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t of Disappearing:
The Buddha’s Path to Lasting Joy
by Ajahn Brahm
성난 물소 놓아주기 / 아잔 브라흐마
As you learn how to calm the mind down,
you also learn little by little how to disappear,
how to fade away.
마음을 진정시키는 법을 배우면,
조금씩 사라지게하고,
소멸시키는 법을 알 수 있게됩니다.
DO NOT READ this book if you want to be a somebody.
It will make you a nobody, a no-self.
누군가가 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지 마라.
이 책은 당신을 아무도 아닌 무아로 만들 것이다.
The Big Picture ! ! !
큰 그림
WHER EvER yOU LIvE —in a monastery, in a city, or on a quiet tree-lined street—you will always experience problems and difficulties from time to time.
This is just the nature of life. So when you have problems with your health you shouldn’t say, “Doctor, there is something wrong with me—I’m sick”; rather you should say, “There is something right with me—I’m sick today.”
당신이 절에 살든, 도시에 살든, 혹은 가로수가 늘어 있는 조용한 거리에 살든,
다른 어디에 살든 때로 문제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삶이라는 게 본래 그렇다. 건강에 문제가 생길 때 “의사 선생님,
제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병이 났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제게 정상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병이 났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It’s the nature of the human body to be sick now and again. It’s also the nature of the septic system to need pumping out when you don’t expect it, and it’s the nature of the water heater to sometimes break down. It’s the nature of life to be this way. Even though we struggle as human beings to try to make life go smoothly for ourselves and others, nevertheless it’s impossible to ensure that happens.
사람의 몸은 때로 병이 나는 게 정상이다.
우리 몸의 정화 시스템은 우리가 미쳐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부패한 것들을 밖으로 퍼내는 것이 정상이다.
온수기도 가끔 한번씩 고장 나는 것이 정상이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 삶의 속성이다.
우리는 삶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이들을 위해 매끄럽게 흘러가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Whenever you experience any pain or difficulty, always remember one of the deep meanings of the word suffering: asking the world for something it can never give you. We expect and ask impossible things from the world. We ask for the perfect home and job and that all the things we work hard to build and arrange run perfectly at the right time and place.
당신이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고통이라는 말이 지닌 속뜻을 늘 명심하라.
고통은 세상이 결코 당신에게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절대로 받을 수 없는 것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요구한다.
우리는 완벽한 가정, 완벽한 일자리를 요구한다.
우리는 자신이 세우려 하거나 마련하려 애쓴 모든 것이 알맞은
시간과 장소에서 완벽하게 굴러가기를 바란다.
Of course, that is asking for something that can never be given. We ask for profound meditation and enlightenment, right here and now. But that’s not the way this universe works. If you ask for something that the world can’t supply, you should understand that you’re asking for suffering.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의 깊은 명상과 깨달음을 바란다.
하지만 이 우주는 그런 식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당신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면,
고통을 자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So whether you work or meditate, please accept that things will go wrong from time to time.
your job is not to ask for things the world can’t give you. your job is to observe. your job is not to try to prod and push this world to make it just the way you wo uld like it to be. your job is to understand, accept, and let it go. The more you fight your body, your mind, your family, and the world, the more collateral damage you’ll cause and the more pain you’ll experience.
일을 할 때든 명상을 할 때든, 가끔 일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할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이 당신에게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하지 말고 그대로 관찰하라.
이 세상을 자기마음에 들게 만들기 위해 다그치거나 밀어붙이려
하지 말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놓아버려라. 자신의 몸과 마음과 가족과 세상과 싸울수록 부수적인 여러 가지 문제만 자꾸 불러일으켜 당신은 더 많은 괴로움을 겪게 된다.
Sometimes, when we understand and stand back from our daily lives, we see the big picture. We see there’s nothing wrong with the monastery, nothing wrong with us, nothing wrong with life. We understand that it’s just the nature of the world to go “wrong”—that’s what the Buddha meant by the first noble truth of suffering. you work, struggle, and strive so hard to make your life just right—to make your home, your body, and your mind just right—and it all goes wrong anyway.
이따금 우리가 나날의 삶에서 뒤로 물러나 그것을 깊이 이해할 때 우리는 큰 그림을 본다.
우리가 속한 절에, 우리 자신에게, 우리 삶에 잘못된 것이나 좋지 않은 게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좋지 않게 흘러가는 것이 바로 세상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붓다가 말한 고통의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가 뜻하는 바는 이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삶이 제대로 굴러가게 하기 위해, 자신의 가정과 몸과 마음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기 위해 일하고 싸운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은 결국 뜻대로 되지 않거나 어그러진다.
Understanding Suffering Is the Motivation for Practice
고통 이해하기
The contemplation of suffering, or dukkha, is an important part of true Buddhist practice. We don’t try to control suffering; rather, we try to understand it by investigating its causes. It’s an important point in our practice, because when most human beings experience suffering, they make the mistake of either running away from it or trying to change it. They blame the machinery for failing, but of course that’s just the nature of machinery.
고통을 주시하는 것은 참된 수행의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고통을 다스리려 하지 않고 그 원인을 탐구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수행에서 중요한 대목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통을 겪을 때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려 하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려 하는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계가 고장 났다고 기계를 나무란다. 기계는 본래 고장 나는 것이 정상이다.
Things go wrong and we suffer. So we should change our attitude and stop fighting. When we stop fighting the world and start to understand the suffering, we get another response. It’s the response called nibbidā.
The response called nibbidā comes from understanding the nature of the body, the mind, and the world.
세상사는 뜻한 대로 흘러가지 않고 그 때문에 우리는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바꿔
세상과 싸우는 짓들 그쳐야 한다.
우리가 세상과 싸우기를 그치고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우리 내면에서는 또 다른 반응이 일어난다.
닙비다nibbidā. 곧 염오厭惡(역겨움)라는 반응이다. 염오는
몸과 마음과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서 저절로 우러나온다.
you understand the nature of Buddhism, of setting up a monastery or a household, and of living together in a group. you know it’s going to be unsatisfactory and that there are going to be problems.
당신이 불법의 본질을 이해했다고 하자. 당신이 절을 세우거나
가정을 갖는 일의 본질을, 하나의 집단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일의 본질을 이해했다고 하자.
그럴 때 당신은 그런 것들이 자기 뜻대로 굴러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것을 알고 있다.
you are wise enough to stop running away from those problems or trying to change them. you understand that problems are inherent in the fabric of saṃsāra. This was one of the great insights of the Buddha that prompted him to give his first teaching, the Dhammacakkappavattana Sutta (SN 56:11).
당신은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로부터 도피하려 들거나 문제들을 다른 것들로 바꾸려는 짓을 그친다. 당신은 문제들이 윤회라는 구조 속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붓다로 하여금 첫 가르침인 <초전법륜경>을 펴게 한 위대한 통찰이 바로 이것이다.
When you realize that suffering is inherent in the fabric of saṃsāra, it changes your reaction. It’s like having a rotten apple and trying to cut out the rotten parts so you can eat the rest. When you have wisdom, you see that the whole of the apple is rotten and that the only possible response is nibbidā—the rejection of the whole apple, revulsion toward it, turning away from it, and just throwing it away.
고통이 윤회의 구조 속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찰할 때 당신은 변한다. 그것은 당신이 썩은 사과를 받고 나서 썩지 않은 부분을 먹기 위해 부분을 도려내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사과 전체가 썩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당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염오다.
사과 전체에 대한 거부감이나 혐오감이나 그것을 외면하거나 그냥 내던져 버리는 식의 반응이 염오다.
you see that you don’t need that apple; you can let it go. It’s important to understand the suffering in this world, and it’s important to see how absolute that suffering and unsatisfactoriness is. It will never be under your control or within your power to sort it out and get it right.
당신은 자신이 사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 우리는 고통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고통과 불만이 절대적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고통과 불만을 우리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으며
적당히 가려내 바로잡을 수도 없다.
When we contemplate and understand this, it gives us the motivation and incentive for practicing the path. According to the suttas, when the Buddha saw people getting old, getting sick, and dying, that was enough to prompt him to seek a solution to suffering (MN 26.13). He realized that it was also his own nature to get old, get sick, and die, that he had not gone beyond these things. That gave him the motivation to set out in search of an end to these problems.
이런 점을 깊이 관찰해 이해할 때 그것은 수행하고자 하는 계기나 동기가 될 수 있다. 붓다는 사람들이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아 고통의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붓다는 자신도 역시 늙고 병들어 죽을 것이며 그런 현실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통찰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붓다는 그런 문제들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Each of these three problems is your inheritance too. This is what awaits you in the future. This is something that’s certain: you will get old, get sick, and die. There’s nothing you can do about that. These are the facts of your existence, your human body, and also all other things.
늘고 병들고 죽는 문제는 우리가 본래 타고난 것들이다.
앞으로 우리에게는 그런 일들이 닥쳐올 것이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늙고 병들고 죽을 것이다.
그런 현실은 누구도 어찌할 수 없다.
우리 삶, 우리 몸, 그리고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사물은 하나같이
다 이 엄연한 사실과 직면하고 있다.
Everything will get old, disintegrate, and die—everything goes wrong and breaks down. The Buddha-to-be was wise enough to know that even with all his spiritual qualities and accumulated merit, he could not avoid that suffering. A different response was needed: to fully understand it.
이세상 모든 것은 늙거나 낡고 무너지고 죽는다.
모든 것은 나빠지거나 망가진다.
붓다는 지혜로운 이였기에 자신이 온갖 영적인 능력을 키우고 덕성을 쌓았는데도 결국은 그런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뭔가 다른 응답이 필요했다. 고통을 철저히 이해하는 것이…
Disengagement
해제 解除
In the Dhammacakkappavattana Sutta it is said that the first noble truth of suffering should be thoroughly understood (SN 56:11). In other words, you don’t try to overcome suffering, you don’t try to change it, you don’t try to make it all better or escape from it; you understand it. Difficult times are wonderful opportunities to sit down and face suffering, to understand it fully and not take the easy option of always running away.
<초전법륜경>에서는 고통의 성스러운 진리를 철저히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고통을 극복하려 하거나 변화시키려 하거나 더 나은 것으로 만들려 하거나 도피하려 하지 말고 이해해야 한다. 힘겨운 때야말로 늘 달아나는 식의 쉬운 방편을 택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고통과 직면하고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다.
It’s the nature of most human beings that whenever suffering or problems arise, they have their escape routes: getting lost in fantasies, watching movies, surfing the internet, reading, chatting, having cups of tea or coffee, or just going for walks. What are we really walking away from? What are we going into those fantasies for? It’s our habitual response to the problem of things not being good enough, not being satisfactory. If you really want to get somewhere in life, monastic or otherwise, to become wise and free, the Buddha said you should understand suffering.
사람들은 고통이나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나름의 탈출구를 갖고 있다.
환상에 빠져 지내기, 영화 보기, 인터넷 서핑, 책 읽기, 친구들과
수다 떨기, 차나 커피 마시기, 무작정 걷기 등, 그럴 때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빠져 나오려 하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그런 환상들에 빠져드는 것일까?
상황이 별로 좋지 않거나 만족스럽지 않다는 문제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인 반응은 이런 식으로 나온다.
붓다는 우리가 일상에서 어딘가로 간절히 가고 싶어 할 때, 절 같은 데로 가고 싶어 할 때, 혹은 지혜롭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 할 때 우리가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When you start to investigate you realize that we all experience suffering. In the Therīgāthā there’s the famous story of Kisāgotamī (Thī. 213–23). The Buddha’s strategy for moving Kisāgotamī away from the grief and suffering caused by the death of her son was to make it quite plain to her that other people die as well: the death of her son was not a solitary event in this universe but was connected to every other death.
고통을 참구하다 보면 우리 모두가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장로니게(長老尼偈비구니스님 깨달음 향한 노래)에는 유명한
끼사고따미 비구니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끔직하게 사랑했던 어린 아들을 잃고 비탄에 빠진 끼사고따미를
사람들이 도우려 할 때 붓다가 택한 전략은 다른 사람들도 역시
죽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그녀에게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아들의 죽음은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사건이 아니라 다른 모든
죽음과 밀밀히 연관된 사건이라는 사실을..
The Buddha wanted Kisāgotamī to understand the suffering called death. Death is natural; it is part of the fabric of things. It’s everywhere; you can’t escape it. So instead of trying to solve the problem by bringing her son back to life, the Buddha taught Kisāgotamī to understand the universality of the problem.
붓다는 끼사고따미가 죽음이라고 하는 고통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존재 구조의 일부다.
죽음은 도처에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그래서 붓다는 끼사고따미에게 아들을 되살려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말고 그 문제의 보편성을 이해하라고 가르쳤다.
When we understand, we don’t just accept things, because that’s not good enough either.
To think, “Just let it be, this is the way things are, so what!” is not the right response. When we really understand the problem of suffering, what we’re in for, what life is truly like, there’s only one natural response. It’s neither trying to escape nor accepting whatever comes; it’s nibbidā.
우리는 실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반길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상이 이러하니 그냥 놓아버리라고?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반응이 아니다. 우리가 고통의 문제,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때
나올 수 있는 단 하나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무엇이 오든 피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염오다.
Nibbidā means disengaging. We turn away from this thing we call life. Trying to change things just gets you more involved in life, and accepting things also keeps you involved. Disengaging is the right response.
염오는 관여하지 않음을 뜻한다.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을 외면해 버려야 한다. 현상을 변화시키려 하는 것은 우리를 삶 속에 더 깊이 휘말려들게 할 뿐이다.
현상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계속 삶 속에 휩쓸려들게 할 뿐이다.
관여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반응이다.
Disengaging means you leave these things alone and you’re not concerned or worried about them. you just sit there and you don’t involve yourself in what you’re experiencing. By not involving yourself in what you’re experiencing, you stand back from life. It’s almost like rejecting it, the sort of rejection that makes things disappear.
관여하지 않음은 존재나 현상을 가만 내버려 두고 그것들에 관심을 갖지도 않고 염려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것에 관여하지 않는다.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것에 관여하지 않을 때 우리는 삶으로부터 물러선다.
그것은 삶을 거부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
존재와 현상을 사라지게 만드는 일종의 거부나 무시 같은 것.
you read in the suttas that the Buddha, out of compassion, knew how to dismiss people (MN 122.6). Sometimes people will engage in conver-sation because they have nothing better to do. I don’t like sitting around and answering questions hour after hour, particularly during a retreat. In any case, you don’t get answers about real Dhamma by asking questions. you get those answers by sitting still and stopping your thinking, not by encouraging it further. So when someone asks me a question, I try to make the answer as brief as possible.
붓다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사람들을 해산시키거나 물러가게 하는 법을 터득했다. 가끔 사람들은 딱히 더 좋은 할 일이 없어 다른 이들과의 이야기 속에 빠져들곤 한다. 나는 빈둥거리고 지내는 것을, 특히 안거(수행자들의 은둔수행기간)에 들었을 때 여러 시간 질문에 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는 담마(Dhamma, 붓다의 가르침, 진리, 법)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다.
그런 답은 생각을 자꾸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고요히 앉아 생각하기를 그치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게 질문을 던지면 나는 가급적 간략하게 답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식으로는 나는
사람들이 수다 떠는 일에 빠져들게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In this way I try to help people disengage from chitchat. you should disengage from the things of the world in the very same way. Why be involved in all these things? Look at them and realize they just cause you suffering; they just make you tired and upset. Through nibbidā all these sensory objects fade in importance.
우리는 그와 똑 같은 방식으로 세상사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어째서 그런 온갖 잡사에 관여하는가. 그것들을 바로 보고 그것들이 단지 당신에게 고통을 안겨주기만 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 그것들은 당신을 피곤하고 산란하게 만들 뿐이다. 염오의 자세로 볼 때 이 모든 지각 대상은 하찮은 것이 되어버린다.
“Not My Business”
내 일이 아냐
When you contemplate life you come to realize that it’s completely out of control. And whatever is out of control is none of your business. That’s a wonderful little saying that I’ve used in my meditation and that I encourage other people to use as well.
삶을 깊이 관조하다 보면 삶이 자신의 통제권을 철저히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당신의 통제권에서 벗어나 있는 것들은 당신이 관여할 일이 전혀 아니다. 내가 명상할 때 흔히 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하라고 권하는 아주 근사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Whatever you are experiencing, in the monastery or elsewhere, say to it, “Not my business.” Whatever happens to the water supply, to people coming and going, to the food that is offered, to the weather, say to it, “It’s not my business.” It’s not your business to worry about what anyone else does or says to you; it’s their business, their kamma, nothing to do with you.
당신이 절에서나 다른 어디에서 무엇을 체험하든 “내 일이 아냐.”라고 말하라. 물을 공급받는 상황에, 오가는 사람들에게,
내가 제공받는 음식에, 날씨가 어떤지,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건 내 일이 아냐.”라고 말하라.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염려하는 것은 당신이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일이요, 그들의 업이요, 당신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If you’re sensitive to other people’s words and allow them to hurt or bully you, you should remember the Buddha’s advice to his son Rahula—to be like the earth (MN 62.13). People urinate and defecate on the earth; they vomit on it and burn it.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어서 그 말에 상처를 받거나 휘둘림을 당할 때는 붓다가 아들인 라훌라에게 충고한 “대지처럼 되어라.”라는 말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대지를 오염시키기도 하고 정화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지에 오물을 쏟아내기도 하고 대지를 불태우기도 한다.
All sorts of rubbish gets tossed on the earth, but the earth never complains; it just accepts everything. People also do some beautiful things on the earth. They plant gardens or, even better, they build monasteries. But the earth doesn’t react no matter what happens to it.
사람들은 대지에 온갖 쓰레기를 내버리지만 대지는 결코 불평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묵묵히 모든 걸 받아들일 뿐이다. 사람들은 대지에서 아름다운 일을 하기도 한다. 화사한 꽃이나 수려한 나무를 심기도 하고 절을 짓기도 한다. 하지만 대지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So be like the earth. Whatever people say or do, be immoveable. If they praise you or blame you, it’s their business. There’s no need to be affected by another person’s speech, whether good or bad. When you have the attitude of “None of my business,” it will never upset you.
대지처럼 살아가라. 사람들이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든 미동도 하지 말라. 그들이 당신을 칭찬하거나 비난할 때
그것은 그들의 일이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다른 사람의 말에 영향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당신이 ‘내 일이 아냐.’ 라는 마음
자세를 꿋꿋하게 지닐 때 그런 말은 결코 당신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할 것이다.
It’s the same with the aches and pains in the body and with sickness. When you meditate, remind yourself they’re none of your business; they’re the body’s business—let the body look after them. Thinking like that is actually a powerful way of keeping the body healthy. It’s a strange thing that sometimes the more you worry about this body, the worse it gets.
몸의 아픔이나 괴로움, 병도 마찬가지다. 명상할 때 그런 것들은
당신의 일이 전혀 아님을 되새겨라. 그런 것들은 몸의 일이니
알아서 보살피게 하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몸의 건강상태를 유지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
묘한 것은, 우리가 몸을 염려할수록 몸이 더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If you disengage from the body, sit still, and just allow the body to disappear, it tends to heal itself. It seems oftentimes when you try to control and organize things they only get worse, and it’s the same with your body. Sometimes, when you let it go and just relax, the body becomes so at ease that it heals itself. So just let go and forget about it.
우리가 몸에 관여하지 않는 상태에서 조용히 앉아 그저 몸이 사라지게 하기만 하면 몸이 스스로 치료한다. 우리가 사물과 현상을
통제하거나 조직하려 하면 그것들이 더 악화되는 경우가 많은데, 몸도 그렇다. 우리가 몸을 가만 내버려두고 그저 느긋하게 지내다 보면 몸이 아주 편해져 스스로 알아서 치료한다. 그러니 몸을 놓아버리고 몸에 관해서는 잊어버려라.
I’ve known a lot of monks whose health problems disappeared through the power of their meditation. The first time I saw that was with Ajahn Tate. When I first went to Thailand in 1974, he was in the hospital with incurable cancer. They gave him the best possible treatment, but nothing would work, so they sent him back to his monastery to die. He died twenty-five years later.
나는 명상의 힘 덕에 건강 문제가 사라진 경험을 한 스님을 여럿
알고 있다. 아잔 따떼(Ajan Tate, 아잔문의 제자)의 경우가 그 첫 사례에 해당한다.
내가 1974년 태국에 처음 갔을 때 그분은 불치 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의사들은 그분에게 좋다는 온갖 치료법을 써보았지만 아무 효험이 없어 결국 그분을 절로 돌려 보냈다. 돌아 가시더라도 거기서 돌아가시라고, 그러고 나서 그분은 25년 뒤에 입적하셨다.
That’s one example of what happens when monks “go back to their monastery to die.” They go back and then live a long time. So you disengage from things—nibbidā arises—and the mind turns away. It’s had enough, it doesn’t even want to look at them anymore, and you find that they fade away. This is the process you read about in the suttas, nibbidā leading to virāga, the fading away of things.
그것은 승려들이 죽으려고 절로 되돌아갔다가 금방 죽지 않은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그들은 절로 돌아가 오랫동안 살았다.
이처럼 우리가 사물이나 현상에 관여하지 않을 때 염오가 일어나면서 마음은 그것들을 외면해 버린다. 마음은 이미 충만하므로 그런 것들을 더 이상 돌아보고 싶어 하지 않으며 그럴 때 우리는 그것들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게된다.
염오는 사물과 현상의 사라짐으로 이어진다.
When you regard something as none of your business, it fades away from your world. Consciousness doesn’t engage with it anymore; it doesn’t see, hear, feel, or know it. The way this works is as follows.
당신이 어떤 것을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지 않을 때 그것은 당신의 세계에서 사라져 버린다. 의식은 더 이상 그것에 관여하지 않는다. 의식은 그것을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알지도 못한다.
Whatever you engage with is what takes hold in the mind—it’s where consciousness finds a footing and grows. you are building mental edifices. It’s very clear to me as a meditator that we create our own world. But when you disengage, you have no business there, and because you’re not interested in it, the whole thing just disappears from your consciousness. When you have nibbidā you’re really “un-creating” your world.
당신이 어떤 것에 관여할 때 그것은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며 그것을 바탕으로 의식이 자란다. 그럴 때 당신은 정신적인 건물을 짓고 있는 것이다.
명상하는 사람인 내게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세계를 지어낸다는 것이 더없이 자명한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당신이 사물과 현상에 관여하지 않으면 그런 것들에 아무 볼 일이 없다. 그런 것들에 아무 관심이 없으므로 그런 것들은 당신의 의식에서 말끔히 사라져 버린다.
염오의 자세를 가질 때 당신은 자신의 세계를 참으로 소멸시키고 있는 것이다.
Solving the Problem
소리를 괴롭히지 말라
How many times have you tried to solve “the problem”? you’ll be trying to solve it not just until you die but for many more lifetimes. Instead, understand that this world is just the play of the senses.
당신이 이제까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쓴 경우를 꼽아본다면 얼마나 될까.
무수히 많지 않았을까?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심초사하는 것은 이승을 뜰 때까지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여러 생에 걸쳐서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지 말고 이 세상이라는 것은 단지 감각들이 빚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It’s the five khandhas doing their thing; it has nothing to do with you. It’s just people being people, the world being the world.
이 세상은 오온(五蘊)이 빚어낸 것이다. 그것은 당신과 아무 상관도 없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세상이라고 부르는,
그 이름이 사람이고 세상일 뿐이다.
Sometimes at our monastery you can see large flocks of cockatoos. They are very noisy. Some people say they don’t like the sound of cockatoos, but whether you like them or not, they still make the same noise, so why not disengage?
우리 절에서는 가끔 코카투 앵무새가 떼로 몰려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아주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어떤 사람들은 코카투가
떠드는 소리가 싫다고 한다. 하지만 당신이 그 소리를 싫어하든
말든 그것들은 여전히 시끄럽게 떠들어댈 것이다.
그러니 어째서 놓아버리지 않는가.
As a meditator I used to ask myself, “Why does noise disturb me?” Whether it’s the sound of a bird outside or somebody coughing or slamming the door in the main hall, why do I hear that? Why can’t I do the same as I do with my eyes, find some “lids” and shut my ears?
명상하면서 나는 나에게 묻곤 한다. “어째서 소음은 나를 어지럽게 만들까?”
밖에서 나는 새소리든 누군가가 기침하든, 넓은 홀 문이 쾅 하고
닫히든 어째서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나는 눈꺼풀을 닫아버리듯 보이지 않는 마개를 찾아내 두 귀를 닫아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Through contemplating sound and understanding how it works, it became quite clear that the only reason I heard it was because I went out to listen to it. There was an active engagement with the world of sound. That’s why it was disturbing.
소리를 잘 살펴서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이해하고 나자 내가 소리를 들은 단 하나의 이유는 내 마음이 그리로 향해 그것을 귀담아들었기 때문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소리의 세계에 대한 나의 적극적인 관여가 있었던 것이다. 소리가 나를 만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Ajahn Chah used to say that it’s not the sound that disturbs you; it’s you who disturbs the sound. That was a very profound saying, and it meant a lot to me. I used that to understand the nature of sound and why it’s so disturbing. 아잔 차(Ajan Chah)는 소리가 너희를 어지럽게 만드는 게 아니라 너희가 소리를 어지럽게 만든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것은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전해주는 아주 심오한 말씀이었다. 나는 그 말씀 덕에 소리의 본성과 소리가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When someone calls you a pig, an idiot, or whatever, you don’t need to listen to it. We hear it because we’re interested in it; we engage with and are attached to the world of sound.
누군가 당신을 돼지나 바보라고 부를 때 그 소리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런 소리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 소리를 귀담아듣는다.
우리는 소리의 세계에 관여하고 그것에 집착한다.
But when we realize that sounds just come according to their nature, we get nibbidā. There are nice sounds, crazy sounds, and the sounds of the birds. Some birds sound sweet and some birds, like crows, sound terrible. But it’s not the fault of the crows; it’s just their nature.
하지만 소리가 그 본성에 따라 나오는 것에 불과함을 깨달을 때
우리는 염오의 자세를 갖게 된다.
소리에는 아주 듣기 좋은 소리도 있고, 미친듯한 소리도 있고,
새 소리도 있다.
어떤 새들은 감미로운 소리를 내고 까마귀 같은 새들은 흉측한
소리를 낸다.
까마귀가 그런 소리를 내는 것은 까마귀 탓이 아니다.
제 속성에 따라 그런 소리를 낼 뿐이다.
It’s the same in the monastery: some anagārikas are like crows and some are like nightingales; some monks speak beautifully, some speak terribly. It’s their nature, that’s all. It has nothing to do with us, and therefore we should disengage.
절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재가수행자들은 까마귀 같고 어떤 재가수행자들은 나이팅게일 같다. 어떤 승려들은 말을 예쁘게 하고,
어떤 승려들은 흉측하게 한다.
그런 소리들은 각자의 속성에서 나올 뿐이다. 그런 소리들은
우리와 아무상관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When we disengage from these things through nibbidā, they fade away. Suffering fades away when the cause of the suffering fades away. The sense world starts to disappear when we’re not so concerned with changing it.
우리가 염오를 통해 그런 소리들에 관여하지 않을 때 그것들은
사라져버린다. 고통의 원인이 소멸될 때 고통은 사라져 버린다.
감각의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려는 마음이 전혀 없으면 저절로 사라지기 시작한다.
When we disengage from it with nibbidā, we’re repelled by it and reject it. This is because nibbidā comes from seeing the world as it actually is. With it, we move in a different direction from the rest of the world.
우리가 염오하는 마음과 함께 그것에 관여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에게 퇴짜를 놓을 것이고 우리도 그것을 무시하게 된다.
염오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서 생겨나기 때문에 그렇다.
그와 더불어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The Messengers of Truth
Kruba Ajahns don’t live in Thailand in some great monastery. That’s a fantasy Kruba Ajahn. The true Kruba Ajahn will be in your hut when you wake up in the morning and you’re so tired that you don’t want to get out of bed. Those Kruba Ajahns will be there when you’re sitting for long periods of time and getting absolutely nowhere. The real Kruba Ajahn will be there when you’re on retreat wonderin g how many days are left. When somebody doesn’t put the right food in your bowl, or you’re just about to get into deep meditation and a crow makes a loud noise, or whatever else it is that really disappoints and frustrates you—that’s an Ajahn. It’s to be contemplated, listened to, penetrated, and understood.
큰 스승은 태국의 어느 큰 절에서 살고 있지 않다.
그런 이는 허구적인 큰 스승이다. 참된 큰 스승은 당신이 아침에
눈을 뜨긴 떴는데 너무 피곤해 도무지 잠자리에서 빠져 나오고
싶지 않을 때 당신의 오두막 안에 계실 것이다.
그런 큰 스승은 당신이 오랜 기간 명상을 하는데도 아무 진전이
없을 때 그곳에 계실 것이다. 참된 큰 스승은 당신이 명상할 날이 얼마나 남았나 헤아리고 있을 때 그곳에 계실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의 밥그릇에 형편없는 음식을 담아줄 때, 당신이 막 깊은 명상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데 하필이면 까마귀가 요란하게 울어댈 때, 혹은 당신에게 큰 실망과 환멸감을 안겨주는 일들이 일어날 때가 바로 스승이다. 그런 것들은 주시하고 귀담아듣고 꿰뚫어보고
이해해야 할 것들이다.
Moving toward Emptiness
Most people are prisoners of their past.
They identify with the past, regarding it as their self, their attā.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의 죄수들이다.
그들은 과거와 동일시하고, 그것을 그들의 자아,
그들의 실아atta實我라고 생각한다.
Since they take themselves to be the past, it becomes their business, and they attach to it and suffer accordingly. But they don’t have to; they can let go of the past. The door of that prison cell is always open, and you can walk through it at any time. Don’t think that you have to work through the “issues” of the past—that’s just guilt. you can completely let go of all that, abandon it, and allow it to vanish if you have the guts to do so.
그들 스스로가 당연한 과거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의 의미가 되고, 그것에 달라붙어 그에 따라 고통을 겪게 된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과거는 떨쳐버릴 수 있다.
저 감옥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고, 언제든지 걸어나갈 수 있다.
과거의 "문제들"을 헤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건 단지 죄책감일 뿐이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완전히 놓아버릴 수 있고, 그것을 버리고,
만약 당신이 그럴 용기가 있다면 그것이 사라지게 할 수 있다.
So using dukkha-saññā, the perception of suffering, ask yourself what the point is of holding on to your past.
따라서 고통에 대한 인식인 두카-사냐 苦(dukkha) saññā(想)를 사용하여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자문해보라.
To use a simile from the suttas (e.g., MN 20.4), regard thinking as the carcass of a dead dog around the neck of your beautiful mind.
Once you look at it in that way, you wonder why you are doing this to yourself.
The automatic reaction is to throw it out, just as you would the carcass of a dead dog—rotten, dirty, smelly, and foul.
생각은 당신의 아름다운 마음의 목을 휘감고 있는 죽은 개의 몸뚱이와 같다. 생각을 그렇게 여기면 썩고 더럽고 악취가 나는 역겨운 개의 죽은 몸뚱이를 집어 던져버리듯 생각을 내던져버릴 것이다.
같은 동작을 무수히 되풀이 하다 보면 습관이 된다. 마찬가지로 침묵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는 훈련을 거듭하다 보면 그것도 습관이 된다. 마음훈련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63)
일상에서 평범한 일들을 할 때 이렇게 알아차림이 몸에 익게 되면 명상을 하기 위해 방석에 앉을 때 몸의 느낌들을 알아차리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 나아가 호흡을 알아차리는 일도 훨씬 쉬워진다. 그렇게 해서 명상이 저절로 일어나게 해주는 습관이 붙도록 하라. 따뜻한 관심과 알아차림 같은 마음의 근육들을 조금씩 키워나가라. 그러면 명상하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 방석에만 앉으면 곧바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 70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 명상을 하지는 말라. 사람은 결과를 얻고자 하는 속성이 있고 뭔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만 원하는 행위 자체가 그런 것들이 일어나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
그러니 뭔가를 얻고 싶어하지 말고 그저 따뜻한 주시로 수행하면서 원인들을 적절히 제공해주기만 하면 결과는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이다. - 75
당신이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고 호흡명상을 할 수 있는 것은 따뜻한 주시 덕분이다. 당신은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장기간에 걸쳐 관찰할 수 있다. 당신은 그런 관찰을 가능케 해주는 원인들이 뭔지 알고 있다. 그 원인들이 되어주는 것은 의지력이 아니라 알아차림과 자애로운 마음, 그런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앎이다. 당신은 호흡하는 데 주의를 모으고 호흡과 자기 자신에게 따뜻한 마음을 보내고 매 순간 호흡을 알아차린다. 그럴 때 호흡은 기분 좋은 것이 되고 지켜보기 쉬운 것이 된다. - 76
번뇌들을 넘어설 때 당신은 자유로워지고 길은 깨끗해질 것이다. 당신은 호흡이 아주 평온하고 고요하고 순일해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당신의 명상은 아주 놀라운 것이 된다. - 111
마음이 산란할 때는 그저 그런 상태와 사이좋게 지내라.
자신을 운전자가 아니라 승객으로 여겨라.
뒷좌석에 편히 앉아 운전하는 데 전혀 관여하지 않고 여행하는
동안 보이는 온갖 것과 일어나는 온갖 현상을 묵묵히 관찰하기만 하라. - 127
아는 자는 영화관의 관객과 같다. 어떤 것에도 말려들지 않는다는 점을 늘 기억하면서 스크린에서 흘러가는 영화를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 당신이 당신 자신 속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보라. 당신은 자신이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느낄 것이다. - 128
연꽃은 천 겹의 꽃잎을 품고 있다.
더럽고 추한 연꽃도 당신이 그것과 함께 머물다보면 벌어져 보기 좋은 것이 된다.
그것과 오래 머물수록 추한 바깥 꽃잎들은 자꾸 더 열리고 덜 추한 꽃잎들이 드러난다.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이 그렇다. - 137
어떤 경험이든 자신이 경험한 것을 그냥 받아들일 때 당신은 그것들을 통해 배울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신은 그 경험들이 자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 때문에 이제 그것들을 통제하거나 조종하려 들지 않는다. 지루할 때는 지루함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말라. 불만스러울 때는 불만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말라. 일어나는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의 과정, 정신적인 현상들과 육체적인 현상들의 오고감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의 통찰과 담마(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활용해 그것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하라. 그 이상 뭘 얻기를 기대했는가. 당신이 절에 가거나 안거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고통을 없애버리겠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당신은 안거할 때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저 고통과 직면하고 그것에 관여하지 않을 뿐이다.
탈출구가 하나 있기는 한데 그것은 간접적인 탈출구다.
당신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을 갖고 있지 않을 때 비로소
탈출이 이루어진다.
- 153-154
당신이 어디로 가든, 어디를 여행하든, 당신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어떻게 환경이 바뀌든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어디로 가든 문제는 늘 당신을 따라다닐 것이다. 삶의 속성이 그러하고 오온의 장난이 그러하다.
당신이 통제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가끔 몸에 병이 날 때도 있고 몸이 피곤할 때도 있다. 어떤 때는 행복하다가 어떤 때는 불행해진다. 느낌의 세계라는 게 본시 그렇다. 당신은 완전하고 철저하고 변치 않는 행복을 얻을 수 없다.
- 155
그 어떤 것과 마주치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말라. 그 작은 악마들, 부정적인 마음 생태들과 똑바로 직면하는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당신이 그것들과 마주서면 그것들은 사라져 버린다. 나는 가끔 이렇게 말한다. 당신 앞에 귀신이 나타나거든 코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다가서 “으악!” 하고 소리쳐라. 그러면 귀신이 혼비백산해서 달아날 것이다. 원래 귀신이 당신을 더 무서워하는 법이다.
- 159-160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할 때 지금 여기는 당신에게 놀라운 가르침을 줄 수 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자리에 앉아 여기 있고 싶어 하기만 해도, 마음이 고요하다는 이유만으로 즉시 아름다운 옛 친구인 니밋따가 찾아온다. 그럴 때 당신은 고요함이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임을, 어떤 것도 원치 않고 다른 데 있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은 ‘나는 거기로 갈 거야. 거기 가서 이런저런 일을 할 거야. 그럼 나중에 마음이 고요해질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중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당신은 오로지 지금에만 고요해질 수 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어떠하든 “이 순간은 충분히 좋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고 싶다.”고 말해야 한다. 당신이 어떤 것을 체험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여기 있고 싶어 하는가, 아니면 다른 데 있고 싶어 하는가이다.
당신은 감옥에서도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고 별 다섯 개짜리
호텔방에 감금되어 있을 수도 있다. 어디서든 어떤 마음 상태에서든 자신이 늘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아주 근사한 일이다. 그것을 이해하라. 지혜가 당신을 어떻게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가를 깨달아라. 이것이 성스러운 세 번째 진리에 속하는 아날라야(무착(無着), 집착 없음)다. 뭔가가 달아붙을 수 있는 어떤 자리도 갖지 않는 것. 이것이 무집착의 참된 의미며 깨달음의 특성이다.
- 168-169
통제하고 억지로 버티는 식으로는 가라앉히는 그런 과정에 이르지 못한다. 나도 그렇게 하려고 해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신이 억지로 호흡에 집중하려 한다면 명상을 지속하기 힘들다. 당신은 긴장하는 바람에 가라앉히는 데서 오는 즐거움을 놓치게
된다. 당신이 제대로 명상하면서 호흡을 따뜻하게 대해준다면 그런 과정이 저절로 일어난다. 당신이 마음속에 들어오는 다른 모든 것의 원인들을 가라앉히고 나면 호흡만 남는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그냥 주시할 때 당신의 마음 상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기분이 좋아진다. 평화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주시하는 일을 계속할 때 기쁨이 일어난다. 나는 그런 것을 아름다운 호흡이라고 부른다. 당신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그것은 아름답고 즐겁고 행복한 호흡이 된다. 이런 체험과 더불어 통찰이 일어날 수 있는 대단한 잠재력이 생겨난다.
그런 잠재력은 가치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계발해야 한다.
- 198-199
호흡이 가라앉고 당신이 마침내 호흡을 놓아버릴 때 아름다운
니밋따가 나타난다. 니밋따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눈부시게 빛나는 상태의 마음이다.
경전에서 ‘빛나는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달이 구름 뒤에서 나오는 것처럼 다른 다섯 감각에서 놓여난 여섯 번째 감각이다.
- 201
자신을 비판하고 평가하고 나무라는 것은 전혀 쓸데없는 짓이다. 당신이 이렇게 관여하는 습관을 피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가라앉고 감각들은 사라지기 시작하고 당신은 평화와 자유와
해방감을 맛볼 것이다. - 218
출가하기 전 나는 대단히 영감어린 가르침을 도도히 펼칠 수 있는 승려들을 찾아가곤 했다. 한데 그들을 차분히 살펴본 결과 나는
그들의 내면이 평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지혜는 그 정도 수준이어ㄸ다. 그들은 나름대로 감동적이고 이치에 맞는 설법을 했지만 붓다가 제시한 기준은 어떤 사람의 지혜는 그것이 그 사람의 삶에 미치는 효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지혜가 당사자가 일상 삶에서 안고 있는 어려움이나 문제들을 가라앉혀주는(느긋하고 편안하고 여유롭고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느낌을 낳는) 교화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것을 수 없다.
경전들에서는 “수척하고 비쩍 마르고 안색이 좋지 않고 정맥들이 불끈 튀어나온” 승려와 수행자는 병든 사람이거나 올바로 수행하는 이가 아닌 반면, 지혜를 갖추고 있고 제대로 수행하는 승려들은 “환하게 웃고 아주 명랑하고 쾌활하며 여러 가지 재능이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자 느긋하게 지내는 사람들”이라고 한 대목도 찾아볼 수 있다. 붓다의 관점에서 볼 때 지혜는 응당 전반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낳아주는 것이어야 한다.
- 239
당신이 즐거움의 정체를 깊이 들여다본다면 그것이 고통스러운
두 시점 사이의 휴지기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이유는 그 전에 몇 시간 동안 먹지 않았고 앞으로
몇 시간 동안 먹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앞으로 고통이
올 것임을 알고 있을 때만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므로 영원히
행복만 지속되는 천국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 273
놓아버린다면 당신은 언제 어디서고 고요하고 평온해질 수 있다. 고요함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고요함이 찾아온다.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평화롭고 자유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무아를 깨닫는 방법이요,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방법이요, 고통을 끝장내는 길이다. - 289
우리 모두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같은 신세다.
우리 자신의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신세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누구나 정신이 바짝 들 것이다. - 296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모든 것과 갈라서고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성찰할 때 당신은 감각적 쾌락과 몸에 대한 관심을 점차 잃게
된다. 그런 것들을 철저히 탐구할 때 당신은 그런 것들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 309
이런 종류의 성찰은 악의에 맞설 때도 활용할 수 있다.
암에 걸린 사람을 대할 때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보다 성을 덜
내거나 짜증을 덜 낼 것이다. 당신은 아파하거나 고통스러워하거나 곧 죽으려는 사람에게는 자연 발생적인 연민의 감정을 품게 된다.
우리 모두가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누구에게나 다 그런
감정을 품을 수 있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하든 그저 그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라. 다른 사람들을 그처럼 볼 때 악의라는 장애는 일어나지 않는다. 정욕과 악의가 일어나지 않고 몸에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평화롭게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의 영역으로 들어설 수 있다.
- 311-312
성난 물소 놓아주기
저자 아잔 브라흐마
출판 공감의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