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Grimm: 1868-1945)
Perennial Questions
by George Grimm
In "Perennial Questions" George Grimm presents us with a precious brief excerpt from his life-work.
이 글은 독일의 신학자이며 불교도였던 그림(George Grimm: 1868-1945)의 '끊이지 않는 물음'(Perennial Question)을 요약해서 옮긴 것입니다.
I 삶의 목적-행복추구
All life, all existence has but one sole purpose,
namely to lead to happiness, to make happy.
We are beings who crave happiness and who abhor suffering, says the Budda.
On account of this the beings continually ponder over how we can become happy, and when they fancy to have become so they worry and trouble themselves about remaining happy.
All concern and effort in business and profession,
in handicrafts and arts, Science and technology, trade and politics aim but at making happy oneself and maybe also others.
All statesmen and economists, the greater they are,
the more they aim at making the people happy.
All philosophers search for imperishable happiness,
all religions promise their believers everlasting bliss.
The yearning for happiness is so deeply rooted in man that no power in the world ever shall turn him from it.
Even he who out of despair puts an end to his life does so only in the hope thus to find rest and peace therewith happiness, or to become in any case happier than he is at present.
우리의 삶 전체는 행복의 추구라는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갖고
있다. 이러한 목적은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게도
공통된다.
행복을 얻을 수 없다면 우리는 억지로라도 그것을 만들려고 발버둥친다.
"우리는 행복을 갈망하면서 고통을 피하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생각한다.
심지어 행복이 여전히 자신 속에 남아있을 때 조차도 스스로 그것을 혹시나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괴로워한다.
직장, 사업, 학술, 예술, 과학, 기술, 무역, 정치 등등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노력도 결국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목적아래서 행해진다.
만일 거기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까지 얻을 수 있다면 그 이상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위대한 정치인과 경제인은 어느 누구보다도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함께 이루려는 꿈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
모든 철학자들은 영원히 변치 않는 행복을 추구한다.
모든 종교는 자신들의 신도들에게 영원한 축복을 약속한다.
행복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너무도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세상의 어떠한 힘도 우리를 거기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자신의 생명이 절망으로 끝나고 있는 사람조차도 마지막 순간까지 행복에 대한 한 가닥의 희망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평화와 안정을 찾음으로써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행복해 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II 행복에의 추구
Now what must there be for man to become happy?
A simple lady of the world once answered this question to the point; on being asked what kind of eternal happiness she hoped to experience after death she promptly replied:
“All I want is peace and quiet”. In fact, these words comprise the unmistakable criterion of real, true happiness, since as long as restlessness, anxiety and disquietude still prevail in man, so long is he not happy but , on the very contrary, unhappy; instead of being happy, he suffers.
For, it is quite a matter of course to everybody that as long as one is tormented with inner restlessness one suffers.
It is because of this that the Buddha says: “Where there is no inner peace, there is suffering”.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
누군가에게 물어 보았다.
"당신이 죽은 이후에도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영원한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가 망설임 없이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의 평화와 고요함입니다."
평화와 고요함은 참된 행복의 의심할 수 없는 기준이다.
이 기준들은 우리 속에 조바심이 계속해서 퍼져있는 한,
다시 말해서 우리가 행복한 거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한 영원히 유지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내면적으로 흔들림에 시달리고 있는 한 고통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하다. 깨달은 이들은 말한다.
"내면의 평화가 없는 한 인간은 영원히 고통 받는다."
Now when is there no inward peace, and when does thus restlessness prevail?
When there is an unfulfilled desire within us, since every unsatisfied desire torments us.
It is on account of this that all men, yea all beings upon the whole incessantly try to satisfy their wishes in order to be released from the inward torment, from the inward restlessness called forth by those unfulfilled desires; indeed, they do seek to realise them with a greediness not even shrinking back from violence and murder.
어느 때 우리는 내면의 평화를 잃고 흔들림에 시달리게 되는가?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 남아있을 때 바로 그것이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왜 우리는 우리의 바람을 이루려고 발버둥치는가?
그것은 바로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라고 불리는 내면의 흔들림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욕심을 버리지 않은 채 자유를 추구한다.
심지어 폭력이나 살인 등으로 남을 해치는 일조차도 떨쳐 버리지 않는 채....
아니 오히려 그 일을 선과 정의라는 이름아래
정당화시키기조차 한다.
But why do men have so many desires?
Because their present condition and the circumstances they are at present compelled to live in are not adequate to them, hence because they are not appropriate to their innermost Being.
They lack something, they still miss something in order to become happy; in fact, they still lack a great deal, they still miss a great deal for their present position really to suit them, namely so that they could state: “My present state is perfectly suitable to me, perfectly adequate;
I am now absolutely content and therewith actually happy!”
However, here on earth the beings are so far from this state that Meister Eckhart exclaimed,
“All beings inwardly bear bitterness.”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은 욕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아무리 우리가 처해있는 조건과 상황이 적당하지
않을지라도 억지로라도 어쩔 수 없이 그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런 삶이 우리의 본래적인 바람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분명 우리는 중요한 무엇인가를 잃어 버리고 있다.
행복하게 되려고 하면서도 참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잃어 버리기도 하였다.
현재의 내 위치를 잃지 않고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실제로는 꼭 필요한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현재의 내 상태는 나에게 너무나 잘 어울린다.
나는 현재 상황에 절대적으로 만족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다." 하지만 실제로 지구상에 살고 있는 존재들은 이미 행복한 상태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기에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외쳤다. "모든 존재는 안으로
어쩔 수 없는 슬픔을 담고 있다."
From this it is clear that if the beings were in a state perfectly adequate to them they would no longer will or desire anything.
Indeed, one can desire but what one lacks.
In a state perfectly adequate to us we should, consequently, no longer lack anything and therewith no longer desire anything either.
For, where there still is a lack of something, the state is not,
for this very reason, a perfectly adequate one.
Thus in a state perfectly adequate to us no desire at all ever could dwell within us anymore.
Yes, if we were to ask a being which is in a state absolutely adequate to it what it furthermore desires and wishes, it would answer: “To desire? To wish? What kind of a thing is that?
Is it red, or blue, or black?”-
만일 모든 존재가 주어진 현재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자리에 있다면 그들은 더 이상 어떤 것을 바라거나 그것이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현재 갖고 있지 않은 것만 바란다.
만일 우리가 완전하게 딱 들어맞는 상황 속에 있다면 더 이상 어떤 것도 바랄 필요가 없다.
어떤 것이 현재 있지 않다는 사실은 바로 그 상황이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딱
들어맞는 상황 속에 있을 수만 있다면 욕망이 우리 속에 머무를
여지는 더 이상 없으리라. 만일 그런 상황 속에 있는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에게 욕망이나 바람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이렇게 되묻지 않을까?
"도대체 무슨 욕망을? 무엇에 대한 바람을?
그나저나 그것들이 매체 무엇일까?"
But if no wish at all arises within us, then there no longer is any inward restlessness, any inward disharmony either.
For, all inward restlessness and disharmony is but a restlessness of will, a disharmony of will:
“All tempests’ uproar derives solely from one’s will, whether one realizes it or not”, Says Meister Eckhart.
Thus, if we were in a state absolutely adequate to us we should not only be wholly desireless but there would also reside perfect inward peace within us.
“He who has quenched all his will all his wish, he has peace” (Meister Eckhart).
우리 속에 어떠한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때서야 비로서
내면에 흔들림이나 부조화가 없는 것이리라.
욕망은 의미의 흔들림인 동시에 부조화일 뿐이다.
"모든 요란스런 소동은 우리 자신이 그것을 깨닫든가 아니든가에 상관없이 오직 우리 자신의 의지에서 나올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절대적으로 딱 맞는 상황 속에 있다면
욕망을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완전한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모든 의지와 바람을 없애버린 그는 진정 평화로우리라."
Let us summarise the above exposition:
For man really to perfectly happy he must be in a state perfectly and absolutely adequate to him.
But if he were in a state absolutely adequate to him he would, consequently, no longer have any desire, he would be, hence, perfectly desirelessly happy, then all inner disharmony- which, as previously stated, derives but from unsatisfied desiring- would be put an end so; therewith boundless peace, the Great Peace would dwell within him.
Consequently, perfect happiness, perfectly adequate state, perfect desirelessness and perfect inner peace are identical concepts; at bottom all these words state the selfsame thing.
Conversely it follows that where there is a desire, a will, there is an inadequate state, the conquest of which is our will’s sole purpose.
As this conquest won’t succeed and the will is, on the contrary, continuously frustrated, beings find themselves at the mercy of inner disharmony and therewith of suffering.
All willing and hence all suffering are therefore merely the symptoms of an inadequate situation and disappear with the latter: in an absolutely adequate state not even the trace of a willing or suffering is possible.
진정으로 해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딱 맞는
상황 속에 있도록 하라.
오직 더 이상의 욕망을 갖지 않는 상태 속에서만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뿐이다.
욕망 없는 행복을 누린다면 불만족한 바람에서 오는 모든 내면적인 부조화는 저절로 사라지리라. 이제부터는 한량없는 평화 속에 머물게 되리라. 그 속에서는 완전한 행복, 딱 들어맞는 상황, 욕심 없음, 완전한 내면의 평화가 동일한 개념이 될 뿐이다.
원래부터 이 단어들은 하나의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니까.
반대로 욕망이나 의지가 있다면 그 곳이 바로 부적절한 상황의
시작이다. 의지의 유일한 목적은 정복에 있다.
정복이 성공하지 못하면 의지는 계속해서 욕구불만에 빠지고
자연 내면의 부조화와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의지와 고통은 부적절한 상황과 동의어이다.
절대적인 조화 속에서는 의지와 고통에 대한 추적조차 불가능하다.
끊이지 않는 물음-2
III 원초적 욕구
Naturally, here the very question arises: is it actually possible for the beings to attain such a state perfectly and absolutely adequate to them, a state in which to all eternity no further desire can arise, in particular not even the desire for the state attained to change, for another state to take its place?
Is there, hence, actually a perfect, absolute happiness which beings can attain?
Here we are conscious of having arrived at the primary problem of all existence.
But is it actually possible for this primary problem to be solved?
However surprising it may appear, it is even quite easy to solve: the desire for an absolutely adequate state is the primary longing of every human heart, yea of all beings upon the whole.
우리가 정말로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딱 들어맞는 상황을 얻을 수 있을까? 더 이상의 욕망이 생겨나지 않고 영원히 변치 않는 그러한 위치가 실제로 있을 수 있을까? 아니 완전하고 절대적인 행복이
존재하기나 할까? 드디어 우리는 모든 존재의 원초적인 물음에
도착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원초적인 물음이 풀릴 수 있을까?
그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그것은 가능하다.
아니 그 의문을 푸는 일은 너무나 쉽다. 절대적으로 딱 들어맞는
상황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바람이다. 아니 그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As long as they have not yet attained this state of absolute happiness they are not wholly satisfied, and so long, consequently, do they not find any rest, any peace, but must go on struggling and striving towards that state.
Only when a being can declare of itself: “Now I am perfectly well”, all desiring and therewith all striving and struggling shall come to end.
절대적인 행복을 얻지 못하는 한 우리는 어느 경우에도 만족할 수 없다. 실제로 현재의 우리는 어떤 휴식처나 평화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투쟁하고 발버둥쳐야만 한다. '아! 드디어 나는 완전하게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만이 비로서 모든 욕망과 투쟁은 사라질 수 있으리라.
Thus the absolutely adequate state actually is the deepest and ultimate desire, the primary longing of all beings.
But for a primary longing common to all beings realization
must certainly be possible.
For indeed, nature always and infallibly achieves its deepest and ultimate purposes, though only after immeasurable periods of time.
Nature acts in the line of least resistance; accordingly, it does not, in particular, produce any needs for which there is no help.
All the more must then be possible the satisfaction of the deepest need, namely of the primary longing for an absolutely adequate state: beings would not have this primary longing at all if it were not capable of realization.
If we have not yet discovered the path leading towards this ultimate and ideal state it is due but to our own weakness, our own wretchedness, not to objective reality.
자연은 언제나 그리고 결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채 가장 깊고도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하고 있다.
비록 그 기간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오래 걸린다 할지라도...
자연은 가장 적은 저항 속에서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도움 받을 수 없는 어떤 요구도 만들지 않는다.
우리가 자연처럼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가장 깊은 욕구 다시 말해서 절대적으로 딱 맞는 상황에 대한 원초적인 바람을 만족시켜야만 한다.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원초적인 바람조차 가질 수 없다. 아직까지 그처럼 이상적이고 궁극적인 상황으로 이끄는 길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비참함 때문이다.
This can also be made clear thus: the longing for an absolutely adequate state is the primary impulse of all beings; it springs forth from the deepest recesses of Reality, from the lightless realm of the primordial source, which is no longer illuminated by any cognition and in which whatever exists has its roots, and wherein for this very reason the purpose of all that which exists is likewise comprised.
Therewith this primary impulse at the same time shows itself to be the non-delusive and thereby absolutely unequivocal herald of the beings’ ultimate destination.
As such it shall not rest before its goal, the absolutely adequate state, is achieved, even though this should take world-periods. It is the whip that again and again, unceasingly and untiringly goads the beings on in this direction. Hence it follows that if the primary impulse of a being comes to extinction and it therewith attains peace, this is the manifestation of its having achieved the absolutely adequate state.
Thus it has fulfilled its destination, as Lao Tse expressly says in the following words:
“To come to rest means to have fulfilled one’s destination”.
원초적 바람은 실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리고 최초의 근원이라는 빛없는 어둠의 영역에서 생겨 나온다. 그 곳은 더 이상 인식의 빛이 다가갈 수는 없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바로 그 자리이다. 그 때문에 모든 존재의 목적이 비슷한 것이다.
그 사실을 올바로 자각한다면 모든 존재의 최종 목적지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있는 선구자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어울리는 상황이라는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까지 절대로
쉬어서는 안된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채찍질이 멈추어서는 안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존재의 원초적 충동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 온다면 그것이 바로 나에게 절대적으로 딱 맞는 상황이 얻어졌다는 표시이다. 이제 우리의 목적은 완수되었고 긴 여정은 끝이 났다. 멈춘다는 것은 바로 목적이 달성되었다는 의미이다.
Lao Tse, however, goes on saying: “To have fulfilled one’s destination means to be in harmony with the eternal order, and to be in harmony with the eternal order means to be Accomplished.”
These words are now easily comprehended: the eternal order is precisely that one in which every being dwells in the state absolutely adequate to it.
목적을 완수했다는 것은 영원한 질서와 하나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영원한 질서와 하나되었다는 것은 완성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영원한 질서는 모든 존재가 자신에게 딱 맞는 상황 속에
거주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Only such an order is unchangeable, i.e. eternal.
As long and in so far as this order is perturbed, disorder sets in.
During this disturbance the eternal order strives after the elimination of this upset, and it does so precisely in the primary impulse that is to reinstall us in the eternal order: it objects, grieves and threatens as bad conscience after every deed in contradiction with it, and it makes us happy in a good conscience after every act in harmony with the state absolutely adequate to beings.
Only when a being has achieved this state, the herald of the eternal order, the primary impulse, is as stated above, silenced, and id so for ever: such an “Accomplished One” is no longer moved and urged at all from within-boundless peace, the Great Peace abides in him.
Indeed, he has “done what was to us be done”, since he has fulfilled his destination.
Consequently, a state absolutely adequate to us is immediately comprised in the eternal order,
Wherewith its realization is not only possible, but is in truth the essential task of our life. –Kant has given expression to this in a few words: “You can, for you ought”.
오직 그 같은 질서만이 변화하지 않고 영속적이다.
이 법칙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이 무질서이다.
혼란이 계속되는 한 영원한 법칙은 그것을 제거하려 애쓴다.
영원한 법칙 속으로 우리를 다시금 복귀시키는 것이 원초적 충동이다. 이 충동은 자신과 모순되는 모든 행위를 떳떳치 못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반대하고 혐오하며 심지어 그것을 협박하기 조차 한다. 딱 맞는 상황과 조화를 이루는 행위가 행해진 뒤에는 충만하고 떳떳한 마음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오직 이러한 상태를 얻었을 때만 영원한 법칙 또는 원초적 충동이 영원하게 된다. 이렇게 완성된 자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형상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며 그것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는 오직 무한한 평화 속에만 머무를 뿐이다. 진실로 그는 해야 할 모든 일을 완수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었다.
절대적으로 어울리는 상황은 즉각적으로 영원한 법칙을 형성한다. 이것을 깨닫는 일은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삶의 본연의 임무이기도 하다.
그대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