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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왜 다른 사람의 경험을 알 수 없는가?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6.21|조회수15 목록 댓글 1

의식의 개수가 다수가 아닌 하나이고, 우리가 바로 의식이라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르기 쉽습니다. “우리가 같은 하나의 의식인데도 왜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알 수 없는가? 왜 나는 이 몸만을 움직일 수 있고 저 몸은 움직일 수 없으며, 왜 나는 이 몸의 아픔만 느끼고 다른 몸의 아픔은 느끼지 못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의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이 의문의 전제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단 하나의 의식이다.

2. 자아는 몸-생각 복합체이다.

3. 자아는 연극에 등장하는 하나의 역할이다.

4. 우리(의식)는 자아의 역할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5. 우리(의식)는 자아를 포함해서 세상 만물을 동시에 연기한다.

 

이상 다섯 항의 진술이 모두 진실이라고 가정합니다. 다음으로 “왜 나는 지금 다른 사람을 경험하지 못하는가?”라고 질문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숙고해 봅니다. 그러면 질문자가 자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질문자는 연극 속의 한 등장인물 혹은 게임 안의 한 캐릭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자는 우리(나)(의식)가 아닙니다. 질문자는 의식이 아닙니다. 연극의 한 등장인물이 그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등장인물이 그 등장인물의 역할만을 경험할 수 있고 다른 등장인물의 역할은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한 등장인물이 여전히 그 등장인물인 채로, 그 등장인물이 아닌 다른 등장인물을 경험한다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진술입니다. 그런 일은 논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그리고 상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전기가 에어컨이라는 등장인물을 통해서 열기를 경험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전기는 히터에서 열기를 체험하는 동시에 에어컨에서 냉기를 체험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등장인물을 그 등장인물답게 하는 의식과 지금 이 책을 읽는 등장인물을 그 등장인물답게 하는 의식은 같은 단 하나의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질문의 전제가 참이라면, 이 질문은 질문으로 성립할 수 없는 가짜문제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벗어나 오로지 의식의 관점에 집중하면, 다른 사람과 세상 만물을 글자 그대로 동시에 체험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 질문은 의식이 연극의 등장인물처럼 특정한 관점을 가진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의식은 연극의 등장인물들이 취하는 이런저런 관점 같은 것을 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의식은 단일하고 순수한 앎의 능력입니다. 온통 하나면 하나는 하나를 인식하거나 경험할 수 없습니다. 물은 물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미 물이기 때문입니다. 초록색은 초록색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세상 만물이 온통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다면 황금 인간은 자신이 황금이라는 사실을 알 수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이때 황금과 관련해서는 그 어떤 체험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미 온통 황금이기 때문입니다. 의식 역시 이와 같습니다.

 

의식이 의식을 다시 알거나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미 온통 단 하나의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무언가를 알거나 체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대되는 둘로 가상적 분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때의 앎과 경험은 자기인식자기체험입니다. 가상적 분열의 두 가지는 주관과 객관입니다. 이 둘은 의식으로 하나입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난 두 줄기입니다.

 

의식으로서 세상 만물을 동시에 체험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단순합니다. 특정 등장인물의 관점을 잠시 옆으로 밀어두거나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관점도 취하지 않으면 즉시 세상 만물을 동시에 체험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세상 만물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의식으로서 세상 만물을 동시에 체험할 때 어떤 느낌이고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합하여 제로가 되는 느낌 즉 아무런 체험이 없다는 체험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가상적으로 분열한 두 줄기가 다시 하나의 뿌리로 환원되기 때문입니다. 체험이 없는 체험꿈도 없는 깊은 잠이나 몸이 출현하기 전사멸한 후에도 일어납니다. 구체적인 감각과 지각은 반드시 특정 배역(몸-생각)의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특정 배역이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사라질 때 의식은 단순히 세상 만물로 존재합니다. 그 존재의 느낌은 비존재로 존재한다는 느낌입니다.

출처 : "자유롭게 살고 유쾌하게 죽기", 이문호

JK: 하나의 ‘의식’만이 존재하지 않나요? 그런데 우리의 몸과 환경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TP: 벽의 노란색도 너의(네가 지각하는) 노란색은 너의 노란색이고 나의(내가 지각하는) 노란색은 나의 노란색이야. 그렇지만 여전히 모든 것은 ‘의식’일세. ‘의식’이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살아내는 거야. ‘의식’은 토니 파슨스의 형태를 통해 살아가는 것이고, 토니 파슨스는 사실에 있어서 토니 파슨스가 지각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빛’이라네. 우리 모두는 사실에 있어서 이 창조한 세상을 통해 살아내는 신일세. 의식이 우리 하나하나를 통해 살아내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이고 전부이지.

그래서 나는 현재 이 방에 앉아 있는 중이고 이것이 창조한 세상이라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어. 창조한 세상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무한한 세상이며, 토니 파슨스의 세상이라는 독특한 느낌은 가지는 거야.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것’이지.

같은 생각을 자네에게도 누구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지. 우리 모두는 우리 각자를 통해 살아내는 ‘의식’으로서 토니의 세상, 얀의 세상 등을 창조해 내는 거야. 자네가 두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어떤 식으론가 내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데, 그것 또한 내가 창조한 세상이지. 자네의 두통은 자네가 창조한 세상이니까 자네의 두통이 어떠한지는 내가 알 수 없고 지각할 수 없는 것이지.

 

JK: 그렇지만 분리된 개인이라는 느낌은 우리가 자신의 몸은 느끼지만 다른 사람의 몸은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TP: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단 깨달음이 일어나면 더 이상 분리의 문제가 없어진다는 거야. 토니 파슨스가 창조한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것에는 전일성(全一性, 하나임, oneness)이 존재한다는 거야.

 

JK: 그러니 사실에 있어서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창조물이라는 것이군요.

 

TP: 그렇다네. 궁극적으로 깨달음이 일어났을 때, 무엇을 개인으로 보아야 하는지 하는 문제가 없어져 버리지. 나 자신과 요 앞에 앉은 얀이라는 인물 사이에 그냥 아무 분리(경계)가 없다는 말이야. 내가 바로 그것이니까. 그러나 내가 그것이라고 해서 내가 꼭 얀의 두통을 안다는 말은 아닐세.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고. 내가 그것이라는 사실로 족한 거야. 이런 말을 한다는 것부터 우스운 일이지. ‘이것’은 모든 것(전부)이니까. 모든 것의 존재. 그게 ‘해탈’이야.

출처 :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THIS IS IT(The Nature of Oneness)), Jan Kerssc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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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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