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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무엇이 실재인가? -- 라마나 마하리쉬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9.03|조회수26 목록 댓글 1

Ramana Maharshi(1879~1950)

 

 

 

[ 문 ]

무엇이 실재實在(reality)입니까?

 

[ 답 ]

실재는 항상 실재해야 합니다.

그것은 형상이나 이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형상과 이름들의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실재입니다.

그것은 한계들(limitations)의 바탕을 이루지만 스스로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속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실재들(unrealities)의 바탕을 이루면서 스스로는 실재합니다.

실재는 존재하는 것(that which is)입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어를 초월합니다.

그것은 '존재, 비존재'의 표현을 넘어서 있습니다.1
실재는 대상에 대한 지知와 함께 무지가 소멸된 뒤에 남는 단순한 의식이며,

이것이 바로 진아(Self, atma)입니다.

진아자각으로 충만된 브라만의 실상實相(Brahma-swarupa) 안에

무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찬란히 빛나는 이 실재는, 불행도 없고 몸(body)도 없으며,

그대가 이 세계를 인식할 때나 인식하지 못할 때나,

그대의 참된 형상(nija-swarupa)[본래적 실상]입니다.
진아는 안팎으로 똑같이 빛을 발하는 하나의 자각으로서,

의식-지복의 눈부신 쏟아짐이며, 이것이야말로 지고의, 지복에 넘치는 원초적 실재입니다.

그것의 형상(form)은 침묵인데, 진인들은 이것이,

최종적이며 무너뜨릴 수 없는 참된 앎(jnana-진지)의 상태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진지야말로 무집착이고, 진지야말로 순수함(purity)이며,

진지가 곧 신을 성취함(attainment of God)이고,

진아를 잊어버리지 않는 진지야말로 영원불멸(immortality)이며,

진지야말로 모든 것임을 아십시오.1

 

 


 

[ 문 ]

이 자각(awareness)이란 무엇이며,

또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얻어서 키워갈 수 있습니까?

 

[ 답 ]

그대가 바로 자각입니다.

자각은 그대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대가 바로 자각이기 때문에 그것을 성취하거나 키워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는 단지 다른 것, 즉 자기 아닌 것(not-Self: 비진아)을

지각知覺하는 것을 그만두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들을 지각하기를 그만두면 순수한 자각(pure awareness)만 남으며,

그것이 바로 진아입니다.2

 

 



[ 문 ]

진아 자체가 자각하고 있다면, 왜 저는 바로 지금 그것을 자각하지 못합니까?


[ 답 ]

이원성二元性(duality)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대의 현재의 앎은 에고(ego)에 기인하며 상대적일 뿐입니다.

상대적인 앎에서는 하나의 주체와 하나의 대상이 있어야 하지만,

진아의 자각은 절대적이며 대상을 요하지 않습니다.
기억이란 것도 마찬가지로 상대적이며, 기억되는 대상과 기억하는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원성이 본래 없다면 누가 누구를 기억하겠습니까?4
진아는 항상 존재합니다.

누구나 진아를 알기를 원하지만,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하여 무슨 도움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사람들은 진아를 뭔가 새로운 것으로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하며 언제나 똑같은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아를 하나의 섬광같이 보려고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의할 수 없으며, 최선의 정의는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I am that I am)1)입니다.
경전들(srutis-보통 베다를 가리킴)에서는

진아가 사람의 엄지손가락 만하다거나 털끝 만하다 하고,

전기불꽃 같은 것이라고도 하며, 방대하다고 하거나,

가장 미묘한 것보다도 미묘하다는 따위로 말들을 하지만,

사실 거기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진아는 다만 존재(being)일 뿐이며, 실재다 비실재다 하는 것(분별)과는 다릅니다.

또한 그것은 지知이지만 지다 무지다 하는 것(분별)과는 다릅니다.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정의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단지 존재일 뿐입니다.5

 

 



[ 문 ]

우리가 진아를 깨닫게 되면 무엇을 보게 됩니까?

[ 답 ]

(무엇을) 본다는 것이 없습니다.

본다는 것은 단지 존재하는 것입니다(Seeing is only being).

이른바 깨달음의 상태란 뭔가 새로운 것을 얻거나

멀리 있는 어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또 항상 존재해 왔던 그대로 그냥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다만 참되지 않은 것을 참되다고 아는 것을 그만두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다들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자신의 이같은 착각을 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때 우리는 진아(자기)를 진아(자기)로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진아가 되라'(Be the Self)는 것입니다.

어느 단계에 이르면 그대는 그토록 분명한 진아를

발견하려고 애썼던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음을 터뜨리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대의 이 질문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그 단계는 '보는 자'(the seer)와 '보이는 것'(the seen)을 초월해 있습니다.

거기서는 무엇을 보는 자가 없습니다.

지금 이 모든 것을 '보는 자'가 사라지고 진아만이 남게 됩니다.6

 

 



[ 문 ]

어떻게 이것을 직접적인 체험으로 알 수 있습니까?


[ 답 ]

만약 우리가 진아(자기)를 '안다'고 말하면,

두 개의 자기(two selves), 즉 '아는 자기'와 '알아지는 자기'가 있어야 하며,

또한 '아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상태는 그냥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무엇을 안다거나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누가 깨달았다면, 그는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유일하게 존재해 온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그는 그 상태를 묘사할 수 없고, 다만 그 상태로 존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직 진아만이 실재하는데(real),

어떻게 그것을 깨닫는다('real'-ise: '실재화'한다) 하겠습니까?7

 

 



[ 문 ]

당신께서는 진아가 곧 침묵이라고 때때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답 ]

진아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마치 아름다움 속에 아무런 생각이 없듯이, 생각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침묵의 체험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지고의 상태에서는

자기 자신 외에 도달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8

 

 



[ 문 ]

무엇이 침묵(mouna)입니까?


[ 답 ]

생각과 언어를 초월한 상태가 바로 침묵입니다.9

존재하는 것, 그것이 침묵입니다.

이 침묵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10
진인(sages)들은 '나'라는 생각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야말로 진아(swarupa)이며, 그것이 곧 침묵이라고 말합니다.

이 침묵의 진아가 곧 신이며, 진아가 곧 개아個我(jiva)입니다.

그리고 진아가 바로 이 세계입니다.
다른 모든 앎은 보잘것없고 하찮은 앎에 불과하며,

침묵의 체험이야말로 참되고 완전한 앎입니다.

수많은 대상적 차별상(objective differences-세계의 다양한 형상과 이름들)은

모두 실재하지 않으며, 진지의 형상(form of true knowledge)인

진아 위의 덧씌움(superimpositions)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십시오.11

 

 



[ 문 ]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세계들 전체(우주와 삼라만상)가

자기 자신('나')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하는 말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 답 ]

자기(진아)란 몸으로 나타난 존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모든 대상을 경험하는 것은, 깊은 잠의 상태에서는

잠재되어 있던 에너지가 '나'라는 관념과 함께 나타난 뒤의 일입니다.

진아는 모든 지각에 있어서 '지각하는 자'로서 현존합니다.

'나'가 없을 때에는 보이는 대상도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일체가 자기(진아)로부터 나오고

또 자기(진아)로 돌아간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문답은 역자 증보이다.)

 

 



[ 문 ]

처에서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육체들(bodies)과,

그것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자아들(selves)이 사실상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어떻게 진아는 오직 하나(one only)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답 ]

'나는 육체다'(I am the body)하는 관념을 받아들이면 무수한 자아가 있게 됩니다.

이 관념이 사라진 상태가 진아인데,

이 상태에서는 (자기 아닌) 다른 대상이 전혀 없습니다.

진아를 오직 하나로 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12
진정한 자기(진아)의 본래적 견지에서 보면 육체 자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환幻의 힘에 의해 미혹迷惑된 마음의 외향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만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의식의 공간인 진아를 육체소유자(dehi)라고 하는 것은 그릇된 견해입니다.
세계는 육체 없이는 존재하지 않고,

육체는 마음 없이는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마음은 의식(consciousness) 없이는 결코 존재하지 않고,

의식은 실재(reality) 없이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뛰어들어 진아를 알아 버린 현인賢人에게는

진아 외에 알아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 육체의 형상을 '나'와 동일시하던 에고가 소멸되고,

그는 형상 없는 존재-의식(existence-consciousness)이 되었기 때문입니다.13
진인(jnani)[진아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진아라는 사실을 알며,

진아 외에는 육체나 그 밖의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 이에게 육체가 있고 없음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무엇을 깨닫는다는 말입니까?

실재는 항상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던

어떤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책에서는 이런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물을 파면 큰 구멍이 생기는데,

그 구멍 또는 우물 속의 공간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공간을 채우고 있던 흙을 들어냈을 뿐입니다.

그 공간은 원래 거기 있었으며 (우물을 파낸) 지금도 역시 그곳에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 쌓여 있는

오래된 상습常習(samskaras)[본래 가지고 있는 습성]들을

밖으로 던져내 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들을 모두 버리고 나면, 진아만이 홀로 빛날 것입니다.14

 

 



[ 문 ]

그렇지만 어떻게 그것을 해내야 해탈(liberation)을 얻겠습니까?


[ 답 ]

해탈은 우리의 성품(nature)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해탈을 희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움이 우리의 참된 성품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새롭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속박되어 있다는 그릇된 관념을 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성취할 때에는, 어떠한 욕망이나 생각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탈을 바라는 한,

단언하건대 그만큼 오래 우리는 속박되어 있을 것입니다.15

 

 



[ 문 ]

진아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생시, 꿈 그리고 깊은 잠의 세 가지 상태가 없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 답 ]

그들에게 세 가지 상태(the three states)가 없다고

그대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대가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깨어있다'라는 말들을 할 때,

그대는 그 세 가지 상태 어디서나 그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모든 상태를 통해서 내내 존재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대가 지금처럼 있으면 그대는 생시의 상태에 있지만,

꿈의 상태에서는 지금의 이 상태가 감추어지고,

깊은 잠을 잘 때에는 다시 이 꿈의 상태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대는 그때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며,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상태는 왔다가 가버리지만 그대는 항상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영화와 같습니다.

화막(screen)은 항상 그대로 있지만

여러 가지 화면들(pictures)은 화막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립니다.

화막에는 어떤 화면도 머무를 수 없으므로, 화막은 다시 화막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대는 그 세 가지 상태 모두에서 그대 자신의 진아로서 남는 것입니다.

그대가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화면들이 화막 위에 머무를 수 없듯이,

세 가지 상태가 그대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화막 위에서 그대는 때로 끝없이 파도치는 큰 바다를 보지만 그것은 곧 사라집니다.

또 어떤 때에는 큰 불이 일어나는 것을 보지만, 그것 역시 사라집니다.

그러나 화막은 어느 경우에나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화막이 물에 젖거나 불에 탔습니까?

어떤 화면도 화막에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시, 꿈 그리고 잠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습니다.

그대는 항상 그대 자신의 진아로서 남아 있습니다.

 

 



[ 문 ]

그 말씀은 우리가 생시, 꿈 그리고 깊은 잠의 세 가지 상태를 다 경험하지만,

이 상태들이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입니까?


[ 답 ]

예, 바로 그겁니다.

그 상태들은 왔다가 가지만, 진아는 방해받지 않습니다.

진아는 단 한 가지 상태뿐입니다.

 



[ 문 ]

그러면 그러한 사람(진인)은 이 세상 속에서

단순히 한 사람의 바라보는 자(witness)로 존재할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 답 ]

그렇습니다.

바로 그 점에 관해 비디야라니야(Vidyaranya)는

{빤짜다시}(Panchadasi) 제10장에서, 무대 위에 켜진 등불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등불은 항상 그곳에 켜져 있으면서,

(그 배역이) 왕이든 하인이든 무희舞姬든, 모든 배우와,

모든 관객들을 차별 없이 고루 비추어 줍니다.

그리고 그 등불은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은 물론이고,

연극이 시작되기 전이나 연극이 끝난 뒤에도 항상 그곳에 켜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내면의 등불인 진아도 그 자신은 늘지도 줄지도 않으면서

에고, 지성, 기억 그리고 마음에게 빛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깊은 잠 속에서나 (그와 유사한) 어떤 상태에서는 에고의 느낌이 전혀 없는데,

저 진아는 다른 속성 없이(attributeless) 남아 있으면서 계속 스스로 빛을 발합니다.16
사실 진아가 '바라보는 자'라는 관념은 단지 마음속에 있는 것일 뿐,

그것은 진아에 대한 절대적인 진리는 아닙니다.

바라봄은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서 상대적입니다.

바라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 둘 다 마음의 창조물(mental creations)입니다.17

 


 


[ 문 ]

이 세 가지 상태들은 네 번째 상태(turiya)에 비해 실재성의 정도가 얼마나 낮습니까?

이 세 가지 상태와 네 번째 상태간의 실질적인 관계는 어떻습니까?


[ 답 ]

단 한 가지 상태, 즉 의식 또는 자각 또는 존재의 상태만이 실재하며,

생시, 꿈 그리고 잠의 세 가지 상태는 실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그냥 왔다가 갑니다.

 (그러나) 실재하는 것(the real)은 항상 존재할 것입니다.

세 가지 상태 모두에서 유일하게 지속되는

'나' 또는 ('나'의) 존재(existence)만이 실재합니다.

다른 세 가지 상태는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실재성의 정도가 어떠하다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대략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존재 또는 의식이 유일한 실재이며,

의식에 깨어있음이 더해지면 생시라 하고,

의식에 잠이 더해지면 잠이라 하며, 의식에 꿈이 더해지면 꿈이라 합니다.

의식은 그 위에 화면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화막과 같습니다.

화막은 실재하지만 화면들은 그 위에 나타나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오랜 습관으로 인해 세 가지 상태를 실재한다고 여겨왔기 때문에,

단순한 자각 또는 의식의 상태를 네 번째 것이라고 부릅니다. 그

러나 사실은 네 번째 상태(the fourth state)라는 것은 없고

단 한 가지 상태가 있을 뿐입니다.18
꿈의 상태와 생시의 상태간에는 꿈은 짧고

생시는 길다는 것 외에 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둘 다 마음의 산물입니다.

생시의 상태가 길기 때문에 우리는 그 상태가 우리의 실재하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실재하는 상태는,

항상 그대로 존재하면서 생시, 꿈 그리고 잠의 세 가지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네 번째 상태, 즉 뚜리야(turiya)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 가지 상태를 아바스타(avasthas-상태)라고 하기 때문에

네 번째 상태도 뚜리야 아바스타(turiya avastha-네 번째 상태)라고 부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상태(avastha)가 아니라,

진아의 참된 본래적 상태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네 번째 상태라는 표현도 상대적이므로 적합하지 않으며,

그것은 뚜리야띠따(turiyatita-네 번째를 넘어선 것),

즉 초월적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19

 

 



[ 문 ]

그렇다면 왜 이 세 가지 상태들은 실재하는 상태,

즉 진아라는 화막 위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입니까?


[ 답 ]

누가 이 질문을 합니까?

이 상태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진아가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자는 '보는 자'이며,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마음(mind)을 구성합니다.

그 마음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마음은 진아 속으로 합일되고 거기에는 '보는 자'도 '보이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대의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그것들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아만이 항상 존재하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세 가지 상태가 존재하는 것은 (진아를) 탐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탐구해 들어가면 그것들은 종식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설명해 주어도,

스스로 진아 깨달음(Self-realisation)을 얻어 자기가 그 동안 이 자명한
단 하나의 실재에 너무나 눈멀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기 전에는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 문 ]

마음과 진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 답 ]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마음이 내부로 향하면 곧 진아요,

외부로 향하면 에고와 모든 세계(the world-현상계)가 됩니다.

같은 솜으로 만들어진 여러 가지 옷들을 우리는 갖가지 이름으로 부르며,

금으로 만들어진 여러 가지 장신구들을 갖가지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것들은 결국 같은 솜이며 같은 금입니다.

한 가지가 실재할 뿐, 그 외의 여러 가지 것들은

다만 이름과 형상(names and forms)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진아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그것은 독립된 존재성이 없습니다.

진아는 마음 없이도 존재하지만,

마음은 진아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20

 

 



[ 문 ]

브라만은 상常-식識-락樂(sat-chit-ananda)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답 ]

예, 그렇습니다. '존재하는 것'만이 상常(sat)이며 그것을 브라만이라고 합니다.

상常의 광채(lustre)가 식識(chit)이며 그것의 본질은 낙樂(ananda)인데,

이 둘은 상常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셋을 함께 상-식-락(존재-의식-지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21

 

 



[ 문 ]

진아가 존재이며 의식인데,

그것이 존재하는 것(the existent)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the non-existent)과,

그리고 지각이 있는 것(the sentient)이나 지각이 없는 것(the insentient)과

다르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답 ]

비록 진아가 실재하며 일체를 포함하기는 하나,

그것이 실재(reality)냐 아니면 비실재(unreality)냐 하는

이원성을 띤 질문을 제기할 여지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실재하는 것(the real)이나 실재하지 않는 것(the unreal)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진아가 의식이기는 하나,

거기에는 '아는' 주체나 '알아지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지각이 있는 것이나 지각이 없는 것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22
존재-의식-지복(sat-chit-ananda)이라는 말은

지고의 실재가 비존재(asat)가 아니고, 비非의식(achit)이 아니며,

비非지복(anananda)이 아님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우리가 현상 세계(phenomenal world) 안에 있기 때문에

진아를 존재-의식-지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23

 

 



[ 문 ]

우리의 참된 성품이 행복 또는 지복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입니까?


[ 답 ]

완전한 지복이 브라만이며, 완전한 평안이 진아의 평안입니다.

그것만이 실재하며 이것이 바로 의식입니다.24

행복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진아의 성품이며, 진아는 완전한 행복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직 행복만이 존재합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 진아의 상태에 안주하면서 영원히 지복을 누리도록 하십시오.25
만약 인간의 행복이 외부적인 원인이나 재산에 의해서 좌우된다면,

재산이 많아질수록 더 행복해지고 재산이 적어질수록 덜 행복해져야 할 것이며,

재산이 하나도 없다면 그의 행복은 전무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경험은 어떻습니까?

과연 이러한 견해에 부합합니까?
사람은 깊이 잠들었을 때 아무런 재산도, 그의 육신조차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행하기는커녕 매우 행복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깊이 잠들고 싶어합니다.

결국 행복이란 인간 속에 내재해 있으며, 외부적 원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순전한 행복(unalloyed happiness)의 창고를 열기 위해서는

누구나 진아를 깨달아야 합니다.26

 

 



[ 문 ]

슈리 바가반께서는 심장(the Heart)을 의식의 자리로,

그리고 진아와 동일한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심장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합니까?


[ 답 ]

그것을 신神이라 하든 진아라 하든,

심장 또는 의식의 자리라 하든,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마찬가지입니다.

알아야 할 요점은, 심장이 바로 우리의 존재의 중추中樞(core)이며,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중심(centre)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27
심장은 육체적인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개념입니다.

흐리다얌(hridayam-심장)이라는 것은 흐릿(hrit)과 아얌(ayam)을 합친 말인데,

'이것이 중심이다'라는 뜻입니다. 심장으로부터 생각이 일어나고,

심장 위에 생각이 머무르며, 심장 속으로 생각이 사라집니다.

이 생각들이 마음을 구성하는 내용이며, 생각들이 우주를 만들어냅니다.

심장은 모든 것의 중심입니다.

우빠니샤드(Upanishads)에서는 삼라만상이 출현하는 원천이 브라만이라 했습니다.

그것이 심장입니다. 브라만이 곧 심장인 것입니다.28

 

 



[ 문 ]

어떻게 하면 이 심장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 답 ]

한 순간이라도 진아(자기)를 체험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자기와 떨어져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바로 진아이며, 진아가 곧 심장입니다.29
심장은 거기서 만물이 솟아 나오는 중심입니다.

그대가 세계, 육체 등을 보기 때문에 이들 삼라만상에는 중심점이 있다고 말해지며,

그것이 심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이 심장 안에 있게 되면,

심장은 더 이상 중심도 아니고 주변도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심장과 별개의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30
실재하는 존재(the real existence)이며,

진아 아닌 것들을 좇아가 알려고 하지 않는, 의식이야말로 심장입니다.

진아의 진리는, 행위함이 없는 그 의식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므로,

항상 진아를 향해 깨어있는 이 의식이야말로 명료한 지知의 빛남입니다.31


 

주: 1)이 정의는 보다 쉽게 '나는 존재 그 자체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 출애굽기에 나오는 말이다

출처 : 명상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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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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