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분명한 목소리로 우리 모두 “본연의 자신이 되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요! 하지만 범죄자나 살인자는 어떤가요? 그들도 그들 본연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가요? 또 하나, 저쪽 세상에서는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요, 그렇다면 살인자도 벌을 안 받는다는 말이겠네요!
저 세상에는 판결 같은 것이 단연코 없습니다. 판결할 게 없으니까요. 우리는 모두가 순수 의식이에요.
많은 이들이 사후에 어떤 판단도 내려지지 않는다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잘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한 것 같아요. 그러나 처벌이나 보상, 판단, 판결 따위는 ‘저기’의 것이 아니라 ‘여기’의 것이에요. 그게 우리가 법, 규칙, 체계라는 걸 갖고 있는 이유지요.
저쪽 편에서는 우리가 왜 지금 이런 모습으로 있는지, 왜 우리가 이러저러한 일을 했는지가 완전히 명료합니다. 그것들이 삶에서 얼마나 비윤리적이었느냐는 전혀 상관없어요. 다른 이들을 헤치는 사람은 단지 그들 자신의 고통 때문에, 제한되고 분리되었다는 느낌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강간이나 살인을 하는 자는 자기가 장엄한 존재라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큰 고통을 다른 이들에게 주려면 그들의 내면은 말할 수 없이 불행할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실 그들은 가장 깊은 연민이 필요한 이들입니다. 사후에 판단이나 더 극심한 고통이 필요한 게 아니라요.
나는 살인자나 범죄자나 ‘그들 본연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길을 잃고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까마득히 잊어버렸을 때에만 파괴 행위를 하게 된다고 전 생각합니다. 범죄자들은 중심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하는 행위는 실제로는 그들 자신에 대한 마음속의 느낌을 반영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그들’과 ‘우리’로 나누기 좋아하지만, 어디에도 ‘그들’은 없습니다. ‘모두’가 우리니까요!
연쇄 살인범은 병이 든 사람이에요. 암에 걸린 사람처럼요. 현재 우리 사회에 살인자가 더 많아졌다면 그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병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을 가둬두면 일시적으로 살인은 줄겠지요. 그건 마치 암의 증상만 치료하는 것과 같아요. 하지만 사회의 핵심 문제를 변형하고 초월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더욱 커질 뿐입니다. 감옥을 더 많이 지어야 할 테고, 사법 체계는 더욱 강화해야겠죠. 가해자들은 자기 환경의 피해자입니다. 아니, 그 이상이죠. 그들은 ‘전체로서의 우리’가 근저에 갖고 있는 문제들의 물리적 증상이에요.
그들의 행위를 눈감아 주자는 게 아닙니다. 나는 단지 내 자신의 장엄함을 알게 됨으로서 내가 바뀌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뿐이에요. 모두가 자신의 진실에 닿을 수 있다면, 그래서 자신의 위대함을 알게 된다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쪽을 선택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임’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그런 행복하고 사랑받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상처 주는 것은 곧 자기를 상처 주는 것과 똑같다는 것을 압니다.
예컨대 살인자 같은 범죄자도 성인(聖人)과 똑같은 곳으로 가고, 성인과 똑같이 아무런 판단도 받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네 그게 바로 제 말입니다. 그 상태에서는 그들이 한 온갖 행위가-겉으로 아무리 부정적으로 보일지라도-두려움과 고통, 제한된 관점에서 나왔다는 걸 우리는 알아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어떤 느낌을 받는 건 그것 외에 어떻게 행동하거나 느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일단 저쪽 세상으로 가면 우리가 몸을 입고 있을 때의 물리적 제한들이 우리 앞에 분명해지고, 우리가 왜 그렇게 행동하고 느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며, 따라서 오직 연민만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가해자’라고 딱지 붙인 사람들 또한 그들 자신의 한계와 고통, 두려움의 피해자라고 느껴져요.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모든 사람,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 느끼게 됩니다. 나는 저쪽 세상에서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것을 이해했지요. 우리는 모두 똑같습니다.
만일 모두가 이것을 안다면 법이나 감옥이 필요 없을 거예요.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우리’와 ‘그들’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지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두려움을 갖고 행동하게 되고요. 판결과 법, 감옥, 처벌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지금 이 시점,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것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저쪽 세상에서는 처벌 같은 것이 전혀 필요 없어요. 일단 그곳에 가면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요.
출처 "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아니타 무르자니
당신을 에워싼 환경이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맑게 깨어서 자기를 지켜보도록 힘쓰라. 주변의 멜로드라마에 휩쓸리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이렇게 말하라. “나는 다른 누구보다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다. 성인이든 죄인이든 그 사람 안에 거하는 영은 신성한 영이다. 그 영이 이번 나의 생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역을 감당하고 있다. 다른 생에서는 다른 역을 맡았다. 그 배역이 어떤 것이든 간에 나는 나와 모든 존재 안에 거하는 신성한 영을 거룩하고 성스러운 영으로 존중한다.”
그가 맡은 역할은 그가 아니다. 이 진실을 알면 어떤 범죄든 용서하기가 쉬워진다. 자기 자신이나 남을 분석, 판단, 평가하여 명찰을 달아주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누구를 판단하여 명찰을 달아줄 필요가 없어졌으니, 누구를 통제하거나 조종할 마음을 접는 것 또한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출처 : “우주 리듬을 타라”, 디펙 초프라
과거에 했던 일 또는 하지 못했던 일 때문에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때 당신은 당신의 의식 수준에 맞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실은 무의식 수준에 맞게 행동했다는 편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당신에게 좀 더 맑은 마음이 있었다면 좀 더 순수의식이 있었다면, 행동이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과거에 했거나 하지 못했던 일들은 실은 모두 인류의 무의식이 발현된 것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행한 폭력과 잔인한 파괴 행위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서글프게도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모두 저주받아 마땅한가? 모두 유죄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런 행위는 그저 무의식의 발현일 뿐이며, 인류가 이제 정신적으로 성장하면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진화의 단계에 불과할 뿐인가?
예수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옵니다’(누가복음 23장 34절)라고 한 말은 당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출처 : “고요함의 지혜” 에크하르트 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