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명상법회를 하는 날입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지금 여기, 지금 눈앞에 있는 이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들, 여기서 경험되는 모든 것들, 내가 삶이라고 여기는 이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 일어나도록 완전히 허용해주는 것입니다. 해석,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허용해주는 것이지요. 마치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은 어떤 대상이 앞에 오더라도, 좋은 대상이 오든 나쁜 대상이 오든, 좋은 사람이 오든 나쁜 사람이 오든 전혀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비출 뿐입니다. 그래서 “명상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는 “있는 그대로 보라.”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명상할 때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 때문에 있는 그대로를 보지 않고 자기 생각, 기억, 판단, 해석으로 자꾸 걸러서 보게 됩니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개념을 짓고, 시비분별을 할 때는 다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되, 명상할 때는 그냥 지금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허용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허용해준다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개입을 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눈앞에 드러나는 모든 것, 다시 말하면 경험의 대상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고,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고, 코로 냄새 맡아지는 것도 있으며, 맛보아지는 것도 있으며, 감각되는 것도 있으며, 또 이렇게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일체(一切)’, 즉 모든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불교에서 일체는 12처(十二處)입니다. 눈, 귀, 코, 혀, 몸, 뜻에서 색, 성, 향, 미, 촉, 법으로 경험되어지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12처는 ‘반야심경’에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12처에 대해 ‘나의 눈이 바깥의 죽비를 본다.’ 이렇게 여깁니다. 내 안에 눈, 귀, 코, 혀, 몸, 생각이 있고, 바깥 경계로 색, 성, 향, 미, 촉, 법이 있어서 내 눈이 바깥의 대상을 본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사실 초기불교에서 12처를 설명한 이유는 ‘무아(無我)’를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비실체성, 즉, 눈, 귀, 코, 혀, 몸, 생각이라는 것이 없다, 색, 성, 향, 미, 촉, 법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서 12처라는 교리를 설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12처는 연기법(緣起法)의 다른 설명이고, 이 12처는 진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연기되어서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연기법을 조금 더 세부적으로 풀이하면 삼법인으로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고, 항상 하다고 여기면 괴로울 뿐이고, 실제 있는 것이 아닌 무아라는 것이죠. 이것을 검증하기 위해서 초기불교 교리에서는 계속해서 12처가 무상, 고, 무아다, 연기된 것일 뿐이다, 실체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나의 눈으로 바깥에 있는 죽비를, 다른 사람을, 이 세상 모든 것을 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너무나도 고질적인 오래된 생각이어서 한 번도 멈추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나의 눈이 죽비를 본다’하는 이 경험이 진실일까요?
이런 질문은 한 번도 자기 자신에게 던져본 적이 없습니다. ‘나의 눈이 저 죽비를 본다’, 이렇게만 생각하면서 나이만큼의 세월동안 그 생각이 맞는 것으로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니라 머리로 배워서 안 것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기일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볼 뿐이었습니다. 보고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좋다, 나쁘다 하지 않고 전체로 보았습니다. 이름도 붙이지 않고 개념도 붙이지 않습니다. 그냥 보고 들을 뿐이었습니다. 아무런 개념이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조금씩 들면 부모가 아이를 가르치게 되고, 아이는 배워서 아는 지식을 늘려가게 됩니다. 안다고 여길 때부터 우리의 가장 큰 오류가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카드의 한쪽에는 비행기의 그림이 있고, 다른 쪽에는 ‘비행기’라는 글씨를 써 놓은 카드를 아이에게 앞, 뒷장을 번갈아 보여주며 “비행기”라고 말해줍니다. 이렇게 하면 아이는 이 모양을 비행기라고 입력하게 됩니다. 나중에 엄마가 아이에게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아이가 “비행기”라고 답을 하면 박수를 보냅니다. 이 아이는 비행기라는 이름을 알았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비행기를 안다고 여깁니다. 불교용어로 식(識)이 생겨난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진짜 아는 것일까요? 어떻게 ‘비행기’라는 이름만으로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허망한 분별망상입니다. 육식(六識)과 십팔계(十八界)가 공(空)하다는 것이 이것을 뜻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명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 생각, 개념, 식(識), 알음알이로 ‘죽비’라고 해놓고 이것을 ‘안다’고 여깁니다. 죽비 소리가 들릴 때 ‘내가 죽비 소리를 듣는다’, 이것이 진실입니까? 이렇게 물어볼 때 여러분들은, ‘아, 12처는 공하다고 했으니까 나의 육근이 육경을 보는 것은 다 공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또 다른 알음알이로 교리를 이해한 것입니다. 아는 것이 하나 더 생긴 것뿐입니다. 아는 것은 참된 진리에 가까이 가는 것을 막습니다. 말을 이해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경험으로 직접 확인하셔야 합니다.
‘지금 내가 죽비를 보았다, 죽비 소리를 들었다.’ 이것은 생각입니다. 생각을 빼고, (죽비를 들고) 이것이 무엇입니까? (죽비를 치며) 이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죽비를 보았다.’라는 것은 벌써 내가 여기 있고, 죽비는 저 바깥에 있어서 둘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나와 나 아닌 것을 분별해놓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모양을 붙입니다. 비행기를 그리고 비행기라는 글자를 써서 “비행기”라 부르면 그것을 알았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듣는 내가 있고 듣는 소리가 있다, 이렇게 생각으로 둘로 나누는 것은 곧 판단이고 분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회에서 부모님이 가르쳐준 대로 기억하고 생각해 온 방식입니다. 정말 있는 그대로 보고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정견(正見)이 아니지요. 만약 배가 고프다고 합시다. “진수성찬, 진수성찬”이라고 백 번, 천 번 부른다고 해서 배가 부릅니까? 진수성찬이라는 그 말은 실제 앞에 있는 밥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말은 백 번, 천 번 들어도 밥 한번 먹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밥이라는 소리와 밥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진짜는 바로 소리 그 자체입니다. 생각 없이, 판단 없이, 분별없이, 지금까지 하던 의식적 습관 다 내려놓고, 그냥 지금 눈앞에 있는 검증 가능한 경험 가능한 실상으로 직접 확인해 보세요. 지금 이것은 무엇일까요? (죽비를 치며) 가만히 이 소리를 들을 때 생각을 다 내려놓으면, 듣는 나와 바깥의 소리로 나누어지지 않고 그냥 이것만 있습니다. (죽비를 치며) 이것만 경험됩니다.
이것이 명상이고 알아차림입니다. 기존 생각으로 ‘내가 저 소리를 들어.’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 이렇게 생각으로 자동 해석하는 것을 잠시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진실은 불이법(不二法), 즉 하나입니다. 내가 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들림’이 경험될 뿐입니다. 들으려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저절로 들리지 않습니까? ‘내가’를 붙일 필요 없이 저절로 들립니다. 그냥 들린다는 경험이 알아 차려질 뿐입니다.
집에서 가만히 있을 때, 책을 보다가, TV를 보다가, 무엇을 하는 중이라도 좋습니다. 잠깐 멈추어서 지금 이순간과 같이 있어 보십시오.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알아차려 집니까? 미세한 전자음이 알아차려 집니까? 미세하다는 말도 빼고, 전자음이라는 말도 빼고, 그냥 이것이 경험됩니다. 여기에 시계의 초침 소리라고 이름을 붙이면 오염되어 버립니다. 그냥 모를 뿐입니다. 그냥 알아 차려질 뿐입니다. 죽비소리라는 알음알이도 내려놓고, 그냥 들릴 뿐입니다. 지금 이 경험뿐입니다. 저절로 보이는 경험이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소리도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모든 것은 이처럼 인연 따라 생겼다가 인연 따라 사라집니다.
그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것은 저절로 알아 집니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것들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드러나는 이 모든 것을 지장 탱화, 인등, 연등, 사람들, 신중단 이렇게 보자마자 해석을 합니다. 그런 해석을 따라가지 않으면 그냥 볼 뿐입니다. 저는 이것을 ‘첫 번째 자리’라고 표현합니다. 첫 번째 자리에서는 ‘내가 저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볼 뿐입니다.
연기법과 십이처라는 교리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것(안근=눈=보는 나)이 있을 때 저것(색경=대상=죽비)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습니다.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주와 객, 보는 것과 보는 대상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인연생 할 때 저것이 동시생 한 것입니다. 이것과 저것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연기법은 ‘존재는 하나’를 뜻합니다. 곧 불이법입니다. 연기법의 자리, 첫 번째 자리, 분별 이전의 자리에서는, 이 모든 것을 그저 하나로 볼 뿐이지 둘로 나누어서 보지 않습니다. 좋은 것이 보이든 나쁜 것이 보이든, 잘난 사람이 보이든 못난 사람이 보이든 그냥 볼 뿐입니다.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은 두 번째 자리에 떨어진 나의 해석, 분별입니다. 나라는 아상, 에고, 거짓된 나라는 것이 생겨서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보고, 좋은 대상으로 보고, 나쁜 대상으로 분별해서 봅니다. 봄의 자리, 첫 번째 자리, 그냥 저절로 보임, 볼 뿐 하는 이 자리는 전체가 둘이 아닙니다.
명상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주객으로 나누어지던 분별을 분별 이전으로 돌려놓기 위함입니다. 명상할 때, 소리가 나면 그냥 그 소리를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소리를 듣는다.’라는 분별된 생각 없이 그냥 그것과 같이 있어 보십시오. 소리가 들리는 것을 분별없이 경험해준다, 허용해준다, 있는 그대로 본다 이렇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초기불교에서는 위빠사나라고 하여 “분별하지 말고 알아차리라”고 하고, 선불교에서는 “(죽비를 치며)이것뿐”이라고 합니다. 교리에서는 ‘정견(正見)’,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라고 설명합니다. 또 다른 말로, 저는 “지금 경험되는 모든 것들을 그냥 허용하라, 판단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라고 합니다. 다른 이야기 같지만 결국 같은 것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것에서든 ‘탁’ 하고 본인에게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어디에서 회광반조(回光返照)되어서 전환될지 알 수 없다 보니까 대승, 초기불교, 선 등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방편으로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진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도(中道)’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은 모두 중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불교 수행법의 본질을 보면, ‘불이중도’라는 하나의 가르침입니다. 위빠사나, 선, 받아들임, 내맡김, 모든 수행법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전혀 어긋나지 않습니다. 하나의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지금까지 남자로 혹은 여자로 어느 지역에서 누구 부모님 밑에서 어떻게 태어나서 어떠어떠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은 나의 생각이고 해석이고 판단이고 분별망상일 뿐입니다. 그런 나라는 것은 애초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너와 내가 주객으로 나누어지지 않고 그저 알아차릴 뿐, 선에서 말하는 공적영지(空寂靈知), 공하여 아무것도 없지만, 신령스럽게 저절로 알아 차려질 뿐인, 그러나 알아 차려지는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를뿐’인, 이것이 참된 명상입니다. 지금 있는 이대로 여기 일어나는 모든 것을 난생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그저 이 경험과 함께 존재하기만 하면 됩니다. 시간 날 때마다 3분이든 5분이든 어디에서든 잠시 문득 돌이켜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허용해주는 참된 명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이 법문은 2020년 2월6일 부산 금련사에서 봉행된 ‘금련사 2월 목요 명상법회’에서 법상 스님이 설한 내용을 법보신문의 주영미 기자님이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