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궁극적 상태와 매우 흡사한데,
단 하나 다른 것은
신성의 본질인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정신분석의 시절을 포함해 이전에는
도달한 적 없는 의식수준에서 열하루 동안 계속해서 항복이 이어졌다. 에고가 생존하는 기반자체와 관련있는 항복이었다.
즉 우리가 자신의 존재자체를 경험하는 과정과 관련이있고,
존재하는 상태를 경험하려는 욕망과 관련있는 항복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나니 항복과정은 끝이 없어보였다.
의심이 떠올랐다.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
의심하는 목적 자체가 방어기제임이 분명했다.
의심은 사라졌고 항복은 대단한 깊이로 이어졌다.
그러다 춥고 비오는 일요일 오후에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가 테이블에 혼자 앉아있을때, 별안간 세상이 기적적으로 변형되었다.
내면에서 깊은 정적과 평화를 느꼈다.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대단한 느낌이었다.
시간을 넘어서는 경험이었다. 사실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공간도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만물이 연결되어 있었다. 모든 생명체를 통해 하나의 큰나로 표출되고 있는 하나의 생명만 존재했다.
육체와의 동일시는 존재하지 않았고, 육체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 공간에 있던 다른 육체에 비해 더이상 어떤 흥미도느낄 수 없었다. 모든 감정과 모든 사건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잠재력이 자연스럽게 움직임과 성장으로 나타나듯이 각 사물이그 내적 본질을 현실로 드러내고 있기에 모든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또한 흔들리지 않는 정적은 성질이 바위처럼 견고했다.
분명한 것은 진정한 큰나는 보이지 않고 시작도 끝도 없는데
육체와 잠시 동일시했고,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딸려오는 이야기 줄거리와 잠시 동일시 했다는 사실이다. 이전까지 자신을 한정된 시간동안 존재하며 타인과 격리되어 있는 육체라고 생각했던 점이 아주 이상하게 보였다. 그런 생각이 터무니 없어보였다.
더이상 분리된 자아의 느낌이 전혀 없었으며 "나"라는 대명사는
사라져서 의미를 잃었다. 대신에 "모든 것임"을 자각했다.
항상 그러했으며 항상 그럴것이었다. 진정한 존재하는 상태가 시간의 외부에 있었다. 육체가 지상에 머무는 기간은 찰나처럼 보였다. 그 기간 동안 작은 자아에 눈이 가려진 탓에 나라는 것의 참모습은 시간을 넘어서 있음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나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가 드러났다.
분리된 존재를 느끼기를 소망하는 생각이 존재하자,
이 생각이 개별인간으로 나타났으며 각 개인은 개별적인 정체성과 그 정체성에 어울리는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만물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부처와 첨단 이론 물리학이 묘사했듯이 우주는 3차원 입체사진을 보여주는 홀로그램같은 것이었다. 만물은 완벽하기에 소망하거나 욕망하거나 창조할 것이 없었고, 어떻게 되어야 할 것도 없었다.
존재가 생겨나는 존재하는 상태의 본질인 "그것"만이 있었다.
그 존재하는 상태가 존재가 생겨나는 근원이며, 이상하긴 하지만 존재를 생기게 하는 원인은 아니다. 자각상태는 엄청나게 익숙한 것이었다. 마치 자각상태를 항상 알고 있었던 듯했고, 마침내 집에 돌아온 듯도 했다. 감정이나 기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감각의 존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것들이 계속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해도 더이상 개인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어떤일이 생기는지 보려고 실험삼아 생각 하나를 찰나동안 품었다. 즉시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들어 버터나 커피를 생각하면, 아무말도 하지 않았는데, 웨이터가 즉시 가지고 왔다.
아무말도 필요없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과도 무언 수준에서 의사소통이 일어났다.
육체가 차를 몰고가서 그날 저녁에 있었던 회의에 참석했다.
달라진 점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강렬하게 살아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살아있는 상태가 그들의 존재하는 상태로부터 보였고, 그들 모두에게 동일한 것인 큰나가 그들의 눈을 통해 보였다. 육체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평범한 대화를 계속 나누는 등 평소하던대로 행동했다. 이때 육체는 마치 카라마적 태엽을 감아놓은 장난감이 자체의 모든 익숙한 패턴과 프로그램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 보였다. 육체는 무슨일으르 해야할지를 알고 있는듯 했고, 그 일을 힘들이지 않고 매우 효과적으로 했다.
모든 대화와 상호작용은 현상으로 목격되었을뿐 지시를 받아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은 자아가 육체가 하는 행동의 창작가로서 존재한다는 믿음은 이상한 허영심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사실 육체는 우주 전체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행동하는 행위자는 전혀 존재한 적이 없었다. 마음이 일으키는 진동으로서 현상이
존재할뿐이었고, 마음은 분리된 존재나 분리된 현실을 갖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그 하나인 상태"뿐이었다.
다음날 오후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현실로 통하는 길이 밝혀졌으니, 개인 상태의 의식으로 복귀하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전까지 실제라고 여겼던 그 개인이 되는 것이었다.
방안의 공기는 방안에 있는 내용물을 경험하지 않듯이 자신의 존재를경험하는 나는 더이상 없었다. 그 공간에는 나는 존재한다를
경험할 나가 없었다. 개별의식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한가지 선택을 의미했다. 실제로는 결정을 내릴 나가 없었기 때문에 선택 스스로가 선택했다.
개별자아를 경험하려는 욕망이 스스로 에너지를 다시 채웠다.
그런 욕망을 놓아버리는 선택이 가능했지만. 세상에서 끝낼 일에 대한 기억이 돌아왔다. 나 인상태를 느끼는감각이 돌아오면서 여러가지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하되, 능동적으로 결정하지는
않았다. 복귀과정이 시작되었다. 과정을 허용할 수도 있었고,
놓아버릴 수도 있었다. 과정을 허용하자 복귀가 계속되었다.
다음날 아침이 밝자 복귀는 완료되었지만 이제 개인적 정체성의
느낌이 달라졌다.
큰나의 참모습이 드러났다 개인으로서 다시한번 삶을 경험하겠다고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받아들였지만, 개별적 존재가 있다는신념에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사실 의식적인 선택으로 인해 선택에 대한 완전한 책임감이 존재했다. 경험면에서 이 모든 일은 자율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한때는 위와같은 의식상태는 신비주의자의 소관이라고만 보았다. 그러나 현재는 이런 상태를 연구해 정보를 얻는 일을 최첨단 과학으로 본다. 특히 양자역학과 고에너지 아원자 입자와 관련된 물리학 분야를 꼽을 수 있다. 아원자 입자연구로 밝혀진 사실은 아원자 입자는 보통 의미의 사물이 아니라 에너지의 주파수가 가져오는
결과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세살이전에는 망각이 있었다. 그러다가 마치 환한 불이 켜진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공void에서 개인적 존재에 대한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앎이 일어났다. 저절로, 달갑지 않게, 언어를 통하지 않고 주관적 상태의 경험적 기초로서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앎이 왔다. 존재와 표면상으로 대립하는 것인 비존재의 가설적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즉각적으로 일어났다. 이렇듯 세살적에 존재대 궁극적
실상으로서의 비존재라는 이원성, 전부임으로서의 궁극적 실상vs무라는 양극성과의 대면이 있었다. 그 경험은 전적으로 비언어적으로 압도적으로 그리고 순전히 대결적이었다.
어린시절의 평범한 활동은 지루했고, 철학에서 피난처를 구했으며, 생활방식은 내성적으로 내향적이었다. 학업의 성취는 용이했으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누스를 비롯하여 정신적 동반자가 된 마음들을 열렬히 탐독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고, 대성당과 고전 종교음악에 심취하여 어느 대성당의 합창단에서 보이 스프라노로서 음악과 목소리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다.
어느날 늦게 어두워진 저녁에 눈보라속에서 신문을 배달하다가
영하 30도의 바람에서 피난처를 찾게 되었다. 눈더미 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쉬고 있는데, 그 속에서 마음이 녹아내리고 침묵하게 된 어떤 의식상태가 졀묘하게 출현했다. 영원하고 부드럽지만
무한히 강한 현존이 스며들었고, 그 압도적인 사랑이 정신화를
대체했다.
시간은 멈췄고, 영원과의 하나임에 대한 앎이 사적인 자기의
모든 생각이나 감각을 대체했다.
현존의 나-임(I-NESS)이 전부임으로서 그 자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모든 우주를 넘어선 것으로서
즉 말할수 없고, 보이지 않고, 모든 것에 스며있고,
설명할 수 없으며, 이름을 넘어선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그 결과 죽음에 대한 온갖 두려움이 사라졌고,
삶은 자연발생적으로 저절로 지속되었다.
이 상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소해정에서 위험한 임무를 맡았는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덕분에 임무수행이 용이했다. 지상에서의 삶의 요구들로 인해 주의와 관여가 불가피했다.
지성에 다시 에너지를 불어넣은 덕분에 학업성취와 의대졸업이
가능했고, 정신의학 및 정신분석을 공부할 수 있었다.
뒤이어 뉴욕에서 대규모 정신병원을 세웠다.
25년간의 고된 일끝에 진실과 지복의 상태로서 신의 현존으로
되돌아가려는 열망이 깊은 명상의 재개로 인도했다.
어느날 숲속을 걷던 도중 청하지도 않았는데,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고 전체가 육중하게 드러났다. 이는 신이 저런 상태를 허락할 수 있었다는 엄청난 충격과 경악의 감정으로 귀결되었다.
마음은 신을 비난했고, 그 다음에 무신론자가 되었다.
타는 듯한 의문이 여전히 계속되었다.
신이 없다면 존재의 진실의 핵심은 무엇이란 말인가?
불교는 신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피했기 때문에 매력적이었다.
실상의 드러남을 잃어버린데 대한 절망이 있었다.
이는 깊은 명상으로 그리고 진실 자체에 대한 치열한 내적탐구로 이어졌고, 결국은 심각한 실존적 우울과 절망으로 귀결되었다.
부동의 목적을 가지고 영혼의 심연을 탐험하는 동안,
깊은 명상상태는 지독한 절망의 영역들로,
그리고 결국에는 사람이 빛과 차단된 영원한 고통의 무시간적 차원들 속의 지옥의 심연으로 인도했다. 심연에는 바닥이 없으며,
사람은 여기에 들어온 너희들 모두 희망을 버려라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영원한 고립에 대한 공포가 뒤따랐는데, 거기에는 그것이 끝나리라는 희망, 사멸에 대한 구원조차 없었다. 왜나햐면 그곳에는 궁극적 도피로서의 죽음의 가능성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희망 그 자체의 내맡김에 따랐다. 그것은 영원한 공포로 대체되었다. 그 다음에 내면에서 침묵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신이시여 계시다면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것은 망각으로 이어졌고, 그 다음에 마음은 침묵하는 상태로 들어갔다.
마침내 앎이 돌아왔지만, 세계의 겉모습은 이미 바뀌었으며
극적으로 변형되었다. 이제 그것은 침묵하는 통일된 하나임이었고, 전존재의 신성을 내뿜는 찬란함속에서 장려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망아 있는 단 하나의 부조화스러운 불일치를 확대시켰는데, 그것은 생명과 존재의 핵심으로서의 사적인 자기감각의 지속이었다. 그것 또한 현존에 내맡겨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 다음에 진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공포로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러한 공포와 함께 선불교의 어떤 가르침에 대한 인식이 왔는데, 그것은 이러했다.
"무슨일이 있더라도 곧장 앞으로 나아가라.
모든 두려움은 환상이다"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자기 정체를 버리고 내맡길 필요성은 강력한 인식이었다. 그 다음에 살려는 의지, 생명 그 자체의 표면적 핵심을 신에게 내맡기자 잠시 무시무시한 고통의 순간이 그 다음에 죽음 그 자체의 경험이 뒤따랐다. 그것은 사람이 갑자기 자유로워진 채 거기 누워있는 육체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이전에 여러차례 일어났던 육체의 죽음과는 달랐다. 아니 그것은 죽음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때이다. 그 죽음의 최종성은 압도적이었다. 마침에 고통이 그치고 광채와 장려함, 무한 멎어있음,침묵, 심원한 무한한 사랑의 평화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마음은 멍해진채 경외감에 압도되었다. 그 다음에 마음은 침묵하게 되었고 그리고 사라졌다.
이후부터는 오직 현존만이 압도했고, 전부가 개인적 의지나 동기
부여없이 자동적으로 출현했다. 그 상태가 사적인 자기를 영구히 대체했다. 침묵하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현존에 의해 전부임의
전체성이 이전의 모든 의식상태, 혹은 사적인 자기나 나에 대한
추정을 대체한다.
흥미롭게도 육체는 동기부여없이 저절로 움직였고 자율적인 활동을 계속 수행했는데, 그것은 생각의 생각하는 사람도, 계획의 계획하는 사람도, 행동의 행동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재성이 현실로 그 자체를 표현함에 따라 전부가 그 자체의 본질에서 일어났다. 이 조건을 가장 잘 묘사해주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나타난 것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후부터 삶은 저절로 펼쳐졌다. 그 상태는 말할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30년 이상 그에 대해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상태는 결국 명상과 고독과 거기에 적응하는 세월을 위해 보통의 세속적 삶에서 벗어나 시골오지로 옮겨갈 것을 요구했다.
그러한 조건안에서 이해는 저절로 일어났으며 그것은 생각을 동반하지 않았다. 이전에 소승불교를 따랐던 나는 불성의 궁극적 실상이 무 또는 공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공 자체는 신념체계이기 때문에 오류였지만, 이번 생에서 명상을 하는 동안 그것은 경험적 실상으로 반복되었다. 부정의 길을 지속적으로 추구할때 공의 상태로 되돌아오곤 하는데, 그것은 대단히 인상적이고 무한하며, 공간 시간 혹은 묘사를 넘어서 있다.
또한 동시에 그것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속속들이 스며있으며,
모든 생각이나 의지작용을 넘어서 있다. 하지만 그 표면상의 비선형적 전체성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적 눈더미 속에서 경험했던 결정적 성질, 즉 형용할 수 없는 부드러움, 고향에 돌아온 느낌, 친숙함, 전부를 포함하는 사랑으로서 실상의 전부임, 그 본질에 대한 인지가 부재하다는 앎이 있었다. 이 사랑의 성질은 기쁨이나 황홀경을 넘어서 있으며 평화상태의 본원적인 것이다.
놀랍게도 공은 궁극적 상태와 매우 흡사한데, 단 하나 다른 것은
신성의 본질인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랑없는 공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텅빈 공간과 같다.
그것을 신성으로 확인해주는 성질이 결여된 공은 한계이다.
이는 표면적 대립들의 최후의 큰양극성/이원성으로 나타났고,
이것의 해결은 그 속에서 창조가 솟아나는 전부임과 하나임으로
참나의 각성을 허락해주었다.
참 나(神=God)
질문자
왜 참나(Self)라는 단어인가?
데이비드 호킨스;
현존의 경험은 근본적이고 완전히 주관적입니다.
마음은 일반적으로 God '저 어딘가에', 즉, 위에, 저 너머에,
초월하여, 천국에, 과거 언젠가 혹은 미래에 있는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렇지만, 전통적으로 신은 초월하며 내재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참나"라는 용어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실제적 존재으 기초가 되는 궁극적 실체인 신이 내부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즉, 천국은 네 안에 있다")
부처는 "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피했다고 말해지는데,
이는 그 용어를 둘러싼 잘못된 개념의 횡행 때문이었습니다.
부처는 그 개념이 혼동케 할 모든 한계를 피하길 원했습니다.
인식자체로서의 "참나"는 문학적으로 "빛"이라고 자주 말해졌습니다. 창세기에 기술된 대로 발현되지 않은 것에서 처음 빛으로 현현됩니다. 빛은 우주로서 형상을 나타낸 신의 에너지가 빛난 것이었습니다.
"참나"라는 용어는 또한 신과 분리되었다는 이원적인 관념을 극복합니다. 역사적으로 여기 아래에는 죄인이 있고 저 위 어딘가 천국에는 신이 있다는 그림은 에고의 관점입니다. 이를테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신"이라는 용어는 "다른 무엇"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창조의 전체성 안에서는 어떤 분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것이 창조주와 분리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분리된 자기(Self)가 실제라는 환상이 제거될 때 참나(Self)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기의 존재를 "나(I)"로서 변함없이 자각하는 것은 본유하는 참나의 신성을 언제나 현재에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증명이 가능치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경험이고 순전히 주관적인 범우주적,
불변의 경험입니다. 참나의 "I"는 신성이, 시간과 형상을 넘어서는 인식근원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런 정체성의 진리는 지각에 의해 만들어진 이원성에 의해 흐려지며 모든 위치성을 포기할 때 사라집니다.
질문자
어떻게 실체(Reality)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데이비드 호킨스:
진리는 철저한 주관입니다. 분리된 자기(Self)라는 상상적 실체를 포함하여 이원성의 환상이 무너짐으로서, 무한한 "나(I)"라는 유일한 상태만이 남는데, 그것은 비현현이 참나(Self)로서 현현된 것입니다.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습니다.
무한한 공간처럼, 거리도 시간도 지속도 없고, 국지성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명하고, 자기 인식이고, 자기 계시이고, 전체입니다.
질문자
영적 정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때가 자주 있습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영적 진리는 의미를 벗어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알게 되는 것이고, 앎은 되는 것에 의해서만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의미화는 지적활동이며 하나의 정의입니다.
영적진리는 고유의 사유작용을 초월한 주관적 자각입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석양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아무것도 '의미하지'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놀랄만한 것뿐이며, 그 자체로 완전하고 전부입니다. God는 직접적 자각이고 경험이고, 깨달음이고, 계시이고,
순수히 주관적인 절대적 완벽함입니다.
신에 본질에 대한 다음 진술은 절대적 확실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God신은, 창조의 전체성과 총합성으로서의 현현임과 동시에
형상에 앞서는 '공함' 혹은 무한한 잠재가능성인 Godhead로서의 비현현이다.
God신은,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혹은 공간과 국지성의 묘사를
초월한 무한이다.
God신은, 편재하며 전능하며 전지하다.
God신은, 의식, 인식, 앎과 지각력의 토대이며 근원이다.
God신은, 생명에너지의 유일한 원천이다.
God신은, 진화와 창조의 원천으로서
둘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다.
God신은, 평화, 사랑, 부동, 아름다움의 현존이고 원천이다.
God신은, 모든 우주와 물질성을 초월하지만,
존재하는 전체의 근원이다.
God신은, 존재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의 유일한 근원이다.
God신은, 우주와 모든 존재가 내용인 궁극적 맥락이다.
God신은, 모든 형상 내부의 선행적인 형상없는 존재의 근원이다.
God신은, 입증가능 하거나 지성의 영역 내에 있지 않다.
God신은, 깨달음이라 불리우는 "나로 있음"인 주관적 상태의 근원이고 에센스이다.
God신은, 자기 실현의 철저한 주관이다.
God신은, 묘사적으로 내재하며 동시에 초월한다.
신의 현존에 대한 인간의 경험은 모든 시대, 모든 문화, 모든 장소에서 동일하다. 신의 현존에 대한 경험이 인간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은 주관적으로 변형시키며, 인류의 역사를 통해 동일하다.
그것은 측정가능한 의식수준으로서 입증 가능한 시간을 벗어나는 영향을 남긴다. 신의 에센스는 인간적 허물, 예를들면 불공정, 조종하려는 욕구, 편애, 이원적, 심판하려함, 격노, 의로운 분노, 후회, 한계됨, 변덕스러움, 허영, 보복, 질투, 복수, 상처받기 쉬움, 국지성 등을 포함하지 않는다.
신성에 대한 묘사가 가변적인 것은 인간 지각의 가변성과 에고의 방해와 에고의 위치성의 투사를 반영한다. 신이 현존함의 순수성은 전통적으로 언어 불가의 성스러운 특질의 에센스이며 서술적으로 "신성한"이라는 용어를 위한 토대이다. 내용이 없는 것은 청정무구와 동등한 것이다. 인간의 정신작용, 감정성과 이것들이 유래하는 에고의 구조라는 장애물이 초월 될 때, 마치 구름이 없어지면 태양이 비추는 것과 같이(신이 내재하는 것으로서의) 참나 그 스스로 빛난다.
God신은, 그 시간과 공간같은 모든 인식적 묘사와 한계를 너머
서서, 모든 창조의 카르마적 단일성의 근원이며 맥락이다.
진리는 그것에 대하여 아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일하게 되는 것에 의해서만 확인 가능하다.
- 데이비드 호킨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