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과 저쪽을 둘로 나누어, 어느 한쪽 극단을 취하거나 버리는 길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쉽게 말해 중도란 있고 없음,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이라는 양 극단의 길을 선택하여 취사분별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이끌어 주는 길 아닌 길입니다.
그렇기에 중도란 억지로 중도의 길을 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분별하던 습관을 하지 않기만 하면 될 뿐, 새롭게 중도라는 특별한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를 그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곧 중도입니다. 둘로 나누기 이전에 분별이 없던 자연스러운 있는 그대로의 실상과 묵묵히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는 갈고 닦아서 혹은 수행해서 얻는 특별한 수행법이 아닙니다. 시비분별로써 지금까지 일으켜 왔던 일체 모든 분별심과 번뇌의 조작을 그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중도에는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던 것을 그저 멈출 일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던 것을 그저 하지 않기만 하면 되기에 노력이 아닙니다.
그래서 중도의 길을 무위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애써서 노력하고 조작하는 유위행이 아니라, 함이 없이 행하는 길이기에 무위입니다. 그렇기에 중도는 존재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그저 태초의 아무 일 없던, 텅 빈 공이며, 텅 빈 충만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오랜 습기로 인해 끊임없이 분별심을 일으키고 애욕과 집착을 일으킴으로써 온갖 유위행을 해왔습니다. 행하던 삶이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이제는 애써서 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쉽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중도라는 아무 할 일 없는 길 없는 길을, 애써 얻어내려고 노력을 합니다. 중도는 애써서 노력하려 하고, 중도의 길을 얻고자 하면 할수록 어긋나는 길입니다.
중도적으로 산다는 것은 이처럼 할 일 없이, 무워로써, 자연스럽게, 완전한 삶의 흐름을 타고 그저 흘러가는 것일 뿐입니다. 전혀 노력하고 애쓸 일이 없으니, 저절로 몸과 마음이 이완이 되고, 긴장이 풀리며, 평안하고 자유롭습니다.
그 어떤 것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집착한다는 것은 곧 특별한 것에 애착하여 취하는 것이니 그것은 벌써 중도가 아닌 취사선택의 분별심입니다.
과도하게 어떤 한 가지를 좋아하거나, 사로잡히거나, 싫어하거나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특정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지도 않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더라도 그 목표에 집착 없이 그저 행할 뿐이기에 아무런 부담이 없습니다. 결과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습니다. 특별한 한 사람을 좋아한다거나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특정한 사상만 옳다고 집착하지도 않고, 특정한 종교만 절대라고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이것만이 절대’라고 고집하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생각만이 옳다라고 여기기는 아집도 없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둘로 나누어 놓고 옳은 것을 위해 노력하거나, 틀린 것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둘로 나누지 않으니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해 줍니다. 내 앞에 펼쳐지는 그 모든 삶에 대해 거부하지도 취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둡니다. 흘려보냅니다.
그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고, 둘로 나누지 않는 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둘로 나누지 않는다고 하여 불이중도라고도 합니다. 중도란 둘로 나누지 않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중도를 지키는 수행자는 따로 지킬 중도가 없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삶 자체를 통째로 수용할 뿐입니다. 중도를 잘 지키면서도 중도를 지킨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중도를 지키는 것에 대해 자랑하지도 않고, 중도를 지키는 않는 것에 대해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중도란 말이 중도일 뿐, 중도라고 부를 특정한 삶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도적 삶이다’라고 할 만한 특정한 방식이나 길이 있다면 그것은 그 방식에 집착하고, 그 길을 취하는 것이기에 분별심일 뿐입니다. 그래서 중도는 중도가 아니니, 그럼으로 중도인 것입니다.
출처 : "반야심경과 선 공부",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