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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완전한 깨달음 / 아디야샨티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8.14|조회수20 목록 댓글 1

 

 

완전한 깨달음

 

 

 

머리말

 

 

살아가면서 당신 존재의 알려지지 않은 핵심을
직접 탐구할 준비가 되었다면,
당신은 분리하는 미몽(迷夢)에서 깨어날 때가
무르익은 것이다.
영적 탐구에서 곧장 질러가는 길은
당신이 갈망하는 무언가를 찾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찾는 자, 곧 본질적인 '나'를 찾는 데서 시작된다.
 
나는 당신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이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바로 당신, '나'라고 불리는 가면 뒤에 있는
알아차림(Awareness)에게 말하고 있다.     

 

아디야샨티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몸-마음, 개성의 너머에 있고,
모든 경험과 그것을 경험하는 자의 너머에 있으며,
세상과 그것을 인식하는 자의 너머에 있고,
존재와 그 부재의 너머에 있으며,
모든 주장과 부정의 너머에 있다.
 
모습 없는 근원으로 돌아와
모든 분리감을 초월했을지라도
멈추지 말고,
이 근원에도 집착하지 말고,
모든 이원성의 너머에 있지만
티끌 하나도 부정하지 않는
궁극의 실체를 향해 넘어가라.
 
모든 개념과 생각을 버리고,
그는 영원하고 늘 새로우며 온전한,
시간과 공간의 세상에서 드러나고 드러내는,
 ​
늘 현존하는 의식으로 살아간다.

 

 

 

1.자유롭고 싶은 충동

 

당신은 해결되어야 할 문젯거리나 실수가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참나를 올바로 보십시오.
 
마음은 과거와 미래를 만들어 내면서,
당신이 자기 존재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순간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십시오.
 
늘 있는 것은 너무나 쉽게 간과됩니다.
오로지 자기가 진정 누구인지만 물어보십시오.

 

 

2. 알 수 없는 것, 그리고 불안

 

생각, 감정, 소리, 냄새 등의 현상들, 즉 앞에 있는 풍결들보다 고요한 배경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앞에 있는 풍경들에, 오감을 통해 느끼는 것들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참나는 배경에서 발견됩니다.
 
참나는 모든 현상이 나타나는 근원이자, 가장 미묘한 느낌과 경험들로부터 거친 물질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이 드러나는 바탕입니다. 가만히 쉬면서 이 배경으로 머물러 있을 때,
당신의 참나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당신은 그저 참나에게 자기를 내주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일 뿐입니다.
그 생각은 그 침묵에서 나오므로,
당신은 자기 자신이 누구라는 생각을 침묵에게 되돌려 줍니다.
 
그것은 아름다움 자체이며, 모든 두려움의 너머에 있습니다. 전적인 안도감은 전적인 불안감에서 일어납니다.
안도감과 불안감은 둘 다 개인적인,
분리된 나라는 느낌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나는 누구입니까? 개인적인 '나'가 없을 때 모든 두려움은 끝이 납니다.

 

 

3. 명상과 영적 수행

 

당신은 어떤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육체적인 것도,
정신적인 것도,
감정적인 것도,
시간 속의 역사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의식 그 자체입니다.
 
대상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리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의 근원인 그것으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 근원입니다.
그 근원으로 곧장 들어가십시오.
스스로를 어떤 것으로 규정하면서 삶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4. 자기 자신과의 투쟁을 넘어서

 

인간의 상태에는 투쟁하려는 무의식적 욕구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끊임없이 투쟁하는 상태 속에 있으면, 

우리는 분리된 자아라는 느낌을 만들어 내는 경계들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리된 채로 있기 위해 투쟁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분리된 채로 있기를 - 비록 그것이 수많은 고통과 두려움,
혼란을 초래할지라도 -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분리된 채로 있기를 원합니다.
분리되어 있을 때 우리는 남다르고 특별하고 유일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구도자들의 가장 은밀하고 알아차리기 힘든 투쟁 방식은, 

투쟁을 멈추도록 도움을 줄 것 같은 수행이나 기법들을 가지고 투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러한 수행에 큰 투자를 할까요?
 
분리된 자아라는 느낌, 즉 에고가 그렇게 합니다.
오로지 에고만이 투쟁을 멈추는 법을 묻습니다.

이 심오한 자유를 일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 자유로 '살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가졌거나

앞으로 갖게 될 모든 자아 관념이 부서져야만 합니다.


이 자유는 투쟁의 필요를 불살라 없애 버리고,
자기의 참나가 바로 존재하는 모든 것임을 깨닫게 하는
불꽃입니다.

 

 

 

5. 모든 노력과 추구를 멈추기

 

무엇이 되려는 노력을 그만둔다는 것은,
마음이 결코 알 수 없는 것에 직면했을 때에
당신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되려 하고, 어디에 도달하려 하고,
무엇을 얻으려고 애쓰는 한,
당신은 실제로 진리 그 자체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것' 안에서 쉰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를
당신의 마음이 전혀 알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마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알려 주기를
당신이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되려는 노력을 완전히 그만둘 때,
당신은 멈추게 됩니다.
이 멈춤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혜에서 나옵니다.

이 삶은 하나의 꿈입니다. 삶을 꿈이라고 부르는 것은
삶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며, 삶이 가치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삶은 당신이 밤에 꿈꾸는 꿈과 다를 바 없습니다.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깰 때, 당신은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 꿈으로 깨어나며,
잠이 들 때는 또 다른 꿈 세계로 깨어납니다.
 
하지만 양쪽 세계에서 늘 깨어 있는 것,
그 꿈꾸는 자는 언제나 똑같습니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현존합니다.
'그것'이 바로 실재입니다.
오고 가지 않는 것,
심지어 꿈의 상태에서도 오고 가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참된 당신입니다.

 

 

 

6. 깨어남

 

깨달음의 순간에는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갑니다.
모든 것이, 갑자기 발 디고 있던 땅이 꺼지고,
당신은 홀로 남습니다. 당신은 혼자입니다.
다른 사람, 다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오직 참나만이, 오직 한없는 텅 빔만이,
순수 의식만이 존재합니다.
 
'깨달음'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참된 당신입니다.
참된 당신은 얻거나 잃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영적 체험이 아닙니다.
모든 상태와 체험은 오고 갑니다.
참된 당신은, 상태나 체험과 상관없이,
바로 지금 존재하는 영원불변함입니다.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서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찾은 것입니다!

 

 

 

 

7. 체화, 진정한 불이

 

갑작스럽게 참나로 깨어난 뒤에는 초월적인 것이 인간의 개성으로 점차 체화(體化)되어 가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점진적이라는 말은 깨달음의 체험 이후에 깨달음이 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월적인 참나가 우리의 인간성 안에 더욱 체화될수록
우리의 관점은 더욱 넓어지고,
우리는 살아가는 모습으로 초월적인 깨달음을 더 많이
표현하고 드러내게 됩니다.
 
질문:
그렇다면 비이원성이 완전히 체화된 삶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런 삶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대답:
경이로움이지요. 늘 놀라워합니다.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놀라워합니다.
왜냐하면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집착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에서 나오는 행동은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깨달음에서 나오는 행동은 마음이 아니라 텅 빔(空)에서
직접 일어납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즉각 일어납니다.
만일 그것이 말의 형태로 일어난다면,
그 말은 텅 빔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이 행위의 형태로 일어난다면, 그 행위들은 텅 빔에서,
개인성과 마음 '이전'에서 일어납니다.

 

 

 

 

8. 자기보다 더 큰 사랑

 

깨어남을 체험할 때 우리는 개인적인 자유를 발견합니다.
개인적인 자유는 이제까지 일어난
모든 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것은 정체성으로부터의 자유인데,
정체성은 우리를 몸과 마음, 기억,
그리고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으로 한정합니다.
개인적인 자유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나는 자유롭다."고 느낍니다.
"나는"은 개인적인 것이라는 냄새를 풍깁니다.
이 지점에서는 자유가 "나는"과 연관이 있지만,
나중에는 "나는"을 넘어설 것입니다.

 

 

 

 

9. 해탈이란 무엇인가?

 

질문:
깨달음과 해탈은 어떻게 다릅니까?

대답:
깨달음은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직접적인 경험과 통찰입니다.
깨달음은 우리가 정말로 놓아 버리도록 허용합니다.
그 놓아 버림의 결과가 해탈입니다.
해탈은 평범하면서도 철저합니다.​ 
 
 
질문:
당신은 모든 것이 의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해탈은 의식을 넘어선 것이라고도 하시는군요.
무슨 뜻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대답:
오직 의식만이 있습니다.
의식하고 의식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는 개인은 없습니다.
개인이 바로 의식이며,
개인을 알아차리는 의식이 바로 의식입니다.
모습이 있든 없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식입니다.
의식 이전에는 텅 빔(공)이 있습니다.
텅 빔은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어떠한 모습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개념적 이해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그 알아차림이 텅 빔입니다.

질문:
그 알아차림은 모든 것을 초월합니까?
그것들이 개념이기 때문에?
 
대답:
자기 자신이 무엇이고 누구인지를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철저하게 깨닫게 되면,
의심이 전혀 없으며, 그러므로 고통도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고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있는 것'과 대립하는
개념적인 '나'와 더 이상 씨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리된 '나'는 초월됩니다. 의식조차 초월됩니다.
그것이 바로 해탈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전체인 의식에 마치는 영향은 어마어마합니다.
 
질문:
그러면 다른 영역들이 열리는 겁니까?

대답:
모든 영역들은 표면적인 것입니다.
정신적 영역이나 영적 영역이 아무리 미묘할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겉모습입니다.
당신이 참된 자기 자신으로 깨어날 때는
모든 겉모습을 넘어서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어떤 영역도 다른 영역보다
조금도 더 낫지 않습니다.
모든 영역은 겉모습이며, 따라서 환영(幻影)입니다.
 
참된 깨달음은 깨달음을 파괴합니다.
당신이 다시 자기를 가리키면서 "나는 깨달았다."라고
말하는 한, 당신은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오로지 깨달은 사람이 남아 있지 않을 때만
참된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한마디 말조차 너무 많은 말입니다.

 

 

 

10. 스승과 제자의 관계

 

갈망은 자유의 씨앗입니다.
제자는 토양이고, 스승은 내리는 비입니다.
해탈은 수확입니다.
 
 
당신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모습을 움직이고 있는

궁극의 원리를 발견하기 위해 스승이라 불리는 모습을 활용하십시오. 

그런 다음 그 궁극의 원리를 당신 자신의 참나로,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보십시오.


참된 스승은 당신 마음속의 공간을 열어 주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열린 문이지만 당신은 반드시 그 문을
직접 통과해야만 합니다. 
참된 스승이 전수해 주는 것은 텅 비어 있음(空)입니다.
그것에 온전히 내맡길 때
존재의 무한한 충만함을 발견할 것입니다.
 
진실한 제자는 진실한 스승을 발견하고,
진실한 스승도 진실한 제자를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매우 진지해야 하고,
스승은 매우 분명해야 합니다.

 

 

 

 

11. 관계에 대하여

 

질문:
제가 삶과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제가 일상의 도전들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저는 깨달음을 얻어서 삶이 더 편해지기를 바랍니다.
 
대답: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어떤 것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구도자들은 영적 수행을 자기의 많은 모습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이럴 때의 문제는,
당신이 무언가를 회피하고 있는 한,
당신은 진리 안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진리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회피하면서 깨닫게 된 사람은
이제껏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자기 자신과 자기의 삶을 있는 그대로 마주해야만 합니다.
영성이나 영적 체험을 그 뒤에 숨기 위한 것으로 이용하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의 일부나 일상적인 삶을 회피하는 한,
아주 심오한 영적 체험과 계시조차 당신에게는

지속적인 영향을 거의 주지 못할 것입니다.


단순히 삶을 초월하려고만 하지 말고,
당신이 삶 전체라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당신이 바로 삶 그 자체입니다.

질문:
몹시 우울해하던 친구와 대화를 끝내고 나서는

제가 대화를 이끈 방식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 기운이 다 빠져나가 버린 것 같습니다.
 
대답:
진리는 이런 종류의 개인적 상황들을 인식하는

매우 객관적인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항상 다른 무엇이 아닌
진리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좋은 기분을 추구하지 않으며, 진리를 추구합니다.
 
질문:
저도 당신이 그랬을 법한 방식으로 대화를 이끌긴 했는데,
문제는 당신에게는 우울감이 그냥 지나쳐 가겠지만
제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진이 빠진 느낌이 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대답:
그것이 저를 지나쳐 가는 까닭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사람을 돕는 데 투자하지 않습니다.

질문:
하지만 당신은 돕겠지요.
 
대답:
저의 반응은 도와주려는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참나에서 나올 것입니다. 참나는 진리를 찾습니다.
참나가 바로 진리이며, 진리는 그 자신을 찾습니다.

 

 

 

 

12. 물을 수 있는 용기

 

대다수 사람들은

숨겨진 믿음들, 생각들, 가정들을 가진 채로

영적 스승과 가르침을 접하게 되는데,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런 믿음들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믿음들에 기꺼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거의 언제나 낡은 개념들을 새로운, 더 영적인 개념들로 대체합니다. 

그러고는 그 새로운 개념들이 옛 것들보다 훨씬 더 진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바로 깨어 있음 그 자체라는 사실에
완전히 깨어나려면,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대신에
진리를 알고 싶어 해야만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과제는 단순히 깨어 있는 상태를
일별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상태를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것조차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깨달음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며,
깨달음을 자기 자신으로서 -

세상에서 활동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도, 어떤 개념도 진실이 아닙니다.


그것들을 모두 내던져 버리고
침묵의 불길이
당신을 불살라 깨어 있게 하십시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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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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