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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침묵의 세계』 -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3.16|조회수122 목록 댓글 1

Die Welt Des Schweigens

침묵의 세계

“Meditation is a mental discipline that enables us to do one thing at a time.”

— Max Picard

Lingua Fundamentum sancti silentii.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

- Maria-Culm 사원 제단에 새겨진 글 ('괴테의 일기'에서)

 

침묵은 하나의 독자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침묵은 말의 중단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결코 말로부터 분해되어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독립된 전체이며, 자기 자신으로 인하여 존립하는 어떤 것이다. 침묵은 말과 마찬가지로 생산적이며, 침묵은 말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형성한다. 다만 그 정도가 다를 뿐이다. (p. 17)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세계이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침묵은 존재한다. 고로 침묵은 위대하다.

그 단순한 현존 속에 침묵의 위대함이 있다.

 

침묵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침묵은 모든 것이 아직도 정지해 있는 존재였던 저 태초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침묵은 창조되지 않은 채 영속하는 존재이다.

침묵이 존재할 때에는 그때까지 침묵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듯이 보인다.

침묵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인간은 침묵에 의해서 관찰 당한다.

인간이 침묵을 관찰한다기보다는 침묵이 인간을 관찰한다.

인간은 침묵을 시험하지 않지만, 침묵은 인간을 시험한다.

오직 말만이 존재하는 세계는 상상할 수 없지만,

오직 침묵만이 존재하는 세계는 아마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침묵은 자기 자신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침묵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완전하게 현존하며

자신이 나타나는 공간을 언제나 완전하게 가득 채운다.

침묵은 발전되지 않는다. 침묵은 시간 속에서 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은 침묵 속에서 성장한다. 마치 시간이라는 씨앗이

침묵 속에 뿌려져 침묵 속에서 싹터 나오는 것 같다.

침묵은 시간이 성숙하게 될 토양이다.

침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하게 현존한다.

침묵은 그 어느 먼 곳까지라도 뻗어가지만, 우리에게 가까이,

우리 자신의 몸처럼 느낄 정도로 가까이 있다.

침묵은 잡을 수는 없지만, 옷감 마냥, 직물 마냥 직접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침묵은 언어로써 규정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이며 분명한 것이다.

멂과 가까움, 멀리 있음과 지금 여기 있음 그리고 특수한 보편이 그처럼 한 통일체 속에 나란히 존재하는 것은 침묵 말고는 다른

어떤 현상에도 없다. (p. 19)

 

 

침묵은 오늘날 유일하게도 아무런 효용성이 없는 현상이다.

침묵은 오늘날의 효용의 세계와는 맞지 않는다.

침묵은 다만 존재할 뿐 아무런 다른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

침묵은 이용할 수가 없다.

다른 큰 현상들 모두가 효용의 세계에 병합되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마저도 비행기들이 다니는 데에 소용이 되는 하나의 밝은 갱도 같은 것일 뿐이다. 물과 불, 그 원소들도 효용의 세계에 흡수되었고, 그리하여 그것들은 단지 이 효용의 세계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한에서만 인식될 뿐이다. 그것들은 더 이상 독자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침묵은 효용의 세계 외부에 위치한다. 침묵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고 침묵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 침묵은 비생산적이다. 그 때문에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용한 모든 것들보다는 침묵에서 더 많은

도움과 치유력이 나온다. 무목적적인 침묵은 지나치게 목적 지향적인 것의 곁에 있다. 그 무목적적인 것이 지나치게 목적 지향적인 것 곁에 갑자기 나타나서, 그 무목적성으로써 놀라게 만들고 목적

지향적인 것의 흐름을 중단시킨다. 그것은 사물들 속에 들어 있는 만질 수 없는 어떤 것을 강력하게 만들어주며, 사물들이 이용당함으로써 입게 되는 손실을 줄여준다. 그것은 사물들을 분열된 효용의 세계로부터 온전한 현존재의 세계로 되돌려 보냄으로써 사물들을 다시금 온전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사물들에게 성스러운

무효용성을 준다. 왜냐하면 침묵 자체가 무효용성,

성스러운 무효용성이기 때문이다. (pp. 20~21)

 

 

말은 침묵으로부터 그리고 침묵의 충만함으로부터 나온다.

그 충만함은 말 속으로 흘러나오지 못할 때는 그 자체로 인하여

터져 버리고 말 것이다.

침묵으로부터 발생하는 말은 어떤 위임에 의해서 존재한다.

말은 그 이전의 선행한 침묵을 통해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물론 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정신이지만, 침묵이 말에

선행했다는 것이 바로 정신이 창조적 작용을 한다는 표시이다.

즉 말을 배태한 침묵으로부터 정신이 말을 끌어 내오는 것이다.

인간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면 언제나 말은 다시금 침묵으로부터 탄생한다. 말은 그렇게 당연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침묵으로부터 탄생한다. 마치 말이란 다만 침묵을 뒤집어 놓은 것. 즉 침묵의

이면일 뿐이라는 것처럼. 그리고 사실상 - 그것 침묵의 이면 - 이 말인 것이다. 말의 이면이 침묵인 것처럼.

어느 말 속에든, 그 말이 어디서 왔는가를 보여주는 한 표시로서 어떤 침묵하는 것이 들어 있고, 또한 어떤 침묵 속에서든 침묵으로부터 이야기가 생긴다는 한 표시로서 어떤 이야기하는 것이 들어있다.

따라서 말은 본질적으로 침묵과 연관되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에야 비로소 그는 말이 이제야 침묵이 아니라 인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것을 그는 다른 사람이라는 대자對者를 통해 체험한다. 대자를 통해서 처음으로 말은 이제는 침묵이 아니라 완전히 인간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자리에는 언제나 제 3자가 있다. 즉 침묵이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말들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좁은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말들이 먼 곳으로부터, 침묵이 귀 기울이고 있는 그곳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그 대화를 폭넓게 만들어주며, 그리고 그것을 통해 말은 더 한층 충만하게 된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말하자면 말들은 침묵으로부터, 즉 저 제 3자로부터 이야기되고, 그리하여 화자 자신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듣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따라서 그러한 대화에서 제3의 화자는 침묵이다. 플라톤의 <대화>의 끝 부분에는 언제나 침묵 자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책 속에서 그때까지 이야기했던 사람들이 침묵의 경청자가 되는 것이다. (p. 27)

 

 

불확실하고 멀리까지 미치며 역사 이전적인 침묵으로부터

분명하고 한계가 있고 철저히 지금 여기 있는 것인 말이 생겼다.

침묵은 이름할 수 없는 천 가지의 형상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소리 없이 열리는 아침 속에, 소리 없이 하늘로 뻗어있는 나무들 속에, 남 몰래 이루어지는 밤의 하강 속에, 말없는 계절의 변화 속에, 침묵의 비처럼 밤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달빛 속에, 그러나 무엇보다 마음의 침묵 속에, 이러한 침묵의 형상들에게는 말이 없다.

그럴수록 이 이름 없는 것들로부터 대립물로서 생기는 말은 더

한층 분명해지고 확실해진다.

침묵의 자연 세계보다 더 큰 자연세계는 없다. 그리고 그 침묵의 자연 세계로부터 형성되는 언어의 정신세계보다 더 큰 정신세계는 없다.

침묵은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하고, 침묵의 세계성에서 말은 자기 자신을 하나의 세계로 형성하는 법을 배운다. 침묵의 세계와 말의 세계는 서로 마주해 있다.

따라서 말은 침묵과 대립돼 있다. 그러나 적대 관계 속에서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은 다만 침묵의 다른 한 면일 뿐이다. 인간은 말을 통해 침묵을 듣는다. 진정한 말은 침묵의 반향인 것이다. (p. 29)

 

 

침묵은 말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은 침묵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말에게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도

가지지 못한다. (p. 31)

 

 

음악의 소리는 말의 소리처럼 침묵에 대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침묵과 평행한다.

음악의 소리는 침묵 위를 흘러가듯이 침묵에 떠밀려 표면 위로

나오는 것이다.

음악은 꿈꾸면서 소리내기 시작하는 침묵이다.

음악의 마지막 소리가 사라졌을 때보다 침묵이 더 잘 들릴 때는

없을 것이다.

음악은 멀리까지 미치고 그리고 단번에 전 공간을 점령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음악은 느릿느릿 수줍게

리듬을 통해 공간을 차지하고, 언제나 다시 같은 멜로디로 되돌아온다. 그리하여 음악의 소리는 마치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고, 도처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한정된 한 장소에만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로 이것, 즉 공간적인 멂과 가까움, 무한한 것과 한계 지워진 것이 음악을 통해서 가장 부드럽게 병존하고 있다는 것이 영혼에게는 하나의 은총이다. 음악 속에서 영혼은 멀리까지 떠돌 수 있고 그러면서도 그 어디에서나 보호받고 안전하게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음악이 신경질적인 사람들에게 진정 작용을 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은 영혼에게 어떤 넓이를 주고 그 안에서 영혼은 불안감 없이 있을 것이다.

 

 

 

언어는 침묵보다 우월하다. 왜냐하면 진리는 언어로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묵 속에도 역시 진리가 있다. 하지만 진리가 침묵 속에 있는 것은 존재의 일반적인 질서 속에 있는 진리에 침묵이 참여하는 한에서 만이다.

침묵 속에 있는 진리는 소극적이고 잠자는 상태지만 언어 속에서는 눈을 크게 뜨고 있다. 또한 언어 속에서는 진리와 오류에 대해서 적극적인 결단이 내려져 있다. 언어는 그 본질상 스스로는 잠시 지속한다. 마치 침묵의 연속이 단절된 것 같다.

침묵에게 연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진리이다. 진리는 침묵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세계가 되게 한다. 그것은 언어가 간과할 수 없는 진리로부터 연속성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언어가 흘러나온 침묵은 이제 진리를 둘러쌓고 있는 신비로 바뀐다. 진리가 아니면 언어는 침묵에 떠있는 언어의 안개에 불과할 것이다. 진리가 없다면 언어는 희미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붕괴되고 말 것이다. 언어를 분명하고 확고하게 하는 것은 바로 진리인 것이다.

언어 역시 세계이다. 단순히 어떤 한 세계에 딸린 부속물이 결코 아니다. 언어는 모든 목적성을 초월하는 충만감을 지니고 있다.

언어에는 단순히 의사소통에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이 있다.

언어는 물론 인간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또한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 언어 속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끌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고통과 기쁨과 슬픔이 있다. 언어는 마치 인간과는 무관하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고통과 슬픔과 환희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언어는 때로는 그 자체에 알맞은 시를 창조하는데

그것은 온전히 그 스스로를 위한 것이다.

 

 

"진리란 없다"고 한 사람이 말했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 자신이 감히 진리란 없다는 것을 하나의 진리로

주장하고 있다." (p. 37)

 

 

인간은 자신이 나왔던 침묵의 세계와 자신이 들어갈 또 하나의

침묵의 세계 ―죽음의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언어 또한 이 두 침묵의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고,

이 두 세계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p. 44)

 

말하기 직전의 순간에는 말은 아직도 자신이 방금 떠나온 침묵

위에서 떠돈다. 그것은 침묵과 말의 중간에서 떠돈다. 말은 어디로 향할 것인지 아직 불확실하다. 다시 침묵 속으로 완전히 되돌아가서 그 속에서 사라져버릴 것인가. 아니면 소리가 되어 침묵으로

부터 분명하게 떠나버릴 것인가. 말이 어느 곳으로 향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이다.

말해진 말은 침묵 속에 있는 말과 대립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 대한 전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말해진 말은 침묵 속에 있는 말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소리가 됨으로써 말은 침묵으로 부터 끌려나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 뿐만 아니라 또한 강조되며 그리하여 아직 침묵 속에 있는 다른 말들에 대해서 우선권을 가지게 된다. 말해진 말은 한 개념을 그

개념이 침묵 속에서 고립되어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고립시킨다.

개념은 소리가 되는 그 순간에는 오직 홀로 존재하며, 그 개념이

소리가 되므로써 이제는 오직 그 개념만이 유효하다는 것이 선언되는 것이다. 물론 침묵 속에 있는 한 개념도 다른 개념들과 뚜렷하게 구별되기는 하지만, 어떤 개념이 유효한가 하는 결정은 아직 확정적으로 내려지지 않았다. 다만 침묵 속의 말만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인간이 아직은 결단의 모험을 하지 않는다. 음성을 통해서나

혹은 말을 쓸때에나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말과 완전히 일치된다.

침묵 속에 있는 말은 가시적인 것을 초월하는 한 세계 속에 위치해 있다. 그것은 바로 침묵이다. 말이 가지고 있는 투명한 미광은 저 비가시적 세계의 미광으로부터 비롯된다. 말이 인간 속에서 침묵하고 있을 때 그 비가시적 세계의 미광이 말 위에 내린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에서 오직 한 번 죽는다. 그리고 죽음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죽음에 실패한다. 죽음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미 죽음에 임했던 경험 많은 사람들의 지침에 따라서 죽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금욕은 우리에게 이러한 죽음의 체험을 준다." (플로렌스키) (p. 45)

 

 

몸짓은 말과는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한다. 몸짓은 그것을 야기시킨 충동들로부터 해방되어 있지 않다. (중략) 몸짓은 지나쳐가는 것이며 스쳐가는 것이며 현존하지 않는 것이다. (p. 60)

 

 

"현대의 저술들 속의 사상은 똑바로 앞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움직임에서 생기는 듯 보인다. 그와는 달리 고대의 저술들 속의 사상은 날면서 원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한 마리 새의 움직임에서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주베르) (p. 64)

 

 

자신의 내부에 침묵하는 실체가 아직 존재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내부를 살펴야 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는 모든 것을 의지의 도움으로 정돈할 필요가 없다. 서로 대립되는 것을 가라앉히는 침묵하는 실체의 힘에 의해서 많은 것들이 저절로 정돈된다. 그러한 인간은 서로 맞지 않는 여러 가지 특성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떤 위기에 이르지 않을 수 있다. 침묵하는 실체 속에는 서로 대립되는 것들을 위한 충분한 공간이 있는 것이다. (p. 75)

 

 

또한 침묵하는 실체는 한 인간의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이 변화의 원인은 정신이겠지만, 침묵이 없다면 변화는 실현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변화할 때 인간이 자신의 모든 과거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지나간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침묵을 놓을 수 있을 때뿐이기 때문이다. (p. 79)

 

 

인간은 생명과 정신, 신앙과 지식에 대해서 다만 서로 대립되어 있는 것들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즉 "생명과 정신", "신앙과 지식"은 그것들이 서로 정면으로 충돌할 때에만 중시된다. 인간은 더 이상 생명과 정신 자체에 대해서, 신앙과 지식에 대해서 그것들 각자가 여전히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해줄 수 있는 아량이 없다. (p. 83)

 

 

꿈 역시 침묵으로 가득 차 있는 형상이다 꿈은 침묵의 표면 위에

새겨진 다채로운 빛깔의 판박이 그림이다. 마치 꿈은 깨어 있는

동안 침묵을 지나치게 많이 소비해 버린 인간에게 새로 침묵을

가져다주려는 것 같다. (p. 105)

 

 

사랑에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다. 그리고 "사랑은 말할 때보다 침묵할 때 비할 데 없이 더 쉽다. 말을 찾는 것은 마음의 감동을 크게

해친다. 보다 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잃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랑의 가치를 알고 있다면 그 손실은 큰 것이다."

(브레몽의 시 「신비주의와 시」 중에서 인용된 아몽의 말) (p. 110)

 

 

말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은 단순한 현상 이상의 것이 된다.

말을 통해서 인간은 어른거리다가 사라지는 현상성으로부터 끌어올려진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현상을 부수고 나와 현존하게 되며, 확고해진다. (p. 117)

 

침묵하는 풍경, 그것은 인간의 얼굴 속에 들어오면 말하는 침묵이 된다. (p. 121)

 

시는 침묵으로부터 나오며, 또한 침묵을 동경한다. (p. 165)

 

 

오늘날 침묵하는 사람은 없다. 더 이상 말하는 사람과 침묵하는

사람 간의 구별이 없다. 다만 말하는 사람과 말하지 않는 사람 간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경청하는 사람 또한 없다. 오늘날 인간은 더 이상 경청할 수가 없다. 그리고 더 이상 경청할 수 없는 까닭에 더 이상 이야기할 수도 없다. 경청한다는 것과 이야기한다는 것은 일치되어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다. (pp. 180~181)

 

 

침묵 속에서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절규가 들리고, 그 절규는 대포 소리를 압도할 것이다. 침묵 속에서는 전쟁의 소리가 너무도 크게 들려 인간은 전쟁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보고하는 계속적인 잡음은 대포의 굉음과 죽어가는 사람들의 절규를 보편적인 잡음으로 평준화시킨다. 전쟁은 전체적인 라디오 잡음의 일부가 되어 거기에 순응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인간의 전쟁을 라디오 잡음 속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pp. 235~236)

 

 

예전에는 침묵이 모든 사물을 뒤덮고 있었고, 그래서 인간은 한 대상에 다가가기 이전에 먼저 그 침묵의 막을 뚫고 나가야만 했으며, 인간이 생각하려고 하는 그 자신의 사상 앞에까지도 침묵 자체가 서 있었다. 인간은 여러 사상들과 사물들에게로 직접적으로 뛰어들 수 없었다. 사상과 사물은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침묵에 의해서 보호되고 있었고, 그리하여 인간은 그것들의 급박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p. 256)

 

 

인간은 침묵을 잃어버렸다는 것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중략) 모든 것이 직접적인 수익성에 따라서 계산되는 현대 세계에는 더 이상 침묵을 위한 자리가 없다. 침묵은 추방당했다. 침묵은 수익성이 없고, 단지 존재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p. 258)

 

 

어쩌면 아직도 약간의 침묵은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이 조금은 묵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멸종되어가는 인디언들에게 초라한 보호구역 내에 약간의 공간을 허락해주듯이 오늘날에도 때때로 침묵에게 약간의 공간이 허락된다. 이를테면 요양소에서 오후 2시와 3시 사이의 "1시간 묵상"이나, 대중들이 "……을 추모하여" 1분만 침묵해야만 하는 "1분 묵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침묵을 추모하여 침묵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p. 259)

 

 

아마도 침묵은 아직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침묵은 그래도 아직은 인간 속에 있겠지만, 그러나 잠들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때로는 한 사람 혹은 한 민족의 어떤 특성이 다른 특성에 뒤덮여서 오래 전에 죽은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한 민족의 시적 창조력이 과학적 혹은 정치적 능력에 의해서 지나치게 부추겨짐으로써 오랫동안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시적 창조력이 다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도 그 충만함으로 그동안의 저 공백기까지 다시 꽉 채워버릴 것처럼 강렬하게 나타난다. (중략) 인간 내부의 형이상학적 능력은 파괴되었던 것도 죽었던 것도 아니고, 다만 잠자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p. 261)

 

 

침묵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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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힘이 미치는 곳에서의 개개인은 자신과 공동체간의 어떠한 대립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인과 공동체는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둘 다 똑같이 침묵을 마주 보고 서 있기 때문이다. 개인과 공동체간의 차이는 침묵의 힘 앞에서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한다.

오늘날 개인은 침묵과 마주해 있지도 않고 공동체와 마주해 있지도 않으며 다만 보편적인 소음과 마주해 있다. 그리하여 개인은 그 소음, 그 보편적인 소음도 이제는 소유하지 못하고 침묵도 아직은 소유하지 못한 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소음으로부터도 고립되고 침묵으로부터도 고립되어 있다. 그는 버림 받은 자인 것이다.

침묵이 작용하는 세계에서 고독은 주관적인 것에 달려 있지 않으며 주관적인 것에서 유래되지 않는다. 고독은 어떤 객관적인 것으로서 인간 앞에 존재하고 있으며, 인간 자신의 내부 속에 있는 고독 역시 그러하다. 고독은 침묵으로서 인간 앞에 존재하고 있다. 옛 성자들이 고독 속으로 들어가서 마주쳤던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침묵의 객관적인 고독이었고, 그래서 그들 자신의 내적 고독은 객관적인 고독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성자는 그 객관적인 고독을 그것이 제삼자로부터 온 것인 양 받아서 가졌고 그것을 당연한 것인 양 받았다. 따라서 성자의 고독은 오늘날의 '내적' 고독처럼 긴장되어 있지 않았다. 반대로 그것은 침묵의 위대한 객관적인 세계와 그 객관적인 세계의 고독과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시였다. 그리하여 성자는 고독으로부터 보다 많은 것을 얻었다. 왜나하면 그것은 단순히 그의 고독인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그의 고독 바깥에 있는 것이었고, 자기 자신의 고독이 될 수도 있는 것 이상의 것이었다. 그러나 고독이 다만 인간 내부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곳에서는 인간은 고독에 의해서 소진되고 고독에 의해서 수축된다.

**

동물들이 인간 가까이에 있듯이 그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무거운 침묵도 그 동물들과 함께 인간 가까이에 있다.

예전에는 동물은 인간에게 오늘날보다 더 중요한 존재였다. 동물에 의해서, 동물의 침묵에 의해서 인간이 말하는 것과 그 움직임은 보다 무겁고 완만해졌다. 동물은 인간을 위해서 침묵을 지고 다녔다. 물건들의 짐뿐만 아니라 침묵이라는 짐을 등에 지고 다녔던 것이다. 동물은 침묵을 끌고 인간과 말의 세계를 횡단하면서 인간 앞에 언제나 침묵을 가져다 주는 피조물이다. 인간의 말이 헤적거려놓은 많은 것들이 동물의 침묵에 의해서 다시 평온스럽게 된다.

동물들은 말의 세계를 뚫고 나아가는 하나의 침묵의 캐라반이다.

동물들은 침묵의 형상들이다. 그것들은 동물이라기보다는 짐승

형상의 침묵이다. 하늘의 별 형상(Sternbild: 성좌라는 뜻/역주)이 하늘의 침묵을 읊듯이 지상의 짐승 형상들은 지상의 침묵을 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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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침묵한다. 서로 충분히 사랑하며 서로 충분히 기쁘게 하길 원하며, 서로를 충분히 알고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며 각자 나름대로 충분히 함께 하며, 충분히 같고, 서로 나란히 오랫동안 고요한 거리를 따라 걷는 두 친구, 그들은 행복하여라. 함께 침묵할 줄 알 만큼 서로를 사랑하는 두 친구는 행복하여라. 침묵할 줄 아는 나라에서, 우리는 올라가고 있다. 우리는 침묵했다. 오래 전부터 우리는 침묵하고 있었다." -샤를 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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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카라티예프는 자신이 이전에 말했던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이야기를 자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맞는 말이었다...... 때때로 피에르는 그의 말의 깊은 의미에 놀랐을 때, 한 말을 다시 한번 해달라고 그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플라톤은 자신이 불과 일 분 전에 한 말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플라톤은 말들을 전체 맥락에서 분리하여 그 의미를 개별적으로 이해하지 않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플라톤의 모든 말과 행동은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그의 삶 전체를 형성하는 어떤 활동의 표현이었다. 플라톤이 관찰하는 그 자신의 삶은 개별적인 삶으로서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주의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고 느껴지는 전체의 부분으로서만이 비로소 그 의미를 얻는 그런 것이었다.

꽃에서 향기가 나오는 것과 아주 똑같이 그로부터 그의 말과 그의 행동이 흘러나왔다.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이러한 인간은 한 행위를 해석하기 위해서 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만큼 어떤 확고한 질서 속에 있다. 마치 각 시간마다 일정한 화단의 꽃들이 피어나는 해시계 속에서 꽃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차례로 피어나듯이 그렇게 행동들이 차례로 따른다.

톨스토이의 이 플라톤이라는 인물에게는 더 이상 말이 필요치 않다. 따라서 말은 내적으로 자유를 가진다. 말은 더 이상 직접적으로 대상에게 묶여있지 않고 또한 다른 말들에게 묶여 있지 않다.

그렇기는 하지만, 말이 완전히 풀려난 것은 아니며 말은 대상과

행위 너머에 행복스럽게 떠 있다. 형식적이고 외면적인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복한 그러한 자유에 의해서 말들이 서로 결합되고 유지된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고, 자신이 이야기했던 것과 완전히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며,

그 두가지가 모두 옳았다. 이러한 인간의 경우에는 말들은 말 그 자체를 보여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사물과 행위를 보여주지도 않으며, 그 행복한 내적 자유를 보여준다. 이러한 인간의 경우에는 그가 말을 해도 거기에는 침묵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가 침묵을 해도 거기에는 이야기가 있고, 실로 침묵이 말을 통해서 들릴 수 있으며, 보통 때라면 하나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 행복이 하나의 가시적인 물체로 그 투명함 속에서 보이게 된다.

 

자아와 침묵

1.

자기 본질 속에 아직도 침묵이 존재하는 인간은 그 침묵으로부터 외부 세계로 움직여 나아간다. 침묵이 그 사람의 중심이다.

침묵의 실체가 자신의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간이라면,

그의 모든 움직임은 그 자신의 침묵에 의해서 지배된다.

그러한 인간은 명백하게 현존하고 있으며 그의 말 또한 명백하게 현존하고 있다.

그러한 인간은 안정 속에서 경직되지 않는다.

침묵은 모든 경계선을 넓히고, 그리하여 안정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 밖으로 뻗어나가게 되며, 그 때문에 결코 경직되지 않는다.

그때에는 불안정도 인간을 소진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침묵의 진동에 불과할 테니까.

그러나 침묵이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는 "안정이 경직되는 까닭에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불안정은 인간을 소진시키는 까닭에 그 속에서 인간은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끊임없이 어느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무겁게 나아갈 수밖에 없고, 그의 모든 시작 속에는 불가피하게 불안함이 스며드는 것이다."(괴레스)

2.

침묵의 힘이 미치는 곳에서의 개개인은 자신과 공동체 간의 어떠한 대립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오늘날 개인은 보편적인 소음과 마주해 있다.

그는 소음으로부터도 고립되고 침묵으로부터도 고립되어 있다.

그는 버림받은 자인 것이다.

고독은 침묵으로서 인간 앞에 존재하고 있다. 옛 성자들이 고독 속으로 들어가서 마주쳤던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침묵의 객관적인 고독이었다.

그러나 고독이 다만 인간 내부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곳에서는 인간은 고독에 의해서 소진되고, 고독에 의해서 수축된다.

3.

자신의 내부에 침묵하는 실체가 아직 존재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내부를 살펴야 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는 모든 것을 의지의 도움으로 정돈할 필요가 없다. 서로 대립되는 것을 가라앉히는 침묵하는 실체의 힘에 의해서 많은 것들이 저절로 정돈된다. 그러한 인간은 서로 맞지 않는 여러 가지 특성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떤 위기에 이르지 않을 수 있다. 침묵하는 실체 속에는 서로 대립되는 것들을 위한 충분한 공간이 있는 것이다.

서로 대립되는 것들 사이에는 침묵하는 실체가 중재를 한다.

그럴 때에만 인간은 자기 자신의 모순을 초월하게 되며,

유머를 가지게 된다.

"끝없는 쾌활함이 필요하며, 자기 자신의 모순을 완전히 초월하여 그 모순 속에서 괴롭고 불행해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필요하다."(헤겔)

침묵하는 실체가 없다면, 그 모순은 논란에 맡겨지고 그리하여

동요가 생긴다. "행복과 안락"은 사라지고 유머는 끝난다.

오늘날에는 침묵하는 실체가 전혀 없다. 모든 것들이 반항적이며 위협적으로 언제나 동시에 존재한다. 그래서 그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침묵 속에 가라앉힐 수 없게 된 인간은 그것을 공허한 빈 말들 속으로 발산시켜 가라앉게 한다.

한 인간의 내부에 침묵하는 실체가 존재하고 있을 때 그의 모든

특성들은 그 실체 속에 중심을 두게 된다.

그의 한 특정의 결함이 그렇게 쉽게 다른 특성에게까지 전염되지는 않는다. 그 결점은 침묵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묵하는 실체가 없다면 인간은 단 한 개의 결함에 의해서도 부식될 수 있고, 그리하여 그는 더 이상 한 인간이 되지 못하며 완전히 결함 그 자체에 불과해지게 된다. 그것은 마치 결함 그 자체, 악 그 자체가 인간의 모양을, 인간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침묵이 없다면 변화는 실현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변화할 때 인간이 자신의 모든 과거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지나간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침묵을 놓을 수 있을 때뿐이기 때문이다.

침묵이 결여된 오늘날의 인간은 더 이상 더 이상 변신할 수가 없다. 다만 발전할 수 있을 뿐이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Meditation

"The face of man is the proof of the existence of God"he said.

Max Picard died in 1965 in Sorengo, Ticino.

In a letter to Rilke, Andre Gide, in 1921, said to see in Picard a "A man who suffers, and whose suffering is frighteningly precise".

When he learned of this judgment, the applicant challenged "Exaltation of suffering", judging that"There is something greater than suffering – it is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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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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