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 소리가 똑, 똑, 똑 울리는 그 자리, ‘어떤 것이 자기일까?’하고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자리가 이름하여 ‘자기’입니다. ‘그 자리’라는 것 역시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물’과 동떨어져 달리 ‘자기’나 ‘그 자리’와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도리어 자기를 잃어버리고 사물을 쫓는 격입니다.
현상이 실재인 줄 알고 현상에 집착하는 것이 중생이 전도되어 자기를 잃어버리고 사물을 쫓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상을 초월한 실재라는 실체가 달리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이 바로 하마터면 자기를 잃어버릴 뻔한 것입니다. 자기라는 것이 실체적 존재로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실한 자기를 잃은 것입니다.
바깥의 현상에 끄달리던 마음을 돌이켜 그 현상의 근원을 문득 알아차리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아, 이것이구나!’하고 현상으로부터 몸을 빼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 ‘이것’이라는 것에서, ‘도’, ‘깨달음’, ‘마음’, ‘근원’, ‘자기’라는 것에서 벗어나기는 도리어 어렵습니다.
감각으로 지각되는 현상이 실재라는 것도 자기를 잃고 사물을 쫓는 미혹이지만, 현상을 벗어나 따로 실재가 있다는 것 역시 또한 자기를 잃고 사물을 쫓는 미혹일 뿐입니다. 앞에 맞은 화살은 얕지만 뒤에 맞은 화살은 깊습니다. 자기라는 것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있는 것 역시 아닙니다.
현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지만, 깨달음에서 벗어나는 것은 도리어 어려운 일입니다.
출처 : "이것이 선이다", 심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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