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形性의 중심
아이투아이 / 켄윌버
우주적 의식은
개별성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성의 더할 나위 없는 달성이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아 혹은 무아를 말할 수 있다.
진정한 자아라고 하든 무아라고 하든
그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의 진정한 자아는
무 시간적이어서 영원한,
무 공간적이어서 무한한,
시간과 날짜를 거부하고
오직 사랑이란 빛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온 우주의 자아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일자와 다자,
절대와 상대,
자유의지와 운명,
의식과 형상,
마음과 육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
기술적으로 올바르며 정확한 대답은
바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관조의 눈을 떠 보라.
그러면
그 해답은
마치 시원한 봄날 이른 아침
수정처럼 맑은 연못 위에서 반짝이는 햇살만큼이나
명백하고 완벽하고 틀림없을 것이다.
당신은 그것이 해답이었음을 안다.
따라서
당신의 중심이 곧 신이라는
사실이 보여짐에 따라,
또한 원형의 중심은 곧 궁극의 신이라는
사실이 보여짐에 따라
그리고 궁극의 신의 중심이 무형성이라는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무형성의 중심은
곧 모든 형상의 세계와 다르지 않는 것임이
드러나게 된다.
가장 유명한 불교 경전(반야심경)에서는
이를 ‘색즉시공’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명상은
지속적으로 초월해 가기 위한
도구적인 방법이다...
명상이 진화이고,
명상이 곧 변형이다.
명상에 대하여 특별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의식의 구조는 존재하지만,
의식 속에 분리된 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체계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착각이지만,
중간단계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우파니샤드에서
‘모든 세계가 브라흐만이다’
그리고 ‘이것 또한 브라흐만이다’라고 말할 때,
[능가경]에서
‘세계는 마음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다’라고 선언할 때,
[신앙의 깨어남]에서
‘모든 것은 오직 한 마음이다’라고 말할 때,
도가 문헌에서
‘오직 도만이 존재한다. 그대는 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라고 주장할 때,
이 모든 것은
바로
문자 그대로 그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잠시 동안이라도
단순히 보는 자로 있어 보라.
그저
단순히 아는 자로, 주시자로
편안히 있어 보라.
보지만 보여질 수 없는 것에
머물러 있어 보라.
당신이
그런 공,
그러한 없음,
그러한 명료함,
그러한 개방상태에
머물러 있을 경우,
당신은 엄청난 자유,
하나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고통으로부터의 어마어마한 해방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은
거대한 해방 속에 부유하면서
공(性)으로서,
원래의 보여지지 않는 존재로서,
근원적 불생자로
안식할 것이다.
지금 바로
당신을 자각하고 있는 그것이 곧 신이다.
지금 바로
당신 자신의 가장 내밀한 자각인 그것이 곧 신이다.
보지만 결코 보여지지 않는 그것이 곧 신이다.
지금 바로
당신 안의 그 주시,
순수한 현존으로서 언제나 존재하는 그 주시가 곧 신이다.
지금 바로
엄청난 자유인 그것,
거대한 공성인 그것,
근원적 순수성인 그것,
당신 자신의 현재 자각 상태가 곧 신이다.
< 켄 윌버의 앎의 세 가지 눈 >
“나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이 세상의 진실을 보려면 관조의 눈을 떠야한다.
“관조의 눈을 떠보라.
그러면 그 해답은 마치 시원한 봄날 이른 아침 수정처럼
맑은 연못 위에서 반짝이는 햇살만큼이나 명백하고
완벽하고 틀림없을 것이다. 당신은 그것이 해답이었음을 안다.”
감각 이성 관조의 눈
! 눈에는 세 가지가 있다.
* 감각의 눈 (肉眼, the eye of flesh)
육체적인 감각이나 과학기술을 통해 사물을 인지.
감각의 눈으로 보이는 세계는 물질세계다.
물질세계는 과학적 도구와 오감을 통해 체험적으로 증명되는 것들이다.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 아인슈타인 등의 과학자들은 감각의 눈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한 것이며, 나노 과학이나 천체 망원경,
우주선 같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던 세계를 물질적으로 증명해 줌으로서 감각의 눈을 밝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감각의 눈은 밝아질수록 맹정을 드러냈다.
그것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20세기에 두드러진 과학지상주의다. 과학은 맹목적인 미신을 타파하고 경험적으로 체득된 우주만물의 체계를 세우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으나,
인간의 의식 내면에 성성하게 살아있어야 할 정신을 도려내었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명제만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오만을 부리게 됐다.
인간의 오감에 대한 체험은 오히려 동물만도 못한 것이다.
‘개 눈만도 못하다’는 말처럼, 개는 오히려 인간이 보지 못하는 것을 인지해서 짖기라도 하고, 개미와 뱀은 지진이 나기 전에 먼저
피하고 새들은 해일이 일어나기 전에 무리 전체가 이동한다.
** 이성의 눈 (心眼, the eye of reason)
이성과 논리로 대상을 인식.
우리가 배우는 언어, 수학, 철학, 심리학 등 논리와 이성적 사고를 통해 해결되는 제 분야는 모두 이성의 눈에 의해 습득된다고 할 수 있다.
이성의 눈은 보이지 않는 분야에 속하지만 충분히 증명해내고
습득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수학 시간에 적분을 배운 사람이라면 주어진 식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파악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단순한 알파벳과 기호의 나열일 뿐이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초기에는 이성의 눈이 관조의 눈과 혼합되어 제자리 잡지 못했다.
일례로 공전은 과학적인 논리나 경험으로 보아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 경우에는 자료를 관측하는 것은 감각의 눈이고,
관측된 자료를 통해 과학적 논리를 세우는 것은 이성의 눈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성한 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였다. 이성의 눈으로 판단되어야 할 대상에 관조의 눈을 들이대어 진실을 가리게 된 것이다.
칸트는 이성을 위해 이바지한 사람이다.
그가 이성의 눈을 밝히면서 철학은 중세 때까지 ‘신학의 시녀’라고 평가절하 받던 철학을 독립시켰다. 또 그는 순수이성의 눈은 본질상 영성 영역을 들여다 볼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해 냈는데, 이것은 곧 철학은 신을 가정할 수 있을 뿐, 신의 영역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 관조의 눈 (靈眼, the eye of contemplation)
수행이나 명상으로 종교적인 영역을 체험.
사람들은 관조의 눈을 뜨고 그 세계를 보고 싶어 갈망하면서도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물론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인류는 고작해야 감각과 이성의 두 눈에 의해 보이는
세계를 전부로 착각했기 때문에 세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 세상의 참모습을 보려면 관조의 눈을 떠야한다.
영성에 대한 믿음의 시절이 분명히 존재했었지만 감각의 눈,
이성의 눈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아지면서 관조의 눈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세계는 신비 아니면 의심으로 보게됐다.
“절대의 본질은 오로지 관조의 눈과 이것에 의해 직접적으로 밝혀진 대상물들, 즉 그것의 영적 자료, 영적 세계에 대한 확고한 사실들로만 밝혀질 수 있다.
... 또한 가장 심층적이며 가장 신비로운 절대/상대 문제는 오직
관조의 눈에 의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
... 그러므로 진정한 해답은 감각 영역이나 지적 영역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초월 영역에 놓여 있다. 초월 영역은 오직 ‘명상’ 실천에 몰두한 후에만 스스로 드러난다.”
이 세가지 눈은 서구 교회의 신비가이자 철학자인 성 보나벤투라(1221-1274)에 의해 설정된 개념이지만,
윌버가 구체적 이이면서도 새롭게 거듭 낸 것이다.
! 관조의 눈을 뜨는 방법은 수행이다.
깨달음의 영역은 감각의 눈이나 이성의 눈으로 지각될 수 없는
영역이다.
삶을 살아가며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깨달음을 추구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방법론을 모른 채 단순히 머리로만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영성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이미 그런 경향을 지닌 사람으로서 관념적 증명이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초월 영역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관조의 실천을 수행해야 한다.
일례로 좌선, 진언(mantra), 자파(japa), 내면의 기도 등을 실천해야 한다.”
수행의 본질적 목적은 웰빙이나 스트레스 해소가 아니라
영성(초월 영역의) 체험이다.
‘닫고 있었던 관조의 눈을 떠라. 그러기 위해서는 수행을 하라.
영성을 키워 이 세상의 본질을 직시히라.’
Eye to Eye: The Quest for the New Paradig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