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성(空性/佛性)에 집중하는 요령
티벳 사자의 서
삶과 해탈이 오직 <한 마음> 뿐이라.
<한 마음>이 만물의 근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는구나.
<한 마음>이 스스로 밝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보지 못하는구나.
<한 마음>이 모든 곳에 늘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는구나.
과거.현재.미래의 무수한 승리자 붓다들의
8만 4천 가르침(八萬四千法門)이 모두
<한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는구나.
경전이 하늘처럼 수북히 쌓여 있을지라도,
요점은 <이것이 그것이다>라는 세 낱말일 뿐.
승리자 붓다들의 관심은 오직 <한 마음>에 있나니,
이것이 번뇌를 여의고 자유의 경지로 들어가는 문이니라.
행복한 수행자들이여, 잘 들으라!
'마음'은 이렇다느니 또 저렇다느니 말도 많지만,
정작 마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적구나.
잘못 알고 있든지, 부분적으로 밖에는 모르는구나.
그들은 마음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치 못한 연고로,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궤변을 늘어 놓고 있구나.
딴 곳에 정신을 팔면 마음을 깨닫지 못하나니,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자신의 본성을 모르고,
자신의 본성을 모르기 때문에,
여섯 존재 차원의 미혹된 세계(三界六道)를
고통스럽게 방황하느니라.
마음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면 그럴 수 밖에 없느니라.
성문(聲聞)과 독각(獨覺)도 깨달음을 말하지만,
그들의 깨달음은 부분적일 뿐
<한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하느니라.
그들은 자구(字句)와 이론에 열중한 나머지
투명한 빛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성문과 독각은
주체와 대상의 분별하는 마음에 갇혀 있고,
중도주의자(中論學派)들은
두 가지 실체를 구별하는 극단주의에 갇혀 있고,
주술적 탄트라 수행자들은
제사 드리는 자와 제사 받는 자를 구별하는 마음에 갇혀 있고,
마하 탄트라와 아누 탄트라 수행자들은
깨달음의 세계와 자신의 마음을 따로 보는 이원론에 갇혀 있다.
이들은 둘이 아닌 것을 둘로 본다.
<모든 것이 '하나'>임을 깨닫지 못한다.
윤회와 해탈이 '한 마음' 속에 있는데,
이들은 이 수레 저 수레 바꿔타면서
윤회의 세계를 부질없이 방황한다.
그러므로 모든 인위적인 행위를 그치고,
그대 자신의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이 가르침을 받아 들여,
모든 것이 지금 자유로운 상태에 있음을 깨달으라!
마하무드라(大印) 곧 위대한 완성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깨달으라!
지적인 이해의 빛나는 과정인 '마음'은
어찌 보면 있고 어찌 보면 없느니라.
윤회와 해탈의 모든 고통과 즐거움은
모두 마음 속에 있느니라.
그러기에 자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11가지 수행 체계가 모두 마음 깨닫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느니라.
사람들은 마음을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 실체"라고 부르고,
어떤 보수적인 사람들은 "참 자아"라고 부른다.
성문(聲聞)들은 마음을 "무아(無我)"라고 부르며,
관념론자들은 "마음"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초월적인 지혜"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불성(佛性)"이라고 부르며,
어떤 사람은 "마하무드라(大印)"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영적인 에너지 초점[빈두]"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진리의 영역"이라고 부르며,
어떤 사람은 "토대"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평상심"이라고 부른다.
세 점의 시간의 문을 통과하려면 -
과거는 맑고 텅 비어 자취도 없으며,
미래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것이며,
현재는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일 뿐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시간이 이러함을 알고
있는 그대로의 그대 자신을 바라볼 때,
보는 행위만이 투명하게 존재한다.
보는 자로서의 그대도 없고,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그대도 없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순수하고 투명한 각성만이 홀로 존재한다.
이 각성이 바로
고정된 실체가 없는 <투명한 비어-있음(空)>이며,
이원성이 사라진 투명하고 <순수한 비어-있음(空)>이다.
이 상태는 어떤 고유한 형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이 상태는 밝고 분명하다.
따라서 완전히 멸절된 상태가 아니다.
이 상태에서는 다양한 것이 동시에 식별된다.
따라서 일종의 단일체라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라는 생각이 없고,
나눌 수 없는 하나라는 느낌이 든다.
이 상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각성이며, 있는 그대로의 실체다.
현존하는 만물 속에는
나누어질 수 없는 세 몸이 온전히 깃들어 있다.
세 몸을 통해 만물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모든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진리의 몸,
빛과 자유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깨달은 몸,
모든 곳에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나투는 몸이
만물 속에 하나로 깃들어 있다.
이 세 몸을 통해 하나로 결합된 이것이 곧 실재의 모습이다.
이 실체 세계로 들어가는 강력한 방법을 터득하려면
지금 그대의 각성이 바로 실체 세계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그대 마음의 본성이 아무 꾸밈없이 명료한데,
그대는 왜 "나는 마음의 본성을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깊게 생각할 마음이라는 대상도 없고,
그대의 지성이 스스로 밝게 빛나고 있는데,
그대는 왜 "나는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마음 속에 이미 생각하는 존재가 있는데,
그대는 왜 "나는 그것을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가?
(깨닫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대는 왜 "나는 아무 것도 제대로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가?
지금 있는 그대로 있으면 되는데,
그대는 왜 "나는 고요히 머물 수가 없다"고 말하는가?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만족할 수 있는데,
그대는 왜 "나는 그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가?
<명료함>, <각성>, <비어-있음>은 그 자체로
나눌 수 없는 것인데,
그대는 왜 "수행이 효과가 없다"고 수행을 들먹이는가?
모든 조건과 상황이 있는 그대로 자유롭고 자발적인데,
그대는 왜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생각과 절대 자유의 경지는 동시적인데,
그대는 왜 "벗어날 길이 없다"고 말하는가?
그대의 지성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왜 "나는 그것을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비어-있음>이 <마음의 진정한 본성>이다.
그대의 마음은 텅 빈 공간처럼 실체가 없다.
그대 자신의 이 마음을 관조하라.
비어 있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함이 아니다.
그대의 마음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태양처럼,
스스로 밝은 <투명한 지혜>로 충만한 비어 있음이다.
그대 자신의 이 마음을 관조하라!
그대의 마음은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아무런 걸림이 없는 <순수한 지혜>다.
그대의 이 마음을 관조하라!
그대의 마음은 산들 바람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생각으로는 그 자취를 잡을 수 없다.
그대의 이 마음을 관조하라!
마음 속에 무슨 생각이 떠오르든,
마음 속 생각은 모두 거울 속에 비친 영상과 같다.
이런 그대의 마음을 관조하라!
그대 마음을 어지럽히는 온갖 장애물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하늘에서 생기는 것처럼,
그대 마음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다.
이런 그대의 마음을 관조하라!
모든 것이 마음 속에 들어 있다.
그러니 마음을 떠나서 어디서 명상을 하겠는가?
모든 것이 마음 속에 들어 있다.
그러니 마음 밝히는 것 외에
무슨 다른 가르침이 필요하겠는가?
모든 것이 마음 속에 들어 있다.
그러니 마음 밖에서 무슨 행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이 마음 속에 들어 있다.
그러니 마음 밖에서 무슨 목표를 찾을 수 있겠는가?
관조하라! 그대의 마음을 관조하고 또 관조하라!
우주를 이잡듯 뒤지고 다녀도 마음은 찾을 수 없으리라.
우주란 마음이 만들어 낸 것,
그러니 마음을 찾으려면 그대 자신의 마음을 관조해야 하리라.
그대의 마음은 티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하다.
이 마음이 진리의 몸이며,
자아에 대한 순수한 각성이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빛나는 태양처럼
어떤 형태에도 구속되지 않는
'비어-있는' 투명한 빛이다.
이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밝다.
이 점을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대의 운명은 크게 달라지리라.
각성은 생겨난 것이 아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투명한 빛이다.
각성이 부모 없는 자식이라니
놀랍지 아니한가!
각성이 만들어 내지 않은,
스스로 존재하는 지혜라니 놀랍지 아니한가!
태어나지도 않고 따라서
죽지도 아니한다니 놀랍지 아니한가!
명백하고 투명한데도
그것을 보는 자가 없다니 놀랍지 아니한가!
고통스러운 윤회 세계를 방황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악이 아니라니
놀랍지 아니한가!
불성(佛性)을 성취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선이 아니라니
놀랍지 아니한가!
궁극적인 실재가 <늘 현존>하고 있는데 그것을 모른다니
이상하지 아니한가!
<지금 그대로 완전한 상태>인데 다른 그 무엇을 찾는 것이
이상하지 아니한가!
<그대 자신이 바로 궁극적인 실재>인데 다른 곳에서 찾으며
방황하는 것이 이상하지 아니한가!
형체가 없는 지금 이 순간의 빛나는 각성이
모든 바라봄의 정점이니라!
개념적인 생각이 완전히 탈색된 이 자유가
모든 명상의 정점이니라!
무엇을 어찌하려는 생각이 없는 이 편안함이
모든 행위의 정점이니라!
본래 그러하기에,
구하지 않고 애쓰지 않아도 도달하는 이 상태가
모든 성취의 정점이니라!
과거.현재.미래를 초월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니라.
과거라는 개념을 버려라.
지나간 흔적을 따라가지 마라.
미래의 계획도 따라가지 마라.
과거와 미래라는 생각을 끊어버려라.
현재라는 생각도 품지 말아라.
오직 <비어-있음>을 체험하는 <상태>에 머물러라.
어떤 대상에 대해 명상하지 말고,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 <깨어 있음>에만 머물러라.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산만한 것도 아닌 상태로
있는 그대로를 보도록 하라.
스스로 밝고 투명한 각성이 곧 <깨달음>이다.
투명한 각성 속에는 알려지는 대상도 없고 아는 주체도 없다.
오직 스스로 밝은 투명함만이 있다.
'비어 있음'에 대한 각성이 '비어-있는' 밝은 진리의 몸이며,
늘 현존하는 <해탈 상태>이다.
불성(佛性)은 수행을 통해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여기'에 현존하는 바즈라사트바(持金剛佛)를
깨닫도록 하라.
아무리 다양한 모습이 보일지라도,
스스로 존재하는 근원적인 지혜인 각성 상태에는
보는 자와 보는 행위의 이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자가 누구인지 찾아보라.
보는 자를 찾아도 찾지 못할 때,
보는 행위의 끝을 넘어서게 되리라.
그러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함께 사라진다.
보는 자도 보이는 대상도 없다고 해서
공허한 無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밝고 투명한 현재 의식의 각성 상태는 늘 현존한다.
이것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을 넘어선
마하무드라의 바라봄이다.
이 바라봄 속에는 이원성이 없다.
여기에는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구별이 없다.
아무리 많은 명상 수행이 있을지라도,
각성된 의식의 곧은 길에는
명상하는 자와 명상 상태의 이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명상하는 자가 누구인지 찾아보라.
명상하는 자를 찾아도 찾지 못할 때,
명상 행위의 끝을 넘어서게 되리라.
그러면 명상하는 자와 명상 상태가 함께 사라진다.
명상하는 자도 명상 상태도 없다고 해서
망상의 흑암 속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스스로 존재하는 밝은 현재 의식의 조화로운 관조 상태는
늘 현존한다.
이 관조 상태 속에는
명상 상태에 머뭄과 머물지 않음의 구별이 없다.
아무리 많은 행위가 있을지라도,
각성된 지혜의 빈두 속에는
행위자와 행위의 이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행위자가 누구인지 찾아보라.
행위자를 찾아도 찾지 못할 때, 행위의 끝을 넘어서게 되리라.
그러면 행위자와 행위가 함께 사라진다.
행위자도 행위도 없다고 해서
충동적인 본능에 사로 잡히지 않도록 하라.
스스로 존재하는 밝은 현재 의식 속에는
좋고 싫음을 초월한 윤리적인 행위가 존재한다.
이 행위 속에는 완전함과 불완전함의 구별이 없다.
아무리 많은 행위의 결과가 있을지라도,
각성된 마음인 스스로 존재하는 세 몸 속에는
성취자와 성취라는 이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성취자가 누구인지 찾아보라.
성취자를 찾아도 찾지 못할 때,
성취의 끝을 넘어서게 되리라.
그러면 성취자와 성취가 함께 사라진다.
성취자도 성취도 없다고 해서
책임을 회피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하라.
스스로 존재하는 밝은 현재 의식 자체가
세 몸의 깨달음이며,
세 몸의 깨달음이 근원적인 불성(佛性)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이 앎은 존재 아니면 무(無)라는
식의 8가지 극단적인 견해에 속박되지 않는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중심이라고 부른다.
이 앎은 티 한 점 없이 맑게 깨어 있는 지성이다.
이 앎은 '비어-있음'과 '깨어-있음'의 본질이기 때문에
"희열로 충만한 주님들의 본질"이라고 부른다.
이를 알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에
<초월적인 지혜>라고 부른다.
마음을 능가하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기 때문에
마하무드라(大印)라고 부른다.
이 앎을 깨달으면 자유와 행복이고
깨닫지 못하면 삶의 속박과 고통이기 때문에
자유와 속박의 기초라고 부른다.
이 앎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내면의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밝고 분명한 의식 자체가 곧 이 앎이다.
그래서 평상심(平常心)이라고 한다.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지,
이 앎은 '현재-의식'의 각성일 뿐이다.
이 앎 밖에 다른 것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대의 마음을 찾으려고
온 세상을 이잡듯 뒤져도 찾지 못한다.
코끼리를 잡으려면 그 발자국을 따라가야 하듯이,
마음을 찾으려면 마음의 흔적만을 좇아가야 한다.
마음 밖에서는 붓다를 찾지 못한다.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 밖에서 무엇을 찾고자 한다면,
붓다는 영원히 찾지 못한다.
이는 마치 군중 속에 섞여서 자신을 망각하고,
다른 사람을 자신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은 얼간이와 같다.
우주의 궁극적인 실체인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그대의 혼미한 마음으로 인해
윤회의 수레 바퀴에 휘말려 들어간다.
그대의 마음이 붓다인 줄을 깨닫지 못하는 그 마음이
니르바나(涅槃)를 흐리게 하는 장애물이다.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해탈과 윤회가 갈린다.
해탈과 윤회는 한 찰나에 갈린다.
마음이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올바른 생각이나 그렇지 못한 생각이나,
모두 같은 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간섭이나 판단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머무는 마음 그 자체는 자유다.
잘못된 생각 조차도 그대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우주의 실상(實相)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
생각이 어디서 나오는가?
생각이 머무는 곳은 어디이며,
최후에는 어디로 사라져 가는가?
모든 생각은 물에 비친 까마귀 그림자와 같다.
까마귀가 연못 위로 날아가 버리면
물에 비친 그림자도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나와도
마음은 연못처럼 늘 깨끗하다.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늘 깨어 있는 마음은
하늘처럼 투명하게 비어 있다.
이 근원적인 직관 지혜의 투명성 속에 만물이 깃들어 있다.
그대의 마음이 모든 현상과 존재를 만들어 낸다.
마음은 투명한 지성으로 스스로를 깨닫는다.
마음을 공간에 빗대어 설명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공간이라는 말로는 마음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마음은 투명하게 비어 있는 지성이다.
하지만 공간은 비어 있는 허공일 뿐 지성이 없다.
그러므로 공간이라는 말로는 마음을 설명할 수 없다.
동요하지 말고,
<마음의 실체에 초점을 맞추라>
이 세상의 모든 피상적인 현상은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현상과 존재, 윤회와 해탈이 그대 마음의 소산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흐름을 바꿈으로써
외적인 세상을 변형시킬 수 있느니라.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피상적인 관찰자들은 여섯 존채 차원의 윤회를
절대적인 실재로 주장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빠진다.
현상의 다름을 보는 사람은
수행의 9단계 역시 서로 다른 것으로 보는
흑백 논리의 오류에 빠진다.
그러나 모든 현상은 마음의 소산이다.
그러므로 무엇에도 집착하지 말고,
깨어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하라.
어떤 사람은 깨달음을 통해 오류에서 벗어난다.
어떤 사람은 현상의 다름에 집착함으로써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집착하는 것 자체도 마음의 작용이다.
이것을 안다면 집착에서 풀려날 것이다.
그대가 아는 것은 모두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이 아는 것이다.
생명이 없는 무정물(無情物)도 마음이다.
여섯 종류의 생명 있는 존재도 마음이다.
고귀한 인간과 신들의 행복도 마음이다.
비참한 상태의 고통도 마음이다.
5가지 독으로 인한 그릇된 인식도 마음이다.
근원적인 지혜의 지성도 마음이다.
선과 자유의 성취도 마음이다.
장애물인 악마와 망령들도 마음이다.
선한 신들의 도움도 마음이다.
모든 순수함도 마음이다.
개념이 사라진 집중 상태도 마음이다.
사물의 형태와 색깔도 마음이다.
형태가 없는 존재도 마음이다.
일원성과 다양성도 마음이다.
비존재와 무도 마음이다.
마음 밖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마음이 모든 현상을 계속 만들어 낸다.
바다와 파도가 둘이 아니듯이,
마음과 현상도 둘이 아니다.
나타나는 현상에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지만,
마음 밖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마음은 어디에도 매여 있지 않고 자유롭다.
어느 한 면만을 보고 마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마음에는 어떤 특정한 상태가 없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마음은 투명한 지성으로 빛나고 있기 때문에
비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마음은 비어 있으면서 투명한 지성으로 충만하다.
'비어-있음'과 투명한 지성은 분리할 수 없다.
행위자를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행위가 일어나지만,
그래도 그대의 각성은 맑고 분명하다.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체험하지만,
그래도 그대의 각성은 맑고 분명하다.
이것을 안다면 완전히 자유로울 것이다.
그 동안 얼마나 부주의하게
그릇된 판단을 내려 왔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참깨에서 기름이 나오고 우유에서 버터가 나오지만,
짜지 않고 젓지 않으면 기름도 버터도 나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가 붓다이지만,
수행이 없이는 깨닫지 못한다.
소 치는 목동도 수행을 하면 깨닫는다.
자신의 깨달음을 설명할 수는 없을지라도
확실한 체험은 할 수 있다.
그대가 직접 설탕 맛을 보았다면,
설탕 맛이 어떠냐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볼 필요가 없다.
마음이라는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전문가 학자라도 오류를 범할 것이다.
9단계 수행에 대해 기가 막히게 설명하는 사람이라도
마음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주워들은
소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불성(佛性)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다.
그대가 만약 마음이라는 실체를 깨닫는다면,
고결함과 사악함을 초월한다.
그러나 만약 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고결함은 그대를 천상계에 태어나게 할 것이고
사악함은 그대를 지옥계에 태어나게 할 것이다.
<비어-있는 직관 지혜인 마음>을 깨달으면
고결함과 사악함은 힘을 잃는다.
텅 빈 허공에서 샘물이 솟아날 수 없듯이,
주체와 대상이 사라진 '비어-있음' 속에는
고결함도 사악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 자신의 순수한 지성을
직관적으로 통찰하라.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은
지극히 심오하다.
그러므로 그대 자신의 순수한 지성인,
마음이라는 실체를 깊이 탐구하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