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식)는 시간과 공간이 생겨나기도 전에 홀로 있습니다. 우리(의식)는 아직 자기 안에 모습을 낳지 않고 고요와 평화로 존재합니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불멸의 생명입니다. 일어날 수 있거나 일어날 수 없는 모든 일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요하고 투명한 앎 자체로 있습니다. 우리 안에 알려지는 내용물이 없으면 우리는 다만 있습니다. 의식의 바다는 떠다니는 배와 헤엄치는 물고기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투명한 의식 홀로인 채로는 아무런 체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식)는 문득 우리(의식)를 느끼고 체험하고 싶습니다. 신은 신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나(의식)는 나(의식) 자신을 속속들이 알고 맛보고 싶습니다. 고요한 의식의 바다에 미세한 떨림이 감지됩니다. 태초 이전에 우리는 ‘나는 나라는 느낌’(나는 있음이라는 느낌)(the sense of I am that I am)으로 휴식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맑고 투명한 느낌만 있기에 우리(의식) 자신을 속속들이 알고 맛보는데 적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식)는 하나의 거대한 연극을 기획합니다. 연극의 제목은 ‘자기체험’입니다. 우리(의식)는 구체적 감각으로 우리를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연극의 운영체계와 규칙을 설정합니다. 역동적 드라마 전개에 가장 알맞은 운영체계로 설정한 것은, 시공간과 물질이라는 연료를 엔진에 투입하여 구동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식)는 이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고안합니다. 그것은 우리(의식)를 대리해서 연극 속 세계를 구석구석 누비며 우리 자신을 실감 나게 체험할 아바타(avatar) 곧 우리의 화신(化身)입니다. 화신은 자아(몸-생각)라는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나는 누구라는 느낌’(the sense of I am that I am somebody)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식)는 자기체험을 위해서 몸-사물-시공간으로 나타납니다. 동시에 우리(의식)는 여전히 투명한 의식(아는 자)입니다. 우리(의식) 안에서 세상 만물이 출몰을 반복합니다. 우리(의식)는 공간 안에 있지 않습니다. 공간이 우리(의식) 안에 있습니다. 공간은 의식입니다.
세상 만물(몸-사물-시공간)은 의식 안에 나타나는 한 장의 그림이므로 함께 나타나고 함께 사라집니다. 이들은 의식으로 만들어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식과 세상 만물은 정체가 같으며 동질입니다. 의식이 의식을 낳습니다. 다른 무엇을 낳을 도리가 없습니다. 세상 만물의 생명은 의식 스스로 겉모습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만물의 생멸 즉 우리 겉모습의 변화와 무관하게 언제나 불변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실상은 연극의 진행 중에는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이런 규칙이 마련된 이유는, 의식의 구체적 자기체험이 일어나려면 아바타에 초점이 맞춰지는 동시에 투명한 의식은 잊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만물을 창조한 신(우리)(의식)은 기획한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위대한 창조의 기억만을 간직한 채 연극 무대를 떠났을까요. 그리곤 천상 혹은 영계에서 아바타들의 행동을 주시하며 사후 혹은 최후의 심판을 세심하게 준비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거대한 연극의 첫 막이 오르는 순간, 신은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 속으로 자기를 던져 넣습니다. 그리하여 신은 연극에 등장하는 모든 것 안에 사무쳐 지금도 여전히 무대를 거닐고 있습니다.
출처 : "자유롭게 살고 유쾌하게 죽기", 이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