다음 번의 재탄생 사이의 중간 상태로 접어든다. 마치 업의 바람에 휩쓸려가는 깃털과 같다.

 

371. 진리는 고유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거짓은 터무니없는 노력을 지불해야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조만간 실패에 이르게 되어 있는 덧없는 허울에 불과하다.

 

373. 티베트의 불교에도 은거를 오래 할 때 가르치는 호흡 조절 훈련과 육체 훈련이 있지만 초심자나 특정한 마음 수련의 맥락을 벗어나는 경우에는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

 

374. 금욕의 목적은 마음의 지배이다.

 

376. 명상에 관하여 불교에서는 자기의 마음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먼저 분석적인 방법으로, 다음에는 관조적이거나 명상적인 방법으로 직접 정신을 검토한다. 여기서 말하는 명상은 막연한 정신의 이완 요법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의미하며 몇 년에 걸친 수행 끝에 마음의 본성과 심적 사건들이 나타나는 방식을 점진적으로 발견해 나가는 것이다.

 

401. 습관적인 성향(유식론에서 제8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식)이 남아 있을 때 불교는 앎의 불로 그것을 태워버리는 것이 더 간단하다고 생각한다. 앎은 마음의 궁극적인 본성, 즉 空을 깨닫게 해주고 동시에 모든 성향들의 흔적을 지워준다.

 

404. 불교의 명상은 해독제를 사용하여 욕망의 본질적인 空함을 인식하게 하고 욕망을 앎으로 전이시키게 된다.

 

18장 진보와 새로움에 대하여

 

412. 고통의 해독제, 즉 자아에 대한 집착을 치유하는 해독제는 사유의 근원에 이르러 우리 마음의 궁극적인 본성을 인식하는 데에 있다.

 

413. 마음의 본성에 대한 명상이 목표하는 바는 증오, 욕망, 질투, 불만, 자만 등은 사람들이 그것들에게 빌려주는 힘만을 지닌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분석하고 그 근본적인 성격을 알게 될 때까지 ‘벌거벗겨’ 관조하면 그것들이 확고부동함이나 억압적인 힘들을 실상 갖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416. 시간 속의 구원은 곧 보살의 서원으로서 모든 중생이 고통과 무지로부터 벗어날 때까지 노력하는 희망이다. 환상에 탐닉하는 예술가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서양에서는 예술가들이 완전히 엉터리 같은 그림을 그리는데도 ‘개성’이 있다고 해서 그 그림들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을 미술관에 전시한다. 이러한 현상은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외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계시적 종교의 한계

 

423. 보편적으로 창조성이 의미하는 것은 내적인 감정의 본능적인 표현인데, 그것은 우리를 조종하는 습관적인 성벽의 범위 안에서 뱅뱅 맴돌 뿐이다. 그것은 우리를 무지나 욕망, 적으로부터 해방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지도 않고, 더 현명하고 더 자비롭게 만들지도 않는다. 진정한 창조성은 진리를 가리고 있는 우리의 무지와 자기중심주의와 점차 결별하고, 마음과 현상의 궁극적 본성을 밝히는데 있다.

 

425. 불교 수행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은 손에 보물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만족은 불필요한 것을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이것은 부와 지식, 안락, 쾌락에도 적용된다.

 

426. 부처와 마라(에고)의 대화-너는 무슨 권리로 깨달음에 도달하기를 원하느냐? 나의 권리는 내가 수많은 삶의 과정 끝에 얻은 앎에 근거한다. 새벽녘이 되자, 마지막 무지의 조각들이 무너져 내리고 부처는 마침내 인간과 사물의 비실재성을 완벽하게 깨닫고, 즉 현상세계는 상호의존적 작용에 의해 나타나며 본질적이고 변함없이 오랫동안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427. 마음 수련에서는 어려움이 처음에 오고, 세상사에서는 어려움이 끝에 온다. 또 ‘처음에는 아무것도 오지 않고, 중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끝에는 아무것도 떠나지 않는다.' 진정한 앎을 얻는데 필수적인 근면함은 '고통'이 아니며, '노력의 형태로 흘러나오는 기쁨'이다.

 

429. 구조주의는 실존주의에 대한 반작용인데 실존주의는 자유와 개인의 선택과 개인의 궁극적인 책임에 모든 문제를 돌렸다. 구조주의자는 ‘아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을 통해 작용하는 구조들이 인간을 관통하고 있다고 한다.

 

432. 자아는 아무것도 아니며 나는 단지 어떤 실재의 흐름이 지나가는 장소일 뿐이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면 어느 정도 평온에 도달한다. 불교 신자의 경우 무아는 해방을 경험하는 것이다.

 

435. 현자의 시각은 하늘보다 높고, 인과법칙에 대한 그의 식별능력은 밀가루보다 더 섬세하다. 우리는 스스로가 뿌린 씨앗에 저항할 수 없지만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어 가는 것과 그 불행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분별할 줄 앎으로서 미래를 건설할 수 있다.

 

438. 기독교는 ‘죄악→회개→면죄’의 변증법적 종교였기에 그러한 변증법에 따라 움직여 왔다.

 

440. 이타주의와 자제는 지혜의 표시, 감정들로부터의 해방은 명상의 표시다.

 

445. 은둔자에게 있어 모든 소리들은 기도, 그리고 그는 만족한다. 날으는 새가 하늘에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듯이 은둔자에게 있어 모든 생각들은 절대적 본성 안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그는 만족한다.

 

451. 우리가 현재의 삶에 의미를 주는 지혜를 발견한다면 바로 그 지혜가 미래를 살아갈 우리의 삶에도 의미를 줄 것이다. 따라서 앎과 정신적 깨달음은 삶이 길건 짧건 간에 하나이든 여럿이든 상관없이 삶의 순간마다 적용된다. 우리가 삶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한다면 그 발견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죽음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452. 장-프랑수아 : 나는 삶을 견디어낼 수 있게 해주는 모든 지혜에는 한계가 있다. 가장 큰 한계는 죽음이다. 나는 내세나 죽음 이후의 무엇과 같은 어떤 형태로든 그 영원성을 믿는 교리들과, 죽음이란 한 존재의 완전한 無化이며 내세란 없다는 원칙에서 출발하는 교리들을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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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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