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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Right Life. 쉬바푸리 바바, 올바른 삶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3.31|조회수111 목록 댓글 1

THE RIGHTLIFE or SWADHARMA

올바른 삶

Sir, why are we so unhappy?

Q: 선생님, 우리들은 왜 불행합니까?

Because you don't live the Right Life.

A: 그것은 당신들이 올바른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What is the Right Life?

Q: 무엇이 올바른 삶입니까?

It is a life with some definite noble aim. It is a planned and discriminative life with duties necessary and helpful for achieving the aim in the shortest possible time.

A: 명확하면서도 고귀한 목적을 가진 삶입니다.

가능한 한 짧은 시간 안에 목적을 성취하는 데 필수적이고

유용한 의무들로 이루어진 계획되고 분별력 있는 삶입니다.

What is the greatest aim of life?

Q: 삶의 가장 위대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To see Truth or God.

A: 신 또는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Why should we want to see Truth?

Q: 왜 우리는 진리를 갈구해야 합니까?

Because before that we cannot be omnipotent, omniscient and omnipresent, or totally free from all troubles for ever.

A: 진리를 알기 전에는 모든 문제들로부터 영원히 완전하게

자유롭지도 전지, 전능, 편재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What are the chief elements of the Right Life?

Q: 올바른 삶의 주된 요소는 무엇입니까?

Discrimination and Devotion.

A: 분별(discrimination)과 헌신(devotion)입니다.

Please explain them.

Q: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You see that for maintaining body, you have to discharge certain duties towards nature, towards family society, government and towards profession. All these should be planned and done with dexterity. This is physical discipline. Then for making mind strong, you have to cultivate virtues like charity, angerlessness, truthfulness, self-control, fearlessness, patience, etc.

This is moral discipline. Physical and moral disciplines together make Discrimination. Rest of the time you should devote to thinking of Truth and various ways without feeling monotonous. This is Spiritual discipline or Devotion. The most important thing is to see that you do not waste your time on any other work.

A: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 가족, 사회, 정부, 직업 등에 대해서 어떤 의무를 이행해야만 합니다. 이것들은 잘 짜여진

계획과 철저한 실천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육체적 훈련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비, 분노하지 않음, 진실성, 자아-조절, 두려움 없음, 인내 등의 미덕등을 길러야 합니다. 이것은 도덕적 훈련입니다. 육체적인 훈련과 도덕적인 훈련의

둘이 합쳐져서 분별을 만드는 것입니다. 나머지 시간은 진리에

대한 생각과 단조로움을 느끼지 않는 다양한 정신활동방법에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훈련 또는 헌신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시간을 다른 일에 낭비하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Could you give me some hints on meditation? ,

Q: 명상에 대하여 이야기 해주십시오.

Meditation has three stages: Samadhi, Dharana and Dhyana. Samadhi is concentration on Truth. Dharana is thinking of Truth historically. Dhyana is thinking of any one particular object for a long time. In another sense, meditation is profound thinking. It makes our health better, gives extremely helpful ideas and is quite essential for our Spiritual progress. Meditation is a madman's business. So it is best to have a separate room for it. It should be neat and clean. Artistic pictures of Rama, Krishna and other Realised Souls can be kept there for the sake of inspiration. Incense-burning and sacrificial fires can also be taken to for they purify both air and mind.

A: 명상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진리에 집중하는 사마디,

진리를 역사적으로 생각하는 다라나, 한 특정물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하는 디야나 등입니다. 다시 말하면, 명상은 심오한 사고입니다. 명상을 하면 건강이 더 좋아지고, 영적인 진보에

필수적이며 좋은 사고방식을 갖게 됩니다. 명상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사람들의 일이기 때문에 좀 떨어진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 장소는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어야 합니다.

라마, 크리슈나 또는 그밖의 깨달은 영혼들의 그림이 있다면

영감을 얻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제단을 마련하고 향을 피울 수 있다면 공기와 마음을 정화할 수도 있습니다.

What is the best time for meditation?

Early in the morning. After answering the call of nature and taking a bath, simple Pranayama should be taken twice or thrice (though not more than ten times a day). An easy posture should then be occupied with body totally erect and meditation begun.

 

Are meditation and concentration the same thing?

Yes, because both signify single-minded consciousness. No, because in meditation there is consciousness of both external world and internal world while in concentration there is consciousness of internal world only.

What is your idea about morality?

Q: 도덕성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Conceptions of morality differ according to time and place. For maintaining the Right Life, we can break any rule of morality. The only universal morality is to commit no act of omission or commission, to live the Right Teaching perfectly and not to do anything outside the Teaching. We must not be dogmatic about other forms of morality. Social stability should be maintained even against moral laws. However, as a rule, moral virtues like those indicated at the beginning of the 16th chapter of the Gita must be practiced.

 

A: 도덕성에 대한 개념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며,

올바른 삶을 위해서는 도덕성의 규법을 깨뜨릴 수도 있습니다.

유일한 우주적인 도덕성은 작위나 부작위의 행위를 하지 않고,

올바른 가르침대로 살며, 가르침에 벗어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도덕성의 다른 형태에 대해서 독단적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때로는 사회의 안정을 위해 도덕규범에 맞설수도 있는 것입니다.

Where can we find teachings about the Right Life at their best?

Q: 올바른 삶에 대해서 가장 좋은 가르침은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습니까?

In the four Vedas. In Ramayana, Bhagavata and Mahabharata also. Ramayana - mainly for disciplining mind. Bhagavata Purana - mainly for disciplining soul. Mahabharata - mainly for disciplining intellect. But always remember that teachings found in books are only general. Particular aspirants need the guidance of a teacher, a Realised Soul. If you want to treat a disease properly, good medical books and well equipped medicine shops are not at all enough. A good physician is quite necessary.

A: 네 권의 [베다]와 마음의 훈련을 주로 다룬[라마야나],

영혼의 훈련을 다룬 [바가바타 푸라나], 지성의 훈련을 다룬 [마하바라타]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책 속의 가르침은 일반적인 것 뿐이며, 구도자는 마땅히 깨달은 스승의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병에 걸렸을 때 아무리 좋은 의학서적과 약국이 있다해도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과 같습니다.

좋은 의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How can we best help the world?

Q: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해야 가장 잘 도울 수 있습니까?

By living the Right Life and practising charity, mental, verbal, bodily and pecuniary. Mentally, we should wish well even to our so-called enemies. We should not speak works likely to hurt others. We should, when possible, try to serve others physically. Then, at least 10% of our income and wealth should be devoted to charity. This, again, should be divided into three parts. One part should go to poor Spiritual practiciants and institutions. Another part should go to deserving cultural people and institutions. The third should go to poor people and institutions, in a simple sense. If people practise charity well, where can be disorder in the world?

A: 올바르게 살고, 정신적으로, 입으로, 몸으로, 금전적으로 자비를 베품으로써 도울 수 있습니다. 정신적으로는 소위 적들에게조차 좋은 생각을 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는 언사를 써서도 안 되며, 가능한 한 육체적으로도 타인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 다음 적어도 우리의 수입과 재산 중 1/10은 자선을 위해 써야 합니다. 또한 이렇게 자비에 쓰는 돈의 1/3은 가난한 영적 수행자들과 연구기관에, 1/3은 가치있는 문화기관에, 1/3은 가난한 자들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자비가 잘 실행된다면 이 세상에 무질서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When shall we realise Truth?

Q: 우리는 언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When you can consciously, continuously and concentratedly ask the question "What is Truth?" or do the like for one Prahar or three hours.

A: 당신이 '진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집중할 수 있을 때입니다.

Some say that we must give up life in order to realise Truth?

Q: 어떤 사람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삶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Yes, but giving up life does not mean merely going to a forest or a cave. Even Buddha said, after realising Truth, that it is not necessary to do that. One can realise Truth even at home if one lives the Right Life. Giving up life means giving up craving for name and fame and enjoyments. Giving up egoism also means giving up life.

A: 그것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 단순히 숲이나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붓다도 진리를 깨친 이후에, 그런 생활이 부적절하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올바른 삶을 산다면 집에서라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름, 명성, 쾌락 등에 대한 열망을 포기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기주의를 포기한다는 것 또한 삶을 포기함을 의미합니다.

What should we do if we want to realise God at once?

Q: 신을 즉시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You must make the 'God or death' determination as Buddha did. If you can stop breathing with the determination to die rather than live without Godrealisation, you may see God even in a few minutes. In other words, love for life must go and love for God or the Beyond must be full. Life should become intolerable without God.

A: 붓다가 한 것처럼 '신이냐 죽음이냐'의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신을 때닫지 못하고 사느니 죽는 것이 낫다고 결정하고 죽을 수 있다면 당신은 아마 단 몇분 안에 신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을 위한 사랑은 버려져야만 하고 신을 위한

사랑 혹은 내세를 위한 사랑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신 없는 삶은 견딜 수 없게 될 것입니다.

This is very difficult.

Q: 그것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Then you should take to Abhyasa and Vairagya (Discrimination and Devotion with increasing emphasis upon God), as Krishna tells Arjuna in the Bhagavad Gita.

A: 그러면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가 아르쥬나에게 말한 것 같이 아브야사와 바이라갸(신을 향한 분별과 헌신)을 행해야 합니다.

Does Lord think that it is possible to realise God even in this age?

Q: 선생님은 이 시대에서 조차 신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Yes, certainly. Only; one has to practise the three disciplines as taught by a Fully Enlightened Soul.

A: 그렇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완전히 깨달은 영혼의 가르침에 따라

앞서의 세 가지 훈련을 행함으로써 가능합니다.

Why is it that all aspirants do not get the guidance of a Fully Enlightened Soul?

Q: 왜 모든 구도자들은 그런 완전히 깨달은 영혼들의 안내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Because they do not really hunger for such a perfect Teacher. It is generally due to inertia, ignorance and arrogance.

A: 그 구도자들 자신이 그런 완전한 스승들을 진실로 갈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무기력, 무지, 교만 등에

기인합니다.

Are there other Realised Souls in the world besides you?

Q: 당신말고도 세상에는 깨달은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까?

Yes. But they live private lives.

A: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적인 삶을 삽니다.

Why don't they come out to help fellow human beings?

Q: 왜 그들은 인간들을 구하러 나타나지 않는지요?

They are All-knowing and know their duties best. Actually, they are doing the greatest possible good. You know Thomas Gray's lines: "Full many a germ of purest ray serene! The dark unfathomed caves of ocean bear". Purity does not need publicity.

A: 그들은 전지하며, 그들의 의무를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능한 최대의 선을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토마스 그레이의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가장 순수한 빛을 발하는 보석들이 고요히 있도다.

대양의 저 헤아리지 못할 어두운 동굴들 속에서 인내하며."

순수성은 대중성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Have you seen God?

Q: 당신은 신을 보았습니까?

Yes.

A: 그렇습니다.

What is God like?

Q: 신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It is not possible to describe or explain God. However, God can be seen or experienced.

A: 신을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신을 보거나 체험할 수는 있습니다.

Our scriptures say,

"One who knows Brahma becomes Brahma".

Is it true?

Yes. But what is generally called Brahma is Purusha.

God is Purushottama.

The Gita refers to it. Then,

how is it that you suffer from diseases, etc.?

Q: 당신이 질병이나 그밖의 것으로 고통받는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I seem to you to suffer but actually I do not suffer, to me they are as enjoyable as cinema for you. All these external sufferings I can enjoy so deeply. I live only in the spirit, not in the body or mind. It is impossible to explain this. Unless you yourself have seen God, you cannot really understand it. No more trouble after seeing Truth or God. After God-realisation, there can be no defect in us, we become omnipotent, omniscient and omnipresent, all-blissful and deathless. But this is also relative Speech. Absolutely speaking, God or Godrealisation is beyond expression‎ or Imagination but within experience.

A: 당신에게는 내가 고통을 겪는것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나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당신이 영화를 보면 즐거운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것들이 즐겁습니다. 이러한 모든 외적인 고통들을 나는 철저히 즐깁니다. 나는 영 안에 살며 육체나 마음 속에 살지 않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신을 보지 않는 한 이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일단 진리 또는 신을 깨달은 후에는 더 이상 고통은 없습니다. 신을 깨달은 이후에는 부족함이 없으며, 전지, 전능, 편재하게

되고, 모든 것이 기쁘고 불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거 또한 상대적인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말한다면 신이나 신을 깨닫는 일은

표현이나 상상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바른 경험 속에 있는 것입니다.

In our scriptures, who lived the Right Life best?

Shukadeva.

Was Krishna God-realised and perfect Teacher of the Right Life?

Q: 크리슈나는 올바른 삶을 살고 신을 깨달은 완벽한 스승입니까?

Yes. His instructions to Arjuna in the Mahabharata and to Uddhava in the Bhaghavata contain the best teachings on the Right Life in brief.

A: 그렇습니다.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아르쥬나에 대한 가르침, [바가바타]에 나오는 우다바에 대한 가르침은 간략하지만 올바른 삶에 대한 가장 좋은 가르침입니다.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instructions?

Q: 두 가르침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Both Arjuna and Uddhava were sincere aspirants but at the times the instructions were called for, Arjuna was much more attached to life than Uddhava. Krishna suited his teachings to the capacities and requirements of his students. Arjuna was taught both Discrimination and Devotion while Uddhava was taught less care of the body and more yearning for God. Uddhava realised God earlier than Arjuna.

A: 아르쥬나와 우다바는 모두 다 신실한 구도자였으나, 아르쥬나가 우다바보다 삶에 더 집착했습니다. 크리슈나는 그의 제자들의 능력과 요구에 따라서 가르쳤는데 아르쥬나는 분별과 헌신 쪽으로 가르쳤고 우다바는 육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신에 대한 열망을 더 갖도록 가르쳤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다바가 아르쥬나보다 더 일찍 신을 깨달았습니다.

Did Uddhava give up his body at Badarikashrama itself?

No, up till now (April, 1955) he has been living in his human body at Badarikashrama even though he has realised God.

Had Adi (the first) Shankaracharya realised God?

Yes.

Then why is it that he laid so much emphasis upon the Adwaitist standpoint unlike Lord Krishna?

Great Teachers appear according to the needs of the times.

Shankaracharya had to be an Adwaitist because during his tune people had grown atheistic under the influence of Buddhism.

Why don't you write a book on your teachings, sir?

Q: 왜 선생님께서는 책을 쓰지 않으십니까?

These are not, so to say, my teachings but God's. They are as old as creation itself. The first-born man was faced with the problem of maintaining body and solving the riddle of life and creation. For this, common sense and all great teachers say, we should minimise our attention to bodily affairs and maximise our enquiry into the riddle till we get the solution. The wonder of wonders is that the very simplicity of the Situation seems to have made it mysterious. So far as my own function is concerned, it must be personal like that of a doctor treating patients. My prescription must be particular to the case in hand because people are in different circumstances. This is why I don't write any book.

A: 나의 이 모든 말들은 나의 것이 아니고 신의 것으로서 창조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입니다. 처음 태어난 사람은 생존의

문제, 그리고 삶의 수수께끼와 창조의 비밀을 해결하려는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모든 위대한 스승들은 육체적인 일에 대한 괌심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해답을 찾을 때까지 수수께끼를 푸는 데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이 상황의 단순함이 그것을 신비롭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해답을 주는 것은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듯 개인적인 일입니다.

나의 처방은 그 개별적인 경우에 따라서 특수한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책을 쓰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You say particular aspirants need the guidance of a teacher, a Realised Soul. But Ramana Maharshi, for example, never had such a teacher?

Q: 당신은 구도자에게는 깨달은 영혼의 스승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면, 라마나 마하리쉬에게는 그러한 스승이 결코 없었지 않습니까?

Ramana's was an exceptional case. He had an extra ordinarily strong mind. But, even then, because of not having the guidance of a Fully Enlightened Soul, he had to go through much unnecessary suffering and made many mistakes in living and teaching.

Ramana was saved by complete Vairagya or total dedication to God.

He saw God only while going off.

A: 라마나의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그는 특별히 강한 마음을 소유 했었지만 완전히 깨달은 영혼의 지도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많은 고통을 경험해야만 했으며 삶과 가르침에 있어서 많은 실수를 범했습니다. 라마나는 신에 대한 전적인 헌신으로 구원됐는데 오직 죽을 때에야 신을 보았습니다.

You say that one who has realised the Purusha will realise God as a matter of course. How?

푸루샤를 깨달은 사람은 당연히 신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군요. 어떻게요?

You see, in the case of such a person, the mind has been killed, so to say, and the Purusha, not mind, has the function of longing for God.

알다시피, 그런 사람의 경우에는 마음이 소멸을 당했으므로,

말하자면, 마음이 아닌 푸루샤는 신을 갈망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When meditation is established, as with Ramana Maharshi you are meditating whatever you may seem to be doing externally.

명상이 확립되면, 라마나 마하라시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외부적으로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명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According to the terminology of the Gita, you become Yogaroodha, a right and ripe candidate for God-realisation.

기타의 용어에 따르면, 여러분은 완전하고 성숙한 신의 실현의

후보인 요가루다가 됩니다.

What about Ramakrishna Paramahamsa?

It is said he frequently entered into Nirvikalpa Samadhi?

Q: 니르비칼파 사마디에 수시로 들어갔다고 하는 라마크리슈나는 어떻습니까?

Ramakrishna was, in a sense, Purity itself. The very thought of such people makes one better. But he did not have a God-realised Teacher. So, though he realised God at length, he had to go through many painful troubles on the way. If he had lived the Right Life, he could have easily avoided them. He was saved by his guidelessness, open-mindedness and total love for God. He saw God only at the point of death. You must be mad after God like Ramakrishna but the madness should not, or need not, be perceptible to others. The Nirvikalpa Samadhi which Ramakrishna entered into is not God-realisation. It is an unconscious state like dreamless sleep. Real Samadhi is conscious. Ramakrishna got the truth about Nirvikalpa Samadhi from me.

A: 라마크리슈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진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신을 깨달은 스승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종극에는 신을 깨달았을리라도 도중에는 많은 고통스런 문제들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만일 그가 올바른 삶을 살았다면 그런 고통은 쉽게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도 역시 신에 대한 전적인

사랑과 개방된 마음, 정직성 등에 의하여 구원받았고 오직 죽는

순간에야 신을 보았습니다. 당신도 라마크리슈나처럼 신에게

미쳐야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삶들에게 알려질 정도여서는 안 됩니다. 라마크리슈나가 들어갔다고 하는 니르비칼파 사마디는 신을 깨달은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꿈 없는 잠처럼 무의식적인 상태입니다. 진정한 사마디는 깨어 있은 상태입니다.

So the guidance of a God-realised teacher is necessary or, at any rate, very useful for an aspirant after God?

Q: 그렇다면 신을 깨달은 스승의 지도는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며 신을 구하는 구도자에게 매우 유용하다는 말씀이십니까?

Yes, in the beginning such a guide is most essential. However, after one following a Guru has understood the teachings and started on the journey to God in right earnest, i.e. with unflinching determination, the Guru too may be physically given up though the faith in the Guru and his guidance has to be kept up till God is realised. In Right Life emphasis is upon the teachings, not upon the teacher.

A: 그렇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필수적입니다.

그렇지만 구루를 따르면서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올바른 정열로 흔들림 없이 신을 찾는 여행길에 오르기 시작하면 신을 깨달을 때까지 그에 대한 신뢰와 그의 지도를 따르면서도 그 구루를 떠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삶 속에서는 스승이 아닌 가르침에 중점이

있습니다.

Are your teachings meant only for the followers of a particular religion like Hinduism? Is it quite essential to belong to a particular religion in order to realise God?

Q: 당신의 가르침은 힌두교와 같은 특정한 종교인들을 위해서만 의미가 있습니까? 신을 깨닫기 위해서는 특정한 종교를 갖는 것이 필수불가결합니까?

No. My teachings are meant for all human beings who long for God, for full perfection, for Absolute Liberation. As I have already said, they are not mine but God's. These teachings are older than the teachings of any particular religion. The Right Life I speak of is a direct way to God. If you know the way to this place and want to come here, you need no guide, you can come by yourself. So if you don't know the Right Life, the direct way to God, you need a religion, not otherwise. The Right Life contains the best in all religions and also transcends them. It is open to all who, being endowed with common sense, are open to it.

A: 아닙니다. 나의 가르침은 신을 갈망하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자유를 갈망하는 온 인류를 위한 것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나의

가르침들은 내 것이 아닌 신의 것이며, 어느 종교의 가르침보다도 더 오래되었습니다. 내가 말한 올바른 삶은 신에게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만약 당신이 신에게 가능 방법을 알고 또 가고자 한다면 당신은 안내인 없이도 스스로 신에게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올바른 삶의 방법을 모른다면 당신에게는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The other day two Germans heard me speak about Right Life and asked me, "What is there in your Right Life that makes it superior to Christianity?". I said: "Right Life is Universal and Natural Life. Take breathing, for instance. Can you say: I won't breathe?" So with eating, sleeping, thinking, feeling, etc. I say: Regulate these so as to keep your body all right, and your mind unperturbed. Then, to everybody naturally occur the questions: What is all this universe, this life, birth, death? What is the purpose of all this? What is at the bottom of all this? What is the goal of all these activities? Remain in these questions for as long as you can, remain longer and longer, you will know the Truth, and know and get something after knowing and getting that which will no more remain to be known or got, to attain which state is the natural desire of everybody in unclouded moments.

어느날 독일인 2명이 내게 찾아와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당신의 올바른 삶이 기독교보다 우수하다고 할 수 있는 점이 무엇입니까?' 나는 대답했습니다. '올바른 삶은 우주적이며 자연스러운 삶으로서 숨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숨을 쉬지 않겠다고 말할수 있습니까?' 먹고 잠자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들을 조절하십시요. 그러면 마음이 침착해지고 다음과 같은 의문이 자연히 생기게 됩니다. '이 모든 우주와 생명, 출생과 죽음은 무엇일까? 이 모든 것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들의 바탕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런 의문들을 가능한 한 오래 간직하십시오!

이를 통해 당신은 진리를 알게 도리 것입니다. 더 이상 알거나

얻을 것이 없는 상태에 들어갈 때, 당신은 아주 특별한 무엇인가를 알고 얻게 될 것이며, 모든 사람의 본성적인 열망을 선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Right Life asks us to remain in these natural desires and pursuits. This could be done and had been done even before any known teacher-propagated religion came into being, this was and is being done since the coming into being of all religions, and this will remain possible even after all these religions have gone into the limbo of oblivion. This is what makes it superior to Christianity, Vedic religion, etc. These religions came into being after mankind had vastly deteriorated, in order to provide some palliatives. But the final and only cure for all ills is Right Life alone. Vedic Religion is meant to awaken the dormant sense of the Natural Life. So also, other religions serve this purpose in varying ways and degrees.

올바른 삶은 우리에게 이러한 본성적인 열망과 구도심 안에 머무르도록 요구합니다. 이것은 어떤 기성 종교가 시작되기 전부터 있어왔으며 모든 종교가 망각의 상태에 빠질지라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나 베다 종교보다도 더 우위에 있다는 점 입니다. 종교는 모두 인류가 크게 타락한 이후 그것을 완화하기 위해 등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종극에 인류의 악을 치료할 것은 올바른 삶밖에 없습니다. 베다 종교는 본성적인 삶에 대한 잠자는 감각을 깨우기 위해 만들어 졌습니다. 또한 다른 종교들도 여러 가지 다른 양식으로 이 목적을 위해서 인류에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Lord has told me that if one lives the Right Life, one is sure to attain prosperity as well. The fact that I have not attained prosperity clearly means that there are many shortcomings in my efforts to live the Right Life?

Q: 선생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올바른 삶을 산다면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내가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올바른 삶을 살아가려는 나의 노력에 많은 결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Yes. Duties and meditation on God - if you take to these two only and do no useless or harmful action, you will get everything, every knowledge, 'Yogakshemam Vahamyaham (Bhagavad Gita, IX,22). Take the case of Sudama (Krishna's friend). Even Lakshmi (the goddess of prosperity) came and lived in his house. If we stick to right duties and God only, everything we require, even if it is millions of rupees, will come to us.

A: 그렇습니다. 신에 대한 의무와 명상- 이 두가지를 확실히 행하고 쓸모없고 해로운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모든 것들, 모든 지식들을 얻을 것입니다. 크리슈나의 친구 수다마의 경우를 봅시다. 번영의 여신 락슈미 까지도 그의 집을 찾아와 같이 살았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의무를 견지하고 신만을 추구한다면 비록 그것이 수백만 루피일지라도 그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How long does it take to realise God?

신을 깨닫는데 얼마나걸리나요?

It differs from person to person. Everything depends upon the earnestness and capacity of the aspirant. In general, a Sattwika type of aspirant takes a decade, a Rajasika type, two decades and a Tamasika type, three decades, if his aspiration for God is marked by sincere struggle for God.

사람마다 다릅니다. 모든 것은 열성자의 성실함과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트위카 유형의 열성자는 10년,

라자시카 타입은 20년, 타마시카 타입은 30년 정도 걸립니다.

신을 향한 열망이 진실한 몸부림으로 표시된다면 말입니다.

What is meant by these different types of aspirant?

이러한 다양한 유형의 염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This is made clear in the first episode in the Mahabharata, the episode of the Teacher Dhoumya and his three disciples, Aruni, Upamanyu, and Veda. Aruni is Sattwika, Upamanyu, Rajasika and Veda, Tamasika.

 

이것은 마하바라타에서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두우미야 스승과 그의 세 제자 아루니, 우파마뉴, 베다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아루니는 사트위카, 우파마뉴, 라자시카, 베다, 타마시카이다.

What should one do if one does not want God but the highest worldly position and prosperity?

Q: 만약 사람이 신보다 세속에서 최고 지위와 성공을 원한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One should stress the cultivation and practice of right morality and right intellect more than enquiry into the Beyond. One should have, so to say, the mind of Yudhisthira and the practical intelligence of Duryodhana. In this way, it is possible to become a highly enlightened and successful ruler of the world like Ramachandra or Yudhisthira.

A: 초월한 세계로의 탐구보다는 더 올바른 도덕,

더 올바른 지성의 수련과 실천 등에 역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고도로 깨우친 성공적인 통치자가 될 수 있습니다.

If one wants God in this very life?

Q: 만일 사람이 현세에서 신을 찾기 원한다면?

One should do the opposite, should stress enquiry into the Beyond more than moral and intellectual activities like Shukadeva and Ramana. One must minimise even one's personal duties and devote the maximum time to meditation on God. Those who devote only half their time to God-worship and the other half to other worldly duties can see Him only in the next life.

A: 그런 사람은 앞서와 반대로 해야 합니다. 그는 수카데바나

라마나와 같이 도덕적이거나 지적인 행동보다는 초월적 세계로의 탐구에 역점을 두어야 하는데, 자신의 개인적 의무는 최소화하고 신에 대한 명상에 최대의 시간을 바쳐야 합니다. 신에 대한 예배에 인생의 반을 헌신한 자는 내생에는 신을 볼수 있지만, 신에 대한 예배에 시간을 적게 쓴 사람은 많은 생을 거친 후에야 겨우 신을 볼 수 있습니다.

Those who devote only a little time to God-worship and the rest of their time to worldly activities can hope to see Him only after many lives.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세속적인 일에 시간을 조금밖에 쏟지 않는 사람은 많은 삶을 거쳐야만 하나님을 뵙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No experiences in meditation?

명상 경험이 없다고요?

 

Your mind is still not consolidated, still fluid, otherwise tendencies to sensual pleasures there should not be. Such experiences are generally had by other people also when there are not many external occupations and pre-occupations.

여러분의 마음은 여전히 통합되어 있지 않고, 여전히 유동적이며,

그렇지 않으면 관능적인 쾌락에 대한 경향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경험은 일반적으로 많은 외부 직업과 사전 고용이 없을 때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행해집니다.

 

Is ultimate realisation, i.e. God-realisation, possible without any other experience in meditation?

궁극적인 실현, 즉 신의 실현이 명상에 대한 다른 경험 없이 가능할까요?

 

Yes. God-realisation may be the first and last experience. Intermediate experiences are, in many cases, even likely to be more bondage-creating. There is only one true experience, all other experiences are to be ignored, if you have them, just like the things you see on the way to this place.

네, 신의 실현이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중간 경험은 많은 경우에 더 많은 유대감을 형성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단 한 번의 진정한 경험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경험은 무시되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장소에 가는 길에 보는 것과 같이 말이죠.

 

Now I realise the value of a Fully Enlightened Teacher.

이제 저는 완전히 깨달은 스승의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Even with the best income, home, etc., the world will remain unsatisfying till Truth is seen?

Q: 아무리 수입이 좋고 집안이 좋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불만이 남아 있지 않을까요?

Yes, that is so. Everything goes against us till we know God.

A: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을 알기 전에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반대입니다.

When I started trying to live Lord's teachings, I thought it would be easy and simple but now I find myself perplexed and depressed at the difficulty of the task.

Q: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할 때에는 그것이 쉽고 단순한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 일의 어려움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You committed many sins in your past lives. So God has sent you into this jail of the world. If you behave well. He will be pleased with you and release you. You must persevere in your quest of God despite all pains and pleasures. Then God will release you.

A: 그것은 당신이 전생에 많은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당신을 이 세상의 감옥에 보내셨습니다.

만일 당신이 행동을 잘한다면 신은 기뻐하며 당신을 이 세상의

감옥에서 해방시킬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고통과 기쁨이 닥쳐와도 항상 신에 대한 탐구와 질문을 간직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신은 당신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There was a miser who observed the Ekadashi fast. On the following day, according to the scriptural injuction, he had to feed a poor person till the latter could eat no more, before taking any food himself. He wanted to feed a person who would require very little food. God Himself came to him in the form of a poor person. "How much food do you require?" asked the miser. "Very little", replied the poor man. The miser was highly pleased and gave him very little food. But the poor man did not seem to be satisfied. He demanded just a little more food. The miser gave him a little more food. But the man was not satisfied even then. In this way the man went on demanding more food again and again. All the food the miser had prepared was finished. Still the man was not satisfied. The miser had to cook more food. You are like the miser. I am like the poor man. "Live the Right Life" - how simple to say! But the world of the Right Life is vaster than the world itself. Previously you lived a wild life, you were very arrogant, so these failures now.

에카다시 의식을 수행하는 구두쇠가 있었습니다. 경전에서 가르친 대로 따르자면 다음날 그는 자신이 먹기 전에 가난한 사람에게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만큼의 음식을 제공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주 적은 양을 요구하는 사람이 나타나길 바랐습니다. 신께서 몸소 가난한 사람의 형상으로 그에게 찾아갔습니다. 구두쇠가 물었습니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가난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아주 조금이면 됩니다." 구두쇠는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음식을 조금만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만족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금 더 달라고 했습니다. 구두쇠는 조금만 더 주었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은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계속 더 많은 음식을 요구했습니다.

이제는 구두쇠가 준비한 음식이 다 떨어졌지만 아직도 그 사람은 만족하지 않았고 구두쇠는 또다시 음식을 해주어야만 했습니다. 당신들은 마치 이 구두쇠와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가난한 사람과 같습니다. 올바른 삶을 사십시오. 이 얼마나 단순한 말입니까! 그러나 올바른 삶의 범위는 이 세상 자체보다 더 방대합니다.

전생에 당신은 거치른 삶을 살았고 아주 거만했기 때문에,

현재 이렇게 실패하는 것입니다.

Nothing seems to be stable and changeless in the world. Buddha also says there is change and becoming only in the world. Yes. Even the best civilisation falls. Creation, preservation and destruction - this process goes on. Nothing can be made permanent. Only after God-vision, your achievement becomes permanent. There is change, as Buddha says. But there is also the Changeless, Absolute Truth. Men are born, laugh and cry and die - changeless this too. Relatively speaking, the Right Life is also changeless.

세상에 안정되고 변화 없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또한 세상에만 변화가 있고 또 변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아무리 좋은 문명이라도 무너지죠. 창조, 보존, 파괴 - 이 과정은 계속됩니다. 어떤 것도 영구적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신 후에야 당신의 업적은 영구적이 됩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변화가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 없는 절대적 진실'도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고 웃고 울고 죽습니다. 이것 또한 변치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올바른 삶 또한 변화무쌍합니다.

Further Dialogues

- 더 깊은 대화

Sir, I have come across many people who are fond of asserting 'I am Brahma', 'All is verily Brahma' but I do not find them free from fear, greed, arrogance, anxieties, etc.

Q: 스승님, 저는 '나는 브라마다,' '모든 것은 참으로 브라마다'라고 역설하기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들이 공포와 탐욕, 교만, 불안등에서 자유롭게 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Such assertions have no ultimate value. They are useful in the initial stages of meditation. Ultimate value is only in the question: Who am I? What is this life? What is the source of consciousness? What is it by seeing or knowing which all troubles including unconsciousness will go forever?, etc. Before we see or experience God and are consciously one with God we can never be totally free from fear, greed, anxiety, unconsciousness, etc.

A: 그런 역설은 궁극적으로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지 명상의 초기 단계에서만 유익할 뿐입니다. 궁극적인 가치는 오직 이 질문에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의식의 근원은 무엇인가?' '보거나 아는것을 통해서 무의식을 포함한 모든 문제가 영원히 없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등등

우리가 신을 보거나 경험하여 신과 의식적으로 하나가 되기 전에는 결코 공포, 탐욕, 불안, 무의식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Soul and ego?

영혼과 자아(에고)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What we call 'I' is really the Soul, the Spirit in man or woman. Without knowing the Soul from experience we say 'I am so-and-so; I am such-and-such'. This is ego. All material things have come out of the Soul, yet Soul is not material.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영혼, 즉 남자나 여자에 있는 정령입니다.

경험에서 본 영혼도 모른 채 우리는 '나는 이러저러하다.

나는 이러하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아(에고)입니다.

모든 물질적인 것들이 영혼에서 나왔지만,

영혼은 물질이 아닙니다.

What is the value of discussion among the friends coming here?

Q: 이곳에 오는 동료들과 논의하는 것은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People interested in a particular subject should get together and discuss. In this way a hundred times more knowledge can be gained than from books. You four or five should discuss freely among yourselves; you may even come to blows if necessary. My energy will also be saved. Bitter things must be spoken among you. Otherwise you can't make any progress. This will help to clear up many dark points.

A: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해 같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함께 모여서 의견을 나누는 것이 좋습니다. 이 방법으로 책에서 얻는 것보다 100배나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서너명이 함께 모여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십시오. 필요하다면 당신은 말을 많이 떠벌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에너지는 저축될 것입니다. 서로 비판하는 말도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보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수많은 불분명한 점들을 선명하게 해줄 것입니다..

Some people denounce going to temples, churches, mosques etc. Are they right?

Q: 어떤 사람들은 사원이나 절, 교회, 모스크에 가는 것을 공공연히 비난하는데, 그들이 옳은 것인가요?

No. Temples, churches, mosques etc. also have some use for some people. Going to them should not be denounced.

A: 그렇지 않습니다. 사원, 교회, 모스크 등도 또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비난을 해서는 안 됩니다.

Is scripture-reading indispensable for living Right Life?

Q: 경전을 읽는 것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것입니까?

No. Scripture-reading is for doubting people. For living Right Life, Right Student and Right Teacher are enough. Scripture-reading can help you become a right Student of Right Life. It will give you a distant view of God. It will give you faith in your infinite possibilities and make you positive in your thinking and living. But you must never forget that at best it is just for gaining momentum to make the final jump.

A: 아닙니다. 경전은 의심하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올바른 스승과 올바른 제자 만으로 충분합니다. 경전을 읽는 것은 당신이 올바른 삶을 배우는 올바른 학생이 되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신에 대한

넓은 시각과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주며, 긍정적인 생각과 적극적인 삶을 가지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들이 마지막 도약을 위한 발판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When, however, you have got a critical understanding of Right Life scripture-reading becomes totally useless. Then, enquiry into the Beyond is the only reality for you. Who created all this? Why? How? Where is He or It? What is the Source of all these things; of consciousness, of thought? What is it by seeing or knowing which all troubles, including all unconsciousness and ignorance and weakness, will go away forever?

당신이 올바른 삶을 명쾌하게 이해하게 될 때 경전을 읽는일은

아주 쓸모도 없는 일이 됩니다. 그때 당신에게는 초월자를 탐구하는 것만이 유일한 실체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을 누가 창조했는가? 왜? 어떻게? 그 또는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이 모든 것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 생각과 의식의 근본은 무엇인가? 대체 무엇을 보고 앎으로써 모든 무의식과 무지, 연약함 등의 문제들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일까?

Lord, is it right to say and feel "I am God"?

Q: 선생님! '나는 신이다'라고 말하고 느끼는 것은 옳은 것입니까?

The feeling that "I am God" is useful for shaking off worldly disturbances. But if one goes into Samadhi with this feeling, one may remain there for thousands of years without any fruit at all. This will be an Akarma [useless action] of the worst variety. When one goes into Samadhi, one must be able to say, "I am not God". It is better to look upon God as one's Teacher or Father or Master or some such thing.

A: '나는 신이다'라는 느낌은 세속적인 잡념을 떨쳐버리는 데에는 유익하지만, 만일 그런 감정을 갖고 사마디에 들어간다면 몇천년이 지나도 결실을 맺지 못할 것입니다. 마땅히 사람이 사마디에

들어갈 때에는, '나는 신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신을 선생님, 아버지 또는 스승 등으로 보는편이 좋을 것입니다.

Can dead people know if we think or pray for their welfare or offer food, clothes, water etc. in charity for their betterment?

Q: 죽은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고, 음식, 옷, 제물등을 바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Yes. Dead people have astral vision and can know everything happening within consciousness. But they cannot know what I call God who is beyond consciousness. Only the God-realised know God. In the terminology of modern science, dead people in their subtle or causal bodies may be said to have a vision equipped with cosmic rays.

A: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아스트랄적 시각을 갖고 있어서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신이라고 부르는 의식을 초월한 존재는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신을 깨달은 사람만이 신을 아는 것이빈다. 현대과학의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미묘한 원인체를 입은 사자들은 우주광선을 사용하는 시각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Do thoughts travel? Can good Yogis know if we are thinking of them?

Q: 생각은 공간을 떠돌아 다닙니까? 훌륭한 요기들은

우리가 그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Thoughts do travel and they are quickest. Good Yogis can actually know who is thinking of them at a particular time and place.

A: 그렇습니다. 생각은 공간을 떠돌아 다닙니다. 그것도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이동합니다. 훌륭한 요기들은 실제로 언제 어디서

누가 그들에 대해서 생각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Do stones have life? Do they grow?

Q: 돌들도 생명을 갖고 있습니까? 그것들도 성장합니까?

Yes. Stones, too, grow and can talk to you if you are a master of the Gunas, a Gunatita.

A: 그렇습니다. 돌들 역시 자라며, 만일 당신이 구나를 깨우친

스승 구나티타라면 그들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Common sense is said to be the highest sense. Can animals have it?

Q: 상식이 최고의 의식이라고 말하는데,

동물들에게도 상식이 있을 수 있습니까?

All other animals have sense. Man alone has common sense. Animals live by instinct. Some men like Einstein live by intelligence. Only supermen live by common sense. Einstein's intelligence produced the formula for the atom bomb. But if he had had common sense, he would have kept it to himself alone.

A: 모든 다른 동물들도 의식은 있지만, 상식은 인간만이 갖고

있습니다. 동물들은 본능으로 살며, 아인슈타인 같은 인간들은

지성으로 사는데, 오직 초인만이 상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지성은 원자폭탄의 공식을 산출했지만, 만약 그가 상식을 가졌었더라면 그것을 자신만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What is the Lord's teaching in brief? What is its best generalisation?

Q: 스승의 가르침을 간략히 말하면 어떤 것입니까?

A. Reason, not emotions - best generalisation. Gunatita (as said in the Bhagavad Gita), being master of the Gunas - next best. Cultivation of virtues - third best. Do the necessary duties, control the passions of the mind and think of God maximum possible. This is all the teaching. A mistake in intellect today will bring more failures tomorrow. A mistake in morality today will bring more worries tomorrow. A mistake in spirituality today will bring more fears tomorrow. This is all the teaching. Moral, intellectual and Spiritual laws govern the universe and its affairs unalterably. Evil-doers, breakers of the laws, are automatically punished and good-doers, practicers of the laws, are automatically rewarded.

A: 감정이 아닌 이성을 사용하는 것 이것이 첫째이며,

구나들의 스승인 구나티타가 되는 것이 다음이며,

미덕을 행함이 셋째입니다.

의식을 초월하는데 필요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의 열정을 조절하고, 신을 최대한으로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가르침의 전부입니다.

오늘 지성의 실수는 내일 더 많은 실패를 가져올 것이며,

오늘 도덕성의 실수는 내일 더 많은 걱정을 가져올 것이며,

오늘 영성의 실수는 내일 더 많은 두려움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것이 가르침의 전부입니다.

도덕적, 지성적, 영적 법칙들이 변함없이 우주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 범법자들은 자동적으로 벌을 받을 것이며

선을 행하는 자, 법을 잘 실행하는 자들은 자동적으로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Professional work is taking up too much of my time, I feel.

Q:직업이 나에게서 많은 시간을 빼앗아간다고 느낍니다.

In a sense, I have to do my professional work all the time. But do you think my meditation is disturbed? As a rule, however, professional work should not take up more than eight hours of every working day. If your mind and intelligence were all right, your one day's honest earning could be what is now your one year's earning. Then your professional duties need not take up so much of your time. If you have enough resources, you should give up every work except God-thinkingenquiring.

A:어떤 의미에서는 나도 항상 직업적인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나의 명상이 방해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일반적으로 직업적인 일은 하루 8시간 이상 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만일 당신의 마음과 지성이 아주 올바르다면 당신의 정직한 하루 소득이 지금의 일년 소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직업적인 의무는 당신으로부터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충분한 재원을 가지고

있다면 매일 일하는 것을 포기하고 신을 생각하고 탐구하는 일만을 해야 합니다.

Lord, in actual life we have to deal with persons with different tastes, natures and understandings. How to do this successfully so that such dealings will be helpful to us in going onward to our goal of God-realisation?

Q:스승이시여,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취향과 본성 또는 여러 종류의 이해를 가진 사람들과 만나야 합니다. 그런 만남이 신을

깨닫고자 하는 우리의 목적으로 진보하는데에 유익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If you don't know how to deal with different people successfully, your personal life will be disturbed and this will make it difficult for you to think of and enquire into God. This is why I have asked to study the Mahabharata and the Ramayana and also the lives of other successful persons. You have to be master of the Gunas, not their slave. To a good man you must be good.

But to a bad man you must be bad, though you must have only goodwill in your mind.

One lesson of the Mahabharata is that straightforward people also should be crooked in dealing with crooked people. In dealing with people and situations, our intelligence should be flexible and adaptable. In details I surrender completely but never in principles. In details you may yield but never, in principles.

A:만약 당산이 각기 다른 사람들과 성공적으로 사귀는 방법을

모른다면, 당신의 개인적 삶은 방해받을 것이며,

당신이 신에 대해 탐구하고 생각하는 것도 어렵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당신들에게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와 또 다른

성공적인 사람들의 인생을 연구하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당신은 구나들의 스승이 되어야지, 그들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선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쁜 사람에게는 당신도 비록 말과 글에는 생명을 담고 있어도 반드시 나쁘게 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도 깨닫는 바가 있어 지혜로와집니다.

It is very difficult not to be angry with those who harm us. What should I do?

Q: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If a policeman arrests you on some crime you should blame, in case you must, the ruler and not him. So, if anybody does some harm to you you should blame, if blame you must, God and not the harm-doer who is just an Instrument. Above all, you must never for a moment forget that all the miseries you suffer in life are children of your own past actions and inactions and are meant for your own purification.

This is also true of all the happiness you get in life.

A:만약 경찰관이 당신을 어떤 혐의로 붙잡는다면 당신은 그 경관이 아닌 그의 지휘관을 비난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해를 끼친다면 당신은 단지 도구에 불과한 그 해를 끼친 사람이 아니라 신을 비난해야만 합니다(만약 당신이 꼭 비난해야만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신이 고통받고 있는 모든 비애는 과거 당신의 행함과 행하지 않음의 결과로서 당신 자신의 순화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Lord, desire or anxiety for results is very much denounced in the Gita. But is not desire for God or for eternal freedom from all troubles also desire?

Q:스승이시여, 결과에 대한 욕심이나 걱정은 버려야 한다고

[기타]에서 말하는데,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영원한 자유나 신을 향한 욕망은 욕심이 아닙니까?

Anxiety for results there must not be in Godthinking. Anxiety for results there must not be in worldly duties. Here the results will come of themselves according to our performance of duties. Giving up desire for fruits or results means concentrating on the duties and doing them with dexterity. It means that you should think much more of the duties than of the results, just as in the office you should be much more careful about doing your duties than about the pay you will get at the end of the month. While coming here from your home, you should be much more careful about the nature of the way than about me or this Ashram. Otherwise there may be accidents for you. You should of course be sure that you are going the right way! So with your duties. Even as regards meditation, your attention should be more on God - remembrance and hankering for God than on God-realisation. You should do your part of the duties properly. Fruits, even God-vision, depend on the will of God.

A:결과를 걱정하는 것은 신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세속의 의무를 도외시하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우리가 의무를 수행한 정도에 따라 저절로 오는 것이며, 결과에 대한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의무에 충실하고 또한 능숙하게 그 의무들을 행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결과보다는 의무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직장에서 월급에 신경쓰기보다는 의무에 더 충실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집에서 여기까지 올 때에도 이 아쉬람보다는 오는 길에 더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신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이것은 명상에도 적용되어 당신이 명상을 할 때면, 신을 깨닫겠다는 것보다는 신을 기억하는 데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먼저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여야 합니다.

열매는, 신을 보는 것조차도, 신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When you do nothing for gaining name and fame and enjoyments, you are desireless. Why do I feel monotony? Why do I get bored with myself? How to conquer monotony?

Q:나는 왜 단조로움을 느끼는지요? 왜 나 자신에 대해서 싫증을 내게 되는지요? 어떻게 하면 이 지루함을 이길 수 있습니까?

You have no interest in God and duties. This is why you have monotony. Lower duties, duties towards life and world, are quite as important as higher duties, duties towards God. Both are God-ordained. The king or government sets up the College and the rules by which it is to be run. But the King is not responsible for its teaching. For this, and for dealing with any breach of rules, you professors are responsible.

A:당신은 신과 의무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당신이

단조로움을 느끼는 원인입니다. 이 세상과 삶에 대한 저차원적인 의무도 신을 향한 고차원적인 의무만큼이나 중요한 것으로서,

이 모두는 신이 명하신 것입니다. 왕과 정부는 학교를 세워 규칙대로 운영되게 할 수는 있지만, 왕이 그 가르치는 것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며, 여기에 대해서는 당연히 당신들 교수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If you attach equal value to both lower and higher duties, there will be no monotony. If you don't look to fruits, also there can be no monotony. As the Gita says, you have the right only to do your duties as well and as sincerely as you can. Concentrate on teaching your subject and observing the rules as well as you can, not on the salary you will get at the end of the month. Be completely absorbed in duties and God. Take to duties and God and to duties as God. Then and thus you will be able to conquer monotony and boredom.

만약 당신이 저차원적인 의무와 고차원적인 의무의 양쪽 모두에 똑 같은 가치를 두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단조로움이란 없을 것입니다. 열매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지루함은 생기지 않습니다. [기타]가 말한 대로 당신은 오직 당신의 의무를 할 수 있는 한 성심껏 잘할 수 있는 권리밖에 없습니다. 월급날 받게 될 월급만을 기다리지 말고, 당신이 맡은 과목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고 규칙을 잘 지키십시오. 완전히 당신의 의무와 신에게 몰입하십시오. 신과 의무를 항상 잊지 말며, 신에게 하듯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면 지겨움 이나 단조로움이 없어질 것입니다.

What is the biggest defect to be avoided by one trying to live the Right Life?

Q:올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피해야 할 가장 큰 결점은 무엇입니까?

Postponement or Inertia. This body-house is burning. Try to save as many articles of devotion and discrimination as possible. So long as one is not possessed by the feeling that death may come to one at any moment, progress in Right Life is not possible.

A:미루는 것과 타성입니다. 이 육체라는 집은 타오르고 있습니다. 가능한 한 헌신과 분별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모으십시오.

언제라도 죽음이 닥칠 수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는 한,

올바른 삶으로의 진보란 불가능합니다.

Can a Brahmana fight in self-defence?

Q:브라만도 자기 방어를 위해 싸움을 할 수 있습니까?

Why not? A Brahmana can curse his murderers. Even Vasistha cursed. Those who are weak can dedicate everything to God.

A:왜 안 됩니까? 브라만도 그를 죽이는 자를 저주할 수 있습니다. 바시스타(Vasistha)조차도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약한 자들은 만사를 신에게 떠맡길 수 있습니다.

Lord, what should we do if we have to die shortly or at once?

Q:스승님, 우리가 지금 당장 죽어야 한다면 죽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If we have to die, we should die with a laugh and God's name. Life and death is not in our hands. If we want to live, God may make us die. If we want to die, God may make us live.

A:우리가 죽어야만 한다면, 한번 크게 웃고 신의 이름으로 죽어야 합니다. 생과 사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살기를 원한다면, 신은 우리를 죽게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죽기를 원한다면, 신은 우리를 살게 할 것입니다.

Life with no aim and life with a bad aim - are they equally wrong?

Q:목적 없는 인생과 나쁜 목적을 가진 인생, 이 모두는 똑같이

잘못된 것입니까?

They are equally wrong.

A:그렇습니다. 똑같이 그릇된 것이다.

COMMENTS ON SPIRITUAL TEACHERS

-영적인 스승들에 대한 평가

Some people don't approve of Lord's criticising, and pointing out the shortcomings of, great saints and sages like Ramakrishna, Ramana Maharshi, Mahatma Gandhi, etc.

Q:어떤 사람들은 스승께서 라마크리슈나, 라마나 마하리쉬,

마하트마 간디 같은 위대한 성인들을 평하는 것에 대해서

찬성하지 않습니다.

For teaching and guiding you only, I criticise persons on one or two particular points. Actually, I respect and worship all. In reality, I know from my own experience that there is nothing and nobody but God. As I have said, our teaching is individual like a doctor's treatment of patients.

A:나는 오직 당신을 가르치고 지도하기 위하여 그분들의 한두가지 특정한 면에 대해서 비평하는 것뿐이며, 실제로는 나도 그들

모두를 존경하고 경배합니다.

사실,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직 신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압니다. 이미 말했듯이 우리의

가르침은 환자를 진단하는 의사의 처방처럼 개별적입니다.

Sai Baba Sai Baba (of Shirdi) lived the Right Life. He was Yogaroodha (established in right meditation).

쉬르디의 사이 바바는 올바른 삶을 살았으며, 요가루다(Yogaroodha:올바른 명상으로 성취된 사람)였습니다.

Aurobindo Aurobindo is just like Videha •and Nietzsche, concerned with the harmony of life, not the Beyond. Aurobindo is not doing Yoga at all. He is trying to create and prove a fantastic theory of life, namely, the possibility of divinising the human, spiritualising the material and immortalising the mortal. Aurobindo's commentaries 'Essays on the Gita' are excellent (but Shankaracharya's is still the best). Read a few sentences and meditate over them - let it take a thousand years to finish it, why worry?

오로빈도는 비데하(Videha)나 니체 같이 생의 조화에만 관심이 있었고 초월한 세계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으며, 요가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삶의 환상적인 이론, 즉 인간을 신성화할 수

있는 가능성, 물질의 정신화, 유한한 존재의 불멸화 등의 이론을 만들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가 쓴[기타에 대한 에세이]는 매우 우수합니다. 그 책을 조금이라도 읽고 명상해보십시오. 그것은 [기타]가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그의 주석만큼 뛰어난 것은 일찌기 없었습니다.

If God wills, Aurobindo's ideal, divinisation of humanity is also possible?

Q:만일 신이 의도한다면 오로빈도의 이상, 즉 인간성의 신성화는 가능한 것입니까?

God can divinise humanity but He can do the contrary too again. In truth, one can beg God for oneself alone, one has no right to demand for others. If one demands for others, one is sure to get punishment from God. Aurobindo like Raja Bali. Raja Bali's mistake: drove out death but (was) punished. Aurobindo is just like a Bodhisattwa. He wants to raise the Standards of living of people. He is the best exponent of Vedic literature at present, his poems are not so good. But some of his political and philosophical writings are excellent.

A:신을 모르고서 어떻게 신의 의도를 말할 수 있습니까?

신은 인간성을 신성화할 수도 있지만 또다시 그 반대로도 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그 자신만을 위해서 신에게 간구할 수 있을 뿐 다른 사람을 위해서 간구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을 위해 간구한다면 그는 신으로부터 벌을 받을 것입니다. 오로빈도는 라자 발리(Raja Bali)와 같습니다.

라자 발리는 죽음은 물리쳤지만, 벌을 받았습니다.

오로빈도는 사람들의 삶의 기준을 올리기 원했습니다. 현재로선 베다문학의 최고 해설자입니다. 그의 시들은 썩 좋지는 않지만, 정치적, 철학적 저술들은 탁월한 것입니다.

Buddha also committed mistakes, admitted all and sundry, women, etc., to the order. So much corruption crept in.

Q:붓다는 누구나 다(여성까지) 그의 교단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만은 부패가 일어나도록 했습니다.

Buddha also did not see God. He only came to know the Right Life, the Eightfold Path is that.

A:붓다의 가르침은 훌륭한 교과서이며, 그는 최고의 과학을

이야기 했습니다. 붓다는 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올바른 삶만을 알았는데, 그것이 8정도입니다.

But he said he knew everything after illuminating experience under the Bodhi tree?

Q:그러나 그는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Yes, the Right Life is everything.

A: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삶,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Mahatma Gandhi To expect perfect non-violence from every person or even from many persons is not at all reasonable. SamaDana-Bheda-Danda (a. Peaceful persuasion - b. Concession - c. Threatening - d. Punishing) - this is the reasoning we have to follow as regards nonviolence. The creed of non-violence as preached by Mahatma Gandhi may be regarded as perfect humbug. (October, 1947) We can have most successful results in any work only when there is a combination of dexterity, knowledge and morality. Living the Right Life makes this combination possible. This combination can be seen in its most beautiful form only in God-realised Souls. The cultivation of morality with some perfection by Mahatma Gandhi has made him the greatest man, as it were, of modern times. (October, 1947) Gandhi was Rajasic in action, Rajasic in knowledge and Rajasic in devotion. He did no Vikarma (harmful action). He had no knowledge of right duties. He was devoted more to ideals than to God or the ultimate Truth. (February, 1948) Gandhi did what he regarded as his duty regardless of life or death or any other trouble. This life was completely planned though in Rajasic direction. (February, 1948)

 

Gandhi had Bhakti Yoga and Gyana Yoga (seen in high morality) but not Karma Yoga. Gandhi could use only Sama and Dana (the policies of peace and concession) Take to the Right Life as Gandhi took to working out his principles - in a firm, planned and fearless manner. (February, 1948) Gandhi, Tagore, etc., have no right to speak on Spiritual matters. (October, 1954) Mahatma Gandhi practiced mental Ahimsa but his Speech was very violent. How he abused the British, the princes! Pakistan, more deaths. He was a slave of the Gunas. So he was killed. Shakespeare was perfect in drama and imperfect in everything else just as Gandhi was perfect in morality and imperfect in everything else. Gandhi will enjoy the pleasures of emperorship in his next life. Christ realised God at the point of death, Ramakrishna a day or so before his death. Mahatma Gandhi also could have realised God, if he had begged God for His Darshan, at least at the point of death, but he was ignorant in this respect: this was the difference between Christ and Gandhi. Krishnamurti If Krishnamurti etc., have to live the Right Life, they will tremble. (January, 1949)

Q:마하트마 간디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십시오.

A:모든 사람들 또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서 완전한 비폭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는 것이 아니며, '평화로운 설득-양보-경고-응징'이야말로 우리가 비폭력으로 간주하고 따라야 하는 이치에 맞는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정신적인 아힘사를 실천했지만, 그의 말은 아주 난폭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영국인들과 왕족들, 그리고 파키스탄인들을 저주할 수 있습니까? 그는 구나들의 노예였기에 살해된 것입니다. 세익스피어가 드라마에서는 완전했으면서도 그밖의

다른 면에서는 불완전했듯이, 간디는 도덕성에서는 완전했지만 기타 모든 것에 있어서는 불완전했습니다.

Krishnamurti has a quiet mind. But he is doing Akarma, useless action. He is too eager to teach others. His immediate aim is not to realise God but to live a good life. We should not be satisfied with such lesser things. Krishnamurti just like the Queen of France (Marie Antoinette) asking, "Why don't these people eat cake if they don't have bread?" She didn't know that cake was more costly and rare. (January, 1954)

Q:크리슈나무르티는 어떻습니까?

A:만약 크리슈나무르티 같은 인물들이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들은 크게 흔들릴 것입니다. 그는 조용한 마음의 소유자였지만 무익한 행동만 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몹시 애썼는데, 그이 목표는 신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삶을 살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저차원적인 것들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물은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와 같습니다. '그들은 왜 빵이 없다면 케이크를 먹지 않을까요?' 그녀는 케이크가 훨씬 비싸고 구하기 힘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Q. Has Ramana Maharshi realised God?

:라마나 마하리쉬는 신을 깨달았습니까?

A. No, He has realised the self, the Purusha. But the Purusha is a creation of God and not God Himself. (December, 1947) Nothing is wrong with Ramana Maharshi. He loves God solely and wholly. (January, 1948)

:아닙니다. 그는 자아, 곧 푸루사(purusha)를 깨달았는데,

푸루사는 신의 창조물이지 신 자신은 아닙니다. 그에게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신만을 전적으로 사랑했습니다.

Q. What does Ramana Maharshi lack still?

:라마나 마하리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A. In Ramana Maharshi mind and intellect have not been perfected. In the Right Life, mind, intelligence and soul are taken to perfection simultaneously. So, this is the best. (April, 1948)

그의 마음과 지성이 완전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삶에서는 마음, 지성, 영혼이 동시에 완전하게 됩니다. 이것이 최상입니다.

Q:마지막으로 사바펠리 라다크리슈나(Sarvapelli Radhakrishna)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십시오.

Dr Sarvapelli Radhakrishnan Radhakrishnan just like Bhishmapitamaha - knowledge but no practical intelligence. If Radhakrishnan had right understanding, he would not be sitting at this Government post but would establish Gurukula universities and live Right Life. (September, 1952) (Dr. S R. paid a visit to S B. on May l, 1956; on May 5/ Renu Lal Singh went to S.B.) Radhakrishnan is a gentleman. In relative things he may be given one hundred per cent marks. The first question he asked me was "What is your teaching?". I said, "\ teach three disciplines - Spiritual, moral and physical". At this, he bent his head like this and said, "The whole truth in so few words?". I replied: "Yes". Again he asked "The whole truth in so few words?". Again I replied, "Yes". Then he explained my Speech to others for about 15 minutes in a most wonderful manner. Such brilliant explanation I have never heard. I myself envied his power of explanation. He is soldier of the Vedic literature - rare in the world. He has only constructive nature. Human love he has got. He looks down upon nobody (refer to verse 18, Discourse 5 of Bhagavad Gita, translated by Annie Besant and Bhagvan Das as: "Sages look equally on a brahmana adorned with learning and humility, a cow, an elephant, and even a dog and an outcast.") He has no hatred for anybody. When he came he only Namaskared me (saluted me by folding his hands). Before he went, he placed his head upon my feet. Such a thing is most difficult for a man of his position. When I said, "I teach three disciplines . . .", I saw feelings of shame, horror, etc., rise in his face as he understood what was at the bottom of life; horror because after so long living in another belief, he feared that he was too old to change his way of life now. Q. From Speeches and writings, I have gathered the impression that Radhakrishnan is more concerned about bettering the world than about bettering himself. I think he is more extrospective than introspective. A. That is so. When one knows the smallness of man and the greatness of God one is on the right path. Radhakrishnan is critical of the world but not of himself. He wants to improve the world but he does not want to improve himself. This is his mistake. He is a pure Sattwa-Guni. I said to him, "One should not be influenced by Gunas, one should influence Gunas. One should not be a slave of sentiments, reason should prevail. Emotions there should not be in the mind". He understood, but it is difficult for him to change. How can you become a cultivator now? You have so long learnt and lived a different life. So with Radhakrishnan. Radhakrishnan has understanding only, no feeling.

A:라다크리슈나는 지식은 있어도 실천적인 지성은 없었습니다. 만약 라다크리슈나가 올바른 이해를 갖고 있었다면, 그는 정부의 관직에 있지 않고 구루카라 대학을 설립하고 올바른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나는 말했습니다. '나는 세 가지

훈련, 즉 영적 훈련, 도덕적 훈련, 육체적 훈련을 가르칩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리 전체가

그렇게 말 몇마디 안에 들어 있습니까?' 내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또다시 물었습니다. '진리 전체가 그렇게 말 몇마디 안에 들어 있습니까?' 나는 '그렇습니다'라고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의 말을 다른 사람에게 15분 동안에 걸쳐

아주 뛰어난 방식으로 설명했는데, 이제까지 그렇게 멋진 설명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 나 자신도 그의 설득력을 부러워할 만큼, 과연 그는 베다문학의 드물게 뛰어난 해설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구조적인 본성과 인간애를 가졌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도 멸시하거나 낮춰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내게 왔을 때에는 다만 손을 포개어 접어 인사를 했으나,

떠날 때에는 머리를 내 발에 대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 일은

그와 같은 위치의 인물로서는 아주 힘든 일이었습니다.

'나는 세가지 훈련을 가르칩니다...'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의 얼굴에서 생의 본질을 이해하여 부끄러움과 공포등의 감정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았는데, 그는 너무 오랫동안 이질적 신조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 새삼스럽게 생활방식을 고치지 못할 만큼 늙었음을 두려워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인간의 왜소성과 신의 위대성을 알 때 올바른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라다크리슈나는 세상일에는 비판적이었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진보시키려고 하면서도 그 자신을 개선시키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실수였습니다. 인간은 마땅히 감상과 감정 등의 노예가 아닌 이성을 지닌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라다크리슈나는 이것을 이해했지만 자신을 바꾸기는 너무 어려웠던 것입니다. 당신은 너무도 오랫동안

다른것을 배워왔고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그것을 바꾸겠습니까? 라다크리슈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오직 이해만 했을 뿐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어록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숲속이고, 그 다음은 왕궁이다. 상대적으로 말한다면, 그 이외의 장소는 모두 지옥이다.

*만약 당신이 아름다움을 거부하고 정의를 따른다면,

당신은 태양, 별, 동물, 식물들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것들은 마음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인생의 영광들을 하찮은 장난거리로 보아야만 한다.

*욕망에서 나온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필요에 의해서 행해진 모든 것은 옳은 것이다.

*헌신은 내일의 양식이며, 분별은 오늘의 양식이다.

이렇게 양쪽 모두는 똑같이 중요하다.

*분별은 빛과 같다. 스바다르마(Swadharma)는 이 책과 같다. 만약 빛이 없으면 이 책을 읽을 수 없듯이,

분별이 없으면 스바다르마는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잘못된 개념이 곧 마야이다. 사실상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신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이 모든 것은 마야이며, 신의 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태도를 지녀야 한다. 우리들은 신의 종들로서,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신만을 위해서 찬양하고 비난하라

"당신은 왜 나를 창조하셨나요? 당신은 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시나요?" 이것이야말로 진짜 사랑싸움이다.

*문제들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신성한 분의 요구로서 환영해야 한다.

*모든 것은 우리의 운명이며, 다른 사람들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

*사람의 저차원적 삶은 그 사람의 전생의 행동들로 결정된다.

그러나 인간의 헌신적인 면은 그것들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

*만약 당신이 올바른 삶을 살지 않는다면,

죽은 후 수만년 동안 인간으로 재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유일 신을 믿으라, 왜 많은 신들과 신적 존재들을 믿는가?

*신은 당신의 가슴 속에 있다.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힘은 당신 내면의 힘과 같다.

*아르키메데스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가 잠시 동안이라도 이 지구 밖에 서 있을 수 있다면

나는 이 세상을 들어올릴 수 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으로부터, 당신의 의식으로부터 나와 서 있을수 있다면 신은 당신 앞에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삶에

대한 애착은 버리고 신에 대한 애착을 가져야 한다.

쉬바푸리 바바, 올바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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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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