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사실 중생은 없다. 모두다 부처임)의 무명(無明), 어리석음(사실 무명, 어리석음도 없다. 모두다 이것의 현현이다)이란 ‘나’라고 하는 인식의 초점, 기준에 대한 무의식적 집착입니다. ‘나’라는 초점이 있음으로 인해 온갖 경계가 상대적으로 세워지고 거기에 끄달리는 미혹, 미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물리적, 심리적 영향이 ‘나’라는 초점으로 수렴될 때, 어떤 영향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어떤 영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좋음과 싫음, 이 두 가지 반응이 모두 번뇌의 단초입니다.
이 ‘나’라는 인식의 초점이 경계와 상대적으로 맞서 있는 또 다른 경계라는 사실을 돌아보십시오. ‘나’가 경계를 분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경계’로 인식되는 작용 자체가 분별심입니다. ‘나’와 ‘경계’가 알려지고 있다는 이 사실에서 그 모두를 아는 앎을 다시 알려 하면 아는 자와 아는 대상의 끝없는 분열이 이어집니다. 알려고 해서는 참으로 알 수 없습니다. 앎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에서, 판단 중지, 멈춤, 인식의 비약적 전환, 깨달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앎에도 속하지 않고 모름에도 속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성품, 마음, 의식은 알 수 없습니다. ‘나’라는 인식의 초점에 의해 인식되는 대상이 아닙니다. ‘나’라는 인식의 초점 이전의 바탕, 본체는 ‘나’에 의해 파악될 수 없습니다. 다만 ‘나’와 ‘경계’가 인식되고 파악된다는 사실에서 갑작스러운 인식의 전환, 깨달음이 와야 합니다. 그 깨달음은 ‘나’의 깨달음이 될 수 없습니다.(굳이 말하자면 있음이 있음을 알아보는 것임) 문득, 생각이 끊어진 것 같은 순간, 만물이 저절로 그러함을 수용하게 될 뿐입니다.
출처 : "이것이 그것이다", 심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