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자기 마음 하나밖에 없다. 이것을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표현할 수도 있다. 육체적인 ‘나’라는 제한에서 벗어나 유일한 의식으로서 ‘나’는 하나뿐이다. 우리는 육체적 형상에 따라 ‘나’와 ‘너’의 구별을 당연시 한다. 의식 내용과 감성의 차이를 가지고 ‘나의 마음’과 ‘너의 마음’의 분별을 당연시 한다. 그러나 그러한 분별되는 것들 배후에 아무런 차이를 느낄 수 없는 하나가 버젓이 존재한다.
눈을 뜨면 볼 수 있는 ‘능력’,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소리가 들리는 ‘기능’, 추위와 더위, 차가움과 뜨거움을 ‘아는 것’은 사람마다 차별없이 똑같다. 심지어 맹인도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귀머거리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 사고나 질병으로 신경에 이상이 생긴 사람은 아무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낀다’. 이것이 우리의 본래 마음이다. 한 순간도 이러지 않은 적이 없다. 본래 갖추어져 있기에 바깥에서 찾을 수 없다. 이것을 사용해서 온갖 행위와 사고를 하고, 이것을 사용해 자기 마음을 찾는 촌극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일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 것이라 한다.(Being : 여기서 마음이란 이것, 의식, 순수의식, 본래면목, 참나, 존재, 있음, 불성, 공, 신, 무한, 전체 등등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먹기에(생각하기에) 달렸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다른 의미가 된다.)
우리는 늘 마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마음 밖으로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아니, 우리 자신이 마음 그 자체다. 온 우주가 하나의 마음이다. 세계는 한 송이 마음 꽃이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미혹하여 모양을 따라 안과 밖, 나와 너를 나눈다. 어디가 바깥인가? 자기 생각은 모두 바깥이다. 본래 안팎이 없는 곳에서 생각으로 안과 밖을 나눈다. 나와 남을 나눈다. 자기와 세계를 나눈다. 참나와 에고를 나눈다. 본질과 현상을 나눈다. 번뇌와 해탈을 나눈다. 중생과 부처를 나눈다. 고요함과 시끄러움을 나눈다. 깨달음과 미혹함을 나눈다. 이 모든 것이 바깥이다. 분별은 곧 바깥이다.(Being : 不二, non-du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