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죽어 사라진 후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죽으면 몸에서 빠져나와 저세상으로 간다고들 알지만 우리는 어디로도 가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개인과 세계’로 있기를 그만두고 이제부터는 ‘세상 전체와 일치’할 것을 결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거세게 요동치던 파도가 사라지면 그 파도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파도가 사라져 바닷물로 돌아가거나 바닷물에서 다시 파도로 돌아오는 일은 없습니다. 파도와 바닷물은 처음부터 바다였을 뿐 다른 일은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손님들의 흥망성쇠를 무심히 바라보거나 보지 않으면서 제자리에 그대로 영원히 아는 자로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몸도 자아도 우리도 정작 죽거나 죽음을 체험할 수 없으므로 죽음은 없다는 진실에 도달합니다. 이런 일은 깊은 잠 안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몸이나 자아는 깊은 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며 그래서 깊은 잠 안에는 잠자거나 잠을 체험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깊은 잠은 작은 죽음이고 그 예행연습이며 우리가 우리의 대리인(자아)에게 주는 죽음에 대한 위로입니다. 그 위로는 죽음은 없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밤에 잠들면서 공포감을 느끼는 자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체험할 수도 없는 죽음을 앞둔 자아는 유쾌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너무 좋았고 즐거웠다. 진정 사랑한다. 나는 어디로도 가지 않고 바로 이곳에 모두와 같이 그대로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기 바란다. 천천히 마음껏 소풍을 즐기기를.” 이런 이해의 확산과 비례해서 장례식장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는 점차로 진실에 부합하는 쪽으로, 즉 밝고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분위기로 바뀌어 갈 것이며 모든 장례식은 언제 어디서든 다 함께 영적인 자각을 확인하는 장이 될 것입니다.
이 한 물건은 본래부터 있는 투명한 의식(昭昭靈靈, 소소영영)이다.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이름도 모습도 없다. 누구든지 임종 시에는 다만 이렇게 관찰하여야 한다. 몸과 세상 만물은 투명한 의식(五蘊皆空, 오온개공)이고 몸 안에는 우리가 없다. 진정한 나는 모양이 없고, 가지도 오지도 않는다. 태어날 때도 의식은 태어나지 않으며 죽을 때도 의식은 죽지 않는다. 투명하고 고요한 의식(湛然圓寂, 담연원적)이 곧 세상 만물이다. 이렇게 관찰할 수만 있다면 곧바로 다 마쳐 몸과 세상에 매이거나 구속받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벗어난 자유인이다.
-휴정, 선가귀감
‘우리는 투명한 의식이다’라는 말은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며 개인적인 생각이나 하나의 이론이 아닙니다. 위의 사실들은 낮과 밤 매일 매 순간 이어지는 우리의 직접 경험을 자세히 관찰하면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아는 것 즉 경험과 행동의 주체는 우리(의식)지 몸이 아닙니다. 망원경이나 스피커가 보거나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몸은 보거나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보고 듣는 아는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커피잔이 보인다면 바로 그곳에 아는 자가 있습니다. 보이는 광경이 곧 우리(의식)입니다. 그래서 ‘봄’(seeing)과 ‘앎’(knowing)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훗날 죽은 후에 어디로 가는지를 몹시도 궁금해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에 있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미 죽은 후에 가는 장소 바로 그곳에 서서 몸과 세계를 굽어보고 있습니다! 죽은 후에 가는 곳과 지금 몸과 세계를 보고 있는 곳은 같은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죽어 있습니다. 구태에 두려움에 떨며 죽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작도 알 수 없는 오래전에 벌써 우리는 죽었고, 죽은 그 자리에서 삶이라는 연극을 관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어야 진정 사는 것이며 살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그리고 죽은 자가 산 자를 보는 것이지 산 자는 죽은 자를 볼 수 없다는 역설이, 역설이 아니라 진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출처 : "자유롭게 살고 유쾌하게 죽기", 이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