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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장자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6.29|조회수24 목록 댓글 1

莊子

 

소요유

 

북명에 곤이라는 이름의 물고기가 있다. 그 몸집이 하도 커서 길이가 대체 몇 천 리에 이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란다. 곤이 변하여 붕이라는 이름의 새가 된다. 붕 역시 등의 길이가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길이 없다. 한번 노하여 하늘을 날면 그 날개가 마치 하늘의 구름을 드리운 듯하다. 그리고 이 새는 바다의 기운이 움직이면 장차 남명으로 날아가려 한다. 남명은 하늘의 연못이다. 제해라는 자는 괴이한 일을 기록했는데, 그가 기록하여 말하기를, 붕이 남명으로 날아갈 때는 3천 리나 되는 파도를 일으키고,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오르면 9만 리를 오르는데, 6개월이나 쉬지 않고 간다고 한다. 야마는 아지랑이와 먼지이다. 살아 있는 것들이 호흡하며 기운을 내뿜는 것이다. 하늘은 푸르디푸른데, 정말 하늘이 푸른 것일까, 아니면 그 닿는 곳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하늘에서 아래의 땅을 보아도 역시 그렇게 보일 것이다.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다. 마루의 움푹 팬 곳에 물 한 잔을 엎지르면 작은 검불은 배처럼 뜰 수 있지만, 거기에 잔을 내려놓으면 바닥에 닿는다.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이 두텁지 않으면 큰 날개를 띄울 수 없다. 9만 리를 올라야 충분한 바람이 밑을 받쳐주고, 그제야 비로소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진 채 막히는 것이 없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에야 장차 남쪽으로 날아갈 수 있게 된다. 매미와 메추라기가 비웃으며 말한다. 자기들은 힘껏 날아올라도 느릅나무나 다목에 앉는 것이 고작이고, 때로는 거기까지 닿지도 못하고 땅에 떨어지는데, 대체 무엇 하러 9만 리를 올라 남쪽으로 날아가려 하느냐고 말이다. 교외로 소풍 가는 사람은 세 끼만 준비해도 배고플 일이 없지만, 백 리를 가는 사람은 이틀 치의 식량을 준비해야 하고, 천 리를 가는 사람은 석 달 치의 식량을 마련해야 한다. ‘작은 앎’은 ‘큰 앎’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삶’은 ‘긴 삶’에 미치지 못한다. 하루살이는 그믐과 초하루를 알지 못하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 반면 초나라 남쪽에 있는 명령이라는 나무는 5백 년을 봄으로 삼고 5백 년을 가을로 삼는다. 또 먼 옛날의 대춘이라는 나무는 8천 년을 봄으로 삼고 8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 팽조라는 사람이 특별히 오래 살았다 하여 그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 사람처럼 오래 살고 싶어 한다면, 이 또한 슬픈 일이다.

 

탕이 극에게 물은 것이 이와 같다. 불모의 북녘에 명해라는 바다가 있으니, 그것이 하늘의 연못이다. 거기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넓이가 수천 리요, 그 길이는 아는 자가 없다. 그 이름은 곤이라고 한다. 거기에 또 새가 있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고 한다. 등은 태산 같고, 날개는 하늘의 구름을 드리운 듯하다. 회오리바람을 타고 양의 뿔처럼 빙글빙글 9만 리를 날아올라, 구름 위세서 푸른 하늘을 등지고, 그런 다음 남쪽을 향해 남명으로 간다. 그런데 메추라기가 이를 비웃으며 말한다. “저것은 또 왜 가는가. 나는 힘껏 날아올라도 불과 몇 길을 못 오르고, 내려와 쑥 덤불 사이를 날아다닌다. 나는 아무리 높이 날아올라도 그 정도이다. 그런데 저것은 또 왜 가는가.” 이것을 작은 것과 큰 것의 구분이라 한다.

 

그 앎이 한 관직을 맡을 만한 자, 그 행동이 한 고을을 맡을 만한 자, 그 덕이 군주에 부합하여 한 나라를 다스릴만한 자는 스스로 보는 것이 이와 같다. 그런데 송영자는 그들을 보고 비웃는다. 온 세상이 그를 칭찬해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온 세상이 그를 비난해도 개의치 않는다. 다만 안과 밖의 나뉨을 뚜렷이 정하고, 영예와 치욕의 경계를 명확히 변별할 따름이다. 세상사에 구구히 이해를 따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아직 세우지 못한 바가 있다.

 

바람을 타고 다니는데, 시원스레 잘 다니다가 15일이 지나면 돌아온다. 송영자는 세상의 복을 이루는 데 급급하지 않았다. 열자는 걷는 것을 면하고 여전히 기대는 바가 있는 것이다.

 

무릇 천지의 올바름에 올라타고 여섯 가지 기운의 변화를 몰며 제약 없이 노니는 사람이라면 어디에 기대는 바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이르기를, 지인은 자기 자신이랄 것이 없다. 신인은 공이랄 것이 없고 성인은 이름이랄 것이 없다.

 

요는 천하를 허유에게 넘기려 한다. 해와 달이 떠 있는데, 횃불을 쉬지 않고 밝힌다 하여 그 빛이 밝아질 수 있겠는가. 농사 때에 맞춰 비가 잘 내리는데도 계속 물대기를 한다면 그 역시 헛수고가 아니겠는가. 허유는 자네가 천하를 다스려 천하는 이미 다스려졌다. 그런데 내가 자네를 대신하다니, 장차 나보고 이름을 구하라고 하는 말인가? 나보고 나그네가 되라는 말인가? 뱁새와 메추라기는 깊은 숲에 둥지를 트는데 나뭇가지 하나를 넘지 않으며, 두더지는 강물을 마시는데 배를 채우고도 넘도록 마시지 않는다. 천하가 소용할 바가 없다. 숙수가 요리를 잘하지 못한다 하여 시동이나 신주가 제기를 들고 다니며 대신할 수는 없다.

 

견오가 연숙을 찾아와 토로한다. 접여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이 너무 커서 마땅하지 않고 이야기가 한참 나아가 돌아올 줄 모르더라. 그 말이 놀랍고 두려우며 마치 은하수가 끝이 없는 것처럼 그 길과 뜰이 너무 폭넓어서 인간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 연숙이 그가 뭐라 했느냐고 묻는다. 막고야라는 산에 어떤 신인이 살고 있는데, 피부는 마치 빙설과 같고 부드럽기가 처자와 같다고 한다. 또 오곡을 먹지 않고, 바람을 들이쉬고 이슬을 마시며, 구름을 타고 비룡을 몰고 다니며 사해의 밖에서 노닌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정신이 모이면 사물이 병들지 않고 곡식도 잘 익게 된다고 하는데, 나는 이런 말들이 하도 미친 것 같아서 믿기질 않는다. 장님은 문장의 아름다움을 보는데 함께 할 수 없고, 귀머거리는 북과 종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어찌 오직 육체에만 장님과 귀머거리가 있겠는가. 무릇 앎에도 있다. 이제 그 말은 지금 자네를 두고 하는 말이로다. 그 사람의 그 덕은 장차 만물을 두루 포괄하여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세상이 난국을 다스려 달라고 바랄지라도, 무엇하러 쓸데없이 천하를 일로 삼겠는가. 그 사람은 사물에 의해 상해를 입지 않고, 큰 홍수가 하늘까지 닿아도 빠지지 않으며, 큰 가뭄으로 돌과 쇠가 녹아 흐르고 토지와 산이 타들어가도 뜨거운 줄 모른다. 그 사람은 그 먼지나 때, 쌀겨나 쭉정이로도 장차 요나 순 같은 성인을 빚을 수 있다. 누가 기꺼이 삶을 일로 삼겠는가. 어떤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관을 밑천 삼아 월나라고 갔는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문신을 하기 때문에 그 관은 쓸데가 없었다. 요는 천하의 백성을 다스리고 세상의 정치를 평안히 한 다음에 네 명의 신인을 만나러 막고야 산에 들어갔는데, 분수의 북쪽 도읍에 돌아오자 멍하니 천하를 잃었다.

 

혜시가 장자에게 이르기를, 위나라 왕이 큰 박의 씨앗을 주기에 가져다 심어 키웠더니 크기가 다섯 석되는 박이 열렸단다. 물이나 간장을 담았더니 박이 무르고 약하여 들어 올릴 수가 없고, 잘라서 바가지로 쓰려니 바가지 깊이가 낮아 소용이 없더란다. 크기는 엄청나지만 자기한테는 쓸모가 없어 부숴버리고 말았단다. 장자는 혜시가 정녕 크게 쓰는데 서툴다고 응수하면서 말한다. 송나라에 손이 트지 않는 약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대대로 솜 빠는 일을 해오고 있었다. 어떤 나그네가 그 이야기를 듣고는 비방을 1백 금에 팔라고 청했다. 가족이 모여 의논하기를, 지금껏 대대로 솜 빠는 일을 해왔지만 불과 몇 금을 벌지 못했거늘 이제 하루아침에 그 기술을 팔아 1백 금을 벌게 되었구나 하면서, 마침내 팔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이 얻은 비방을 오나라 왕에게 선전했다. 월나라가 침략해오자, 오나라 왕은 그 나그네를 장수로 삼았다. 월나라 사람들과 수전을 벌여 크게 물리치고, 얼마간의 땅을 봉토로 받았다. 능히 손을 트지 않게 하는 것은 같았지만 한 사람은 봉토를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솜 빠는 일을 면하지 못했으니 그 쓰는 바가 달랐기 때문이다. 다섯 석의 박으로 어찌 큰 술통을 만들고 강호에 띄우지 않으면서 그 바가지가 낮아 쓸데가 없다고 근심하느냐. 혜시의 마음이 쑥 무더기처럼 막혀 있다.

 

나에게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쓸모없는 가죽나무라고 부른다. 그 큰 뿌리는 울퉁불퉁하여 먹줄을 칠 수가 없고, 작은 가지는 구부러져서 자를 댈 수가 없다. 길에 세워 두어도 목수가 돌아보지 않는다. 지금 자네의 말도 크기만 했지 쓸데가 없어서 사람들이 다들 외면해 버린다. 왜 ‘자네만 유독 너구리와 족제비를 보지 못했는가. 몸을 낮게 엎드리고 사냥감을 기다리며, 또 높고 낮은 곳을 가리지 않고 동서로 마구 뛰어다니는 데, 그러다가 덫에 걸려 붙잡히거나 그물에 걸려 죽는다. 검은 소는 그 크기가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은데, 비록 몸집은 그렇게 커질 수 있지만 쥐를 잡지는 못한다. 큰 나무가 쓸모없다고만 걱정하는가? 어째서 무하유지향의 광막한 들판에 그 나무를 심어놓고 그 곁을 한가로이 노닐거나 그 아래 누워 소요 하지 않는가? 도끼에 찍혀 요절하는 일도 없고, 다른 무언가에 해를 입는 일도 없다. 쓸데가 없다고 하여 어찌 곤고하겠는가.

 

제물론

 

남곽자기가 안석에 기대어 앉아 하늘을 우러러 길게 숨을 쉬는데, 멍하여 그 짝을 잃은 것 같았다. 곁에서 그를 모시고 서 있던 안성자유가 말한다. 대체 어디 계신 겁니까? 형체는 흡사 마른 나무와 같고, 마음은 진실로 꺼진 재와 같이 하고 계십니다. 지금 안석에 기대어 있는 분은 예전에 안석에 기대어 있던 분이 아닙니다. 언아, 너는 참 훌륭한 질문을 하는구나! 지금 나는 ‘나’를 잃어버렸노라. 너는 그것을 알 수 있겠느냐. 너는 사람의 통소소리는 들었지만 아직 대지의 퉁소소리는 듣지 못했구나. 너는 대지의 퉁소소리는 들었지만 하늘의 퉁소소리는 듣지 못했구나. 부디 그 도리를 일러달라고 청하자, 남곽자기는 이야기한다. 무릇 대지가 내쉬는 숨결을 바람이라 한다. 바람이 일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한번 일면 온갖 구멍들이 요란하게 소리를 낸다. 너도 그 바람소리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산림이 흔들리면 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의 구멍들이 마치 코나 입이나 귀처럼, 가로보나 가축우리나 절구처럼, 또는 깊고 얕은 웅덩이처럼 되어, 격한 소리, 목청 높은 소리, 꾸짖는 소리, 들이쉬는 소리, 부르짖는 소리, 우렁찬 소리, 굴속에서 나는 소리, 지저귀는 소리 등의 갖가지 소리를 낸다. 또 앞에서 부르면 뒤에서 따라 부른다. 작은 바람이 불면 작은 소리로 화답하고, 큰 바람이 일면 큰 소리로 화답한다. 그리고 사나운 바람이 가라앉으면, 구멍들이 비게 된다. 너도 숲의 나무들이 여러 가지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대지의 퉁소소리란 여러 구멍에서 나는 소리 같은 것이고, 사람의 퉁소소리는 관악기에서 나는 소리 같은 것이군요. 감히 묻겠습니다. 천뢰는 무엇입니까. 무릇 불어나오는 소리는 만 가지로 다르지만 그 스스로 그럴 뿐이다.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이니 소리 나게 하는 자가 그 누구이겠는가.

 

큰 앎은 너그럽고 작은 앎은 따지고 분별한다. 큰 말은 맹렬하고 작은 말은 수다스럽다. 잠을 자면 혼령에 맞닿고 깨어나면 육신의 감관이 열린다. 그러니 접하는 것마다 얽혀들어 마음이 날마다 다툰다. 어떤 사람은 유부단한 모습을 보이고, 어떤 사람은 음흉한 모습을 보이고, 어떤 사람은 빈틈없이 철저한 모습을 보인다. 두려움이 작으면 덜덜 떠는 것으로 그치지만, 두려움이 크면 넋을 잃고 정신을 못 차린다. 시비를 가릴 때는 마치 활이나 쇠뇌를 쏘듯이 세찬 기세로 덤비고, 승리를 지키려 할 때는 마치 맹세를 지키듯이 끈덕지다. 마치 가을과 겨울에 초목이 말라 시드는 것처럼 된다. 작위적인 행동에 몰두하게 되면, 그러다가 다시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욕심의 도량에 빠지게 되면 마치 실로 봉해놓은 듯 마음이 꽉 막혀버린다. 죽음에 가까워진 마음은 다시 소생시킬 수 없게 된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걱정과 한탄, 변덕과 집착, 아첨과 방자함, 열린 마음과 꾸미는 마음은 마치 빈 구멍에서 음악소리가 나오듯, 습한 곳에서 버섯이 자라듯 생겨난다. 밤낮으로 번갈아가며 나타나는데도, 그것이 어디서 생기는지를 알 수 없다. 그만두자, 그만두자. 아침저녁으로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과연 그 말미암은 바가 있어서 그러겠는가.

 

저것이 없으면 나도 없다. 내가 없으면 취할 것이 없다. 이것은 곧 존재의 실상과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존재의 실상을 누가 주재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설령 참된 주재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 조짐을 파악할 수 없다. 행해지는 작용이 있다는 점은 확실하지만 그 형체를 찾아볼 수는 없다. 정황은 있지만 형체는 없다. 백 개의 뼈마디와 아홉 개의 구멍, 여섯 개의 장기가 모두 갖춰져 있다. 그러나 과연 ‘나’는 그 가운데 어느 것과 친한 것인가? 그대는 그 모두를 좋아하는가? 아니면 각별히 좋아하는 것이 있는가? 그것들은 모두 신첩이 되는 것인가? 그 신첩들은 족히 서로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인가? 서로 번갈아가며 주인이 되고 종이 되고 하는 것인가? 참된 주인이란 과연 있는 것인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존재의 실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한번 형체를 받으면 죽을 때까지 잊지 않는다. 타인과 더불어 서로 해치고 다투기를 말 달리듯 하여 막을 길이 없으니, 참으로 슬프지 않은가. 종신토록 시달리고도 성공을 보지 못하고, 극도로 피폐해져도 돌아갈 바를 모르니,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불사를 추구한들, 죽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형체는 늘 변화하고 마음도 그것과 더불어 변화하고 있을 따름인데, ‘참으로 크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인생이 본디 이처럼 허무한 것인가. 나 혼자만 허무한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허무하지 않은 것인가? 대체로 성심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마음이 스스로 취하여 스승으로 삼은 것임을 어찌 알겠는가. 우둔한 자들에게도 스승이 있게 마련이다. 성심이 없는데도 시비가 있다는 것은, 마치 오늘 월나라로 출발한 자가 어제 도착했다는 것과 같다. 이는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긴다면 비록 저 신묘한 우임금이라 하더라도 어찌할 수가 없는데, 내가 홀로 어찌하겠는가.

 

무릇 말이란 그저 입에서 나오는 바람소리가 아니다. 말에는 말하고자 하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확고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과연 말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말이 새소리와 다르다고 하는데, 구분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도는 어디에 가렸기에 참과 거짓이 있는가. 말이 무엇에 가렸기에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인가? ‘도’란 어디에 간들 있지 않을 것이며, 말이란 어떻게 쓰든 가능하지 않겠는가. 도는 성심에서 은폐된다. 말은 거창한 논변에서 은폐된다. 이런 까닭에 유가와 묵가의 시비가 있었다. 상대편이 그르다는 것을 옳다고 하고,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한다. 이명만 못하다.

 

물에는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물에는 이것 아닌 것이 없다. 자아와 상대가 연속되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아를 세우면 의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역시 저것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를 피시방생의 설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삶이 있으니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니 살아 있다. 바야흐로 가함이 있으니 불가함이 있고, 불가함이 있으니 가함이 있다. 시로 인하여 비가 있고, 비로 인하여 시가 있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이쪽’이라는 제한된 자리에서 사물을 보지 않고, 하늘에 비추어 본다. 인시이다. 이것 역시 저것이고, 저것 역시 이것이다. 저것 역시 하나의 시비이고, 이것 역시 하나의 시비이다. 결국 이것과 저것은 있는 것인가, 이것과 저것은 없는 것인가. 이것과 저것을 서로 마주세우지 않고 마음의 상태를 일러 도추, 즉 ‘도의 지도리’라고 한다. 지도리는 중심의 둥근 고리에 자리하여, 사방으로 여닫히는 문의 움직임에 제한 없이 응한다. 시 역시 하나의 무궁이요, 비 역시 하나의 무궁이다. 그러므로 이명만 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은, 손가락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만 못하다. 말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은 말이 아닌 것으로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만 못하다.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고, 만물은 하나의 말이다.

 

가한 것을 가하다고 하고 자기에게 불가한 것을 불가하다고 한다. 길이란 다니니까 생기는 것이다. 물이란 그렇게 부르니까 그런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그런 것이 자연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 것이 자연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것이다. 모든 개별자들에게는 타고난 자연의 성질이 있으며, 또한 각각의 입장에서 가한 것이 있다. 그러니 각각의 입장에 따라 다 그럴 만하여 그런 것이고, 다 가할 만하여 가한 것이다. 그러므로 풀줄기와 기둥, 추한 문둥이와 미인 서시를 함께 거론하는 것은 다소 괴이한 듯싶지만, 도에서 보면 하나가 된다. 나누는 것은 이루는 것이다. 이루는 것은 허무는 것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이루어짐도 허물어짐도 없이 다시 통하여 하나의 연속된 장으로 연결된다. 오직 도에 이른 자만이 통하여 하나가 됨을 깨달아, 자신의 판단을 쓰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평상함에 맡겨둔다. 용은 용이다. 용은 통이다. 통은 득이다. 각자 얻은 바에 따라 사는 것이야말로 실상에 가깝다. 인시할 뿐이다. 실상은 이미 그러하지만,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을 일러 도라고 한다. 신명을 수고롭게 하여, 통일적이고 전체적인 이론을 만든다. 그 역시 참된 실상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일러 조삼모사라고 한다. 무엇을 일러 조삼모사라고 하는가? 저공이 도토리를 주며 말하기를, 아침에 세 개를 주고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고 하니, 여러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냈다. 다시 말하기를, 그러면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하니, 여러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실상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스스로 기뻐했다 성냈다 하니, 이것 또한 인시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시비를 화한다. 천균에 쉰다. 이것을 일러 양행이라고 한다.

 

옛 사람은 그 앎이 지극한데 이르렀다. 어디에 이르렀는가? 애초에 물이 있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지극하고 완전하여 더할 것이 없다. 그 다음 단계의 앎은, 물이 있다고 여기기는 하지만 아직 봉은 시작되지 않았다. 또 그 다음 단계의 앎은, 봉은 있지만 시비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시비가 드러나면서 도가 무너졌다. 도가 무너지면서 애가 이루어졌다. 과연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있는 것인가? 이루어짐도 무너짐도 없는 것인가?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있는 것은 소문이 거문고를 연주했기 때문이다.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없는 것은 소문이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문은 거문고 연주에서, 혜시는 오동나무 안석에 기대어 진행하는 담론에서 각각 그 앎이 일가를 이루었으며, 그리하여 말년까지 명성을 유지하고 살았다. 그들은 스스로 좋아하는 바가 남들과 달랐고, 자신이 좋아하는 바를 밝히고자 했다. 그들은 밝힐 수 없는 것을 밝히려 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견백의 어리석음으로 끝난 것이다. 그 자식들은 아비의 형식을 이어받는 데 그치고 종신토록 성취가 없었다. 이와 같은 것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도 이룬 것이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것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면, ‘나’나 다른 아무도 이룬 것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빛을 성인은 없애려 한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으로 상대를 밝히려 하지 않으며, 상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맡긴다. 이것을 일러 이명이라고 한다.

 

지금 여기에 하나의 말이 있다고 하자. 그 말은 자신이 말하는 내용과 같은 유인가, 아니면 다른 유인가? 같은 유이건 아니건 간에, 서로 더불어 하나의 유가 되고, 그러니 서로 다를 것이 없다. 비록 그렇더라도 시험 삼아 말해보겠다. 시작이 있으면 그 앞에 ‘시작이 있기 이전’이 있고, 또 그 앞에 ‘시작이 있기 이전의 이전’이 있다. 있음과 없음이 있으면 그 앞에 ‘있음과 없음이 있기 이전’이 있고, 또 그 앞에 ‘있음과 없음이 있기 이전의 이전’이 있다. 홀연 있음과 없음이 나타난다. 그러나 있음과 없음이 과연 어느 쪽이 ‘있음’이고 어느 쪽이 ‘없음’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내가 ‘있음’이라고 말할지라도, 그것이 과연 진정한 ‘있음’을 일컫는 것인지, 아니면 ‘없음’을 일컫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천하에 추호의 끝보다 큰 것이 없고 태산보다 작은 것이 없다. 어려서 죽은 아이보다 오래 산 자도 없고, 팽조도 요절한 것이다. 천지가 나와 함께 생겨나고,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하나이다. 이미 나와 하나인데, 또 달리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미 ‘하나’라고 말했으니, 또 어찌 말이 없다고 하겠는가. ‘하나’에 말을 더하면 둘이 되고, 둘에 하나를 더하면 셋이 된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아무리 셈이 뛰어난 교력 같은 자라도 다 헤아릴 수 없을진대, 하물며 평범한 사람들은 더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러니 무에서 유로 나가는데도 셋이 되어버리는데, 하물며 유에서 유로 나간다면 말해 무엇 하겠는가. 세어나갈 것이 없다. 인시일 뿐이다.

 

도는 애초부터 경계가 없고, 말은 처음부터 정해진 고정된 의미가 없다. ‘이것 혹은 옳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의 잣대를 세우면서 구분의 경계가 생긴다. 그 구분의 경계에 대해 말해보자. 왼쪽이 있으니 오른쪽이 잇고, 관계의 질서가 있으니 그에 따른 마땅함이 있고, 구분이 있으니 옳고 그름의 변론이 있고, 앞뒤를 다툼이 있으니 맞서 다툼이 있다. 이것을 일러 ‘팔덕’이라고 한다. 육합의 바깥에 대해, 성인은 있는 그대로 두고 바라볼 뿐 거론하지 않는다. 육합의 안에 대해서는, 거론하기는 하되 하나하나 따지지는 않는다. 역사 전적에 나오는 선왕들의 기록에 대해서는, 상세히 살피기는 하되 시비를 변론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분별함이 있어도 분별하지 않으며, 변론함이 있어도 변론하지 않는다. 어찌 그런가? 성인은 가슴에 품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변론하여 서로 자신의 주장을 보인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변론하는 자는 보지 못함이 있다. 무릇 참된 도는 이름할 수 없고, 참된 변론은 말로 하지 못한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지 않고, 참된 청렴은 겸손하지 않으며, 참된 용기는 남을 거역하여 해치지 않는다. 도는 겉으로 드러나면서 도가 아니게 되고, 말은 변론이 시작되면서 미치지 못하게 되고, 사랑은 한 곳에 고정되면서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또 스스로 청렴하다고 하는 자는 믿을 수 없게 되고, 남을 해치는 용기는 남을 굴복시키지 못하게 된다. 이 다섯 가지는 본디 동그란 원과 같은 것인데, 모가 나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앎은 알지 못하는 바에서 멈추는 것이 지극한 것이다. 누가 ‘말할 수 없는 말’과 ‘말할 수 없는 도’를 알겠는가. 만일 능히 아는 자가 있다면 그것을 일러 ‘천부’라고 한다. 물을 대어도 넘치지 않고 아무리 잔으로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알 수 없다. 이를 일러 ‘보광’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옛날에 요가 순에게 물었다. 나는 종과 회, 그리고 서오를 정벌하고자 한다. 왕이 되어 남면하고 있어도 시원치 않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순이 말했다. 무릇 이 세 나라는 아직 봉애의 땅에 있다. 석연하지 않은 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옛날에는 열 개의 해가 나란히 나와 만물을 모두 비추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덕이 해보다 더 나은 자는 어떻겠습니까.

 

설결이 왕예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모든 존재자들이 공통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을 아십니까? 스승은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면 선생님은 선생님이 모르시는 것을 아십니까?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느냐. 그렇다면 세상의 그 어떤 존재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느냐. 비록 그럴지라도 시험 삼아 말해보겠다. 내가 안다고 말하는 그 무엇이 과연 모르는 것이 아닌지를 어찌 알겠으며, 내가 모른다고 말하는 그 무엇이 과연 아는 것이 아닌지를 어찌 알겠는가. 그러면 내가 자네에게 시험 삼아 물어보겠다. 사람이 습한 곳에서 자면 허리 병이 나서 죽게 된다.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사람이 나무에서 살면 무서워 덜덜 떤다. 원숭이도 그러한가? 이 셋 중에 과연 누가 올바른 거처를 안다고 하겠는가?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먹고, 올빼미는 쥐를 좋아한다. 이 넷 중에 누가 올바른 맛을 안다고 하겠는가? 암원숭이는 수원숭이를 짝으로 삼고, 수사슴은 암사슴과 교미하며,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논다. 사람들은 모장과 여희가 미인이라고 하지만, 물고기는 그들을 보고서 물속 깊이 들어가고, 새는 그들을 보고서 높이 날아가고, 사슴들은 그들을 보고서 급히 도망간다. 이 넷 중에 누가 천하의 올바른 아름다움을 안다고 하겠는가? 내가 보건대, 인의의 단서나 시비의 길은 복잡하고 어지럽다. 어찌 내가 능히 그 구분을 알겠느냐. 설결은 묻는다. 선생님께서 이로움과 해로움을 모르시다니, 그러면 지인도 진정 이해를 모르는 것입니까? 왕예는 이야기한다. 지인은 신령하다. 큰 연못의 수풀이 불타도 뜨거움을 느끼지 않고, 강물이 얼어붙어도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 또 번개가 산을 부수고 표풍이 바다를 진동시켜도 놀라지 않는다. 그런 자는 운기를 타고 일월을 부리며 사해의 밖에서 노닌다. 사생이 그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해의 단서는 어떻겠느냐.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물었다. 제가 우리 스승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성인은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세상일에 애쓰지 않고, 이익을 쫓지 않고, 손해를 피하지 않고,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한 가지 도에 매이지 않고, 일컫지 않으면서도 일컫고, 일컬으면서도 일컫지 않고, 세속의 바깥에서 노닌다고 합니다. 스승님 자신은 이를 맹랑한 말로 여기시지만, 제게는 오묘한 도의 실행으로 여겨집니다.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오자는 말한다. 이것은 황제가 들어도 잘 모르는 것인데, 그대의 스승인 공자가 어찌 알겠는가. 또 자네는 너무 성급히 헤아리고 있다. 계란을 바라보며 시간을 알고자 하고, 새총의 총알을 바라보며 새를 구워먹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이제 자네에게 허망하게 말하고자 하니, 자네도 허망하게 듣는 것이 어떻겠는가. 해와 달과 함께 하고, 우주를 안고 있으며, 만물과 하나가 되어 그것을 혼돈 속에 두고, 서로 존중하며 따르게 한다. 보통 사람들은 힘들여 수고하지만, 성인은 우둔하고, 만세에 참여하면서 연속성의 순수함을 유지한다. 만물이 모두 그러하여, 이렇게 서로를 품고 있다. 내가 어찌 삶을 좋아하는 것이 미혹된 것이 아님을 알겠는가. 내가 어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미혹된 것이 아님을 알겠는가. 내가 어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어릴 때 집을 잃어버려 집으로 돌아갈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님을 알겠는가. 여희는 애땅 국경지기의 딸이다. 처음 진나라로 끌려갈 때는 하도 울어 눈물이 옷깃을 적실 정도였다. 그러나 왕의 궁전에 이르러 왕과 더불어 침소를 같이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자, 옛날에 울고 불며 슬퍼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니 어찌 알겠는가. 저 죽은 자들도 애초 살아생전에 ‘삶을 좋아했던 것’을 후회할지. 꿈에 술을 마시던 자가 아침이면 일어나 슬퍼 곡을 하고, 꿈에 슬퍼 곡을 하던 자가 아침이면 일어나 즐거이 사냥을 한다. 바야흐로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 알지 못한다. 꿈속에서도 또한 그 꿈을 점치다가 깨어난 후에야 비로소 꿈임을 안다. 또 크게 깨달은 후에야 이것이 큰 꿈임을 안다.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깨어 있다고 여기면서 아는 체한다. 군주라고 뽐내고, 목동이라고 천대한다. 자네 스승인 공자나 자네 역시 모두 꿈이다. 내가 자네에게 꿈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꿈이다. 이런 말을 괴이한 말이라고 이름 짓는다. 만세 후에 대성을 만나 그 해답을 아는 것은 아침저녁의 일이다.

 

만일 내가 자네와 더불어 논쟁을 한다고 하자. 자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자네를 이기지 못한다면, 자네가 과연 옳은 것이고 내가 과연 그른 것일까? 내가 자네를 이기고 자네가 나를 이기지 못한다면, 내가 과연 옳은 것이고 그대가 과연 그른 것일까? 어느 한쪽이 옳고 다른 쪽은 그른 것일까? 모두 옳거나 모두 그를 수도 있는 것일까? 이것은 나도 자네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또한 제3자도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구로 하여금 그것을 바르게 판단하도록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자네와 입장이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판단하게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자네와 입장이 같을 테니 어찌 바르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와 입장이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판단하게 한다면, 이미 나와 같을 것이니 어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나 자네와 의견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판단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나와도 자네와도 입장이 다를 것이니 어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나 자네와 의견이 같은 자로 하여금 판단하게 할지라도, 나와도 자네와도 입장이 같을 것이니 어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도 자네도 제3자도 모두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에 의지한단 말인가. 무엇을 일러 천예로서 화한다고 하는가. 옳은 것은 옳은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옳은 것이 만약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면, 옳은 것이 옳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사실은 변론의 여지가 없다. 또 그런 것이 절대적으로 그런 것이라면, 그런 것이 그렇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사실은 변론의 여지가 없다. 화성은 상대하여 일어나는 소리이다. 만일 서로 상대하지 않고 천예로서 화하는 것이다. 만연을 따르는 것이니 궁년의 방법이다. 망년하고 망의하여 무경에 떨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무경에 깃들인다.

 

망량이 경에게 물었다. 그대는 얼마 전에 걷고 있더니 지금은 멈춰 있고, 아까는 앉아 있더니 지금은 서 있소. 어째서 일정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는가. 경이 답한다. 내가 무언가에 의존하고 있는 것 아닐까? 내가 의존하고 있는 것 역시 무언가에 의존하고 있는 것 아닐까? 내가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에 의지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그런지 알 수 없으며, 어째서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

 

옛날에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였다. 스스로 기분 좋게 뜻대로 날고 있었는데,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한다. 잠시 후 깨어나자, 황황히 주가 되었다. 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 주가 된 것인가?

 

양생주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지만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삶으로 끝이 없는 앎을 추구하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며, 그런데도 앎을 이루려 하는 것은 위태로울 뿐이다. 선을 행해도 이름나게 하지 말고, 악을 행해도 형벌에 저촉되지 않게 하라. 중으로 경영하면 가히 몸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고, 타고난 수명을 다할 수 있다.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았다. 손으로 잡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밟고 무릎을 구부리면서 칼질을 하는데, 그 소리가 서걱서걱 음률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마치 상림의 춤에 부합하는 듯하고, 경수의 회에 맞는 것 같았다. 아!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느냐.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답하며, 신이 좋아하는 것은 도입니다. 기에서 더 나간 것입니다.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보이는 것이 모두 소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신은 신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관의 작용이 멎으니 신이 작용합니다. 타고난 결에 따라 큰 틈새를 쳐나가고, 빈 곳을 따라 그 고유성을 좇을 뿐입니다. 뼈에 붙은 살과 힘줄이 얽힌 곳을 지날 때도 일찍이 걸리지 않았는데,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솜씨 좋은 칼잡이라도 1년이 지나면 칼을 바꾸는 것은 가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칼잡이가 한 달이 지나면 칼을 바꾸는 것은 절단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의 칼은 19년이 지났고 수천 마리의 소를 해체했지만, 칼날이 마치 이제 막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저 뼈마디에는 틈이 있지만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칼로 그 틈을 가르면 널찍하여 칼을 놀리는 데 반드시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19년이 지났는데도 칼날은 마치 이제 막 숫돌에 간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매번 뼈와 살이 엉긴 곳에 이르면, 저는 그것이 어려운 일임을 보고 놀라 경계하며 시선을 고정하고 천천히 행동합니다. 칼놀림이 심히 미세하여 뼈에서 살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마치 흙무더기가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칼을 든 채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흡족한 마음이 들면 칼을 닦아 칼집에 넣습니다.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도다. 내가 오늘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을 얻었노라.

 

공문현이 우사를 보고 놀라 말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어찌하여 외발이 되었는가? 하늘이 그런 것인가, 사람이 그런 것인가? 우사가 대답하여 말했다. 하늘이 한 것이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하늘이 이 사람을 낳아 외발이 되게 했다. 인간의 모습을 보면 두 발이 있는 것이니, 이것으로 보면 하늘이 그런 것이지 인간이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연못가의 꿩은 열 걸음 가서 한 번 쪼아 먹고, 백 걸음 가서 한 번 물 마신다. 새장 안에 갇혀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비록 왕 같은 대접을 받는다 해도, 마음이 즐겁지 않기 때문이다.

 

노담이 죽자, 진일이 조문하러 와서 곡을 세 번하고 나갔다.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친구 분이 아니십니까? 진일이 그렇다고 말하자, 그런데 이렇게 조문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래도 된다. 나도 처음에는 그 사람들처럼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까 내가 들어가 조문하면서 보니, 노인들은 곡하기를 마치 자식을 잃은 듯이 하고, 젊은이는 곡하기를 제 어미를 여읜 듯이 했다. 저들이 저렇게 모여 있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 그렇게 울지 않아도 될 울음을 우는 것이다. 이는 존재의 실상을 피하고 세속의 정을 더하는 것이며, 받은 바를 잊은 것이다. 옛날에 이를 일러 ‘하늘을 도피한 벌’이라고 한다. 어쩌다가 선생이 세상에 온 것은 때가 되었기 때문이고, 어쩌다가 선생이 떠나간 것은 때를 따른 것이다. 때에 따라 오고감을 편안히 여기고 순리대로 처하니 슬픔과 즐거움이 끼어들 데가 없다. 옛날에 이를 일러 제의 현해라 한다. 손으로 밀어 넣는 장작은 타서 없어지지만, 그 불은 이어져서 꺼질 줄을 모른다.

 

인간세

 

안회가 중니를 만나 길을 떠나겠다고 청했다. 공자가 어디를 가려느냐고 묻자, 안회는 위나라에 가고자 한다고 말한다. 공자가 거기에 가서 무얼 하려고하느냐고 묻자, 제가 듣건대, 위나라 군주는 그 나이가 젊은데 그 행동이 독단적이라고 합니다. 경솔하게 권력을 남용하고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하며, 함부로 백성들을 사지에 몰아넣어 그렇게 죽은 자가 너무 많습니다. 나라를 연못에 비유하여 헤아린다면, 마치 연못에 뒤덮인 무성한 잡초처럼 여기니, 백성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고 합니다. 제가 일찍이 듣건대,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나아가라. 의원의 집 문에는 환자들이 많이 모이게 마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원컨대 그 들은 바를 본받고자 생각한 것이니, 그렇게 하면 그 나라가 좀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중니는 말한다. 아! 만약 네가 간다 하더라도 고작해야 형벌을 받을 따름이다. 무릇 도란 복잡하지 말아야 한다. 복잡하면 일이 많아지고, 일이 많아지면 혼란해지고, 혼란해지면 근심이 생기고, 근심이 생기면 구할 수 없다. 옛날의 지인은 먼저 자기부터 갖추고 난 연후에 남도 갖추게 했다. 자기에게 갖춰야 할 것도 안정되지 않았는데 어느 겨를에 포악한 사람의 행동에 간섭하겠느냐. 또 너는 무릇 덕이 어디에서 흐려지고 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아느냐? 덕은 명을 추구하는 데서 흐려지고 지는 다툼에서 나온다. 명이란 서로 헐뜯는 것이고 지는 다툼의 무기이다. 이 두 가지는 흉기이니 힘써 행할 것이 아니다. 게다가 덕이 두텁고 신망이 굳다 해도 남의 기운을 알 수 없고, 명예를 다투지 않는다 해도 남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런데 포악한 자 앞에서 애써 인의와 법도를 늘어놓는 것은 남의 못난 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잘난 점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를 일러 ‘남을 해치는 것’이라고 한다. 남에게 해를 입히면 상대 역시 반드시 그 해를 돌려주게 마련이니, 너는 아마 남에게 해를 입게 될 것 같구나. 또 진실로 현인을 좋아하고 불초한 자를 미워한다면 어찌 너를 써서 특별한 일을 하겠느냐. 너는 오직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왕공은 필시 권세를 등에 업고 이기고자 다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네 눈은 어지러워지고, 얼굴빛은 변하고, 입은 무언가를 변명하려 들고, 태도는 비굴해지고, 마음은 상대의 의견을 따르게 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불로 불을 구하고 물로 물을 구하는 것을 일러 익다라 한다. 순종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만약 신임을 받지 못하는 말을 계속 쏟아낸다면 반드시 그 포악한 자 앞에서 죽게 될 것이다. 또 옛날 걸은 관용봉을 죽였고, 주는 왕자 비간을 죽였다. 이들은 모두 자기 몸을 수양하여 아래로 백성들을 따르게 만듦으로써 신하의 신분으로 군주에게 거역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그들이 수양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배척했다. 이것은 호명한 것이다. 옛날 요는 총지와 서오를 공격했고 우는 유호를 공격했는데, 나라는 폐허가 되었고 군주는 죽임을 당했다. 전쟁을 멈추지 않았고 실익을 구하는 데 끊임이 없었다. 이들은 모두 명실을 구한 것이다. 그런데 너는 유독 듣지 못했느냐? 명실을 추구하는 자들은 성인이라도 능히 교화할 수 없다. 하물며 네 경우에는 어떻겠느냐.

 

아무리 그래도 네게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겠지. 내게 시험 삼아 말해보아라. 안회는 말한다. 몸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비우며, 부지런히 힘쓰고 한결같이 행동한다면 가능하겠습니까? 공자는 말한다. 어찌, 어찌 가능하겠느냐. 무릇 사나운 기운이 가득 차서 의기가 매우 왕성하고 얼굴빛도 일정하지 않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거역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억누르고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하려 한다. 이런 것을 일러 날마다 노력하여 얻는 작은 덕도 이루지 못한다고 하는데, 하물며 큰 덕은 가능하겠느냐. 장차 자기 고집에 빠져 남의 감화를 받지 않는다. 겉으로는 화합하는 척해도 마음속에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어찌 가능하겠느냐. 그렇다면 저는 안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밖으로 몸을 굽히며, 무슨 일이든 옛 어른의 가르침에 맞추어 하겠습니다. 안으로 마음을 곧게 하는 것은 하늘과 더불어 벗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더불어 벗이 된 자는 천자도 자신도 모두 하늘의 자식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홀로 자기 말이라고 하여 사람들이 좋게 여겨주거나 그렇지 않거나 문제 삼을 것이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을 일컬어 ‘어린아이’라 하고, 이를 일러 하늘과 더불어 벗이 된 자라고 합니다. 밖으로 몸을 굽히는 것은 사람과 더불어 벗이 되는 것입니다. 팔을 높이 들고 무릎을 꿇어 절하는 것은 신하 된 자의 예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 그렇게 하는데, 저라고 어찌 감히 하지 않겠습니까. 남들이 하는 대로 하면 남들도 저를 허물하거나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일러 사람과 더불어 벗이 된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든 옛사람의 가르침에 맞추어 하는 것은 예 성인과 더불어 벗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비록 옛사람의 가르침이지만, 상대를 견책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옛사람의 것인지, 나의 것은 아닙니다. 그리하면 아무리 올곧은 말을 해도 화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일러 옛사람과 벗이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가능하겠습니까? 중니는 말한다. 어찌, 어찌 가능하겠느냐. 정법이 너무 많아 마땅치 않구나. 비록 고루하다 해도 죄가 되지는 않겠지만, 거기서 그칠 뿐이다. 대체 어찌 교화하는 데 미칠수 있겠느냐. 오히려 사심하는 것이다. 안회는 말한다. 저는 이제 더 이상 모르겠습니다. 부디 그 방법을 묻겠습니다. 중니는 재하라 말한다. 내가 너에게 말해주겠다. 유심으로 재한다면 그것이 쉽게 되겠느냐. 쉽다고 여기는 것은 호천도 마땅하게 여기지 않는다. 안회는 말한다. 저희 집은 가난하여 술도 마시지 못하고 향기로운 채소도 먹지 못한 지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이렇다면 가히 재한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중니는 말한다. 그것은 제사 지낼 때의 재이다. 심재가 아니다. 안회는 말한다. 부디 심재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중니는 말한다. 너의 뜻을 하나로 하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듣는 것은 귀에서 그치고, 마음은 그 뜻에 부합하는 것에서 그친다. 기는 텅 비어 물을 기다리는 것이다. 오로지 도는 비어 있는 곳에만 모인다. 비어 있는 것이 심재이다. 안회는 말한다. 제가 처음에 심재하지 못했을 때는 저라는 자아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심재하고 나니 애초에 저라는 자아가 있지 않습니다. 가히 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스승은 극진하다고 말한다. 내 너에게 말해주겠다. 만일 그 새장에 들어가 놀더라도 그 명에 마음을 주지 말고, 받아들여지면 말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쳐라. 문을 열지도 말고 독으로 누르지도 마라. 하나로 연속된 세계에서 부득이한 데 깃든다면 거의 무난할 것이다. 걷지 않기는 쉽지만 땅을 밟지 않기는 어렵다. 사람의 부림을 받을 때는 거짓으로 속이기 쉽지만 하늘의 부림을 받을 때는 거짓으로 속이기 어렵다. 날개가 있어 난다는 말은 들었어도 날개 없이 난다는 말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유지로써 안다는 말은 들었어도 무지로써 안다는 말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저 텅 비어 있음을 보라. 빈 방에 빛이 드니, 길상이 머무는 곳이다. 무릇 마음이 쉬지 못하는 것을 일러 좌치라 한다. 이목을 안으로 통하게 하고, 심지를 밖으로 하면 귀신도 찾아와 머문다. 그러니 하물며 사람이 찾아옴은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것이 곧 만물의 변화에 응하는 방법이자 우임금과 순임금이 의지했던 바이요, 복희와 궤거가 죽을 때까지 행한 바이다. 하물며 범인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섭공 자고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중니에게 물었다. 왕께서 저 제량을 사신으로 보내시는 뜻은 매우 중대합니다. 제나라는 사신을 매우 정중하게 대하지만, 교섭에는 급히 응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라 해도 좀처럼 마음을 움직이기 어려운데, 하물며 제후는 어떻겠습니까. 저는 매우 두렵습니다. 선생님께서 일찍이 제게 말씀하시기를,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든 일에는 성공을 기쁘게 생각하지 않는 자가 드물다. 만일 일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인도의 환’이 있을 것이요, 만약 일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음양의 환’이 있을 것이다. 성공하든 성공하지 못하든 나중에 환이 없는 것은 오직 덕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먹는 음식은 거칠어 맛이 없고, 불도 많이 때지 않아 시원함을 바랄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 저는 아침에 명령을 받고 저녁에 얼음을 먹었으며, 그럼에도 아직 제 속은 뜨겁게 열이 납니다. 저는 아직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음양의 환’이 있습니다. 만약 일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인도의 환’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두 가지 환이 모두 있으니, 남의 신하가 된 자로서 일을 맡기에 족하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중니는 말한다. 천하에는 크게 지켜야 할 것이 두 가지이니, 하나는 명이요 다른 하나는 의이다. 자식이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이 명이니, 이는 마음에서 떨쳐내기가 불가능하다.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것이 의이니, 어디를 가든 군주가 없는 곳이 없어 천지간에 피할 데가 없다. 이를 일러 대계라 한다. 이런 까닭에 무릇 어버이를 섬기는 데는 처지를 가리지 않고 편안히 모시는 것이 효의 지극함이요, 무릇 군주를 섬기는 데는 일을 가리지 않고 편안히 섬기는 것이 충의 성대함이다. 스스로 그 마음을 섬기는 데는 슬픔과 기쁨을 눈앞에 쉽게 드러내지 않으며,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임을 알고도 마치 명을 받은 듯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덕의 지극함이다. 남의 신하가 된 자는 진실로 부득이함이 있다. 일을 행하는 가운데는 제 몸을 잊는데, 대체 어느 겨를에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한단 말인가. 그대는 가는 것이 좋다.

 

내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해보겠다. 무릇 교제란 가까이 있으면 반드시 서로가 신의로 맺어지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반드시 말로 그 진심을 보이게 마련이다. 그리고 말은 반드시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양측이 모두 기뻐하거나 양측이 모두 성낼 만한 말을 전하는 것은 천하의 어려운 일이다. 무릇 양측이 기뻐한다면 실제 이상으로 추켜세운 말이 넘쳐난 것이고, 양측이 노한다면 헐뜯는 말이 넘쳐난 것이다. 무릇 지나치게 넘치는 말은 망령된 것이고, 망령된 말을 믿는 자는 없다. 믿는 자가 없다면 말을 전하는 것 자체가 재앙이 된다. 그러므로 법언에 이르기를, 있는 그대로의 실정을 전하고 지나치게 꾸민 말을 전하지 않는다면 거의 온전할 것이라고 했다. 또 재주를 가지고 힘을 겨루는 자는 양에서 시작해도 늘 마침내는 음에서 끝난다. 그리고 심한 데 이르면 기이한 기교를 많이 사용한다. 예로 술을 마시는 자는 처음에는 절도 있게 마시다가 마침내는 언제나 어지럽게 끝난다. 그리고 심해지면 기이한 오락을 추구한다. 범사가 역시 그러하다. 진실에서 시작하여 난잡하게 끝난다. 그 시작은 간단했어도 마침내는 반드시 커진다. 말한다는 것은 바람 따라 일어나는 물결 같아서, 행동하게 되면 실상을 잃게 된다. 바람 따라 일어나는 물결은 변화하기 쉽고, 실상을 잃게 되면 위태로워지기 쉽다. 그러므로 분노는 다른 이유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꾸민 말과 치우친 말에서 일어난다. 짐승은 죽을 때 울음소리를 가리지 않으며, 호흡이 거칠어진다. 여기에서 사나운 마음이 일어난다. 너무 준엄하게 다그치면 반드시 불초한 마음으로 응하게 되지만, 스스로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진실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데, 그 결과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므로 법언에 이르기를, 군주의 명령을 바꾸지 말고 빨리 이루려 애쓰지 말라고, 도를 넘는 것은 지나치다고 했다. 명령을 바꾸고 빨리 이루려 애쓰는 것은 일을 위태롭게 만든다. 잘 이루려면 오래 걸리고 잘못 이루면 다시 고치기 어려우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사물의 움직임에 따라 여유로운 마음으로 노닐고, 부득이함에 맡겨 양중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거기에 무엇을 작위하여 보고하겠는가. 치명하는 것만 못하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다.

 

안합이 위령공의 태자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가게 되었는데, 거백옥에게 물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덕이 천성적으로 박약합니다. 그와 더불어 무도한 행위를 하면 나라가 위태해집니다. 그와 더불어 옳은 일을 하고자 하면 제 몸이 위태해집니다. 그의 지적 능력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잘 찾아내지만, 자기 잘못의 근거는 알아내지 못합니다. 이런 경우에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거백옥은 말한다. 좋은 질문입니다. 경계하고 삼가서 당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십시오. 겉으로는 따르는 것이 좋고, 마음으로는 화합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두 가지 염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따르더라도 아주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되고, 화합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따르다가 마음까지 동화되면 뒤집히고 파멸되고 무너지고 엎어질 것입니다. 또 마음으로 화합하면서 겉으로 드러내면 헛된 소문이 나고 요사한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가 갓난애가 되면 역시 그와 함께 갓난애가 되십시오. 그가 절도 없이 굴면 또한 함께 절도 없이 구십시오. 그가 함부로 방종하게 굴면 함께 방종하십시오. 그렇게 그를 이끌어 허물없는 경지에 들어가도록 하십시오. 그대는 저 사마귀를 알지 못하십니까. 사마귀는 노하면 자신의 팔뚝을 들어 수레바퀴에 맞섭니다. 그러면서 자기 힘으로는 감당하여 이기지 못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는 자신의 재주가 뛰어나다고 알고 있는 것이니, 삼가고 조심할 일입니다. 자신을 자랑하고 뽐내면서 상대를 범하게 되면 위태롭게 됩니다. 그대는 저 호랑이 기르는 자를 알지 못하십니까. 감히 살아 있는 것을 호랑이에게 주지 않는 것은 호랑이가 그 동물을 물어 죽이려는 노기 때문입니다. 감히 통째로 먹이를 주지 않는 것은 호랑이가 그 동물을 찢어버리는 노기 때문입니다. 호랑이의 배가 고픈지 부른지 때를 잘 맞추어 그 성난 마음을 제어해야 합니다. 호랑이와 사람이 서로 다른 유인데도 호랑이가 자기를 길러주는 사람을 따르는 것은 그 사람이 호랑이의 본성을 쫓기 때문이고, 호랑이가 자기를 길러주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 사람이 호랑이의 본성을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무릇 말을 사랑하는 자는 광주리로 똥을 받아내고, 무명조개에 오줌을 받아냅니다. 어쩌다가 모기나 등에가 엉겨 붙었다 하여 갑자기 때에 맞지 않게 채찍으로 치면, 재갈을 끊고 머리를 흔들어 다치게 하며 가슴을 부숴버립니다. 말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했지만, 그 사랑하는 것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장석이 제나라에 갔는데, 곡원 땅에 이르러 사에 잇는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릴 정도였고, 그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으며, 높이는 산을 내려다볼 정도였다. 또 열 길 높이 너머에 가지가 있어, 그 하나만으로도 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가지들이 수십 개나 되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마치 장터에 모이듯 모여들었는데, 장백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끝내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제자가 실컷 구경한 후에 장석에게 달려와 말했다. 제가 도끼를 잡고 선생님을 따라다닌 이래 이처럼 아름다운 재목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눈여겨보시지 않고 그냥 가버리시니 어째서 입니까? 장석은 말했다. 그만두어라. 그 나무에 대해 말하지 말거라. 그것은 산목이다. 배를 만들면 가라앉을 것이고, 관곽을 만들면 금방 썩을 것이고, 기둥을 만들면 벌레가 생길 것이다. 그것은 재목으로 쓸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쓸데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장석이 집에 돌아갔는데, 사의 상수리나무가 꿈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는 나를 어디에 비교하려 하는가. 저 좋다는 나무들에 비교하려는가. 무릇 아가위나무, 참배나무, 귤나무, 유자나무 따위에 비교하는가. 그런 나무들은 열매가 익으면 뜯기고 욕을 당한다. 큰 가지는 꺽이고 작은 가지는 찢기며, 자신들의 능력 때문에 삶이 비참해진다. 그리하여 그 타고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요절하니, 스스로 세속의 타격을 심하게 받은 것이다. 모든 것들이 다 이와 같다. 나는 쓸데가 없기를 바란 지 오래되었다. 여러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그 뜻을 이루게 되었으니, 그것이 나의 큰 쓸모이다. 내게 만일 쓸모가 있었다면 이렇게 크게 자랄 수 있었겠는가. 또 그대와 나는 모두 사물이다. 무엇 때문에 서로를 비교하겠는가. 그대처럼 곧 죽을 쓸모없는 인간이 어찌 쓸모없는 나무 운운한단 말인가. 장석은 깨어나 그 꿈을 이야기해주었다. 제자가 말했다. 뜻이 무용에 있었다면 어찌하여 사의 나무가 되었겠습니까. 장석이 말했다. 조용히 하여라. 너는 말하지 말거라. 저 상수리나무는 다만 사에 자신을 맡기고 있을 뿐, 자기를 모르는 자들이 자신을 욕보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의 나무가 되지 않았더라도 거의 잘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상수리나무의 보존 방법이 세상 것들과 다른 것이다. 다만 사의 나무가 되었다고 하여 저 나무를 떠받는다면 실상에서 멀지 않겠느냐.

 

남백자기가 상구에서 노딜다가 큰 나무를 보았는데, 사마가 끄는 수레 천 대를 메어 놓아도 그 그늘에 덮여 가려질 정도였다. 자기는 말하기를 “이것은 어떤 나무인가? 이것은 필시 특이한 재목이리라“. 눈을 들어 그 가지를 보니 구부러져 기둥이나 대들보로는 쓸 수 없고, 눈을 내려 그 밑동을 보니 뒤틀려 관곽으로도 쓸 수 없었다. 그 잎사귀를 핥아보니 입이 문드러져 상하고, 냄새를 맡아보니 사람을 미치게 하여 3일이 지나도 깨어나지 못했다. 자기는 말했다. 이것은 과연 재목감이 안 되는 나무여서 이렇게 크게 자랄 수 있었구나. 아, 신인도 이처럼 부재이겠구나! 송에 형씨라는 고장이 있었는데, 가래나무와 잣나무와 뽕나무가 잘 자랐다. 그것이 한 아름 이상 되면 원숭이의 말뚝을 구하는 자가 베어가고, 서너 아름이 되면 거대한 집의 기둥이나 대들보를 구하는 자가 베어가고, 일고여덟 아름이 되면 귀인이나 부상의 집에서 널감을 구하는 자가 베어간다. 그러므로 타고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중도에 도끼에 잘리게 되니, 이는 재목의 환이다. 제사용으로 잡을 때, 이마가 흰 소와 코가 뒤집혀 있는 돼지, 그리고 치질을 앓고 있는 사람은 강으로 데려갈 수 없다. 이것은 모두 무축들이 알고 있는데,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신인이 큰 행운으로 여기는 까닭이다.

 

지리소라는 사나이는 턱이 배꼽에 가려지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고, 상투는 하늘을 가리키고, 내장이 머리 위로 올라가 있고, 두 넓적다리가 옆구리에 닿아 있다. 옷을 깁거나 빨래를 하여 족히 먹고 살만했고, 키질로 쌀알을 골라 열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다. 위에서 병사를 징발할 때도 어깨를 흔들며 그 사이를 지나 다녔고, 위에서 큰 역사가 있을 때도 늘 병이 있다 하여 노역을 피할 수 있었다. 위에서 병자에게 곡식을 내릴 때면 3종의 쌀과 열 묶음의 땔나무를 받았다. 저 지리소는 그 모습으로도 족히 제 몸을 기르고 천수를 다할 수 있었다. 하물며 그 덕이 지리인자는 어떻겠는가.

 

공자가 초나라에 가니, 초의 광인 접여가 그 문을 지나며 말했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어찌 그 덕이 쇠했는가. 오는 세월은 기다릴 수 없고, 가는 세월은 좇을 수 없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성인은 성취하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그저 살아갈 뿐이다. 바야흐로 지금의 시대는 겨우 형을 면하는 것이 고작이다. 복은 깃털보다 가벼운데도 실을 줄을 모르고, 화는 땅보다 무거운데도 피할 줄을 모른다.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덕으로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위태하구나. 위태하구나. 땅에 금을 긋고 달려가는 것은. 가시밭이여, 가시밭이여, 내가 가는 길을 막지 말거라. 나는 돌아서 가고 있으니, 내 발을 상하게 하지 못하리니. 산의 나무는 스스로를 해치고, 기름불은 스스로를 태운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기에 베이고, 옻나무는 용도가 있기에 갈라진다. 사람은 모두 유용의 용은 알지만 무용의 용은 모른다.

 

덕충부

 

노나라에 발 하나가 잘린 왕태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를 좇아 노니는 자들의 수가 중니의 제자들만큼이나 되었다. 상계가 중니에게 물었다. 왕태는 발이 잘린 사람인데도 그를 좇아 노니는 자들이 선생님을 따르는 자들과 더불어 노나라를 반분하고 있습니다. 그는 서서 가르치지도 않고 앉아서 의논하지도 않는데, 텅 비어서 찾아갔다가 가득 차서 돌아옵니다. 진실로 불언지교라는 것이 있어서 드러내지 않고 이루어주는 것입니까? 이 사람은 어떤 자입니까? 중니는 “그분은 성인이시다”말하며, 나는 다만 꾸물대다가 아직 그에게 가지 못한 것이다. 나는 장차 그를 스승으로 삼고자 하는데 하물며 나만 못한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느냐. 어찌 노나라 뿐이겠느냐. 나는 장차 온 천하의 사람을 이끌고 그를 따르려 한다. 상계는 묻는다. 그 분은 불구인데도 선생님보다 훌륭하다고 하시니, 보통 사람과의 차이는 퍽 크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 씀은 특별히 어떤 것입니까? 중니가 말한다. 죽고 사는 것은 큰 문제이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한다. 비록 천지가 뒤집어져도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틈이 없음을 알고 있어서 사물과 함께 변하는 일이 없으며, 사물의 변화를 명으로 알고 따르면서 그 종을 지킨다. 상계는 묻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중니는 말한다. 다르다는 점에서 보면 간과 쓸개는 초나라와 월나라만큼 멀다. 같다는 점에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다. 무릇 이와 같이 깨달은 자는 눈과 귀가 좋아하는 것 따위는 알지 못하고, 마음을 덕의 조화 속에서 노닐게 한다. 모든 사물을 하나의 바탕에서 보기 때문에 사물이 없어진다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발 하나 잃는 일 따위는 마치 흙을 떨어버리는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상계는 말한다. 왕태는 자신을 위해 그의 지로 마음을 얻었고, 그 마음의 역량으로 상심을 얻었습니다. 어찌하여 사람들이 그에게 모이는 것입니까? 중니가 말했다. 사람들은 흐르는 물에 비추지 못하고, 고요한 물에만 비출 수 있다. 오직 고요한 것만이 능히 다른 것들을 고요하게 할 수 있다. 땅에서 목숨을 받은 것 가운데 소나무와 잣나무가 가장 올바르므로 겨울이나 여름에도 푸르고, 하늘에서 목숨을 받은 것 가운데 오직 순임금만이 가장 올바르므로 다행히 먼저 자신을 바르게 하면서 뭇사람을 바르게 이끌었다. 도를 보존하고 있는 사람의 징표는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용감한 병사는 혼자서도 대군이 지키는 적진에 쳐들어가 싸운다.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하여 반드시 일을 이루는 자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하늘과 땅을 뜻대로 다루고, 만물을 품에 품고, 육신을 잠시 머무는 숙소로 삼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허망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가 아는 바를 하나로 삼고, 마음으로 이미 죽음을 넘어선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 그는 날을 택해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따르는 것이다. 그가 어찌 사람들을 모으는 일 따위에 괘념하겠는가.

 

신도가는 올자인데, 정자산과 함께 백혼무인의 동문 제자였다. 자산이 신도가에게 일러 말했다. 내가 먼저 나가면 자네는 여기 남아 있게. 자네가 먼저 나가면 내가 여기 남아 있겠네. 그 다음날 또 한 집에서 만나 함께 앉아 있었는데, 자산이 신도가에게 일러 말했다. 내가 먼저 나가면 자네는 여기 있게. 자네가 먼저 나가면 내가 여기 있겠네. 지금 나는 나가려 하는데, 자네가 여기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또 자네는 집정을 보고도 피하지 않으니, 자네는 집정과 대등하단 말인가? 신도가는 말한다. 선생의 문하에 본래 집정이라는 구별 따위가 있는 것인가? 자네는 자네가 집정이라는 점을 좋아하여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업수이 보는군. 듣건대 거울이 밝은 것은 먼지가 앉지 않아서이고, 먼지가 묻으면 밝지 못하지. 현인과 오래도록 함께 있으면 허물이 없어진다고 했네. 지금 자네가 크게 소중히 여길 것은 선생이네. 그런데도 아직 그런 소리를 하다니, 역시 지나친 것이 아닌가? 자산은 말한다. 자네의 처지가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요순과 그 선을 다투고자 하다니, 자네의 덕을 헤아려 족히 스스로를 반성하지 못하는가? 신도가는 말해준다. 자신의 허물을 변명하며 부당하게 벌을 받았다고 여기는 자는 많지만, 자신의 허물을 변명하지 않고 응당한 벌을 받았다고 여기는 자는 적다. 어찌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명인 듯 편안히 여기는 것은 오직 덕 있는 자만이 능히 할 수 있다. 예의 화살이 닿는 사정거리 안에서 노닌다면, 그 안은 화살이 명중하는 곳이다. 그런데도 명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명이다. 온전한 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불구인 사람을 비웃는 경우는 많다. 나도 발끈하며 성내지만 선생이 계신 곳에 가면 다 잊고 돌아온다. 선생이 선으로 나를 씻어주심을 알지 못하겠는가? 나는 선생님과 더불어 19년을 노닐었지만 일찍이 내가 불구인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지금 자네와 내가 형해의 안에서 노닐어야 하는데, 자네는 형해의 밖에서 나를 보고 있으니 역시 지나치지 않은가? 자산을 부끄러워하며 낯빛을 고치고 말했다. 자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되네.

 

노나라에 발이 잘린 숙산무지라는 자가 있었는데, 외발의 종종 걸음으로 공자를 찾아왔다. 중니가 말했다. 자네는 신중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미 이런 환이 있었다. 비록 지금 찾아와 보았자 어쩔 수 있겠는가. 무지는 말했다. 나는 오직 힘써 배울 줄 모르고, 내 몸을 가벼이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발을 잃게 되었습니다. 지금 내가 온 것은 발보다 존귀한 것이 있기 때문이요, 그것을 보존하는 데 힘쓰고자 함입니다. 무릇 하늘은 덮지 못하는 바가 없고, 땅은 싣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하늘과 땅으로 여기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실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공자는 말했다. 내가 생각이 모자랐소. 선생은 안으로 드시지 않겠소? 청컨대 내가 들은 바를 한번 강해보겠소. 무지가 나갔다. 공자가 말했다. 제자들아, 힘쓰거라. 무릇 무지는 발 없는 불구이지만 오히려 배움에 힘써 그 이전에 행한 악을 보상하려 하고 있다. 하물며 온전한 너희들이야 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 무지가 노담에게 말했다. 공구는 아직 지인에 들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공손한 태도를 하고 선생님께 무엇을 배우려 하는 것입니까. 그는 속임수를 써서 헛되고 기괴한 명성을 구하려 하지만, 그런 것이 지인에게는 한낱 자기 자신을 묶는 질곡으로 여겨짐을 모르고 있습니다. 노담이 말했다. 어찌 그로 하여금 바로 사생이 하나이며 가불가가 하나임을 깨닫게 하여 그 질곡을 풀어 주지 않는가.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은가. 무지가 말했다. 하늘이 그를 형벌한 것인데, 어찌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노나라 애공이 중니에게 물었다. 위나라에 못생긴 자가 있는데, 이름이 애태타라 합니다. 장부들이 그와 함께 있으면 그를 그리워하며 능히 떠나지를 못하고, 부인들은 그를 보면 부모에게 청하여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느니 그 분의 첩이 되겠다고 하는 자가 십 수 명으로도 그치지 않습니다. 일찍이 그가 주장하는 것을 들은 바가 없고, 언제나 사람들과 화합할 뿐입니다. 군주의 지위를 가지고 사람들의 죽음을 구제하는 것도 아니고, 녹봉을 모아 다른 사람들의 배를 채워준 적도 없습니다. 또 그 추한 모습은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이며, 화합하기는 하지만 주장하지 않고, 그의 지식이 사방 먼 곳까지 이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남녀가 그 앞에 모여드니, 이는 필시 다른 사람과 다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과인이 그를 불러 보았더니, 과연 그 추한 모습이 세상을 놀라게 할 만했습니다. 함께 있기를 한 달도 되지 않아 과인 역시 그이 사람됨에 뜻을 두게 되었고, 1년이 되지 않아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나라에 재상이 없어, 그에게 나랏일을 맡기려 했습니다. 그는 고민한 후에 응답했는데, 범연히 사양하는 듯 했습니다. 과인은 부끄러워졌지만 마침내 그에게 나랏일을 맡겼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과인을 떠나가 버리니, 과인은 슬퍼져 마치 무언가를 잃은 듯했고, 더불어 이 나라를 함께 즐길 사람이 없는 듯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중니가 말했다. 저는 일찍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새끼 돼지들을 보았는데, 얼마 후에 새끼 돼지들은 놀란 표정으로 모두 죽은 어미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자기들을 돌보지 않고,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류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어미를 사랑한 것은 그 형체가 아니라, 그 형체를 있게 한 그 무엇인 것입니다. 싸우다 죽은 자는 장사를 지낼 때 운삽이 달린 관을 쓰지 않고, 형벌을 받아 잘린 자는 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이는 모두 그 근본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천자의 여러 후궁들은 귀밑머리를 자르지 않고 귀에 구멍을 뚫지 않습니다. 이제 막 장가를 든 자는 집에 머물며 부역에 나가지 않아도 욉니다. 형체를 온전히 하는 것도 족히 이와 같이 하는데, 하물며 덕을 온전히 하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지금 애태타는 말하지 않고도 신임을 얻고, 공이 없어도 친애를 받으며, 사람이 자기 나라를 맡기려 하면서도 오직 받아들이지 않을까 염려 하니, 이는 필시 재전하면서도 덕이 드러나지 않은 자입니다. 애공이 말했다. 무엇을 일러 재전이라고 합니까? 그러자 중니가 말했다. 사생과 존망, 궁달과 빈부, 현과 불초, 훼예와 기갈, 한서는 모두 일의 변화이며 명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낮과 밤이 서로 앞에서 교대하지만, 지는 능히 그 시작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생존망 등의 것들은 족히 마음의 조화를 어지럽힐 수 없으며, 신령한 마음속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마음이 조화롭고 즐겁도록 하고 이치에 통하여 기쁨을 잃지 않도록 한다면, 낮과 밤이 쉴 새 없이 진행되어도 물과 더불어 봄의 화기를 가지게 되니, 이는 사물에 접하여 때에 따라 마음에 화기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를 일러 재전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일러 덕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합니까? 중니가 말했다. 수평이란 물이 최대로 정지해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가히 본보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안으로 고요를 보존하고 밖으로 출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덕이란 조화가 닦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덕이 드러나지 않은 자에게는 물이 능히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애공은 후일 민자에게 고하여 말했다. 처음에 나는 남면하여 천하의 군주가 되어, 백성의 기강을 잡고 그 죽음을 가엾게 여겼고, 나 스스로 그것을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지금 내가 지인의 말을 듣고 나니, 내가 그 내용도 없이 가벼이 처신하여 나라을 망하게 할까 두려워졌다. 나와 공자는 군신 관계가 아니라 덕으로 사귀는 친구일 뿐이다.

 

인기지리무신이 위령공에게 유세하자, 위령공이 기뻐했다. 그 뒤로 온전한 사람을 보면 그 목이 야위어 보였다. 옹앙대영이 제환공에게 유세하자, 환공이 기뻐했다. 그 뒤로 온전한 사람을 보면 목이 야위어 보였다. 그러므로 덕이 뛰어나면 형은 잊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하고, 잊지 않아야 할 것을 잊는다. 이를 일러 ‘참으로 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노닐면서 지를 재앙으로 여기고, 약을 아교풀 같은 구속으로 여기고, 덕을 교제 수단으로 여기고, 기교를 장사 수단으로 여긴다. 성인은 분별적인 계산을 하지 않으니 지를 어디에 쓰겠으며, 깍아 다듬지 않으니 아교풀을 어디에 쓰겠으며, 잃을 것이 없으니 덕은 어디에 쓰겠으며, 재물을 추구하지 않으니 상은 어디에 쓰겠는가. 이 네 가지는 천죽이기 때문이다. 천죽이란 하늘이 먹여주는 것이다. 이미 하늘에서 먹을 것을 받았는데, 어찌 또 인위를 쓰겠는가. 인간의 몸은 있어도 인간의 분별적인 정은 없다. 인간의 형이 있으므로 인간과 무리를 짓지만, 인간의 분별적인 정이 없으므로 시비의 판단을 그 몸에 얻을 수 없다. 성인이 아득히 작아 보이는 것은 사람들 속에 있기 때문이고, 오연히 커 보이는 것은 홀로 그 자연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혜시가 장자에게 일러 말했다. 사람은 본래 정이 없는가? 장자가 말했다. 그렇다. 혜시가 말했다. 사람이면서 정이 없다면 무엇을 가지고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가? 도가 인간에게 모습을 주고 하늘이 인간에게 형체를 갖추어 주었는데, 어찌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겠는가. 혜시가 말했다. 이미 사람이라 한다면 어떻게 정이 없을 수 있는가? 장자가 말했다. 그대가 말하는 정은 내가 말하는 정이 아니다. 내가 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호오의 감정으로 몸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자연을 따르고 익생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혜시가 말했다. 익생하지 않으면 무엇을 가지고 그 몸을 보존하는가? 장자는 말했다. 도가 모습을 주고 하늘이 형체를 주었으니, 안으로 호오 때문에 몸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자네는 자네의 정신을 밖으로 하고, 자네의 정기를 수고롭게 하여, 나무에 기대어 읊고, 오동나무 책상에 기대어 졸고 있다. 하늘이 자네의 형체를 선택하여 주었는데, 자네는 견백을 말하는구나.

 

대종사

 

하늘이 하는 일을 알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자는 지극하다. 하늘이 하는 일을 아는 자는 자연으로 산다.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자는 자신의 지로 아는 바를 가지고 자신의 지로 알지 못하는 바를 기른다. 그 타고난 수명을 다하고 중도에 요절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지의 훌륭함이다. 비록 그렇다 해도 아직 문제가 있다. 무릇 지라는 것은 근거가 있어야 그 정당성을 가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의거하는 바는 특별히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내가 말하는 ‘하늘’이 사람이 아닌지, 내가 말하는 ‘사람’이 하늘이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진인이 있은 연후에 진지가 있다. 무엇을 진인이라고 하는가? 옛날 진인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거역하지 않고, 무엇을 이루었다 해도 내세우지 않으며, 일을 꾸미지도 않는다. 그런 자는 허물이 있어도 뉘우치지 않고, 마땅하게 했다 해도 자득하지 않는다. 그런 자는 높은 곳에 올라가도 두려워하지 않고, 물속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뜨거워지지 않는다. 이는 그 일이 능히 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옛날의 진인은 잠을 자도 꿈을 꾸지 않았고, 깨어 있을 때도 근심하지 않았다. 먹되 단 것을 바라지 않았고, 호흡은 깊고 깊었다. 진인은 호흡은 발꿈치로 하고, 중인의 호흡은 목구멍으로 한다. 굴복한 자는 목구멍으로 말하는 것이 마치 막힌 듯하고, 욕망이 심한 자는 천기가 얕다. 옛날의 진인은 열생을 모르고, 오사를 몰랐다. 세상에 나옴을 기뻐하지 않았고, 다시 들어감을 거역하지 않았다. 무심히 가고 무심히 올 뿐이다. 그 비롯된 곳을 잊지 않고, 죽어서 어디로 갈지를 구하지 않았다. 마주하는 대로 기쁘게 받아들이며, 잊고 되돌아간다. 이를 일러 마음으로 도를 훼손하지 않고 인위로 자연을 조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일러 진인이라고 한다. 그런 자는 그 마음이 편안하고, 그 용모가 고요하며, 그 이마가 높고 아름답다. 서늘하기가 가을과 같고, 따뜻하기가 봄과 같다. 희로가 사계절과 통하고 사물과 더불어 마땅한 조화를 이루니, 그 끝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병사를 일으켜 상대 나라를 망하게 할지라도 인심을 잃지 않으며, 만세에 이익과 은택을 베풀지라도 각별히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없다. 즐거움을 위해 물과 소통하는 것은 성인이 아니요, 친한 자와 친한 것은 인이 아니다. 하늘의 때를 점치는 것은 현인이 아니요, 이해를 구분하는 것은 군자가 아니다. 명예를 좇아 행동하여 자기를 잃는 것은 선비가 아니다. 몸을 망치며 참된 삶을 잃고 있는 자는 남을 부린 것이 아니다. 호불해, 무광, 백이와 숙제, 기자, 서여, 기타, 신도적 등은 남이 부리는 일에 부려진 것이다. 남이 가고자 한 곳에 간 것이지, 스스로 가고자 하는 길을 간 것이 아니다. 옛 진인은 그 형상이 의로우나 무리 짓지 않는다. 부족한 듯 하면서도 좇지 않았고, 한가로이 홀로 머물면서도 완고하지 않았고, 텅 빈 마음으로 베풀면서도 겉치레 하지 않았다. 즐거워하는 모양이 기쁜 듯하고, 서두르는 모양이 부득이한 듯했다. 덕이 모여 얼굴색을 더욱 빛나게 돋우는 듯하고, 한가로이 자신의 덕에 머물렀다. 고민하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과 비슷한 듯하고, 자유롭기가 제재되지 않은 듯했다. 줄곧 입을 다물고 있기를 좋아하는 듯하고, 무심히 말을 잊은 듯했다. 형으로 체를 삼고, 예로 날개를 삼고, 지를 때맞춰 쓰고 덕으로 따랐다. 드러난 것으로 몸을 삼는 것은 그 죽어가는 것을 여유 있게 보는 것이고, 예로 날개를 삼는 것은 세상에서 행동의 근거로 삼는 것이고, 덕으로 따르는 것은 발을 가진 자와 더불어 언덕에 이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진인이 근행한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그 좋아하는 것도 하나의 입장이요, 좋아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입장이다. 그 하나도 하나의 입장이지만, 그 하나가 아닌 것도 하나의 입장이다. 하나라는 입장으로 천과 무리가 되고, 하나가 아니라는 입장으로 사람과 무리가 된다. 천과 인이 서로를 이기려 하지 않으니, 이를 일러 진인이라고 한다.

 

나고 죽는 것은 명이다. 낮과 밤이 일정함은 자연이다.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바가 있으니, 모두 물의 실정이다. 사람들은 하늘조차도 아비로 여기고 몸소 그를 사랑하는데, 하물며 그보다 더 우뚝한 것은 어찌하겠는가. 사람들은 군주조차도 자기보다 낫다고 여겨 그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데, 하물며 그보다 더 참된 것은 어찌하겠는가. 샘이 마르면 물고기들은 서로 땅위로 드러나 서로 습기를 불어 주고 서로 물방울로 적셔주지만, 강호에서 서로를 잊고 사는 것만 못하다. 요임금을 기리고 걸을 비난하는 것은 양망하여 그 도와 하나가 되는 것만 못하다. 무릇 대괴는 내게 모습을 주고, 내게 삶을 주어 수고하게 하고, 내게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내게 죽음을 주어 쉬게 한다. 그러므로 나의 삶을 훌륭하게 하는 것은 곧 나의 죽음을 훌륭하게 하는 것이다.

 

무릇 골짜기에 배를 감추고 연못 속에 그물을 감추고는, 이를 일러 든든하다고 한다. 그러나 밤중에 힘 있는 자가 그것을 짊어지고 달아나며, 몽매한 자는 이를 알지 못한다. 작은 것을 큰 것 속에 감추는 것은 마땅한데도, 오히려 가지고 달아나는 일이 있다. 만일 천하를 천하에 숨긴다면 가지고 달아날 데도 없다. 이것은 항물의 위대한 실상이다. 다만 인간의 형체를 얻은 것만으로도 오히려 기뻐한다. 만일 인간의 형체가 만 가지로 변화하여 처음부터 그 극이 있지 않다면, 그 즐거워하는 것을 가히 이루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은 물이 가지고 달아날 수 없는 바에 노닐면서 만물을 있는 그대로 있게 한다. 일찍 죽어도 좋고 늙어 죽어도 좋으며, 시작도 좋고 마침도 좋게 여긴다. 사람들은 성인을 본받으려 하는데, 하물며 만물이 의지하는 바이자 모든 조화가 하나같이 의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는가.

 

무릇 도는 유정하고 유신하지만 무위하고 무형하다. 가히 전할 수는 있지만 받을 수는 없고, 터득할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다. 스스로 본이 되고 스스로 근이 된다. 천지가 있기 이전의 옛날부터 존재했다. 음양의 신묘한 작용과 훌륭한 지도자들의 신묘한 활동을 가능케 했으며, 하늘을 낳고 땅을 낳았다. 가장 높은 곳보다 더 위에 있어도 높다 하지 않고, 가장 깊은 곳보다 더 아래 있어도 깊다 하지 않는다. 천지보다 먼저 있었으면서도 오랜 세월이라 하지 않고, 까마득한 옛날 보다 오래 되었으면서도 늙었다고 하지 않는다. 시위씨가 이를 얻어 천지를 이끌었고, 복희씨가 이를 얻어 기모를 계승했다. 북두성이 이를 얻어 종내 어긋나지 않았으며, 해와 달이 이를 얻어 종내 쉼이 없다. 감배가 이를 얻어 곤륜산을 다스리고, 풍이가 이를 얻어 대전에서 노닌다. 견오가 이를 얻어 대산에 처하고, 황제가 이를 얻어 운천에 오르고, 전욱이 이를 얻어 현궁에 처하고, 우강이 이를 얻어 북극에 섰다. 서왕모가 이를 얻어 소광에 앉았다. 그 시작을 알 수 없고 그 마침을 알 수 없다. 팽조가 이를 얻어 위로는 유우에 미쳤고, 아래로는 오백에 미쳤다. 부열이 이를 얻어 무정의 재상이 되어 천하를 관장했고, 동유를 타고 기미에 올라 뭇별들과 나란히 서게 되었다.

 

남백자규가 여우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연세가 높으신데도 얼굴이 어린아이 같으니, 어찌된 것입니까? 여우가 말했다. 나는 도를 들었노라. 남백자규가 말했다. 도는 어떻게 배울 수 있습니까? 그러자 여우가 말했다. 아, 어찌 배울 수 있겠는가. 자네는 도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무릇 복량의는 성인의 재가 있었지만 성인의 도는 없었다. 나는 성인의 도가 있지만 성인의 재가 없으니, 내가 그를 가르치고자 해도 그가 과연 성인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성인이 되지는 못한다 해도, 성인의 도를 가진 자가 성인의 재를 가진 자에게 고해주는 것은 또한 쉬운 일이다. 내가 지켜 고해주기를 3일이 지나자, 그는 능히 외천하 했다. 이미 천하를 잊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내가 또 도를 지켜주기를 7일이 되자 능히 물을 잊을 수 있었다. 이미 물을 잊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내가 또 도를 지켜주기를 9일이 되자 그는 생을 잊게 되었다. 이미 생을 잊을 수 있게 되자, 능히 조철하게 되었다. 조철한 후에 능히 견독하게 되었다. 견독한 후 능히 고금이 없게 되었다. 고금이 없게 된 후 능히 불사불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삶을 죽이는 자는 죽지 않고, 삶을 살리는 자는 살지 못한다. 도의 양상은 보내지도 않고 맞이하지도 않는다.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없고,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것을 이름 하여 영녕이라고 한다. 영녕이란 얽힌 후에 이루는 것이다.

 

남백자규가 말했다. 선생님은 어디에서 그것을 들으셨습니까? 여우가 말했다. 나는 부묵의 아들에게서 그 말을 들었다. 부묵의 아들은 낙송의 손자에게서 들었다. 낙송의 손자는 첨명에게서 들었다. 첨명은 섭허에게서 들었다. 섭허는 수역에게서 들었다. 수역은 오구에게서 들었다. 오구는 현명에게서 들었다. 현명은 삼료에게서 들었다. 삼료는 의시에게서 들었다.

 

자사, 자여, 자리, 자래 네 사람이 서로 더불어 말했다. 누가 능히 무로 머리를 삼고, 생으로 척추를 삼고, 죽음으로 엉덩이를 삼을 것인가? 누가 사생과 존망이 하나임을 알겠는가? 우리가 그와 더불어 벗이 되겠노라. 네 사람이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마음에 거슬리는 바가 없으니, 마침내 더불어 벗이 되었다. 얼마 후 자여가 병이 들어, 자사가 가서 문안했다. 자여가 말했다. 위대하구나, 조물주여. 장차 나를 이처럼 구구하게 만드는구나. 허리는 굽고, 등은 튀어나오고, 위로 오관이 솟고, 턱은 배꼽에 숨었다.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고, 목덜미의 혹은 하늘을 가리는구나. 음양의 기운이 막혔지만, 그 마음은 한가롭고 무사하구나. 비틀거리며 우물로 가서 비춰보며 탄식했다. 무릇 조물주가 또 장차 나을 이처럼 구구하게 만드는구나. 자사가 말했다. 자네는 그것이 싫은가? 자여가 말했다. 망이거늘, 내가 어찌 싫어하겠는가. 가령 점점 화하여 나의 왼쪽 팔뚝이 닭으로 변한다면 나는 그것으로 밤의 때를 구하고, 가령 점점 화하여 나의 오른쪽 팔뚝이 활로 변한다면 나는 그것으로 올빼미를 잡아 구울 것이다. 가령 점차 화하여 나의 꽁무니가 수레바퀴로 변하고 나의 신이 말로 변한다면, 나는 그것을 탈 것이니 어찌 다시 수레를 구하겠는가. 무릇 얻는 것도 때가 되어 얻는 것이요, 잃는 것도 때에 따르는 것이다. 안시처순하면 애락이 능히 끼어들지 못한다. 이것이 옛날부터 이르는 현해이니 능히 스스로 풀지 못하는 자는 물에 의해 결박된 것이다. 또 무릇 물은 천의 장구함을 이기지 못하는데, 내가 어찌 또 싫어하겠는가.

 

얼마 후 자래가 병이 들어 기침을 하며 장차 죽으려 하자, 그 처자가 둘러 앉아 울고 있었다. 자리가 문안을 가서 꾸짖으며 말했다. 비키라. 놀라게 하지 말라. 창틀에 기대어 자래에게 말했다. 위대하구나, 조화여. 또 장차 자네를 무엇으로 만들려 하는가. 또 장차 자네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자네를 쥐의 간으로 만들려 하는가. 자네를 벌레의 팔뚝으로 만들려 하는가. 자래가 말했다. 자식에게 부모는 동서남북 어디에서든 오직 그 자식이 명령을 듣도록 한다. 사람에게 음양은 부모가 자식에게 대하는 것 이상이다. 음양의 도가 내 죽음 가까이에 왔는데도 내가 듣지 않으면 내가 사납게 거스르는 것이지, 저 음양의 도가 무슨 죄인가. 무릇 대괴는 내게 모습을 주고, 내게 삶을 주어 수고하게 하고, 내게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내게 죽음을 주어 쉬게 한다. 그러므로 나의 삶을 훌륭하게 하는 것은 곧 나의 죽음을 훌륭하게 하는 것이 된다. 지금 대야가 쇠를 불리는데 그 쇠가 펄쩍 뛰면서 ‘나는 반드시 막야검이 되겠다’고 말한다면, 대야는 필시 이 쇠를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 여길 것이다. 지금 우연히 인간의 형체를 받았는데 ‘나는 사람이다, 사람이다’라고 말한다면, 무릇 조물주가 이를 상서롭지 못한 사람이라 여길 것이다. 지금 천지는 하나의 큰 용광로요 조화는 대야이니, 어디로 가든 불가하겠는가. 편안히 잠들고 퍼뜩 깨어날 뿐이다.

 

자상호와 맹자반, 자금장 세 사람이 더불어 벗하며 말했다. 누가 능히 상여함이 없으면서도 상여하고, 상위함이 없으면서도 상위할 수 있는가? 누가 능히 등천하여 안개 속에서 노닐고, 무극을 휘감으며 서로 생을 잊은 채 마침내 궁함이 없을까? 세 사람은 서로 보고 웃으며 마음에 거슬리는 바가 없어 마침내 더불어 벗이 되었다. 한참을 한가로이 지내다가 자상호가 죽었다. 장례를 치르기 전에 공자가 이 소식을 듣고는 자공을 보내어 일을 돕게 했다. 한 사람은 곡을 엮고 또 한 사람은 거문고를 타면서 서로 화답하여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호라, 상호여! 이미 그 진으로 돌아갔는데, 나는 아직도 인간 세상에 길게 남아 있구나. 자공이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 말했다. 감히 묻건대, 주검 앞에서 노래하는 것이 예입니까. 두 사람이 서로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이 어찌 예의 뜻을 알겠는가. 자공은 돌아와 공자에게 고하여 말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 입니까? 수행이 없고, 그 형해를 도외시하고, 주검을 앞에 두고 노래하면서도 안색이 달라지지 않으니, 뭐라고 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저들은 방외에서 노니는 자들이고, 나는 방내에서 노니는 사람이다. 방내와 방외는 서로 미치지 못하는데, 너를 보내어 조문하게 했으니 내가 고루했구나. 저들은 바야흐로 조물주와 더불어 사람이 되고, 천지의 일기에서 노닌다. 저들은 생을 군더더기나 종기처럼 여기고, 죽음을 부스럼이나 종양이 없어지는 것처럼 여긴다. 무릇 그런 자들이 어찌 사생의 어느 것이 앞에 있고 뒤에 있는지를 알겠는가. 갖가지 다른 것을 빌려 잠시 사람의 몸을 이룬다. 그 간과 쓸개 따위를 잊고 그 이목을 버리며, 죽음과 삶을 반복하여도 그 시작과 끝을 알지 못한다. 아득히 진구 밖에서 노닐며, 무위의 업에서 소요한다. 저들이 무엇 때문에 세속의 예에 매여 보통 사람들의 귀와 눈으로 사물을 대하겠는가. 자공이 말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어느 방에 의거하고 계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나는 하늘의 육민이다. 그러나 나는 자네와 더불어 그들과 함께하고자 한다. 자공이 말했다. 감히 그 방도를 묻겠습니다. 공자는 말했다. 물고기는 물에서 서로 살아가고, 사람은 도에서 서로 살아간다. 물에서 사는 것은 연못을 파주면 살아갈 수 있고, 도에서 사는 자는 무사한 채로 삶이 안정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물고기는 강호에서 서로를 잊고 사람은 도에서 서로를 잊는다고 했다. 자공이 말했다. 감히 묻건대, 그런 자들은 기인이 아닙니까? 공자가 말했다. 기인은 사람들의 눈에 기이한 것처럼 보여도 하늘에 동반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늘의 소인이 인간 세계의 군자요 인간 세계의 군자가 하늘의 소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안회가 중니에게 물어 말했다. 맹손재는 모친이 죽자 곡은 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고, 마음에서 슬퍼하지 않았으며, 상을 치르면서도 비통함이 없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없는데도 상을 잘 치른다는 소문이 노나라를 덮으니, 진실로 그 실은 없으면서 그 이름만 얻은 것입니다. 저는 참으로 이것이 시상합니다. 중니가 말했다. 맹손씨는 훌륭하게 해냈다. 상례를 잘 아는 자보다도 앞서 있다. 다만 그 일을 간단히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는데, 그는 이미 간단하게 해냈다. 맹손씨는 태어나는 까닭을 알지 못하고, 죽는 까닭도 알지 못한다. 또 삶을 앞서 좇을 줄도 모르고, 죽음을 따를 줄도 모른다. 그저 자연의 변화에 따라 무엇이든 되어, 앞으로 일어날 미지의 변화를 기다릴 따름이다. 일단 변화하고 나면 그 변화하기 이전을 어찌 알겠으며, 아직 변화하지 않았다면 변화한 뒤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다만 자네와 나만이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 아닐까? 또 그는 외형의 변화에 놀라기는 하지만 마음이 상하지는 않고, 머무는 곳은 달라져도 정말로 죽는 일은 없다. 맹손씨야말로 깨달은 자이다. 사람들이 곡을 하니 자신도 곡을 했으며, 그러니 이야말로 알맞게 처신한 것이다. 또 서로 더불어 ‘나는 나일 뿐’이라고 하지만, 어찌 내가 이른바 나임을 알겠는가. 또 너는 꿈에 새가 되어 하늘을 날아 보았는가? 꿈에 물고기가 되어 연못에서 놀아보았는가? 지금 말하는 자도 깨어 있는지 꿈꾸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마땅한 바에 나아가는 것도 웃어넘김에는 미칠 수 없고, 웃어넘기는 것도 편안히 변화를 따르는 것에는 미칠 수 없으니, 안배하여 화에 나아가면 이에 사람은 저 고요한 하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의이자가 허유를 뵈었는데, 허유가 말했다. 요가 자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던가? 의이자가 답했다. 요가 저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몸소 인의를 실천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라 했습니다. 허유가 말했다. 자네는 무얼 배우겠다고 여기에 왔는가? 요가 이미 인의로 자네에게 묵형을 가했고, 또 시비로 코를 베었으니, 자네는 장차 무엇을 가지고 전사의 길에서 자유로이 노닐겠는가? 의이자가 말했다. 비록 그렇지만 저는 그 울타리에서라도 노닐고 싶습니다. 허유가 말했다. 그럴 수 없다. 무릇 청맹과니와는 이목과 안색의 아름다움을 함께 할 수 없고, 색맹과는 청황으로 수놓은 아름다운 무늬의 장관을 함께 할 수 없다. 의이자가 말했다. 무릇 무장이 그 미모를 잊게 된 것과 거량이 그 힘을 잊게 된 것, 황제가 자신의 지를 잊게 된 것은 모두 화로 속에서 단련되었기 때문입니다. 무릇 조물자가 나의 묵형을 지우고 비형을 보완하여 나를 온전케 함으로써 선생을 따르게 한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허유가 말했다. 아,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를 위해 대략을 말해주겠다. 우리의 스승이시여! 우리의 스승이시여! 만물을 조화롭게 하지만 의로 여기지 않고, 은택이 만세에 미치지만 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상고보다 오래 되었지만 늙었다고 하지 않으며, 천지를 싣고 덮어 뭇 사물을 조형하지만 기교로 여기지 않는다. 이는 노니는 것일 뿐이다.

 

안회가 말했다. 저는 얻은 바가 있었습니다. 중니가 말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안회가 말했다. 저는 인의를 잊었습니다. 중니가 말했다. 좋구나.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다른 날 다시 보고 안회가 물었다. 저는 진전이 있었습니다. 중니가 말했다.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저는 예악을 잊었습니다. 중니가 말했다. 좋구나.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다른 날 다시 보고 안회가 말했다. 저는 진전이 있었습니다. 중니가 말했다.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저는 좌망했습니다. 중니가 놀라며 말했다. 무엇을 좌망이라 하느냐? 안회가 말했다. 팔과 다리를 잊고, 총명을 몰아냈으며, 형을 떠나고, 지를 버려 동어대통했습니다. 이를 일러 좌망이라고 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같아졌으니, 따로 좋아하는 것도 없고 화하여 집착하는 것도 없구나. 과연 훌륭하구나. 내가 너를 따라 배워야겠다.

 

자여와 자상은 친구 사이이다. 장맛비가 열흘이나 계속되자, 자여가 말하기를 자상이 아마 병이 난 것 같구나 하며 밥을 싸가지고 가서 먹이려 했다. 자상의 집 문에 이르자, 마치 노래하는 듯도 하고 곡하는 듯도 한 소리로 그가 거문고를 뜯으며 말했다. 아버지이신가, 어머니이신가? 하늘인가, 사람인가? 그 소리는 노래를 감당하지 못했고, 그 시는 매우 촉급했다. 자여가 들어가 말했다. 자네의 노래가 어찌하여 이러한가? 자상이 말했다. 나는 나로 하여금 이런 극한 상황에 오게 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 알 수가 없었다네. 부모가 어찌 나를 가난하게 하고자 하겠는가. 하늘은 사사로이 덮은 것이 없고 땅은 사사로이 싣는 것이 없지. 천지가 어찌 나를 사사로이 가난하게 하겠는가. 나를 이렇게 만든 자를 구하고자 했으나 찾아내지 못했다네. 그러니 내가 이런 극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은 명인 듯하네.

 

응제왕

 

설결이 왕예에게 물었는데, 네 번을 물었지만 네 번 모두 모른다고 했다. 설결은 뛸 듯이 기뻐하며 포의자에게 가서 고했다. 포의자가 말했다. 자네가 지금에야 그것을 알았구나. 유우씨는 태씨에 미치지 못한다. 유우씨는 인을 품고 사람들에게 요구하니, 역시 인심은 얻었지만 처음부터 인간을 그르다고 여기는 데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태씨는 누워 있을 때 편안하고 깨어 있을 때 자유로우니, 한 번은 자신을 말이라 여기고, 한 번은 자신을 소라고 여긴다. 그 지와 정은 신실하고 그 덕은 매우 진실하지만, 처음부터 비인하는 데는 들지 않았다.

 

견오가 광접여를 뵈었다. 광접여가 말했다. 일중시가 자네에게 무엇을 말하던가. 견오가 말했다. 저에게 말해주기를 “군주에 오른 자가 자기 생각으로 여러 의식과 법도를 만들어 낸다면 사람들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으며, 그것에 교화되지 않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광접여가 말했다. 그것은 거짓된 덕이다. 그렇게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바다를 걸어서 건너고, 강바닥을 파고, 모기에게 산을 짊어지우는 것과 같다. 무릇 성인의 다스림이 바깥을 다스리는 것이겠는가? 바르게 한 뒤라야 잘 다스려지는 법이니, 성인의 다스림은 다만 확고하게 자기 일을 해낼 뿐이다. 또 새는 높이 날아 주살의 해를 피하고, 생쥐는 신단의 언덕 아래를 깊이 굴 파고 들어가 그을리거나 파헤쳐지는 해를 피한다. 그대는 이 두 동물보다 무지한 것인가?

 

천근이 은양에서 놀다가 요수가에 이르러 무명인을 만나 물었다. 청컨대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을 묻습니다. 무명인이 말했다. 가거라. 너는 고루한 사람이구나. 어찌하여 그리 유쾌하지 않은 것을 묻는가. 나는 지금 조물자와 더불어 벗이 되려 하고 있다. 싫증이 나면 또 저 아득히 나는 새를 타고 육극의 밖으로 나아가 무하유지향에서 노닐고 광랑지야에 거처할 것이다. 너는 또 어찌 천하를 다스리는 일로 나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가. 또 다시 묻습니다. 무명인은 말했다. 네가 담에서 마음이 노닐고 막에서 기가 합하고 순물자연하여 사사로움을 쓰는 일이 없다면 천하는 다스려진다.

 

양자거가 노담을 뵙고 말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는데, 민첩하고 강하고 투철하고 밝으며, 도를 배우는 데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라면 가히 명왕에 비견되겠습니까? 노담이 말했다. 성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사람은 관리의 직무를 잘하느라 형을 수고롭게 하고 마음을 피곤하게 하는 자이다. 호랑이와 표범은 가죽의 무늬 때문에 사냥꾼을 부르고, 재빠른 원숭이와 털이 긴 소를 잡는 사냥개는 밧줄에 묶이게 된다. 이런 자가 명왕에 비견될 수 있겠는가? 양자거가 놀라 얼굴색을 바꾸며 말했다. 감히 명왕의 다스림에 대해 묻겠습니다. 노담이 말했다. 명왕의 다스림은 그 공이 천하를 덮지만 자기 것이 아닌 듯 하고, 만물에 교화를 베풀지만 백성들이 의식하지 못한다. 공은 있지만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며, 물로 하여금 스스로 기쁘게 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곳에 있으면서 무유의 경지에서 노닌다.

 

정나라에 계함이라는 신무가 있었는데, 사람의 사생과 존망, 화복과 수명을 알아 그 정확한 때까지 예측하니 마치 신과 같았다. 정나라 사람들은 그를 보고 모두 버리고 도망갔다. 열자가 그를 보고 심취하여 돌아와 호자에게 고하여 말했다. 처음 저는 선생님의 도가 제일인 줄 알았는데, 더 뛰어난 자가 있었습니다. 호자가 말했다. 내가 너에게 거죽은 주었지만 아직 내용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도를 얻었다고 하는가? 여러 암컷들이 있어도 수컷이 없다면 어찌 알을 낳을 수 있는가. 도로 세상에 마주하여 믿음을 얻으려 하는구나. 그렇기 때문에 남이 너의 상을 보고 알아맞히는 것이다. 시험 삼아 그를 데려와 나를 보여 보자. 다음날 열자가 그와 더불어 호자에게 갔다. 나와서 열자에게 일러 말했다. 아! 자네의 선생은 곧 죽을 것이다. 살 수가 없다. 10여 일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나는 괴이한 것을 보았다. 젖은 재를 보았다. 열자가 들어와서 눈물로 옷깃을 적시며 호자에게 고했다. 호자가 말했다. 아까 나는 그에게 대지의 상을 보여주었다. 움직이지도 않고 바르게 고정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이것으로 그는 아마 내 덕이 막히는 조짐을 보았을 것이다. 시험 삼아 다시 데려와 보아라. 다음날 또 그와 함께 호자를 뵈러 갔다. 뵙고 나와서 열자에게 일러 말했다. 다행이다. 당신의 스승은 나를 만나 병이 나았다. 완전히 생기가 살아났다. 나는 그의 기가 막힌 것을 보았다. 열자가 들어가 호자에게 고했다. 호자가 말했다. 조금 전 나는 그에게 천양을 보여주었는데, 명과 실이 아직 개입되기 전이니, 생명의 조짐이 발꿈치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마도 나에게 일어나는 생명의 조짐을 본 것이리라. 시험 삼아 다시 데려와 보아라. 다음날 그와 함께 호자를 뵈러 갔다. 뵙고 나와 열자에게 말했다. 자네의 스승은 상이 일정하지가 않다. 나는 더 이상 상을 볼 수가 없다. 자네 스승의 상이 일정해진 연후에 다시 와서 상을 보겠다. 열자가 들어와 호자에게 고했다. 호자가 말했다. 내가 조금 전에는 태충막승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그는 나에게 형기의 조짐을 본 듯하다. 소용돌이치는 연못도 있고, 고요한 물의 연못도 있고, 흐르는 물의 연못도 있다. 연못에는 아홉 가지 이름이 있는데, 이는 그 가운데 세 가지이다. 시험 삼아 다시 데려와 보아라. 다음날 또 그와 함께 호자를 뵈러 갔다. 아직 똑바로 서기도 전에 정신을 잃고 달아났다. 호자가 말했다. 좇아라. 열자가 좇아갔지만 잡지 못했다. 돌아와서 호자에게 고하여 말했다. 이미 사라졌습니다. 이미 없어져 잡지 못했습니다. 호자가 말했다. 조금 전에 나는 근원에서 나오기 이전의 본모습의 상을 보여주었다. 내가 허로써 그에게 맡기는 그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내가 바람 부는 대로 쏠리고 물결치는 대로 흐르는 고러, 그는 도망친 것이다.

 

그런 후 열자는 스스로 공부를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집으로 돌아와 3년간 나가지 않았다. 아내를 위해 직접 요리하고 돼지 기르는 것을 사람 키우듯이 했다. 어떤 일도 더불어 친한 것이 없고, 조탁복박하여 흙덩이처럼 홀로 의연히 서있다. 분분한 세상에서 매이지 않았으니 오로지 이와 같이 하여 일생을 마쳤다.

 

이름의 노예가 되지 말라. 음모의 창고가 되지 말라. 일을 맡아 일로 삼지 말라. 아는 것의 주인이 되지 말라. 무한한 변화를 타고 흔적 없음에서 노닐라. 자연으로부터 받은 바를 극진히 하도, 견득하지 말라. 허일 뿐이다. 지인의 용심은 거울과 같아, 보내지도 않고 맞이하지도 않는다. 응하되 저장하지 않기 깨문에 능히 만물을 감당하지만, 마음을 해치지 않는다.

 

남해의 제왕은 숙이요, 북해의 제왕은 홀이며 중앙의 제왕은 혼돈이다. 숙과 홀이 때때로 혼돈의 땅에서 서로 만났는데, 혼돈의 대접이 매우 훌륭했다. 그래서 숙과 홀은 혼돈의 덕에 보답하고자 했다. 사람들에게는 모두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 구멍이 일곱 개 있는데, 혼돈만이 없으니 시험 삼아 뚫어주자. 하루에 구멍 하나씩 뚫었는데, 칠일이 되자 혼돈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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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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