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한정록 제3권 한적(閒適)
‘한(閒)’ 자의 자의(字義)에 대하여 어떤 이는 달[月]이
대문(大門) 안에 들이비치는 것이 바로 한(閒) 자라고 한다.
옛날에는 모두 문(門) 안에 일(日)을 넣은 간(間) 자와 같이
보아 왔지만, 그 음(音)만은 달리 쓰이는 경우가 있다.
아무튼 한가로움이란 저마다 얻기 어려운 것이다.
이를테면 두목지(杜牧之)의 시(詩)에,
不是閒人閒不得(불시한인한부득)
願爲閒客此間行(원위한객차간행)
한인이 아니고야 한가로움을 얻을 수 없으니
이 몸이 한객 되어 이 속에 놀고파라
하였다. 이에 오흥(吳興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포성현(浦城縣))에 한정(閒亭)을 건립하였다.
나는 본시 한가로움을 무척 좋아하면서도 한가로운 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여 시(詩)를 짓고 술[酒]을 마련하거나
꽃나무를 가꾸고 새[禽]들을 길들이는 데에 무척이나 바쁘다.
옛날 한치요(韓致堯 한악(韓偓)의 자)의 시에,
畫墻暗記移花日(화장암기이화일)
洗甕先知醞酒期(세옹선지온주기)
須信閒人有忙事(수신한인유망사)
早來衝雨覓漁師(조래충우멱어사)
벽화 그리며 꽃 모종할 날짜 내심 기억하며
술독 씻으며 술 빚을 기회 먼저 짐작하네
한인에게도 바쁜 일 있다는 걸 알아다오
아침 일찍 비 맞으며 어부를 찾아가네
하였으니, 옥산초인(玉山樵人 한악(韓偓)의 호)이야말로
나와 뜻이 같은 자라 하겠다. 《미공비급(眉公祕笈)》
옛적에 주무숙(周茂叔 무숙은 송(宋) 주돈이(周敦頤)의 자)이
이정 선생(二程先生 정호(程顥)ㆍ정이(程頤))에게 ‘중니(仲尼)와 안자(顔子)의 즐기던 곳과 그들이 즐기던 것이 무엇이겠는가
찾아보라.’ 하였는데, 백자(伯子 정호)가 마침내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면서 돌아오는 경지와 ‘내가 점(點)을 허여(許與)한다.’한
의취를 얻었으니, 주무숙의 이 공안(公案)은 마치 활줄을 당기기만 하고 쏘지는 않은 것과 같은 가르침이다. 나는 이 속의 의취를 오직 소요부(邵堯夫 요부는 송(宋) 소옹(邵雍)의 자)만이 가장 절실히 음미했다고 본다. 그의 《격양시집(擊壤詩集)》에,
世間無事樂(세간무사악)
都恐屬閒人(도공속한인)
세간에 다른 낙 없고 무사한 낙 가진 사람은
다만 이 한인뿐인가 하노라
하였고, 또,
料得閒中樂
無如我得全
생각건대 이 속의 낙은
나처럼 독차지한 이 없네
하였으니, 그는 뜬구름과 같은 부귀(富貴)와 담박한 단사표음(簞食瓢飮)한 도시락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즉 한사(寒士)의 살림을 말함)을 어떻게 보았던가. 그가 병이 위중하여 임종에 가까웠을 때 대뜸 ‘시험삼아 죽어보자.[試與觀化]’ 하였다.
이 말은 물론 해학(諧謔)이지만 그는 잠시 후에 운명하였다.
이는 죽고 사는 변화를 마치 아침이 지나고 저녁이 돌아오는 것처럼 보았으니, 그는 참으로 천고(千古)의 풍류인다운 호걸이었다. 《지비록(知非錄)》
극초(郄超)가, 뜻이 고상하여 은거(隱居)에 유의한 이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매번 선뜻 백만의 자금과 거기다 거처할 집까지
마련해 주곤 하였는데, 대안도(戴安道 안도는 진(晉) 나라 대규(戴逵)의 자)를 위하여 섬계(剡溪)에 매우 정제(整齊)한 집을
지어 주었다. 경력(慶曆) 연간에는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시호)이 낙양(洛陽)을 지나다가 산천(山川)과 풍속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이내 거기에 머물러 살 뜻을 두자, 가우(嘉祐) 7년(1062)에 왕선휘(王宣徽)가 낙양윤(洛陽尹)으로서 천궁사(天宮寺) 서쪽, 천진교(天津橋) 남쪽에 있는 오대(五代) 시대의 절도사(節度使) 안심기(安審琦)의 옛터인 곽숭도(郭崇韜)의 고리(故里)에 3칸의 집을 지어 강절을 이거(移居)시켰다. 또 부 한공(富韓公 한공은 송(宋) 부필(富弼)의 봉호)이 문객(門客) 맹약(孟約)을 시켜서
그 집 맞은편에 하나의 동산을 강절에게 사주었는데, 역시 수석(水石)과 화목(花木)이 매우 아름다웠다. 나의 의취야 감히 선철(先哲)에 미칠 수 없건만, 육평천(陸平泉 평천은 명(明) 나라 육수성(陸樹聲)의 호) 선생과 포우명(包羽明)ㆍ동현재(董玄宰 현재는 명(明) 나라 동기창(董其昌)의 자) 등이 나를 위하여 각기 자금을 내어 소곤산(小崑山) 북편에 독서대(讀書臺)를 건립하였는데,
구학(丘壑)들이 봉묘(峯泖)의 압주(押主)가 되어 있으므로 내빈(來賓)들이 자못 절경(絶景)이라 일컬었다. 이에 내가 임강선(臨江仙)이란 사(詞) 하나를 짓기를,
婉孌北山松樹下(완련북산송수하)
石根結箇巖阿(석근결개암아)
巧藏精舍恰無多(교장정사흡무다)
尙餘簷隙地(상여첨극지)
種竹與栽梧(종죽여재오)
高臥不須愁客至客來(고와부수수객지객래)
野筍山蔬一瓢濁酒儘能沽(야순산소일표탁주진능고)
倦時呼鶴舞(권시호학무)
醉後倩僧扶(취후천승부)
아름다운 북산 소나무 아래엔
바위들이 돌뿌리에 결집되었는데
한 채의 정사 교묘히 세워졌네
그래도 처마 밑에 남은 땅 있어
대나무 오동나무를 심어 놓고
한가로이 지내다가 손들이 찾아오면
죽순나물 산나물에 탁주를 나눌 제
피로해지면 학을 불러 춤추게 하고
취한 뒤에는 중 시켜 부축케 하네
하였다. 《암서유사(巖棲幽事)》
백낙천(白樂天 낙천은 당(唐) 백거이(白居易)의 자)은,
“내가 작년 가을에 처음으로 여산(廬山)에서 노닐다 동서편 숲
사이에 있는 향로봉(香爐峯) 아래 이르러 주위를 살펴보니,
운수(雲水)와 천석(泉石)이 너무도 절경이라 그대로 버려둘 수
없었다. 이에 초당(草堂) 한 채를 지었다. 앞에는 큰 소나무 10여 그루와 대나무 1천여 그루가 있는가 하면, 푸르른 댕댕이는 장원(牆垣)이 되고, 하얀 돌은 교도(橋道)가 되었으며, 흐르는 물은
초당 아래를 둘렀고 뿜어나오는 샘물은 처마 위에서 떨어지는가
하면, 푸르른 버드나무와 하얀 연(蓮)이 못과 언덕에 즐비하였다. 대저 이곳의 경치가 이처럼 절경이므로 매번 혼자 찾아가서 10여 일씩 지내곤 한다. 나의 한평생 좋아하는 바가 다 여기에 있으니, 돌아오기를 잊을 뿐 아니라 일생을 그냥 거기서 마칠 수도 있다.”
하였다.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원윤(袁尹 진(晉) 원굉(袁宏))이 임지(任地)에 있을 때 시주(詩酒)로써 자적(自適)하고 세무(世務)에 마음을 두지 아니하여
매번 채찍을 지팡이로 하고 밖에 나가 노닐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유연(悠然)히 돌아오기를 잊곤 하였다. 마침 본군(本郡) 남쪽 어느 집에 아름다운 대나무와 돌이 있었는데, 원윤이 선뜻
보행(步行)으로 찾아가서 주인에게 알리지도 않고 곧장 대나무
밭으로 들어가 소리를 높여 마음껏 노래하였다. 이에 주인이 듣고 나와서 간곡한 담소(談笑)를 나누는 사이에 거기(車騎)와 의장(儀仗)이 들이닥치므로 그제야 주인이 그가 원윤임을 알았다. 《하씨어림(何氏語林)》
왕일소(王逸少 일소는 진(晉) 왕희지(王羲之)의 자)가 말하였다.
“지난번 동유(東遊)에서 돌아와 뽕나무를 심었더니, 그 지엽(枝葉)이 한창 무성하게 자랐다. 이에 여러 아들과 손자들을 거느리고 거기 가서 노니는 사이에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이라도 골고루 나누어 주면서 즐기었다. 당면한 의식(衣食) 문제만 해결한 이외에는 가끔 친지들과 함께 모여서 마시고 즐겼으면 좋겠다. 물론 흥겨운 토론과 고상한 읊조림으로 잔을 가득 채워 마시는 놀이라 할 수는 없으나 전가(田家)의 행사를 이야기할 수 있으므로 손뼉을 치면서 즐기는 자료가 될 것이니, 그 마음에 드는 낙(樂)을 어찌 다 말하랴.” 《소창청기(小窓淸記)》
백거이(白居易)가 말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늙기에 이르도록 아무리 1~2일 간 머물러 있게 되더라도 흙을 져다가 대(臺)를 만들고 돌을 모아 산(山)을 만들고 물을 막아 못을 만들곤 하였다. 그런데 지금 여산(廬山)이 신령스럽고 절승(絶勝)의 경치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마침내 나의 좋아하는 바를 얻게 되었으니, 내가 앞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면 왼손으로는 처자(妻子)를 이끌고 오른손으로는 거문고와 책을 안은 채 여산으로 가서 만년(晩年)을 보내어 나의 평생 소원을 이루고야 말겠다. 여산의 맑은 샘과 하얀 돌도 나의 이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소창청기》
사마 온공(司馬溫公 온공은 송(宋) 사마광(司馬光)의 봉호)이
말하였다.
“정신과 육체가 피로할 적에는 낚싯대를 던져 고기를 낚거나 옷자락을 잡고 약을 캐거나 개천물을 돌려 꽃밭에 물을 대거나 도끼를 들어 대나무를 쪼개거나 뜨거운 물로 손을 씻거나 높은 곳에 올라 사방을 관망하거나 이리저리 한가로이 거닐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즐기거나 하면 좋다. 그때 밝은 달이 제때에 떠오르고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면 움직이고 멈추는 데 구애가 없어 나의 이목폐장(耳目肺腸)이 모두 나의 자유가 되므로 마냥 고상하고 활발하기만 하여, 이 하늘과 땅 사이에 또다시 어느 낙이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줄도 알지 못하게 된다.” 《소창청기》
왕 형공(王荊公 형공은 송(宋) 왕안석(王安石)의 봉호)이 만년에 종산(鍾山) 사공돈(謝公墩)에서 살았는데, 그 지점이 종산과 주성(州城)의 중간에 있으므로 이름을 반산정(半山亭)이라 하고는,
매일 아침 식사가 끝나면 으레 집에서 기르는 나귀를 타고 종산에 가서 산간(山間)을 거닐었고, 피로해지면 즉시 수림(樹林) 사이에 앉아 졸다가 가끔 해가 져서야 돌아왔으며, 혹 종산까지 도착하지 못할 경우에는 중도에서 나귀를 몰아 돌아오곤 하였다.
그는 이 같은 일을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소창청기》
또 소자첨(蘇子瞻 자첨은 송(宋) 소식(蘇軾)의 자)은 황주(黃州)와 영외(嶺外)에 있을 때 매일 일찍 일어나서 객(客)들을 불러들여 서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으레 자신이 객들을 찾아가서 이야기하였고, 그와 종유(從遊)하는 자들도 말을 가리지 않고 마음대로 해학(諧謔)하여 마음의 간격을 두지 않았다. 또 이야기를 못하는 자에게는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억지로 시키다가 혹 이해가 가지 않을 경우에는 그런 거짓말은 그만두라고 하여 듣는 자들이 모두 허리를 잡고 웃어대면서 마음껏 즐긴 뒤에야 헤어지곤 하였다 한다.
《미공비급(眉公祕笈)》
소옹(邵雍)이 그 거처를 안락와(安樂窩), 자호(自號)를 안락 선생(安樂先生)이라 하고는, 매일 아침에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았다가 신시(申時)가 되면 3~4잔의 술을 마시되, 얼근해지면 그만두어 한 번도 만취한 적이 없었고 흥이 날 적에는 대뜸 시를 지어 읊조렸으며, 춘추(春秋)에는 가끔 성중(城中)에 나가 노닐었고 비바람이 있을 적에는 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밖에 나갈 적에는 조그마한
수레를 이용하여 한 사람을 시켜 끌도록 하고 마음내키는 대로
즐기었다. 그러므로 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도 그의 수레 소리를 듣고 앞을 다투어 맞이하면서 서로 우리집에 선생이 왔다고 하였다. 그는 덕기(德氣)가 수연(粹然)하여 바라보는 사람마다 그
어짊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드러내거나 남들과 간격을 두지 아니하여, 여럿이 담소(談笑)하는데 종일토록 남다른 행동이 없었고 남들과 만나서 그 선(善)은 칭찬하고 악(惡)은 숨겨 주었으며, 학(學)을 묻는 자가 있으면 열심히 대답해 주었고, 신분의 귀천(貴賤)과 나이의 소장(少長)도 없이 모든 것을 정성으로 대하므로, 어진이는 그 덕행을 좋아하고 불초한 자도 그 교화에 복종하였다. 사후에 강절(康節)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
손방(孫昉)의 호는 사휴거사(四休居士)인데,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의 호)이 그 호의 뜻을 묻자, 웃으면서,
“거친 음식을 먹어도 배만 부르면 그만이고, 누더기옷을 입어도
몸만 따뜻하면 그만이고, 불평과 불만도 시기가 지나면 그만이고, 탐욕과 질투도 나이가 많아지면 그만이다.”
하므로, 산곡이 말하였다.
“이것이 곧 안락법(安樂法)이다. 대저 욕심이 적은 것은 불벌(不伐)의 집이 되고, 만족함을 아는 것은 극락(極樂)의 나라가 된다.”
사휴거사의 집에 3묘(畝)의 동산이 있어 화목(花木)이 무성한데, 손이 찾아오면 차를 달이고 술을 내놓고는, 인간의 기쁜 일들을
서로 담론(談論)하다가 차와 술이 식어버리는 것도 주객(主客)이 모두 모르고는 하였다. 《옥호빙(玉壺氷)》
황진(黃溍)이 말하였다.
“마음이 혼탁하지 않은 것을 ‘청(淸)’이라 하고, 행적이 드러나지 않은 것을 ‘은(隱)’이라 하는데, 나는 노자(老子)의 법을 배운 사람이다. 아침ㆍ저녁에 기장[黃粱]밥 한 그릇과 거여목[苜蓿]국
한 사발이면 그대로 쾌적하고도 편안하게 여기며, 학창의(鶴氅衣) 차림에 《황정경(黃庭經)》을 들고 소연(翛然)히 앉았으면 제아무리 9구(衢) 12맥(陌)의 자욱한 티끌도 나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찌 청(淸)이 아니겠는가. 이름이 명리(名利)의 장중(場中)에 들지 않고 마음이 영욕(榮辱)의 경내(境內)에 예속되지
아니하여 들어와서는 연하(煙霞)와 함께 지내고 나가서는 어초(漁樵)와 함께 노닌다면 이 어찌 은(隱)이 아니겠는가.”
《지비록(知非錄)》
경야자(耕野子)가 말하였다.
“산이 깊어 숲이 무성하고 못이 기름져 고기가 살쪘으며, 송아지가 언덕에서 조는가 하면 죽림(竹林)이 그윽하고 계곡이 깊다.
이에 초동(樵童)은 숲에서, 어부(漁父)는 못에서 노래를 부르고 목수(牧叟)는 언덕에서 저[笛]를 불며, 야인(野人)은 계곡을 찾고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휴식하는가 하면,
배부르게 먹고 격양가(擊壤歌)를 불러 풍년을 축하한다.
나는 고금(古琴) 1대와 도서(圖書) 1권에 필낭(筆囊)을 메고
술병을 휴대한 다음 마음 내키는 대로 거닐다가 느낌이 있을 적에는 흔연히 시구(詩句)를 얻어내고 흥이 나서 술을 마실 적에는
가고 머무는 것을 마음쓰지 않는다. 지친 새들이 나무를 찾아들고, 흘러가는 구름이 동학(洞壑)에 멈추고, 해가 서산에 기울고 달이 띳집에 떠올라 사벽(四壁)이 조용하고 온 창문이 환해질 적에 취흥을 타고 돌아오면서 자재경(自在境)을 읊조리고 희황(羲皇)의
자리에 누워서 무하향(無何鄕)을 노닐면 마침내 즐거운지 즐겁지 않은지 그 여부조차도 알지 못하게 된다.” 《지비록》
서면(徐勉)이 말하였다.
“해가 비추는 겨울날이나 해가 가려진 여름날, 그리고 좋은 계절에 경치가 아름다울 때 지팡이에 나막신을 신고 밖에 나가 거닐면서 스스로 즐기는 한편, 못가에서 물고기를 구경하고 숲 속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탁주 한 잔과 거문고 한 곡조로 몇 시간의 낙을 즐기다보면 일생 동안 거의 이대로 지낼 수 있다.” 《지비록》
연숙견(延叔堅 후한(後漢) 때 연독(延篤)의 자)은,
“내가 새벽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객당(客堂)에 앉았다가 아침이 되면 희황(羲皇)의 《역경(易經)》 순우(舜禹)의 전모(典謨)를 외고 주공(周公)의 전례(典禮)와 중니(仲尼)의 《춘추(春秋)》를 읽으며, 저녁이 되면 안마당 층계에서 한가로이 거닐고 남쪽 난간에서 시를 읊조리다가 틈을 타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을 열람하노라면 귀에 쟁쟁하고 눈이 황홀한 그 혼자만의 낙이 푸짐하고 흐뭇하니, 이 경지의 낙이야말로 하늘이 덮여 있는 것과 땅이 실려 있는 것도 분간할 수 없고 세상에 사람이 있는 것과 나에게 육체가 있는 것도 분간할 수 없다.”
하였다. 《저기실(楮記室)》
오초려(吳草廬 초려는 원(元) 오징(吳澄)의 호)가 말하였다.
“다만 바라는 바는, 동이에 술이 비지 않고 부엌에 연기가 끊이지 않으며, 띳집이 새지 않고 포의(布衣)를 늘 입을 수 있으며, 숲에서 나무하고 물에서 고기 낚을 수만 있으면 영화도 욕됨도 없이 그 낙이 도도(陶陶)할 것이다. 이만하면 일생이 만족하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철경록(輟耕錄)》
방손지(方遜志 손지는 명(明) 방효유(方孝孺)의 재호(齎號))가 말하였다.
“흙벽[土壁]에 띠처마[茅簷]와 깨진 항아리 주둥이로 만든 창문[甕牖]에 새끼로 단 지도리[繩樞]와 조그마한 침상에 거적문으로 겨우 몸을 용납하는 곳에서 나의 본뜻을 기를 뿐이요, 칡베옷에 갈대띠[葦帶]와 마른밥에 나물국 등 거칠고 담박한 것으로 겨우 기한(飢寒)을 해결하여 나의 본뜻을 기를 뿐이요,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본래의 소질대로 하되, 바른 행동과 바른 기색(氣色)으로 지내며 남에게 요구하는 바도 없고 사물(事物)과 어긋나는 바도 없이 나의 본뜻을 기를 뿐이요, 말은 그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글은 그저 자신의 생각에 맞도록 함으로써 사리만을 따라서 나의 본뜻을 기를 뿐이다.” 《정학집(正學集)》
오강재(吳康齋 강재는 명(明) 오여필(吳與弼)의 호)가 말하였다.
“남쪽 난간에서 《맹자》를 읽을 적에는 사람들의 아침에 발로되는 청명(淸明)한 기(氣)에 대해 논한 말을 매우 좋아하여 조금도 요탈(擾奪)됨이 없으며, 짙은 녹음과 활짝 갠 대낮에 훈풍(薰風)이 슬슬 불어오고 산림(山林)이 조용할 적에는 천지(天地)가 저절로 넓어지고 일월(日月)이 저절로 한량없는 듯하다. 소요부(邵堯夫)의 ‘마음이 조용해야만 환한 해를 알 수 있고 눈이 밝아야만 푸른 하늘을 알 수 있다.[心靜方能知白日 眼明始會識靑天]’라고 한 뜻을 여기서 증험할 수 있다.” 《지비록》
진백사(陳白沙 백사는 명(明) 진헌장(陳獻章)의 호)가 말하였다.
“그 환경이 마음과 융화되고 그 기회가 뜻과 일치되어 흔연히 쾌적해지고 태연히 편안해지면 물아(物我)를 서로 잊게 될 것이니,
생사(生死)가 어찌 서로 간섭할 수 있으랴. 여기에 놀기도 하고
쉬기도 함으로써 영대(靈臺)가 허명(虛明)해지면 조금의 티끌도 전염되지 않고 부화(浮華)가 일체 제거되어 그 진실을 얻을 것이요, 비파를 치고 거문고를 퉁기어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멈추는
사이에 기(氣)가 봄바람에 융화되고 마음이 태고(太古) 시대에
노닌다면 그 자득(自得)의 낙 또한 그지없을 것이다.” 《지비록》
나일봉(羅一峯 일봉은 명(明) 나륜(羅倫)의 호)은,
“국화를 불러 붕(朋 동류(同類)를 뜻함)을 삼고 소나무를 사귀어 우(友 동지(同志)를 뜻함)를 삼고 미록(麋鹿)과 어울려 한떼가 되면 정무(庭廡)와 궤석(几席) 사이에 산(山)은 그 기이함을, 달[月]은 그 깨끗함을, 연하(煙霞)는 그 변환(變幻)을 보여주어, 온 천지가 다 제각기의 장점을 나에게 보여줄 것이다.”
하였다. 《지비록》
유남원(劉南垣 남원은 명(明) 유인(劉麟)의 호)이 말하였다.
“요즈음 내가 줄곧 한가로운 것만 탐하여 졸지도 않고 손님도 받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필연(筆硯)도 대하지 않고는, 규화(葵花)를 꺾고 근화(槿花)를 구경하다가 혹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물을 구경하는 것으로 우유(優遊)와 쾌락을 삼을 뿐인데, 공(公)이 어찌 가영(歌詠)하는 일로써 나를 수고롭게 하려 하는가. 가영이란 실속도 없고 전수할 가치도 없는 것이요, 또한 가영은 안개나 구름을
따라 흩어져 버리는 것인데, 어찌 세속과 어울려 고뇌스러운 생활을 하겠는가.” 《지비록》
축석림(祝石林)이 말하였다.
“사람들의 공통된 병통은 나이가 들수록 지모(智謀)만 깊어지는 데 있다. 대저 석화(石火)는 금방 꺼져버리고 황하수(黃河水)는 수백 년 만에 한 번씩 맑아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세속에서 살려 하거나 세속을 떠나려 하거나간에 모름지기 조화(造化)의 기미[機]를 알고 멈춤으로써 조화와 맞서 권한을 다투려 하지 말고 조화의 권한은 조화에게 돌려주고, 아손(兒孫)을 위해서는 복(福)을 심어 아손의 복은 아손에게 물려준 뒤에 물외(物外)의 한가로움에 몸을 맡기고 목전의 청정(淸淨)한 일에 유의할 것이다. 꽃을 찾고 달을 묻는 데 두셋이 동반하고, 차[茶] 달이고 향 피우는 데 거동이 단아(端雅)하며, 모임에는 약속이 필요 없고, 의식에는 겉치레가 필요 없고, 시(詩)에는 기교가 필요 없고, 바둑에는 승부가 필요 없으며, 모든 일이 날로 감소되기를 구하고, 이 마음이 하늘과 함께 노닐도록 하여 경신(庚申 나이를 말함)도 기억하지 못하고 갑자(甲子 연조를 말함)도 망각해 버린다면 이 또한 진세(塵世)의 선경(仙境)이요 진단(震旦)의 정토(淨土)이다.” 《지비록》
막운경(莫雲卿 운경은 명(明) 막시룡(莫是龍)의 자)은,
“내가 일찍이 산 속에서 승방(僧房)을 빌려 혼자 거처할 적에 매번 임만(林巒)이 막 개고 새 소리가 요란하고 암비(巖扉)가 환해지고 운산(雲山)이 눈앞에 흔들리는 듯하는 사이에 산초(山椒)가 걷히고 자취(紫翠)가 머리맡에 와서 떨어지는 듯하곤 하므로, 마치
금방 신선이라도 된 듯이 이 몸과 이 세상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하였다. 《명세설신어(明世說新語)》
당자서(唐子西 자서는 송(宋) 당경(唐庚)의 자)의 시에,
山靜似太古
日長如少年
산이 조용하니 태고 시대와 같고
해가 기니 소년 시절과 같네
라고 하였다.
나의 집이 산 속에 있으므로 매년 늦은 봄, 초여름이 되면 층계에는 푸른 이끼가, 오솔길에는 떨어진 꽃만 가득할 뿐, 문 밖에 찾아오는 이가 없는가 하면 소나무 그림자가 여기저기 어지럽고 새소리가
위아래서 우짖는다. 이에 낮잠을 즐기다가 샘물을 긷고 삭정이를 주워 차를 달이어 마음 내키는 대로 마신 뒤에 《주역》ㆍ국풍(國風 《시경(詩經)》을 말함)ㆍ《좌전(左傳)》ㆍ이소(離騷 《초사(楚辭)》의 편명)와 태사공(太史公 한(漢) 나라 사마천(司馬遷))의 글, 도두(陶杜 도잠(陶潛)ㆍ두보(杜甫))의 시, 한소(韓蘇 한유(韓愈)ㆍ소식(蘇軾))의 문장 몇 편씩을 읽다가 조용히 산길을 거닐면서 송죽(松竹)을 어루만지며, 사슴 새끼나 송아지와 어울려 수풀에서 뒹굴다가 흐르는 시냇물을 희롱하면서 이를 닦고 발을 씻는다.
이어 발길을 돌려 죽창(竹窓)에 이르러서는 아내와 어린애가 마련해 놓은 죽순나물ㆍ고사리나물에 보리밥을 흔연히 배불리 먹은 뒤에 죽창 아래 앉아 붓을 놀려 크고 작은 글씨 수십 자를 쓰고는, 소장된 필첩(筆帖)과 화축(畫軸)을 펼쳐 마음껏 감상한다. 흥이 날 적에는 소시(小詩 단편시를 말함)를 읊고《학림옥로(鶴林玉露)》한두 대문을 쓰고는, 다시 차를 달이어 한 잔 마신 뒤에 시냇가를 거니는 사이에 우연히 원옹(園翁)과 계우(溪友)들을 만나서 상마(桑麻)의 사정을 묻고 갱도(秔稻)의 작황을 이야기하고 우청(雨晴)을 헤아리고 절서(節序)를 세면서 농담을 실컷 주고받다가 지팡이를 짚고 사립문 앞에 당도하면 서산에 지는 해가 만상(萬狀)으로 달라지고 경각(頃刻)으로 변환(變幻)하여 사람의 눈을 황홀케 하는가 하면, 목동(牧童)은 저[笛]를 불며 두셋씩 짝지어 돌아오고 달은 전면 시냇물에 비친다.
그러면 당자서의 이 시구를 음미해 보면 참으로 절묘하다 하겠다. 그러나 이 시구가 아무리 절묘하다 한들 그 절묘함을 아는 자는
대개 적다. 저 사냥개와 매를 데리고 명리(名利)의 장중(場中)에서 사냥이나 하는 자들이야 말머리의 티끌 속에 파묻혀 헛되이
세월만 보낼 뿐이니, 어찌 이 시구의 절묘함을 알겠는가.
사람이 진정 이 절묘함을 안다면 소동파(蘇東坡)의,
無事此靜坐
一日是兩日
若活七十年
便是百四十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앉았으면
하루에 이틀의 실효 있으니
만약 칠십 년을 산다면
일백사십 년을 사는 셈이 되리
라고 한 시와 같이 될 것이니, 그 소득이 어찌 많지 않겠는가.
《학림옥로(鶴林玉露)》
낙성(洛城) 안팎 60~70리 사이의 모든 도관(道觀)과 불사(佛寺)와 고적지(古跡址)와 별장 가운데 천석(泉石)이나 화죽(花竹)이 있는 곳은 놀아보지 않은 데가 없고, 좋은 술과 거문고가 있는 인가(人家)는 들러보지 않은 데가 없고, 도서(圖書)와 가무(歌舞)가 있는 곳은 구경하지 않은 데가 없다. 낙천(洛川)의 수재(守宰)로부터 포의가(布衣家)에 이르기까지 연유(宴遊 연음(宴飮))할 일로 부르는 자가 있으면 또한 때때로 찾아갔다. 매양 좋은 계절, 좋은 경치나 혹은 눈[雪] 내린 아침, 달 뜨는 저녁에 호사자(好事者)들이 서로 찾아올 때면, 반드시 그들을 위해 먼저 술항아리를 꺼내 마시고 다음엔 시 상자[詩篋]를 열어 놓고 읊으며, 술이 이미 거나해지면 이내 거문고를 가져다가 궁성(宮聲) 한 곡조를 타서 추사(秋思) 일편(一篇)을 노래한다. 《옥호빙(玉壺氷)》
당(堂) 가운데에 목탑(木榻) 4개, 소병(素屛) 1벌, 소칠금(素漆琴) 1장(張), 유서(儒書)ㆍ도서(道書)ㆍ불서(佛書) 각기 두어 권(卷)씩을 설치(設置)하여 놓고, 낙천(樂天 백거이(白居易))이 와서 좌주(座主)가 되어 우러러 산(山)을 구경하고 허리 구부려 샘물 소리를 들으며, 곁으로는 죽수(竹樹)와 운석(雲石)을 엿보되, 진시(辰時)로부터 유시(酉時)까지 매우 바쁘게 보내었다. 이윽고 경물(景物)로 인해 나의 심기(心氣)가 이끌리어 밖으로는 유유자적하고 안으로는 마음이 화평하여, 하룻밤을 묵고 나니 몸이 편안해지고 이틀밤을 지내고 나자 마음마저 편안해지며, 사흘밤을 지내고 나서는 마치 술에 취한 듯, 멍하니 정신이 없는 듯도 하여 도무지 그렇게 된 까닭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되어버렸다. 《옥호빙》
장송(長松)과 괴석(怪石)이 황폐한 마을과의 거리는 10~20리
정도인데, 아주 좁은 길, 가파른 벼랑 밑으로 물을 건너가면 풀숲 사이의 좌측(左側)ㆍ우측(右側) 두서너 군데에 두세 인가(人家)가 서로 마주보고 있고 닭과 개의 소리가 서로 들린다. 대나무 울타리에 초가집, 그곳에 한가히 있으면서 난초며 국화를 물가에 심고 때로 복숭아나무며 매화나무를 심어 놓으니 상월(霜月)과 춘풍(春風)에 날로 생각에 여유가 있게 된다.
아동(兒童)과 비복(婢僕)들은 모두 포의(布衣)와 단갈(短褐)을 입고서 땔나무와 마실 물을 공급하니 이로써 촌주(村酒)를 빚어 마신다. 책상에는 잡서(雜書)인 《장자(莊子)》ㆍ《사기(史記)》ㆍ《초사(楚辭)》ㆍ《황정경(黃庭經)》ㆍ《음부경(陰符經)》ㆍ《능엄경(楞嚴經)》ㆍ《원각경(圓覺經)》 등 수십 권뿐이다.
명아주 지팡이에 나막신 신고서 깊은 산골과 큰 냇물을 왕래하면서,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소용돌이치는 여울을 구경하고, 맑은 연못을 감상하고, 높은 다리[橋] 위를 거닐고, 무성한 숲 속에 앉았기도 하고, 그윽한 구렁[幽壑]을 탐색하고, 높은 산봉우리를 오르나니, 이 어찌 즐기지 않고 죽을 수 있겠는가. 《징회록(澄懷錄)》
매양 새 지저귀고 꽃 떨어질 때면 흔연히 내 마음에 만족함이 있다. 이에 작은 종아이를 보내어 항아리에 든 백주(白酒)를 가져다가 이화자잔(梨花瓷盞)에 부어 마시고는 급히 시권(詩卷)을 가져다가 한바탕 유쾌하게 읽고서 음미하니, 흥취가 소연(蕭然)하여 세속(世俗)에 있는 줄을 모를 지경이다. 《옥호빙(玉壺氷)》
옛 초가집을 보수하고 도랑을 터서 샘물을 끌어들이고 빙 둘러 화목(花木)을 심어 놓고서, 날마다 그 사이에서 시가(詩歌)를 읊조리며, 친구와 만나 차[茶]를 달여 마시고 바둑을 두며 잔술이 방안에 가득 널려 있으니, 그 낙(樂)은 자못 속세(俗世)에 있을 바가 아니다. 또한 가래[鍤]를 가져다가 계천(溪泉)을 터서 채마밭[圃]에 물을 주고, 그 틈새에는 연못을 파고 그 주위에는 수목(樹木)을 심어 놓고서, 거닐면서 노래하고 앉아서 낚시질하며 청천(靑天)과 백운(白雲)을 바라보면서 이것으로 유유자적하니, 이 또한 아무 걱정 없이 여생(餘生)을 보내기에 만족하다. 《옥호빙》
한가하게 사는 것이 벼슬살이보다 훨씬 나은데 그 일은 한결같지 않다. 그 가운데 가장 편한 것은 더욱 더운 계절에서 볼 수 있다.
아침 일찍이 향(香)을 피우고 밥을 먹고 나서 두건(頭巾) 벗고 웃통과 아래 옷과 짚신 등을 모두 벗어던지고는 등나무 와상(臥床), 대나무 안석[几]에 몸을 기대고 북쪽 창(窓) 아래 전전(展轉)하다가 맑은 바람이 때로 불어오면 도리어 너무 서늘함을 걱정하며, 책(策)을 끼고 잠자리에 들면 이내 깊은 잠이 든다.
그리고 서늘한 저녁에는 목욕을 끝내고서 지팡이를 짚고 이곳저곳을 서서히 거닐면서 연못에 가서 달을 구경하고 높은 데에 올라 바람을 쏘이며, 연(蓮)을 캐서 가시연밥[芡]을 따고 쪼갠 오이조각과 하얀 연뿌리로 안주하여 흰 막걸리 서너 잔 마시고서 거나하게 취하여 유유자적하니, 그 낙(樂)이 자못 하나 둘로 헤아릴 수 없다. 《경서당잡지(經鋤堂雜志)》
명산(名山)엔 능히 복거(卜居)할 수 없으니, 조그마한 산이 겹겹으로 둘러싸이고 숲이 무성하게 우거진 곳에 나아가 땅 두어 이랑[畝]을 개간하고 삼간초가집을 짓고서, 무궁화나무를 꽂아 울타리를 만들고 띠[茅]를 엮어서 정자(亭子)를 만들며, 한 이랑에는 대나무를 심고 또 한 이랑에는 꽃나무와 과일나무를 심고 또 한 이랑에는 오이와 채소를 심는다. 이리하여 사벽(四壁)은 맑게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데, 산동(山童)을 시켜 원포(園圃)에 물을 주고 잡초를 제거한다. 이에 의자 한두 개를 정자(亭子) 밑에 놓고는 책과 벼루를 끼고서 고적(孤寂)과 벗삼고 거문고와 바둑을 가져다가 좋은 친구를 만류하며, 이른 새벽에 말을 채찍질하여 나갔다가 해 저물어 돌아오곤 하면 이 또한 노년(老年)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미공비급(眉公祕笈)》
예로부터 초야(草野)에 한가히 묻혀 사는 선비치고는 반드시 또
그와 도(道)를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는 선비가 있어 서로 더불어
왕래하기 때문에 자락(自樂)할 수 있었다.
도연명(陶淵明 연명은 도잠(陶潛)의 자)의 시(詩)에,
昔欲居南村(석욕거남촌)
非爲卜其宅(비위복기댁)
聞多素心人(문다소심인)
樂與數晨夕(악여수신석)
옛날 남촌에 살고자 한 것은
그곳에 복거(卜居)하기 위함이 아니라
마음씨 고결한 사람 많다기에
아침저녁 그들과 즐기려 함이라네
고 하였고, 또,
隣曲時來往(린곡시래왕)
抗言談在昔(항언담재석)
奇文共欣賞(기문공흔상)
疑義相與析(의의상여석)
이웃 마을 때때로 왕래하면서
서로 마주 대해 옛이야기 나누며
좋은 글은 함께 감상도 하고
의심난 것은 서로 변석도 했지
라고 하였으니, 남촌(南村)이란 이웃이 어찌 용렬한 선비가 사는 곳이었겠는가. 두소릉(杜少陵 소릉은 당(唐) 두보(杜甫)의 호)이 금리(錦里)에 있을 때 또한 남촌의 주 산인(朱山人)과 왕래하면서 지은 시에,
錦里先生烏角巾(금리선생오각건)
園收芋栗未全貧(원수우률미전빈)
慣看賓客兒童喜(관간빈객아동희)
得食階除鳥雀馴(득식계제조작순)
秋水纔添四五尺(추수재첨사오척)
野航恰受兩三人(야항흡수량삼인)
白沙翠竹江村暮(백사취죽강촌모)
相送柴門月色新(상송시문월색신)
금리 선생은 오각건을 쓰고서
밤이며 토란을 수확하니 가난하지만도 않구려
손들을 자주 보아 아동은 기뻐하고
뜨락에서 먹이를 먹고 새들은 길들었네
가을 물은 겨우 네댓 자나 불어났는데
들 배는 꼭 두세 사람을 태울 만하네
흰 모래 푸른 대숲 강마을 저물어가는데
서로 전송하는 사립문에 달빛이 새롭구나
라고 하였고, 또,
相近竹參差(상근죽참차)
相過人不知(상과인부지)
幽花欹滿徑(유화의만경)
野水細通池(야수세통지)
歸客村不遠(귀객촌부원)
殘尊席更移(잔존석경이)
看君多道氣(간군다도기)
從此數追隨(종차수추수)
서로 가까워도 대는 들쭉날쭉하고
서로 지나면서도 사람은 알지 못하네
그윽한 꽃은 기울어 길에 가득하고
들 물은 가늘게 못으로 통하누나
돌아가는 손은 마을이 멀지 않은데
남은 술잔은 자리에서 다시 옮겨지네
보건대 그대는 도기가 많은지라
앞으로는 자주 따르며 모시리다
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주 산인(朱山人)이란 자는 진실로 보통 위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태백(李太白 태백은 이백(李白)의 자)의 ‘노성 북쪽의 범거사를 찾으려다가 잘못 창이 가운데 떨어졌다.[尋魯城北范居士誤落蒼耳中]’는 시(詩)에는,
忽憶范野人(홀억범야인)
閒園養幽姿(한원양유자)
문득 생각난다 범 야인이
한가한 동산에서 그윽한 풍치 기르겠지
라 하였고, 또,
還傾三四酌(환경삼사작)
自詠猛虎詞(자영맹호사)
近作十日歡(근작십일환)
遠爲千歲期(원위천세기)
風流自簸蕩(풍류자파탕)
謔浪偏相宜(학랑편상의)
서너 잔 술을 거뜬히 들이마시고
스스로 맹호사를 읊조리네
가까이는 십일 간의 환희를 가졌지만
멀리는 천년의 기약을 만들었다오
풍류가 매우 호탕하니
해학하기가 서로 마땅하구나
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범 야인(范野人)이란 자도 진실로 쓸모 있는 무리였으리라. 《학림옥로(鶴林玉露)》
향(香)을 피우고 글을 보니 인사(人事)는 다 끝났다. 주렴 밖엔 꽃잎 떨어지고 소나무 끝에 달이 떠올랐을 때 종소리가 갑자기 들려오자 창문을 밀어젖히고 하늘을 쳐다보니 은하수와 뜬구름이 대낮보다 훨씬 빛난다. 심려(心慮)를 맑게 씻어서 효상(爻象)의 밖에 득의(得意)한 자가 아니면 혼자서 이 말을 깨달을 수가 없다. 《소창청기(小窓淸記)》
이태백(李太白)의 시에,
[淸風明月不用一錢買(청풍명월불용일전매)]
청풍명월은 일전이라도 돈을 들여 사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는데,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호)의 적벽부(赤壁賦)에는 이르기를,
“저 강상(江上)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이여,
귀로 듣노니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노니 빛이 되도다.
갖자 해도 금할 이 없고 쓰자 해도 다할 날이 없으니,
이것은 조물(造物)의 무진장이다.”
라고 하였으니, 동파(東坡)의 뜻은 대개 이태백의 시구(詩句)에서 나온 것이다. 대저 바람과 달은 돈을 들여 사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가져도 누가 금할 이가 없는 것이니, 태백과 동파의 말이 진실이다. 그러나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몇 사람 되지 않고 맑은 바람과 밝은 달도 1년 동안에 또한 몇 날도 되지 않는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 낙(樂)을 안다 할지라도 혹은 세속 일에 골몰하여 정신을 빼앗기거나 혹은 장애(障礙)로 인하여 비록 그를 즐기려 해도 즐기지 못하는 자가 있다. 그렇다면 일없이 한가하게 있으면서, 이미 돈을 들여서 사는 것도 아니요 게다가 그를 가져 보았자 누가 갖지 못하게 금할 이도 없는 이 청풍명월을 만나가지고도 즐길 줄을 모른다면 이는 자기 스스로 장애를 만들어낸 것이다. 《경서당잡지》
집에는 뽕나무와 삼이 있고 밭에는 메벼와 찰벼가 있고 물가에는 버들과 연꽃이 있으며, 높은 공중엔 창을 던져 높게 낮게 날아가는 물오리와 기러기를 쫓고 깊은 물엔 낚싯줄 던져 헤엄치는 상어와 다랑어를 쫓으니, 이는 내가 내 힘으로 생활을 영위하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바이다.
쉬려 하니 높은 나무의 무성한 그늘이 있고, 깔고 앉자 하니 풍성한 풀의 그윽한 향기가 있으며, 산에 올라 구름을 헤치고 천지(天地)의 기변(奇變)을 관람하고, 샘물을 희롱하여 달을 타고서 혼탁한 먼지를 깨끗이 씻으니, 이런 일은 내가 그 권태(倦怠) 속에 처하여 스스로 뜻을 이루는 데에 즐기는 것이다. 《옥호빙(玉壺氷)》
이목(耳目)을 맑게 텅 비워 기관(機關)을 설치하지 않고서, 마음이 안한(安閑)하고 몸이 활발하게 쭉 펴이기를 기대한다. 삼경(三更)이면 잠자고 고용(高舂)이면 일어나서, 고요한 집 밝은 창 아래 경사(經史)와 거문고와 술동이를 죽 늘어 놓고 스스로 즐기다가, 흥(興)이 나면 작은 배를 띄우고 나가서 창(閶)을 돌며 소리내어 시가(詩歌)를 읊고 강산(江山)의 사이에서 고적(古跡)을 찾아보고 회상한다. 차[茶]와 술은 족히 시름을 풀 수 있고, 순채[蓴]며 벼[稻]며 물고기[魚]며 게[蟹]는 족히 입에 맞을 수 있으며, 게다가 또 고승(高僧)과 은군자(隱君子)며 불사(佛寺)요 승경(勝景)이 많고, 집에는 원림(園林)이 있어 진기한 꽃이며 기괴한 돌이며 굽은 연못이며 높은 대각(臺閣)이며 물고기와 새가 있으므로, 거기에 정신이 팔려 날이 저문 것도 모를 지경이다. 《옥호빙》
어떤 사인(士人)이 몹시 가난에 쪼들린 나머지 밤이면 향(香)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를 올리되 날이 갈수록 더욱 성의를 다하자,
하루 저녁에는 갑자기 공중에서,
“상제(上帝)께서 너의 성의를 아시고 나로 하여금 너의 하고자
하는 바를 물어오게 하였다.”
는 말이 들리므로, 사인이 대답하기를,
“제가 하고자 하는 바는 매우 작은 것이요 감히 과도하게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라건대, 이 인생은 의식(衣食)이나 조금 넉넉하여 산수(山水) 사이에 유유자적하다가 죽었으면 만족하겠습니다.”
하니, 공중에서 크게 웃으면서,
“이는 천상계(天上界) 신선(神仙)의 낙(樂)인데,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만일 부귀(富貴)를 구한다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이 헛된 말이 아니다. 내가 보건대, 세상에 빈천(貧賤)한 자는 기한(饑寒)에 울부짖고 부귀한 자는 또 명리(名利)에 분주하여 종신토록 거기에 골몰한다. 알건대, 의식이 조금 넉넉하여 산수 사이에 유유자적하는 것은 참으로 인간의 극락(極樂)이건만 천공(天公)이 매우 아끼는 바이기에 사람이 가장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그러나 필문 규두(蓽門圭竇)에 도시락 밥 한 그릇 먹고 표주박 물 한 잔 마시고서 고요히 방 안에 앉아 천고(千古)의 어진이들을 벗으로 삼는다면 그 낙(樂)이 또한 어떠하겠는가. 어찌 반드시 낙이 산수 사이에만 있겠는가. 《금뢰자(金罍子)》
飽食緩行初睡覺(포식완행초수각)
一甌新茗侍兒煎(일구신명시아전)
脫巾斜倚繩床坐(탈건사의승상좌)
風送水聲來耳邊(풍송수성래이변)
배불리 먹고 느리게 거닐다 막 잠에서 깨어나니
향기 좋은 차 한 잔을 아이가 달여오네
두건 벗고 비스듬히 승상에 나앉으니
바람이 귓가로 물소리를 불어오누나
라고 하였는데, 이는 배진공(裴晉公 진공은 당 나라 배도(裴度))의 시(詩)이고,
細書妨老讀(세서방로독)
長簟愜昏眠(장점협혼면)
取簟且一息(취점차일식)
抛書還少年(포서환소년)
잔글씨는 늙은이가 읽기에 거북하고
긴 평상은 깊이 잠들기에 만족하구려
평상 가져다가 한 번 쉬려고
책을 던지니 다시 소년일세
라고 한 것은 반산옹(半山翁 왕안석(王安石))의 시이며,
相對蒲團睡味長(상대포단수미장)
主人與客兩相忘(주인여객량상망)
須臾客去主人覺(수유객거주인각)
一半西窓無夕陽(일반서창무석양)
포단에 서로 마주한 채 조는 맛 진진하여
주인과 손이 둘이 서로 잊었네
잠깐 사이 손은 가고 주인은 잠에서 깨니
서쪽 창 한 허리에 석양빛이 졌구려
라고 한 것은 육방옹(陸放翁 방옹은 송(宋) 육유(陸游)의 호)의 시이고,
謮書已覺眉稜重
就枕方欣骨節和
睡去不知天早晩
西窓殘日已無多
글을 읽자 하니 미골(眉骨)이 무겁고
잠자리에 드니 뼈마디가 편안하구나
자느라고 해의 조만도 몰랐어라
서쪽 창에 남은 햇빛 벌써 얼마 없구려
라고 한 것은 오(吳) 나라 승(僧) 유규(有規)의 시이며,
謮書已覺眉稜重(책서이각미릉중)
就枕方欣骨節和(취침방흔골절화)
睡去不知天早晩(수거부지천조만)
西窓殘日已無多(서창잔일이무다)
늙어서 글 읽으면 흥이 무르녹기 쉬우니
병을 요양함엔 한가함이 제일임을 꼭 알아야 해
대나무 와상 돌베개로 텅 빈 마루에 누워
강남쪽 비 갠 산을 건너다보네
라고 한 것은 여형양(呂滎陽 형양군공(滎陽郡公)에 봉해진
여희철(呂希哲))의 시이고,
紙屛瓦枕竹方床(지병와침죽방상)
手倦抛書午夢長(수권포서오몽장)
睡起莞然成獨笑(수기완연성독소)
數聲漁笛在滄浪(수성어적재창랑)
종이 병풍 돌베개 대나무 침상에
게을리 책 던지고 낮잠을 자는구나
잠에서 깨어나 빙그레 혼자 웃음짓노니
어부의 피리소리 창랑에서 들려오네
라고 한 것은 채지정(蔡持正 지정은 송(宋) 채확(蔡確)의 자)의 시이다.
나는 게으름 피우는 것이 버릇이 되어 매양 서책을 대할 때마다 반드시 누워서 쉬곤 한다. 그리하여 효선(孝先)을 조롱하는 손이 있을 때는 문득 이 효선의 고사(故事)를 읊어서 스스로 해명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매양 침열(枕熱)이 괴로워서 두서너 번씩 엎치락뒤치락한다. 뒤에 전배(前輩)의 말을 보니,
“형공(荊公 형국공(荊國公)에 봉해진 왕안석(王安石))이 낮잠을 즐겼는데 여름철에도 항상 방침(方枕)을 사용하므로 어떤 이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형공이 ‘오래 졸다가 훈김이 일어 베개에 열이 나면 한쪽 냉(冷)한 곳으로 바꿔 베기 위해서이다.’ 했다.”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낮잠 자는 맛을 아는 자가 아니면 쉽게 이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계신잡지(癸辛雜識)》
花竹幽窓午夢長(화죽유창오몽장)
此中與世暫相忘(차중여세잠상망)
華山處士如容見(화산처사여용견)
不覓仙方覓睡方(부멱선방멱수방)
꽃과 대나무 그윽한 창에 낮꿈이 진진하니
이 가운데 세상과 잠시 서로 잊었다오
화산처사를 만일 만나게 된다면
선방은 그만두고 수방을 찾으리
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잠자는 데도 방법이 있는 것인가. 희이(希夷 송(宋) 진단(陳摶)의 별호)의 말은, 온 세상 사람에게 혼(魂)과 신(神)을 떠나는 것이 곧 부동(不動)이라고 한 데에 불과한 것이다. 그가 남긴 교경(敎經)에는 곧 ‘번뇌(煩惱)의 독사(毒蛇)가 너의 마음속에 들어 있으니 그 독사가 나가버려야만 편히 잠을 잘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근세(近世)의 서산(西山) 채계통(蔡季通 송(宋) 채원정(蔡元定)의 자)의 수결(睡訣)에 이르기를,
“졸 때는 몸이 기울어서 굽고 깨면 몸이 곧게 펴지니 잠자는 데 있어 조만(早晩)을 때에 맞춰 하되, 먼저 마음이 잠든 뒤에 깊은 잠을 잔다.”
라고 하였는데, 회옹(晦翁 주희(朱熹)의 호)은 이에 대해 ‘이는 고금(古今)에 발명하지 못한 묘(妙)이다’ 하였다.
초여름 원림(園林)에서 살살 부는 바람에 술이 깨자 마음내키는 대로 이끼를 쓸고 돌 위에 앉아 꾀꼬리 울음 소리를 듣노라면, 대나무 그늘에서 햇빛이 새어 나오고 오동나무 그림자는 구름을 뚫고 올라간다. 이때 잠깐 서궤(書几)에 기대고서 눈으로 본 바의 시치(詩致)를 가지고 이리저리 탁마하여 문장을 만든다면 족히 운치 있는 가영(歌詠)이 될 것이요, 붓을 끌어다가 동산음(東山吟)을 짓기도 한다.
그리고 혹 천뢰(天籟)가 맑게 터져나오고 학(鶴)의 울음 소리가 창공을 가로지르며, 둥둥 뜬구름이 대각(臺閣)에 부딪고 일천 산봉우리에 비가 내릴 때, 침상(寢床)에 들어 낮잠을 잔다면 쇄락한 깊은 꿈이 또한 운치를 얻을 것이다. 《소창청기(小窓淸記)》
반죽림(斑竹林) 가운데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청석궤(淸石几) 위에 몸을 기대고서, 갖고 있는 도서(道書)와 범서(梵書)를 혹 네댓 자 교수(校讐)도 하고 혹은 한두 장(章)을 외기도 한다. 차[茶]는 그리 정세(精細)하지 못하나 찻잔은 항상 마르지 않고, 향(香)은 그리 좋지 못하나 꺼지지 않고 계속 탄다. 짤막한 거문고는 곡(曲)은 없으나 줄[絃]은 있고, 긴 노래[謳]는 가락[腔]은 없으나 소리는 있으며, 격발(激發)한 기운은 숲 그늘에서 터져나오고 좋은 바람은 물가로 보내주니, 이는 만일 희황상인(羲皇上人)이 아니면 분명 완적(阮籍)의 형제간일 것이다. 《암서유사(巖棲幽事)》
산(山)에 머물러 있으면서, 모름지기 붉은 난간[欄]에 푸른 휘장[幄]이며 밝은 격자창(格字窓)에 짤막한 돛대의 조그마한 배 한 척을 갖추고 그 배 안에다 도사(圖史)와 정이(鼎彝)와 주장(酒漿)과 천포(荈脯)를 뒤섞어 싣고서, 가까이는 봉묘(峯泖)에 이르러 그치고, 멀리는 북쪽으로 경구(京口)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전당(錢塘)에 이르러 그치되, 바람이 알맞게 불고 길이 편리하거든 이내 고인(故人)을 찾아가며 혹 만류하는 자가 있으면 하룻밤 동안 얘기를 나누거나 열흘 동안 술을 마시는 것도 무방하다. 그리고 아름다운 산수(山水)가 있는 곳을 만나거나, 혹은 고승(高僧)과 야인(野人)의 집[廬]을 만나, 죽수(竹樹)가 무성하고 초화(草花)가 서로 비치며 복건(幅巾)과 장극(杖屐)이 서로 마주하여 있는 자리에서, 풍광(風光)이 맑고 시원하고 수월(水月)이 공허하고 맑으며 쇠피리[鐵笛] 한 소리에 흰 갈매기가 너울너울 춤을 추려는 광경을 구경한다면, 이 또한 시끄러운 속세를 피하여 손[客]을 사절하는 한 계책이 될 것이다.
병화사(甁花史), ≪한정록(閒情錄)≫ 제17권(허균)
선(仙)이란 해탈(解脫)로써 의취를 삼으므로 수렁 속에서 나는
연꽃 뿐만 아니라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근화(槿花)나
아침에 봉오리가 벌어졌다가 저녁에 오므라드는 훤초(萱草)도
다 그 본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럼 도량에 나아가서 본래의 공색[空色 ; 불교에서 말하는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色卽是空)을 말함]을 지관[止觀 ; 불교에서 정(定)과 혜(慧)를 닦는 지법과 관법]하면 일체가 다 우로(雨露)이고 또 음양을 따질 나위도 없다고 하였다.
≪한정록≫은 한가한 정취를 기록한 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일종의 독서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