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馬)의 다섯 등급
쿠마라지바(鳩摩羅什.구마라습)
첫째,
채찍의 그림자만 비쳐도 스스로 조복되는 말.
둘째,
내리치는 채찍질을 받고서야 조복되는 말.
셋째,
날카로운 송곳으로 살가죽을 뚫어 찔러야 조복되는 말.
넷째,
살을 깊이 베어야만 조복되는 말.
다섯째,
칼과 망치, 도끼로 뼈에 저며 사무치도록 쪼고 쳐야 겨우 조복되는 말.
~ 중생들의 영리하고 우둔한 것도 다섯 등급이 있으니.
첫째는,
남의 無常(무상)을 보고서 내가 깨닫는 사람이다.
둘째는,
지식으로 無常(무상)을 배워 알아 홀연히 깨닫는 사람이다.
셋째는,
형제나 친척의 無常(무상)을 보고서 깨닫는 사람이다.
넷째는,
부모의 無常(무상)을 보고서 깨닫는 사람이다.
다섯째는,
자신의 인생에서 매우 괴로운 고통을 겪고, 무한히 고뇌하여
피가 마르는 참경을 당한 후에 만신창이가 되어,
옆의 사람이 해 주는 충고를 듣고서야 비로소 깨닫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또한 마찬가지이니 이 모든 것을 겪고,
잃고 나서 드디어는 깨달을 수만 있다면,
아둔하다 하여도 서러울 것 없으려만,
무지 몽매, 암흑천지, 눈감고 걷는 세상,
제 발부리에 제가 걸려 코 깨지고 박 터지면서도,
영문을 몰라 길가의 돌멩이 탓 원망하다가,
無明(무명)속에 한세상 헛 매 맞고 가는 이여.
그대, 또 다시 매 맞을 세상으로 돌아오리.
- '혼불' 강호와 도환 스님의 사천왕에 대한 기나긴 대화 중
! 물이란 그릇에 따라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좁은 통에 들어가면 좁아지고 넓은 바다에 쏟으면 넓어진다.
낮으면 아래로 떨어지고 높으면 그 자리에 고인다.
더우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추우면 얼어 버린다.
그릇과 지리와 炎凉에 따라 한 번도 거역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순응하지만, 물 자신의 본질은 그대로 있지 않은가.
모습과 그릇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땅속으로 스며들어간 물은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마는
지하수가 되어 샘물을 이루고,
하늘로 증발한 물은 이윽고 구름이 되어 초목을 적시는 비를 이룬다.
대저 형식에 집착한다는 것이 무엇이랴.
보이는 것에 연연하여 보이지 않는 것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오히려 형식에 본질이 희생을 당하는 것이리라.
작금의 시세가 불운하여 내가 조상을 욕되게 하고
가문의 문을 닫는다마는, 이것은 다만 형식일 뿐이다.
얼음이 아무리 두꺼운들 실낱같은 봄바람을 어찌 이기며,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천지를 한 입에 삼킬 것 같아도,
구름이란 세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무게를 못 이기어
빗방울이 되고 마는 법.
기다리면 때가 안 오랴. . .
내 대에 안 오면 강모가 있고 강모 대에 안 오면
그 다음 대가 있지 않는가.
그러고도 자손은 면면히 대를 이어갈 것이나,
아무러면 때가 안 오랴. . .
! “우리가 전생을 몰라서 생사의 인연을 놓고 설워하는 것이지,
알고 보면 모두 다 제 받을 몫을 받는 것이야.“
청암부인은 까마귀 형제들의 이야기 끝에 한숨을 쉬었다.
! “정도 줄라면 한 간디다 주랬다고, 여그 저그다 흘리고 댕기먼
목마를 때 떠먹을 물 한 박적이라도 괴이간디?
아, 그런 말도 안 있습디여? 주인 많은 나그네 밥 굶는다고,
여그서는 저그서 먹었겄지 허고, 저그서는 여그서 먹었겄지 허고, 서로 미룸서 밥을 안중게 굶어여제 벨 수 있어?
그렁게로, 미우나 고우나 한 자리를 파야는 거인디.
매급시 찝적거리기만 허먼 생가슴에 원한이나 심어 놓은 거여.“
! 안고수비(眼高手卑)라는 말이 있어서,
마음은 크고 눈은 높아도 재주가 모자라
손이 눈을 따르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기도 한다만,
수비는 나중 이야기고 우선은 안고가 되어야 한다.
보는 눈이 먼저 열려야 분별을 하게 되고,
눈에 격이 생겨야 그 격에 이르려고 부지런히 손을 익힐 것 아니냐. 타고난 재주가 아무리 출중허고,
일평생 익힌 솜씨가 아무리 능란해도,
눈이 낮은 사람은 결국 하찮은 몰풍정(沒風精)을 벗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다른 무엇보다, 사람은 눈을 갖추어야 하느리라.
우리 사람의 정신 속에도 반드시 정신의 눈이라 할 혈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곳에 제대로 있고 그 혈을 보는 눈이 밝은 사람을
세상에서는 “어른”이라 하지.
! 눈이 없어 어둡고 미련한 사람이 한낱 무지랭이라면,
저 혼자서나 미물로 굼벵이처럼 구부린 채 뒹굴다 가지만,
만일 한 집단의 어른이나, 남을 이끄는 자리에 있는 사람,
또는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 가진 사람이 그런 눈을 하고 있다면,
온 집안, 온 나라를 미욱한 어둠 속으로 캄캄하게 처박으면서,
온통 짐승들이 횡행하는 똥밭으로 만들고 말 것이니,
얼마나 겁나고 무서운 일이야.
눈은 곧 빛인데,
빛이 밝으면, 저 혼자서만 제 것을 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빛에 의지해서 모인 사람들 것도 잘 볼 수 있게 해준다.
나랏님도 다를 바 없지만, 아무쪼록 너는 한 가문의 종손이니,
부디 이런 말을 명심하거라.
! 내가 과연 누구인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살아야 할 것인지
깨닫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존귀한 존재가 된단 말이다.
! “진새”란 담살이의 애티를 벗고 드디어 “온 일꾼”으로 인정되는 한판의 잔치였다.
그러나 이것은 생일이나 명절처럼 날짜 되었다고 치르는 것이 아니었다. 이 진새를 하기 전에 담살이는 반드시 한 절차를 거쳐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만한 힘이 있소.” 하고 보여 주는 증거로,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자나무 근처에 놓인 쌀가마니보다 크고 무거운 돌을 불끈 들어 짊어지고, 나무 주위를 도는 일이었다.
그 돌을 “들돌”이라 했다. 온전한 일꾼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는
자질의 바탕은 힘이었던 것이다.
이 일을 거뜬하게 해내면, 모여 선 사람들이 장하다고 함성을 질렀다. 그 동안 송아지도 소도 아니었던 어중간한 어석이소가 이제
떡 벌어진 황소로 때를 벗는 뿌듯한 순간인 것이다.
! “머슴 먹일 것 아끼다가는 그해 농사 다 망친다.”
! 나무는 새들을 찾아 나설 수가 없다.
오직 저 혼자, 새를 부르며,
선 자리에 선 채로 목 놓아 어둠이 깊어지는 수밖에는,
그렇게 나무가 어두워져야 새들은 돌아온다.
한번 씨앗이 떨어진 자리에서 뿌리가 썩어도 다리를 옮길 수 없는
나무와, 날개 가진 새의 안타까운 인연이라니,
그래서 옛 성현이신 공자도
“새는 나무를 골라서 살지만,
나무는 자기에게로 와서 사는 새를 선택할 수가 없다.“는 뜻으로
조즉택목(鳥則擇木), 목기능택조(木豈能擇鳥)라고 하신 일이
있었던가.
! 봄바람은 차별 없이 천지에 가득 불어오지만
살아 있는 가지라야 눈을 뜬다.
! 하늘 아래 나 같은 이. 단 한 사람도 없다 할지라도,
나는 다만 나 혼자서 내 하늘을 이고, 우러러,
단 한 방울 눈물도 흘리지 않으리라.
어금니가 썩어도 나는 결코 이 일로 입을 벌리어 탄식하지 않으리. 비록 나 혼자서 홀로이 나 자신에게 이르는 말일지라도,
이 일을 두 번 다시 되뇌어 곱씹지 않으리라.
내 아무런들 이만한 일에 굽은 다리를 못 펴고,
이만한 일에 넘어져서, 갈 길 먼 가슴을 상할 것이냐.
이 앞으로 내가 세상을 살아갈 때
오직 나를 지탱하고 의지해야 할 곳은 나의 속, 나의 가슴,
나의 머리, 나의 중심일 뿐일 것이거늘, 지금 다 써 버리고,
지금 다 내주어 썩어 버린다면 내 어찌 살아가리.
남의 것 맡아 할 일은 그만두고
오직 내 한 몸 유지하여 살아가려도
그 유지할 만큼은 남겨 두어야 하리니, 내 가슴이 내 양식이라.
내 마음이 나의 시량(柴糧)인즉,
뼛속에 끼치는 추위로 이 세상이 고적하여
그 어디에도 몸 비비어 온기를 얻을 곳 없다 하여도,
내 심중이 든든하다면
스스로 땔나무를 구하러 헤매지 않을 것이요.
어느 한 사람 나한테 마음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 하여도,
내 속에 내 먹을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비루하고 누추하게 남의 문전에서 동정을 얻으려고 서성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결코 너의 문전에서 기웃거리지 않을 것이다.
효원은 어금니를 깊이 물었다.
! “아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우리 집을 망치고,
딸을 가르치지 않으면 남의 집을 망친다.
그러므로 잘 가르치지 않는 것은 부모의 죄다.“
! 옛날부텀도 복이 너무 차면 쏟아진다고,
항상 어느 한 구석은 허름한 듯
부족한 듯 모자라게 두어야 한다 했니라.
천석꾼 만석꾼 부잣집에서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대궐마냥
덩실하니 짓는 거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대문만은 집채 규모에 당치않게 허술하거나 아담 조그맣게 세웠고, 작명을 할 때 또한 사방 팔방이 복으로만 숨통이 막힐 만큼 꽉 차게 짓지는 않는단다.
지나치면 터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거든,
그래서 부부 금술이 유난히 좋아 떨어질 줄을 모르면
예전 어른들은 오히려 사위스럽다고 나무라셨더니라,
그런 사람들이 상배(喪配)하기 쉬운 탓이었다.
!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우리 속담에 있다.
이것은 그 어떤 무엇이 비록 상하여 썩었다 할지라도,
원래 품격과 기틀이 가지고 있었던 사물이나 바탕은, 그 본질이
몸 어딘가에 남아서 꼭 제 노릇을 한다는 비유인 것이다.
! 서망벽(鼠忘壁)이라는데,
쥐는 제가 갉은 벽을 잊어도,
벽은 그 상처가 남아 길이 쥐를 잊지 못한다지 않은가.
그래서 벽불망서(壁不忘鼠)라고 하였다.
! “보이는 물질은 잃으면 잃은 줄을 압니다.
허지만, 보이지 않는 정신이나 마음은
빼앗겨도 빼앗긴 줄을 모르니, 찾을 길 또한 망연한 것입니다.“
작가는 1998년 12월 11일에 숨을 거두기 전 산소 호흡기를 쓴 채 마지막으로
“혼불 하나면 됩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참으로 잘 살고 갑니다.”
나직하게 말하며 지상의 삶을 마치고 고요히 영원 속으로 떠나게 됩니다.
나는 봄의 밤 강물을 보았다.
달도 없는 야청 하늘 검푸른 등허리에,
몇 점 별빛, 새로 돋는 풀잎부리 여린[芽]처럼 눈 뜬 밤.
물 오른 어둠을 깊숙이 빨아들여 숙묵(宿墨)보다
더 검어진 산 능성이 반공에 두렷한 마루를 긋고 있는데,
그 산 그림자 품어 안은 밤 강물이 소리 죽여, 제 몸의
비늘을 풀며, 아득히 가득히 흐르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것은 '돌아오는' 강물이었다.
언제라고 강물이 한자리에 서 있으랴만,
가을의 강물은 뒷모습을 차갑게 가라앉히며
멀리 떠나가는 강물이요, 겨울 강물은 쓸쓸히 남은
그 물의 살을 벗고, 오직 뼈만으로 허옇게 얼어붙어
극한(極寒) 속에서 존재의 막투름을 견디는 얼음이다.
지난 여름,
무성하게 푸르러 눈부시게 젊고도 풍요로운
강물이 제 온몸을 수천 수만 수십만 개 은비늘로 찬연히
부수며, 물의 살 끝 끝에까지 차오르던 환희를 어찌 잊으리.
목숨이 누리는 영화에 여한이 없었다.
흰 돛 달고 두둥실 구름같이 배 띄우는 수면에 바람은
불어와 황금빛 노를 젓는데, 솟구쳐 뛰노는 은어떼,
비단고기, 자멱질이 숨 막히었지.
이윽고 해가 지면 밤이 익어 꽃술 터지듯
함성을 지르며 쏟아지던 저 별들의 무리.
살아서 아름다워, 이만한 충만이 어디 있으랴.
돌아보아 부러울 것 하나 없던 뜨거운 여름이
만월(滿月)이라 보름달같이, 시위 당긴 활만큼
넘치게 부풀어 아슬아슬한 고비 정점에 이르면,
이 어인 일이가, 아차, 한 순간 놓친 것이 그만 쏜살처럼
뒷모습 보이며 저만큼 흘러가 버리는 가을 강물.
가을 강물이 설명도 없이 투명하게 씻고 가는 모세혈관에,
그 여름의 잔정(殘情)은 이미 자취를 거두고, 이제는 온기
식어 텅 빈 실핏줄 메마른 굽이마다 홀로 남아 여윈 뼈가
쓸쓸히 일어서는 겨울이 왔었다.
그 여름의 휘황한 갈채 은비늘이 뒤집히어,
이제는 비늘마다 시퍼렇게 날 세우며 얼어붙는
겨울 강은, 침묵의 비수였다.
수천 수만 수십만 개 단도로 앙상한 제 가슴을
찌르고 있는 겨울 강의 빙판 저 언저리에, 아아,
어느 날인가, 문득 연두 물빛 번지면서
소살소살 소살소살 발소리 들린다.
돌아오는 강물의 발소리인 것이다.
한꺼번에 다는 못 돌아오고 아주 조금씩,
강 언덕 가장자리 눈치 못채게 숨결로 스미다가,
드디어는, 날 세운 비수도, 거꾸로 박힌 단도도
고단하게 돌아오는 손으로 다 녹이어 깊이깊이
풀어주는 발소리가, 비어있던 온 강에 가득 차는 봄밤.
이 강물은 과연 어디만큼이나 멀리 멀리 다리가 아프게
헤매어 흐르다가, 지금 이렇게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오는 것일까. 웬일인지 봄날의 강물은 눈물겨웁다.
눈물 섞인 강물이 제 몸을 적시어 일깨우는 산하(山河)
대지에 어찌 새 풀 돋지 않고, 새 꽃 피지 않으랴.
세우(細雨) 내린 언덕에 버들은 아스라지게 애달픈
연두 머릿단 감아 빗고, 더 못 숨길 마음 같이 봄의 가슴
문지르며 피어나는 무리무리 연분홍 진달래, 보라색 제비붓꽃,
노란 민들레, 풀섶에 패랭이꽃, 장다리, 배추꽃, 홍자색 산철쭉,
논에는 자운영, 밭에는 쑥부쟁이, 들에도 피어나고,
산등에도 피어나고, 응달진 골짜구니, 흥건한 물가에도
얼마든지 피고 또 피는 봄꽃들의 저 황홀한 잔치는,
천지를 오색 교성(嬌聲)으로 자지러지게 한다.
돌아온 안도의 저 빛깔들이여, 마음놓고 어우러져
서러울 것이 없구나. 봄 하늘에 새 울고 나즉히 일렁이는
아지랑이 꿈결 같은데, 그 갈피 간질이며 고개 젖혀
색색깔로 웃는 꽃들의 향기와 짙어지는 풀빛들은,
모두 다 '새'것이 아니라 '돌아온' 것들이다.
겨울 강은 봄 물을 나무라지 않는다.
홀로 빈 겨울을 묵묵히 견딘 저 해토(解土)의 대지 또한.
네가 나를 무참히 버리고 가, 내가 너를 이토록 기다리게
하였으니. 보라. 꽃 진 자리 멍든 상처,
길고 긴 회한을 내보이며 원망하지도 않는다.
겨우내 얼어터진 발등과 오래오래 기다리다 메마른
앙가슴을 두드리며, 포원(抱寃)진 설움에 목을 놓아
울지도 않는다. 그저 다만 그 돌아오는 강물이 촉촉하게
스며든 대지의 젖은 살은, 긴 겨울의 무거운 비늘을 벗고,
꽃비늘 벗고, 다투어 다투어 흐드러지게 피어날 뿐이다.
그러나, 이 봄이 무르익어 여름이 넘치면 가을은
또 뒷모습 보이며 흘러가고, 꽃도 지고 잎도 지고
낙목한천, 다시금 겨울이 강물과 대지의 세상을
혹한에 내던지겠지. 그 도취와 상실과 아픔,
그리고 기다림과 견딤의 시간들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은, 흡사 약재
숙지황(熟地黃)처럼 느껴진다.
이 봄날의 장독대 언저리에 막 잎사귀 돋아나는,
숙근초(宿根草) 다년생 풀뿌리 지황은,
엄지 손가락만씩한 뿌랭이를 조롱조롱 줄조롱으로
달고 있는데. 생지황 그대로 먹어서 혈증(血症)을
다스리기도 하지만, 구증구포(九烝九曝),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어 숙지황으로 만들면,
이것은 허손증(虛損症)에 쓰이는 보혈(補血),
보정(補精)의 소중한 한약재가 되었다.
허손증이란, 사물에 허기를 느껴, 줄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가지고자 덤비는 것이라 하던가.
약성이 '무거운' 숙지황은, 알갱이 빠져버린 헛껍데기 빈 몸에
허기를 가라앉혀 잡아주고, 피와 원기를 만드는 데 긴요한 약이다.
그러나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가 않다.
축사밀(縮砂密)의 씨 '사인'(砂仁)을 넣은 술 사인주에
생지황 뿌리를 취하도록 담갔다가, 햇볕에 꺼내어
바싹 말린 다음, 이번에는 뜨겁게 찌는 숙지황.
그것도 그냥 찜통이나 솥에 넣고 잠깐 찌는 것이 아니라,
불가마를 만들고는 거기에 쌀알만큼씩 굵은 모래를
채운 뒤, 모래 속에 지황을 묻어놓고, 그 위에 자갈을
무겁게 덮어서 함봉을 하여, 나뭇가지 정하게 꺾어
오래오래 공들여 뜨겁게 쪘으니.
지금이야 그리 하기 어찌 쉬우랴마는,
옛날에는 산 속에서 약 짓는 노인들이 도(道) 닦는
마음으로 이와 같이, 똑같은 순서를 아홉 번씩
되풀이했다 한다. 한 번으로 끝난대도 결코 수월치
않을 것을, 지황은 묵묵히, 소스라치게 독한 술에
담그어 졌다가, 폭건(曝乾)으로 묵어 목이 타게
말려졌다가, 한중보다 더 무섭게, 마지막 수분이
다 빠지도록 쪄졌다가, 다시 처음부터 단 한치
달아날길도 없이 그 일을 당하면서 조금씩 약이 되어갔던 것이다.
그것을 어찌 하루에 다 할 수 있으리오.
지황으로 태어난 한 세상을 그렇게 오직 온 몸뚱이
목숨을 찌고 말리는 일에 다 들여야 했으니,
지황이 만일 사람처럼 생각 있어 문득 돌아본다면,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기품을 자랑하는 왕후장상 소나무도 아니요,
뜨락의 군계일학 모란꽃도 아닌, 일개 풀뿌리로 태어나
별로 누린 것도 없이, 무슨 좋은 날 기약된 것도 아니면서
어이하여 이와 같은 곤욕 과정을 견디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그가 약재(藥材)로 난 탓이다.
약재 아니더면 그러할 리 천만 없는 혹독지경을
숙지황은 몸소 겪으며, 긴긴 나날, 취하고, 울고,
가뭄에 갈라지는 논바닥처럼 제 몸 트고 쪼개져
저 실핏줄의 마지막까지 다 마르고,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서 불덩어리 불가마 한복판에 이글이글
파묻혀 뜸질에 잠 못 이루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루하루, 그 몸에 점점 술(滿)이 없어지는
지황은, 본디의 물 많고 노르스름한 살덩어리를
벗어가고, 조금씩 독성을 거르고, 드디어는 쫀득쫀득
정혈만 남아 새까맣게 엉긴 약재로 값지게 태어나는지라.
잡티와 한숨과 허상도 다 버린. 한 번 찔 때마다
흑칠 같은 윤택이 단맛과 함께 자르르 깊어지는
숙지황은, 또 한 번, 다시 한 번, 찌고 찔수록
약효가 더욱 신묘해진다.
장독대 언저리의 하찮은 풀뿌랭이 하나도,
제가 가진 약성(藥性)을 제대로 발휘하게 하려면
이와 같을진대, 사람이라면 그 어찌할 것인가.
사람이 제 값나게 살아서, 눈빛만 맞추어도 약이 되고,
소리만 들어도 허기가 가시며, 그가 다만 목숨 가진 이승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온기 도는, 그러한 날을
이룰 수 있으려면 과연 몇 중 몇 포를 해야 하는 것일까.
사람이 일생에 모진 일을 세 번만 당하여도
그만 다 늙는다 하는데. 풀뿌리만 못할 리 있으랴.
아무러면 사람같이 오묘한 것 하늘 아래는
다시 없을 터인즉. 약이라면 사람만한 약 어디 있을까.
그대, 괴로운 이여. 누구의 아픔과 허손에 쓰이려고,
그토록 제 몸을 약으로 달이고 있는가. 그러나,
꿈에라도 슬플 일 없는 이를 부러워 말라.
낮도 밤도 없이 너무나 밝은 태양만 내려쪼이면 제 아무리
기름진 옥토라도 부스러져 사막이 되고 마는 법이니,
나를 찌며 번민으로 구증구포, 눈물이 나를 적시우는 불면의
밤이야말로 나의 대지에 스스로 내리는 단비가 아니랴.
술 보다 더 독한 인연에 대취(大醉)하여 고꾸라진 이여.
내가 바라는 생의 소망 그 무엇이 아직도 발소리를
풀지 않는 침묵의 봄날, 견딜 일 많은 시름을 잠시 놓고,
저 흐르는 물, 피는 꽃을 바라볼 일이다.
'사랑이여, 이제 너도 돌아오라.' 라고 부르던 어느 시인의
노래 한 소절 손짓을 간절히 마음에 담고, 이 봄의 밤,
숙지황같이 검은 강물 돌아오는 물비늘 이랑을 나는 보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아직은 돌아오지 말라.
내 이 가슴에 약이 덜 차 아직 이 봄이 약(藥) 봄이
아이어든. 천지에 난만한 꽃 피어나 독하게도
휘황하여 아득한 어질머리 일으킬지라도. 그대여,
내 아직 약 아니 되었거든 더디 더디 오시라.
조금 더 홀로 두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