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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썬다싱의 명상 3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4.08|조회수116 목록 댓글 1

< 인도의 사두 썬다싱의 명상 3 >

201. 만년의 눈으로 덮혀 있는 히말라야 산중을 여행할 때

어떤 이가 그 산중에 온천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였다.

그는 온천물에 손을 대어보기 전까지는 그 물이 따스하다는 것을 믿지 못하다가 대어보고야 시인하였다.

그는 경험을 통하여 이해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영적 경험을 가지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다.

경험은 기도를 통하여서도 우리에게 얻어진다.

202. 어떤 사막지대에 물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한 그루의

나무가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까닭을 알아보니 그 나무는

긴 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이 땅 속 깊이 숨겨있는 물줄기에까지 닿아 있었다.

기도는 감추어진 샘인 하나님에게까지 이르는 숨은 뿌리인 것이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힘이 붙어진다.

203. 요단 강가의 맑은 물은 사해로 끊임없이 흘러가건만

그 바다는 짜기만 하고 언제나 죽은 상태이다.

그것은 들어온 물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새로운 물이 흘러들어 오는데도

죽은 신앙의 상태에 있다면 이는 남에게 주지 않기 때문이다.

204. 나의 주되시는 하나님이여! 나의 전부의 전부이시며

생명의 생명이시고 영의 영이신 주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사 성령으로 나를 충만케 하소서!

그것은 내 마음은 당신을 두고 따로 다른데 바칠만한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모든 은총을 베푸시는 주님 외에 내 마음은 다른 세상의 보물이나 그 무엇도 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당신만을 구하고 사모할 뿐입니다. 당신이 계신 곳 그곳이 천국입니다. 이 같은 마음의 기갈을 채워주실 분은 이 요구를 주신 당신 외에는 없나이다. 오! 나의 주님이시여! 당신은 내 마음을 오로지

당신을 위해서만 만드셨기에 내 마음은 당신 안에 있지 않으면 휴식이나 평안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 속에 당신을

거역하는 것은 모두 떼어버리고 당신만이 영원히 나를 지배하시기 바라나이다.

205. 주님이 인간에게서 오랜 동안 멀리 떨어져 있는 이유는

어떤 계시를 받을만한 준비가 그에게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주님은 늘 그와 함께 계셨다.

주님이 사람의 마음과 영에 자신을 나타내는 계시는 그의 외부적 현현보다 더 본질적이다. 많은 재난을 당한 슬픈 사실까지도

주님이 그를 특별한 방법으로 준비시킨 것이며 슬픔과 고통의

수단을 통하여 진리 탐구자는 주님에게 나오게 되며 영적 수용량은 확대되고 또 주님의 임재로 그 눈이 떠져 놀랍고도 신성한

축복의 자각과 희열에 들어가게 된다. 고통과 번민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결점을 인식케 하며 필요와 만족을 구하여 마침내 주님에게로 와서 그 요구를 만족케 된다.

206. 조용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침묵 가운데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역사 하신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도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하고 결심하는 것이 침묵 속에서 행해진다. 육신의 형벌로는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킬 수 없다. 오직 그들을 위해 대신 기도함으로 그 마음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생명을 줄 수 있다. 성인들은 기도로 고독 속에 있으면서도 군중 속에 있는 듯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큰 일은 침묵 속에서 시작되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실 때 인간의 도움을 구하지 않으셨고

묵묵히 홀로 모든 것을 만드셨다. 그러나 인간이 방황할 때

그 필요에 의해서 예언자나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셨고

때가 이르러 그 자신이 육신으로 나타나 인류에게 이야기하고

구원 사업을 끝내셨다. 세상을 등진 채 조용히 기도하는 것이

외톨이의 고립적인 신앙이라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신성한 진리의 진주를 따기 위해 바다 속의 잠수는 필요하며

이는 남도 부요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 세상의 소요로부터 잠기기 위해서 곧 보이는 것과 들리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기도로 성령을 호흡하는 길밖에 없다.

207. 하나님을 알기 전에 자신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자기의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과 이해보다 초월해 있기에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만일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신이 아니다. 우리가 불 속에 손을 넣어보면 불이 뜨겁다는 것을 알 듯이

하나님의 달고 오묘한 사랑의 교제에 들어가 본 영적 경험이

곧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208. 우리는 이 세상의 외적인 지식이 없어도 하나님을 느끼고 알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내적인 눈으로 볼 수 있고

그 아름다운 임재를 기뻐할 수 있다. 벙어리고 귀머거리며

소경이 외적 세상에 대한 지식은 불충분하여도 하나님을 눈으로 보듯이 선명히 느낄 수 있다.

209. 세상을 버릴 수는 없다. 세상을 버린다는 의미는 세상 속의 악을 버린다는 뜻이다. 인간은 영이기도 하지만 육체이기도 하기에 세상과 자연을 버리는 것은 죽기 전까지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외적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지상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기에 올바로 물질과 신체를 사용하기를 원하시고

이로서 천국에 이르기까지 예비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정욕으로 자극할지라도 주님은 우리가 그 세상과 싸워 이기기를 원하신다.

210. 성자가 다른 이보다 다른 점은 성자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으나 다른 이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또 성자는 자신이 연약하고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만 다른 이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성자는 항상 성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자이지

이미 성자가 된 성자는 없다.

211. 깊은 영적 경험은 영적 용어로만 표현할 수 있고 그 밖의

충동이나 감정은 인간의 어법이나 말재주로 나타낼 수 있다.

짐승은 혀가 있어도 말할 수 없다. 짐승은 본능대로 행동하지만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다. 꿀벌들이 꿀을 모으는 것은 배우지 않고 깨닫지도 않지만 인간은 배우고 생각하고 의지하여 행동한다. 이것은 인간은 계속 긴장과 곤란과 노력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성장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모습으로 닮아가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끝없는 기쁨을 누리기 때문이다.

212. 아무리 무능한 자라도 제 집에서는 왕이다.

문제는 그 집 곧 외적인 형태를 집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집으로 여기는 자가 현명하다. 사람은 각기 제 자신의 경우에 따라 행복을 느낀다. 돈이 있다고 구차한 사람보다 행복이 더할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고 부자보다 행복 될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구차한 사람은 부자보다 불행 된 것을 참고 지내기 쉽다. 우리는 항상 주님께서 허락하신 이 처지에서 행복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참으로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평화를 가진 자가

행복한 자이다. 왕국의 호화보다 오막살이의 단순한 소찬을 감사하며 맛있게 먹는 것이 행복이다. 고통의 학교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아무리 긴 지상의 고통도 영원의 기쁨을 보면 일시적인 것이다. 우리의 죽음의 날짜는 정해져 있다.

어느 날 죽음의 강을 건너야 한다. 밀알이 썩어 며칠 내 싹이

나오듯 육체는 죽고 그 영은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난다.

213. 어느 왕자가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와 같이 방정하고 선량하였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과 떨어져 왕궁에 살았기에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몰랐다. 그가 언젠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 세상을 통치할 때 아버지보다 더 잘 다스리기 위해 변장을 하고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살아 그들의 생활 상태와 노고를

알아보았다. 그가 변장한 왕자라는 것을 수행하는 측근 몇 사람 외에는 알지 못했다. 그는 허술한 집에 살며 비밀리에 여러 번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그는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아버지의 도움이 그의 힘의 근원이었다) 무죄한 양민들을 불쌍히 여기며 도움을 주었고 그의 사랑과 근로 생활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아버지에게 알려졌다.

그는 한 사람의 상인으로 생활하는 중 여러 사람들과 교제하며 그들의 성질을 파악하고 그들의 사정에 정확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이는 그의 직접적인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그는 늘 그들의 악을 제거하는 일에 몰두하였고 자신을 속이고 학대한 자들에게 진정한 신분을 나타내 보복하지 않았다.

언제나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이 선량히 되기를 기도하며

법을 지키는 시민이 될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는 누구일까.

이가 바로 우리의 그리스도였다.

214. 의인이 받아야 할 축복을 악인이 받고 악인이 받아야 할

저주와 불행이 착한 사람에게 임하는 사건에는 하나님의 크신

지혜와 섭리가 숨어있다. 불합리한 듯이 보이나 이 세상은 짧고 일시적인 곳이다. 외관상으로는 하나님이 그릇된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전체 계획 중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과 행복을 구하지 않는 악인에게도 주신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저들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그러므로 나중에 저들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러 저러한 좋은 것을 주지 않았다고 불평할 수 없다.

이와 달리 선인은 세상에서 조롱받고 빼앗기고 고통 당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유익을 위해 베푸시는 역사인 줄 알고

오히려 감사하며 인내로 싸워 이기려 한다.

이로 인해 그들의 영적 병은 죄의 원인으로부터 치료되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한 알의 씨가 햇빛 가운데

나오기까지 어두운 땅 밑에서 차갑고 답답한 가운데 참고 지내야 하는 것과 같다. 인간도 의의 태양 빛 가운데 들어오기까지 슬픔과 고통의 긴 터널을 통과하는 중에 무의식적으로 그 속에서

은혜를 받는 것이다. 선은 조만간 좋은 열매를 맺어 풍성하게

되는 것같이 악도 조만간 악의 열매인 멸망을 가져온다.

우리 죄는 확실히 우리를 찾아내고 죄인은 그 자신이 죄에 의해 죽지 않으면 안 된다.

215.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만물을 만들었고 인간을 자기의

형상과 같이 지으셨다. 이는 사람이 다른 피조물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이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사랑의 가치를 알고 그 사랑에 의해서 우리의 영혼이 깨끗함을 얻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제 일로 사랑하고 그 후

전 인류와 자연을 사랑해야 한다. 이는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오기에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움으로 그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버리고 인간이

죄로 피조물을 사랑하기에 고통과 번민이 찾아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사랑의 흔적이 있는 이유는 이 사랑을 통하여 자신의 사랑이 불충분함을 깨닫고 사랑의 원천인 하나님에게로 나오게 하기 위함이다.

216. 창조자의 사랑이 없으면 인간의 사랑은 불완전하고 이별과 불안과 슬픔의 그늘을 가져온다. 그러나 인간이 그늘을 피하여 양지로 옮기기만 하면 따사로운 볕을 받을 수 있듯이 신은 결코 인간을 떠나지 않으시며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며 변함도 없고 시간과 장소의 제한에도 지배되지 않으신다. 하나님과의 교제 중에서는 참된 행복이 어디든 어느 경우든 계속된다.

217.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 외에는 채울 수 없는 본능과

욕구가 있어 이 세상에서 잠깐 시련과 준비를 마친 후 하늘에

올라 더욱 향상된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의

만족과 그 가운데 있는 것을 추구하면 그 자신을 위하여 하는

노력은 마침내 실망과 파멸을 가져온다. 세상만을 바라보는 것은 덧없는 꿈과 같아 새로운 무덤 속에 사는 것과 같다.

이 세상은 악하나 그와 동시에 여러 방면에 위대하고 무한한

조류의 흐름이 있어 사람을 죄와 고통과 그 조건에서 건지려는 무한한 사랑과 생명의 큰 물결이 흐르고 있다. 이 큰 물결은 단지 기도하는 자에게만 건강과 기쁨과 평화를 준다.

그것은 마치 적도를 따라 흐르는 멕시코만의 대조류가 북극의

얼음을 풀어 북방 나라들의 주민을 극심한 추위에서 건지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준비한 이 무한한 사랑의 물결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항상 안전하고 혼란치 않으며 남의 선을 위해 노력하고 악을 받아도 복수하지 않고 선으로 갚는다.

218. 사람들은 죄의 끈에 자신이 묶여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에 세상이 밝은 줄로 알고 웃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신앙에 서면

죄악의 끈이 보여 이때부터 이 끈을 풀기 위한 고통의 몸부림으로 웃음이 사라지며 늘 우울 속에 지내는 시기가 오나 참고 견디면 언젠가 이 사슬을 풀고 자유의 창공을 훨훨 날게 된다.

사람은 본디 외부의 모든 조건이 좋아도 그는 육체가 사람이

아니요 영혼이 사람이기에 영혼의 죄가 풀리지 않으면 참된 평화는 얻을 수 없고 마침내 어둠의 영원한 고통에 처한다.

219. 14년 전 그가 코트갈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문득 영안이

열려 하늘의 영광을 보았다. 그때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너무도 생생하여 그는 지금 죽어서 영혼이 하늘의 영광 중에 들어온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그의 생애를 부요하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은 그가 원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대개 기도 중이나 묵상 중에 이루어지고

어떤 때는 한 달에 8-10회로 되기도 하고 한 번에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정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영광스런 지역을 구경하고 천사나 성도들과 담화하기도 하였다. 이 영의 교통에서 얻는 말할 수 없는 입신의 즐거움이 영원히 그들과 함께 살고싶은 욕망을 갖게 하였다.

교령술은 저급령이 사는 암흑계로부터 오는 암시나 소식인데

그것은 전부가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대개는 단편적이요 똑똑치 못한 것이다. 이것은 진리를 떠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그의 입신 중에는 영계의 영광스런 상태를 세밀하고 생생하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 속에는 해결이 어려운 문제에 대한 똑똑하고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220. 영들은 선과 악 두 가지 구별이 있는 상태에 있는 존재를

말하는데 이는 죽은 뒤 천계와 지옥의 중간 상태에 있는 존재들이다. 성도는 이 상태를 지나서 영계의 더 높은 곳을 올라가

특별한 봉사를 하는 자요 천사는 여러 가지 영광스런 사업에

봉사하는 존재로 그 중에는 우리 지구와 함께 다른 여러 세계에서 온 많은 성도들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한 가족처럼 살고 있다.

221. 오직 하나 생명의 근원이 있는데 이는 무한하고 전능한

생명이시다. 그 창조적인 힘은 모든 생물에 생명을 주고 피조물은 그 안에서 살고 그 안에 있어 영원히 그 존재를 계속한다.

피조물의 생명은 변화하나 소멸하지는 않는다.

비록 존재의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죽음이라

부르나 죽음은 결코 생명의 종극적 소멸이 아니고 다른 생명에의 가입이나 혹은 거기서 무엇을 빼어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물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진 것이 아니요

다른 모양과 다른 상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전 우주의 어떤 존재라도 이는 소멸되지 않는 것이요 누군가가 소멸시킬 수도 없다. 하나님도 그 생명을 소멸시키시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의

말과 비유로는 영계의 모든 진상을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

222. 어느 날 그는 기도 중에 문득 많은 영적 실재자의 무리에

둘러싸인 것을 알게 되었다. 영안이 열리자 많은 천사와 성도가 모인 그 앞에 엎디어 있는 그를 발견하였다. 처음 그는 저들의

영광과 빛난 얼굴을 보고 자신의 부족한 상태를 깨닫고 조금

부끄러움을 느꼈으나 저들의 진실한 사랑과 충만한 친절을 보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223. 죽음은 잠든 것과 같다. 조금 육체의 병이나 정신적 조건을 제하면 이것을 넘는데 아무 고통도 없다. 몹시 피곤한 사람이

깊이 잠드는 것과 같이 죽음의 잠이 인간에게 닥쳐오는 것이다. 대개 죽음은 누구에게나 뜻밖에 오는 고로 죽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에 있는 것을 깨닫기 힘들 정도이다.

그는 환경이 새롭고 아름다운 모든 것을 보고 자신이 지상의

어느 다른 곳에 온 줄로 생각한다. 그들은 충분히 가르침 받은 후에야 비로소 자기가 죽은 줄 알고 자기 몸이 육체가 아니요 영이며 물질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옮겨온 것을 알게된다.

224. 보통의 죽음의 경우에는 육체가 점점 감각을 잃어버리고

아픔도 없고 다만 졸음과 같은 상태에 덮인다. 혹 몸이 몹시 쇠약하였든지 무슨 뜻밖의 변사를 당하여 죽은 영혼은 육체가 숨 떨어지기 전 무의식 상태에서 영혼이 그 몸을 떠나는 일이 있다.

이처럼 영계에 들어갈 준비나 생각 없이(주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자) 문득 영계에 들어온 영혼은 몹시 놀래며 당황하여 자기 운명이 어찌 될 것인가 큰 고민에 빠지면서 상당히 오랜 동안

낮고 어두운 중간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이와 같은 낮은 범위에 사는 영들은 지상에 사는 영들을 몹시 괴롭게 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나 이들이 괴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저들처럼 사악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의지로 저들의 마음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자들에 한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그 보호 중에 있어 안전하다. 악한 영은 자기 성질과

같은 성질을 가진 사람만을 해할 수 있기에 그 영향이 제한되어 있다. 때때로 그 악령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의해 의인도

괴롭게 할 수 있는데 이는 욥기에서와 같이 그 백성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유익되게 하는 것이다.

225. 불순종한 영혼들은 장차 죽게될 때 무지각 상태에 빠지게 되고 자기 주위에 가득 모여든 사납고 무서운 악마들의 얼굴을 보고 공포에 질린다. 그러나 신자의 죽음은 그를 맞으려고 오는 천사나 거룩한 영들을 보고 극도의 행복을 깨닫게 된다.

그 때 먼저 죽은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의 임종에 와서 그 영혼을 영계에 모시고 가는 것을 허락하신다.

영의 세계에 들어가자 즉시 마음이 평안한 것은 주위에 그의

친구들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곳이 땅 위에 사는 동안 늘 믿고 기도하며 바라던 참 본향이기 때문이다.

226. 인간의 영혼을 지상에서 안내하여 가는 것은 천사의 직무이다. 그리스도는 영계에서 항상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이는 각자의 영광의 도수에 따라 곧 그 영혼의 발달된 정도에 응하여 강하고 약하게 자기를 계시하신다. 또 어떤 때는 주께서 직접 그 종의

죽음에 임하셔서 저를 맞이하고 사랑으로 그 눈물을 씻어주시고 그를 낙원에 인도하신다. 영계는 마치 어린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모든 필요한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그곳도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227. 죽은 후 영의 세계에서 영혼은 자신의 발달된 마음과 성질에 비슷한 영과 함께 암흑이나 영광 중에 살게된다. 이 영계는

아무도 육체로 들어갈 수 없는데 다만 그리스도와 에녹 엘리야만이 육체가 썩음을 입지 않고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 들어갔다. 또 어떤 이에게는 살아있을 때 영의 세계와 천계를 볼 수 있도록 허락된다.

228. 그는 각 방면에서 몇 천 몇 만의 영혼들이 천사에 옹위되어 항상 영계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선한 영들은 천사나 다른

선한 영들과 함께 옹위되어 있기에 악령들은 멀리 서서 주시하고만 있었다. 악인이 죽을 때는 악한 영들이 모여 그를 괴롭게 하지만 천사들이 이를 막아주고 있기에 곧 악령들은 저들을 데리고 어둠 가운데로 이끌고 가버렸다. 악인도 자기를 괴롭히는 악령들을 버리고 천사에게 올려해도 그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그들의 의지가 벌써 천사들이 악령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에 차라리 악령들을 따라가고 천사들도 그들의

자유의지를 간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229. 사람의 영혼은 영계에 오자마자 선과 악이 곧 분리된다.

지상에서는 모든 것이 혼합되어 있으나 영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빛의 아들들이 영계에 들어오면 먼저 감촉으로는 알 수 없는

공기와 같은 투명하고 맑은 바닷물에 목욕하여 거기서 튼튼해지고 원기를 얻어 새로워진다. 그 영이 이 이상한 물 가운데로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것은 마치 문 밖의 공기 중을 다니는 것과 같이 결코 그 물 속에 빠지지도 않고 젖는 일도 없다. 영은 그 속에서 신기하게도 깨끗하고 신선하고 순수하게 되어 영광과 빛의 세계로 더 높이 올라간다.

230. 악한 생애를 보낸 영은 저들과 달라 그들은 영광의 빛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평온 대신 고통을 느끼고 그 불결함과 더러워진 성질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하여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려 애쓴다 영의 세계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는 더러운 냄새나는 검은 연기가 일어난다. 악한 영들은 이곳에

자기 몸을 거꾸로 던져버린다. 그 속에서는 통회하는 울음소리와 고민하는 아우성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영들에게는 이런 소리가 들리지 않고 연기도 보이지 않는다.

231. 영계에는 어린 아이를 위해 특별히 지정된 곳이 있다.

여기서 천사들은 그 영혼에게 천국의 필요한 모든 하늘의 지식을 배워주어 어린 아이는 차츰 자라 천사와 같이 된다.

이 천사와 같이 된 어린 아이의 어머니가 죽어 영계에 올 때 그는 허락을 받아 자신의 육체의 어머니를 만나 반갑게 맞이하게 된다. 그 아들은 어머니를 부르며 붙잡고 기쁨으로 흐르는 어머니의 눈물을 씻어준다. 이는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같이 주위의 아름다운 광경을 설명하고

정한 기간동안 중간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그 어머니와 함께

있으며 더 높은 곳에 올라갈 준비를 돕게 된다.

더 높은 곳은 여러 가지 놀랄만하고 기뻐할 만한 사물이 있고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하여 고난을 받은 자들이다. 그곳은 아름다운 산천과 화원이 있고 그 속에는 여러 종류의 과일과 꽃들이 가득하여 마음이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다 거기에는 존재하고 있다 땅 위의 모든 사물은 그 참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지상에서 인간이 알 수 없는 무수한 종류의 존재가 있으나 이 영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232. 철학과 과학 등의 논리적 지식으로 사물을 규정하는 것으로 영계의 이치를 규명할 수 없다 영계는 육체의 눈과 이성으로는 보이지 않고 오직 영의 눈이 열린 자는 누구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적 활동이 아니라 영적 이해력이 필요한 것이다.

물질적 사실을 취급한 우리의 두개골과 뇌수는 땅에 파묻고 영계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사랑에서 나오는 영적 지식만이

필요한 것이다.

233. 논리적 지식으로 일관한 생애 중 그 사람 전체의 생애가

악하였다면 그는 곧 어둠의 영들과 함께 할 것이고 만일 그가

그런 가운데서도 도덕적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였다면 그는

그 철학적인 머리를 쪼으면서 중간 상태의 낮은 곳에서 극히

오랜 동안 맹목적으로 방황하며 자신의 미련에 지쳐 마침내

회개에 이르는 것이다.

234. 어떤 의미로 말한다면 무한한 공간의 전부는 하나님의 현재로 충만한 영계이다. 다른 의미에서 말하면 세상도 또한 영계이다. 세상의 주민은 몸을 입은 영인 때문이다. 중간 상태인 영들의 세계는 죽어서 몸을 벗은 영들의 일시적인 거주처이다.

가장 높은 영광의 세계와 가장 낮은 지옥과의 중간의 세계이다 그 중에도 여러 가지 세계가 있어 각자는 땅에서 진보된 정도에 따라 합당한 세계로 들어가서 천사들에 잠시동안의 교육을 받고 영적 사회로 가게 된다. 선령은 더 큰 광명 가운데로 악령은 더 큰 암흑 가운데로 각자의 내적 성질과 정신적 경향에 따라 나아간다.

235. 이미 죽은 친족이나 사랑하는 자나 성도들도 지상에 사는 우리를 돕기 위해 가까이 오는 때가 종종 있으나, 대개는 천사가 이 직무를 행한다 하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고 지각할 수 없는

가운데 우리에게 거룩한 사상의 감화를 주어 하나님께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나 특별한 경우에 따라 그 모양을 나타낼 때도 있다. 성령은 우리 마음 속에 있어서 영적 생활의 안정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성취시킨다.

236. 사람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유용하게 될수록 위대한 사람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봉사할수록 그는 큰 자인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할 때는 자신의 생애를 갱신하는 일이 지상에서부터 시작된다. 성령이 직접 그를 가르칠 뿐 아니라 지상의 가까운 성도들과의 교제 중에 은밀하고 보이지 않는 중에 진리와 선의 방향으로 이끌림을 받는다. 그러나 기독 신자도 믿지 않는 진리 추구자와 같이 대개는 진리에 대하여 그릇되고 편협한 견해를 가진 채

죽게된다. 그러나 저들이 만일 영의 세계에서 자기 의견에 완고하지 않고 교정 받기를 기뻐한다면 교정된다. 영의 세계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지식을 바꾸도록 강요하지는 않는다.

237. 영계에 들어온 한 우상숭배자가 있어 즉시 자신의 신을

찾기 시작했으나 성도들에게 한 분 하나님의 나타내심이 되시는 그리스도 외에는 신이 없다는 것을 성도로부터 듣고 몹시 놀래었으나 저는 정직한 진리 탐구자였으므로 자기의 잘못됨을 인정하고 진리의 올바른 견해를 가지려 애쓰며 행여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까 찾는 중에 그리스도는 저에게 가는 빛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저의 정도로는 그리스도의 강한 빛으로 나타나시는 영광의 모습을 견딜 수 없기에 가는 빛 가운데 주님을

뵙는 것이다. 주의 영광의 광채가 너무 큰 까닭에 천사라도

이것을 보기 곤란하여 그 날개로 얼굴을 가리는 것이다.(사 6:2)

그러므로 주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는 그 영혼의 진보된 정도에 따라 혹은 어렴풋하게 혹은 영광 중에 각자가 주를 보기에 감당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자신을 계시하신다. 주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의 빛의 강약을 통하여 영들은 생명을 받는 정도가 다르다. 이 빛으로부터 무한한 기쁨과 평안과 진리와 사랑의 힘을 얻게 된다. 또 이 생명을 주시는 빛의 방사와 끊임없이 주께로부터

흘러나와 저들을 넘쳐흐르는 생명을 주는 광선과 사랑의 큰 물결에 목욕하여 모든 잘못은 씻겨지는 것이다.

238. 생애를 통하여 매일의 양식을 얻기에만 전력하고 다른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의심하고 생각지도 않는 완고한 자가 죽으면 영의 세계로 들어오자 몹시 번민한다. 그들은 영의 세계 아래층 어두운 곳에 오래 동안 머물도록 지정되는데 그들은 이 고통 중에서 도와주기를 구하며 부르짖기 시작했다. 그래서 천사와 성도들이 사랑과 동정으로 어떻게 하면 이 영광의 나라에 들어올 수 있을까를 가르치기 위해 그를 찾아갔으나 그는 이와 같이 번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가 저의 전 인격을 의심하게

하고 삐뚤게 만들어 그곳을 나오려 하지 않고 어두운 곳에 그냥 살기를 원하였다. 이미 그의 죄성으로 마음이 악에 지배되어

있기에 악한 것이 진리로 보이고 선한 것이 오히려 악과 거짓으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성도들은 그의 장래를 위해 '하나님이여 원하오니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할 뿐이었다.

239. 어떤 사람이 자기의 방안에서 죄를 짓고 있었는데 그 방안에는 많은 천사와 성도와 사랑하는 자들이 함께 있는 것을 그는 볼 수 없었다. 그 모든 영들이 그를 염려하여 그의 부끄러운 행위를 보고 걱정하였다. 그들은 그를 도우려고 왔으나 저의 마음이 악하여 지각할 수 없는 중에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오히려 그들은 나중 심판 날에 저의 죄를 증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 영들은 '바라건대 이 사람이 회개하여 장차 올 형벌에서 면하기를 원하노라'며 그곳을 떠났다.

240. 어느 때 영의 세계에서 한 영이 원통히 울부짖으며 미친

사람 모양 뛰어 다니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는 땅 위에 있을 때 회개하고 믿을 기회가 많았지만 번민이 생기면 언제나 술을 먹고 이를 넘겨 마침내 재산을 탕진하고 가정 파탄으로 자살을 한 것이다. 그는 그 잃은 기회를 원통히 여겨 가슴을 쥐어뜯으며 고통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저를 도우려 하나 저의 삐뚤어진 성격이 회개를 방해하고 있다. 저 마음은 언제나 죄의 기억이 새로우나 그 마음은 이미 죄로 굳어져 있어 회개가 안 되는 것이다.

이는 지상에 생을 사는 신자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이다. 죄를 자꾸 허용하면 그것이 죄인 줄 알고 마음이 괴로우나 진정한 회개를 하려해도 되지 않는 것이다. 죄의 파괴력은 이와 같아 처음부터 가느다란 죄라도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지고 있는가

하고 나면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죄의 유혹 앞에는 인간의 힘은 아주 무력한 것이다. 이것이 죄의 권세이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여 깨어있어야 한다 죄로 굳어진 그 마음은 다른 악령들과 함께 어두운 곳에 자신을 숨김으로 어느 정도까지 빛에서 오는 고통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241. 하나님은 참으로 사랑이시다. 그는 사람을 자기와 함께

영원히 행복된 교제 가운데 살게 하려고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완고한 마음과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그 얼굴을

하나님께 돌리고 지옥을 자기 집으로 삼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나 지옥에 넣기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사람이 스스로 죄에 얽매여 자신을 위하여 지옥을 만든다.

하나님은 결코 지옥을 만들지 않았다.

악한 자가 빛으로 충만한 천국에 이르면 선인과는 달리 스스로 불안을 느끼고 천국의 빛이 그의 더러워진 생애를 환히 비추어 들어낸 때문에 저는 제 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하여 도망하며

중간 상태인 영의 세계에도 있지 못하고 그곳을 지나 거꾸로

무저갱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때 아름답고 황홀한 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보라 나의 사랑하는 아들들아! 아무도 여기 오는 것을 금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이 사람을 막은 사람이 없고

아무도 여기서 나가라고 명령한 사람도 없다. 이 거룩한 곳에서 도망하게 만든 것은 그 사람의 불결한 생애이다"

242. 지옥으로 내려가는 자 중에는 이런 자도 있다.

"당신의 깨끗하고 사랑스런 생애를 만약 생전에 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눈이 어두운 때문에 당신의 참된 영적 생명은 육체에 가리워서 그 속의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이

후회스럽다. 내가 당신을 죽였기 때문에 당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던 축복과 유익들을 빼앗아 버렸다 이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죄인이요 형벌 받기에 합당한 자이다. 나는 내 몸을 어둠 가운데 숨기는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나는 이 빛에 견딜 수 없다. 이 빛 가운데서는 내 마음이 괴로울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나의 죄 깊은 생애를 보고 있는 것이 괴롭다"

이때 성도가 말하였다 "그대는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 오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의 어린양이 자기의 깨끗한 피로서

씻어주실 희망이 있다 그러면 그대가 새 생명을 받고 지옥의

고통에서 구원받고 우리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죄인이 다시 말하였다 "내 죄는 다 들어 났으므로 벌써 고백할

필요가 없다. 세상에서는 숨길 수 있었으나 여기서는 불가능하다. 나는 당신과 같이 하늘에서 성도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지만

영계의 가는 빛에 내 몸을 비치는 것도 견디기 어렵거든 꿰뚫는 영광의 빛이 환히 비치는 그곳에 들어가면 어찌될 것인가.

나의 가장 큰 장애는 죄 때문에 양심이 무디고 굳어져 내 성질은

하나님을 등지게 되었고 회개가 되지 않는다. 내 속에는 벌써

회개할 능력이 사라진 것 같다. 이제는 아무 희망도 없고 영구히 이곳에서 나를 몰아내는 길밖에 없다. 아! 나는 불행한 자이다"

그때 한 천사가 말하였다 "보라 여기서는 아무 형벌도 선고할

필요가 없다. 어떤 죄인이든지 그의 생활이 그의 죄를 증명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세상에 있을 때부터 죄인의 마음에 죄의 형벌은 시작되는 것이고 이곳에 와서야 그 충분한 결과를 맛보는 것이다"

243. 세상에 있을 때 거짓이 습성이 되어 죽어서도 거짓을 하려했으나 저가 말하기 전에 저의 생각이 모든 사람에게 다 드러나는 바람에 퍽 부끄러워하였다. 거기서는 마음의 어떤 상태든지 숨길 수 없고 겉으로 드러나기에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모든 죄가 새겨진 대로 하늘의 빛 가운데 다 드러난다. 거짓하는 사람은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요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한 인식력을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를 죄인으로 선고하고 위선자로 심판하는 것은 진리이다.

244. 간음자의 모습은 마치 목말라 지친 사람 모양으로 혀를

드리우며 콧구멍은 붓고 몸 안에서 불이 붙어 올라오는 듯 손뼉을 치며 가슴을 긁고 있었다 모든 사치품과 감각적인 것은 세상에 두고 온 때문에 지금은 미친개와 같이 돌아다니며 부르짖는다. "이 생을 저주하라 여기는 고통을 끝내는 죽음이 없구나.

이 고통은 세상에서의 고통보다 많이 크구나. 나는 어쩌면 좋은가!"

다른 여자와 음행하는 것 뿐 아니라 자기 아내에 대해서도 너무 과도한 동물적 욕구에 잠기는 것도 이 죄에 포함된다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는 것은 육체욕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서로 돕고

합하여 그 자녀들과 함께 인류와 하나님께 그 생애를 바치기

위함이다. 간음을 크게 보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욕망을 채우는 것도 이 죄에 포함된다.

245. 도적질을 일삼던 사람은 영계에서도 도적질을 하려한다.

그러나 천국의 모든 물건 그 자체가 저의 불의를 말하고 책망하는 듯한 느낌에 놀래었다. 지상에서 포악을 행하다가 저 세상에서도 그 성질을 버리지 못하는 자가 여러 시대를 두고 고통하든가 영원히 고통할 것인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죄인의 영혼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고통이 끝이 없다. 빛이 없는 일종의 불이

끊임없이 붙어 저들을 괴롭게 하고 영혼은 죽지 못하고 불은

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불이 마지막에는 깨끗케 하는 불꽃이 될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246. 육체의 죽음은 끝이 아니고 영계의 탄생날이다. 전심으로

주를 섬긴 참 신자가 죽기 조금 전에 주께서 그 영안을 열어주셔서 아직 육체를 떠나기 전에 영계를 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가 죽어 자기 영체를 보니 빛나고 또 묘하여 추잡한 육체와는 아주 달랐다. 그가 육신의 껍질을 완전히 벗은 직후 그는 영으로 자신의 죽어있는 육체를 볼 수 있고 자기 방과 집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천사들과 사랑하던 사람들에 싸여 주님 앞에 이르렀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의 기쁨에 참예하라.

저를 위하여 태초부터 예비하여 둔 가장 영광스런 주택으로

인도하라"는 주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땅에서 가졌던 생각과 같이 주를 등지고 천사와 같이 가는 것은 주를 모독하는 일이

아닐까 하여 주저하다가 드디어 얼굴을 주택쪽으로 향한즉 놀랍게도 어느 쪽에서도 주를 볼 수 있었다. 거기서는 낮은 자도 높은 자를 시기심으로 보는 일이 없고 높은 자도 낮은 형제에게 봉사하는 것을 행복으로 알고 있다.

하늘에는 곳곳마다 굉장한 공원이 있어 언제나 모든 종류의 아름답고 달콤한 과실이 열리고 영적 식물이 있으며 여러 꽃이 피어 시드는 일이 없다. 과실을 먹을 때는 기이한 맛과 상쾌한 감각을 느끼며 그것이 아름다운 향기로 화하여 몸의 기공을 통하여 발산하여 주위의 공기를 청량하게 한다. 빛깔이 화려한 새들의 아름다운 찬미와 천사와 성도들의 찬미 또한 어울려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게 한다. 이것이 주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한 낙원이다. 거기는 죽음의 그림자도 없고

잘못이나 죄나 고통도 없이 영원히 계속되는 평화와 기쁨만 있다.

247. 하늘에서는 모든 물건이 영적이요, 영안은 중간 물체를 꿰뚫고 한없이 먼 거리까지도 볼 수 있다. 그곳에서는 영혼의 상상력이 믿는 것은 모두 다 갖추어져 있고 그것들은 그를 위해 봉사하려고 준비되어 있다. 이웃은 그와 비슷한 영혼의 상태를 지닌

자들이 살고있어 늘 즐겁게 교제할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을 기다리는 영광스런 미래인 것이다.

248. 천국에서도 교만은 주를 보는 일이나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을 막아버린다. 이 교만의 치료법은 지상에서와 같이 겸손이다.

지상에서의 기도와 겸손의 생활은 영계에서 삶의 질적 향상을

가져온다. 또 신앙으로 죽음을 준비해온 자는 중간상태를 그리

오랜 동안 거치지 아니한다.

249. 천국에서의 선은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고 더욱 진보하여

그칠 줄 모른다. 그것은 지상에서처럼 저들의 진보를 방해할

죄가 깃든 육신이나 세상의 유혹이나 악의 무리가 없고 오직

모든 사물이나 다른 성도들이 그를 돕고 있기 때문이다.

의인의 영혼이 도달한 선의 정도는 그의 얼굴 전체에서 방사하는 광채로서 알 수 있다. 사람의 품성과 성질은 큰 영광으로 나타나 무지개와 같은 여러 가지 광채로 그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주님의 선한 빛 아래 모든 것이 그 진정한 모습을 숨기지 못하여 드러내고 있다.

천국에는 질투가 없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영적 향상과 영광을 보기를 기뻐하여 이기적 동기는 조금도 없이 항상 충심으로 서로 봉사한다 한량없는 은사와 하늘의 축복이 모든 공동사용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 누구나 이기심으로 자기만을 위하여 쌓아두려 생각하는 자도 없고 만물은 모든 이에게 있어 흡족하게 풍부하다.

250. 천국에서의 하나님의 모습은 가장 높은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신 예수의 인격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의의 태양이요, 세상의 빛이요, 사랑 자체이신 주께로부터 고치는 힘과 생명을 주는

광선과 빛과 사랑의 물결이 흘러나와 우주 끝의 끝까지 미치고 성도와 천사들을 통하여 흐르며 그 접촉하는 곳은(만일 이 빛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활력을 주어 충만하게 하는 것을

본다. 간단히 말하면 하늘에 사는 사람들의 모든 소원과 욕구는 주안에서 충분히 성취된다.

251. 성경에는 많은 말씀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여 혼란을 일으키는 내용이 많다. 이는 성경이 이 지상의 사람 뿐 아니라

천국의 사람도 읽기 위해 쓰여진 까닭이다.

사람마다 영적인 이해의 차이가 있듯이 그들 각자의 정도에 알맞게 서로 이해의 빛도 달라 그 영적 의미도 수준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성경의 말씀에는 틀림없기에 서로 성경의

옳음을 가지고 주장하다 보니 한 성경에서 나온 말씀들끼리 서로 상반된 뜻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의 해결방법은 이해력이 높은 자는 낮은 자를 무시하지 않고 또 낮은 자는 그 수준에 머무르지 말고 더 높은 수준으로 정진해야 하기에 낮은 수준의 의미를 자꾸 탈피하고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야 한다.

252. 몇 달 전 그는 눈 안에 부스럼이 나서 너무도 아픈 때문에

혼자 방안에 누워 있었다 몹시 아파 아무 일도 할 수 없기에 다만 기도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에 영계가 열리며 많은 천사들이 그 주위에 둘러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와 동시 그의 전 주의가

그 현상에 집중되어 아픔은 잊어버렸다

253. 천사들은 모두 새 이름을 받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주님과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각 다른 시대에 다른 지방에서 주께 봉사하던 사람들이다. 아무도 그들의 이름을

알 필요는 없다. 또 전에 땅 위에 살던 이름도 알 필요가 없다.

또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아는 것을 싫어한다. 이유는 사람들이 그들을 큰 자로 여겨 주께 돌릴 영광을 자기들에게

돌릴까를 염려함이다.

254. 사람이 물에 잠기면 위나 아래나 다 물 뿐인 것처럼 영계나 지상에나 어디든지 하나님으로 충만하나 그중 영이 열린 자는

하나님을 보고 그렇지 않은 자는 보지 못한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그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요, 또 그의 생명과 사랑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각 사람의 영적 진보의 등급은 각 자가 하나님을 알고 또 느낄 수 있는 도수에 따라 규정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의 수용량에 맞추어 자신의 영광의

모습을 계시하신다.

신의 임재는 깨닫고 기뻐할 수는 있으나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과자의 단 맛은 먹는 자는 느낄 수 있으나 그것을 말로 아무리 잘 설명해도 실제 맛보는 그 기분은 전해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늘에서는 신의 임재의 기쁨 속에 항시 경험하며 살기에 그것을 말로 표현할 필요 없이 모두 이해하고 있다.

바다 물 속에 많은 생물이 살고 있듯이 하나님의 존재 안에 무한한 종류의 피조물이 살고 있다. 하나님은 무한이요, 우리는 유한이기에 유한한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상 안에서만 볼 수 있다.

255. 하늘에서는 누구도 거리 관념이 없다. 어느 곳에 가려고

생각하면 그 즉시로 자신이 그곳에 나타난다. 거리는 다만 물질 세계에서만 느끼는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 다른 지역에 있는

성도를 보기를 원하면 그 순간에 즉시 자기가 그곳에 나타나든지 멀리 있는 그가 자신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또 높은 곳에 사는 자가 낮은 곳에 내려오고자 할 때에는 일종의 영의 가림이 있어

그의 몸에서 나오는 광채로 인해 낮은 곳에 사는 자들이 불안을 느끼지 않게 하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자도 일종의 영적 가림이 있어 그곳의 빛과 영광에 견딜 수 있도록 한다.

256. 만물의 창조는 다 목적을 가지고 있다. 비록 예수께서 저주한 무화과가 즉시 말라 죽었다해도 창조주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생명의 주께서는 각 피조물을 향하여 어떤 특정의 목적을

부여하신다. 그러나 만약 그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 듯 보이는 것은 더 높은 의미상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 생명을 찾으신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다른 이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 것을 보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인 것이다.

무화과나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일지라도 더 높은 인간에 의하여 그 생명을 잃는다해도 그것이 의롭고 가장 존귀한 봉사라면 한 그루의 나무가 그릇된 이스라엘을 경계하기 위해 희생되었다.

해서 무엇이 의롭지 않겠는가 그리스도는 이 무화과나무로서

유대인과 전 세계를 향하여 열매 없는 생활과 창조 목적에 위배하는 자는 다 마르고 멸망한다는 것을 교훈 하신 것이다 만약

누가 열매를 찾을 시기가 아닌데 주님께서 저주하였다고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선행을 할 시기는 정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257. 하나님은 인간을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기계와 같이 짓지

않으시고 항성이나 유성같이 일정한 궤도 밖에는 나갈 수 없는 운명으로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인간을 자신과 같이 이해력과 결의와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의 능력을 가진 자로 창조하셨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보다 우수하다 자유행동자가 아닌 상태는 다만 기계와 같아 알지도 못하고 감각도 없어

무한의 공간을 감각도 없이 돌아다니는 별과 같기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영적인 기쁨은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지각하는 영혼이 있어 선택에 의한 기쁨으로 하나님의 완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258. 인간과 만물이 허무에 끌려가게 된 것이 결코 영구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자신과 만물에 허무의 상태인 병과 고통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 영적 고민에 의하여 그 영력은 십분 발휘되고 고통과 싸우는데서 완전에 이르는 필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어느 것이든 결국에는

악을 이기고 선으로 회복될 것이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259. 하늘의 백성은 누구나 하나님은 사랑이신 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을 구하기 위해 친히 사람이 되시고 그들을 속죄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죽으시기까지 하는 놀랄만한 사랑인 것은 영원의 옛적부터 숨겨져 있었다. 저는 허무에 복종하고 있는 인간과 만물을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고통을 당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되는 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사랑스런

마음을 인간에 보이셨다. 그렇지 아니하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그의 무한애는 영원히 나타나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고로 만물은 열심으로 하나님의 뭇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때는 피조물이 다시 회복되고 영화되는 때다.

그러나 지금은 저들이나 모든 피조물이나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기까지 함께 탄식하며 고통하는 일이 계속된다.

또 중생한 자도 심중에 신음하며 육체가 구속되기를 기다린다.

그리하여 때가 와 전 창조물이 만사에 하나님께 복종할 때에는 파괴에서 구원되고 영원히 허무한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한없는 행복 속에 살 때 창조의 목적은

다 이루어지고 하나님은 만물 중에 전체가 되는 것이다.

260. 주께서 택한 세 사람을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간 것은 다만

휴식하기 위한 것 만이 아니라 저들에게 영광스런 신성의 본체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저들이 주와 늘 접촉한 것은 이 계시를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 저들은 주의 기적을 보고 놀랄만한 말도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저들이 존경과 경탄의 마음을 가지고 그곳에 머물러 있는 일이다. 복잡 다단한 나날을 떠나

인적이 고요한 곳에서 주의 신성한 인격과 초절한 영광에 대하여 고요히 묵상에 잠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때 저들의

영안이 열리지 않고서는 주님의 얼굴과 함께 한 모세와 엘리야의 얼굴도 볼 수 없었을 것이고 저들의 귀가 열리지 않고서는 주께서 당할 최후에 대한 말씀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또 저의 말을

들으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도 못 들었을 것이다. 결국 주와 교제하여 주를 보고 깨닫고 듣는 것은 명상에 의하여 우리의 영안이 열리고서야 가능한 것이다.

261.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이 되고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 마음을 세상의 어지러운 소리에서 떠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달고 오묘한 음성을 들을 수는 없다. 우리가 전심을 기울여 그를 대망하기 전에는 그를 만나거나 친교에 들어갈 수 없다. 이는 내가 잠잠하지 않으면 남의 말을 들을 수 없고 내가 주의를 집중하지 않고는 남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도 모든 정신과 감정을 집중하여 그 앞에서 고요히 기다리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전심을 기울여 그를 찾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262.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나라에 들어갈 때 왕의 좌우에 앉게 해달라던 두 제자와 같이 세속적 영달을 위하여 거룩한 교제를 원해서는 안 된다. 마리아는 보좌 옆의 높은 자리를 원하지 않았고 주님 발아래 앉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생명의 말씀을 들었다. 그의 좋은 위치를 빼앗기지 말라하신 그 자리를 그녀는 택한 것이다.

263. 명상 중에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말씀하신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 때, 그것은 말이 아니요,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넘치는 은혜요, 그의 충만한 임재이다. 샘이 흘러 넘쳐 그릇에 차는 것같이 성령과 참 평화는 마음을 낮추는 자에게 부어 넘친다. 하나님께 올라가는 길은 곧 내가 내려가는 길이다.

264. 이야기 가운데 한 푼 돈 잃은 것같이 그리스도를 잃었다해도 그를 찾으러 로마나 예루살렘에 갈 필요가 없고 그의 집이요, 보좌인 마음깊이 영혼 속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는 언제나 그곳을 비운 적이 없으시다. 우리가 잃은 것이 있다면 그가 그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스도는 배 가운데 잠든 것같이 우리 마음에 잠들고 계신다. 우리는 큰 기원의 소리로

잠든 그를 불러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실은 그가 잠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잠들고 있는 것이다.

265. 우리 마음 속에는 항상 격정의 폭풍우가 휘몰아친다.

이것은 곧 욕망이라 불리우는데 우리 의지가 이 욕망으로 유혹하는 자를 거부하여 정글 속에서 샘터를 발견하기까지 기갈에 고통하는 사슴처럼 하나님께 대한 갈구로 강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는 견디지 못하게 된다. 마음과 욕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의 만족은 채워진다 새 새끼가 입을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듯이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다.

새끼들은 아직 눈이 뜨이지 않아 어미를 보지 못하는데도 어미가 가까이 오면 기척을 채리고 죽자사자 입을 벌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먹이를 먹고 나서야 비로소 잠잠해지는 것이다.

그 새끼들은 어미의 사랑에 대하여 조금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기에 얼마 후에는 눈이 뜨여 어미를 보고 행복을 느끼며 어미 모양으로 튼튼히 자라서 오래지 않아 창공을 훨훨 날아다닐 것이다. 그러나 육체로 사는 인간은 이를 모르고 오히려 육체의 욕망을 차지하려 애쓴다.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인간은 이 새보다 못하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존재와 그 사랑에 대해 의심을 갖고 가까이 하려하지 않는다.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다.

266. 지식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가 지은 지옥을 두려워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런 마음의 예배는 마치 자신을 지옥 불에서 건져달라고 뇌물을 드리는 것과 같이 참되지 못하다. 또 창조주와 그의 한없는 사랑을 저버리고 다만 그가 만드신 천국을 얻으려고 예배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지옥을 막고 천국을 얻기 위해 예배한다면 오히려 그 가운데 숨어있는 욕망에 빠지게 된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선을 사랑한다면, 그는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충만한 임재의 기쁨을 주실 것이다.

267. 만일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피조물을 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뿐 아니라 피조물도 잃을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만을

구하면 그와 함께 피조물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자아를 구하는 것은 필경에는 징벌과 비참한 종말밖에는 얻을 것이 없다. 우리는 자신을 구하는데서 모든 것을 잃는 비참과 고통이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면 하나님도 잃고 자신도 잃어버린다.

268.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같은 비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존재자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하려 하니, 그것은 더 어리석은 일이다. 미련한 자는 그 속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니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자는 이미 그가 소경이요, 하나님을 알 능력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무신론자가 하나님이 없다고 소리치는 것은 마치 태양이 없다고 주장하는 곤충의 생각과 같다. 태양이 있다는 것은 나면서 소경된 자 외에는 이론을 펴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269. 사람들 중에는 이쪽도 저쪽도 부인하지 않는 것을 현명하게 여기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아니하는지 인간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이론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욕구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부여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내적 욕구 없이 창조되었다면 그것은 창조의 본의에 위배되고 그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어미에게서 아이가 낳아질지라도 그 아이는 또한 어미와는 다른 별개의 존재이다.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어미를 사랑하나 어미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만큼은 어미를 사랑하고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는 자랄수록 더 알게 되며, 어머니와 친교에 따라 충분히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광대 무변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지식은 알면 알수록 끝이 없다. 우리는 진보하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 생명을 주시는 임재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비록 현재는 충분히 모른다해도 만약 우리에게 주어진 빛을 따라 가기만 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고 영원토록 이 일은 계속될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의 완전함에

이르는 길이요 운명인 것이다.

만약 현 단계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때는 하나님이 그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피조물이 실제로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충분한 준비를 하시기 때문이다.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알기를 적극적으로 원하시기도 하신다. 배우는 자에게는 단순히 듣기만 하는 자보다

적극적으로 찾아내려는 노력을 하는 자가 더 알게 된다. 그러나 지식으로 아는 것보다 내 자신의 자각으로 경험에 의하여 아는 것이 보다 참되게 아는 것이다. 또 믿기 전에 지식이든 경험으로든 알려는 것은 결코 참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즉 알기 전에 믿음이 필요하여 믿음으로 알게된다는 뜻이다. 결국 먼저 믿음에

의하고, 그 뒤 지식이 오고 다음에 산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순서이다.

270. 인간은 신의 존재를 떠나서는 사물의 어떠한 것도 그 본질을 알 수 없다. 인간은 사물의 외적인 특색은 조금 알 수 있겠지만 그 내적 생명은 조금도 모른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어느 한 쪽을 알면 다른 한 쪽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것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아서 창조되지 않았다면 사람이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열망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신은 다만 신에 의해서만 알 수 있기에 신은 인간이 되셨다. 우리가 하나님같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다. 그러나 신과 인간은 분명 다르다.

271. 하나님은 진리를 찾는 어떤 사람에게도 그 신앙이 잘못되었다. 해서 낙심시키지 않고 그 사람 자신이 그릇된 것을 알도록

점차 진리를 식별할 수 있도록 하신다. 정글 속에서 아름다운

돌을 주워서 그것이 다이아몬드 인줄로 착각한 한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그것을 보석상에게 보였다. 상인은 그것이 가짜인줄 알았으나 그가 실망할 것을 고려하여 그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고 그에게 자신의 일을 거들도록 시켰다. 결국 그는 지식을 습득한 후에 자신의 것이 다이아몬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주인에게 그동안의 배려에 감사했다. 이 이야기에서 보석상 주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그릇된 길에서 방황하는 자를 참길에 인도하기까지 저들이 스스로 진리를 깨닫도록 오래 참으시고 오히려 은혜로 다스리신 후 전 생활을 바쳐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하신다.

272.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상 받기 위한 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배고픈 자신에게 빵을 주는 자를 향하여 감사하기는커녕 선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이 그에게 제공했다고 오히려 큰소리 칠 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상 받을 일이 아니고, 그의 은혜로 선을 행한 것이니 감사할 일이다.

273. 창조주는 인간에게 지적인 감각과 의지를 주셨다.

하나님에게 봉사하는 힘을 얻기 위하여 인간은 영적인 양식을

지혜의 이빨로 씹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이 지혜를

세상의 일에 대해서만 사용한다. 이는 마치 앙상한 뼈다귀를

발견한 개는 입이 찢어지도록 그것을 깨물어 자신의 입이 터져 나오는 피를 맛있게 먹는 것과 같다.

274. 같은 땅에 원천을 둔 하천도 원래의 바다로 돌아가려면

여러 지역을 통하여 흐르기 마련이다. 여러 지역을 통할 때

그것을 자기의 것이라 소유를 주장할 자는 없다. 그 물은 여러 곳을 흐르면서 모든 사람들의 기갈을 풀어주기 때문이다. 그처럼 하나님의 생명의 물은 하나님의 광대 무변 한 대양으로부터 나와 예언자들이나 사도들의 수로를 통하여 모든 자의 갈증을 풀어주며 성도에게까지 이르는데 어느 성도가 그것을 자기에게서 그치게 한다면 나머지 그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들은 어찌할 것인가.

275. 영적인 고통은 죄의 결과이고 신체적 고통은 병이나 상해에서 오는 것이다. 모든 생물이 감각 기관의 발달 정도에 따라 고통을 받을지라도 인간처럼 고통이 심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감각과 한층 높은 지력이 고난에 대한 심도를 더하게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언제나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면 그 상상하는 정도만큼

실제 고통은 증가하는 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자연계(동물계)에 있어서 몇몇 사태를 제외하고는 보통 죽는 일이 그다지 고통 없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죽음에 당면할 때에는 독의 효력이나

상처의 충격으로 피해자는 반 무의식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심하지 않은 상태이며 고통이나 고난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악에서 오는 결과이며 그 열매는 고민이다.

276. 고통과 고난을 언제나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많은 물건 중에는 맛보기에는 쓰고 나쁜 것같이 보이지만 그것들은 실제로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아주 유용한 것일 때도 있다. 어떤 독이나 불유쾌한 괴로움도 일종의 약과 같은 효력으로 사용될 때도 있다. 하나님은 본래 유해한 것이나 나쁜 것을

만드신 것이 아니고 올바르게만 사용한다면 하나님이 만든 어떠한 것도 해할 수 없다.

고통과 고난은 사람을 영적 상태로 눈뜨게 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일 뿐 아니라 곤경에 있는 자를 돕고자 하는 선한 사람들에게도 힘을 더하여 준다. 그들은 완전을 향하여 성장하는데 필요한 우수한 자질을 양성할 기회를 준다. 참다운 우리의 나아가야 할 길은 고통이나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 그들을 감수할 때 겁을 먹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바꾸어 그들과 싸워 승리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쁨과 평강의 참된 가치는 고통이나 고난을 알지 못하고는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다. 단 것은 쓴 것을 알지 못하고는 제대로

알 수 없고 행복은 재난을 경험하지 않고는 제대로 진가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얻기 전에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은 나중에 그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지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이것이 천국적인 것과 지옥적인 것의 평정이다.

277. 진주의 모양은 서서히 이루어지지만 그동안 진주조개는

각종 생물이나 기생충 작은 고기 모래알 등의 침입으로 큰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진주는 고통과 고난의 산물인 것이다.

고통을 겪으면서 태어난 진주처럼 영의 생명도 고통과 고난 없이 아름다워질 수 없다. 그러나 이 가운데 주의할 것은 그 진주의

보관이다. 아름다운 상태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겸손을 잃으면

그 높은 상태에서 떨어져 빛을 잃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278. 금강석이나 그 밖의 보석류는 아름답게 되기 전에 천연의 실험실 속에서 열과 추위 압력에 시달리며 몇 백천 년의 세월을 경과하였다. 인공으로 만든 금강석이나 보석류에는 결점들이

있다. 인간의 생애는 결점 투성이 일지라도 때때로 하나님의

연단을 받으면 그 임재 안에 들어갈 수 있다.

279. 비나 폭우는 파괴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변장한 은혜이다. 그것은 여러 종류의 치명적인 병균을 깨끗이 없애며 이곳 저곳을 청소하기 때문이다. 또 태양의 열은 구름을 형성하기 위해 먼저 물 표면을 끓여 수증기가 되게 한다. 물이 은혜의 소낙비 되어

지상의 많은 생물에게 생명을 공급하기 위해 먼저 태양열에 데워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고난의 생명이다.

280.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때문에 자살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평화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고난에 대하여 이해하며 인간으로서 자신이 직접 고난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고난 당하는 자들을 돕고 계신다.

281.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당하며 살고 있다. 악인은 착한 사람을 만나면 자기의 본성이 그들의 본성과 다르며 양립할 수 없기에 본성적으로 반대를 취하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도끼에 찍혀지면서 은은한 향내를 내는 백단목과 같다 고난에서 벗어나지 못해 불평하는 것은 진실과 주님을 부정하려는 자이며 세상을 가까이 지내려는 자이다.

282. 어려운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일진대 우리가 왜 기피하려 하는가. 우리 운명으로 하나님이 주신 그 상황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난을 피하려는 우리의 뜻이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속에 절망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 시험을 통과할 때 기쁜 날이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꿀벌은 그저 꿀만을 모으지 않고 침을 가지고 있으며, 아름답고 향기로운 장미꽃도 가시를 가지고 있다. 침이나 가시는 모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인데 우리는 그 속에서 표면만 보고 속의 깊은 뜻은 발견치 못한다. 바울의 몸에 있는 가시도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283. 만약 사람들에게 버림과 쑤근거림과 창피를 당한다해도

그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거나

어떤 일을 벌이든지 우리는 전혀 개의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만이 우리의 뜻이요, 관심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을 향하여 개들이 짖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그에 낙심해서는 안 된다. 개는 짖더라도 이방인은 갈 길을 가는 것이다.

개는 얼마 동안은 따라 오지만 다시 돌아간다.

284. 만약 장님이 길을 더듬으며 걸어온다면 눈 뜬 사람은 그와 부딪치지 않도록 길을 비켜주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장님이

갑자기 부딪쳐 왔다면 성을 내는 대신에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장님과 부딪친 것을 속상해 한다면, 그는 장님보다 더

눈 먼 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와 불신자와의 관계이다.

285. 눈이 많은 곳에는 곰이나 짐승들은 여름 한 철에 먹은 것으로 몸에 지방을 저축하여 겨울의 몇 달을 지낸다. 우리도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양식을 취해 고난 때에 흔들리지 않도록 힘을 기를 수 있다.

286. 자기의 결점을 보지 못하는 자들은 항상 남의 결점만을

들추게 마련이다. 자기 결점을 안다면 어찌 남의 결점을 이해 못하겠는가. 사람들은 저 자신의 결점은 보지 못하는 대신에 무엇이든지 보고 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만 씻어주는 분으로

보지 말라. 그는 죄를 짓지 않도록 힘까지 주시는 분이시다.

이런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면 결코 보이지 않던 우리 자신의 결점을 볼 수 있도록 또 끊을 수 있도록 힘을 얻을 수 있다.

287. 악은 비자연적인 것으로 존재 법칙에 상반되는 것이다.

악을 행할 때의 심정은 그것이 악이라는 개념으로 싫어하기 보다 그것을 좋아하여 행하는 것이다. 그는 그 악으로 자신의 기쁨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선은 하나님의 속성이나 악은 아니다. 또 악이 사단의 속성이라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왜냐하면 사단도 죄가 없는 결백한 상태에서 만들어졌는데 현상으로 나타난

악은 자유의지를 쓰는데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악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마지막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에는 악은 선에 의해

소멸된다. 악은 소멸적이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지옥도 마지막에는 천국으로 바뀌는 날이 올 것이다.

288. 히말라야 산 중에 어떤 굶주린 사람이 아주 맛있어 보이는 과일을 발견하였다. 정신 없이 먹었으나 그것은 독 있는 것이었다. 자기를 만족시키려던 굶주린 사람과 그를 괴롭히던 굶주림은 함께 죽음으로 영구히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이처럼 우리의

기쁨을 죄악적인 것으로 만족시키려 하면 당장은 기쁠 수 있으나 결국은 우리를 해하고 만다.

289. 참나무의 어린잎을 찌르는 곤충의 침은 그 잎이 성장하면 혹으로 발전한다. 어느 때 주위의 악에 물들면 언젠가는 그 피해를 입게 된다. 뱀은 자기의 독으로 저 자신은 해를 입지 않으나

다른 동물은 해를 입힌다. 이처럼 악인은 자기와 성질이 같은

자들과는 다른 선한 사람들에게 더 치명적인 해를 입힌다.

쟈바의 우파스 나무나 미국의 독초는 수액이나 기름의 일종을

내뿜는데 그것이 바람을 타고 옮겨지면 그 영역 안에서 무서운 소모성 역병을 일으킨다. 그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에 의해 악인의 유독한 나쁜 영향은 여러 방면으로 넓혀져 많은 자들을 죽게 만든다.

290. 가장 단단한 나무를 파먹는 벌레나 바위에 구멍을 뚫는

바다벌레는 아주 연약한 작은 벌레이지만 딱딱한 나무나 바위를 파괴한다. 우리가 주의를 하지 못하는 작은 죄의 습관들이 우리를 죽게 한다. 또 뱀이나 전갈과 같이 독을 가진 생물은 상대를

상처 낸 후 독을 주입함으로 죽게 하여 모두들 두려워 하지만,

파리나 모기는 그다지 위험하다고 여기지 못하나 실은 병균을

이리 저리 옮겨 역병을 일으킨다. 세상에는 겉으로 드러난 악인보다 숨은 악인이 더 지독할 수 있다.

291. 덜 익은 과일에 구멍을 내고 곤충이 거기에 알을 까면 과실이 커질 때 과실의 바깥의 구멍은 채워진다. 후에 알이 부화하면 작은 구더기는 과일을 파먹게 되어 겉으로 보기에는 맛있어 보이나 속은 벌레가 먹어 쓸모 없게 된다. 우리가 어릴 때 접촉한 악한 사상과 습관은 착실하게 자라서 영혼의 도덕성을 썩게 만든다.

292. 멕시코에 춤추는 콩이 있다 이 콩은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는 뒤틀리며 꿈틀대다가 서늘해져야 동작을 멈춘다. 그 내막은 어떤 곤충의 요충이 그 속을 파먹다가 햇볕이 비치면 뜨거워

도망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사악한 마음에 의의 태양이 비치면 견디지 못하고 불안하여 암흑으로 도망하려 한다. 그리하여 죄인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그의 사랑과 진리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293.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에 자신이 자유의지의 악용만 피한다면 그 어느 것도 그를 해칠 수 없다. 우리가 죄를

범한다고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고 자신에게 그 해는 돌아온다 죄는 하나님을 보고 느끼는 그의 임재와 그가 주시는 평화를 깨뜨린다. 즉 죄 때문에 우리의 기쁨은 잃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악을 행하는 때는 옆의 누가 피해를 꼭 입게 되고 선을

행할 때 역시 옆의 누가 기쁨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회개란 뉘우치는 것 뿐 아니라 이미 한 일에 대해 해 받은 자에게 갚는 것이다.

294. 병의 치료를 위해 혈청을 주사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의

치료를 위해 주님은 자신의 피를 사용하셨다.

전 우주는 하나의 몸이다 저마다의 지체는 몸 전체에 달렸으므로 한 부분에 고통이 있으면 전체가 고통하는 것이다 만일 혈청이 어딘가 특정한 곳에 쓰여졌다 해도 몸 전체가 효과를 보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또 보이는

세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 나아가 전 우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295. 제 아무리 위대한 마음이나 풍부한 감정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에 가진 사랑만큼 목적이 고귀하고

수단이 진실한 것은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거짓으로 돌릴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과연 누가 엮어내며

그 사상을 과연 누가 상상해 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나 뉴톤의 사상이 거짓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아니고서는 그러한 사상이 전하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역시 예수를 빼고는 그러한 사상이나 행적을 생각할 수 없다.

296. 세상의 지식이나 교육이 우리에게 들려진다는 사실만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그것들은 유익하게 된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그들로 인해 우리는 더욱 파괴적이 될 것이다.

식물이 지상의 물과 태양으로 사는 것 같으나, 실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생명을 인하여 사는 것이다. 외적인 것은 수단에

불과한 것이고 참 본질 곧 그 원인은 속의 것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으로 얻는 지식으로 신앙을 유지하려는 것이 위험한 것은, 그 속에는 참 생명이 없고 외적인 생명만 있기 때문이다. 곧 그것은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참된 힘은 되지 못한다.

희미한 빛은 발할 수 있을지언정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생명력은 그 속에 없는 것이다.

297. 부싯돌이 있는 곳에 불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하는 모정이 있다. 이 염원은 죄와 무지의

소치로 숨겨져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람과 접촉하든가

하나님의 영에 접촉되면 곧 불이 붙게된다. 인간에는 이 세상이나 다음 세상에서나 그 속에서는 채울 수 없는 하나의 갈망이

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은 이를 채우려 이리저리 번민하며 쫒겨 다니다가 끝내는 회개하여 돌아가는 곳이 하나님이다.

298.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존재에 대해 한정된 지식이나 박약한 논리로 증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했다면 그 자신이 침묵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아무 때나 마음 속에 우리가 탄복할만한 지식을 주어 자신을 위한 증거로 삼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임재를 맛본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자신을 증거하도록 하셨다. 개인의 경험은 이론보다 훨씬 신뢰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증거할 때도 행위의 인격으로 보여주는 것이 설교보다 도 효과가 있다.

이제까지 누구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 모습을 보거나 음성을 들은 자가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여러 경우에 예언자들이나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마지막에는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인간의 소리는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하나님의

소리는 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보다 볼 수 있도록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 더 본질이다 말씀은 말이 아니고 행위였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애이다. 또 사람들은 성경은

책으로 읽고 들으면서 그것을 말씀으로 간주하면서 자연이나

여러 창조물은 하나님의 보이는 말씀으로 여기지 않기에 읽으려 하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천박한 일에 매달려 천계의 구성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이 지상에 큰 글자로 쓴 자연의 대서사시에 눈을 돌리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것은 실로 슬픈 일이다.

299.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그 행위를 통하여 일종의 위안이나 또는 하나님을 향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도 자비의 하나님은 그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고 그들의 신앙에 따라 위로를 주지만, 그것이 위험한 것은 영적으로 전진을 못하고 그 피조물을 창조하신 배후의 하나님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300. 인간이 아무리 사악한 생활을 할지라도 본성 중에는 결코 죄에 기울어지지 않고 하나님에 기대는 요소가 있다.

인간의 양심과 영적 감수성은 둔하게 될 때도 있지만 하나님에게 의지하려는 그 불씨는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흉악한 자중에도 선한 점이 발견될 수 있다. 가장 포악하고 잔인한 범죄자 중에도 가난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기도 한다. 그러기에 어찌 어떤 죄인이라도 그가 회개할 수 없다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자가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말의 심정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 불씨인 것이다.

이로 인해 고통을 느끼고 고뇌한다면 그 고뇌는 언젠가는 그를 회복시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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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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