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mana Maharshi(1879~1950)
질문자:
당신께서는 이 세상의 고통의 원인이 뭐라고 보십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개인으로서나
아니면 집단적으로, 그것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잇습니까?
마하리쉬:
진정한 자기(진아)를 깨달으십시오, 그것이 필요한 전부입니다.
질문자:
많은 한계들로 둘러싸인 이 삶속에서
제가 과연 진아의 비복을 깨달을수 잇을 까요?
라마나 마하리쉬:
그 진아의 지복은 항상 그대와 함께 하며,
만약 그대가 열심히 추구하면 그대 스스로 그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대가 불행의 원인은 그대바깥의 삶에 있지 않고,
에고로서의 그대 안에 있습니다.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 제한을 가해 놓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헛된 애를 쓰고 잇습니다.
모든 불행은 에고 때문이며, 에고와 함께 모든 괴로움은 찾아옵니다.
사실은 그대의 안에 있는 불행의 원인을 ,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두어봤자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그대 바깥의 것들로부터 그대가 무슨 행복을 얻겠습니까?
설사 얻는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만약 그대가 에고를 부인하고
그것을 무시하여 에고를 고사시켜 버리면,그대는 자유로워지겠지요.
그러나 만약 그대가 에고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그대에게 온갖 제한을 가하고 그대로 하여금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헛된 노력을 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대 자신인 진아가 되는 것만이 ,
항상 그대의 것인 그 지복을 깨닫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질문자:
만약 참으로 얽매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다면,
실제로 기쁨과 슬픔들을 경험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기쁨과 슬픔은 우리가 자신의 참된 성품으로부터
벗어났을 때에만 실재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것들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질문자:
이 세상이 창조될 것은 행복을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불행을 위해서입니까?
마하리쉬:
창조계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 위로 온갖 것을 건립하는 것은, 사물을 자신의 각도에서 바라보고
그것을 자신의 이익에 맞도록 해석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여자는 그냥 한 사람의 여자인데,
어떤 마음은 그를 ‘어머니’라 하고, 어떤 마음은 ‘누이’라 하며,
또 다른 마음은 그를 ‘아주머니’라 하는 식입니다.
인간은 이성을 사랑하고 뱀을 싫어하지만, 길가의 잡초나 돌맹이에는 무관심합니다.
이러한 가치 판단이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의 원인입니다.
창조계는 한 구루의 보리수와 같습니다.
새들은 날아와서 열매를 따먹기도 하고, 가지 밑에 둥지를 틀기도 하며,
사람들은 그 그늘에서 시원함은 즐기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가지에 목을 매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무는 조용히 자신의 삶을 살아갈 뿐 ,
자신이 어떤 용도로 쓰이고 있는지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어려움을 만들어 내고 나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칩니다.
신이 이 사람에게는 평안을 주고 저 사람에게는 슬픔을 줄 정도로 편파적이겠습니까?
창조계 안에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지만,
인간이 좋은 것, 건강한 것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보지 않으려고 하면서 계속 우는소리만 합니다.
이는 마치 굶주린 사람이 맛난 음식 옆에 앉아서도
손을 뻗쳐 배고픔을 해소하지는 않고‘ 이게 누구 잘못인가,
신의 잘못인가 사람의 잘못인가?’하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질문자:
만약 신이 모든 것이라면 왜 개인은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개인이 그로 인해 고통받게 될 행위들은 신이 유발한 것 아닙니까?
마하리쉬:
자신이 행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통받은 자 이기도 합니다.
질문자:
그러나 그 행위들은 신이 유발한 것이며 개인은 그의 도구일 뿐입니다.
마하리쉬:
이러한 논리는 그 사람이 즐거워할 때에는 아니고 그가 고통받을 때에만 적용됩니다.
만약 그러한 확신을 항상 지니고 있을 수 있다면,
고통 또한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질문자:
고통은 언제 사라집니까?
마하리쉬:
개인성이 사라지기 전에는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들이 모두 그의 것이라면,
왜 그대는 즐거움과 고통만 그대의 것이라고 느낍니까?
좋고 나쁜 행위를 하는 자가, 또한 즐거움도 느끼고 고통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내버려두고 그대 자신에게 고통을 부가하지 마십시오,
질문자:
당신께서는 어떻게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저는 도처에서 고통을 봅니다.
마하리쉬:
각자의 내면에서 심정으로서 빛을 발하는
자신의 실체는 그 자체 순전한 지복의 바다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하늘의 푸름이 하늘에 실재하지 않듯이,
불행이란 것도 실재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개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무지의 어두운 망상으로는 접근한 수 없는
진지의 태양인 우리 자신의 실체는,
그 자체 행복으로서 빛을 발하고 있으므로, 불행이란 것은 개인성이라는
그릇된 관념이 야기하는 하나의 환상일 뿐입니다.
진실로 그같은 비 실제적 환상 외에는 그 누구도 불행 같은 것은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 그 자체 지복인 우리 자신의 진아를 면밀히 탐구하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 불행이란 젼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받는 것은, 결코 우리자신인 적이 없는 육체를 ‘나’라고 여기는 관념 때문입니다.
고통은 모두 망상에서 기인합니다.
질문자:
저는 마음과 몸으로 다 고통받고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날 이후로 저는 행복했던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저를 배었을 때부터 고통을 받아왔다고 합니다.
저는 왜 그렇게 고통을 받습니까?
저는 금생에 죄를 짓지도 않습니다.
이 모든 고통은 전생에 지은 죄 때문입니까?
마하리쉬:
그대는 마음가 몸이 고통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까?
질문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마음과 몸을 넘어서 있는 그 누구 아닙니까?
그대는 몸이 그 생에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 원인이 전생에 있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전생의 원인은 그 앞 전생이 될 것이고,
그런 식으로 이어집니다.
그러하여 씨앗과 싹의 경우처럼 그러한 인과 관계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생의 처음원인은 무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무지가 지금도 존재하며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 무지가 진지에 의해 제거되어야 합니다.
‘왜, 그리고 누구에게 이러한 고통이 찾아왔는가?’
만약 그대가 그렇게 물어 들어가면,
그대는 그 ‘나’가 마음이나 육체와는 별개라는 것,
그리고 진아가 단 하나의 영원한 존재이며
그것이 곧 영원한 지복 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지입니다.
질문자:
저는 끝없이 일어나는 걱정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제가 행복하기 위해서 부족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데도, 저는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마하리쉬:
잠들었을 때에도 그런 걱정들이 그대를 괴롭힙니까?
질문자: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마하리쉬:
아무 걱정 없이 잠들었던 그 사람과 지금의 그대는 같은 사람입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질문자:
물론 저는 같은 사람입니다.
마하리쉬:
그렇다면 분명히 그 걱정들은 그대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대 자신의 잘못입니다.
질문자:
저희들이 슬픔을 겪을 때 당신께 편지를 쓰거나 아니면
마음속의 기도를 통해서 이를 하소연하면,
당신께서는 당신의 자식이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으니
얼마나 안된 일인가 하고 연민을 느끼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만약 제가 그렇게 느낀다면 저는 진인이 아니겠지요.
질문자:
저희들은 이 세상 속에서 고통을 봅니다.
어떤 사람이 굶주리고 있다할 대, 그것은 하나의 물리적 현실이며 ,
그러한 현실로서 그것이 그에게는 매우 실재적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꿈이라 하면서 그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아야 합니까?
마하리쉬:
진지 혹은 실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대가 말하는 고통은, 그것이 그 중의 극히 작은 일부일 뿐인
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하나의 꿈입니다.
꿈속에서도 그대는 배고픔을 느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배고파하는 것을 봅니다.
그대는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며,
배고픔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도 음식을 배풉니다.
그 꿈이 계속되는 한 그 모든 배고픔의 고통은,
지금 그대가 이 세상 속에 널려있다고 생각하는 고통만큼이나 현실적입니다.
꿈속의 그 고통이 실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오직 그대가 깨어났을 때입니다.
그대는 배불리 먹고 나서 잠자리에 들 수가 있습니다.
꿈속에서는 뙤약볕 아래서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고는
지치고 배가 고파서 실컷 먹고 싶어할 수 잇습니다.
그때 그대는 잠에서 깨어나, 그대가 배가 부른 상태이고
침상에서 나오지도 않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 거기서 느끼는 고통이 마치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대가(꿈속에서)행동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꿈속에서 느끼는 배고픔은 꿈속의 음식으로서 해결해야 합니다.
꿈속에서 다른 사람이 몹시 배고파하는 것을 보면 그 꿈속에서의 음식을 주어야 합니다.
그대는 꿈의 상태와 생시의 상태를 절대로 뒤섞지 못합니다.
그래가 진지의 상태에 도달하여 이 환에서 깨어나는 날까지는,
그대는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볼 때마다 그것을 덜어주는 사회적 봉사를 해야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그대는, 다들 말했듯이 에고없이,
즉‘내가 행위자다’하는 생각 없이 다만 ‘나는 신의 도구이다’ 라고 느끼면서 해야 합니다.
또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쭐해져서, ‘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돕고 있다.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한다.
나는 도와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나는 우월하고 그는 열등하다’ 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대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신을 섬기는 방편으로서 그를 도와야 합니다.
그러한 모든 봉사는 진아인 그대 자신을 위한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대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을 도울 뿐입니다.
질문자:
장시간 명상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경우에,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본사에 전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에, 그것으로 됩니다.
착한 생각은 그들의 마음 깊이 자리잡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착함, 신, 사랑, 이들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들 중 어느 하나를 끊임없이 생각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모든 명상은 다른 생각들을 몰아내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질문자:
그렇다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고통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마하리쉬:
모든 사람이 똑같이 행복하고 부유하고
지혜롭고 건강한 그런 때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말들도 그에 반대되는 말들이 존재하는 한에서가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대가 자신보다 덜 행복하다거나
더 불쌍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를 동정하거나,
그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그를 도우려 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대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도와야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대는 그대 자신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다른 사람이나 그대 자신 영적으로 진보하며,
특히 그러한 봉사가 사심없이 이루어질 때, 즉 ‘내가 이 일을 하고 잇다’는
에고적 느낌 없이‘신이 나를 이 봉사 행위의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그가 행위자이고 나는 도구다’라는 정신으로 행해질 때 그러합니다.
만약, 우리가 남에게 주는 것이
사실은 자기 자신한테 주는 것일 뿐이라는 진리를 우리가 안다면,
누군들 덕이 있는 사람이 되어 남에게 베푸는 그런 행위들을 하지 않겠습니까?
각자가 다 자기 자신의 진아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하든 그것은 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입니까?
질문자:
이 세상에는 피해를 확산시키며 퍼져나가는 재난들,
예컨대 기아나 전염병 같은 것이 널려 있습니다 .
이러한 사태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누구에게 그것이 나타나 보입니까?
질문자:
그런 말씀만으로는 안됩니다. 저는 도처에서 불행을 봅니다.
마하리쉬:
그대는 잠들어 있을 때는 이 세상과 세상의 고통에 대해 알지 못했으나,
지금 생시의 상태에서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그런 것들로 고뇌하지 않던 그 상태를 지속하십시오,
다시 말해서, 그대가 이 세상을 의식하지 못할 때에는
세상의 고통들이 그대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잠들어 있을 때처럼, 그대가 진아로서 머무를 때,
이 세상과 세상의 고통들은 그대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내면을 바라보십시오. 진아를 보십시오!
그러면 이 세상과 세상의 불행이 다 사라질 것입니다.
질문자:
그러나 그것은 자기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하리쉬:
세상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는 자신을 육체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바깥으로 세상을 보며,
세상의 고통이 그대에게 분명하게 인식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실재를 찾아내고, 이 실재하지 않는 느낌을 소멸하십시오.
질문자:
위대한 사람들도 있고 사업가들도 있지만,
그들은 세상의 불행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마하리쉬:
그들은 에고 본위적 (자기 중심적)이며,
그들이 문제를 해결해 내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진아 안에 머무른다면 그들도 달라질 것입니다.
질문자:
왜 큰 성인들께서는 도와주지 안습니까?
마하리쉬:
그들이 돕지 않는지 그대는 어찌 압니까?
대중연설, 신체적 활동 그리고 물질적 도움 같은 것은
모두 큰 성인들의 침묵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일을 이루어 내고 있습니다.
질문자:
세상의 상태를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마하리쉬:
만약 그대가(내면적으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있으면, 세상 어디에도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문제는 그대가 세상을 외부적으로 보면서
거기에 고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도 고통도 다 그대의 내면에 있습니다.
만약 그대가 내면을 바라보면 아무런 고통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질문자:
신은 완전합니다.
그런데 그가 왜 이 불완전한 세계를 창조했습니까?
작품은 그것을 만든 자의 본질을 나누어 가집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마하리쉬:
그 질문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질문자:
저, 그러니까 개인입니다.
마하리쉬:
그대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그대가 신과 별개이기 때문입니까?
그대가 자신을 육체라고 생각하는 한,
그대는 세상을 외부적인 것으로 보며, 불완전한 모습들이 그대에게 나타나 보입니다.
신은 완전함입니다.
그의 작품 역시 완전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그릇된 동일시 때문에 그것을 불완전 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질문자:
진아가 왜 이렇게 비참한 세계로 나타났습니까?
마하리쉬:
그대가 진아를 찾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대의 눈은 자기 스스로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울을 앞에 갖다 놓으면 눈이 자기를 볼 수 있습니다.
창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질문자:
결국 제가 항상 내면을 바라봐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먼저 그대 자신을 보고, 그러고 나서 세계 전체를 자기(진아) 로 보라’ 는 것입니다.
마하리쉬:
그렇습니다.
질문자:
세계는 전혀 보아서는 안됩니까?
마하리쉬:
세계에 대해 눈을 아주 감아 버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대는 단지'먼저 자기 자신을 보고, 그런 다음 세계 전체를 자기로 보기'만 하면 됩니다.
만약 그대가 자신을 육체라고 생각하면 세계는 외부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질문자: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세계란 무엇입니까?
평화는 무엇이며 , 일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세계는 그대의 잠 속에는 없고, 그대의 생시에 그대 마음의 한 투사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관념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평화란 어지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어지러움은 개인 속에서 생각들이 일어남으로써 생기며,
개인이란 순수 의식으로부터 일어나는 에고일 뿐입니다.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생각들로부터 벗어나서
순수 의식으로 안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자기 자신이 평화에 머무를 수 있으면, 어디에나 평화만 존재한 것입니다.
질문자: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지 않은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큰 잘못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행위를 해야 합니까?
마하리쉬:
무엇이 옳고 그릅니까?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르다고 판단 할 수 있는 기준이란 없습니다.
의견이란 개인의 기질에 다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또한 의견이란 생각일 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 마음을 쓰지 말고, 대신에 생각들을 제거하십시오,
만약 그대가 항상 옳음에 머무르면 그 옳음이 세상에 만재할 것입니다.
질문자:
올바른 행위만으로도 구원을 얻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누구를 위한 구원입니까?
누가 구원을 바랍니까?
그리고 무엇이 올바른 행위입니까?
무엇이 행위이며, 무엇이 올바릅니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누가 판단합니까?
각자는 지금까지의 상습에 따라 이것이 옳다고도 하고 저것이 옳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실재를 깨달았을 때에만 옳고 그름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최선의 길은 이러한 구원을 바라는 자가 누구인지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 ‘누구’혹은 에고를 그 원래의 근원까지 추적하는 것이야말로,
누구에게나 올바른 행위입니다.
질문자:
선행의 실천을 통해 구원에 이르고 있지 않습니까?
책에서는 더러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마하리쉬:
책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선행은 좋은 것이며 그것이 결국
그대를 그 목표 (구원) 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합니까?
선한 행위는 마음을 정화하며 청정심 (순수한 마음) 을 가져다 줍니다.
이 청정심이 진지를 성취하며, 그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진지를 성취해야만 합니다.
즉, 에고를 그 근원까지 추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방법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선한 행위가 청정심을 얻게 하고 청정심이 진지에 이르게 하며,
진지가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말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질문자:
동기는 어떻습니까?
행위를 하는 동기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무슨 일이든, 고결한 순수성과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즐거이 하는 일은 좋은 행위입니다.
욕망이 얼룩이 묻어 있고 번뇌망상으로
마음이 가득 차서 하는 모든 일은 나쁜 행위로 분류됩니다.
그리고 어떤 좋은 행위도‘이것이 좋은 결실을 맺기만 하면 된다’ 하는 생각으로,
나쁜 수단에 의해서 하지는 마십시오,
만약 그 수단이 나쁘면, 좋은 행위도 나쁜 행위로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를 하는 수단도 순수해야 합니다.
질문자:
샹까라는 우리가 모두 자유롭고,
얽매여 있지 않으며, 마치 불에서 불꽃이 솟듯이
우리가 그로부터 떨어져 나왔던 신에게로 우리 모두 돌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온갖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마하리쉬:
우리가 얽매여 있지 않으며 진정한 자기(진아)에는 얽매임이 없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그대가 결국 그대의 근원으로 돌아가리라는 것도 진실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만약 그대가 죄라고 하는 것을 범하면,
그대는 그 죄의 과보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대는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대를 때린다고 할 때, 그대는 ‘나는 자유롭다.
나는 이러한 구타에 얽매여 있지 않으며,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때리도록 내버려 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그대는 그대 좋을 대로 무슨 일이든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으로만‘나는 자유롭다’고 말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질문자:
우주 전체가 신의 의식의 유희이며,
일체 만물이 브라만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쁜 습관과 나쁜 관행들을 버려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까?
마하리쉬:
사람 몸 안에 어떤 상처가 있다고 합시다.
만일 그대가 그것이 신체의 작은 dfl부분일 뿐이라 생각하고 무시하면,
그것은 온 몸에 통증을 유발할 것입니다.
만약 상처를 통상적인 요법으로 치료하지 않으면,
의사를 불러와서 환부를 칼로 도려내고
불순물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만약 환부를 도려내지 않으면 그것은 곪을 것이며,
수술 후에 붕대를 감지 않아도 고름이 생겨날 것입니다.
행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습관과 나쁜 행위는 몸 속의 상처와 같습니다.
모든 병은 적절한 치료를 해주어야 합니다.
질문자:
그래서 우리는 전통적인 행위 규범을 지켜야 하는 것이군요,
마하리쉬:
권계 (자기 규율) 를 전해진 대로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정도로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것들은 받아들여 따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진지에 대한 보다
높은 수준의 탐구를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것들을 미흠한 것으로 보고 즉시 그만두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