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마음 증득하면 온갖 법은 신기루와 그림자
집착을 벗어나야 참으로 본다
問
三寶如虛空相 非見聞之所及者 敎中云何 說見道又稱見佛.
문 : 허공 같은 삼보(三寶)는
보거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도(道)를 본다’거나
‘부처님을 본다’고 가르치십니까?
答
約本智發明 假稱名見 非眼所睹.
唯證乃知 離見非見 方名眞見.
답 : 근본지(根本智)가 환하게 드러남을 일러
임시방편으로 ‘본다’ 하는 것이지
눈으로 보는 것은 아니니,
이는 오직 증득해야만 안다.
‘본다’거나 ‘보는 것이 아니다’라는
집착을 벗어나야 비로소 ‘참으로 본다’고 한다.
강설)
의상조사 법성게 첫머리에서
“법의 성품 원융하여 두 모습 없고 /
온갖 법은 부동이어 본래가 적정 /
이름이나 모습 없어 온 자취 끊겨 /
부처님만 알 수 있지 중생은 몰라.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라고 하였다.
온 자취가 끊겨 집착할 데 없는 마음자리,
그 자리가 참다운 부처님과 법과 수행자가 있는
삼보의 자리이다.
망념을 벗어난 지혜는 허공 같아
大涅槃經云 有業有報 不見作者 如是空法 名第一義空.
所以 見性之時 性本離念 非有念而可除 觀物之際
物本無形 非有物而可遣. 故云 離念之智 等虛空界.
『대열반경』에서 “짓는 업이 있어 그 과보도 있지만
이 업보의 주체를 찾을 수 없는 공(空)을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참성품을 볼 때
그 성품은 본디 망념을 벗어난 것이기에
그 성품에 망념이 있다하여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물을 볼 때에도 그 사물에는
본디 ‘어떤 실체가 있는 형상이 없는 것’이니
‘실체가 있는 사물로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망념을 벗어난 지혜는 허공 같다.”라고 한다.
강설) 온갖 경계가 사라져서
이 업보의 주체를 찾을 수 없는
제일의공은 망념을 벗어난 지혜를 말한다.
견성(見性)이란 이 지혜가 드러나는 것이다.
온갖 법은 남김없이 신기루나 그림자들
問
衆生業果 種子現行 積劫所熏 猶如膠漆 云何但了一心 頓斷成佛.
문 : 중생의 업보로 심어 놓은 씨앗이 드러나는 것은 오랜 세월 훈습되어 잘 떨어지지 않는 아교나 옻칠과 같은 것인데 어떻게 ‘한마음만 알면 이를 단숨에 끊어 부처님이 된다’고 하십니까?
答
若執心境 是實人法不空 徒經萬劫修行 終不證於道果. 若頓了無我 深達物虛則 能所俱消 有何不證. 猶微塵揚於猛吹 輕舸隨於迅流 只恐不信一心 自生艱阻. 若入宗鏡 何往不從. 且如勇施菩薩 因犯婬欲 尙悟無生 性比丘尼 無心修行 亦證道果 何況信解一乘之法 諦了自心 而無剋證乎.
답 : 만약 마음이나 경계에 집착하면
실로 ‘나’와 ‘경계’라는 모습이 남아 있으니
부질없이 백천만겁 수행해도
끝내는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한다.
단숨에 ‘나가 없는 도리’를 알아 ‘
사물의 실체가 공(空)’인 줄 깊이 통달하면
‘나’와 ‘대상’이 함께 사라지니
여기에 증득하지 못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이 공부는 믿기만 하면
세차게 부는 바람에 날리는 티끌이나
빠른 물살을 타고 있는 가벼운 배와 같아
금방 끝낼 공부인데,
다만 한마음을 믿지 않고
스스로 어렵다는 마음을 낼까 걱정할 뿐이다.
만약 한마음 종경에 들어가면
어디에 간들 참다운 이치가 따르지 않겠는가.
용시 보살은 음욕을 범했어도
‘생멸이 없는 무생(無生)의 이치’를 깨달았고
성(性)비구니는 ‘망념이 없는 수행’으로
또한 깨달음을 증득하였다.
하물며 일승(一乘)을 믿고 알아
자신의 마음을 분명히 알았는데
어찌 깨달음을 증득할 수 없겠는가.
或有疑云 豈不斷煩惱耶 解云 但諦觀殺盜婬妄 從一心上起 當處便寂 何須更斷. 是以 但了一心 自然萬境如幻.
何者 以一切諸法 皆從心幻生. 心旣無形 法何有相.
所以 高城和尙歌云
혹 의심하여
“어찌 번뇌를 끊지 않는단 말인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만 살(殺)·도(盜)·음(婬)·망(妄)이
한마음에서 일어남을
분명히 알고 있으므로
그 자리에서
시비분별이 다 사라져
마음이 고요할 뿐이니,
여기에 어찌 끊어야 할 번뇌가 있겠는가.”
라고 대답하며
의문을 풀어 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한마음만 알면
자연 온갖 경계가 허깨비와 같아진다.
왜냐하면 온갖 법이 모두 마음을 좇아
허깨비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마음에 이미 형상이 없는데
법에 어찌 모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고성(高城) 화상은 게송으로 말한다.
說敎本窮無相理 廣讀元來不識心 識取心了取境
識心了境禪河靜 若能了境便識心 萬法都如闥婆影.
가르침은 본디
무상 그 이치를 알려는 것
많은 경전 읽더라도
원래 마음 모르기에
마음 경계 가져다가
이리저리 살피고는
그 실체를 알고 나면
참마음이 고요하니
경계 아는 그 마음의 참모습을 터득하면
온갖 법은 남김없이 신기루나 그림자들
강설) 얼굴이 잘 생긴 용시라는 비구가 있었는데,
한 젊은 여자가 그를 사모하다가
병이 나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하루는 그 젊은 여자의 유모가
탁발 나온 용시에게 병석에 누운 사람을 위해
설법해 주기를 청하였다.
용시 비구가 그 집을 자주 방문하여
설법을 해준 덕으로
여자의 병은 차츰 나아졌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너무 친숙해져서
어느 날 음행까지 저지르게 되었다.
용시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고민하다가
비국다라 보살을 찾아가 진심으로 참회를 구하였다.
보살이 말하기를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를 위하여 두려움이 없는 법을 베풀리라.” 하고 법을 설하니,
용시는 “온갖 법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은데
어리석은 범부들은 그것에 집착하여
욕심내고 탐을 내며 성을 낸다.”라고 하는 법문에서
‘생멸(生滅)이 없는 무생(無生)의 이치를’ 깨치고 성불한다.
‘무생의 이치’는
다른 말로 ‘망념이 없는 수행’이다.
이 이야기는 『불설정업장경(佛說淨業障經)』에 실려 있다.
이런 내용을 읽다보면
“누구든지 사람을 잡아 먹어가며
공부해도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극단적인 경우를 예로 든 것은
자비문중인 우리 불법은 광대무변해서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도 불법을 바로 믿고
그대로 공부하면 성불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증득하기 참으로 쉬워
處胎經云 魔梵釋女 皆不捨身不受身 悉於現身得成佛.
故偈云
法性如大海 不說有是非 凡夫賢聖人
平等無高下 唯在心垢滅 取證如反掌.
『처태경』에서
“마구니와 하늘 신과 제석궁의 여인들이
모두 몸을 버리지도 않고
다른 몸을 받지도 않으면서
다 현재의 몸에서 성불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법의 성품 넓고 커서 큰 바다 같아
옳고 그름 이리저리 시비 안 하니
범부거나 덕이 높은 온갖 성인들
평등하여 높고 낮은 차별이 없네.
오직 하나 마음에서 분별없을 뿐
깨달음은 증득하기 참으로 쉽다.
가을밤에 둥근 달이 허공 속에 떠오르니
如來藏經言 衆生身中 有佛三十二相八十種好 坐寶蓮華 與佛無異 但爲煩惱所覆故 未能得用. 此是具有佛知見根性 未有知見用 卽時猶故愚 乃至譬如小兒 具有大人六根 與大人不異 在其身中 而未能有大人用 至漸長大 復須學問 乃有大人知見力用也. 若根性是有 作用豈無. 如種子本甘 結果非苦 只恐 不知有 自認作凡夫. 眞性常了然 未曾暫隱覆 如佛言 如來 實無秘藏. 何以故. 如秋滿月 處空顯露 淸淨無翳 人皆睹見.
『여래장경』에서 “중생의 몸 가운데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갖춘 부처님이
‘보배 연꽃 좌대’에 앉아 있으므로
중생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번뇌에 덮여 있으므로
그것을 쓸 수 있는 힘이 없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지견’을 갖추고 있는 중생이
아직 그 지견을 쓰지 못하므로 어리석다는 뜻이다.
이는 조그마한 어린아이가 갖고 있는
육근(六根)이 어른과 다를 게 없더라도
어른처럼 쓸 수 없어 점차 커가면서
배우고 익힌 뒤에야 어른처럼 쓸 수 있는 것과 같다.
근본 성품에 있는 것이라면
그 작용이 어찌 없겠는가.
종자가 본디 달면 열매도 쓴 맛이 아니니,
다만 사람들이 자신에게
‘부처님의 지견’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범부라고 단정할까 걱정될 뿐이다.
참 성품은
언제나 분명하고 분명하여
잠시도 숨거나 은폐된 적이 없으니,
부처님께서
“여래는 실로 감춘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가을밤에 둥근 달이 허공 속에 떠오르니
맑디맑은 환한 달빛 세상사람 모두 보네.
출처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