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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명상과 집중 -- 라마나 마하리쉬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9.01|조회수29 목록 댓글 1

Ramana Maharshi(1879~1950)

 

 

 

 

 

질문자:
명상(dhyana)과 탐구(vichara)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둘 다 결국은 같은 것이 됩니다.
탐구가 맞지 않는 사람들은 명상을 해야 합니다.
명상에서는 수행자가 자신을 잊어버리고
'나는 브라만이다'나 '나는 쉬바다'(I am Siva)를 명상하며,
이렇게 브라만이나 쉬바를 계속 착파하는 것입니다.
결국 브라만 또는 쉬바로서의 존재(being)가 남게 됩니다.
그러면 그는 이것이 순수 존재, 즉 진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기탐구를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착파하는 것으로써 시작하며,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음으로써 진아가 그에게 드러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존재-의식-지복으로서 빛을 발하는,
지고의 실재라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명상입니다.
마음을 진아 안에 고정하여 비실재적인
망상의 씨앗이 사멸되도록 하는 것이 탐구입니다.
누가 어떤 보심保心(bhava)[마음에 그리는 모습]으로써
진아를 명상하든지 그 모습으로만 진아에 도달합니다.
그런 보심 없이 고요히 안주하는 평온한 사람들은,
드높고 온전한 독존獨存(kaivalya)의 상태, 즉 형상 없는
진아의 상태(formless state of the Self)에 도달합니다.




질문자:
다른 때, 다른 사람이 한 질문] 명상과 자기탐구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명상은 외부적인 대상이나 기타 어떤 대상에 대해서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체와 대상이 다릅니다.
자기탐구에서는 주체와 대상이 같은 자기(진아)입니다.
명상은 에고가 유지될 때에만 가능합니다.
즉, 에고가 있고 명상하는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간접적입니다.1)
반면에 진아(자기)는 오직 하나입니다.
만약 우리가 에고의 근원(ego-source)을 파고들게 되면,
이 에고는 사라지고 진아만 남게 됩니다. 이것이 직접적인 방법입니다.




질문자:
명상이 탐구보다 더 직접적입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진리를 (직접) 착파하는 데 반해,
후자는 비진리로부터 진리를 걸러내기 때문입니다.


마하리쉬:
초심자에게는 어떤 형상에 대한 명상이 더 쉽고 편합니다.
그렇게 수행해 가다 보면, 비실재로부터
실재를 걸러내는 방식인 자기탐구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대가 모순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는데,
진리(실재)를 착파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자기탐구는, 그대로 하여금 진아가 아직 깨달아져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해 줌으로써, 곧바로 깨달음에 이르게 합니다.




질문자:
명상할 때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마하리쉬:
명상이 무엇입니까?
생각들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대는 계속 쏟아져 나오는 생각들 때문에 방해를 받습니다.
한 생각을 착파하여 다른 생각들을 몰아내십시오.
꾸준히 수행하면 명상에 몰입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의 힘이 강해집니다. (이 문답의 여기까지는 역자 증보이다.)
명상은 공부인의 진보한 정도에 따라서 차이가 납니다.
명상을 할 만한 수준이라면
그 생각하는 자(thinker-'나')를 곧바로 착파할 수가 있고,
그러면 그 생각하는 자가 그의 근원인 순수 의식 속으로 뛰어들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 생각하는 자를 곧바로 착파할 수 없다면
신에 대해서 명상해야 하며,
때가 되면 그 사람도 충분히 순수해져서
그 생각하는 자를 착파하고 절대적 존재(absolute being) 속으로
몰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질문자:
명상을 해 보아도 내면으로 들어갈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마하리쉬:
우리가 지금 어디 딴 데 있습니까?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질문자;
그렇게 존재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하리쉬:
무엇을 모르며, 누가 모르는 것입니까?
만약 진아를 모른다면 두 개의 자기가 있는 것입니까?




질문자:
두 개의 자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는 느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한계들 때문에 . . . .


마하리쉬:
한계란 마음 속에만 존재합니다.
그대는 그것을 깊은 잠 속에서도 느낍니까?
그대는 잠을 잘 때도 존재합니다.
그때에도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대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똑같은 자기가 여기 지금 깨어있는 상태에 존재합니다.
그대는 지금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두 상태간에 이러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마음에 기인합니다.
잠을 잘 때에는 그것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진아는 마음이 없을 때에도 존재합니다.




질문자;
이해는 됩니다만, 그것을 깨닫지는 못합니다.


마하리쉬:
명상을 하면 오래지 않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질문자:
명상은 마음으로써 합니다.

어떻게 하면 진아가 드러날 수 있도록 명상으로 마음을 죽일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명상은 한 생각에 달라붙는 것입니다.

그 한 생각이 딴 생각들을 물리칠 것입니다.
마음이 딴 데로 흐른다는 것은 그 힘이 약하다는 징표입니다.
부단히 명상하면 마음이 힘을 얻습니다.
다시 말해서 잘 달아나던 한 생각의 약함이,
생각을 벗어난 지속적인 뒷바탕(enduring background)으로 됩니다.
생각이 없어진 이 공간이 진아입니다.
순수한 상태의 마음이 진아입니다(Mind in purity is the Self).




질문자:
명상이란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명상이란 자신의 참된 성품으로부터 어디로도 벗어나지 않고,
자기가 명상하고 있다는 느낌도 없이, 자신의 진아로서 안주安住하는 것입니다.




질문자:
명상과 삼매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마하리쉬:
명상은 세심한 마음의 노력을 통해 성취됩니다.

삼매 속에서는 전혀 그러한 노력이 없습니다.




질문자:
명상에 있어서는 어떤 요소들을 명심해야 합니까?


마하리쉬:
진아 안에 자리잡은 사람(atmanishtha-진아안주자)은
그 몰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참된 성품에서 벗어나면, 그는 눈 앞에 밝은 광채를 보거나,
이상한 소리를 듣거나, 혹은 그의 안팎에서 나타나는
너무나 실재적인 신들의 환영幻影(visions)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것들에 속아 자신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질문자:
명상은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마하리쉬:
명상이란 진실로 말해서,
진아안주眞我安住(atmanishtha)[진아로서 고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생각들이 일어날 때는
그것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그 노력을 보통 명상이라고 합니다.
진아안주는 그대의 참된 성품입니다.
존재하는 그대로 머무르십시오(Remain as you are). 그것이 목표입니다.




질문자:
그러나 생각들은 일어납니다.
우리의 노력이란 생각들을 제거하는 것만을 목표하는 것입니까?


마하리쉬:
그렇습니다. 명상이 단 한 가지 생각에 머무르면,
다른 생각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명상은 생각들을 일어나지 않게 하는 만큼만의 소극적인 효과가 있을 뿐입니다.




질문자:
'진아 안에 마음을 고정시키고'(atma samstham manah krtva)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아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마하리쉬:
그대는 도대체 왜 명상을 하고 싶어합니까?
그대가 그것을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진아 안에마음을 고정시키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대는 왜, 명상할 것 없이 그대가 존재하는 그대로 머무르지 않습니까?
그 '마음'(manah)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생각들이 제거될 때, 그것은 '진아 안에 고정될'(atma samstha) 것입니다.




질문자:
저는 어떤 형상이 주어지면
그에 대해 명상할 수 있고 다른 생각들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진아는 형상이 없습니다.


마하리쉬:
형상, 즉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내관內觀(meditation)을 명상(dhyana)이라 합니다.

반면에 진아에 대한 탐구는 자기탐구(vichara) 또는
일여내관一如內觀(nididhyasana)[끊임없는 존재 자각]입니다.




질문자:
관능적 향락보다는 명상에 더 많은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향락을 추구하지 명상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하리쉬:
쾌락이나 고통은 단지 마음의 여러 모습들일 뿐입니다.
우리의 본질적 성품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진아)를 잊어버리고 육체나 마음이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그릇된 자기인식(identity)2)이 불행을 야기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마음의 습(mental tendency)은
아주 오래된 것이며, 헤아릴 수 없는 과거생 동안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강해져 있습니다. 그것이 사라져야,
본질적 성품인 행복이 드러날 것입니다.




질문자:
명상은 어떻게 합니까?
눈을 뜨고 합니까, 감고 합니까?


마하리쉬:
어느 쪽으로 해도 됩니다.
핵심은 마음이 안으로 향해져야 하며,
활발하게 추구해 들어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눈을 감고 할 때에는, 때때로 잠재된 생각들이
엄청난 힘으로 쏟아져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눈을 뜨고 할 때에는 마음을 안으로 돌리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강한 마음의 힘(strength of mind)이 필요합니다.
마음은 대상을 받아들일 때 오염됩니다.
그렇지만 않으면 그것은 순수합니다.
명상에 있어서 주된 핵심은, 외부적인 인상을 받아들이거나
다른 일을 생각함이 없이, 마음을 그 자신이
추구하는 바에 활발히 집중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질문자:
바가반, 저는 명상을 할 때마다 머리에 굉장한 열이 나고,

그래도 계속하면 온 몸이 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고치는 방도는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두뇌로써 집중하면 열감熱感, 심지어 두통까지 일어납니다.
집중은 서늘하고 신선한, 심장 안에서 해야 합니다.3)
긴장을 푸십시오.
그러면 명상이 쉬워질 것입니다.
밀고 들어오는 모든 생각들을, 긴장 없이 부드럽게
젖혀 버림으로써 마음을 안정되게 지녀 가십시오.
오래지 않아 성공할 것입니다




질문자:
저는 어떻게 하면 명상 중에 잠이 들어 버리는 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마하리쉬:
만약 그대가 잠드는 것을 막으려 한다면,

그것은 명상 중에 그 생각을 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명상하다가 잠에 빠진다 해도,
그 명상은 잠자는 중이나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계속되겠지요.
그렇기는 하나 잠은 하나의 생각이므로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왜냐하면 최후의 본래적 상태(natural state)는,
생시(jagrat)에, 아무런 방해하는 생각 없이,
분명한 의식 하에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생시와 잠은 본래적인 무념無念의 상태(thought-free state)라는
화막 위에 나타난 화면들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을 보지 않고 지나가도록 하십시오.




질문자:
무엇에 대해 명상해야 합니까?

마하리쉬:
뭐든 그대가 좋아하는 것으로 하십시오.




질문자:
쉬바, 비슈누(Vishnu) 그리고 가야뜨리(gayatri)는 동등한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의 어느 것을 명상해야 되겠습니까?


마하리쉬:
그대가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하십시오.
그것들은 효과 면에서 동등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하나만 붙들어야 합니다.




질문자:
어떻게 명상해야 합니까


마하리쉬:
그대가 가장 좋아하는 그 하나에 집중하십시오.
단 한 가지 생각이 지배하면 모든 다른 생각들은 밀려나고 마침내 근절됩니다.
다양성이 지배하는 한 나쁜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대상(명상의 주제)이 지배하면 좋은 생각들이 판을 장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생각만 착파하십시오. 명상(dhyana)이 주된 수행입니다.
명상은 싸움(fight)을 의미합니다.
그대가 명상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다른 생각들이 밀려들어,
힘을 합쳐서 그대가 붙들려고 하는 그 한 생각을 침몰시키려고 합니다.
좋은 생각은 꾸준한 수행에 의해 점차로 힘을 얻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힘이 강해지고 나면 다른 생각들은 달아날 것입니다.
이것은 명상에서 항상 벌어지는 한 바탕 큰 싸움입니다.
우리는 불행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평안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은 온갖 생각들로 인한 어수선함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음의 평안은 명상에 의해서만 얻어집니다.




질문자:
슈리 바가반께서 진아는 심장 안에 자리잡고 있지만

어떤 중심, 즉 짜끄라(chakras)에서도 작용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니까,
그러면 양미간(아즈나 짜끄라)을 강하게 집중하거나
명상함으로써 이 중심이 진아의 자리가 되게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마하리쉬:
만약 그대가 육체의 어떤 부위에 집중한다면,
진아의 자리에 관한 어떠한 고려도 이론에 그치고 맙니다.
그대가 자신을 주체, 즉 '보는 자'로 간주하면,
그대가 주의를 집중하는 부위는 '보이는 대상'이 됩니다.
이것은 단지 보심관保心觀(bhavana, mental imagery)일 뿐입니다.
반대로 그대가 '보는 자' 그 자신을 보게 되면,
그대는 진아 안에 합일되어 그것과 하나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심장입니다.




질문자:
양미간에 집중하는 수행도 해 볼 만합니까?


마하리쉬:
어떤 종류의 명상이건
그 최종 결과는 그 수행자가 마음을 고정하는 대상이,
그 주체와 별개로 분리된 것으로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 즉 주체와 대상은 하나의 진아가 되며, 그것이 심장인 것입니다.




질문자:
슈리 바가반께서는 왜 저희들에게
어떤 특정한 중심 즉, 짜끄라에 집중하는 수행을 가르치지 않으십니까?


마하리쉬:
요가 경전(Yoga Sastra)에서는 사하스라라(sahasrara), 즉 뇌腦가 진아의 자리라고 합니다.
[뿌루샤 수끄따](Purusha Sukta)에서는 심장이 그 자리라고 선언합니다.
수행자들이 이 점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저는 '나'라는 것('I'-ness) 또는
'나는 존재한다'는 것('I am'-ness)을 단서로 해서
그것을 그 근원까지 따라가 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누구든지
이 '나'라는 관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도 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어떤 방편을 택해서 수행하든 최종 목표는,
우리의 경험의 제1차적 소여所與인 '나는 존재한다'라는
것의 근원을 깨닫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약 그대가 자기탐구를 수행하면,
그대는 그것이 곧 진아인, 심장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질문자:
저는 하타 요가(hatha yoga)를 수행하면서 '나는 브라만이다'도 명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명상을 시작하고 조금 지나면, 어떤 공백 상태(blank)가 지배하면서,
머리는 열이 나고 죽음의 공포가 일어납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하리쉬:
죽음의 공포는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뒤에야 일어납니다.

그대는 누구의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누구에게 그 두려움이 있습니까?
그대는 자기(진아)를 육체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 동일시가 있는 한 공포가 있을 것입니다. (이 문단은 역자 증보이다.)
'나는 브라만이다'는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누가 그렇게 말합니까? 브라만 자체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참'나'도 그렇게 말할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브라만으로서 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단지 하나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누구의 생각입니까?
모든 생각은 거짓 '나', 즉 '나'라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생각함이 없이 머무르십시오.
생각이 있는 한 공포도 있을 것입니다.




질문자:
제가 그것을 계속 생각해 나가다 보면 곧 잊어버리게 되고,
머리는 열이 나며, 저는 두려워집니다.


마하리쉬:
그렇습니다.
마음이 두뇌에 집중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열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나'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나'라는 생각이 일어날 때, 죽음의 공포도 동시에 일어납니다.
잊어버림(망각)에 관해서 말한다면, 생각이 있는 한 망각도 있게 마련입니다.
먼저 '나는 브라만이다'하는 생각이 있고 나서, 그에 대한 망각이 뒤따릅니다.
망각과 생각은 '나'라는 생각에게만 있습니다.
그것('나'라는 생각)을 착파着把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허깨비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뒤에 남는 것은 참'나', 즉 진아입니다.
'나는 브라만이다'는 집중을 돕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그것이 다른 생각들을 물리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 한 생각만 지속되게 되면, 그것이 누구의 생각인지 살펴보십시오.
그것은 '나'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는 어디서 일어납니까?
그것을 탐색해 들어가면 '나'라는 생각은 사라질 것이며,
지고의 진아가 스스로 빛을 발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노력은 필요 없습니다.
하나의 참'나'만이 남게 되면, 그것은 '나는 브라만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사람이다'고 계속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시비하지 않는다면, 왜 자기가 사람이라고 선언해야 합니까?
누가 자기를 짐승으로 잘못 알기에 '아니오,
나는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오'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브라만 즉 '나'는 존재하는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에,
시비할 자는 아무도 없으며 따라서
'나는 브라만이다'라고 반복해야 할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질문자:
왜 우리는 이 생각할 수 없는 사항(unthinkable point-진아)을

생각하는 자기 최면의 방법을 택해야 합니까?
왜 다른 방법들, 예컨대 빛을 응시한다든지,
호흡을 멈춘다든지, 음악을 듣고, 내면의 소리를 듣고,
신성한 음절 '옴'(om)이나 다른 진언(mantras)을 암송한다든지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마하리쉬:
빛 응시는 마음을 멍하게 만들고

한동안 의지意志의 마비 상태를 가져오지만, 아무런 지속적인 이익이 없습니다.
호흡 제어(breath control)는 일시적으로 의지를 마비시키지만 그것도 지속성이 없습니다.
소리를 듣는 것도, 만약 그 진언이 신성하며
'더 높은 힘'의 도움을 받아 (마음을) 정화해 주는 것이 되지 못하고
생각들을 일으킨다면, 마찬가지입니다.




질문자:
양미간의 이마에 있는 한 점에 집중하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것입니까?


마하리쉬:
누구나 '내가 존재한다'라는 것을 자각합니다.

그러나 이 자각을 젖혀두고 우리는 신을 찾아 헤맵니다.
양미간에 주의를 집중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신이 양미간에 있다고 말한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한 이야기의 목적은 마음을 집중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제어하여 그것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강제적인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마음을 하나의 통로로만 흐르도록 강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집중하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에 이르는 최선의 수단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입니다.
당면 문제는 마음에 있으며, 마음은 마음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자:
저는 몸 안의 같은 중심(짜끄라)에만 항상 집중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때에는 어느 한 중심이 집중하기 쉽고,
다른 때에는 다른 중심이 더 쉽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한 중심에 집중하면
생각이 저절로 옮겨가서 다른 중심에 고정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마하리쉬:
그것은 아마도 그대의 과거(전생)의 수행 습習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하튼 어느 중심에 집중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심장은 모든 중심에 다 있으며 심지어 몸 밖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몸의 어떤 부위에 집중하든,
아니면 외부의 어떤 대상에 집중하든,심장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질문자:
어느 때에는 한 중심에 집중하고

다른 때에는 다른 중심에 집중할 수도 있습니까,
아니면 항상 일관되게 같은 중심에만 집중해야 합니까?


마하리쉬:
방금 이야기했듯이, 어디에 집중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집중은 생각들을 놓아버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어느 중심 또는 대상에 집중하건,
집중하는 자는 항상 똑같습니다.




질문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거친 대상(gross objects-형체 있는 것)에 대해서만 명상해야 하며,
만약 우리가 부단히 마음을 죽이려고 하게 되면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마하리쉬:
누구에게 재앙이 온다는 것입니까?

진아와 별개의 재앙이 있을 수 있습니까?
끊어짐이 없는 '나, 나'는 무한한 대양大洋입니다.
에고, 즉 '나'라는 생각은 그 위의 한 개 물거품이며
개아(jiva), 즉 개인적 영혼이라 불립니다.
그 물거품 또한 물입니다. 그것이 터지면 대양에 섞여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물거품으로 남아 있어도 역시 대양의 일부입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모르고 여러 종파에서 요가, 헌신(bhakti), 행위(karma) 등
수많은 방법을, 제각기 많은 변용變容을 가하여
굉장한 기법으로 정교한 세부 사항까지 가르치면서,
구도자들을 유인하여 그들의 마음만 혼란시켜 놓고 있습니다.
여러 종교와 분파(sects)와 교리들(dogmas)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무얼 하려는 것입니까?
단지 진아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것들은 진아를 아는 데 필요한 방편이며 수행법인 것입니다.
감각 기관으로 지각한 대상들이 직접지(pratyaksha)라고 이야기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 감각 기관의 도움 없이도
항상 체험되는 자기(진아)만큼 직접적일 수 있습니까?
감각 지각은 간접지일 뿐, 직접지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자각(one's own awareness)만이 직접지이며,
그것이 각자의 그리고 모든 존재의 공통 체험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진아를 아는 데는 아무런 방편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
1) 이 방법이 간접적이라는 것은 나중에 다시 에고를 소멸시키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 'identity'란 자기를 어떤 무엇과 동일시(identify)함으로써 갖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상(相)[관념], 즉 에고의 자기인식 형상이다. 3) 여기서 '심장 안에서 집중하라' 함은, 집중하는 자기를 자각함으로써 의식을 심장에 두고, 자연스럽게 가슴(심장)에서 일어나는 마음으로 명상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심장 안에서의 명상이란, 마음을 침묵시켜 심장으로 돌아가게 하여 이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무심 - 나는 진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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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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