處世箴 처세잠
- 물러나 내 본연의 마음을 지키리
直道而行乎 則人莫之知也
枉道而行乎 則神不可欺也
도(道)대로 행하면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도를 굽혀 행하자니
신을 속일 수 없네
辯辯而言 孰不以余爲佞
默默而處 孰不以余爲愚
말을 조리 있게 잘하면
나를 말만 잘하는 사람이라 할 것이고
잠자코 가만히 있으면
나를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 것이네
與其役智勞神 求全而兩毁
曷若退守吾本然之天 悠然與神而爲徒
그래도 꾀를 쓰고 정신을 수고롭게 하며
다 잘하려다 둘 다 망치느니
물러나 내 본연의 마음을 지키면서
여유롭게 신과 함께하는 게 나으리
나는 내게 달린 것에 최선을 다할 뿐이고,
하늘이 이루어 주는 대로 따를 뿐이다.
내 힘써 최선을 다한다면, 비로소 내 할 일은 다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는 부끄럼이 없고,
밖으로는 내게 주어진 것 이외에는 달리 경영하거나 도모하는 것이 없다. 때문에 분수에 넘친 헛된 욕망이 발동하지 않고,
이해타산으로 마음이 들끓지 않는다.
내 마음은 마치 파도가 일지 않는 담담한 물과 같고,
사방으로 열리고 통하고 막힘이 없이 활달하다.
폭염의 햇빛에 처하여, 시원한 바람을 타거나 달콤한 단물을 마시지도 못하고, 또 한낮의 더위에 얼음을 쌓아 놓은 듯 시원하다고 말할 처지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행위와 말로도 내 상쾌한 마음을 비유할 수가 없다.
나는 하늘의 때를 기다리지만,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람과 시간을 다툰다. 폭염을 피하여 나는 마음속의 그늘로 들어가지만, 사람들은 모두 나무 그늘로 들어가기를 다툰다. 이렇듯 나와 달리한 것은 뭇사람들이 아니던가?
-'밭을 사이에 두고 나눈 대화'(田間對)', 『연천집(淵泉集) 』 -
월출은 부처의 마음이고
(月出爲印心)
높은 산봉우리는 곧 견성이라
(峰高名見性)
어찌하여 견성인가
(如何是見性)
몸이 무상등에 있어서라네
(身在無上等)
일체의 모든 고해의 상이
(一切諸苦相)
울타리를 잡고 다시 돌다리로 이어졌네
(攀蘿復緣?)
점차 발꿈치를 가두지 않는다면
(稍不牢脚?)
천 길의 함정으로 실추되리라
(失墮千尋穽)
이미 만들어진 후에는
(及其旣造後)
절로 차별 없는 경지를 이루네
(亦自無別境)
만약 차별의 경지를 구한다면
(若更求別境)
이는 대승의 경지라 말할 수가 없네
(是不名上乘)
즐겁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도 없고
(無喜故無怖)
동(動)을 잊었기에 정(靜) 또한 잊었네
(忘動亦忘靜)
구름이 걸친 숲은 보리가 아니며
(雲林非菩提)
바다에 뜬 달도 밝은 거울이 아니라
(海月非明鏡)
코끼리 털에 파리를 불자로 터니
(象毛蠅拂子)
유리구슬이 이마를 뚫네
(琉璃珠貫頂)
나의 법안으로 보니
(我以法眼觀)
모든 경계가 공하네
(空諸所有景)
어찌 그릇된 생각으로 꾸미리오
(何??妄身)
금벽이 서로 비치네
(金碧交輝映)
함께 해탈하는 것만 못하니
(不如俱解脫)
다만 맑고 고요한 물에 있을 뿐이라
(?存水淸淨)
산승 견유에게 답한(冒雨出道岬 答山僧見留者) 시
묵은 구름이 산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宿雲不歸山)
맑은 샘물이 끝없이 흐른다네
(石泉澄餘瀉)
산승이 봄나물을 잘라다가
(山僧剪春蔬)
비바람 부는 밤, 나를 위로하였네
(慰我風雨夜)
아득한 진흙길, 실로 건너기 어려운데
(脩塗信難涉)
후한 뜻에 거듭하여 감사하네
(厚意重堪謝)
앞길엔 기이한 볼거리가 있어서
(前行有奇觀)
내 수레 더 머물 수가 없네
(未可淹吾駕)
대둔사의 융신과 지헌 두 스님에게
밥을 다 먹고 나서
(飯食旣畢已)
발우를 닦은 후 미타를 염불하네
(撲鉢念彌陀)
빈산엔 사람의 자취마저 끊어졌는데
(空山不見人)
물 흐르고 무심히 꽃이 피었네
(流水與閒花)
겨울에도 보리수는 푸르고
(冬靑菩提樹)
바다에 뜬 달, 명경대로다
(海月明鏡臺)
본래 일물도 없는 것인데
(本自無一物)
어찌 먼지를 닦으려 애쓰리오
(何勞拭塵埃)
*
물을 색이라 말한다면
(若道水是色)
잡아도 자취가 없고
(執之不見跡)
만약 물을 공하다 말한다면
(若道水是空)
보면 곧 색이라
(視之卽有色)
색도 아니고 또 공도 아니라
(非色亦非空)
어찌 분별이 일어날까
(何更起別見)
서강의 강물을 다 마셨으리니
(吸盡西江水)
그대는 한 바퀴 돌려주시길
(請君下一轉)
무명변(無命辯) / 홍석주
그렇게 해야 할 것이 그렇게 되는 것은 의(義)이고,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되는 것은 명(命)이다.
성인(聖人)은 의를 말미암는데 명이 그 가운데 있고,
군자는 의로써 명에 순종하고,
보통 사람 이상은 명으로써 의를 단정하고,
중인 이하는 명(命)을 알지도 못하고 그 의도 잊어버리고 있다.
이 때문에 명을 알지 못하고서 의에 편안할 수 있는 자는 드물고, 의에 통달하지 못하고서 명에 편안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나 명(命)은 말을 하지 않을 때가 있으나,
의는 어디를 가나 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효로써 어버이를 섬기면서 그 명은 따지지 않고,
충(忠)으로써 임금을 섬기면서 그 명은 따지지 않고,
경(敬)으로써 자기 몸을 닦으면서 그 명은 따지지 않고,
부지런히 행실을 닦으며 그 명은 따지지 않는다.
그러하나 명(命)은 말을 하지 않을 때가 있으나,
또한 때로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궁색하고 영달(榮達)함은 명에 달려 있어
무리하게 구할 수는 없는 것이요,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 있어 무리하게 도피할 수는 없는 것이요, 귀천은 명에 달려 있어 무리하게 영위할 수는 없는 것이요,
빈부는 명에 달려 있어 무리하게 도모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명(命)은 성현의 마음을 흔들리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인(中人)은 격려할 수는 있는 것이며, 보통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화복(禍福)은 단정할 수 있다.
그러니 명을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안다면 내가 그에 대해
기교를 베풀 것이 없고, 명이 계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내가 그에 대해 마음 쓸 바[所用]가 없다.
어깨를 움츠리며 아첨하는 웃음을 웃고서 부귀를 취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의(義)를 잡고 어려운 일을 실천하다가 몸이 죽어간 자도 있다. 그러나 때가 부귀해지게 되면 도를 지키는 자도 영달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고, 운명은 사망에 직면하면 수치스러운 짓을 차마 해내는 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아니다.
운명은 진실로 이와 같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 진실로 이 이치에 대하여 밝게 알고,
이 이치를 독실히 믿는다면, 어느 누가 마음으로 애를 쓰면서
이익을 구하고, 수치를 무릅쓰면서까지 구차스럽게 더 살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진실로 의(義)를 알지 못하면 명(命)은 쓸모가 없으며, 진실로 의를 안다면 명이 세상의 가르침에 도움됨이 또한 클 것이다. 명이 없다는 설이 일어나면서부터 명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자 순박함이 없어지고 꾀만 많아져 천도(天道)는 허망한 것이 되고 인사(人事)는 더럽혀져, 봉록이나 구하고 이익이나 추종하며 삶을 탐내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무리들이 불어나서 천하가
어지러워졌다. 이것이 이른바 명(命)이 없다는 설의 해독이다.
오직 군자라야 명(命)에 맡겨 두면서도 의(義)만을 따르는 것이다.//
명(命)은 알 수는 있어도 어떻게 해 볼 수는 없는 것이며,
믿을 수는 있어도 꼭 기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알 수는 있지만 어떻게 해 볼 수는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자연스러운 것이 천(天)이요, 인위적인 것이 인간이니,
명이란 것은 인간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천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氣)는 사세(事勢)와 합하고 운은 때로 이동하여 시키는 것이
있는 듯하면서도 실은 아무 것도 시키는 것이 없으니,
억지로 이름을 지어 명이라 하였을 따름이지,
진실로 주재(主宰)가 있어 안배(安排)하고 더하거나 덜거나 하면서 주었다 빼앗았다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든지 해 보려고 하면서 남에게 구하는 자가
망녕된 것뿐만 아니라, 빌거나 푸닥거리하면서 하늘에 구하는 자도 그것이 무익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오늘날 저 무당과 소경들이 술수를 부려 사람들을 현혹해서
제물(祭物)을 팔아대게 하여 재주를 뽐내려 하니,
음사(淫祀)가 번성하여 귀신과 사람이 뒤섞이고,
부적(符籍)과 주문(呪文)이 극성을 부려 간악함이 불어나고 있다. 명(命)을 이어가게 할 수 있다 하거나 명을 헤아릴 수 있다고 하나, 명을 이어갈 수 있다거나 명을 더 늘릴 수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명이라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자연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명이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믿을 수는 있어도 꼭 기필할 수는 없다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필할 수 있는 것은 이치[理]이고 기필할 수 없는 것은 일[事]이다. 주(周) 나라 무왕(武王)의 질병은 운수가 하늘에 달려 있었던 것이요, 금등(金縢)의 글은 주공(周公)이 그만둘 수 없었던 것이다. 주공의 도는 행해지지 못했고, 공자는 진(陳)ㆍ채(蔡)의 액(厄)을 면하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반드시 흥창(興昌)할 운(運)에 처할지라도 명군(明君)은 그 두려워 경계함을 잊지 않고, 멸망할 때를 당해서도 충신은 반드시 그 힘을 다하는 것이다.
만일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알고 나의 의를 닦지 않는다면,
태보(太保)는 하늘에 기원(祈願)하는 말씀이 없었을 것이고,
소사(少師)는 심장이 쪼개지는 일을 당하기까지 한 절개가 없었을 것이니, 온 천하를 가져다 크게 어지럽히는 것은 분명 이 명이 없다는 설(說)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지(知)를 말하면서는 곧 기미(幾微)를 아는 것이 신(神)과 같다고 말하였을 뿐이고,
명(命)을 말하면서는 몸을 닦고서 그것을 기다린다고 말하였을 뿐이니, 그것은 항상 그 근원을 막은 것이다.
성인이 말하지 않은 것인데도 무당과 소경이 언제나 말하고,
성인이 알지 못하는 것인데도 무당과 소경이 알아맞히기도 한다. 반드시 식례(式例)에 따라서 사생(死生)을 판결하고 며칠 전에
부귀를 알아맞힌 뒤에라야 지혜롭다 말한다면, 이것은 관로(管輅 위(魏)나라의 점상(占相)으로 이름난 인물)가 원성(元聖 주공(周公)을 가리킴)보다 현명하고 당거(唐擧 양(梁나라)의 관상가)가 선니(宣尼 공자를 말함)보다 슬기롭다는 것이니, 어찌 도리에 어그러진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명은 기필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저 반첩여(班婕妤 한 성제(漢成帝)의 후궁)가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올바른 일을 닦아도 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물며 악을 행하고서야 장차 무엇을 구하겠는가?” 하고,
제갈 무후(諸葛武侯 무후는 제갈량(諸葛亮))도 또한 말하기를, “몸이 다하도록 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니, 성패(成敗)와
이로움과 불리함의 결과에 이르러서는 신(臣)이 미리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의(義)의 지극함이요,
지(知)의 완성이다. 그러니 왜 하필 명(命)이란 없다고 말한 뒤에라야 속이 시원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