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Birth and Death Srila Prabhupada:
스릴라 쁘라부빠다/생과 사를 넘어서
제 1장
We Are Not These Bodies
우리는 이 몸이 아니다.
데히 니땸 아바됴' 얌 dehī nityam avadhyo 'yaṁ
데헤 사르바샤 바라따 dehe sarvasya bhārata
따스맛 사르바니 부따니 tasmāt sarvāṇi bhūtāni
나 뜨밤 쇼찌뚬 아르하시 na tvaṁ śocitum arhasi
“오 바라따의 후손이여, 육체 안에 거주하고 있는 영혼은
절대 살해될 수 없기에
어떤 생명체를 두고도 한탄할 필요가 없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2.30》
“O descendant of Bharata, he who dwells in the body is eternal and can never be slain. Therefore you need not grieve for any creature.
깨달음에 있어 가장 최초의 단계는 자신을 자기 몸과 떼어내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몸이 아니라 이 영혼이다.” 이런 인식은 죽음을 초월하여 영적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 누구에게나 필요한 절차입니다. “나는 이 몸이 아니다.” 이렇게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깨달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깨닫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육신이 아니라 순수한 의식이지만 어떤 연유로 육신이라는 옷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초월하는 행복과 자유를 얻으려면 자신을 재정립하고
본질적 위치인 순수한 의식으로 남아야 합니다.
The very first step in self-realization is realizing one’s identity as separate from the body. “I am not this body but am spirit soul” is an essential realization for anyone who wants to transcend death and enter into the spiritual world beyond. It is not simply a matter of saying “I am not this body,” but of actually realizing it. This is not as simple as it may seem at first. Although we are not these bodies but are pure consciousness, somehow or other we have become encased within the bodily dress. If we actually want the happiness and independence that transcend death, we have to establish ourselves and remain in our constitutional position as pure consciousness.
육신에 얽매인 생각으로 사는 삶에서 행복이라는 개념은
정신병과도 같습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이런 정신 착란과도 같은 육체적 정체성이 모든 행위를 끊음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런 물질적 행위가 고뇌의 원인이므로 모든 행위를 멈춰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깨달음의 최고 경지는 아무런 행위도
없는 상태인 불교적 해탈(nirvana)과 같은 것입니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물질의 조합으로 육신이 존재에 이르렀고
어떤 식으로 이 물질 성분이 분리되거나 제거되면 고통의 원인이 사라진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너무 큰 집을 소유하고 있어 국세청 직원이 과도한 세금을 부과해 괴로우면 그 집을 없애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바가바드 기따(Bhagavad-gītā)는
이 물질적 육신이 전부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이 물질의 조합을 넘어서 영혼이 있고 이 영혼은 의식을 통해 증명됩니다.
Living in the bodily conception, our idea of happiness is like that of a man in delirium. Some philosophers claim that this delirious condition of bodily identification should be cured by abstaining from all action. Because these material activities have been a source of distress for us, they claim that we should actually stop these activities. Their culmination of perfection is in a kind of Buddhistic nirvāṇa, in which no activities are performed. Buddha maintained that due to a combination of material elements, this body has come into existence, and that somehow or other if these material elements are separated or dismantled, the cause of suffering is removed. If the tax collectors give us too much difficulty because we happen to possess a large house, one simple solution is to destroy the house. However, the Bhagavad-gītā indicates that this material body is not all in all. Beyond this combination of material elements, there is spirit, and the symptom of that spirit is consciousness.
의식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의식이 없는 육신은 시체에
불과합니다. 의식이 몸에서 사라지자마자 입은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은 보지를 못하며 귀는 듣지 못합니다.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입니다. 이는 육신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의식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의식이란 무엇일까요?
열이나 연기가 불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의식은 영혼의 증거입니다. 영혼 혹은 자아를 움직이는 동력이 의식이라는 형태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의식은 영혼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이것은 바가바드 기따의 철학만이 아니라 베다 문학(Vedic literature) 전체의
결론입니다.
Consciousness cannot be denied. A body without consciousness is a dead body. As soon as consciousness is removed from the body, the mouth will not speak, the eye will not see, nor the ears hear. A child can understand that. It is a fact that consciousness is absolutely necessary for the animation of the body. What is this consciousness? Just as heat or smoke are symptoms of fire, so consciousness is the symptom of the soul. The energy of the soul, or self, is produced in the shape of consciousness. Indeed, consciousness proves that the soul is present. This is not only the philosophy of the Bhagavad-gītā but the conclusion of all Vedic literature.
샹까라짜리아(Śaṅkarācārya) 같은 비인성주의자들이나 절대신 스리 끄리쉬나(Śrī Kṛṣṇa)의 가르침을 전승해 온 바이쉬나바(Vaiṣṇava) 모두 영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인정하지만 불교학자들은 이를 부인합니다. 불교도들은 어떤 시점에 물질 조합이 의식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하지만 우리 앞에 이런 물질 구성요소가
마음껏 있어도 의식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이의가 제기됩니다. 죽은 사람에게도 이 모든 구성요소가 있지만 그 사람에게 의식을 불어넣을 수 없습니다. 육신은 기계와 다릅니다. 기계의 한 부분이 고장 나면 그 부분을 대체하여 다시 사용할 수 있지만 몸이 망가지고 의식이 몸을 떠나면 그 망가진 부분을 대체하거나 의식을 살아나게 할 방법은 없습니다. 영혼은 육신과 다르고 영혼이 있는 한
육신은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영혼 없이 육신을 살아있게 하는
방법은 절대 없습니다.
The impersonalist followers of Śaṅkarācārya, as well as the Vaiṣṇavas following in the disciplic succession from Lord Śrī Kṛṣṇa, acknowledge the factual existence of the soul, but the Buddhist philosophers do not. The Buddhists contend that at a certain stage the combination of matter produces consciousness, but this argument is refuted by the fact that although we may have all the constituents of matter at our disposal, we cannot produce consciousness from them. All the material elements may be present in a dead man, but we cannot revive that man to consciousness. This body is not like a machine. When a part of a machine breaks down, it can be replaced, and the machine will work again, but when the body breaks down and consciousness leaves the body, there is no possibility of our replacing the broken part and rejuvenating the consciousness. The soul is different from the body, and as long as the soul is there, the body is animate. But there is no possibility of making the body animate in the absence of the soul.
우리가 불완전한 감각을 가졌기 때문에 영혼을 인지할 수 없어
그 존재를 부인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많은 것이 존재합니다. 공기, 라디오 주파수, 소리, 미세한 박테리아까지도 우리의 무딘 감각으로는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현미경이나 그 외 다른 도구의 도움으로 불완전한 감각 탓에 예전에는 부정했던 많은 것들을 이제는 인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소 크기의 영혼이라서, 우리의 감각이나 다른 도구들로 인지될 수 없다고 해서 영혼이 없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영혼도 그 징후와 영향으로 인지할 수 있습니다.
Because we cannot perceive the soul by our gross senses, we deny it. Actually there are so many things that are there which we cannot see. We cannot see air, radio waves, or sound, nor can we perceive minute bacteria with our blunt senses, but this does not mean they are not there. By the aid of the microscope and other instruments, many things can be perceived which had previously been denied by the imperfect senses. Just because the soul, which is atomic in size, has not been perceived yet by senses or instruments, we should not conclude that it is not there. It can, however, be perceived by its symptoms and effects.
바가바드 기따에서 스리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불행과 고통은 육신에 얽매인 거짓 정체성 때문이라 지적하십니다.
In the Bhagavad-gītā Śrī Kṛṣṇa points out that all of our miseries are due to false identification with the body.
마뜨라-스빠르샤스 뚜 꼬운떼야 mātrā-sparśās tu kaunteya
시또쉬나-수카-두카-다하 śītoṣṇa-sukha-duḥkha-dāḥ
아가마빠이노 '니땨스 āgamāpāyino 'nityās
땀스 띠띡샤스바 바라따 tāṁs titikṣasva bhārata
“오 꾼띠의 아들이여, 영원하지 않은 행복과 불행의 교차는
여름과 겨울의 계절이 바뀌는 것과 같다.
오 바라따의 후손이여, 이 행복과 불행은 감각적 인식에서
생기므로 그에 좌우되지 말고 참는 법을 배우거라.”
《바가바드 기따 2.14》
“O son of Kuntī, the nonpermanent appearance of heat and cold, happiness and distress, and their disappearance in due course, are like the appearance and disappearance of winter and summer seasons. They arise from sense perception, O scion of Bharata, and one must learn to tolerate them without being disturbed.”
여름에 물을 만지면 시원해서 만족스럽겠지만 똑같은 물을 겨울에는 너무 차서 손도 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같은 물이지만 우리 몸과 접촉함으로써 즐거움과 고통으로 달리 느낍니다.
In the summertime we may feel pleasure from contact with water, but in the winter we may shun that very water because it is too cold. In either case, the water is the same, but we perceive it as pleasant or painful due to its contact with the body.
고통과 행복 같은 모든 감정은 육신 때문에 생겨납니다.
어떤 특정한 상태에서 몸과 마음은 행복과 고통을 느낍니다.
영혼의 본질적 위치는 행복이기에 실제로 우리는 행복을 갈망합니다. 영혼은 지식과 행복으로 가득 찬 영원한 삿-칫-아난다-비그라하(sac-cid-ānanda-vigrahaḥ), 즉 절대 존재의 부분입니다(브라흐마 삼히따 5.1). 사실 끄리쉬나라는 이름은 어느 종파에도 무관한 이름으로 최상의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끄리쉬(Kṛṣ)는 최고를, 나(ṇa)는 즐거움을 뜻합니다.
끄리쉬나는 즐거움의 전형이고 우리는 당신의 부분이므로 즐거움을 갈망합니다. 대양(大洋)에서 나온 물 한 방울도 대양이 가진
특성이 있기에 우리 역시 절대신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 하더라도 그와 같은 강력한 특성을 지닙니다.
All feelings of distress and happiness are due to the body. Under certain conditions the body and mind feel happiness and distress. Factually we are hankering after happiness, for the soul’s constitutional position is that of happiness. The soul is part and parcel of the Supreme Being, who is sac-cid-ānanda-vigrahaḥ – the embodiment of knowledge, bliss, and eternity. Indeed, the very name Kṛṣṇa, which is nonsectarian, means “the greatest pleasure.” Kṛṣ means “greatest” and ṇa means “pleasure.” Kṛṣṇa is the epitome of pleasure, and being part and parcel of Him, we hanker for pleasure. A drop of ocean water has all the properties of the ocean itself, and we, although minute particles of the
원소 크기의 영혼은 그 크기가 아무리 작아도 온몸을 떠돌며
엄청난 일을 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도시가 있고 도로, 다리,
거대한 빌딩과 유적, 그리고 위대한 문명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누가 했나요?
이는 모두 육신에 내재한 미세한 영혼의 불꽃이 이루어 낸 결과입니다. 이런 위대한 업적들이 작은 영혼의 불꽃이 이룬 것이라면
지고한 영혼 전체(Supreme Spirit Whole)가 이루어낼 업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작은 영혼들은 지고한 영혼이 가진 자질 즉 지식, 행복, 영원을
자연히 갈망하지만 이런 욕망은 물질적인 육신 때문에 좌절되고
맙니다. 바가바드 기따는 어떻게 영혼의 욕망을 성취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지식을 제공합니다.
The atomic soul, although so small, is moving the entire body to act in so many wonderful ways. In the world we see so many cities, highways, bridges, great buildings, monuments, and great civilizations, but who has done all this? It is all done by the minute spirit spark within the body. If such wonderful things can be performed by the minute spirit spark, we cannot begin to imagine what can be accomplished by the Supreme Spirit Whole. The natural hankering of the minute spirit spark is for the qualities of the whole – knowledge, bliss, and eternality – but these hankerings are being frustrated due to the material body. The information on how to attain the soul’s desire is given in the Bhagavad-gītā.
현재 우리는 불완전한 도구를 통해 영원과 행복, 지식을 얻으려
애쓰고 있습니. 그러나 사실 이런 목표를 향한 전진은 육신 때문에 중단됩니다. 따라서 육신을 넘어선 존재에 대한 깨달음에 이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몸이 아니라는 이론상의 지식이 깨달음을 주지 않으므로 항상 우리 자신을 몸의 종이 아닌 주인으로
단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차를 잘 운전할 수 있다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큰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At present we are trying to attain eternity, bliss, and knowledge by means of an imperfect instrument. Actually, our progress toward these goals is being blocked by the material body; therefore we have to come to the realization of our existence beyond the body. Theoretical knowledge that we are not these bodies will not do. We have to keep ourselves always separate as masters of the body, not as servants. If we know how to drive a car well, it will give us good service; but if we do not know how, we will be in danger.
육신은 감각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감각들은 항상 대상에 굶주려 있습니다. 눈은 아름다운 것을 보며 말합니다.
“저기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 저기 멋진 남자가 있다. 가서 보자.” 그리고 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기 아주 감미로운 음악이 있군. 가서 들어 보자.”
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레스토랑에 맛있는 음식이 있네.
가서 먹어 보자.”
이렇게 감각들이 여기저기 우리를 끌고 다녀 당황하게 합니다.
The body is composed of senses, and the senses are always hungry after their objects. The eyes see a beautiful person and tell us, “Oh, there is a beautiful girl, a beautiful boy. Let’s go see.” The ears are telling us, “Oh, there is very nice music. Let us go hear it.” The tongue is saying, “Oh, there is a very nice restaurant with palatable dishes. Let us go.” In this way the senses are dragging us from one place to another, and because of this we are perplexed.
인드리야남 히 짜라땀 indriyāṇāṁ hi caratāṁ
얀 마노 '누비디야떼 yan mano 'nuvidhīyate
딷 아샤 하라띠 쁘라걈 tad asya harati prajñāṁ
바유르 나밤 이밤바시 vāyur nāvam ivāmbhasi
“강한 바람으로 물에 떠 있는 배가 흔들리듯 배회하는 감각 중
단 하나에도 마음을 뺏기면 우리의 지혜는 멀리 사라진다.”
《바가바드 기따 2.67》
“As a boat on the water is swept away by a strong wind, even one of the senses on which the mind focuses can carry away a man’s intelligence.”
감각을 통제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고스와미(gosvāmī)는 감각을 통제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에게
붙여주는 호칭입니다. 고(Go)는 감각을, 스와미(svāmī)는 통제자를 뜻하므로 감각을 통제한 사람을 고스와미로 여깁니다.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시기를 실체 없는 물질적 육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는 영적 존재라는 올바른 자아를 확립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육체적 즐거움은 일시적인 본성 탓에 불안정하고
정신을 혼미하게 해서 실제로 즐길 수 없습니다.
진정한 즐거움은 영혼을 통해서 느끼는 것이지 육신으로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바로 잡아 우리가 육체적인 즐거움을 향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의식이 육체적인 즐거움을 향하게 되면 육신을 넘어선 참된 자아로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It is imperative that we learn how to control the senses. The name gosvāmī is given to someone who has learned how to master the senses. Go means “senses,” and svāmī means “controller”; so one who can control the senses is to be considered a gosvāmī. Kṛṣṇa indicates that one who identifies with the illusory material body cannot establish himself in his proper identity as spirit soul. Bodily pleasure is flickering and intoxicating, and we cannot actually enjoy it, because of its momentary nature. Actual pleasure is of the soul, not the body. We have to mold our lives in such a way that we will not be diverted by bodily pleasure. If somehow we are diverted, it is not possible for us to establish our consciousness in its true identity beyond the body.
보가이스바랴-쁘라삭따남 bhogaiśvarya-prasaktānāṁ
따야빠흐리따-쩨따삼 tayāpahṛta-cetasām
뱌바사야뜨미까 붇디히 vyavasāyātmikā buddhiḥ
사마다우 나 비댜떼 samādhau na vidhīyate
뜨라이군야-비샤야 베다 traiguṇya-viṣayā vedā
니스뜨라이군요 바바르주나 nistraiguṇyo bhavārjuna
니르드반드보 니땨-삿뜨바-스토 nirdvandvo nitya-sattva-stho
니르요가-끄쉐마 아뜨마반 niryoga-kṣema ātmavān
“감각만족과 물질적 부에 지나치게 얽매여 혼란해진 자의 마음에는 지고한 주를 향한 봉헌의 굳은 결심이 서지 않느니라.
베다는 물질적 본성의 세 가지 양태에 관한 문제를 주로 다룬다.
오 아르주나, 이 세 본성을 초월하거라. 모든 이중성과 이해득실, 무사안전을 위한 근심에서 벗어나 자아를 바로 세워라.”
《바가바드 기따 2.44~45》
“In the minds of those who are too attached to sense enjoyment and material opulence, and who are bewildered by such things, the resolute determination for devotional service to the Supreme Lord does not take place. The Vedas deal with the subject of the three modes of material nature. Rise above these modes, O Arjuna. Be transcendental to all of them. Be free from all dualities and from all anxieties for gain and safety, and be established in the Self.”
베다(veda)라는 단어는 “지식의 책”이란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지식 서적이 있고 이는 나라, 인종, 환경 등에 따라 다양합니다. 인도에서는 지식을 다루는 책을 베다라고 부릅니다. 서양에서는 구약 혹은 신약이라 일컫고 이슬람교도들은 코란이라 부릅니다. 이런 지식 서적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걸까요?
우리의 참된 위치가 순수한 영혼이라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한 훈련이 그 목적입니다. 특정 규율과 법으로 육체적 행위들을 통제하기 위함이고 이 규율들은 도덕 규정으로 이해됩니다.
예를 들어 성서는 십계명으로 우리 삶을 규제하려 합니다.
가장 높은 완성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육체를 통제해야 하고 이런 규정 원칙 없이 삶을 완성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규율은 나라에 따라, 경전에 따라 다르고 시간과 상황, 사람들의
의식 상태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졌지만 규정된 원칙들은 다 똑같아서 큰 차이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국가는 국민을 다스리기 위해 법령을 제정합니다. 규정 없이 진보와 문명은 불가능합니다.
앞서 언급한 절에서 끄리쉬나는 아르주나에게 베다의 규정 원칙은 물질적 본성의 세 가지 양태, 즉 선성(善性), 동성(動性), 암성(暗性)(뜨라이군야-비샤야 베다하)을 통제하기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끄리쉬나는 아르주나에게 물질적 이중성을 초월한 본질적
위치, 영혼으로서의 자아를 확립하라고 이르십니다.
The word veda means “book of knowledge.” There are many books of knowledge, which vary according to the country, population, environment, etc. In India the books of knowledge are referred to as the Vedas. In the West they are called the Old Testament and New Testament. The Muhammadans accept the Koran. What is the purpose for all these books of knowledge? They are to train us to understand our position as pure soul. Their purpose is to restrict bodily activities by certain rules and regulations, and these rules and regulations are known as codes of morality. The Bible, for instance, has ten commandments intended to regulate our lives. The body must be controlled in order for us to reach the highest perfection, and without regulative principles, it is not possible to perfect our lives. The regulative principles may differ from country to country or from scripture to scripture, but that doesn’t matter, for they are made according to the time and circumstances and the mentality of the people. But the principle of regulated control is the same. Similarly, the government sets down certain regulations to be obeyed by its citizens. There is no possibility of making advancement in government or civilization without some regulations. In the previous verse, Śrī Kṛṣṇa tells Arjuna that the regulative principles of the Vedas are meant to control the three modes of material nature – goodness, passion, and ignorance (traiguṇya-viṣayā vedāḥ). However, Kṛṣṇa is advising Arjuna to establish himself in his pure constitutional position as spirit soul, beyond the dualities of material nature.
앞서 지적했듯이 열과 냉기, 즐거움과 고통 같은 이런 이중성은
대상과 감각이 접촉함으로써 생겨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감각은 자신을 육신과 동일시하자마자 생겨난 결과물입니다.
끄리쉬나께서는 쾌락과 권력에 눈먼 자들도 제식과 규제된 행위를 통해 천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음을 약속하는 베다 지식을 알게 되면 압도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즐거움은 우리의 타고난 권리로, 영혼의 특성이지만 영혼이 물질적으로 즐기려 하기에 잘못되었습니다.
As we have already pointed out, these dualities – such as heat and cold, pleasure and pain – arise due to the contact of the senses with their objects. In other words, they are born of identification with the body. Kṛṣṇa indicates that those who are devoted to enjoyment and power are carried away by the words of the Vedas, which promise heavenly enjoyment by sacrifice and regulated activity. Enjoyment is our birthright, for it is the characteristic of the spirit soul, but the spirit soul tries to enjoy materially, and this is the mistake.
모두가 즐기려고 물질적 대상을 찾고 있고 가능한 한 최대의 지식을 쌓으려 애씁니다. 어떤 이는 화학자, 물리학자, 정치인, 예술가 또는 다른 무엇이 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전체 중 일부를 알고 혹은 일부 중 전체를 알며 이것을 일반적으로 지식이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몸을 떠나자마자 이 모든 지식은 사라지게 됩니다. 전생에 위대한 지식의 소유자였어도 현생에서는 학교에 가
쓰고 읽는 법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해 다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전생에 습득한 어떤 지식이든 완전히 잊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는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지식을 구하고 있지만
이 물질적 육신 때문에 그것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몸을 통해 즐거움을 추구하고 있지만 육체적 쾌락은 진정한 즐거움이 아닙니다. 인위적입니다. 만일 이런 인위적인
즐거움을 계속 누리고자 하면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는 우리 본질적 위치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Everyone is turning to material subjects for enjoyment and is compiling as much knowledge as possible. Someone is becoming a chemist, physicist, politician, artist, or whatever. Everyone knows something of everything or everything of something, and this is generally known as knowledge. But as soon as we leave the body, all of this knowledge is vanquished. In a previous life one may have been a great man of knowledge, but in this life he has to start again by going to school and learning how to read and write from the beginning. Whatever knowledge was acquired in the previous life is forgotten. The situation is that we are actually seeking eternal knowledge, but this cannot be acquired by this material body. We are all seeking enjoyment through these bodies, but bodily enjoyment is not our actual enjoyment. It is artificial. We have to understand that if we want to continue in this artificial enjoyment, we will not be able to attain our position of eternal enjoyment.
육체를 병에 걸린 상태로 여겨야 합니다. 환자는 올바로 즐길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황달에 걸린 사람은 사탕을 쓰다고 느끼겠지만 건강한 상태의 사람이라면 사탕의 달콤한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똑같은 사탕이지만 우리의 상태에 따라 다른 맛을 느낍니다. 삶을 육체로 인식하는 이 병든 의식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영적 세계의 달콤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쓰다고 느낄 것입니다. 동시에 물질적 삶에 대한 즐거움을 늘릴수록 병든 상태는 더욱 악화됩니다. 장티푸스 환자가 고체 음식을 먹지 못하는데도 누군가에게 받아먹으면 병이 더욱 악화하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부닥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진정으로 물질적 존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육체적 요구와 즐거움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The body must be considered a diseased condition. A diseased man cannot enjoy himself properly; a man with jaundice, for instance, will taste sugar candy as bitter, but a healthy man can taste its sweetness. In either case, the sugar candy is the same, but according to our condition it tastes different. Unless we are cured of this diseased conception of bodily life, we cannot taste the sweetness of spiritual life. Indeed, it will taste bitter to us. At the same time, by increasing our enjoyment of material life, we are further complicating our diseased condition. A typhoid patient cannot eat solid food, and if someone gives it to him to enjoy, and he eats it, he is further complicating his malady and is endangering his life. If we really want freedom from the miseries of material existence, we must minimize our bodily demands and pleasures.
실제로 물질적 즐거움은 결코 진정한 즐거움이 아닙니다.
진정한 즐거움은 멈추지 않습니다. 마하바라따(Mahābhārata)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라만떼 요기노 난떼(ramante yogino 'nante).
영적 단계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요가행자(요기노)들은 진정으로 즐기고 있고(라만떼), 이 즐거움은 끝이 없다(아난떼).
그들이 느끼는 즐거움은 지고한 향유자(Rāma), 스리 끄리쉬나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가반 스리 끄리쉬나(Bhagavān Śrī Kṛṣṇa)가 진정한 향유자라고 바가바드 기따 5.29는 확언합니다.
Actually, material enjoyment is not enjoyment at all. Real enjoyment does not cease. In the Mahābhārata there is a verse – ramante yogino ’nante – to the effect that the yogīs (yogino), those who are endeavoring to elevate themselves to the spiritual platform, are actually enjoying (ramante), but their enjoyment is anante, endless. This is because their enjoyment is in relation to the supreme enjoyer (Rāma), Śrī Kṛṣṇa. Bhagavān Śrī Kṛṣṇa is the real enjoyer, and the Bhagavad-gītā (5.29) confirms this:
복따람 야갸-따빠삼 bhoktāraṁ yajña-tapasāṁ
사르바-로까-마헤스바람 sarva-loka-maheśvaram
수흐리담 사르바-부따남 suhṛdaṁ sarva-bhūtānāṁ
갸뜨바 맘 산띰 릿차띠 jñātvā māṁ śāntim ṛcchati
“모든 제식과 고행은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며
내가 모든 행성과 데바들의 가장 높은 주인이며
뭇 생명체에게 자비와 은총을 베푸는 것임을 깨달아
항상 나를 생각하는 현자들은 물질적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를 얻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5.29》
“The sages, knowing Me as the ultimate enjoyer of all sacrifices and austerities, the Supreme Lord of all planets and demigods, and the benefactor and well-wisher of all living entities, attain peace from the pangs of material miseries.”
보가(Bhoga)는 즐거움을 의미하고 우리가 즐거움의 향유자가
아니라 대상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즐거울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즐기는 주체는 절대신이고 우리는 당신이 즐거워하는
대상, 생명체입니다.
Bhoga means “enjoyment,” and our enjoyment comes from understanding our position as the enjoyed. The real enjoyer is the Supreme Lord, and we are enjoyed by Him.
물질계에서 이런 관계는 남편과 아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남편은 즐기는 자(쁘루샤, puruṣa)이고 아내는 즐겨지는 자(쁘라끄리띠, prakṛti)이다. 쁘리 ‘Pri’라는 단어는 ‘여성’을 뜻합니다. ‘뿌루샤’는 영혼, 즉 주체이고 '쁘라끄리띠'는 자연, 곧 대상입니다. 그러나 즐거움은 남편과 아내 둘 다 함께 느낍니다.
진정으로 즐거울 때 남편이 더 즐겁고 아내가 덜 즐겁다는 식의
구별은 없습니다. 비록 만일 남편이 우세하고 아내가 덜 우세하다고 해도 즐거움의 경지에 이를 때는 그 우열을 생각지 않습니다.
더 큰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생명체도
향유자가 아닙니다.
An example of this relationship can be found in the material world between the husband and the wife: the husband is the enjoyer (puruṣa), and the wife is the enjoyed (prakṛti). The word pri means “woman.” Puruṣa, or spirit, is the subject, and prakṛti, or nature, is the object. The enjoyment, however, is participated in both by the husband and the wife. When actual enjoyment is there, there is no distinction that the husband is enjoying more or the wife is enjoying less. Although the male is the predominator and the female is the predominated, there is no division when it comes to enjoyment. On a larger scale, no living entity is the enjoyer.
절대신은 당신 자신을 수많은 형태로 확장하시고 우리는 그런 확장의 일부입니다. 절대자는 두말할 나위 없이 오직 한 분이시지만
즐기고자 기꺼이 여러 모습을 하십니다. 대화 나눌 사람 없이 빈방에 혼자 앉아 있을 때 전혀 즐겁지 않다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섯 명 정도가 있으면 즐거움은 배가 되고 더 많은 사람 앞에서 끄리쉬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즐거움은 더욱
커집니다. 즐거움은 다양성을 의미합니다. 절대신은 당신의 즐거움을 위해 여럿이 되시고 우리의 위치는 그 즐거움의 대상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적 위치로, 인류 창조의 목적입니다.
즐기는 자와 즐거움의 대상 둘 다 의식이 있지만 즐거움의 대상이 지닌 의식은 즐기는 자의 의식에 종속됩니다.
비록 끄리쉬나가 향유자이고 우리는 그 대상이지만 모두 다 똑같이 즐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절대신의 즐거움에 관여할 때 완벽히 즐거울 수 있습니다. 육체적 개념의 즐거움으로는 절대 진정한
즐거움을 느낄 수 없습니다. 바가바드 기따는 오직 육신에 기반을 두는 물질적 즐거움을 멈춰야 한다고 전반에 걸쳐 권고합니다.
God expanded into many, and we constitute those expansions. God is one without a second, but He willed to become many in order to enjoy. We have experience that there is little or no enjoyment in sitting alone in a room talking to oneself. However, if there are five people present, our enjoyment is enhanced, and if we can discuss Kṛṣṇa before many, many people, the enjoyment is all the greater. Enjoyment means variety. God became many for His enjoyment, and thus our position is that of the enjoyed. That is our constitutional position and the purpose for our creation. Both enjoyer and enjoyed have consciousness, but the consciousness of the enjoyed is subordinate to the consciousness of the enjoyer. Although Kṛṣṇa is the enjoyer and we the enjoyed, the enjoyment can be participated in equally by everyone. Our enjoyment can be perfected when we participate in the enjoyment of God. There is no possibility of our enjoying separately on the bodily platform. Material enjoyment on the gross bodily platform is discouraged throughout the Bhagavad-gītā.
마뜨라-스빠르샤스 뚜 까운떼야 mātrā-sparśās tu kaunteya
시또쉬나-수카-두카-다하 śītoṣṇa-sukha-duḥkha-dāḥ
아가마빠이노 '니땨스 āgamāpāyino 'nityās
땀스 띠띡샤스바 바라따 tāṁs titikṣasva bhārata
“오 꾼띠의 아들이여, 영속성 없는 행복과 불행의 교차는
여름과 겨울의 계절이 바뀌는 것과 같다. 오 바라따의 후손이여.
이 행복과 불행은 감각적 인식에서 생기므로 그에 좌우되지 말고 참는 법을 배우거라.” 《바가바드 기따 2.14》
“O son of Kuntī, the nonpermanent appearance of heat and cold, happiness and distress, and their disappearance in due course, are like the appearance and disappearance of winter and summer seasons. They arise from sense perception, O scion of Bharata, and one must learn to tolerate them without being disturbed.”
물질로 구성된 총체 육신(gross body)은 물질적 본성들과 교류한 결과물이고 소멸하는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The gross material body is a result of the interaction of the modes of material nature, and it is doomed to destruction.
안따반따 이메 데하 antavanta ime dehā 니땨쇽따하 샤리리나하 nityasyoktāḥ śarīriṇaḥ 아나시노 '쁘라메야샤 anāśino 'prameyasya 따스맏 육댜스바 바라따 tasmād yudhyasva bhārata
“파괴될 수 없으며 측정 불가능하며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체가
갇힌 물질적 육신은 반드시 소멸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일어나 싸워라. 오 바라따의 후손이여.”
《바가바드 기따 2.18》
“Only the material body of the indestructible, immeasurable, and eternal living entity is subject to destruction; therefore, fight, O descendant of Bharata.”
그러므로 스리 끄리쉬나는 육체적 인식으로서의 존재를 초월해
진정한 영적 삶을 구하라고 격려하십니다.
Śrī Kṛṣṇa therefore encourages us to transcend the bodily conception of existence and attain to our actual spiritual life.
구난 에딴 아띠땨 뜨린 guṇān etān atītya trīn
데히 데하-사묻바반 dehī deha-samudbhavān
잔마-므리뜌 자라-두카이르 janma-mṛtyu jarā-duḥkhair
비묵또 '므리땀 아스누떼 vimukto 'mṛtam aśnute
“육신에 갇힌 생명체가 육신과 동반되는 이 세 가지 물질적 본성을 초월할 수 있을 때 그는 삶과 죽음, 늙음, 그리고 여러 고통에서
벗어나 심지어 이생에서도 감로를 즐길 수 있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14.20》
“When the embodied being is able to transcend these three modes [goodness, passion, and ignorance], he can become free from birth, death, old age, and their distresses and can enjoy nectar even in this life.”
‘세 가지 본성을 초월한 순수한 브라흐마-부따(brahma-bhūta) 경지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끄리쉬나 의식’을 시작해야
한다.(스리마드 바가바땀 4.30.20).’
짜이따냐 마하쁘라부(Caitanya Mahāprabhu)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끄리쉬나의 이름 구송,
즉 하레 끄리쉬나, 하레 끄리쉬나, 끄리쉬나 끄리쉬나, 하레 하레 /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가 이 과정을 촉진합니다. 이 방법을 박띠 요가(bhakti-yoga) 혹은 만뜨라 요가(mantra-yoga)라고 하며 최상의 초월주의자들이 실행합니다.
초월주의자들이 어떻게 생사를 초월해 자아를 인식하고
물질적 육신에서 벗어나며 어떻게 물질적 우주에서
영적 우주로 옮겨가는지가 다음 장들의 주제입니다.
To establish ourselves on the pure brahma-bhūta spiritual platform, above the three modes, we must take up the method of Kṛṣṇa consciousness. The gift of Caitanya Mahāprabhu, the chanting of the names of Kṛṣṇa – Hare Kṛṣṇa, Hare Kṛṣṇa, Kṛṣṇa Kṛṣṇa, Hare Hare/ Hare Rāma, Hare Rāma, Rāma Rāma, Hare Hare – facilitates this process. This method is called bhakti-yoga or mantra-yoga, and it is employed by the highest transcendentalists. How the transcendentalists realize their identity beyond birth and death, beyond the material body, and transfer themselves from the material universe to the spiritual universes are the subjects of the following chapters.
제 2장
죽는 순간의 상승
이 세상에는 요가행자라고 불리는 여러 종류의 초월주의자가 있고, 그 종류는 하타 요가행자(haṭha-yogīs), 갸나 요가행자(jñāna-yogīs), 댜나 요가행자(dhyāna-yogīs,) 그리고 박띠 요가행자(bhakti-yogīs)입니다.
이 모든 요가행자는 영적 세계로 이동할 자격이 있습니다.
요가(yoga)는 ‘연결하다’라는 뜻이고 요가 체계는 우리를 초월적인 세계로 연결될 수 있게 함을 의미합니다.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원래 우리는 절대신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현재 물질적 영향으로 오염되었습니다.
따라서 영적 세계로 돌아가야 하고 돌아가게 하는 이 연결 과정을 요가라고 합니다. 요가의 다른 의미는 ‘플러스’, 즉 ‘더하기’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절대신을 빼고 있습니다. 끄리쉬나
혹은 절대신을 우리 삶에 더할 때 인간 형태의 삶은 완벽해집니다.
죽음의 순간, 이 완성의 과정을 끝내야만 합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완성에 다가가는 방법을 실천하면 죽음의 순간, 이 육신을 버려야 할 때 그 완성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쁘라야나-깔레 마나사짤레나
prayāṇa-kāle manasācalena
박땨 육또 요가-발레나 짜이바
bhaktyā yukto yoga-balena caiva
브루보르 마뎨 쁘라남 아베샤 삼약
bhruvor madhye prāṇam āveśya samyak
사 땀 빠람 뿌루샴 우빠이띠 디뱜
sa taṁ paraṁ puruṣam upaiti divyam
“생명의 기를 미간에 집중하고 요가의 힘으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여 완전한 봉헌으로 지고한 주를 기억하는 데 전념하는 자는 반드시 최고인격신에 이를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 8.10》
학생이 4, 5년간 전공 공부를 하여 시험을 치른 후 학위를 받는
것처럼 삶이라는 과목을 인생 전반에 걸쳐 실행하고 죽음의 순간
그 시험에 통과하면 영적 세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인생은 죽음의 순간에 시험받게 됩니다.
얌 얌 바삐 스마란 바밤 yaṁ yaṁ vāpi smaran bhāvaṁ
땨자띠 안떼 깔레바람 tyajaty ante kalevaram
땀 땀 에바이띠 까운떼야 taṁ tam evaiti kaunteya
사다 딷-바바-바비따하 sadā tad-bhāva-bhāvitaḥ
“현생의 몸을 버리는 순간에 기억하는 어떠한 것이든
다음 생에 틀림없이 얻게 될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 8.6》
완성을 위해 한 어떤 행위든 죽음의 순간에 시험받을 것이다.” 라는 벵골 속담이 있습니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끄리쉬나는 육신을 버릴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설명하십니다. 댜나 요가행자(명상가)들에게 스리 끄리쉬나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얃 악샤람 베다-비도 바단띠 yad akṣaraṁ veda-vido vadanti 비샨띠 얃 야따요 비따-라가하 viśanti yad yatayo vīta-rāgāḥ 얃 잇찬또 브라흐마짜리암 짜란띠
yad icchanto brahmacaryaṁ caranti
땃 떼 빠담 상그라헤나 쁘라박셰
tat te padaṁ saṅgraheṇa pravakṣye
사르바-드바라니 삼얌야 sarva-dvārāṇi saṁyamya
마노 흐리디 니루댜 짜 mano hṛdi nirudhya ca
무르드니 아댜뜨마나하 쁘라남
mūrdhny ādhāyātmanaḥ prāṇam
아스티또 요가-다라남 āsthito yoga-dhāraṇām
“베다에 능통하고 옴까라(oḿkāra)를 발성하고 유행기의 삶에
있는 위대한 성인들은 브라흐만(Brahman)에 들어가느니라.
그러한 완성의 경지를 바라며 독신 수행을 한다.
이제 너에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 과정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줄 것이다. 요가의 경지란 모든 감각적 활동에서 초연한 상태이다.
모든 감각의 문을 닫고 마음을 가슴에 집중하며 생기를 머리
꼭대기에 둠으로써 요가의 경지에 도달하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8.11~12》
요가 과정 중 이것을 쁘라땨하라(pratyāhāra)라고 하며,
이는 “정반대로”라는 의미입니다.
사는 동안 눈이 비록 세속적 아름다움을 보는 데 전념했다 하더라도 죽음의 순간에는 대상을 향한 감각을 원위치로 돌려 내면의
아름다움을 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귀가 세상의 다양한 소리에 익숙하더라도 죽음의 순간에는 자신의 안에서 초월적인 옴까라를 들어야 합니다.
옴 이띠 에깍샤람 브라흐마 oṁ ity ekākṣaraṁ brahma
비야하란 맘 아누스마란 vyāharan mām anusmaran
야하 쁘라야띠 땨잔 데함 yaḥ prayāti tyajan dehaṁ
사 야띠 빠라맘 가띰 sa yāti paramāṁ gatim
“이 요가 수행을 한 후 신성한 음절 옴(om), 곧 문자 가운데 최상의 결합을 소리 내며 최고인격신을 생각하며 육신을 떠나면 반드시
영계(靈界)에 이를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 8.13》
이런 식으로 모든 감각은 외적 행위를 멈추고 비쉬누-무르띠(viṣṇu-mūrti), 즉 절대신의 형상에 집중해야 합니다.
마음이 몹시 동요하겠지만 가슴 속에 있는 절대신을 향해 집중해야 합니다. 마음이 가슴에 집중하고 생기가 정수리로 옮겨가면 요가의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시점에 요가행자는 어디로 갈지 결정합니다.
물질계에는 수없이 많은 행성이 있고 이 우주를 넘어선 곳에 영적 세계가 있습니다. 요가행자들은 베다 문헌을 통해 이 영계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미국에 가려는 사람이 미국 관련 서적들을 보며 미리 어느 정도의 정보를 얻는 것처럼 베다 문헌을 읽음으로써 영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가행자들은 이 모든 정보를 알고 있고 우주선의 도움 없이 자기가 원하는 어떤 행성으로든 이동할 수 있습니다.
어떤 기계적 수단을 통한 우주여행은 다른 행성으로 상승하는 공인된 과정이 아닙니다.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엄청난 노력과 돈으로 기계적 수단을 이용해 몇몇 사람들이 다른 행성에 도달할지도 모르나 이 방법은 몹시 성가지고 비현실적입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기계적인 수단을 이용해 물질계를 초월할 수는 없습니다.
더 높은 행성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널리 인정되는 것 중의 하나가 갸나 요가, 즉 명상적 요가 수행입니다. 하지만 박띠 요가는 어떤 물질적인 행성에 도달하는 것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끄리쉬나, 곧 절대신의 종들은 물질적 하늘에 있는 어떤 종류의
행성이든 출생과 늙음, 질병, 그리고 죽음의 네 원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런 행성들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 지구보다 더 높은 차원의 행성에서는 수명이 좀 더 길지만 그곳에도 여전히 죽음이 존재합니다. ‘물질계’라 함은 생로병사가 있는 곳을 의미하고 ‘영계’라 함은 생로병사를 겪지 않는 곳을 의미합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물질계 내에 있는 어떤 행성으로도 올라가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기계적 수단을 통해 더 높은 행성에 들어가려 한다면 몸이
대기권의 급격한 변화를 감당하지 못해 순식간에 죽고 맙니다.
그러나 요가를 통해 더 높은 행성에 가려 한다면 그곳에 적합한 몸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지구 상에서도 인간은 바다나 수생환경에서 살 수 없고 수생동물 또한 지상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 지구 상에서조차 그 환경에 적합한 몸을 가져야 하고, 따라서 다른 행성에서 살려면 거기에 적합한 특정한 몸을 가져야만 합니다. 지구의 6개월이 더 높은 행성에서의 하루와 같으므로 그런 행성의 생명체들은 지구의 육신들보다 더 오래 삽니다.
그러므로 베다는 더 높은 행성에서는 지구의 시간으로 만 년 이상을 살 수 있다고 기술합니다. 그러나 수명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죽음은 모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만 년 혹은 5만 년, 심지어 백만 년을 더 산다고 해도 물질계에는 그런 햇수를 모두 헤아릴 수 있고 결국 죽음의 순간이 옵니다.
어떻게 이런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가바드 기따가 주는 교훈입니다.
나 자야떼 므리야떼 바 까다찐 na jāyate mriyate vā kadācin
나얌 부뜨바 바비따 바 나 부야하
nāyaṁ bhūtvā bhavitā vā na bhūyaḥ
아조 니땨하 샤스바또 '얌 뿌라노
ajo nityaḥ śāśvato 'yaṁ purāṇo
나 한야떼 한야마네 샤리레 na hanyate hanyamāne śarīre
“어느 때에도 영혼에 생과 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은 과거에 태어난 것이 아니며 현재에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미래에 태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항구적이며 원초적이다.
육신이 다할 때 영혼은 절대 죽지 않는다.” 《바가바드 기따 2.20》
우리는 영원한 ‘영혼’입니다. 그런데 왜 삶과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요? 이런 질문을 하는 자는 총명한 자입니다.
끄리쉬나 의식을 가진 자들은 죽음이 존재하는 어떤 행성에도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으므로 매우 총명합니다. 그들은 절대신과 같은 몸을 얻기 위해 더 긴 수명을 거절할 것입니다.
이스바라 빠라마 끄리쉬나 삿-칫-아난다-비그라하(Īśvaraḥ paramaḥ kṛṣṇaḥ sac-cid-ānanda-vigrahaḥ,브라흐마 삼히따 5.1). 삿(sat)은 영원함을, 칫(cit) 은 완전한 지식, 그리고 아난다(ānanda)는 완전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끄리쉬나는 모든 즐거움의 저장소입니다. 만일 이 육신이 끝난 후 끄리쉬나의 행성인 끄리쉬나로까(Kṛṣṇaloka)나 다른 영계로
들어갈 수 있다면 삿-칫-아난다 같은 육신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끄리쉬나 의식에 있는 사람들의 목표는 이 물질계 내에
존재하는 더 높은 행성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목표와 다릅니다.
개별 자아, 혹은 ‘영혼’은 미세한 영적 불꽃입니다.
요가의 완성은 이 영적 불꽃을 정수리에 두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이를 달성한 요가행자들은 자기가 원하는 물질계의 어떤 행성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행자들이 뉴욕, 캐나다 또는 지구 상의 여러 다른 도시에 가는 것처럼 요가행자는 달이 궁금하면 달에 갈 수 있고, 그보다 더 높은 행성에 관심이 있으면 그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지구 상의 어디를 가든 비슷한 비자와 출입국 심사가 있듯이 모든 물질적 행성에는 생로병사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옴 이띠 에깍샤람 브라흐마(Oṁ ity ekākṣaraṁ brama).
죽음의 순간에 요가행자는 초월적 소리의 간결체인 옴, 옴까라를 발성할 수 있습니다. 요가행자가 이 소리를 낼 수 있고 동시에
끄리쉬나 혹은 비쉬누(Viṣṇu)를 기억하면(맘 아누스마란: mām anusmaran) 가장 높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비쉬누에 마음을 집중하는 요가 과정입니다.
비인성주의자들은 절대신의 어떤 형상을 상상하지만 인성주의자들은 그런 상상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절대신을 봅니다. 실제로 당신을 보든 상상하든 반드시 마음을 스리 끄리쉬나의 인격적 형상에 집중해야 합니다.
아난야-쩨따 사따땀 ananya-cetāḥ satataṁ
요 맘 스마라띠 니땨샤하 yo māṁ smarati nityaśaḥ
따샤함 술라바 빠르타 tasyāhaṁ sulabhaḥ pārtha
니땨-육따샤 요기나하 nitya-yuktasya yoginaḥ
“흔들림 없이 항상 나를 기억하는 자는 나를 쉽게 얻을 수 있다.
이는 그들의 계속되는 봉헌 덕분이니라,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바가바드 기따 8.14》
적어도 바가바드 기따에 따르면 일시적인 삶과 즐거움에, 그리고 일시적인 편의에 만족하는 자는 총명하지 못한 자입니다.
기따에 의하면 뇌가 매우 작은 자들이 일시적인 것에 흥미를 느낀다고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존재인데도 왜 일시적인 것에 관심을 둬야 하나요? 아무도 영원하지 않은 상황을 원치 않습니다.
만일 집주인이 당장 방을 비우라고 한다면 처량하겠지만 만일
더 나은 집으로 이사한다면 별로 슬프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영원하므로 영원한 보금자리를 원합니다.
또한 영원한 존재이므로 죽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늙고 병드는 것은 모두 표면적이고 영원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원치 않습니다. 원래 우리는 고열을 앓지 말아야 하는 존재인데도 가끔 열병에 걸리게 되고 그러면 처방을 받아 조심스레 건강을 회복해야 합니다. 네 겹의 고통도 고열과 같고 이 모든 것은
물질적 육신 때문에 생겨납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물질적 육신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육신에 늘 따라다니는 고통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 일시적 육신에서 벗어나도록 끄리쉬나는 비인성주의자들에게 음절 옴을 발성할 것을 권유하십니다. 이런 식으로 영계로의 이주를 보장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이 영계에 들어가더라도 그곳에 있는 어떤 행성에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브라흐마죠띠(brahma-jyotir) 외부에 남아있을 뿐입니다.
브라흐마죠띠는 태양 광선에, 영적 행성들은 태양 자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영적 하늘에서 비인성주의자들은 브라흐마죠띠,
즉 절대신의 광채에 머물게 됩니다. 비인성주의자들은 브라흐마죠띠에서 영적 불꽃으로 자리 잡게 되고 이런 식으로 브라흐마죠띠는 영적 불꽃으로 꽉 차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존재에 합쳐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브라흐마죠띠와 하나가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각 영적 불꽃의 개별성이 유지되지만 비인성주의자들은 인격을 갖춘 형태로 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그 광채 속의 영적 불꽃으로 남습니다. 태양광선이 무수한 원소입자로 이루어진 것처럼 브라흐마죠띠는 수많은 영적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체로서 우리는 즐거움을 원합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영혼은 존재(삿)와 더불어 더없는 행복(아난다)을 원합니다. 완전한 상태에서의 생명체에게는 세 가지 본성이 있습니다. 영원함, 지식 그리고 더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비인성적으로 브라흐마죠띠에 들어간 자들은 브라흐만(Brahman)과 같은 완전한 지식을 얻은 채 그곳에서 어느 정도 머물지만 영원한 아난다, 즉 더할 수 없는 행복은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분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빈방에 혼자 남아 몇 시간 책을 본다거나 생각에 잠겨 즐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몇 년, 틀림없이 평생을 그렇게 있기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비인성적으로 최상의 존재 속에 합쳐졌다고 하더라도 결국 어떤 교류를 갈구하기 때문에 매 순간 물질계로 다시 떨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스리마드 바가바땀이 말하는 결론입니다.
우주 비행사가 몇천 마일이나 여행할 수는 있겠지만 쉴 수 있는
행성을 찾지 못하면 결국 지구로 돌아와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인성적인 형태로 휴식은 불안정합니다. 그러므로 스리마드 바가바땀은 숱한 인내와 노력 끝에 영계에 들어가 비인성적 형상을 갖게 되더라도 사랑과 헌애(devotion)로 절대신을 섬기는 의무를 게을리하는 까닭에 비인성주의자들은 물질계로 다시 되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이 지구 상에 있는 한 끄리쉬나를 사랑하고 섬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을 배우면 영적 행성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영계에서의 비인성주의자들의 위치는 영구적이지 못하고 외롭기 때문에 어떤 관계를 만들려고 합니다. 절대신과 개인적으로 교제하지 않는 탓에 그들은 세상으로 되돌아와 거기서 속박된 다른 생명체들과 교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원함과 완전한 지식, 더할 수 없는 행복을 원하는 우리의 본질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브라흐마죠띠에 혼자 오래 남겨지면 즐거움을 얻을 수 없으므로
물질계가 주는 즐거움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끄리쉬나 의식으로는 진정한 즐거움을 즐길 수 있습니다. 물질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성교를 가장 높은 쾌락으로 여깁니다. 이것은 끄리쉬나와 함께하며 느끼는 즐거움, 영계에서의 성적 즐거움이 물질계에 그릇되게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나 영계에서의 성적 즐거움이 물질계에서의 성적 쾌감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확연히 다릅니다. 그러나 영계에 성생활이 없는 한 물질계에 반영될 리도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단지 그릇되게 반영되었지만 모든 즐거움의 저장소인 끄리쉬나 안에 진정한 삶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방법은 지금 우리 자신을 훈련해 죽음의 순간
영계인 끄리쉬나로까로 이동해 끄리쉬나와 교제하는 것이다.
브라흐마-삼히따(5.29)에 스리 끄리쉬나와 당신의 거처가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친따마니 쁘라까라 사드마수 깔빠 브릭샤
cintāmaṇi-prakara-sadmasu kalpa-vṛkṣa-
락샤브레떼슈 수라비르 아비빨라얀땀
lakṣāvṛteṣu surabhīr abhipālayantam
락쉬미 사하스라 샤따 삼브라흐마 세뱌마남
lakṣmī-sahasra-śata-sambhrama-sevyamānaṁ
고빈다 아디 뿌루샴 땀 아함 바자미
govindam ādi-puruṣaṁ tam ahaṁ bhajāmi
“저는 원초적 주, 최초의 창시자, 소들을 돌보시며 모든 욕망을
성취해 주시는 고빈다(Govinda)를 숭배합니다.
당신은 영적 보석으로 지어졌고 수백 만의 소원 성취수에 둘러싸인 곳에 거처하시며 무수한 락쉬미(Lakṣmī) 또는 고삐(gopī)들에게서 크디큰 공경과 사랑의 섬김을 받습니다.” (브라흐마-삼히따 5.29)
이것이 끄리쉬나로까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곳의 집들은 ‘시금석(touchstone)’이라 불리는 것들로 지어져 무엇이든 시금석에 닿으면 즉시 황금으로 변합니다.
나무들은 소원 성취수 또는 ‘소망의 나무’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물질계에서 망고는 망고나무에서,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얻지만 끄리쉬나로까에서는 어떤 나무에서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소는 수라비(surabhi)라 불리고 끊임없는 양의
우유를 공급합니다. 이것이 베다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영적 행성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물질계에서 우리는 출생과 죽음, 그리고 다른 모든 종류의 고통에 순응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은 감각 만족 또는 파괴를 위한 수많은 편의 시설 및 도구를 발명했지만 늙음과 질병 그리고 죽음에 대한 어떤 해결책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죽음과 늙음, 질병을 멈출 어떤 기계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죽음을 가속할 무언가를 만들 수는 있지만 죽음을 멈출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총명한 자는 물질적 삶에서 오는 네 겹의 고통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영계로 상승할 것에 신경 씁니다. 지속적인 황홀경에 있는 자(니땨 육따샤 요기나하)는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항상 황홀경에 빠져있을 뿐입니다. 그의 마음은 벗어남 없이 끄리쉬나에 대한 생각으로
항상 가득 차 있습니다(아난냐-쩨따 사따땀). ‘사따땀’은 ‘언제든 어디에서든’이라는 뜻입니다.
인도에서는 나는 브린다반(Vrndavana)에 살았고 지금은 미국에 있지만 항상 끄리쉬나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행선지와 상관없이 나는 늘 브린다반에 있고 브린다반을 떠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끄리쉬나 의식이란 영적 행성 골로까 브린다반(Goloka Vṛndāvana)에서 끄리쉬나와 항상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고 그런 의식에 있는 자들은 그저 물질적 육신을 버릴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스마라띠 니따샤하’란 ‘끊임없이 기억하는 것’을 의미하고 끊임없이 끄리쉬나를 기억하는 자에게 당신은 따샤함 술라바, 즉 쉽게 구해집니다. 끄리쉬나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박띠 요가
과정으로 당신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다른 방도를 갈구하려 하나요?
하레 끄리쉬나, 하레 끄리쉬나, 끄리쉬나 끄리쉬나, 하레 하레/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만 하루 24시간 구송하면 됩니다. 다른 규칙과 규정도 없습니다. 길에서, 지하철에서 혹은 집에서나 사무실에서도 구송할 수 있습니다. 세금도, 다른 여분의 비용도 들지 않습니다. 시작해보는 게 어떤가요?
제 3장
물질계에서의 해방
갸니(명상가)와 요가행자는 일반적으로 비인성주의자로서 영적
하늘, 즉 비인성적 광휘에 합쳐지는 일시적 형태의 해방을 얻는다 하더라도 스리마드 바가바땀에 따르면 그들의 지식은 순수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참회와 고행, 명상으로 지고한 주의 행성에
올라갈 수는 있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끄리쉬나의 인격적 특징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물질계로 떨어집니다.
끄리쉬나의 연꽃 같은 발을 숭배하지 않는 한 물질계로 다시 내려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마음가짐은 “저는 당신의 영원한 종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끄리쉬나는 아지따하(ajitaḥ), 그 누구도 절대신을 정복할 수 없기에 ‘정복되지 않는 자’입니다. 하지만 스리마드 바가바땀에 따르면 이런 마음가짐과 자세로는 당신을 쉽게 정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은 또한 지고한 주를 가늠하려는 쓸데없는 과정 또한 버려야 한다고 권합니다. 우주의 한계조차 측정 불가능한데 지고한 주는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인간의 아주 작은 지식으로 끄리쉬나의 길이와 넓이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를 이해한 자를 베다 문헌은 총명한 자라고 합니다. 순종적인 자세로 우리는 우주를 구성하는 아주 하찮은 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한된 지식이나 사색으로 지고한 주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고 겸허하고 순종적으로 권위 있는 출처인 바가바드 기따나
다른 깨달은 영혼들의 입을 통해 지고한 주에 대해 들어야 합니다.
아르주나와 스리 끄리쉬나
바가바드 기따에서 아르주나는 스리 끄리쉬나 당신의 입을 통해
직접 절대신에 대해 듣습니다. 이렇게 아르주나는 순종적인 듣기를 지고한 주를 이해하는 기준으로 삼습니다. 우리의 위치는 아르주나의 입을 통해 바가바드 기따를 듣거나 그의 진정한 대표자인 영적 스승을 통해 듣는 것입니다. 듣고 난 후에는 습득한 지식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 주님, 당신은 정복되지 않는 존재이십니다. 그러나 이 과정으로, 당신에 대해 들음으로써 정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헌애자(獻愛者, devotee)들은 기도한다.
절대신은 정복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추측을 완전히 삼가고 권위 있는 출처들을 통해 듣는 헌애자에게 당신은 친히 정복되어 주십니다.
브라흐마 삼히따에 따르면 지식을 얻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올라가는 과정과 내려가는 과정입니다.
올라가는 과정은 스스로 획득한 지식으로 향상되는 방법입니다.
이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난 책이나 권위자들의 말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명상이나 철학 같은 방법으로
내 스스로 지식을 얻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절대신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방법인 내려가는 과정은 자신보다 더 높은 권위자들로부터 지식을 얻습니다. 브라흐마 삼히따는 올라가는 과정을 채택한 자들이 마음과 바람의 속도로 수백만 년을 나아가도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끝난다고 말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탐색 주제는 파악하기 어렵고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주제에 관해 바가바드 기따는 설명합니다.
아난냐-쩨따하. 순종적인 자세로 봉헌의 과정에서 벗어남 없이
당신을 명상하라고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식으로 그를 숭배하는 자는 따샤함 술라바하, “나를 쉽게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참된 과정입니다. 끄리쉬나를 위해 하루 24시간 일하는 자는 끄리쉬나께서 잊으실 수 없습니다. 순종함으로써 절대신의 관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적 스승 박띠싯단따 사라스바띠(Guru Mahārāja Bhaktisiddhānta Sarasvatī)께서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을 보려 애쓰지 마라. 우리가 신을 보고 싶다고 해서 신이 종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 주셔야 하는가? 그건 순종적인 자세가 아니다. 사랑과 섬김으로 당신이 기꺼이 와 주시게끔 해야 한다.”
끄리쉬나께 다가가는 올바른 과정은 주 짜이따냐 마하쁘라부(Lord Caitanya Mahāprabhu)께서 인류에 소개하셨고,
그의 첫 제자인 루빠 고스와미(Rūpa Gosvāmī)가 그 진가를 인정했습니다. 루빠 고스와미는 마호메트 정부의 장관이었지만 짜이따냐 마하쁘라부의 제자가 되기 위해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낭독하며 짜이따냐 마하쁘라부를 처음 뵈었습니다.
나모 마하-바단야야 namo mahā-vadānyāya
끄리쉬나-쁘레마-쁘라다야 떼 kṛṣṇa-prema-pradāya te
끄리쉬나야 끄리쉬나-짜이따냐 kṛṣṇāya kṛṣṇa-caitanya-
남네 고라 뜨비셰 나마하 nāmne gaura-tviṣe namaḥ
“지고한 주 스리 끄리쉬나 짜이따냐께 경배 올립니다.
당신은 그 누구도 준 적 없는 끄리쉬나를 향한 순수한 사랑을 기꺼이 나누어 주시기에 끄리쉬나 자신보다도 더 관대한 아바따라(avatāra)이십니다.”
절대신을 향한 사랑이라는 가장 귀중한 것을 모두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기 때문에 루빠 고스와미는 짜이따냐 마하쁘라부를
‘가장 후하고 자비로운 인격’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끄리쉬나를 원하고 갈망합니다. 끄리쉬나는 가장 매력적이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풍부하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갈망하는 대상입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강력하며
지적이고 부유한 것을 갈구합니다. 끄리쉬나는 이 모든 것의
저장소이므로 단지 우리의 관심을 끄리쉬나께 돌리기만 하면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슴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 끄리쉬나 의식의 과정을 통해 성취할 수 있습니다.
끄리쉬나 의식으로 죽는 자는 이전에 언급했듯이 끄리쉬나께서
거처하시는 최상의 보금자리 끄리쉬나로까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받습니다. 이쯤에서 누군가는 끄리쉬나로까에 들어가서 좋은 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어볼 것입니다. 거기에 관한 답을 끄리쉬나께서 직접 주십니다.
맘 우뻬땨 뿌나르 잔마 mām upetya punar janma
두칼라얌 아샤스바땀 duḥkhālayam aśāśvatam
납누반띠 마하뜨마나하 nāpnuvanti mahātmānaḥ
삼싯딤 빠라맘 가따하 saṁsiddhiṁ paramāṁ gatāḥ
“위대한 영혼들이 헌애로 나에게 이른 후 고통으로 가득한
이 일시적 세상에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장 높은 완성을 달성했기 때문이니라.”
《바가바드 기따 8.14》
이 물질계는 스리 끄리쉬나께서 증명해 주시는 것처럼 두칼라얌(duḥkhālayam), 고통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평안해질 수 있을까요? 소위 진보한 과학으로 이 세상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과학 발전의 결과로 오히려 이 고통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생로병사의 고통을 해결할 수 없어 그저 방치할 뿐인 것입니다. 과학은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이런 고통을 해결할 힘이 없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관심을 우주선이나 원자폭탄에 향하도록 유도합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바가바드 기따에 나와 있습니다.
끄리쉬나의 행성에 도달한 자들은 삶과 죽음이 있는 이 지구에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고통으로 가득 찬 곳임을 이해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의 발전된 의식이 필요합니다. 개나 고양이, 돼지는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이라 부르지만 이성을 이런 고통의 상태에서 해방되는 방법을 찾는 데 쓰기보다 오히려 더욱 동물적인 성향을 만족시키는 데 쓰고 있습니다. 여기에 끄리쉬나께서 명백히 말씀하시기를 자신에게 오는 자는 다시 고통을 겪기 위해 태어나는 일은 절대 없다고 하십니다.
당신께 돌아간 위대한 영혼들은 속박된 존재에서 오는 고통을 덜어주는 삶의 가장 높은 완성을 달성했습니다.
끄리쉬나와 평범한 존재의 차이점 중의 하나는 평범한 생명체는
한 번에 한 장소에만 머물 수 있지만 끄리쉬나께서는 우주의 모든 곳에 계실 수 있는 동시에 당신의 고유한 보금자리에도 계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초월적 왕국에 있는 끄리쉬나의 거처는 골로까 브린다반이라고 합니다. 인도에 있는 브린다반은 그곳과 같은 장소로 지구 위에 내려온 형태입니다. 끄리쉬나께서 당신의 고유한 내적 능력으로 내려오실 때 당신의 다마(dhāma), 즉 거처도 함께 내려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끄리쉬나께서 이 지구상에 내려오실 때
특정한 땅에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럼에도 끄리쉬나의 거처는
영원히 바이꾼타들(Vaikuṇṭhas)의 초월적 영역에 남아 있습니다. 이 절에서 끄리쉬나께서는 바이꾼타에 있는 당신의 보금자리에
도달한 자는 물질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일은 절대 없다고 단언하십니다. 그런 자들을 마하뜨마(mahātmā)라고 합니다.
마하뜨마라는 단어를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마하뜨마 간디와
연관 지어 들었겠지만 마하뜨마는 정치가의 직함이 아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히려 마하뜨마는 끄리쉬나의 보금자리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1등급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을 일컫습니다. 인간의 형태로 태어난 삶과 특성을 활용하여 삶과 죽음의 반복에서 해방됨으로써 마하뜨마 완성을 이룹니다.
총명한 자는 고통받고 싶지 않지만 고통이 강제로 자신을 덮친다는 것을 압니다. 이전에 설명했듯이 우리는 마음과 몸, 자연재해 또는 다른 생명체 때문에 항상 괴로운 상태에 놓입니다.
어떤 종류의 고통이라도 항상 우리에게 옵니다. 이 물질계는 고통받기 위해 존재하고 만일 고통이 없다면 우리가 끄리쉬나 의식이 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고통은 사실 우리가 끄리쉬나 의식에 오르게 도와주는 동력입니다. 총명한 자는 이런 고통이 왜 강제로 초래되는지 묻습니다. 그러나 현대 문명의 사고방식은 이렇습니다.
“그래, 괴로워 주지. 무언가로 취하면 돼. 그러면 다 사라질 거야.” 그러나 그 도취의 효력이 끝나자마자 고통은 되돌아옵니다.
인위적인 도취로 삶의 고통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끄리쉬나 의식’입니다.
누군가는 끄리쉬나의 헌애자들은 끄리쉬나 행성에 들어가려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은 달에 가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지도 모릅니다. 달에 가는 것도 완성이 아닌가 하며 물을 것입니다. 다른 행성에 가려는 경향은 생명체와 항상 함께했습니다.
생명체를 사르바-가따(sarva-gata)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모든 곳에 가고 싶어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행은 생명체가 지닌 본성의 한 부분입니다. 달에 가려는 욕망은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요가행자들 또한 더 높은 행성에 들어가는 데 관심이 있지만
바가바드 기따(8.16)에서 끄리쉬나께서는 이런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하십니다.
아브라흐마-부바날 로까하 ābrahma-bhuvanāl lokāḥ
뿌나르 아바르띠노 '르주나 punar āvartino 'rjuna
맘 우뻬땨 뚜 까운떼야 mām upetya tu kaunteya
뿌나르 잔마 나 비댜떼 punar janma na vidyate
“물질계의 가장 높은 행성에서 가장 낮은 행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은 생사가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곳이다. 그러나 나의 보금자리에 이르는 자는 오 꾼띠의 아들이여,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8.16)
우주는 높은 행성, 중간 행성, 낮은 행성으로 구분되고 지구는 중간 행성 체계의 하나로 여겨집니다. 이 중에서 아무리 가장 높은 행성인 브라흐마로까(Brahmaloka)에 들어가더라도 생사의 반복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끄리쉬나께서 지적하십니다.
우주의 다른 행성들도 생명체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이곳에 있다고 해서 다른 행성들은 모두 비어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경험상으로도 지구에 비어있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땅의 깊은 곳을 파면 벌레가 나오고 물 깊숙이 들어가면 수생 동물들이 나오며 하늘에 오르면 수많은 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행성에는 생명체가 없다고 어떻게 결론지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끄리쉬나께서는 위대한 데바들이 거주하는 행성들에 들어가더라도 여전히 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끄리쉬나께서는 당신이 계신 행성에 도달함으로써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거듭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행복과 지식으로 가득한 영원한 삶을 얻는 데 매우 심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린 이것이 삶의 진정한 목적이고 관심사라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왜 잊게 되었을까요?
아무리 높고 큰 고층 빌딩을 지어도 거기에서 영원히 살 수 없는데도 고층빌딩과 큰 공장, 정치 놀이 등과 같은 물질적 현란함에 사로잡혀 정신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속성에 한층 더 휘말리게 할 거대한 산업이나 도시를 만드는 데 우리 에너지를 소비하지 말고 끄리쉬나의 행성에 들어가게 하는 영적 몸을 얻기 위한 끄리쉬나 의식을 발전시키는 데 힘써야 합니다. 끄리쉬나 의식은 종교적 공식이나 영적 오락이 아니라
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제4장
우주를 넘어서는 하늘
더 높은 행성에조차 생사가 존재하는데 왜 위대한 요가행자들은
그런 곳으로 올라가고 싶어하는 걸까요?
그들은 여러 신비한 능력을 지녔지만 여전히 물질적 삶의 편의를 즐기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높은 행성에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스리 끄리쉬나께서는 이런 행성들의
시간 계산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하스라-유가-빠르얀땀 sahasra-yuga-paryantam
아하르 야드 브라흐마노 비두후 ahar yad brahmaṇo viduḥ
라뜨림 유가-사하스란땀 rātriṁ yuga-sahasrāntāṁ
떼 '호-라뜨라-비도 자나하 te 'ho-rātra-vido janāḥ
“인간의 계산 방법으로 브라흐마(Brahmā)의 하루는
네 유가(yuga)를 천 번 거치는 것이니라.
그리고 그의 밤의 길이 역시 이와 같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8.17》
한 유가(yuga)는 430만 년에 해당합니다. 이 숫자에 천을 곱하면 브라흐마로까 행성에 거주하는 브라흐마의 12시간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나머지 12시간은 밤입니다. 그런 30일이 한 달이고 12개월이 1년이며 브라흐마는 그런 계산법에 해당하는 100년을 삽니다. 그런 행성에서의 수명은 정말 길지만 무수한 해가 흐른 후에
브라흐마로까의 거주자들 역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영적 행성으로 가지 않는 한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뱍딷 뱍따야 사르바하 avyaktād vyaktayaḥ sarvāḥ
쁘라바반띠 아하르-아가메 prabhavanty ahar-āgame
라뜨리-아가메 쁘랄리얀떼 rātry-āgame pralīyante
따뜨라이바뱍따-상갸께 tatraivāvyakta-saṁjñake
“브라흐마의 하루가 시작될 때 많은 생명체는 발현하게 되고
밤이 오면 모두 전멸하게 된다.” 《바가바드 기따 8.18》
브라흐마의 하루가 끝날 때 낮은 곳에 위치하는 모든 행성은
물로 뒤덮이게 되고 거기에 사는 생명체는 전멸하게 됩니다.
이런 황폐와 밤이 지나간 후 아침이 되면 브라흐마가 일어나고
다시 창조가 시작되며 생명체도 밖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창조와 파괴에 좌우되는 것이 물질계의 본성입니다.
부따-그라마하 사 에바얌 bhūta-grāmaḥ sa evāyaṁ
부뜨바 부뜨바 쁘랄리야떼 bhūtvā bhūtvā pralīyate
라뜨리-아가메-‘바샤하 빠르타 rātry-āgame 'vaśaḥ pārtha
쁘라바바띠 아하르-아가메 prabhavaty ahar-āgame
“다시 또다시 브라흐마의 낮이 되면 많은 생명체는 존재의 세계로 나오고, 브라흐마의 밤이 되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소멸의 세계로 들어간다.”《바가바드 기따 8.19》
생명체는 황폐한 상태를 좋아하지 않지만 브라흐마의 밤 동안 행성에 있는 생명체들이 모두 물에 흡수될 때까지 황폐화는 계속되고 행성들은 물에 잠깁니다. 하지만 하루가 시작되면 물이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빠라스 따스맛 뚜 바보 '뇨 paras tasmāt tu bhāvo 'nyo ‘
뱍또 ‘뱍땃 사나따나하 'vyakto 'vyaktāt sanātanaḥ
야하 사 사르베슈 부떼슈 yaḥ sa sarveṣu bhūteṣu
나샷수 나 비나샤띠 naśyatsu na vinaśyati
“그런데 또 다른 본성이 있어 이것은 영원하고 발현과 비발현의
상태를 초월한다. 이것은 최상이고 절대 소멸하지 않는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멸할 때 그 부분만은 있는 그대로 남는다.” 《바가바드 기따 8.20》
우리는 물질계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지만 베다 정보에 따르면
전 창조 안에는 수백 만의 우주가 있고 이 물질적 우주를 초월한 곳에 또 다른 창공이 있으며 그곳은 영적입니다. 거기에 있는 행성들은 모두 영원하고 그곳 생명체들 또한 영원합니다.
이 절에서 바바하(bhāvaḥ)라는 단어는 ‘본성’을 의미하고 여기에 또 다른 본성이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두 가지 본성을 경험합니다. 생명체는 영혼이고 영혼이 생명체 안에 있는 한 주체는 움직이지만 영적 불꽃이 몸에서 나가는 즉시 몸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영적인 본성을 끄리쉬나의 상위 본성이라 하고 물질적 본성을 하위 본성이라 합니다. 이 물질적 본성을 넘어서면 완전히 영적인 상위의 본성이 있습니다. 경험적인 지식으로 이것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망원경으로 무수한 별을 볼 수 있지만 그곳에 갈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물질적 우주조차 경험적인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절대신과
그의 왕국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실험과 경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실험적 지식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들어야 하고 어머니 말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 어머니를 믿지 않는다면 아버지를 알 방법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끄리쉬나 의식을 고수한다면 끄리쉬나와
그의 왕국에 대한 모든 정보는 밝혀질 것입니다.
빠라스뚜 바바하(Paras tu bhāvaḥ)는 “상위 본성”을 의미하고
뱍따하(vyaktaḥ)는 우리가 보는 발현된 것을 뜻합니다.
물질적 우주는 지구, 태양, 별, 그리고 행성들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우주를 넘어서 또 다른 본성이 있으며 영적입니다.
아뱍땃 사나따나하. 물질적 본성은 시작과 끝이 있지만 영적 본성은 사나따나하, 즉 영원합니다. 시작과 끝도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구름이 지나가며 하늘을 가리게
되고 멀리서 보면 하늘을 뒤덮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늘
전체의 아주 미미한 부분만을 가렸을 뿐입니다.
우리가 매우 작아서 몇백 마일만 가려도 하늘 전체가 구름에 뒤덮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모든 물질적 우주는
거대한 영적 창공에 있는 아주 작고 하찮은 구름에 불과합니다.
물질계는 마핫-땃뜨바(mahat-tattva)라고 하는 물질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구름이 시작과 끝이 있는 것처럼 물질적 본성도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구름이 걷히고 날이 개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육신은 영혼을 지나가는 구름과도 같습니다. 얼마간 머물다가 부산물을 만들고 쇠퇴하다 사라집니다.
우리가 목격하는 어떤 물질적 현상도 탄생과 성장, 얼마간의 머뭄, 부산물의 생산, 쇠퇴, 소멸이라는 이 여섯 가지 형태를 겪게 되어 있습니다. 끄리쉬나께서는 이런 구름의 본성과 같은 변화를 넘어서는 영적 본성이 있고 이것은 영구하다고 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물질적 본성이 소멸할 때 아뱍땃 사나따나하는 그대로 남습니다.
베다 문헌에는 물질계와 영계에 관한 방대한 양의 정보가 들어있습니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의 제2권에는 영적 창공과 그곳 거주자들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영적 비행기라는 것도 있어
해방된 존재들이 그것을 타고 번개와 같이 여행한다는 정보까지도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실제로 그곳에도 존재합니다. 이곳 물질적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영적 하늘에 존재하는 것들의 모방이고 그림자입니다.
영화관에서 그저 현실의 모사나 쇼를 보는 것처럼 물질계는 실제를 모형으로 한 대상들의 조합일 뿐이라고 스리마드 바가바땀은 말합니다. 진열장에 있는 여자 마네킹이 여자를 모형으로 한 것처럼 말입니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모두 이 마네킹이 모형이라고 압니다. 스리다라 스와미(Śrīdhara Svāmī)는 영계가 실제이지만 모사품인 이 물질계는 실제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실제의 의미를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실제란 정복될 수 없는 존재이며 영원함을 뜻합니다.
나사또 비댜떼 바보 nāsato vidyate bhāvo
나바보 비댜떼 사따하 nābhāvo vidyate sataḥ
우바요르 아삐 드리쉬똔따스 ubhayor api dṛṣṭo 'ntas
뜨브 아나요스 땃뜨바-다르시비히 tv anayos tattva-darśibhiḥ
“진리를 꿰뚫어 보는 사람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육신)은
영구성이 없고 영원한 것(영혼)은 멈춤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이 둘의 본성을 통찰함으로써 이러한 결론을 내린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 2.16》
진정한 즐거움은 끄리쉬나인 반면, 물질적 즐거움은 일시적이고
진짜가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자들은 그림자의
즐거움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목표는 영적 하늘을 구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이것을 알지 못한다고 스리마드 바가바땀은 지적합니다. 인간 삶은 실제를 이해하고 그곳으로 이동하기 위함을 의미합니다. 모든 베다 문헌들은 이 어둠 속에 남아 있지 말 것을 가르칩니다. 물질계의 본성은 어둠이지만 영계는 빛으로 가득하고 이 빛은 불이나 전기의 도움 없이 스스로 빛납니다.
끄리쉬나께서 바가바드 기따 15장을 통해 힌트를 주십니다.
《바가바드 기따 2.16》
나 딷 바사야떼 수르요 na tad bhāsayate sūryo
나 샤샹꼬 나 빠바까하 na śaśāṅko na pāvakaḥ
얃 가뜨바 나 니바르딴떼 yad gatvā na nivartante
딷 다마 빠라맘 마마 tad dhāma paramaṁ mama
“지고한 내 왕국은 태양이나 달, 불이나 전기 없이 빛나느니라.
그곳에 도달한 자는 단연코 이 물질계에 되돌아오지 않는다.”
영적 세계를 발현되지 않은 곳이라고 하는 이유는 물질적인 감각으로 인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뱍또 ‘끄샤라 이띠 욱따스 avyakto 'kṣara ity uktas
땀 아후후 빠라맘 가띰 tam āhuḥ paramāṁ gatim
얌 쁘라뺘 나 니바르딴떼 yaṁ prāpya na nivartante
딷 다마 빠라맘 마마 tad dhāma paramaṁ mama
“그 최상의 보금자리는 발현하지 않았고 결코 틀리지 않으며 최상의 목적지이다. 그곳에 도달하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바로 그곳이 내 최상의 보금자리이니라.” 《바가바드 기따 8.21》
위대한 여정이 이 절에 설명되어 있습니. 외부 공간을 통과하고
물질적 우주를 횡단하여 그 표면을 뚫고 영적 하늘에 들어가야
합니다. 빠라맘 가띰, 그 여정은 최상의 여정입니다.
지구에서 몇천 마일을 갔다가 다시 돌아올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여정은 별로 영웅적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물질적 우주 전체를 뚫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주선이 아니라 끄리쉬나 의식으로 가능합니다.
끄리쉬나 의식에 몰입해 있고 죽음의 순간 끄리쉬나를 생각하는 자는 즉시 그곳으로 옮겨집니다. 영적 하늘에 가서 행복과 지식으로 가득 찬 영원한 삶을 살기를 조금이라도 바란다면 지금부터
삿-칫-아난다 몸을 계발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끄리쉬나는 삿-칫-아난다 몸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스바라 빠라마하 끄리쉬나 삿-칫-아난다-비그라하(īśvaraḥ paramaḥ kṛṣṇaḥ sac-cid-ānanda-vigrahaḥ), 그리고 우리 또한 당신과 비슷한 영원함과 지식, 행복으로 가득 찬 몸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 몸은 아주 작고 물질이란 옷으로 덮여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가짜 옷을 버릴 수 있다면 영적 왕국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영적 세계를 얻는다면 돌아올 필요가 없습니다(얌 쁘라뺘 나 니바르딴떼).
모두가 그 ‘다마 빠라맘’, 즉 끄리쉬나가 계신 최상의 보금자리로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끄리쉬나 당신이 우리에게 직접 오셔서 지침서로 삼을 베다 지식을 주셨고 당신의 진실한 대표자들도 보내주셨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 편의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 최상의 보금자리에 도달한 자들에게 참회와 고행, 명상 등의
과정은 더는 필요치 않고, 그곳에 도달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모든 종류의 참회와 고행은 불필요한 시간 낭비가 됩니다.
인간 형태의 삶은 이 혜택을 얻는 계기이고, 인간으로 태어난 자들에게 이 삶의 완성을 이루게 하는 것이 국가와 부모, 선생, 보호자들의 의무입니다. 개와 고양이처럼 단순히 먹고 자고 성교하고
다투는 것은 문명이 아닙니다. 이 인간 형태의 삶을 올바로 활용해야 하고 이 지식을 이용해 끄리쉬나 의식이 되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그 결과 하루 24시간 끄리쉬나에 몰입하게 되고 죽음의 순간
즉시 영적 하늘로 옮겨질 수 있습니다.
뿌루샤하 사 빠라하 빠르타 puruṣaḥ sa paraḥ pārtha
박땨 라뱌스 뜨브 아난야야 bhaktyā labhyas tv ananyayā
야샨따하-스타니 부따니 yasyāntaḥ-sthāni bhūtāni
예나 사르밤 이땀 따땀 yena sarvam idaṁ tatam
“누구보다 위대한 최고인격신은 순수한 헌애로 얻어진다.
나는 내 보금자리에 머물고 있으나 동시에 모든 곳에 편만하며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 《바가바드 기따 8.22》
그 최상의 보금자리에 이르는 데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여기에 명시되어 있듯이 그곳에 이르는 과정은 박띠(bhakti)입니다.
‘박땨(Bhaktyā)’는 봉헌과 지고한 주에 대한 복종을 의미합니다. 박땨의 어원은 ‘바즈(bhaj)’로 봉사를 의미합니다.
나라다-빤짜라뜨라(Nārada Pañcarātra)가 제시하는 박띠의
정의는 “명칭에서 벗어남”입니다. 육신 때문에 생겨나고 육신이
바뀔 때마다 항상 변하는 이 명칭들, 순수한 영혼에 부수되는 이 모든 명칭에서 벗어날 결심을 한 한 사람은 박띠를 이룰 수 있습니다. 박띠는 우리가 순수한 영혼이며 전혀 물질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그저 영혼을 감싸고 있는 이 육신이 아니라 다사(dāsa), 즉 끄리쉬나의 종입니다. 진정한 자아의 상태에서 끄리쉬나를 섬기는 자가 박따(bhakta)입니다. 흐리쉬께나 흐리쉬께샤 세바남(Hṛṣīkeṇa hṛṣīkeśa-sevanam). 우리의 감각이 물질적 명칭에서 벗어날 때 그 감각을 감각의 주인 흐리쉬께샤, 곧 끄리쉬나를 섬기는 데 활용할 수 있습니다.
루빠 고스와미께서 지적하셨듯이 끄리쉬나를 호의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물질적인 목적이나 이득을 위해 신을 섬깁니다. 물론 물질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신께 가는 자가 아예
가지 않는 자들보다 낫지만 물질적인 혜택을 바라지 않고 절대신을 섬겨야 합니다. 물론 끄리쉬나는 무한하고 당신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바가바드 기따가 특정적으로 현존합니다.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 지식을 얻고 무엇이 끄리쉬나를 기쁘게 하는지 알고 당신의 즐거우시도록 호의적으로 봉헌해야 합니다. 끄리쉬나 의식은 방대한 문헌을 지닌 위대한 과학으로 이것을 활용하여 박띠를 이뤄야 합니다.
뿌루샤 사 빠라하. 영적 하늘에는 절대신이 지고한 인간으로 계십니다. 그곳에는 스스로 빛나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행성이 있고 각 행성은 끄리쉬나가 거처하는 곳의 확장입니다.
끄리쉬나는 네 팔을 하고 계시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름이 있습니다. 그 모두는 사람이지 비인성적 존재가 아닙니다.
이 뿌루샤들(puruṣas), 즉 인격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도전이나
철학적 추측 혹은 관념적 제조나 체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결과에 얽매이는 행위를 하지 않는 박띠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뿌루샤하, 최고의 인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야샨따하스타니 부따니 예나 사르밤 이담 따땀.” 모든 생명체와 모든 것이
당신 안에 있지만 당신은 그들 밖에 있고 모든 곳에 편만하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그는 마치 태양과 흡사합니다.
태양은 한곳에 있지만 빛을 통해 모든 곳에 존재합니다.
절대신은 당신의 다마 빠라맘에 거처하시지만 당신의 에너지는
모든 곳에 퍼져있습니다. 태양과 태양광선이 다르지 않듯이 당신과 당신의 에너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끄리쉬나의 에너지와 끄리쉬나가 다르지 않으므로 우리가 봉헌에 앞서게 되면 모든 곳에서
끄리쉬나를 볼 수 있습니다.
쁘레만자나-추리따-박띠-빌로짜네나
premāñjana-cchurita-bhakti-vilocanena
산따 사다이바 흐리다예슈 빌로까얀띠
santaḥ sadaiva hṛdayeṣu vilokayanti
“저는 원초적 최고인격신 고빈다를 숭배합니다.
신성(神性)을 향한 사랑의 연고가 눈에 발린 순수한 헌애자들은
그들의 가슴 속에서 언제나 당신을 봅니다.”
《브라흐마 삼히따 5.38》
절대신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찬 자들은 그들 앞에 계시는 절대신을 끊임없이 봅니다. 어젯밤에는 봤지만 오늘은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들에게 끄리쉬나는 항상 존재하고 끊임없이 인지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당신을 볼 수 있는 눈을 발전시켜야 할 뿐입니다.
물질적 감각으로 뒤덮인 물질적 속박 때문에 무엇이 영적인지 이해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이런 무지는 하레 끄리쉬나를 구송으로 제거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잠에 빠져든 자는 소리 진동으로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또는 고의적으로 보지 않고 느끼지 않고 냄새를 맡지 않을 수는 있지만 청각은 너무나 두드러져 잠자는 자도 그저 소리의 진동으로 깨어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적 접촉으로 현재 너무나 강력한 수면 상태에 들어가 있다고 해도 ‘하레 끄리쉬나, 하레 끄리쉬나, 끄리쉬나 끄리쉬나, 하레 하레/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 라는 이 초월적인 소리 진동으로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하레 끄리쉬나는 절대신과 당신의 에너지를 부르는 말입니다. ‘하레’는 에너지를, ‘끄리쉬나’는 절대신을 의미하므로 우리가 하레 끄리쉬나 구송은 “오, 절대신의 에너지시여, 오 절대신이시여, 제발 저를 받아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이것 외에 절대신께서 받아주실 다른 기도는 없습니다. 매일의 양식이 있음에도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하레 끄리쉬나는 절대신을 부르며 당신이 우리를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라는 부탁입니다. 주 짜이따냐 마하쁘라부 당신
스스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이 난다-따누자 낀까람 ayi nanda-tanuja kiṅkaraṁ
빠띠땀 맘 비샤메 바밤부다우
patitaṁ māṁ viṣame bhavāmbudhau
끄리빠야 따바 빠다-빤까자- kṛpayā tava pāda-paṅkaja-
스티따-둘리-사드리샴 비찐따야
sthita-dhūlī-sadṛśaṁ vicintaya
“난다 마하라자의 아들이시여, 저는 당신의 영원한 종이지만
어떤 연유로 생과 사라는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러니 이 죽음의 바다에서 저를 건져내시어
당신의 연꽃 같은 발에 작은 티끌로 붙여두소서.” 《식샤쉬따까 5》.
바다에 빠진 자에게 남은 단 하나의 희망은 누군가가 와서 건져내 주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와서 몇 발자국만 물 밖으로 끌어내 주어도 즉시 구제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삶과 죽음의 바다에서
끄리쉬나 의식의 과정을 통해 끌어올려 지면 그 즉시 구제됩니다.
비록 절대신의 초월적 본성과 이름, 명성, 활약을 인지할 수 없지만 끄리쉬나 의식을 확립하면 점차 절대신이 우리 앞에 당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절대신을 볼 수 없지만 자격을 갖추면 절대신께서 당신을 드러내 주실 것이고 그러면 당신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 누구도 절대신께 자기 앞에 나타나 춤추라고 명령할 수 없지만 끄리쉬나께서 기꺼이 우리 앞에 당신을 드러내 보여 주시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끄리쉬나께서는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 당신에 대한 정보를 친히
주셨고 그것을 의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느끼고 이해해야 할 뿐입니다. 바가바드 기따는 절대적 경지에서 전해졌으므로 이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예비 단계의 자격도 필요치 않습니다.
끄리쉬나의 이름을 구송하는 단순한 과정이 우리가 누구인지,
절대신은 어떠한지, 또한 물질계와 영계는 무엇인지, 왜 우리가
속박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와 그 외 모든 것들이 단계적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사실 믿음과 계시의
과정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매일 우리가 자신 있게 믿는
어떤 것들이 나중에 드러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인도로 가게 될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인도행 비행기 표를 살 것입니다.
왜 그 표를 사는 걸까요? 우리는 그저 아무한테나 돈을 주지 않습니다. 항공사는 정식인가를 받았고 비행기 또한 그러하기 때문에 믿음이 형성되었습니다. 믿음 없이는 삶의 일상에서 한 걸음조차 나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믿음을 가져야 하지만 권위
있는 것에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맹목적으로 믿을 것이 아니라
인정된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가바드 기따는 인도에 있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경전으로
인정받았고 인도 밖에서는 수많은 학자와 신학자들, 그리고 철학자들이 권위 있는 위대한 저술이라고 인정합니다. 과학자이자 교수였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규칙적으로 바가바드 기따를 읽었습니다.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 절대신의 왕국인 영적 우주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삶과 늙음, 질병, 죽음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로 옮겨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기쁘지 않은가요?
그런 곳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분명 그곳에 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아무도 늙고 싶지 않고 아무도 죽고 싶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런 고통 없는 곳이 우리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것을 원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그런 것을 원할 특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는 영원하고 행복하며 지식으로 가득한 존재이지만 물질적인 덫에 갇혀 참된 자아를 잊고 있습니다. 바가바드 기따는 우리 본래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는 혜택을 제공합니다.
샹까라 철학자(Śaṅkarites)과 불교도들은 세상을 넘어서면 공허하다고 하지만 바가바드 기따는 이런 실망감을 안겨주지 않습니다. 공사상은 그저 무신론자를 창조해 냈을 뿐입니다.
우리는 영적 존재이고 즐거움을 원하기에 미래가 공허하다면 즉시 현재의 물질적 삶을 즐기려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비인성주의자들은 공사상을 논하면서 물질적 삶을
즐길 수 있는 한 최대한 즐기고 있습니다. 이런 억지 추측을 즐길 수는 있겠지만 거기서 어떤 영적 혜택도 얻을 수 없습니다.
브라흐마-부따하 쁘라산나뜨마 brahma-bhūtaḥ prasannātmā 나 쇼짜띠 나 깡끄샤띠 na śocati na kāṅkṣati
사마하 사르베슈 부떼슈 samaḥ sarveṣu bhūteṣu
맏-박띰 라바떼 빠람 mad-bhaktiṁ labhate parām
“따라서 초월적 경지에 오른 자는 즉시 최고의 브라흐만을 깨닫게 된다. 그런 자는 더는 어떠한 것에도 한탄하지 않고 무엇을 바라지도 않으며 모든 생명체를 똑같이 대하느니라.
바로 그러한 경지에 올라야 나를 향한 순수한 봉헌을 하게 되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18.54》
헌애하는 삶의 과정을 걷고 있고 끄리쉬나를 기쁘게 섬기는 자는 자연히 물질적 쾌락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박띠에 몰입한 사람들의 특징은 끄리쉬나로 완전히 만족하는 것입니다.
제5장
끄리쉬나와의 교제
더 나은 것을 가지게 되면 더 못한 모든 것을 자연히 포기하게 됩니다. 우리는 즐거움을 원하지만 비인성주의와 공사상이 물질적 쾌락에 중독되게 하는 환경을 만들어냈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볼 수 있는 지고한 인간(뿌루샤하 사 빠라하)과의 관계를 통해 즐거움을 느껴야 합니다. 영적 하늘에서 우리는 몸소 절대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놀 수 있으며 함께 식사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행위는 박땨, 즉 초월적인 사랑의 봉헌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봉헌에는 결코 불순함이 없어야 하고 물질적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절대신과 하나가 되기 위해 사랑하는 것 또한 불순한 목적의 하나입니다.
영적 하늘과 물질적 하늘의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는 영적 하늘에서는 그 행성의 우두머리나 지도자에게 경쟁자가 없다는 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영적 행성에서의 주된 인격은 스리 끄리쉬나의 전체적 확장입니다. 절대신과 그의 다양한 현현은 모든 바이꾼따 행성에 두루 주재하십니다. 지구에서는 대통령이나 장관 같은 직책에 경쟁이 있지만 영적 하늘에서는 모두 최고인격신이 최고라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절대신을 인정하지 않고 대적하려고 하는 자는 마치 감옥과 같은 물질적 우주에 놓이게 됩니다.
도시에 감옥이 있고 그 감옥은 전체 도시의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물질적 우주는 속박된 영혼들의 감옥입니다.
그것은 영적 하늘의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감옥이 도시
안에 있는 것처럼 이 물질적 우주 또한 영적 하늘 안에 존재합니다.
영적 하늘의 바이꾼따 행성 거주자들은 모두 해방된 영혼입니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은 그들의 모습이 절대신의 형상과 완벽히 같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 행성들 중 어떤 곳에서는 절대신이 두 팔로 현현하시고 다른 행성에서는 네 팔을 한 형상을 보이십니다.
이 행성들의 거주자들은 절대신과 같이 두 팔 혹은 네 팔을 하기에 그들과 최고 인격신을 구별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영적 세계에는 다섯 종류의 해방이 있습니다.
사유쟈-묵띠(Sāyujya-mukti)는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최고 인간의 비인성적 존재와 합쳐지는 형태의 해방입니다.
또 다른 해방은 사루뺘-묵띠(sārūpya-mukti)로 절대신과 완벽히 같은 형상을 받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것은 살로꺄-묵띠(ālokya-mukti)로 절대신과 같은 행성에서 살 수 있습니다.
사르쉬띠-묵띠(sārṣṭi-mukti)로는 절대신이 소유한 풍요로움과 비슷한 풍요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종류의 해방은 아르주나가 끄리쉬나의 친구로 항상 함께했던 것처럼 절대신의 동반자로서 항상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다섯 종류의 해방 중 어떤 것이라도 얻을 수 있지만 사유자-묵띠, 즉 절대신의 비인성적 측면에 합쳐짐은 바이쉬나바 헌애자로 인정받지 않습니다. 바이쉬나바는 절대신을 있는 그대로 숭배하고 당신을 섬기기 위해 분리된 개별성을 유지하는 반면 마야바디(Māyāvādī), 즉 비인성적 철학자들은 자신의 개별성을 잃고 절대신의 존재와 합쳐지고자 합니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스리 끄리쉬나께서도, 바이쉬나바 철학자들의 사제 전수도 이런 합체를 절대
권장하지 않습니다. 주 짜이따냐 마하쁘라부께서는 이 주제에 대해 식샤쉬따까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나 다남 나 자남 나 순다림 na dhanaṁ na janaṁ na sundarīṁ 까비땀 바 자갓-이샤 까마예 kavitāṁ vā jagad-īśa kāmaye
마마 잔마니 잔마니스바레 mama janmani janmanīśvare
바바딷 박띠르 아하이뚜끼 뜨바이
bhavatād bhaktir ahaitukī tvayi
《식샤쉬따까 4》
“오 전지전능한 주여! 저는 부를 축적하고 싶은 바람도,
아름다운 여자를 즐길 욕망도 없고 수많은 추종자 또한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생을 거듭해 당신을 향해
원인 없는 순수한 봉헌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 짜이따냐 마하쁘라부께서는 “생을 거듭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생을 거듭한다면 해방이란 없습니다.
해방되면 영적 행성을 얻거나 절대신의 존재 속으로 합쳐집니다. 두 경우 모두 물질계에 다시 태어날 여지란 없습니다.
하지만 짜이따냐 마하쁘라부께서는 자신이 해방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끄리쉬나 의식으로 절대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헌애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동물의 세계에서 태어날지 인간 세계에서, 혹은 데바의 세계에서 태어날지 등에 대해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절대신을 잊지 않고 항상 당신을 향한
초월적인 봉헌에 임할 수 있기만을 기도할 뿐입니다.
이것이 순수한 헌애의 특징입니다. 물론 헌애자는 어디에 있든,
심지어 이 물질적 육신으로 사는 동안에도 영적 왕국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신께 자신들의 개인적 발전이나 평안을 위한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습니다.
비록 스리 끄리쉬나께서 당신께 헌신적인 자들은 당신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하셨지만 다른 방법의 요가를 행하는 요가행자들에게는 위험 요소가 존재합니다. 그런 자들을 위해 바가바드 기따(8.23)에서 총체 육신을 떠나는 적절한 시간에 대한 지침을 내려주십니다.
야뜨라 깔레 뜨브 아나브릿띰 yatra kāle tv anāvṛttim
아브릿띰 짜이바 요기나하 āvṛttiṁ caiva yoginaḥ
쁘라야따 얀띠 땀 깔람 prayātā yānti taṁ kālaṁ
박샤미 바라따르샤바 vakṣyāmi bharatarṣabha
“오 바라따 가문의 최고여, 이제 네게 이 세상을 떠나는 여러 다른 시간에 따라 이 세상에 돌아오고, 돌아오지 않는 것을 설명할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 8.23)
여기에서 끄리쉬나께서 설명하시기를 특정한 시점에 육신을 떠날 수 있으면 해방되고, 절대 물질계로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한편으로 다른 때에 죽으면 되돌아와야 한다고 지적하십니다. 여기에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존재하지만 항상 끄리쉬나 의식에
있는 헌애자는 절대신을 향한 헌애 덕분에 우연한 가능성과는 상관없이 끄리쉬나의 보금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받습니다.
아그니르 죠띠르 아하하 슈끌라하 agnir jyotir ahaḥ śuklaḥ
샨-마사 웃따라야남 ṣaṇ-māsā uttarāyaṇam
마뜨라 쁘라야따 갓찬띠 tatra prayātā gacchanti
브라흐마 브라흐마-비도 자나하 brahma brahma-vido janāḥ
“최상의 브라흐만을 아는 자는 불의 신 영향 아래 빛 속에서 상서로운 순간에, 그리고 달이 차는 보름 기간과 태양이 북반구를 지나는 6개월 동안에 이 세상을 떠난다.” 《바가바드 기따 8.24》
태양은 북반구에서 6개월, 남반구에서 6개월의 시간을 보냅니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을 통해 행성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태양도 움직인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태양이 북반구에 있을 때 죽으면 해방을 얻습니다.
두모 라뜨리스 따타 끄리쉬나하 dhūmo rātris tathā kṛṣṇaḥ
산-마사 닥쉬나야남 ṣaṇ-māsā dakṣiṇāyanam
따뜨라 짠드라마삼 죠띠르 tatra cāndramasaṁ jyotir
요기 쁘라뺘 니바르따떼 yogī prāpya nivartate
슈끌라-끄리쉬네 가띠 히 에떼 śukla-kṛṣṇe gatī hy ete
자가따 샤스바떼 마떼 jagataḥ śāśvate mate
에까야 야띠 아나브릿띰 ekayā yāty anāvṛttim
안야야바르따떼 뿌나하 anyayāvartate punaḥ
“연기 속에서, 밤 동안, 그리고 달이 기우는 보름 동안, 또는 태양이 남반구를 지나는 동안 이 세상을 떠난 자와 달에 이르는 신비주의자는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느니라.
베다에 따르면 이 세상을 떠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빛 속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둠 속에서이다.
빛 속에서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 떠나면
되돌아오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8.25~26》
이것은 모두 우연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알지 못하고 어느 때라도 사고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끄리쉬나 의식을 확립한 박띠 요가행자들에게 우연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항상 확실합니다.
나이떼 스리띠 빠르타 자난 naite sṛtī pārtha jānan
요기 무햐띠 까스짜나 yogī muhyati kaścana
따스맛 사르베슈 깔레슈 tasmāt sarveṣu kāleṣu
요가-육또 바바르주나 yoga-yukto bhavārjuna
“헌애자들은 이 두 가지 길을 알고 있지만 오 아르주나,
그들은 절대 당혹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항상 헌애에 전념한다.” 《바가바드 기따 8.27》
죽음의 순간에 끄리쉬나를 생각할 수 있으면 즉시 끄리쉬나의 보금자리로 옮겨진다는 사실은 이미 규명되었습니다.
안따-깔레 짜 맘 에바 anta-kāle ca mām eva
스마란 묵뜨바 깔레바람 smaran muktvā kalevaram
야 쁘라야띠 사 마드-바밤 yaḥ prayāti sa mad-bhāvaṁ
야띠 나스띠 아뜨라 삼샤야하 yāti nāsty atra saṁśayaḥ
아비아사-요가-육떼나 abhyāsa-yoga-yuktena
쩨따사 난야-가미나 cetasā nānya-gāminā
빠라맘 뿌루삼 디비암 paramaṁ puruṣaṁ divyaṁ
야띠 빠르타누찐따얀 yāti pārthānucintayan
“그리고 생의 마지막에 나만을 기억하며 육신을 떠나는 자는
누구나 즉시 나의 본성을 얻게 될 것이니라.
이에 관해 일말의 의심도 없을지어다.
최고인격신인 나를 명상하며 헌애의 길에서 벗어남 없이
마음을 항상 나를 기억하는데 두는 자는 오 빠르타(아르주나),
반드시 나에게 이르리라.” 《바가바드 기따 8.5, 8.8》
끄리쉬나를 명상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르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하-만뜨라
하레 끄리쉬나, 하레 끄리쉬나, 끄리쉬나, 끄리쉬나, 하레 하레 /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를 구송함으로써
끄리쉬나 의식을 실천하면 재빨리 그런 명상을 할 수 있습니다.
끄리쉬나와 당신의 이름은 다르지 않고 끄리쉬나와 당신의 초월적인 보금자리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소리의 진동으로 끄리쉬나께서 우리와 함께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갈 때 하레 끄리쉬나를 구송하면 끄리쉬나가 우리와 함께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고개를 들어 달을 올려봤을 때 그달이 마치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끄리쉬나의 하위 에너지인 달이 우리와 함께 가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의 이름을 부르는 데 끄리쉬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
당연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끄리쉬나께서 함께해 주시겠지만 우리도 ‘그’와 함께할 자격을 갖춰야 합니다. 그러나 항상 끄리쉬나를 향한 생각에 몰두에 있다면 끄리쉬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주 짜이따냐 마하쁘라부께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남남 아까리 바후다 니자-사르바-샥띠스
nāmnām akāri bahudhā nija-sarva-śaktis
따뜨라르삐따 니야미따하 스마라네 나 깔라하
tatrārpitā niyamitaḥ smaraṇe na kālaḥ
에딷리시 따바 끄리빠 바가반 마마삐
etādṛśī tava kṛpā bhagavan mamāpi
두르다이밤 이드리샴 이하자니 나누라가하
durdaivam īdṛśam ihājani nānurāgaḥ
“오 주님! 당신의 신성한 이름 하나만으로도 생명체에게 모든 축복을 내리십니다. 그렇기에 당신에겐 끄리쉬나, 고빈다 같은 수백만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 초월적인 이름들 속에 당신의 모든 초월적 에너지를 부여하셨고, 이 신성한 이름들을 구송하는데 어떤 엄중한 규칙도 없습니다.
오 주님! 당신은 친절히도 이 신성한 이름들을 통해 당신께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해 주셨지만, 불행히도 저는 그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식샤쉬따까 2》
그저 구송하는 것만으로도 끄리쉬나와 개인적 교제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완전한 혜택을 얻습니다. 깨달은 영혼으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끄리쉬나 당신의 화신인 주 짜이따냐 마하쁘라부께서는 현재와 같은 깔리(Kali) 시대에 자아 깨달음을 위한 진정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지만 끄리쉬나께서는 매우 친절하시어 유가-다르마(yuga-dharma), 즉 이 시대를 위한 깨달음의 방법으로
활용하도록 샤브다(śabda, 소리 화신)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방법을 실천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자격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산스끄리뜨어조차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레 끄리쉬나라는 소리 진동 자체가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므로
산스끄리뜨어나 다른 어떤 지식 없이도 누구나 즉시 구송할 수 있습니다.
베데슈 야계슈 따빠하수 짜이바 vedeṣu yajñeṣu tapaḥsu caiva 다네슈 얏 뿐야-팔람 쁘라디쉬땀
dāneṣu yat puṇya-phalaṁ pradiṣṭam
아뗴띠 땃 사르밤 이담 비디뜨바 atyeti tat sarvam idaṁ viditvā 요기 빠람 스타남 우빠이띠 짜댬
yogī paraṁ sthānam upaiti cādyam
“봉헌의 길을 받아들인 자들이 베다를 공부하거나 어려운 제식을 거행하고 자선을 하며 철학적이거나 결실적 행위를 함으로써 오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봉헌을 계속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달성하게 되고 결국 최상의 보금자리에 이르게 된다.” 《바가바드 기따 8.28》
여기에서 끄리쉬나께서는 모든 베다 지식은 절대신께 돌아가는
삶의 궁극적 목적을 달성할 것을 지시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경전도 이를 목적으로 합니다.
또한, 이것은 모든 종교 개혁가들 혹은 아짜리아들(ācāryas)의
메시지였습니다. 서구 사회를 예로 들면 예수님께서도 같은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과 마호메트도 그러했습니다. 어느 분도 이 물질적 세상에 영원히 남으라고 권장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라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리고 상황과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약간의 차이점은 있겠지만 우리는 이 물질계가 아니라 영적 세계에 있어야 할 존재라는 주요 원칙은 진정한 초월자들 모두가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영혼이 가슴 깊숙히 갈망하는 것은 생과 사를 넘은 끄리쉬나의 세계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지식 향상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이상으로,
영적 스승 스릴라 쁘라부빠다께서 저술하신 ‘생과 사를 넘어서’를 마칩니다.
- 하레 끄리쉬나.https://vedabase.io/ko/library/bb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